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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1주일 성경 말씀 해설
조회수 | 161
작성일 | 23.02.23
지난 재의 수요일로 우리는 사순시기에 들어왔다. 40일간 지속되는 사순시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시기, 곧 회개를 살고자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우상숭배에 저항해야만 하고,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이기에 열성을 다해야 하는 시기이다. 교회는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왕국으로 가는 여정에서 항상 긴장 속에 살아야만 하는 무능을 절감하기에 우리에게 별도의 특별한 시기를 제정하여 회개를 향한 우리의 힘을 집중하고 ‘영적인 투쟁’이라는 예술을 연마하도록 배려한다.

사순 제1주일에는 예수님께서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으시는 장면을 듣는다. 마태오 복음사가에 따르면,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1절) 첫 번째로 맞닥뜨린 일이 악마와의 직접적인 대면이었다. 예수님께서 세례 때에 드러난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권능을 검증해야 할 유혹에 직면하신다. 유혹과 시련, 시험, 저항을 넘어서 하느님의 은총을 향해 사막을 가로지르는 여정(사순절)을 보내는 우리를 위해 새로운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유혹을 이기시고 물리치셨는지를 말해준다. 이 복음은 세 공관복음이 공통으로 전한다.

처음 두 유혹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3.6절)이라는 어구로 시작하고, 예수님께서는 각각의 유혹에 대하여 모두 신명기의 성서 말씀(신명 8,3;6,16;6,13)을 통하여 답하시며 악마를 물리치신다. 이를 통해 마태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통과할 때 겪었던 똑같은 유혹을 예수께서 모두 겪으신 것처럼 묘사한다. 악마가 말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말은 마태오복음 종장부에서 “네가 하느님 아들이거든 너 자신이나 구하거라. 십자가에서 내려오려무나”(마태 27,40)라는 말로 되풀이된다. 예수님의 유혹은 십자가 위에서 절정에 달하고 동시에 예수께서는 그 유혹을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극복하신다.

약속의 땅으로 가던 광야의 유다인들도 유혹에 무너져 죄에 빠진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탈출 16,3) 하며 불평하는 이들에게 “하늘에서 양식을 비처럼 내려”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왔소? 우리와 우리 자식들과 가축들을 목말라 죽게 하려고 그랬소?”(탈출 17,3) 하며 다시 불평하는 이들에게 “주님을 시험하였다” 하여 마싸와 므리바라는 물터 이름이 생겼다는 이야기, 그리고 “앞장서서 우리를 이끄실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하며 금송아지를 만들었다가 화가 난 모세가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를 가져다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 물에 뿌리고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마시게 하였다.”(탈출 32,20) 하는 내용이다.

예수님의 세례 이후 곧바로 예수님을 찾아온 악마의 유혹을 일회적인 이벤트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유혹은 공생활 내내 예수님께 다가왔고 마지막 십자가상의 죽음을 맞이하실 때까지 예수님을 괴롭힌다. 예수님께서는 온 생애에 걸쳐 유혹을 받으신다. 마지막 유혹과 승리는 십자가 위로까지 이어진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마르 1,13)라고 하면서 40일 내내 악마가 예수님을 괴롭혔다고 적고 있는데, 마르코와는 달리 마태오와 루카는 유혹을 3번의 단계처럼 묘사한다.

1. 예수님께서는…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마태오 4,1-11)

오늘 사순 제1주일의 복음이 우리에게 보여 주듯이 유혹에 맞서는 우리의 영적인 ‘투쟁’은 예수님께서도 피하실 수 없었을 만큼 어떤 의미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께서는 성부께로부터 “내가 사랑하는 아들”(마태 3,17)이라 부르셨음을 알고 체험하셨으나 이러한 예수님께도 시련을 피할 길은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요르단 강물에 잠기시어 세례를 받으신 후, 곧바로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마태 4,1) 이와 마찬가지로 세례받은 이들은 그 누구라도 교활하고도 끈질긴 유혹으로 주님을 따르려는 길에서 돌아서게 하려는 원수들의 간교한 술책을 맞닥트려야만 한다.

‘가’해인 올해 사순 제1주일에는 제1독서를 창세 2,7-9;3,1-7에서 취하는데, 이 독서의 내용은 복음과 병행하면서 ‘유혹’ 안에 담긴 구조나 작동 원리를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시면서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세 2,16-16) 하신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와 제한 내에서 인간의 자유가 보장되는 한편 그 틈새를 뱀의 유혹이 파고든다. 뱀은 사람을 유혹하면서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 3,4-5) 한다.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뱀의 못된 제안은 새로운 현실에 관한 제안이다.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줄 것처럼 탐스러웠다.”(창세 3,6) 한다. 세상이 삼킬 수 있는 먹이로 보이고, 그렇게 보이면 이미 죄가 시작하며, 열매를 따는 손의 동작은 멈출 수가 없게 된다.

