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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주일 성경 말씀 해설
조회수 | 214
작성일 | 23.03.03
사순시기의 여정은 본질에서 부활로 가는 여정이다. 이 여정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내려가심과 올라가심, 낮추심과 들어 높이심으로 특징지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하여 사순 제1주일에 광야에서 여러 가지로 유혹과 시험을 당하신 예수님, 악마로부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마태 4,3.6) 하는 말을 들어가면서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신적神的인 자질까지 들먹거리는 상황에 부닥치신 예수님을 만나 뵈었다면, 오늘 사순 제2주일에는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마태 17,5)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영광에 둘러싸여 변모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는다.

교회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온 생애를 둘러싸고 있는 부활의 역동성 안으로 온 교회를 초대하는데, 변모를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몸소 보여 주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마태 17,9) 하고 명령하신다. 영광의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조건 안에서 일단 당신의 본래 모습을 다시 숨기신 셈이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여정 동안에 당신을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 외아드님의 영광과 신비를 엿보게 해주시고, 그분의 가르침을 잘 들으라고 권고하신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의 내용은 공관복음이 공통으로 전하고, 2베드 1,17-18에도 다른 형태로 전해진다. 예수님의 변모라는 사건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 다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태 16,28) 하신 말씀으로 이미 예고된 바 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신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계시되고 있는 것이다.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마태 17,1) 열둘 중의 “세 제자”는 예수님께서 수난을 앞두고 겟세마니에서 “근심과 번민에 휩싸이실” 때에도 함께 있게 된다. 세 제자는 예수님의 특별한 증인이 되도록 선택을 받는다. 베드로는 훗날 스스로 “나는…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이며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동참할 사람”(1베드 5,1)이라 증언하고,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친히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마태 20,23) 하고 약속하신 바에 따라 순교하기까지 실제 자기들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살아내는 증인들이 된다. “세 제자”는 모세가 산에 오를 때 동행했던 세 제자(참조. 탈출 24,1.9), “엿새 후”는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덮은 다음 이렛날 모세를 부르신 장면(참조. 탈출 24,16),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는 모세의 얼굴이 빛나던 순간(참조. 탈출 34,29)을 각각 떠올리게 한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당신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새로운 모세인 것처럼 묘사하려 한다.

『…우리는 그곳에 급히 올라가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하늘로부터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앞서가신 것처럼 우리도 급히 올라가야 합니다. 그분과 함께 올라간다면 우리도 신앙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그 빛으로 둘러싸이게 되고 우리 영혼의 모습은 새로워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변모되며, 그분의 모상으로 형성되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고 더욱 큰 영광으로 변모될 것입니다.

열렬한 마음과 기쁨을 지니고 그 산으로 달려가 모세와 엘리아, 야고보와 요한처럼 구름 속에 들어갑시다. 베드로처럼 이 신적 영상에 넋을 잃고 이 아름다운 변모의 영광으로 변모되어 이 세상 것들을 벗어나 높이 들려지도록 합시다. 육신과 피조물은 뒤에다 남겨 두고 탈혼에 빠진 베드로처럼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하고 말하면서 창조주께로 향합시다.…(시나이의 아나스타시우스 주교, 700년경, ‘주의 거룩한 변모 축일에 한 강론’에서-8월 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성무일도 독서기도)』

『…예수님께서는 세 친구를 (타볼의 영광스러운 산만이 아니라) 겟세마니 동산으로도 데려가셨다. 거기에서 친구들은 고뇌에 찬 예수님의 얼굴과 피눈물이 흥건히 땅을 적시는 그런 처참한 모습을 만나게 되었다.(루카 22,44) 우리 마음의 기도 역시 이렇게 타볼과 겟세마니의 두 모습을 동시에 지니게 된다.…(헨리 나웬, ‘The only necessary thing’, Crossroad, 2008년, 120쪽)』

1. “예수님께서…모습이 변하셨는데”(마태오 17,1-9)

그리스도교의 전승에 따라 타볼 산으로 여겨지는 “높은 산”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2) 예수님의 몸과 옷에 변화가 일어난다. 복음사가들은 하나같이 예수님과 하느님 사이의 통교에 관하여 말로 잘 표현되지 않는 이 사건을 묘사하는데 무척 고민한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옷이 빛처럼 하얘졌다.” 하는 것을, 마르코는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마르 9,3) 하고, 루카는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 9,29) 한다. 옷은 그렇다 치고 매일 마주했던 예수님의 얼굴을 두고는 마태오가 “해처럼 빛나고”라고 하는 반면, 마르코는 아예 예수님의 얼굴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고, 루카는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루카 9,29)라고만 기록한다. 늘 보던 예수님의 얼굴이 아닌 모습으로 오직 하느님에게서만 올 수 있는 빛나는 어떤 모습을 제자들이 보았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볼 수 있고 감지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고,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 13,43) 한 그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2. “모세와 엘리야가…예수님과 이야기를”(마태오 17,1-9)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마태 17,3)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예언의 표상이다. 믿음의 열매 덕분에 믿음을 넘어선 은총으로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 전체가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시나이·호렙 산에서 모세는 주님께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하고 주님의 얼굴을 뵙도록 주님께 간청하였으나 그는 겨우 주님의 “등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참조. 탈출 33,19-23) 엘리야 예언자도 같은 산에 올라 주님을 뵙고자 하였으나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1열왕 19,12) 안에서만 주님을 알아 모실 수가 있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한 그대로 죽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을 볼 수 없다.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가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하느님을 변모하신 예수님 안에서 마침내 만나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 17,4) 한다. 예수님의 빛나는 변모 중에 베드로가 “주님”이라 칭하며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른 채 초막 셋을 짓겠다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추수를 하고 온 민족이 예루살렘에 모여 나뭇가지로 초막을 세우고 이레 동안 그 안에서 지내는 초막절을 지냈다. 이는 시나이 사막에서의 천막생활을 회상하는 축제였다. 우리에게 집을 지어주실 분은 우리의 주님이신데도 베드로가 주님께 집을 지어드리겠다 한다. 모세나 엘리야뿐 아니라 우리 모두 우리 마음의 지성소에 주님을 위한 초막을 지어야만 한다.

