[전주]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자매의 믿음
작성자 : ocatholic 조회수 : 3357

오늘 우리는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의 이야기를 듣는다. 루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종종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들르셨다. 가끔씩 그 집에 머무르시며 식사 대접도 받으시고, 하느님의 말씀도 가르치시며 사랑을 베푸셨다(루가 10,38참조). 예수님께 대한 그 자매의 사랑과 정성 또한 지극했다. 오신다는 소식만을 듣고 멀리 마중 나갈 정도였으며, 오빠가 앓아눕자마자 이내 그 소식을 예수님께 알려드릴 정도였다.

베타니아에서 갈릴래아까지는 대단히 먼 거리이고, 더구나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의 어느 곳에 계신지도 알고,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께 소식을 알려드릴 정도로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지극했다.

이러한 자매의 모습, 그것이 곧 신앙인의 모습이다. 누구보다 먼저 주님을 찾고 주님께 알려드리는 자세, 그것이 신앙인의 자세이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축구 경기를 볼 때 어떤 선수가 골인을 성공시킨 후 달려가 무릎을 꿇는 것을 보면 그는 개신교 신자이다. 어찌 생각하면 쇼맨십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골인의 기쁨을 먼저 하느님께 바친다는 자세가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인의 자세인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보면 그분들은 항상 ‘예수 마리아, 성모 어머님’을 찾았다. 깜짝 놀랄만한 일이 생겼을 때나 기쁜 일이 생겼을 때에도 ‘예수 마리아, 성모 어머님’을 찾았다. 감탄사처럼 입에 발려 예수님과 성모님을 불렀다. 그래서 어떤 신자가 열심한 구교우 신자인가 아닌가를 알려면 그가 ‘아이고머니’를 찾는가 아니면 ‘예수 마리아, 성모 어머니’를 찾는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정도이다.

먼저 하느님을 찾으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갚아주신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하다가 되지 않으면 하느님을 찾지 말고, 먼저 하느님을 찾고, 다음에 최선을 다하여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사람이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신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을 찾는 자세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며, 이를 어여삐 보시고 갚아주신다. 먼저 하느님을 찾는 사람, 하느님께 사랑과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참 신앙인의 모습이다.

이처럼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님을 찾은 자매의 믿음은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큰 믿음이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여기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라자로가 죽었다는 원망의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지 않도록 치유의 기적을 하실 수 있는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예, 주님 믿습니다.” 하고 대답했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습니다.” 하고 철저한 신앙고백을 한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고백이 결국 라자로를 소생시킨다. 주님께 대한 자매의 굳은 믿음이 라자로를 살린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은 죽은 사람까지도 살린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뿐이다. 믿음 없이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없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해주고, 우리를 가로막는 장벽을 제거해주는 하느님의 힘이다. 도저히 소생할 수 없는 라자로가 다시 소생하듯이 신앙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해주는 하느님의 힘이며 능력이다. 신앙은 또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게 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우리의 애통함을 감싸주시고 달래주시며 그래서 우리가 청하는 바를 들어주시는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을 느끼는 유일한 길이 곧 신앙이다. 신앙 없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다. 그들이 만일 신앙이 없었다면 마르타는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주실 줄 압니다.” 하고 주님께 매달리지 않았을 것이며 라자로의 소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믿음이 부족하다는데 있다. 그래서 하느님께 매달리고 간구하지 않는데 있다. 별로 기도하지 않으면서도 많이 기도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신앙이 깊지 않으면서도 열심하다고 자만하며, 그래서 자신의 신앙과 기도의 부족을 탓하기보다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느님을 몰인정한 분으로 생각하는데 있다.