2.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마태오 4,1-11)

예수님께서는 아담과 정반대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처럼 똑같은 분이셨지만,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히브 4,15) 분이시다. 아담이 죄에 떨어진 그 자리에서 싸우시고 이겨 승리하신 분이시다. 마태오는 오늘 복음에서 세 가지 유혹을 들어 예수님께서 유혹들을 어떻게 물리치시고 승리하셨는가를 보여 준다. 악마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마태 4,3)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마태 4,6)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보여 주며,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마태 4,8-9) 하면서 예수님을 유혹한다. 돌을 빵이 되게 해 보라는 유혹, 기적적으로 구해질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보라는 유혹, 천하 만물과 세상의 힘을 소유해 보라는 유혹이다.

유혹자는 어떤 물건을 한가운데로 던져 분열시키는 사람이나 상황과도 같은 악마이고, 모든 것에 난관과 무질서를 조성하여 혼란에 빠뜨리는 사탄들(διάβολος, diabolos)이다. 인간의 생각을 혼란스럽게 한다. 사탄은 신성한 말씀에 파괴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동인을 끌어들여 하느님의 계획을 가로막으며, 선한 것과 악한 것을 혼합시킨다. 사탄은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되 성경의 본래 의미와 전혀 다른 의미로 인용함으로써 선악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그는 성경의 말씀에 악의를 섞어 넣는다.

3. 말씀으로 산다…시험해서는 안 된다…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섬기며…(마태오 4,1-11)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향한 온전한 순명과 피조물로서 지키고 지녀야 할 본성에 철저히 충실하심으로써 악마의 간교하고도 그럴듯한 제안을 여지없이 물리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인성人性을 강력하게 보호하시면서 성경이 계시한 하느님의 모습 역시 지켜내신다.

예수님의 무기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악마에게 신명기의 말씀들을 인용하며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 8,3 마태 4,4) “그분(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신명 6,16 마태 4,7)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이름으로만 맹세해야 한다”(신명 6,13 마태 4,10) 하고 대답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악마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마태 4,6 시편 91,11-12) 하면서 그럴듯하게 겉으로만 대충 읽어 사악하게 성경을 인용하고 이용하는 것과는 달리 말씀이 지닌 깊은 의미를 새겨 그 말씀에 순명하신다.

아담은 하느님처럼 되고 싶어서 그 하느님의 신성神性을 획득해야 할 무엇인가로 생각하며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손을 뻗어 그 열매를 움켜잡아 쥐어서 땄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담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신다. 지상 여정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온전한 자유로 기꺼이 십자가 나무에 오르시고 완전히 열린 당신의 손을 뻗어 펼치시어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놓으시고 봉헌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온갖 유혹에 맞서 싸워 이기는 방식도 예수님의 방식과 같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예수님께 온전히 봉헌하여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몸소 싸우시게 해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께서는 예리한 지성으로 이를 간파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사막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으니, 네가 유혹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께서 네 안에서 유혹을 받으신 것, 너 그분 안에서 승리하여 그분께 승리를 안겨드려야 한다.』 하셨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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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순 제1주일에 복음(마태 4,1-11 참조)은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다음,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마태 4,1)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한 것처럼(탈출 24,18 1열왕 19,8 참조),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사명을 시작할 준비를 마치시고 40일 동안 단식하셨습니다. “사순시기”에 들어가신 겁니다.

(예수님의) 40일 동안의 단식이 끝날 무렵 유혹자, 곧 악마는 세 차례에 걸쳐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시도합니다. 첫 번째 유혹은 예수님께서 배고프다는 사실에서 시작됩니다. 악마의 제안은 이렇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마태 4,3) 하나의 도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단호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예수님께서는 모세를 언급하십니다. 모세가 긴 여정을 걸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대상으로 광야에서 자신의 삶이 하느님 말씀에 달려있음을 배웠다고 말했을 때입니다.(신명 8,3 참조)

그런 다음 악마는 두 번째 유혹을 합니다.(마태 4,5-6 참조) 악마는 성경을 인용하며 더 간교하게 유혹합니다. 악마의 전략은 분명합니다. “만일 당신이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다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천사들이 도와줄 것이라고 한 말을 체험해 보라는 것”입니다.(마태 4,6 참조) 하지만 이 경우에도 예수님께서는 혼란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믿는 이는 하느님께서 그를 시험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선함에 맡기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탄이 의도적으로 해석한 성경 말씀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다른 말씀으로 대답하십니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7)

마지막으로, 세 번째 유혹(마태 4,8-9 참조)은 악마의 진짜 생각을 드러냅니다. 하늘나라의 도래는 악마가 패배하기 시작했음을 알리기 때문에, 악마는 정치적 메시아주의의 전망을 예수님께 제시하면서, 예수님께서 당신 사명을 완수하시는 것을 방해하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권력과 인간적 영예의 우상을 거부하시고, 마침내 유혹자를 내쫓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이 순간, 예수님 곁에, 성부의 명령에 충실한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습니다.(마태 4,11 참조)

이는 우리에게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악마와 대화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악마에게 대답하십니다. 유혹을 받을 때 많은 경우 우리는 유혹과 대화를 나누거나, 악마와 이렇게 대화하기 시작합니다. “맞아, 하지만 나는 이것을 할 수 있고, (…) 그런 다음 (죄를) 고백하면 되고, 그러고는 이런 것, 저런 것도 할 수 있어. (…)” (하지만) 악마와는 결코 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악마에게 두 가지 방법으로 대응하십니다. 악마를 내쫓거나, 아니면, 이 경우처럼, 하느님의 말씀으로 대답하신 겁니다. 여러분도 주의하십시오. 절대 유혹과 대화해서는 안 되고, 절대 악마와 대화해서도 안 됩니다.