3.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오 17,1-9)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실 때 그분 둘레에서 이스라엘(모세와 엘리야)과 교회(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통교가 이루어지는데, “(하느님 현존의 상징인)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마태 17,5) “들어라!”(신명 6,4) 하는 가장 큰 계명이 “내 아들의 말을 들어라” 하는 계명으로 다시 울려 퍼진다. 하느님을 듣는 것이 곧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말씀이신 아드님 예수님을 듣는 것이 된다. 제자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마태 17,8) 하는 까닭이다. 율법과 예언이 증언을 마치고 예수님을 통하여 말하고자 예수님께 자리를 내어드린다.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진실로 드러내시고, 모든 인간에게 이 땅에서, 그리고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 안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생명,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이라는 기쁜 소식을 펼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시다.

시나이(탈출 13,21;19,16;24,15-16), 만남의 천막 위(탈출 40,34-35), 그리고 성전 위에서(1열왕 8,10-12)처럼 “구름”은 하느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그리고 현존하신다는 상징이다.(2마카 2,7-8 참조) “빛나는 구름”은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면서도 동시에 제자들을 “덮어” 그늘이 되어 하느님을 감춘다. “구름”은 계시이자 숨김이다. 드러내시는 하느님이시고 감추시는 하느님이시다.

‘들음’은 순명을 요구한다. 들어서 시작한 순명은 대답을 요구한다. 예수님의 세례 때에는 하늘의 목소리가 예수님께 말하지만,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 그리고 이들을 통하여 군중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다르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성령을 통해 잉태 때에 천사의 전갈로(마태 1,20), 하느님의 계시로(마태 2,15), 세례 때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로(마태 3,17),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실 때 제자들의 입을 통해(마태 14,33),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을 통해(마태 16,16) 드러난다.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마태 17,6) 제자들이 깜짝 놀라 엎어지며 경외심으로 두려워한다. 이에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마태 17,7)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하시듯이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신뢰와 사랑의 몸짓으로 손을 대신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손을 대어 일으켜 주시지 않으면 영영 일어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1요한 1,1) 하였듯이 이제 듣고, 보고, 살펴보고, 손으로 만져본 것에 예수님께서 손을 대신 사실을 더해 증언하게 될 것이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마태 17,9) ‘하늘’이 계시한 비밀을 지키라는 당부는 묵시 문학의 고전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다니 12,4.9 참조) 이것이 공관복음서, 특히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메시아의 비밀’이라는 맥락 안에서 되풀이된다.(마태 8,4;9,30;12,16;16,20 마르 1,34.44;8,30) 부활의 신비로 완전히 밝혀질 메시아에 관한 비밀을 지금은 지키라 하신다.

제자들은 이제 자기들이 체험했던 예수님의 영광이 주는 힘으로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마지막 십자가 산 위에까지 오를 것이다. 그러나 그 기억이 부활 이후로까지 이어지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여정이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타볼 산에서 광채 속에 묻혀 계시는 주님을 목격했을 때 그들은 잠에 취해 몽롱했지만, 그 추억은 후에 시련을 겪을 때 희망의 샘이 되어 주었다. 아마 내 인생에는 한 차례 타볼 산 체험밖에 없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체험에서 얻어지는 새로운 힘은 골짜기에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그리고 인생의 긴 어둠의 밤에서 나를 지켜주기에 충분할 것이다.(헨리 나웬, 제네시 일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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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제자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기 위해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을 선택하셨다는 점을 강조해야 합니다. 거룩한 변모를 목격할 수 있는 특권을 그들에게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세 명을 택하신 걸까요? 그들이 더 거룩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는 시험의 순간에 그분을 부인했고, 야고보와 요한 두 형제는 그분의 나라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다투었습니다.(마태 20,20-23 참조)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준에 따라 선택하시는 게 아니라 당신의 사랑의 계획에 따라 선택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계가 없습니다. (그 척도는)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 사랑의 계획을 통해 선택하십니다. 조건 없이 거저 베풀어 주시는 선택, 자유로운 계획,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않는 신적인 우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세 명의 제자를 부르셨던 것처럼, 오늘도 당신을 증거할 수 있기 위해, 당신 가까이 머물도록 누군가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증거자가 되는 것은 우리가 받을 자격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받은 선물입니다. 우리는 부족하다고 느끼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무능력하다는 변명을 내세우며 뒤로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타보르 산에 가서 태양처럼 빛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 눈으로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도 구원의 말씀이 전해졌고, 신앙이 주어졌으며,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는 예수님과의 만남의 기쁨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7,7). 이기주의와 탐욕으로 물든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빛은 일상의 걱정으로 흐려졌습니다.…하지만 우리가 받은 세례성사가 우리를 증인이 되게 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 덕분에 증인이 됐습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20년 3월 8일 삼종기도 훈화, *출처-바티칸 뉴스 한국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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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벤지
2023년 3월 5일
528 45.2%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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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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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마태 16,21)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야기이고, 사실상 하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예고 말씀은 흘려듣고 수난 예고 말씀만
알아듣고서 기가 꺾여 있었던 제자들에게 믿음과 용기와 힘을
주시려고 당신의 본래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 뒤에 누리시게 될 영광을 미리 목격했고,
나중에 자신들이 누리게 될 하늘나라의 행복을 미리 체험했습니다.
그 일은, 십자가는 영광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며, 목적지가 아니라
중간 경유지라는 것, 진짜 목적지는 승리, 부활, 영광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시청각 교육입니다.
‘모습’이 변하셨다는 말 때문에
‘겉모습’이 바뀐 것으로만 생각하기가 쉬운데, ‘겉모습’을 바꾸신 일이
아니라, 당신의 본성, 또는 본질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예수님의 옷이 빛처럼
하얘졌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으로’ 눈부시게
빛났다는 뜻인데, 인간의 언어로 ‘하느님의 영광’을 묘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지상에서의 우리 인생은 지나가는 경유지일 뿐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집은 아버지의 집입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은 목적지가 분명한 여행입니다.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제자들이 체험한 그 행복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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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은,
구약시대의 대표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겼다는 뜻입니다.
<대화의 내용보다 그 두 사람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상황 자체가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한 말은,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
또는 이대로 영원히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행복하고 황홀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마태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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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말을 중간에 끊으셨다는 뜻입니다.
아직은 하늘나라의 행복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당신의 외아드님이시고, 당신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하느님의 공식 선언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말씀의 ‘그의 말’은,
앞의 16장 24절에 있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예수님 말씀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은, 당신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십자가를 건너뛰고 영광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하느님의 나타나심 자체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무서움’이 아니라 ‘경외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마태 17,7-9).”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는 “그들을 어루만지시며”입니다.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사랑의 손길’입니다.)
“일어나라.”는 “이제 산에서 내려가자.”이고,
“두려워하지 마라”는 “놀라지 마라.”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라는 말은,
제자들이 헛것을 보았다가 정신을 차렸다는 뜻이 아니라,
황홀경에서 벗어나서 현실로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지금 본 것을 당신의 부활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온전히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것은
부활 신앙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런 체험을 했으면서도
예수님 수난 때에 왜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였는가?”
제자들은 특별한 체험을 했지만, 그 체험이 아직 ‘온 삶으로’ 믿는
믿음으로 발전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수난 때에는 그랬지만,
예수님 부활 후에는 온 삶으로 믿는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과 힘과 용기를 주신 것은
당신의 수난 때를 대비하기 위한 일이 아니라,
제자들 자신들이 박해와 순교를 받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일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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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3년 3월 5일
  | 03.04
528 45.2%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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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위인들의 자서전이나 그들의 체험과 어록을 엮은 책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삶을 사는 비법과 인생의 지름길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한테서 삶을 살아내는 지혜와 용기와 열정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들의 화려한 이력 앞에 용기가 생기기는커녕 오히려 기가 죽더군요. 그들이 걸어온 우뚝우뚝 솟은 산봉우리들만 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봉우리들 사이에는 굽이굽이 눈물과 어둠의 골짜기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화려한 봉우리는 다름 아닌 그늘진 골짜기 덕분에 우뚝 솟을 수 있었습니다.

