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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1주일 성경 말씀 해설
조회수 | 241
작성일 | 22.11.22
전례력으로 새해 첫 주일이다.
대림 제1주일을 라틴어로는
‘레바비 주일’(Levavi, 들어올리다)이라는 명칭으로 불렀다.
그 이유는 이날 부르는 그레고리안 성가 입당송 구절이
“Ad te levavi animam meam.”
(주님 당신께 제 영혼을 들어 올립니다)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가’해의 대림절 4주 동안 제1독서는 이사야 예언서에서 취한다.(이런 의미로 이사야를 ‘대림예언자’라 부를 수도 있다) 기원전 7∼8세기의 암울한 시기에 이사야 예언자가 메시아께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고자 했었기 때문이다. 제2독서는 1·2·4주일에 로마서에서 취하고, 3주일에는 야고보 서간에서 취한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의 교우들에게 주님께서 오실 때를 대비하여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만 구원될 수 있는지를 설파하고, 야고보서는 농부가 추수를 기다리듯이 끈기 있게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복음은 4개 주일 모두 ‘가’해의 말씀인 마태오복음에서 취한다.

오늘 복음은 소위 ‘종말론적 담화’라고 일컬어지는 마태오 복음 24장의 한 대목으로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와”(마태 24,1) 예루살렘 동편 “올리브 산에 앉아 계실 때에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다가와 여쭈어보니”(마태 24,3) 사형 판결과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해주신 말씀이다. 인간들이 거룩한 도시라고 하는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두고 성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 예고하시고, 재난이 뒤따를 것이라 하시며,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 있을 징조들이 있을 것이지만,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신다. 종말은 확실하고, 그때는 불분명하다는 두 가지 사실에 관한 비유적 말씀이다. 그러니 깨어있어야 하고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잠으로부터” “어둠으로부터” “준비” “깨어있음” 등의 개념이 사순시기와 같은 주제어들이지만 사순시기가 ‘보속’을 위한 어두움이요 암울함이라면, 대림시기는 ‘기쁨’ ‘기대’의 어두움이고 암울함이라는 차이가 있다.

전례력의 첫 주일이든 마지막 주일이든 사람의 아들이신 우리의 주님과 우리의 만남을 기다리는 우리의 미래라는 시간 속에 놓여 있다.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묵시 4,8)이 바로 우리 하느님이시다. 성모 마리아의 아드님으로서 죽을 육신을 취하여 오심으로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 매 순간 당신의 제자들을 당신께로 이끄시고자 오시는 분, 우리가 이 세상을 마감하고 빠져나갈 때, 그리고 시간의 끝에 평화와 생명이 충만한 당신의 나라에 결정적으로 모든 이를 인도하러 오실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오실 분(오 에르코메노스, ὁ ἐρχόμενος, ho erchómenos, 영어로 who is to come)”(묵시 1,4.8;4,8)으로서 당신의 날, 바로 그 ‘주님의 날, 주일主日, 주간 첫날(히브리말로 욤 아도나이, יום יהוה, jom 'Adonaj, 그리스말로 키리아케 에메라, κυριακῇ ημέρα, kyriakè heméra, 영어로는 the Lord's Day, the first day of the week 등으로 번역)’은 재림(그리스어로 파루시아, παρουσία, parousía, 영어로 a/the coming, an/the arrival, advent<대림待臨 등으로 번역)의 날, 최종적이고 결정적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는 날일 것이다.(참조. 묵시 1,7.10;16,15 사도 20,7)

1. “사람의 아들의 재림”(마태오 24,37-44)

“예수님께서 올리브 산에 앉아 계실 때,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다가와 여쭈었다.”(마태 24,3)라는 구절로 미루어 불 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일반 군중에게 하신 말씀이라기보다 체포와 사형선고 및 죽음으로 이어지는 공생활의 끝부분에 이르러 당신의 “작은 양 떼”(루카 12,32)인 제자들에게 “따로” 하신 말씀으로 보인다. 예루살렘 동쪽 찬란히 빛나는 성전 건너편 올리브 산에서 예루살렘을 보며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마태 24,36) 하면서 하신 말씀이다. 종말과 사람의 아드님께서 오시는 날이 언제일지 “모른다” 하시는 인간 편에서의 이 무지無知와 함께 그때에는 혼란과 이를 생각지도 않는 무관심이 함께할 것이다. 복음의 문맥으로 보아 지상 생애를 마무리하시는 시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슬픔에 잠겨 이 말씀을 하신다.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마태 24,37-39) 하시는 것처럼 인간이 노아 때처럼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재림의 날을 맞이할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아신다.