오늘도 사탄은 매혹적인 제안으로 유혹하기 위해 사람들의 삶에 개입합니다. 양심을 길들이려고 노력하는 수많은 목소리에 자기 목소리를 뒤섞어 놓습니다. 일탈을 경험하기 위해 “유혹받는 데 자신을 맡기도록” 부추기는 메시지가 여러 곳에서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체험은 유혹이란 하느님의 길과는 다른 길을 택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이것을 해버려. 그래도 아무 문제 없어. 나중에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실 거야! 그러니 걱정 말고 만족의 하루를 보내자! (…)” “하지만 이것은 죄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사소한 일, 아무것도 아닌 일이야.” (이처럼 하느님의 길과) 다른 길은 우리에게 자기만족의 느낌을 주는 길이며, 삶 그 자체만을 위한 삶의 만족의 느낌을 주는 길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착각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더 멀어질수록, 우리 존재의 커다란 문제 앞에서 우리가 무방비 상태이고 무력하다는 것을 우리는 머잖아 느끼게 됩니다.

뱀의 머리를 짓밟으신 분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께서 이 사순시기 동안 유혹 앞에 우리가 깨어 있도록, 이 세상의 어떤 우상에도 굴복하지 않도록, 악에 대항하는 싸움에서 예수님을 따르도록 우리를 도와주시길 빕니다. 그러면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20년 3월 1일 삼종기도, *출처-바티칸 뉴스 한국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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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벤지
2023년 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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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지 않는 유혹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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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오늘은 사순 제 1주일입니다. 사제는 재의 수요일 이후 자색 제의를 입습니다. 자색은 회개와 보속을 상징합니다. 제의의 색깔이 자색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이제 지난 재의 수요일 이후로 사순절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순절의 순은 ‘열’을 뜻합니다. 육순은 60을 , 사순은 40을 뜻합니다. 40일 동안 齋戒(재계)를 지키면서 부활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재계란 무엇인가? 재계는 좀 낯선 말입니다. 한자 재(齋)라는 말을 파자하면 ‘齊(가지런할제) + 示(보일시)’인데,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전에 제단 위에[示] 제물을 가지런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재(齋)란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고 부정(不淨)한 일을 멀리하고 삼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재를 지킨다는 것은 제사 같은 종교적 의식을 치르기 위하여, 그 전에 심신을 깨끗이 하고 음식을 가려 먹는 등 부정(不淨)을 금기(禁忌)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이 기간 동안 모든 신자들이 단식재와 금육재를 지키도록 명합니다. 금식재는 만 18세부터 60세까지이며,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지켜야 합니다. 한끼를 금식하여 예수님의 고통당하심에 동참하며, 사랑을 실천하자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금육재는 육식을 금하는 것인데 만 14세부터 죽을 때까지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 그리고 연중 모든 금요일에 지켜야 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죄의 유혹 혹은 악마의 유혹에 관한 스토리액팅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제1독서는 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가 죄의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짓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극복해서 천사의 시중을 받게 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들려줍니다.

프랑스 외방선교회 소속으로 대구 신학교에서 교의신학을 가르쳤던 문세화 신부님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첫 인간 아담과 이브가 범한 첫 번째 죄를 교의신학에서 말하는 원죄(le péché originel)와 구별하여 기원죄(le péché original)라고 부릅니다. 이 기원죄가 모든 인간에게 DNA처럼 박혀 태어나는 모든 인간이 죄를 짓게 만드는 가능성(potentia)과 현실성(actus)을 원죄(le péché originel)라고 합니다. 그는 원죄, 기원죄, 세상의 죄(le péché du monde)를 구별하면서 모든 인간은 유혹과 범죄에 노출된 취약한 본성을 갖춘 존재임을 갈파합니다. 모든 인간은 이미 기원죄로 인해 생겨난 원죄를 짊어진 조건에서, 이미 죄로 더럽혀져 있는 세상에 태어나서, 그 구조악(le mal structurel)의 환경에 살면서, 개별적인 죄를 일상적으로 범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죄의 현실 앞에 던져져 있는 심각한 존재가 바로 실낙원한 우리 인간 현존재(Dasein, l’étre-là)라는 것입니다. 문신부님에 의하면 지금 여기(hic et nunc) 인간은 원죄를 안고 죄에로 피투되어 죄를 범하며 살아가는 흙 혹은 먼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아무튼 첫 인간 아담과 이브는 악마의 유혹에 적절하게 대적하지 못하고 실패한 일그러진 인간들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바오로는 제2독서에서 구원의 신비를 예형론으로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2의 아담으로 보고 첫 인간 아담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예형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제1의 아담도, 제2의 아담도, 유혹을 똑같이 받았습니다. 이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혹을 받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담과 이브는 뱀의 유혹에 떨어져 죄를 짓고 말았지만, 제2의 아담인 예수님은 악마의 유혹을 효과적으로 잘 물리쳤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사건은 예수님께 대한 악마의 유혹과 예수님의 승리에 관한 스토리액팅입니다. 오늘 복음의 공간적 배경은 광야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고 간단하게 배경설명을 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악마의 유혹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악마가 제안한 첫 유혹은 빵에 대한 유혹입니다.