모처럼 높은 산에 오르신 예수님은 해처럼 빛나십니다(1­-2절). 이미 모세가 시나이라는 높은 산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대한 적이 있습니다(탈출 24,16 이하 참조). 엿새 동안이나 구름이 산을 덮다가 이렛날에 구름 가운데서 주님이 모세를 부르셨고, 사십 일 주야를 그곳에서 지내면서 모세는 주님께 계약법전을 하사받았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도 하느님의 산 호렙에서 주님과 대면하는데, 바람도 지진도 불속도 아닌 이 모든 것이 지나간 자리에서 주님과 마주합니다. 이때 엘리야는 엘리사를 후계자로 삼으라는 명을 받습니다(1열왕 19,8 이하 참조). 모습이 변하신 예수님은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와 구약의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십니다(3절).

마태오는 제자들의 반응에 주목합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4ㄴ절) 얼마 전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부정하다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라는 호된 꾸지람을 들은 바 있습니다. ‘주님’이라는 그의 고백이 눈에 띕니다. 예수님의 변한 모습에서 하느님 나라에서 그분이 누릴 주권을 어느 정도 알아차린 듯합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4ㄷ절) 천진난만한 베드로의 바람은 소박한 우리의 소망을 닮았습니다. 집까지 지어놓고 하느님 나라가 올 때까지 오래오래 이 영광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하고픈 꿈같은 소망. 고통과 죽음 없이 영광스러운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베드로의 이 청원은 말없이 묵살됩니다.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5절)는, 세례 때와(3,17 참조) 똑같이 예수님의 특별한 신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줍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모세와 엘리야가 못다 이룬 일을 완성하는 분이십니다. 제자들은 몹시 두려워 떨지만 예수님은 편안하게 그들에게 다가오시어 손을 내미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7절)

아마도 오늘 복음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기다려 온 메시아의 모습일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장면을 혼자 보기 아까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인 앞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멋지게 드러내실 수 있는 기회는 마다하시고 인적이 드문 높은 산에서 몇몇 제자한테만 본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미래를 앞당겨 보이신 것일 뿐 그 상태를 오래 지속하지도 않으십니다. 높은 산에서 보낸 시간을 오래 유지하고 싶어한 베드로의 바람은 예수님이 겪으실 십자가의 길을 건너뛰자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영광에만 눈이 먼 인생들, 기적을 좇는 우리들의 가벼운 의지를 너무나 잘 간파하셔서인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9절)며 그나마 모든 것을 조용히 묻으십니다. 십자가와 죽음 없는 영광은 예수님께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직 가실 길이 남은 그분은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성공이라는 영광 뒤에 자리한 고난과 역경의 지루한 시간은 찬란한 봉우리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골짜기를 모른 채 화려한 봉우리에 취해 무턱대고 덤벼드는 것도 무모한 용기일 테고요. 골짜기 없는 산은 있을 수 없듯이 한숨과 눈물이 없는 영광은 손쉬운 영광입니다.

닮고 싶은 위대한 인물이 여럿 있는데, 성경에서 찾으라면 저는 단연 모세를 첫째로 꼽고 싶습니다. 광야 여정을 이끈 이스라엘의 첫 지도자였지만 그다지 카리스마가 넘치지도 않았고 세상의 영광을 누리지도 못한 모세가 좋습니다. 광야라는 험한 골짜기를 무지몽매한 이스라엘을 이끌고 다니면서, 이스라엘과 하느님 사이를 오가며 전전긍긍했던, 자기 역할에 충실한 모세가 존경스럽습니다. 그의 삶은 고단했지만 우리에게 남긴 것은 하느님께 끝까지 순종한 골짜기의 삶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모세라는 봉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우뚝 솟아 있습니다.