2.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마태오 24,37-44)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후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신”(창세 6,5-6) 나머지 “세상에 홍수를 일으켜, 하늘 아래 살아 숨 쉬는 모든 살덩어리들을 없애버리”(창세 6,17)셨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노아(의 홍수)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마태 24,37-38) 하고 말씀하시는 내용은 폭력적이고 비윤리적인 행태, 존엄성과 형제애를 상실한 인간의 모습을 목격하는 오늘날까지도 인간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인간의 선택이 온 세상을 가득 메우게 되었다는 사실이 “홍수”와 함께 실감 나게 읽힌다. 또한 이러한 사태에 직면한 인간은 책임을 느끼고 경각심을 가져야 할 텐데도 “홍수가 닥쳐 모든 것을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마태 24,39) 한 그대로 끝까지 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 역시 보게 된다. 창세기의 인간은 홍수를 만났었지만, 오늘날의 인간은 지구라는 별 이곳저곳에서 엄청난 속도로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라는 말씀에 이어서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하시면서 ‘주님의 날’이 그렇게 닥칠 때 인간이 부도덕하거나 비뚤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기보다는 단지 인간의 무관심을 지적하신다. 인간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태어나고 자라며, 사랑하고 결혼하며, 먹고 마시며…그렇게 오늘을 살아간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금욕적인 삶의 프로그램을 제시하시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탓하시지도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οὐκ ἔγνωσαν, ouk égnosan, 영어로 knew nothing) 하시면서 준비하지 않았다 하시고, 무엇보다도 먼저 챙겨야 할 것들, 창조주의 뜻과 부르심에 응답해야만 하는 진정한 인간으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필수적인 내용에 무관심했다는 사실을 지적하신다.

그러니까 하느님 편에서 인간을 벌하시고자 한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람의 아드님”의 오심 앞에 서게 된 인간의 처지를 계시하시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인간은 불행하게도 종말적 재앙에 관한 예고와 그 사건에만 집착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 재앙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인가 하는 사실에만 매달리면서 우리의 본질적인 무관심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이 종말을 어느 시점으로 연기하고 말고 할 수 없으며 지금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음을 통해서 건너가는 “저세상”에서 우리 각자는 영광중에 다시 오실 사람의 아드님 앞에 반드시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마태 24,40-41) 하신 것처럼 어떤 이는 다른 이보다 먼저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또 다른 어떤 이는 다른 이보다 뒤에까지 남겨질 것이며, 그렇게 모든 것이 일어나고 소멸해갈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같은 시간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같은 기회가 있을 것도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종말은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중요한 가르침이다. 하느님의 심판에 관한 거의 예언적인 가르침이다. 다른 이들과 사랑스러운 이웃으로 살아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과 이웃이 되지도 못하였고 이웃을 아랑곳하지 않고 살면서 이기적인 사랑이자 자기만 아는 필라우티아(φιλαυτία, philautía, 영어로 self love, 참조. “자신과 돈만 사랑하고 허풍을 떨고 오만하며, 남을 중상하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며, 감사할 줄 모르고 하느님을 무시하며, 비정하고 매정하며, 남을 험담하고 절제할 줄 모르며, 난폭하고 선을 미워하고 배신하며, 무모하고 교만하며, 하느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면서 겉으로는 신심이 있는 체하여도 신심의 힘은 부정할 것”-2티모 3,2-5)를 먹고 살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과의 분리가 있을 것이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처럼(참조. 묵시 2-3장) 주님께서 오시고, 주님의 오심은 매 순간 심판이다.

3. “그러니 깨어있어라”(마태오 24,37-44)

“그러니 깨어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 하신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알아 깨어있어야 하며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43-44) 하신 대로 제자의 자세는 사람의 아드님께서 오신다는 것을 알고, 설령 그분께서 언제 오실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오실 것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깨어 기다린다. 이리저리 산만하게 왔다 갔다 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며 인간적으로 착하게 잘 살아 주님께서 오실 때 언제라도 문을 열어드리려고 준비된 사람이 바로 주님의 제자이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오실 것이므로 우리를 놀라게도 하실 것이지만, 그 놀라움은 거대하고 충만한 기쁨의 놀라움일 것이다.