악마는 먼저 예수님께 우당탕탕 오지 않고 조용하게 디테일에 다가옵니다. 은밀하게 다가와야 유혹을 치명적으로 잘 할 수 있습니다. 악마는 마치 갑(甲)이라도 된 양 명령조로 말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라고 합니다. 악마는 역시나 나쁩니다. 보통 상태의 사람도 빵이나 재물에 관한 유혹을 이기기 힘든데 예수님은 40일이나 굶어 배가 고픈 상태입니다.

또 다른 악마의 사악한 본성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하고 단서를 다는데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악마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악마는 빈정거리면서 유혹합니다. 빵에 대한 유혹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 관한 유혹 혹은 소유에 관한 유혹으로 출현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의 유혹과 요구를 거부하시지만, 나중에 공생활의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성체성사를 제정하심으로써 빵의 문제를 영성적인 차원에서 승화시킵니다.

이렇게 볼 때, 빵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실존적인 문제에서 존재(to be)에 삶의 이유(raison de vivre)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소유를 욕망하기보다 존재를 열망할 때 나는 참된 나의 주인으로 수처작주입처개진할 수 있습니다. 빵의 유혹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돈 앞에 구질구질해지지 말자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각자 평범한 인간 군상의 하나로 살아가지만 한 번 ‘쩐의 전쟁’에 엮이면 사정없이 망가지고 추잡스럽게 됩니다. 빵의 유혹이야기는 돈 때문에 온갖 지질이들을 다 만나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되지 말자는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존재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빵의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자신이 물질적 메시아가 아님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대나무 광주리 밥에 표주박물 밖에 먹지 못하는 단사표음(簞食瓢飮)의 인생이라도 말씀, 로고스, 존재를 체험하는 삶이 스스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 예수님이 악마에게 당한 두 번째 유혹은 기적행하기, 자기 능력과시 혹은 명예욕에 관한 유혹입니다.

악마는 예수의 능력과 잘남을 시험하고자 합니다. 악마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하고 유혹합니다. 첫 번째 유혹 때와 마찬가지로 역시‘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하고 단서가 달려있습니다. 악마는 예수님이 성전 꼭대기에서 베트맨이나 왕거미처럼 뛰어내릴 것을 제의했습니다. 그리고 기적을 본 사람들을 당신의 발아래 무릎을 꿇게 만들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예수님의 메시아 사명도 끝장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보다 하느님께 철저히 순종하는 ‘야훼의 종’ 혹은 ‘천주의 어린양’으로서의 메시아입니다.

세 번째 예수님께서 받으신 유혹은 부귀영화와 권력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의식주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 가장 많이 받는 최강의 유혹입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유혹 스팟’ 즉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갑니다. 거기서 악마는 예수님께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땅에 엎드려 자기에게 경배하면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자기에게 경배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웁니다. 이것은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파는 파우스트적인 악마숭배 사상의 그림자가 얼른거리는 장면입니다. 요즘 영혼 없는 공직자들이 많다고 하지요.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해서 악마에게 무릎을 꿇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악마의 이 유혹은 파워게임 혹은 권력다툼에 관한 유혹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아무리 노심초사(勞心焦思)하고 동분서주(東奔西走)하더라도 화무백일홍(花無百日紅)이고 권불십년(權不十年)입니다. 이 세상에는 백 일 동안 붉은 꽃이 없고 십 년 가는 권세가 없습니다. 앞으로 한 십 년만 더 살아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권력자들이 부리고 있는 권력이 얼마나 가는지를. 권세는 남가일몽(南柯一夢)이요 일장춘몽(一場春夢) 즉 한 때의 꿈같은 헛된 부귀영화입니다. 꿈에서 깨어나야 뭐라도 이룹니다. 이런 세상의 권력과 부귀영화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대의와 그 행군에는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이며 사이즈는 작지만 깔끄러운 돌부리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고슴도치 딜레마(Hedgehog Dilemma)’에 관해 말하였습니다. 그는 고슴도치와 관련해서 권력의 불가근불가원(不可近 不可遠)에 관하여 갈파하였습니다. 요즘 같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활성화된 시기에는 ‘가만있기(stand still)’와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가 미덕이고 접촉을 피하고 마스크를 쓰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런데 고슴도치의 우화에서 추운 겨울날 얼어 죽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 바짝 달라붙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추위는 좀 줄일 수 있지만 날카로운 가시로 서로서로 찔러 아픈 상처를 냅니다. 그리고 공자님은 소인배들을 가르켜 "불가근 불가원"이라고 했다. 너무 가까이 있으면 다치기 쉽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해코지를 하기 때문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권력은 불과 같아서 너무 멀면 춥고 너무 가까우면 타죽는다”는 전략적인 충고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오늘날 우리 중에 주로 어떤 사람이 악마의 먹잇감이 됩니까?