엘리야의 인생 역시 그에 못지않습니다. 우상숭배가 대세이던 시대에 혼자서만 거짓 예언자들 무리에 맞서 야훼 예배를 지켜야 했으니 무척 고독한 길을 걸어야 했을 겁니다. 툭하면 숨어 다니고 먼 호렙 광야까지 줄행랑을 쳐야 했지요. 제자 엘리사처럼 배짱이 두둑하지도 못한 못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약 예언자들의 대부가 되어 후배 예언자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영광에 싸인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를 불러 뭔가를 의논하십니다.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3절) 골짜기의 삶을 산 그들은 영광의 예수님과 한자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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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강지숙
  |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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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이겨 내신 사건에 이어서 오늘의 전례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전해 준다. 이것은 신비로운 하느님의 세계를 엿보게 하는 사건으로, 귀로 듣는 이야기라기보다는 마음의 눈으로 관조해야 하는 하나의 장면이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당신의 수난 예고와 관련된다. 거룩한 변모의 사건은 제자들의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세 제자가 증인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겪으실 피땀의 증인이 될 뿐만 아니라 그들도 같은 운명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오늘 본 예수님의 이 모습을 기억하여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고난을 이겨낼 것이다. 죽음이라는 어둠에 위협을 받고 계신 인간 예수님이시지만 파스카의 찬란한 빛으로 그 어둠을 이기실 것이라는 보증의 사건으로 제자들은 희망을 잃지 않게 될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곁에 있다. 구약의 이 위대한 두 증인은 마지막 때가 가까이 오고,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셨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처럼 구름 속에서 말씀하시며 나자렛 예수님의 '비밀'을 밝혀 주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는 곧 예수님께서 겪으실 고통과 약함, 죽음 안에 이미 영광과 강함 그리고 부활이 들어 있음을 선언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종으로서 고난의 길을 가시고자 산을 내려오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골고타의 어둠은 이 거룩한 변모의 광채를 삼켜 버릴 것이다. 그 때가 되면 그 어둠이 모든 희망을 앗아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날의 광채는 거짓이 아니다. 제자들이 거룩한 변모 때에 본 광경은 환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그 빛은 파스카의 새벽을 비추고, 제자들은 그 빛으로 생명이 죽음을 이기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파스카는 제자들의 파스카가 된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파스카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은 번창했던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자기 고향을 떠난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친척, 선조들의 종교도 버리고 떠난다. 그것은 그 때까지 그가 맺고 있던 모든 관계를 끊어 버리고, 모든 이주민이 그렇듯이, 확실하지 않은 미래에 자신을 맡기고 모험을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어 과거의 모든 인연을 끊고 자기 자신마저 비워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인간을 보여 주신다. 이것은 죄를 끊어 버리고 하느님과 맺은 관계를 새롭게 하고 거룩한 백성의 삶을 시작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 백성은 구세주, 곧 땅 위에 사는 모든 백성에게 복을 내리실 분의 길을 준비할 것이다(제1독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며 그들이 타락한 뒤에도 구원하시는 분은 언제나 하느님이시다. 인간의 구원은 그들의 업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보내시어 이 은총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생명과 불사불멸의 근원을 밝혀 주셨다. 사순 시기는 예수님께서 죽음에 이르시기까지 우리에게 주신 이 생명의 은총을 깨닫고 완전히 회개하는 때이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얼마 전에,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겪으실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거룩한 변모는 가까이 닥쳐온 고난을 미리 내다보고 신념을 가지고 대처하게 할 목적을 갖는다. "이는 나의 아들, 내 사랑을 모두 쏟아 부은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듣고 그가 너희에게 하는 모든 말을 믿어라." 사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도들에게서 믿음을 송두리째 앗아갈 만한 사건이었다. 그들에겐 그 때 그들의 믿음을 지켜 줄 무엇이 필요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때에 들었던 하느님의 목소리를 기억하여야 했다. 그것은 인간의 폭력에도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이 함께한다는 선포이며, 인간의 모든 역사를 바꾸어 놓을 죽음에 대한 승리의 예고였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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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02년 2월 24일
  |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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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전례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사순절과는 잘 어울리지 않고 엇박자가 나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에 관한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타볼 사건은 공생활 2년 말기에 일어났던 사건으로서 공생활 중 내리막길에 해당되는 시기입니다. 타볼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감추고 계시던 당신의 본모습 곧 황홀하고 찬란한, 말로써는 형언할 수 없는 신비스런 모습을 한순간 보여 주시며 강렬한 신체험을 시켜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앞둔 당신의 외아들 예수께 고통스러운 수난 이후에 있을 부활의 영광이 어떤 것인지를 미리 맛보게 하십니다. 이 사건은 앞으로 수난의 길을 걸으시며 일그러지고 무능하고 패배한 것처럼 나타날지라도 결코 실망하거나 낙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심어 줍니다. 예수께서 미구에 닥쳐 올 수난과 죽음을 미리 내다보시고 제자들이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대처하며 인류 구원 사업을 완수할 수 있게 하시려고 신심이 확고한 세 제자 앞에 자신의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즉 제자들의 신앙을 굳게하기 위한 교육적인 배려가 들어가 있습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 변모 사건은 수난을 앞둔 예수께 크나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앞으로 주어질 부활의 영광에 대한 희망은 죽음의 고통과 두려움을 용감하게 넘어설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오늘 복음의 등장인물은 많습니다. 예수님, 베드로, 야고보, 요한, 모세, 엘리야 등장하고 성부께서는 목소리로 등장합니다. 상황이 벌어지는 곳은 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제자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오르십니다. 시나이산 호렙산 등 많은 경우 성서에서 산은 수직적이고 신령스런 성격으로 인해 하느님 계시의 장소로 등장합니다.

