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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가해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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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 성지 주일 성경 말씀 해설
조회수 | 165
작성일 | 23.03.31
예수 부활 대축일 전 한 주간을 ‘성주간聖週間’이라고 한다. 성주간 동안 전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주님 부활을 맞이하도록 이끌어 준다. 따라서 교회 전례에서 성주간은 전례의 정점을 이루며, 가장 거룩한 시기이다. 성주간을 지내는 관습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3세기 무렵에는 예수 부활 대축일 전 금요일부터 예수 부활 대축일 아침까지 3일 동안을 성주간으로 지냈는데 지금과 같이 일주일의 성주간을 지내게 된 것은 5-6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중세 때는 성주간을 ‘수난 주간’ 또는 ‘파스카 주간’이라고도 하였다.(*이미지 출처-ilblogdienzobianchi.it)

성주간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시작되는데, 성지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미사를 봉헌한다. 교회 전례는 이날 성지聖枝 축복과 행렬을 통하여 참 임금이신 예수님께 환호하고, 예수님의 죽음 예고와 제자들의 배반,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를 지내신 사건, 마침내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수난 복음’을 장엄하게 선포한다. 성목요일이 되면 주님 만찬 미사 직전에 사순 시기가 끝난다. 이날 오전에 각 교구에서는 주교와 사제들이 성유 축성 미사를 봉헌하며, 사제들의 서약 갱신과 성유 축성식을 거행한다. 저녁에는 예수님께서 성체성사와 성품성사를 제정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 만찬 미사를 봉헌하는데, 이로써 파스카 성삼일이 시작된다.

‘가’해에는 마태오가 전하는 주님의 수난기를 듣는다. 복음사가 마태오는 우리에게 주님 수난에 대한 일지 형식의 사건을 보도한다기보다 예수 그리스도 생애의 마지막에 벌어진 주님의 수난을 두고 교회의 믿음이 어떻게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를 전한다. 복음은 예수님의 부활을 고백하는 이들이 기록한 내용으로서 그 사실에 비추어 앞의 사건들을 설명하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밝힌다. 그래서 마태오는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각도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록한다. 그래서 이 수난기에는 구약의 인용과 함께 “성경에…라고 기록된 대로”, “말씀이 이루어졌다”라는 구절들이 보인다. 마태오가 전하는 예수님의 수난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부활이라는 대사건의 빛 아래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만나는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시련과 고난으로 이를 어떤 시련과 고난으로 받아들이시고 살아내셨는지를 듣는다.

마태오가 전하는 예수님의 수난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1) 사건 전(마태 26,1-46)
2) 종교적 재판 과정(마태 26,47-75)
3) 정치적 재판 과정과 예수님의 죽음 및 안장安葬(마태 27,1-66)

1. 음모, 값진 향유, 최후의 만찬, 겟세마니 (마태오 26,14-27,66)

먼저 예수님을 죽일 음모(마태 26,1-5)에 이어 베타니아에 있는 가난한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익명의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값진 향유를 붓는 사건(마태 26,6-13)으로 본격적인 예수님의 수난기를 준비하는 과정을 듣는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행동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진정한 사제요 왕이 되실 것임을 알려주는 예언적 행동이다. 여인은 예수님이 장차 고독하게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버려져 “가난한 이”(마태 26,9.11)로서 십자가에 오르실 것을 암시하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행위가 제자들이 “불쾌하게”(마태 26,8) 여길 낭비가 아니라 진정 가난한 이로 오신 당신께 드린 선물로서 이를 용인하신다. 이는 유다가 은돈 서른 닢에 팔아넘긴(마태 26,14-16) 예수님, 감히 돈의 값어치로 환산할 수 없는 예수님께 드린 선물이었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마태 26,13)이라고 그 여인이 했던 사랑의 행동을 선포하신다.

최후의 만찬(마태 26,17-35)이 이어진다. 이는 마태오 복음사가에게 부활을 준비하기 위한 만찬이었고, 열두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님을 팔아넘긴 배반자 유다를 고발하며, 바위처럼 굳건하게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베드로마저 바람에 흔들리는 잔가지처럼 흔들리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할 제자들과 함께 하는 장면이다. 이런 모습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 곧 당신 생명을 내어주실 예수님의 공동체였다. 최후의 만찬은 죄인들, 믿음이 없는 자들, 감히 주님의 살과 피, 그리고 생명을 받아 모실 자격이 없는 자들이 모여 나눈 식사 자리였다. 그러나 죄 사함과 새로운 계약을 이루는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며 주님을 두고두고 기릴 은총의 시작 자리 또한 바로 그 공동체의 식사 자리였다. 마태오는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마태 26,26) 하는 말씀과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쏟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8)”라는 예수님의 엄숙한 선언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성체성사를 죄의 용서와 연결시킨다.

저녁 식사 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동체와 함께 성전 아래에 있는 겟세마니로 내려가시어 이미 목전에 다가온 당신의 죽음을 예견하시며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마태 26,39)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제껏 해왔던 말씀과 행동을 부정하며 도망을 칠 수도 있었고, 강력하게 저항하며 폭력을 행사하실 수도 있었지만, 당신께 가해질 악을 받아들이고 끝까지 선을 행하시기로 선택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며 모든 인간 존재를 위한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유롭게 당신 사랑으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신다. 공생활 초기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악마의 유혹이(마태 4,1-11) 다시 예수님을 몰아쳤다고 말할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 26,42)” 하는 ‘주님의 기도’ 내용대로,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을 당신 몸으로 실현하시면서 다시 한번 하느님의 손에 당신의 운명을 맡기신다.