어찌 되었든, 오늘 복음을 만나면서 한편에서 당혹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고백해야만 한다. 주님께서 영광중에 반드시 오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데 주저하고, 시간의 끝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라도 못 본 척, 모르는 척 도외시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뵙고자 하는 열망으로 불타오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는 오늘 복음 앞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냐시오 실로네(Ignazio Silone, 1900~1978년)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기다리면서 버스 기다리듯이 한다.』 한다. 종말의 시기를 따지고 계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일’, ‘내일’ 그리고 ‘다음에’ ‘다음에’ 하다가 낭패를 보고야 마는 것이 인간의 우둔함이다.

아마도, 자기 자신의 삶과 주변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인생과 삶을 꼼꼼히 주의를 기울여 읽어내면서 흐트러지지 않고, 결국 나 자신의 삶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주님과의 만남을 위해 매일매일 이끌려가고 있음을 의식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이 땅 위에서 걸식하며 방랑자로 한 줌 인생을 살지만,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 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시편 89,10-최민순 역) 한 말씀 그대로이다. 그날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주님의 자비일 뿐이다.

복음에서 “깨어있어라” 하고, 제2독서인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 역시 우리가 “잠에서 깨어날 시간”(로마 13,11)이라 한다. “깨어있음”에 반대되는 개념인 “잠들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ὕπνος, hypnos이다. 이는 영어로 hypnotize가 되는데 ‘최면에 걸리다’는 뜻이 된다. 세상의 거짓 유혹에 취해 최면에 걸리는 것을 경계하라는 말씀이다. 그런 의미로 바오로 사도께서는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로마 13,13)-이 부분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과 관련된 유명한 구절이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내일 또 내일입니까? 왜 지금은 아닙니까? 어째서 바로 이 시각에 저의 추잡을 끝내지 않으십니까?”…집어 들었습니다. 폈습니다. 그리고 읽었습니다. 제 눈이 가서 꽂힌 첫 대목을 소리 없이 읽었습니다. ‘술상과 만취에도 말고, 잠자리와 음탕에도 말고, 다툼과 시비에도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에 빠져 육신을 돌보지 마시오.’(로마 13,13-14) 저는 더 읽을 마음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 구절의 끝에 이르자 순간적으로 마치 확신의 빛이 저의 마음에 부어지듯 의혹의 모든 어둠이 흩어져 버렸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성염 역, 경세원, 2016년, 제8권 12.28-29)』

잠은 죽음의 연습이다. 그리스도인의 “깨어있음”은 공포와 두려움의 깨어있음이 아니고 열렬한 대망大望의 깨어있음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깨어있음”과 “준비”는 두려움에 의한 걱정스러운 깨어있음과 준비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주님께서 어서 빨리 오시기를 기다리는 기쁨에 찬 희망의 “깨어있음”이요 “준비”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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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오실 때를 준비하라고 권고하십니다. “그러니 깨어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 깨어있는 것은 물리적으로 눈을 뜨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올바른 방향을 향해 자유로운 마음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기꺼이 은사를 받고 섬기려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나야 하는 잠은 무관심, 허영,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는 무능력, 소외되고 버림받았거나 병든 형제에 대해 책임지지 못하는 무능력입니다. 따라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깨어있어야 할 의무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활동, 그분의 놀라우심 앞에서 놀라는 것이고, 그분을 으뜸으로 삼는 것입니다. 깨어있음은 구체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우리의 이웃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요구하게 하는 것도 의미합니다. 그가 우리에게 도움을 청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에게 행하시는 것처럼,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 먼저 손을 내미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삼종기도 훈화, 2019년 12월 1일, 바티칸 뉴스-한국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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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벤지
2022년 1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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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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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대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심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심을 매년 경축하고 기념하는 것이다. 즉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의 성탄을 기념하면서 종말에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2천여년 전에 이 세상에 오시었고, 이 사건으로써 모든 사람은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되었으며 그 구원의 은총은 오늘을 사는 우리 각자에게도 이르고 있기 때문에 이 축일을 우리 모두는 당연히 경축해야 한다.