먼저 본문은 아주 탁월한 상징으로 신현을 묘사합니다. 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빛납니다. 눈부시게 빛나는 옷과 광채는 예수님 정체의 탁월성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다음 성경 본문은 계속해서 연장된 신현의 장면으로 모세와 엘리야의 출현을 언급합니다. 본문은 변모하신 예수님에게 모세와 엘리야 두 분이 나타나 대화를 나눈다고 합니다. 이들은 구약의 양대 산맥이며 두 거목(巨木)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엘리야는 예언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이 두 분이 구약의 대표 선수에 해당하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빛나게 해주는 엑스트라 혹은 병풍으로 출현합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에 모세와 엘리야를 동참시키신 목적은 바로 예수님께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를 능가하는 분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를 합한 것보다 더 위대하신 분입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출현은 예수님의 인격이 율법과 예언의 완성이심을 드러내 보여 줍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는 곧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만 남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이 두 분이 하신 일을 다 모아서 완성하시는 사명을 맡은 강력한 실세 메시아이심을 암시합니다.

이어서 오늘 복음은 제자들의 반응을 리얼하게 언급합니다. 번쩍 번쩍 빛나는 예수님의 모습에 제자들은 황홀경에 빠지고 성질 급한 베드로는 놀라운 광경을 보고서 놀라서 얼떨결에 한 마디 합니다.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면서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고 제의합니다.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으니 함께 머무르시지요.'하고 말합니다. 베드로의 평소 성격이 아주 잘 드러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어떤 대답도 하시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복음 텍스트는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동안 구름 속에서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리는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일을 덧붙입니다.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마침내는 성부께서 직접 자신의 음성으로 예수님의 정체가 당신의 아드님이심을 장엄하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느님과 예수님의 관계가 성부와 성자의 관계로 계시됩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자성(子性)이 하느님의 부성(父性)이 계시되는 절정의 순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복음이 전해주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은 문맥상으로 볼 때 세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이벤트입니다. 그것은 첫째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고, 둘째 장차 힘없이 잡혀 죽더라도 사흘 만에 부활하여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신 당신의 말씀을 밑받침해주는 사건이며, 겁 많고 의심 많은 제자들에게 용기와 믿음과 희망을 주는 사건입니다.

첫째 오늘 성변용 사건은 예수님의 아이덴티티 즉 신원을 밝혀 주는 강렬한 신체험 사건이며 거룩한 신현 사건입니다. 공간적으로 하늘과 가까운 산은 하느님이 자주 출현하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하얗게 빛나는 옷은 예수님이 거룩한 하느님이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출현은 예수님이 그 두 분을 합쳐 놓은 것보다 더 크신 분이라는 사실을 함축합니다. 요컨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구약에 의해 예언되고 베드로에 의해 고백된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계시해 줍니다.

둘째 성변용 사건은 죽음 예고에 이은 부활예고 혹은 부활 선취(先取, l’anticipation) 사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앞둔 당신의 외아들 예수께 고통스러운 수난 이후에 있을 부활의 영광이 어떤 것인지를 미리 맛보게 하십니다. 산에서의 변모 사건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선취되어 이미 여기 현실화된 것입니다. 이는 앞으로 수난의 길을 걸으시며 일그러지고 무능하고 패배한 것처럼 나타날지라도 결코 실망하거나 낙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심어 주기 위함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장차 힘없이 잡혀 죽더라도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임을 선취하여 미리 알려주고 보여주고 듣게 해주고 이루어주는 사건입니다.

오늘 복음의 텍스트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이 놓여져 있는 전후 상황을 잘 알아야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뽈 리쾨르는 하나의 텍스트를 잘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콘텍스트를 잘 이해해야 한다는 ‘텍스트 확장 이론’의 성서 해석학을 주장합니다. 하나의 분리된 텍스트는 그 주변의 모든 콘텍스트를 압축하기도 하고 그것이 변곡점에 이르면 다시 팽창하기도 한다는 것이 그의 해석학입니다. 텍스트는 그만 부동적으로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독서와 함께 수축과 확장을 계속하면서 의미를 끊임없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텍스트는 항상 콘텍스트를 지시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의 컨텍스트 즉 문맥을 좀 더 세밀하게 잘 살펴봐야 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성변모(Transfiguratio) 사건 앞에 나오는 내용이 무엇인지 훑어 보고 그 맥락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사건이 있기 전에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예수님의 수난예고가 먼저 나옵니다. 오늘 사건은 예수님의 정체에 관한 베드로 사도의 고백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수난과 부활의 예고에 바로 이어진 사건입니다. 수난예고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묻고 이 질문에 베드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함구령을 내리시고, 뜬금없이 앞으로 닥칠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이 수난과 부활의 예고에 이어진 사건이 바로 오늘 복음의 주제인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입니다. 요컨데,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은 예수님의 신원에 관해 즉 예수님께서 힘없이 잡혀 죽더라도 사흗날 만에 부활하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미리 이루어주어 보증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변모 사건은 부활의 선취(先取, l’anticipation)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부활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면서 완전한 하느님이심을 제자들에게 주지시키기 위해 부활의 모습을 미리 당겨 와서 이루어 보여주신 사건이 성변모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중요한 신학적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선취(先取, l’anticipation)라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독일의 신학자 칼 라너가 영원과 시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응용한 개념입니다. 부활사건 혹은 예수님 본래의 아이덴티티 같은 것은 일차적으로 시간을 초월한 영원의 영역에 속하는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느님과 관련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부활의 사건이 미리 선취될 수 있는가? 모든 피조물과 인간의 존재양식은 시간과 공간이다. 인간은 동시에 두 군데 있을 수 없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동시에 있을 수 없고 여기 혹은 저기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느님의 존재양식은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공간적으로 무한하다.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이 때 이 영원이란 말은 시간적으로 끝이 없이 계속 이어져 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은 피조물의 존재양식이고 창조주 하느님은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하느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그 바깥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간이란 피조물의 존재 양식이고 변화의 측정 단위입니다. 하느님은 변화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순수 현실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를 나누어 생각하지만 하느님은 언제나 현재에 계시는 순수현실태(Actus Purus)입니다. 하느님은 시간을 넘어서 계시기에 과거 미래 현재가 모두가 그분께 한꺼번에 동시적이다. 예를 들면 우리에게는 사심판이지만 그분께는 모든 인간의 사심판이 공심판입니다.