우선 성인 옆에 마귀가 더 우글거린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미 유혹에 넘어간 사람에게는 마귀가 많이 붙어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부들의 금언 중에 다음과 같은 우화가 있습니다. “포수가 두 마리 토끼를 보고 한 마리를 쏴 그 토끼가 쓰러지면 포수는 쓰러진 놈은 놔두고 도망가는 놈을 계속 쫓아가서 잡으려 한다. 마찬가지로 악마도 이미 자기의 소유로 된 자는 그만 내버려두지만 산토끼처럼 유혹에서 탈주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추적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따라가서 유혹한다.”악마도 잡아 놓은 물고기나 집토끼에게는 더 이상 유혹거리를 던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직 나에게 유혹이 많다는 것은 내가 아직 젊고, 악마에게 잡혀 있는 먹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더욱더 분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자신에게 유혹이 많다고 느껴지는 사람은 그래도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마귀의 유감에 빠져 있다는 사실 조차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대데레사는“영성 생활에서 앞서 가는 이들도 종종 자기 자신이 유혹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하얗게 모르고 있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악마는 하도 다양한 수법으로 유혹을 펼치기 때문에 항상 깨어 경계하지 않으면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도 모르게 악마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라 할지라도 악마의 꼭두각시놀음에 빠져있는 것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불쌍하게 살아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악마는 나의 약한 부분과 나쁜 성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에 잘 걸려 넘어지는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호기심이 강한 사람에게는 호기심을 타고 들어옵니다. 불같이 성격이 급한 사람에게는 그 성질을 타고 들어옵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술을, 권세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권세를 타고 들어옵니다. 그리고 욕정이 강한 사람에게는 쾌락을 타고 들어옵니다. 뱀이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듯 악마는 먹음직스러운 사과를 우리 눈앞에 들이댑니다. 그걸 먹으면 영리해질 것처럼 온갖 유혹을 다 합니다.

​또 우리가 악마의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평소에 오관,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지은 죄를 성찰하고, 극기로 보속해야 합니다. 유혹에 빠지는 순간 죄를 짓고 우리의 인생은 조금씩 파괴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대구 신학교 학장을 오래 하신 정하권 몬시뇰의 가르침에 의하면 똑똑하고 교만한 사람이 오히려 자기 꾀에 빠지고 여러 가지 유혹에 잘 넘어간다고 합니다. 겸손하게 하느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사람은 악마가 공격해도 잘 물리칩니다. 오만과 독선으로 인한 경거망동(輕擧妄動)은 폭풍유혹에 빠지는 지름길입니다.

물론 악마가 노리는 최고의 먹잇감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일미사만 달랑 나오고 일상적인 기도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은 나머지 일주일 내내 사탄의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덮어놓고 살지말고 성경을 펴 놓고 읽고, 되새기고, 묵상하고, 심장에 새겨 넣고(par coeur) 기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악마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 유혹을 이겨내시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간악한 악마의 속셈을 꿰뚫어 보시고 ‘처음부터’ 아예 악마의 모든 제안을 거절합니다. 범죄의 유혹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처음부터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유혹은 처음부터 끊어 버려야 합니다. 경험에 의하면 모든 욕망은 한줄기에 달린 감자들처럼 서로 줄줄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악과 한번 타협하고 나면 결국 줄줄이 밀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맙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유혹에서 쩌렁쩌렁 ‘사탄아, 물러가라’하고 단호하게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나쁜 악마에게 명령하십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입니다. 예수님의 이 촌철살인의 한 마디는 메시아적 아우라를 가진 정언적 호령(號令)입니다. 악마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는 단호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바이러스와 기생충은 모양, 크기, 존재이유와 기원 등은 달라도 둘 다 숙주에 기대어 산다는 점은 같습니다. 그런데 악마도 기생충이나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아서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못하고 의지가 약한 사람을 숙주로 삼아 기대어 살아간다고 합니다. 숙주가 면역력이 뛰어나고 건강하면 빌붙어서 사는 것들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결국 스텝이 꼬이고 맙니다.