두 번째는 오심은 예수께서 세상 마칠 때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때를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이다. “그때 사람의 아들이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욀 것이다” (마태 24, 30).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서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하고 기도드리고, 미사 때마다 “복된 희망을 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대림 제1주 미사 중에 이제 곧 바치게 될 오늘 대림 감사송에서는 그리스도의 두 차례 오심에 대하여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희망의 기쁨 속에서 권능을 떨치며 오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우리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는 것은 신앙인의 마땅한 자세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종말이고 종말은 심판이며 심판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신앙인에게 있어 새하늘과 새 땅의 개벽이며 더 이상 눈물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슬픔도 없는 새로운 세상의 시작입니다. 우리 신앙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것은 분명하고, 이 그리스도의 재림은 넓게 인류의 구원사안에서 볼 때는 이 세상의 종말이지만 각 개인의 구원사안에서는 각자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는 죽습니다. 바로 그날이 그사람에게는 세상의 종말이고 새로운 세상의 시작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오심을 고대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공동체와 우리의 착한 생활 속에 오셔서 함께 사신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 23)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2천여년 전에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성사 안에서 우리에게 다시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특히 성체성사로 주께서 친히 우리 각자에게 더욱 친밀한 방법으로 오신다.

여기에서 특별히 베르나르드 성인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세 번째 오심으로 성체성사에 관해 강조합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은 말 구유 위에 나약한 육신으로 오심이고, 두 번째 오심은 마지막 날 재림 때 영광과 위엄으로 오심이며, 세 번째 오심은 성체 안에 오심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매일미사의 영성체 후 묵상에서 ‘우리가 받아 모신 성체는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예수님을 참되게 만나도록 우리를 준비시키는 양식입니다. 성체야말로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의 표징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양식으로 하여 초림과 재림 사이의 이미와 아직 아니의 긴장 안에서 인생살이를 해 나갑니다. 성체성사는 지금 여기의 삶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성탄절을 준비하기 위해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듭니다. 성탄목은 사철 푸른 상록수 전나무로 만드는데 그것은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와 선악나무를 상징합니다. 초대 교회 교우들은 성탄목에 사과, 장미(백합, 수선화 등), 빵, 촛불 등으로 장식하였습니다. 우리 성당에서 올해 만든 성탄목은 세속화되고 상업화된 가짜 성탄목이 아닙니다. 리얼하게 만들었습니다. 구유는 소박하고 가난하게 만들고 성탄목은 전통에 맞게 아름답고 의미있게 만듭니다.

우리 성탄목에 미니사과를 달려있습니다. 사과는 아담과 이브의 사과입니다. 이브가 먼저 따먹고 아담에게도 주었다는 그 사과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은 원죄와 본죄를 없애고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성탄목에는 빵이 달려있습니다. 빵 역시 생명을 상징하고 성체성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우리에게 영적 양식, 생명의 양식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또 성탄목에 꼭 달려있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또 달려있습니까? 꽃 즉 샤론의 장미를 상징하는 생화가 달려 있습니다. 샤론 평야에는 지중해에서 시원한 습한 바람이 늘 불어와서 기후도 시원하고 언제나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곳입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메시아를 샤론에 피는 들꽃, 들백합화, 들수선화, 들무궁화 혹은 샤론의 장미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샤론의 아름다운 들꽃입니다. 그리고 장미는 하느님나라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의 나라는 이스라엘 샤론 평야의 초원에 피어나는 들꽃처럼 아름답게 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세주의 강생으로 이루어질 하느님 나라의 꿈을 보여주고 소망하는 의미로 장미꽃을 달아 놓습니다.

마지막으로 성탄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촛불이었습니다. 요즘은 화재의 위험 때문에 작은 전구를 달아놓습니다. 촛불은 빛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 대림 첫 주 전례의 가장 큰 주제는 빛이며 독서와 복음도 빛과 관련됩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고 외칩니다. 그리고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라고 호소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가 빛의 갑옷을 입고 빛 속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깨어 있어라... 준비하고 있어라.”라고 명령형으로 말씀하십니다.

요컨대, ‘빛의 갑옷을 입고 깨어서 빛 속을 걸어가라’라는 것이 오늘 전례 말씀의 요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 중 특별히 제2독서의 내용은 아주 유명한 대목입니다. 왜 유명한 대목이겠습니까? 왜냐하면 이 말씀은 우리가 아주 잘 아는 아오스딩 성인께서 죄에 빠져 있다가 회개하실 때 읽은 성경대목입니다.