인간은 시간을 나누어서 과거 현재 미래로 시간이 흘러가는 것으로 의식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프랑스어권 종교학자 미르케아 엘리아데는 그 시간의 흐름을 현재를 기준으로 방향을 거꾸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르는 것으로 의식되지만 다른 차원 즉 성스러운 차원에서 보면 미래 현재 그리고 과거로 흐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땅으로 수직적으로 내리 꽂히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역시 쌍방향으로 영향을 끼치고 현재를 구성합니다. 그런데 순수 현실이신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과거와 미래 모두를 현재화하고 현실화 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과거의 사건이 오늘 현재에 이어져 현실을 구성하고 있고 동시에 미래의 사건이 이미 여기에 침투해 있고 선취(先取, l’anticipation)되어 현실을 구성하기도 합니다. 과거사는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현실화되어 있고 미래의 일 역시 막연히 언젠가 발생할 수도 있는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 현실화되어 부분적이고 파편적이지만 현실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몸현상학자 메를로 퐁티에 의하면 과거는 우리의 몸을 통해 현재를 구성하고 있고 미래 역시 우리 몸에 선취되어 현재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구원경륜의 수레바퀴에서 지나간 과거의 일은 끝나서 닫혀 버린 것이 아니고 현재를 구성하고 미래를 향해 침투되어 갑니다. 인간에게 미래의 일이지만 완성된 거룩한 일은 이미 여기에서 현실화되어 그 창조적인 힘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세기에 있어서 나치의 부역자로서 가장 불행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데거는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미래와 현재의 오묘한 관계에 대해 현상학적으로 설명합니다. 아무튼 하이데거의 생각에 따르면 현재가 모여 미래가 될뿐만 아니라 미래가 현재를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미래의 일은 질료적으로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실재적으로는 지금 여기 부분적이고 파편적이지만 현실화되어 현재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현존재를 규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미래의 인간학적인 구성 요인을 죽음으로 보았습니다. 하이데거는 죽음으로 정향된 인간이라는 서글프지만 부정할 수 없는 대명제를 받아들인 것은 2차 세계대전을 겪은 그의 허무주의적 역사관의 한계입니다. 그는 인간의 온갖 부정적인 측면에 관심을 많이 가집니다. 그는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을 미구에 닥칠 죽음과 관련해서 실존론적으로 해석합니다. 인간이 일상생활 속에서 겪는 갖가지 고통들도 결국 언젠가 미래에 결정적으로 닥칠 죽음이 미리 와 있는, 죽음이 선취되어 있는 죽음의 다른 여러 모습들이라는 것입니다. 철학적인 용어로 이야기 하면 혹독한 아픔, 무료함, 가혹한 시련, 불안, 공포, 고난, 고통, 아픔, 슬픔, 고독, 소외감, 빈곤, 절망, 이별 병들고 아프고 불행한 모든 일들은 이미 여기 와 있는 죽음입니다. 모든 것을 완전히 끝장내는 마지막의 죽음이 현실화되어 현재에 침투되어 부분적이고 파편적이며 단편적이지만 이미 여기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우리가 갖는 미워하는 마음, 시기하는 마음, 교만한 마음 등은 단순히 그것들이 시기하고 미워하고 교만한 마음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볼 때 결국 죽음이 현재에 현실화되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죽음이 noumena(본체)라면 세상의 인간학적인 악들은 죽음이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의 phenomena(현상)입니다. 구조악 역시 하나의 부분적인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의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에게 있어 하루 하루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하루 죽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40년 살았다는 것은 40년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아직 완성되진 않았지만 이미 지금 여기 와 있는 죽음을 살아가는 것이고 결국 죽음으로 끝장나게 된다는 것이다. 죽음은 나의 존재와 소유를 다 파괴하고 그리고 내가 이룬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삼켜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인간관은 매우 염세적이고 비관적이며 허무주의적입니다. 무에 바탕을 두는 인간관이며 세계관입니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인들에게 굉장히 어필되었고 6 25를 치른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우리 인간의 경험에 의하면 절반 정도는 맞는 내용입니다. 인생사고(人生四苦) 생로병사(生老病死)를 강조하는 불교의 인간관과 세계관에 아주 잘 부합하는 형이상학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이것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인생을 속이는 일입니다. 산을 하나 넘으면 강이 막고 있고 강을 건너면 사막이 놓여 있곤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한 인간은 이런 와중에도 희망고문을 스스로 갖고 살며, 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무언가를 즐기면서 향유하는 삶을 영위해 나갑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똥밭을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죽음의 단편들을 체험하지만 생명을 체험하기도 한다. 평화, 충실, 기쁨 성취감 보람 즐거움 신뢰 사랑 정 신바람 행복 만족 신뢰 등의 단어로 수놓아지는 인생의 측면도 있다. 지옥같은 아우슈비츠에서도 기쁨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부활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드러내심으로써 끝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것을 계시해주십니다. 거룩한 변모 사건 즉 부활의 선취 사건은 히틀러에 곡학아세한 하이데거의 부정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인생관 같은 조잡한 것들을 완전히 뒤집어엎어 버리는 결정적인 계시의 사건입니다. 사실 죽음이 이미 여기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데 촛점을 맞추고, 거꾸로 부활이 완전히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여기 와 있다는데 촛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신앙이다. 아무리 이미 여기 와 있는 죽음의 모습으로 인생이 고통스럽더라도 나중에 결정적으로 완성될 부활에 희망을 가지고 이미 여기 와 있는 부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다. 미래에 완성될 부활이 현재에는 아직 미완성인 것에 대해 절망하지도 말고 이미 지금 여기 부분적으로 침투해 와 있는 부활의 기쁨에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다.