모든 인간은 유혹하기도 하고 유혹 당하기도 합니다. 유혹은 모든 이가 다 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조건입니다. 유혹은 늘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 본능을 건드립니다. 인간의 식욕, 재물욕, 종족 보존의 본능, 권력욕, 수면욕, 편해지고 싶고자하는 욕망등을 건드립니다. 육신을 갖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유혹을 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유혹을 당할 때 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본 받아 처음에 잘라버려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솔선수범(率先垂範)에 따르면 우리가 악마의 유혹에 맞서 싸워서 이기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중무장되어야 합니다. 악마도 예수님을 유혹하기 위해 무엄하게도 성경을 남용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으로 맞서십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라는 말씀,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라는 성경 말씀, 그리고‘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요컨대 예수님의 유혹퇴치법은 어떤 꼼수나 다른 마술적인 기법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방패와 칼로 사용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고, 마음에 새기고(par coeur), 몸으로 실천할 때 마귀의 유혹을 애초에 차단할 수 있습니다. 실제 일상생활에서 성경소구를 많이 암송하여 체화(體化)하고 있으면 도움이 됩니다. 유혹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반추하면서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사순절은 은총의 비가 소나기처럼 내리는 시기입니다. 사순절은 전 세계 교회가 함께 참여하는 ‘피정 기간’입니다. 사순절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온갖 악의 사슬에 묶여 있는 우리 자신을 해방 시키는 시기입니다. 유혹에 빠져 잃어버린 영적인 자유로움을 되찾는 은총의 시기이며, 개과천선(改過遷善)과 진정한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시기입니다. 세상의 유혹에 따라 흩어졌던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하느님을 향해 다시 새롭게 모으는 은혜로운 시기가 사순절입니다. 요즘 우리의 시선과 마음과 발길은 어디로 향해 있습니까?

인간은 유혹 속에서 이렇게 할 것인가? 아니면 저렇게 할 것인가? 양자 택일을 해야 할 상황에 처할 때가 많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늘 유혹앞에 직면해서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유혹은 그 자체로서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새가 우리 머리 위를 날라 다니는 것은 막을 수 없으나, 그 새가 머리 위에 집을 짓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죄인인 우리 인간에게 치명적인 유혹은 분명히 일종의 시련과 역경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바로 이런 시련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하여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끝은 끝나야 끝이지만, 끝까지 끝나지 않는 유혹이나 시련은 없습니다. ‘불은 쇠를 여물게 하고 유혹은 사람을 강하게 한다’는 영성격언이 있습니다. 정금처럼 단련이 되면 유혹 바이러스에 면역성과 내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제 만물이 소생하려고 꿈틀대는 봄입니다. 아무리 광기의 광풍이 불어도 우수가 지났는데 봄이 오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아무쪼록 우리 모두 더 기도하고 더 힘을 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 사순절 동안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어 생생한 모습으로 기쁜 부활을 맞이할 수 있도록 기도 하고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유혹에 자주 지는 인간이지만, 동시에 유혹을 쳐 이겨낸 은혜로운 시간을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지나가지 않는 유혹은 없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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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
2023년 2월 26일
  |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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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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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2 그분께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3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6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7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8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9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11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마태오 4, 1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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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성경 공부에 몰두하여 온갖 주석서와 논문을 뒤적이며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낼 때였습니다. 공부하는 맛에 그런대로 머리는 즐거운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은 왠지 찜찜한 게 석연치 않았습니다. 성경의 이 구절 저 대목을 빈틈없이 파헤쳐 분석하고 시대적 연관성과 역사적 사실성 여부를 따지다 보니, 내 어설픈 신앙심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추상같은 하느님 말씀의 신비는 온데간데없을 뿐더러 교리 때 배운 ‘성령의 영감’은 어디다 써먹어야 할지 내내 고민이었지요. 하느님 저자와 인간 저자의 절묘한 조합이 일궈낸 역작인 성경을 알량한 인간의 학문과 언어로 담아내기는 여러 가지로 역부족임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악마와 한판 대결을 벌이시는 오늘 복음도 인간적 잣대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본문에 속합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곧장 광야로 향하십니다(1절). 사실 이스라엘에게 광야는 아주 특별한 곳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그들이 호된 시험과 단련을 통해 하느님 백성으로 태어난 장소입니다. 그들은 사십 년이라는 험난한 광야 여정을 거친 뒤에야 약속된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요. 오죽하면 그들이 이집트 노예살이를 그리워했겠습니까? 순간순간 찾아드는 숱한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역사적 현장을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제 발로 들어서십니다. 예수님과 성령께서 공동으로 벌이신 첫 과업은 하느님 나라의 적대 세력들과 맞서는 것이었습니다.

사십 일이나 단식으로 고행하신 예수님 앞에 악마가 나타납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3,17)을 악마가 그냥 봐주고 넘어갈 리가 없습니다. 허기진 예수께 유혹자는 치사하게 빵으로 유혹을 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3절) 빵을 구실 삼아 굶주리는 백성을 먹여 살릴 능력을 과시해 보라고 유혹합니다. 그럴듯한 이유를 핑계로, 하느님의 아들 자격을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이용하라는 요구입니다.
악마가 노리는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해 보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도 시편까지 들먹이며,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 천사들이 하느님의 아들을 받쳐주는지 증명해 보이라고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하느님을 빙자한 오만함으로 믿음을 남용하게 만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시험해 보라고, 그것도 제 자존심과 독선을 위해서 하느님을 이용하라고 유혹합니다.