어느 날 아오스딩 성인께서 방에 앉아서 멍 때리기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아이들이 운율에 맞추어 와글와글 시끌시끌 노래하는 것이 들렸습니다. 아이들이 노래부른다는 이야기는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서동요’같은 것이 있습니다. “Tolle, lege(똘레, 레제), Tolle, lege(똘레, 레제), Tolle, lege(똘레, 레제)...”“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 ...”라는 노래 소리가 계속 들렸습니다.

그래서 아오스딩 성인은 ‘도대체 무엇을 집어서 읽으란 말이냐?’하고 방을 둘러보니까 방바닥에 여러 개의 두루마리가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인 가만히 앉아 있다가 아이들이 시키는 대로 저쪽 구석에 던져져 있는 두루마리 하나를 집어서 읽었는데 그 때의 그 대목이 바로 오늘 제2독서의 내용이고 바로 이 부분입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아오스딩 성인께서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펑펑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라는 구절을 천천히 읽고 또 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회개하여 어둠의 행실을 순식간에 벗어버리고 평생 빛의 갑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아오스딩 성인의 회개 스토리입니다. 그리고 이 회개 스토리텔링은 이후 천 수백년 동안 스토리액팅이 되어 전승되고 있습니다. 물론 성인의 회개에는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열심한 기도와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영향이 컸습니다만, 회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바로 오늘 제2독서의 성경구절을 우연히(?) Toller et leger(똘레, 레제), 집어서 읽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대림 제1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어라”, “준비하고 있어라”라고 명령하십니다.

먼저, “깨어 있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두 눈에 힘을 줘서 부릅뜨고 잠 한숨도 자지 않는 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까? 다니던 학교나 직장 그만 두고 기도원에 모여 기도만 하고 있는 것이 늘 깨어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육체적인 잠이 아니라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는 일이 절박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바로 오늘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권고에 따라 살고 아오스딩 성인처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둠의 자식이 아니라 빛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한 밤중이 아니라 대낮처럼 사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준비하고 있어라”하시는데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준비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께서 계실 자리를 마련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미워하는 마음, 시기하는 마음, 질투하는 마음, 다른 사람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마음, 복수하고싶은 마음, 나만을 이기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으로 내 마음이 가득 차 있으면 예수님께서 들어오실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성탄을 준비하고 기다린다는 것은 바로 내 마음 속에 있는 이런 나쁜 마음들을 깨끗이 정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대림 첫 주일을 맞이하여 내 마음을 한 번 들려다 봐야겠습니다. 내 마음속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번 대림 기간 동안에 좀 깨끗이 정리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틈이 있어야 우리에게 들어 오실 수 있습니다. 잘 준비해서 맞이하지 않으면 예수님 없는 성탄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성탄이 되느냐 아니면 예수님 없는 성탄이 되느냐 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준비된 기다림 후에 참된 성탄이 옵니다.

아무쪼록 이번 대림시기 그리고 연말연시에 흥청망청 딩가딩가 살지 말고 품위 있게 대낮처럼 빛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대림절이 되도록 기도하고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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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
2022년 1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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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창세기가 전하는 노아 홍수 이야기를 상기시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상에 골몰하다가 다가오는 불행을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 깨어 있고,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으로 오늘 복음은 끝났습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느님이 우리를 심판하시리라고 믿고 있는 초기 신앙인들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삶을 배워 실천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자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제1독서 이사야서는 하느님에게로 시선을 돌린 사람의 마음 자세를 말합니다. 그는 “사는 길을 주님께 배우고 그 길을 따라가고...주님의 빛을 받으며” 걸어갑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더불어 사는 사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컫는 것은 그분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아버지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철저히 실천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기원으로 또 우리 삶의 원천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선해야 하고 자비로워야 하는 것도 우리 생명의 기원이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이시고, 우리 삶의 원천으로 그분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하느님이 죄인을 버리신다고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죄인들과 어울리면서 하느님이 그들과도 함께 계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고통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믿었지만, 예수님은 고통을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해서 퇴치해야 하는 불행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서 하느님이 죄에 대한 대가로 병고를 주시지 않는다는 것과 하느님은 고치고 살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말은 우리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에게 성령이 살아계시면, 그는 예수님 안에 볼 수 있는 하느님 생명의 일을 실천합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진리의 영, 그분이 오시면 그대들을 모든 진리 안에 인도하실 것입니다”(16,13). 성령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사는 길을 주님께 배우고 그 길을 따라가자...주님의 빛을 받으며 걸어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에게는, 예수님의 길을 따르고 그분의 진리를 배우자는 말로 들립니다. 그 시대 유대교가 죄인이라고 버린 사람들과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우리도 배워서 실천하자는 말입니다. 성령은 그것을 배우고 실천하는 우리의 마음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예수님의 삶을 배우고 그 길을 따라 실천하는 것은 먹고 마시는 일상에 묻혀서 자기 한 사람 사는 데에 골몰하던 과거와 결별하고, 우리 생명의 원천을 찾아 새롭게 사는 일입니다. 나와 무관하게 보이던 내 주변 사람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내 형제자매로 보이는 새로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과 주변을 새롭게 발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 말하고 세례를 받은 사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을 원천으로 내 삶 안에 새로움을 발생시키는 일입니다.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가꾸는 일, 내가 획득한 자격증, 내가 가진 재물 등이 나의 참다운 미래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내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깨어 있어라” 또 “준비하고 있어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우리 생명의 원천이 우리 안에 살아 숨 쉬게 하라는 말입니다. 나를 사로잡고 있는 욕심과 허세에서 우리가 한발 물러서면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오늘 살아있는 것도 하느님이 하신 은혜로운 일로 새롭게 보일 것입니다. 은혜로운 삶입니다. 나 한 사람을 위하라고 주어진 생명이 아닙니다. 은혜로움을 깨달은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선하고 자비롭게 처신해서 은혜로움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우리가 깨어서 준비해야 하는 새로움입니다.