예수님의 성변용 덕분에 제자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었듯이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력 덕분에 우리는 허무주의적 실존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를 ‘죽음에의 존재’라 하였지만 부활신앙은 몸적인 인간 실존은 ‘생명에로의 존재이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이 없는 한 우리는 허무주의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인간은 이따금 현현하는 존재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불안’의 존재자일 뿐입니다. 구태여 말하자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와 같이 어쩔 줄 모르는 존재입니다. 죽음이 지금 여기 침투해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힘이 내려 꽂혀 있기에 우리는 불안 속에서도 평화와 평정을 누립니다. 이미 여기 살아있는 부활의 힘 덕분에 우리는 인생사고를 뒤집어서 오히려 인생사희 즉 태어나는 기쁨, 나이먹어 성숙되어 가는 기쁨, 병으로부터 치유되는 기쁨 그리고 부활의 기쁨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에로 던져져 있는 존재자가 아니라 부활에로 던져져 있는 존재자입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 덕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무화적이고 파괴적이며 죽음을 위한 죽음에 의한 가공할 죽음을 당하셨지만 부활하심으로써 그것을 쳐부수셨고 우리에게도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셨을 뿐아니라 그 힘까지 주십니다.

부활신앙은 단순히 ‘희망고문’이 아닙니다. 인생살이 여정의 곳곳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침투되어 있어 생로병사의 현상으로 나타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의 힘이 시간의 곳곳에서 선취되어 힘과 용기와 기쁨을 주고 있다는 믿음이 우리 신앙 현존재의 실존적 삶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재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불안감이나 좌절을 느낄 때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속에서 살아가며 또 다른 사람을 기뻐게 해 주는 사람이고 자기 자신도 기쁘게 사사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에 그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미워하거나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잘되기를 바라고 또 그것을 기뻐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부활예고라는 측면에서 제자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예수님의 성변모 사건을 전하지만 동시에 부활선취라는 관점에서 우리에게 인생의 의미에 대해 교훈을 줍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의 성변용 사건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이 사순시기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사순절을 지내고 있는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 우리는 지금 여기에 이미 와 있는 부활을 선취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에로 던져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부활에로 던져져 있는 중생입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지금의 우리에게도 생명의 힘과 거대한 부활의 한 자락을 살며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타볼산 사건은 죽음이 침투해 들어와 있는 것들에 의해 가려져 있던 부활의 모습을 살짝 보여준 사건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주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맛보는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희망과 성취감은 다름아닌 결국 생명이 미리 와 있는, 부활이 션취(anticiper) 되어 있는 생명의 다른 여러 모습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 미리 부분적으로 선취(anticiper) 되어 있는 죽음의 힘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또 딴 사람 잘되는 꼴을 못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지금 여기 미리 부분적으로 선취되어 있는 생명의 힘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잘되기를 바라고 또 잘 되는 것을 봤을 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그 기준을 부정이 아니라 긍정 그리고 죽음이 아니라 부활의 생명에 두고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사건입니다.

둘째 우리는 현실에 충실하게 발을 딛고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목격한 산에서의 황홀한 모습 때문에 그곳에 초막을 짓고 주님과 함께 머물러 살자고 했지만, 종국에 예수님의 일행은 결국 산에서 내려옵니다. 수난 없이 영광이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금 여기 따뜻하고 안락한 생활이 있다면 이 자리를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오늘 우리는 베드로의 표현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제가 여기에 텐트 세 개를 쳐서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해와 같이 변하는 그 순간을 베드로는 결코 놓치기 싫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오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통해 그분의 ‘영광’과 ‘십자가’를 뒤따라야 할 사람들로서 자신들의 험난하고 고독한 길을 버틸 힘을 다시금 얻게 됩니다. 하지만 그 힘이 당장 눈에 띄게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산 위에 올라가서 하는 기도, 산 위에서 겪은 신비로운 체험, 그것은 산 아래에서의 삶을 위한 것입니다. 일반적 종교 활동, 즉 기도드리며 미사를 봉헌하는 것으로 자기 안에 머물며 만족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와야만 했듯이 우리는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한다. 마더 데레사 성녀와 관련하여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꿈 속에서 천국의 문에 도착했을 때 베드로 사도는 ‘지상으로 돌아가라. 여기에는 빈민굴이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복음의 핵심은 우리도 변화하신 그분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변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에 이번에 내 자신이 변해야 할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결심하였습니다. 나름대로 각자 ‘커피를 다섯 잔에서 두 잔으로 줄이겠다, 저녁기도를 꼭 바치겠다, 식사량을 줄이겠다’ 등입니다. 사순절은 40일간의 광야 피정 기간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처럼 나의 광야에서 나름대로의 고행을 통해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칠흑같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새벽 여명은 동터오고 좋지 않은 죽음의 일은 반드시 지나가고 좋은 부활생명의 일이 반드시 다시 옵니다. 죽음이 침투해와 있는 이런 와중에도 부활의 힘 혹은 생명의 힘이 선취되어 있는 희망이 우리에게 한 자락 있습니다. 죽음과 어둠의 힘은 가끔 국지적인 전투에서 가공할 힘을 발휘하곤 하지만 전쟁의 승패는 부활과 빛의 승리로 이미 판가름이 나 있습니다. 전투에서 죽음과 부활은 힘겨루기를 계속하고 있지만 물러가거나 지나가지 않은 죽음과 어둠의 힘은 없습니다. 죽음은 생명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죽음 앞에서도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1고린 15,55)고 외칠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타볼산에서의 빛나는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본모습은 우리의 미래이며 희망입니다. “인간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언 16,9). 주역에 비극태래(否極泰來)라는 괘가 나옵니다. 아닌 것이 극에 달하면 결국 크고 좋은 것이 옵니다. 상황이 극에 달하면 새로운 국면이 열리며, 모든 것은 새옹지마이고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아무쪼록 두려워하지 말고 일어나는 한 주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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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
2023년 3월 5일
  | 03.04
528 45.2%
제1독서(창세기 12,1-4ㄱ)는
하느님과 함께하지 못했던 과거와의 단절을 요구합니다.