마지막 시험은 광야의 시련이 웬 말이냐, 하느님의 아들 신분을 포기하면 세상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것입니다(8­-9절). 하느님의 계획과 악마의 계획을 저울질하고 있습니다. 불의하고 부당한 것이라면 그것이 제아무리 찬란하고 영광스럽다 해도 악마한테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혼을 악마에게 내맡기는 것은 영혼을 죽이는 일입니다. 세상 위에 군림하려다가 자유도 잃고 사랑도 잃고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신분은 생애 내내 도전을 받습니다. 광야의 유혹이라는 이 상징적 장면은 예수님이 앞으로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줍니다. 세 번 다 예수님은 신명기를 인용하여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4절; 신명 8,3) 하느님의 아들 신분은 배고픔과 갈증의 충족을 넘어섭니다.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만이 우리 영혼의 진정한 양식이 되어줍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7절; 신명 6,16) 자신의 신분과 권위를 내세워 기적을 남발하지 않으십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10절; 신명 6,13) 어떠한 목적에서건 악마와 야합하지 않으십니다. 신명기의 말씀대로 실천하시고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십니다.

예수님의 세 유혹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시절 겪은 유혹과 통합니다. 구약의 모든 위대한 인물은 자신들의 신앙이 참됨을 시련 속에서 증명해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광야에서 고행을 하시다니, 한낱 악마 나부랭이에게 시험을 당하시다니,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 동참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시험에 통과하셨습니다. 고난의 길을 피하라는 사탄의 유혹은 예수님의 앞길을 가로막았지만, 온전히 하느님의 계획에 따르시는 예수님의 소명 의지는 광야의 고행을 통해 더욱 확고해지셨습니다.

톨스토이와 더불어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큰아들 드미트리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악마와 신이 서로 싸우는 싸움터’라고요.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예수님이 겪으신 광야를 마음에 담고 사는 셈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몸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그 마음 하나 간수하기도 참으로 버겁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우리의 신앙은 시험받습니다. 악마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장하여 나타납니다. 모든 것을 혼란에 빠뜨리고 선악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 판단력을 흐리게 합니다.

특히 신앙인의 양심은 더욱 지키기 어렵습니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쉽게 대충 살아라, 이런 일쯤은 하느님도 봐주실 것이다, 고달플 게 뻔한 하느님의 길을 포기하라는 유혹은 우리의 양심을 무디게 만듭니다. 나약한 우리가 겪는 하찮으면서도 때로는 심각한 일상을 예수님도 광야 여정에서 겪으셨고 또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유혹자 앞에 예수님처럼 “사탄아, 물러가라.”(10절)고 당당히 외쳐보십시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유혹을 받은 곳이 낙원으로 바뀌어, 악마는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우리의 시중을 들 것입니다(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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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강지숙
  |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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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40일 간의’ 체험에 우리의 깊은 관심과
믿음의 눈을 돌리는 것이 좋겠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에 ‘비둘기 모양으로’(3,16) 내려오셨던 ‘성령’께서 그분을 광야로 ‘인도하시어’ ‘유혹을 받게 하신다’. 그런데 이 유혹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3,17)는 말씀 후에 나오는 것으로 ‘메시아적’ 유혹이다. 사탄은 두 번이나 이것을 확인하려고 한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3.5 절)이라고 하지 않는가?

당시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명예와 품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무력도 불사하는 강력한 메시아를 꿈꾸고 있었다. 아마 ‘야훼의 종의 노래’에서 언급한 고통 받는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죽음을 예고하셨을 때에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마태 16,22). 그 때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16,23). 이것은 광야의 유혹 장면을 연상케 하고 있다. 베드로가 사탄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유혹사화는 그리스도의 일생 전체를 압축시켜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십자가 위에까지 계속된 유혹이었다 (마태 27,42 참조).

예수님의 유혹은 오랜 단식 후에 빵을 얻는 것과 같은 단순하고 순수한 일로부터 우상을 숭배하도록 종용하는 본격적인 충동적 권유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러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의 명예를 추구하려고 애쓰는 사람 누구에게나 던지는 유혹적인 발언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특히 사탄이 권력과 부라는 매력적인 것으로 나타날 때는 완전히 사탄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교묘한 유혹들을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일치로써 이기신다. 그 말씀은 당신이 하시는 모든 결정의 근원적인 痼繭箚?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정확히 세 번 ‘성서에...’(4.7.10절)라는 표현을 하시면서 당신의 결정은 이미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있음을 뜻하고자 한다. 즉 하느님의 ‘말씀’은 그분께서 인간들에게 베풀어주시는 ‘빵’보다도 더 갚진 것이다. 이것은 생명을 위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가 물질적 차원만 있다면 그것은 이미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메시아사상의 참된 의미에 대한 유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마 지금도 하느님의 나라가 인간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빵’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형제들과 나눌 수 있도록 마음을 ‘회개하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즉 자신을 나누는 것을 알지 못하고, 배고픔을 없애기 위해 돌을 빵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제1독서 : 창세기 2,7-9; 3,1-7
인간들의 창조와 범죄