우리는 대단히 제한 된 시야를 지니고 삽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고 우리 자신만 크게 보이는 시야입니다. 이해타산(利害打算)이 가장 소중한 원칙으로 보이는 시야입니다. 우리의 욕심과 허영심을 채워주는 사람들만 돋보이는 우리의 시야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과 우리가 누리는 것이 절대적으로 소중한 우리의 시야입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과 우리의 안락함을 위협하는 것은 무엇이든 단호히 거부하는 시야입니다. 오늘 이사야서가 말하듯이 “사는 길을 주님께 배우고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은 주님의 시야 안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시야에는 우리 삶이 은혜롭게 보이고 우리의 이웃에게도 은혜로움을 보여주는 우리의 몸짓이 보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미래는 ‘먹고 마시는’ 우리의 일상적 삶이 보장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면서 열리는 그분의 시야 안에서 발생하는 우리의 실천이 우리에게 하느님의 생명과 미래를 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시야에서 은혜로움을 실천하며 산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운명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는 길을 주님께 배우고 그 길을 따라 가서” 하느님 생명의 새로움을 찾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높으신 분, 저 멀리 계시는 분, 우리가 정성을 바쳐 섬겨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삶 한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실천하는 은혜로움 안에 그 원천으로 함께 계십니다. 이웃에게 은혜로움을 실천하는 사람이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자유는 선하고 자비로운 실천을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자유의 숨결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우리의 창의력으로 자유롭게 또 다양하게 당신의 일을 실천하도록 우리 안에 침묵으로 함께 계십니다. “꽃처럼 피어났다가는 스러지고, 그림자처럼 덧없이 지나가는” 우리의 삶이라고 구약성서 욥기(14,2)는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이 살아 숨 쉴 때만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우리 일상 세상살이가 그 덧없음을 넘어 하느님과 더불어 남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대림시기가 시작합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과 같이 우리도 “사는 길을 주님께 배우고 그 길을 따라...주님의 빛을 받으며 걸어가야” 하는 시기입니다. 하느님의 시야 안에서 은혜로움을 찾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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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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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님, 빛으로 어서 오소서. 동해 울진 북면성당 종탑 위로 아침 햇살이 떠오른다. 대림시기는 어려움 속에서도 벅찬 희망을 안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때다. 이 한주간 세상을 희망으로 밝힐 동해 태양처럼 우리도 모든 이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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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7 "노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바로 그럴 것이다. 38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39 홍수를 만나 모두 휩쓸려 갔다. 그들은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홍수를 만났는데,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 41 또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 42 만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는지 집주인이 알고 있다면 그는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44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마태오 24,37-44)

마지막 도래에 대한 준비

오늘의 주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이루시는 모든 ‘오심’을 하나도 놓치지 않음으로써 마지막 ‘오심’을 잘 준비하는 ‘깨어있는 자세’이다.