아브람은 원래 하느님(야훼)이 아니라 다른 신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여호 24,2).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을 선택하시어 당신 백성으로 삼을 테니 지금 사는 곳(하란)을 떠나라고 하십니다(12,4ㄴ). 하느님께서 아브람에게 느닷없이 요구하신 것은 고향은 물론 이제껏 살던 모든 환경과 조건과 생각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만 섬기기 위해 과거와의 단절을 요구하십니다. 하느님만 아시는 미지의 땅, 가나안 남쪽, 네겝으로 가라시는(12,9) 하느님의 명령에 많은 이유를 댈 수도 있었을 텐데, 투명하지 않은 미래임에도 아브람은 하느님의 말씀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자기 고향을 떠납니다.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한 아브람과 그 후손들은 자손을 통해 복을 받고 번성하면서 별들처럼 높이 솟아오를 것입니다(집회 44,21). 때로는 정처 없이 방황할 수도 있는 유목민 생활을 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겨드리고 떠날 수 있었던 아브람은 믿음의 아버지(사도 3,25; 갈라 3,7; 히브 11,8)로 불리게 될 것입니다.

복음(마태 17,1-9)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시고(16,21-23) 어떻게 당신을 따라야 하는지(분별) 말씀하신 뒤(16,24-28) 엿새가 지났을 때 세 제자와 함께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가라지를 수확할 때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13,43)이라고 하신 대로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습니다. 이집트 탈출 뒤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랐을 때 엿새 후에 구름이 산을 덮었고(탈출 23,9-18), 거룩하게 변화된 모습(탈출 34,29)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모세가 백성에게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신명 18,15)라고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데, 율법(모세)과 예언서(엘리야)에 이미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이 담겨(계시되어) 있음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런 광경을 본 베드로의 반응은 의외입니다. 초막절 축제(레위 23,27.34)를 생각했는지 즉시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합니다. 천상의 인물들을 지상 인물의 삶의 방식으로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사람들과 함께 있기에(묵시 21,3)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가셔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듯합니다. 매우 즉흥적이며 분별력이 없는 베드로는(16,2-3) 또 다른 유혹자가 되어 영광스럽게 부활하기 위해 산에서 내려가셔야 할 예수님 수난의 여정에 족쇄를 채우려는 것입니다.

이집트 탈출 뒤, 구름이 이스라엘의 성막을 채웠던(탈출 40,34-38; 2열왕 8,10-11) 것처럼 베드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구름이 그들을 덮으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처럼 들려온(3,1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확인해줍니다. 거룩하게 변화되신 예수님의 모습은 부활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마태오는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를 훨씬 능가하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즉위: 시편 2,7), “거룩한 영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것입니다.”(로마 1,4) 거룩한 변화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넘겨받으신(11,27) 아드님이심이 확인되는 순간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모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중심적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에게 다가오시어,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자, 제자들이 눈을 들어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거룩함을 체험한 뒤에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인간적 배려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변화 뒤 산에서 내려오실 때 산 위에서 보았던 거룩한 모습을 말하지 말라 하시는데, 아직 당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고(16,20), 오로지 당신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제2독서(2티모 1,8ㄴ-10)는
구세주의 나타나심과 우리의 실천 사항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을 아브람의 후손으로 이해하는(갈라 3,16)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다는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히브 2,14),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의 은총을 보여주신 우리의 구원자이시라고 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난”(티토 2,11) 것이니 티모테오에게 복음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창조의 목적과 구원의 은총에 따라 거룩하게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바오로처럼 복음 때문에 겪게 되는 고난에(에페 3,1) 동참하라고 합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면서 겪는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주신 생명과 결합하기 위한 것이므로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1,12). 비록 복음대로 살기가 힘들더라도 견뎌내면서 말씀대로, 하나씩 하나씩,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부르시고, 그분의 뜻대로 늘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 하느님을 뵈었듯이, 그리고 아브람이 아들 이사악에 대한 집착을 없애기 위해 모리야산(예루살렘)에 오르라고 하느님께서 명령하셨듯이(창세 22,2-16),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이 넘실거리는 산이 아니라(마태 4,8-10) 고난을 받고 죽을 높은 산(골고타: 마태 16,21)에 오르실 것을 미리 보여주십니다. 제자들이 보았던 부활하신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으로 다시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마태 28,3). 거룩하게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분이 당신의 아드님이심을 선언하십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다.”(2베드 1,18)라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아브람이 하느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드러나신 예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합니다(2베드 1,19).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주시어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 하느님에게서 받아 전한 ”(1베드 1,21) 하느님의 말씀은 바르고 진실하기에 분별력을 키워줄 수 있으며, 그분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 어려울지라도, 때로는 벅차고 힘겹게 느껴질지라도, 한 번만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그다음은 조금 더 쉽게 실천할 수 있고, 하느님 안에서 기쁨과 축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태양 빛을 청해본 적이 없어도 늘 빛이 우리 곁에 와 있듯이 생명과 불멸의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 곁에 가까이 있습니다(로마 10,8). 자기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형식적인 신앙생활 때문에, 그리고 잘못된 습관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그분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부르심)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순절 시기만이라도 하느님의 부르심을 못 듣게 하는 장애물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처럼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고, 바오로가 티모테오에게 권고했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해보라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 보라.”(2베드 1,19)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세속적인 것에서 벗어나 거룩해지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조금씩 거룩해지지 않다면 그것은 과거의 악습과 단절하지 못했다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거나 들어도 못 들은 것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할 때 기쁨의 얼굴, 빛나는 얼굴을 우리에게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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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방효익 바오로 신부
2023년 3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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