제1독서는 인간창조 설화와 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 충실하지 못한 인간의 모습, 그래서 죄를 범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하느님의 말씀에 끝까지 충실했던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게 하고 있다. 여기서 구원이냐 파멸이냐에 대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창세 3,3 참조). 그러나 결과가 불행하다. 사탄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하도록 하여 그 말씀을 어기도록 하는데 성공한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 (4-5절). 정말 그들은 그 열매를 먹은 후 눈이 ‘밝아졌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그들이 ‘알몸인 것’(7절)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 이상의 것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꿈꾸었던 ‘하느님과 같이’ 되려는 것은 사탄의 말을 들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의 행동은 죄를 낳게 되었고, 모든 세상을 파멸에로 이끌었다.

제2독서 : 로마 5,12-19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원조들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대립적인 상태를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19절). 이제 하느님의 말씀에 절대 순명하며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따라 그분이 회복시켜주신 하느님의 모습을 닮음을 부지런히 이루어 가는 것이 사순절을 잘 지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예수께서 유혹을 받으신 장면을 다시 묵상해 본다면, 그 유혹은 예수님께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기까지 계속 괴롭혔던 유혹이었다. 바로 그 유혹은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도 끊임없이 우리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느님의 ‘말씀’에 확고하게 근거하고 신뢰하며 그 유혹을 이기셨듯이 우리도 하느님 앞에 온전히 서 있으려 노력한다면 우리도 능히 그 유혹들을 이겨나 갈 수 있을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에 합당한 힘을 주실 것이다. 기도 중에 이러한 삶의 용기와 도우심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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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02.25
528 45.2%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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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신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기록한 이야기겠지만, 신앙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유혹들을 상징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7-18).”

우리가 유혹을 받는 일 자체는 죄도 아니고, 부끄러운 일도 아닙니다.
예수님도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리치지 못하고 유혹에 넘어가면 그때부터 죄가 됩니다.
마귀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도 유혹하는 존재이고,
예수님의 신앙인들을 늘 유혹하는 존재입니다.
특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충실한 신앙인들은
더욱 심하게 유혹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유혹이 다가왔을 때 그것을 어떻게 물리치느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이 말씀은 마귀를 물리치는 방법에 대한 말씀이지만,
온갖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에도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유혹을 받을 때 기도하지 않으면 누구나 ‘백전백패’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마태 4,3).”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마귀의 첫 번째 유혹은,
‘몸의 편안함’을(육적인 것을) 추구하라는 유혹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돌들’일까?
여기서 ‘돌들’은 ‘생명력 없음’을 상징하고, ‘돌들로 만든 빵’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라는 말씀은, 살기 위해서는
빵도 필요하지만, 빵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육신만을 배부르게 하는 ‘썩어 없어질 양식’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인생의 목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어야 합니다.
‘빵’은 분명히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을 방해하는 걸림돌이(유혹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라는 말씀은,

‘말씀대로 사는’ 충실한 신앙생활을 통해서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이 없다고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6,6).
이 말씀은, 현세적인 복만 추구하는, 즉 빵만 추구하는
세속의 사고방식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또 ‘빵의 기적’ 후에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군중에게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6,27).
예수님은 우리에게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마태 4,6)”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7)”

마귀의 두 번째 유혹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사람들이 했던 말에 곧바로 연결됩니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 하느님을 신뢰한다고 하니,
하느님께서 저자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해내 보시라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야(마태 27,42-43).”

이 말은 예수님을 유혹하는 말이기도 하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기도 하고, 하느님께 반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는 “하느님을 의심하지 마라.”입니다.
십자가, 고난, 시련, 고통, 무엇이라고 표현하든지 간에
그런 일들은 그 자체로 심각한 유혹이 됩니다.
참기 힘들다는 점도 큰 유혹이 되지만, 그런 일을 왜 겪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점이 가장 큰 유혹입니다.
그런 일을 겪을 때, 왜 겪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래도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고 믿는 것,
바로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겪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도’입니다.
<사실 기도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마태 4,9).”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마귀의 세 번째 유혹은, 예수님의 형제들이 했던 말에 연결됩니다.
“이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하시는 일들을 제자들도 보게 하십시오.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남몰래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시오(요한 7,3-4).”
세속의 헛된 명성만 찾는 것은 마귀에게 굴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그런 유혹이 유혹인 줄도 모르게 다가온다는 점입니다.
유혹을 물리치려면 우선 먼저 유혹을 유혹으로 알아보아야 하는데,
그것을 알아보는 방법도 역시 ‘기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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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3년 2월 26일
  |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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