제1독서 : 이사야 예언서 2,1-5
그들의 칼을 보습으로 만들 것이다

제1독서에서는 두 가지 사상을 전하고 있다. 첫째,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으로 쏟아져 들어올 때가 올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는 주님께서 ‘당신의 길을 가르쳐주시고’ ‘당신의 법과 말씀을 선포하실’(3절) 주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주님의 말씀을 모든 민족들이 듣게 됨으로써 서로 다른 민족들 사이에 일치와 화해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 예언의 말씀은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란 바로 ‘형제애’와 ‘평화’가 정말로 실현되어야 할 공동체 즉 ‘멧부리 위에 우뚝 서서’(2절) 찬란히 빛나고 있는 예루살렘 공동체, 즉 교회이다. 교회의 기능은 ‘하느님과의 친밀한 일치와 전 인류의 일치의 표지이며 도구’(교회1항)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기록은 결코 끝나지 않는 ‘주님의 도래’, 즉 그리스도의 최초의 도래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의 힘겨운 성장,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끊임없이 ‘오시는 분’(사도 1,4 참조)을 만나러 가는 여정임을 기술하고 있다.

복음 : 마태오 24,37-44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주님과의 ‘만남’을 한 순간도 그냥 지나치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늘 ‘깨어있어야’ 한다. 즉 오랜 기다림 속에서 엄습되는 잠이나 피곤함의 유혹을 극복해야만 한다. 오늘 복음은 이 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노아 시대의 일을 회상시키면서(37-39절)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신다. 첫째, 하느님께서 ‘불시에’ 찾아오시리라는 사실을 잊은 채, 매일의 일상적 삶의 문제에 너무 빠져있으면 안된다는 것과, 둘째, 홍수 때처럼 주님의 ‘오심’에 따르는 위협적이며 위험스런 상황에 관한 점이다. 노아의 홍수 사건은 파괴와 저주의 사건이기도 하였지만, 노아와 그의 가족을 위한 구원의 기회이기도 하였다(창세 7,11-23 참조). 오시는 하느님 앞에서의 심판은 이렇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인내롭게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처럼 당신께 개방되어있고 당신의 말씀을 온순히 따르는 사람은 구원하시고,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당신을 거절하여 마음을 당신께로 향하지 않는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41절).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그 모든 것을 마지막 날에 드러내 보이실 것이라는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뜻을 잘 받아들여 온순히 따르고 실천 했는지 아닌지가 그 때에 드러날 것임을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이 언제이든 간에 두려움과 ‘깨어있음’으로 그분을 기다려야 한다. 그 두려움이라는 것은 무서워함이 아니다. 나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지 못하여 하느님의 자녀로서 품위를 잃을 수 있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있어라”(42절). 이 말씀은 여러 군데서 반복되고 있는 말씀이다. 이는 밤을 지키는 야경꾼들과 같이 잠을 잠으로써 도둑에게 기습을 당하지 않도록 깨어있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는지 집주인이 알고 있다면 그는 깨어있으면서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43-44절). 도둑이 오는 때는 언제인지 모른다. 항상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오시고자 하는 그 때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깨어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깨어 기다림’은 주님께서 우리 생활 가운데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이루시는 그 모든 ‘오심’를 하나도 놓치지 않음으로써 그분의 마지막 ‘도래’에 대해 더 잘 준비하는 우리의 정신적 자세를 의미한다. 이것을 이미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하고 있다. “두 번째 오심에 놀라지 않기 위해서는 첫 번째 오심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Enarrat. in Psalmos, Ps 95,14).

제2독서 : 로마 13,11-14
잠에서 깨어날 때

바오로 사도는 잠자지 말라는 권고에서 더 나아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과거생활이 그리스도라는 ‘빛’ 속에서의 삶이 아니라, ‘밤’에 묻혀있는 ‘잠’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활에 들어와 계신 지금은 그 ‘밤’에서 벗어나 ‘대낮처럼’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와 그리스도의 만남을 위한 근본적인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그분의 오심과 더불어 ‘때가 찼기에’(갈라 4,4 참조) 구원의 마지막 국면이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11 절). 이 말씀은 이미 이 순간부터 여러 가지 형태의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점점 더 실현되어 가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지막 도래는 우리의 삶과 역사 가운데 이루어지는 다른 모든 ‘도래’의 종합이며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얼마나 나의 일상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깨어있고, 주님을 맞아 드릴 수 있도록 늘 준비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밤’의 ‘잠’에서 깨어나 빛 속에서 구원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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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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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 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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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마태오24,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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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그렇게 될 것이다.”라는 예고가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노아 때처럼 될 것이다.” 라는 경고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재림이 ‘갑자기’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준비 없이 갑자기 당하는 일이 없도록 지금 회개하여라.”
라고 강조하십니다.
여기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라는 말씀과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태평하게 사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재림’은 그런 사람들에게만 갑작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1테살 5,2-4).”