마태오복음(17,14이하)을 보면 어떤 사람이 아들의 병을 고쳐주시길 예수님께 청한다. 자신의 아들이 간질병에 걸려 불 속에도 뛰어들고 물속에도 뛰어들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불러 고쳐달라고 청하였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했다고 예수님께 말씀드린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왜 이렇게 믿으려 하지 않고 비뚤어졌느냐?” 하고 탄식하신 후 마귀를 쫓아내어 그의 아들의 병을 고쳐주신다. 제자들이 “왜 저희는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예수님께 여쭙자,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약한 탓이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겨자씨란 들깨보다도 더 작은 씨앗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런 작은 믿음도 없다는 꾸지람이다. 어쩌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랍시고 믿음을 자랑하며 병을 고쳐준다고 했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믿음은 실로 보잘것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병을 고쳐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믿음이 부족함을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만 몰인정하다고 원망하고, 심한 경우 하느님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우리의 모습과 제자들의 모습이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셨다. 애통해하는 자매들의 모습을 보시고 비통해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실 정도로 그들을 무척 사랑하셨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가셨을 때는 이미 라자로를 장사 지낸지 나흘이나 지난 뒤였고, 그래서 라자로의 시체에서는 벌써 썩은 냄새가 나고 있었다. 라자로는 완전히 죽었으며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라자로야, 나오너라.”는 한 마디의 부르심으로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죽음의 세계에서 불러내시어 살리셨다.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눈물을 흘리시며 비통해 하실 정도로 지극했기에 완전히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것이다.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시체까지도 다시 살릴 수 있을 정도로 예수님의 사랑은 지극했던 것이다. 사랑은 그 모든 것을, 죽음까지도 뛰어넘는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처럼 우리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아버지이시다. 우리의 슬픔을 보시고 비통해 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애통해하는 자를 가엾이 보시고, 청하는 자들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시며, 따뜻한 정과 사랑을 베푸시는 자비의 아버지이시다. “하느님은 어떤 죄도 용서하시는 분, 애처롭고 불쌍한 꼴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시고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시는 분, 그 사랑은 그지없으시다.”(느헤 9,17)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이시다(루가 15,20).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연결시키는 통로가 곧 믿음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자매의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라자로를 죽음에서 살리셨다. 그런데 주님께서 “라자로야, 나오너라.”라고 부르심으로써 라자로를 소생시키신 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에서 소생시키신 것을 뜻하지만은 않는다. 영적인 소생까지도 상징한다.

“라자로야, 나오너라.”라는 주님의 부르심은 재산을 잃거나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꿈과 희망을 잃고, 삶의 목표와 용기를 잃고, 실의와 절망에 빠져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들, 살 의욕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매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부르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감옥에 갇혀 있는 자들에게 일러라. 어서 나오너라. 캄캄한 곳에 웅크리고 있는 자들에게 일러라. 나와 몸을 드러내어라.”(이사 49,9)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이기도 하다.

오늘 제 1독서 에제키엘 예언서에서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올려 이스라엘 고국 땅으로 데리고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의 기운을 불어넣어 살려내어 너희로 하여금 고국에 가서 살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영적인 힘과 기운을 불어넣어주시는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어떤 것으로 인하여 삶의 힘과 용기를 잃고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다면, 그래서 돌무덤과 같은 어두운 곳에 웅크리고 있다면 “라자로야, 나오너라.”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라자로를 불러내시듯이 캄캄한 무덤 속에 있는 우리를 불러내실 것이다. 주님께서 라자로의 손발을 묶고 있는 베와 얼굴에 감긴 수건을 풀어주어 가게 하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를 얽매고 있는 모든 것들을 풀어주시며 우리의 인생길을 생기 넘치고 활기차게 걷도록 하실 것이다.

사순 제 5주일인 오늘, 이제 사순절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진정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아버지이시다. 우리를 다정하게 감싸주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자 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우리가 어둠 속을 벗어나 기쁘고 활기차게 살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이시다. 라자로를 죽음에서 건지시어 살려내셨듯이 우리를 어둠의 세계에서 건져내시어 삶의 활기와 용기를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바로 그러한 하느님이심을 굳게 믿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인생이란 사순절을 걸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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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