평소에 늘 회개하면서, 준비가 잘 되어 있는 상태로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인들에게는, 재림은 갑작스럽게 닥치는 재앙이 아닙니다.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지는 ‘기쁜 일’입니다.>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마태오 24,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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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평범한 일상 가운데에서 긴박하고 갑작스럽게
재림이 닥친다는 뜻이 아니라, 누구든지 회개는 본인이 직접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들에 있는 두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 또는 형제입니다.
‘맷돌질을 하고 있는 두 여자’는 어머니와 딸,
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또는 자매입니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라는 말씀은,
“회개하는 사람은 구원받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버림받을 것이다.(구원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가족이 함께 구원받지 못하고,
구원을 받는 사람과 받지 못하는 사람이 갈라지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어쩌면 그날이 되면 ‘이산가족’이 많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회개는 다른 사람이 대신 해 줄 수가 없습니다.
가족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구원의 은총이 내리더라도, 회개는 본인이 직접 해야 합니다.
구원에는 무임승차가 없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4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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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까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은,
뜻으로는 “지금 곧 올 수도 있으니, 지금 깨어 있어라.”입니다.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금방 올 가능성이 있으니까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일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니,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1테살 5,6.8).”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바오로 사도의 설명을, “믿음, 사랑, 희망을 바탕으로 한
기쁨, 기도, 감사의 삶”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신앙인답게 충실하게 사는 것’,
그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이라는 말씀의 뜻은, “도둑이
언제 올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온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면”입니다.

<종말과 재림의 날이 언제인지는 몰라도 그날은 틀림없이 옵니다.>

“준비하고 있어라.”라는 말씀에서 ‘준비’는 심판받을 준비이면서
동시에 구원받을 준비입니다.
그 준비는 회개입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생각하지도 않다가,
즉 아무런 준비 없이 지내다가 갑자기 재림을 맞이하는 일이 없도록
지금 잘 준비하여라.”입니다.

‘대림’이라는 말은 ‘임하시기를 기다린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고,
또 예수님의 재림도 기다리면서 ‘대림 시기’를 지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누가 누구를 기다리는가?”
우리는 ‘대림’이라는 용어에서 비롯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라고 약속하셨고, 약속하신 대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림 시기’는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예수님을 잘 맞이하려고
노력하는 시기이면서, 동시에 ‘나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에게로
‘내가 잘 돌아가려고 노력하는 시기’로 지내는 것이 옳습니다.

<대림 시기뿐만 아니라 언제나 항상 그렇게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재중’이었던 적이 없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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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2년 11월 27일
  |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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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6   연중 제4주일 성경 말씀 해설  [9] 129
795   [수도회] 행복한 삶의 비결  [8] 2435
794   [수원]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5] 2141
793   [인천] 진복팔단  [4] 2384
792   [서울] ‘행복’이란 단어는 늘 우리를 설레게  [9] 2357
791   [의정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3] 2603
790   [군종] “못된 신부, 삐짐 할매 ”  [4] 2446
789   [원주] 영(靈)으로 가난한 사람들  [4] 2422
788   [춘천] 가난한 이웃 위해 무엇을 했는가  [3] 2357
787   [마산] 억눌린 민초(民草)들의 천국  [3] 2257
786   [부산] 복된 삶이란  [8] 2271
785   [안동] 아낌없이 주는 나무  [3] 2454
784   [대구] 행복하게 사는 방법  [3] 2485
783   [청주] 행복의 유통기한  [2] 474
782   [대전] 영에 충만 해 있는 가난한 자가 행복합니다.  [3] 2250
781   [전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1] 451
780   [광주] 가난, 왜 복인가  [3] 2245
779   (녹) 연중 제4주일 독서와 복음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4] 2157
778   연중 제2주일 성경 말씀 해설  [6] 186
777   [수도회] 완벽한 조연 세례자 요한  [6] 2518
776   [수원] “과연 나는 보았다.”  [7] 2443
775   [인천] 정성을 다한 기다림  [9] 2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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