어둠 속에서 유다의 입맞춤으로 비극이 시작되지만, 예수님께서는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마태 26,50) 하시고,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귀를 잘라버린 사건이 이어지지만, 예수께서는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 26,52)” 하시는 비폭력의 선언과 함께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 26,54) 하신다. 배반자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보낸 큰 무리”(마태 26,47)는 자기들이 할 일을 하고 예수님께서는 잡히신다. 예수님 비폭력의 근거는 예수님 스스로 하느님의 보호 아래 있음을 아신다는 것에 있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대사제 카야파에게 인도되어 종교 재판을 받으신다.(마태 26,57-68) “그곳에는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급히 소집되어) 모여 있었다.”(마태 26,57)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동과 말로 율법을 거슬렀고, 하느님을 모독하였으며, 이스라엘 공동체를 배반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거짓 증인들이 많이 모여”(마태 26,60) 법석을 떤다. “마침내 두 사람이 나서서” 자기들이 하느님의 거처로 모시는 성전을 두고 했던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이자가 ‘나는 하느님의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마태 26,61)라며 증언한다.

2. 종교 재판, 카야파, 유다의 배반, 베드로의 부인否認 (마태오 26,14-27,66)

마태오 복음사가가 정확한 사실적 근거들이나 말마디들을 전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재판의 과정은 결국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어떤 관계에 계신 분이신가 하는, 곧 예수님의 신원 규명이었다. 그래서 대사제 카야파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인지 (그리스도인지) 밝히시오.”(마태 26,63) 한다. 이에 예수께서는 카야파의 말과 그의 양심 그대로를 지적하시며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시고, 다니엘서와 시편을 인용하여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태 26,64) 하신다. 이 말씀은 카야파를 놀라고 화나게 하면서 카야파 스스로 “자기 겉옷을 찢게”(마태 26,65)하고, 마침내 예수님이 “죽을 죄”(마태 26,66)를 지었다고 결론을 내리게 한다.

예수님의 종교 재판이 진행되는 가운데 다른 한편에서는 힘과 권력이 없는 몇몇 사람들과 “하녀”에 의해 베드로에 대한 또 다른 심문이 진행된다. 베드로는 부인하고, 고통받는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며, 그분의 제자였던 사실마저도 부정한다.(마태 26,69-75) 급기야 신변의 위협을 느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계시던 곳으로부터 “밖으로 나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슬피 울었다.”(마태 26,75)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던 유다는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치고서는”(마태 27,3) “죄 없는 분을 팔아넘겨 죽게 만들었으니 나는 죄를 지었소.”(마태 27,4) 한다. 유다의 번복 뒤에 마땅히 재판은 처음부터 다시 심문을 시작해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유다는 자기 인생의 의미를 잃어 마침내 스승의 몸값으로 받았던 돈을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마태 27,5) 베드로는 무력감 속에서 자신을 하느님의 자비에 눈물로 맡겨드리지만, 유다는 자기의 배신을 스스로 만회하고 싶었으므로 자신을 하느님의 자비로운 심판의 손에 내어드리지 않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심판한다.

3. 정치 재판, 빌라도, 바라빠, 십자가, 새 무덤 (마태오 26,14-27,66)

종교 재판은 예수님께 형을 선고할 수는 있었지만, 그 형벌을 집행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이유로 예수께서는 다시 당시 유다의 통치자였던 로마 정치 권력, 총독 빌라도 앞으로 끌려가신다.(마태 27,1-3.11-26) 빌라도에게 예수님은 로마 황제에게 정치적 위협이 되는 때에만 관심을 둘 수 있는 사안이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마태 27,11) 하고 묻는다. 이는 ‘당신이 감히 황제의 권력에 맞서는가? 로마의 정치적 힘에 맞서는 권력을 꾀하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다시 한번 예수께서는 ‘예’나 ‘아니오’로 답하지 않으시고, 빌라도가 했던 말을 그에게 돌려주며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마태 27,3) 하신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그리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동시에 유다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고발하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잘 인지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마태 27,12.14) 예수님께서는 말이 없으시고, 침묵하신다. 그러나 그 침묵을 주의 깊게 듣는다면 이는 그 어떤 말이나 소리보다도 강력한 진실의 웅변이었다.

이어 빌라도는 예수님과 “바라빠라는 이름난 죄수”를 교환해 보려고 시도한다. 이방인이었던 빌라도의 아내도 “꿈”을 근거로 남편 빌라도를 만류하려 한다. 그러나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구슬려놓은”(마태 27,20) 군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태 27,22.23) 하고 외친다. 여기에 민중의 전체주의적인 부정적 힘의 원리가 작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혼란이 일어나는 중에 예수님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보호를 받지 못하고, 권한권자 빌라도는 군중의 외침에 동조한다. 군중은 분노하고 폭력의 희생양을 찾으며,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은 군중에 대한 두려움에 “어찌할 수가 없어”(마태 27,24) 짐짓 물러나며 손을 씻는다. 형의 집행 전에 폭력은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 모욕과 고문으로 분출구를 찾는다. 고발 내용에 따라 예수는 유다인의 왕으로 여겨졌고, 그 고발은 “진홍색 옷을 입히고,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씌우며, 오른손에 갈대를 들리는”(마태 27,28-29) 조롱의 패러디로, 그러나 훗날 그리스도인들이 절대 잊지 못할 표상으로 거행된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여느 사람의 아들이요 불의와 학대의 희생자로만 대할 뿐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재판 과정은 예수님을 “총독의 군사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가게” 넘겨주고, 성 밖에 있는 “골고타 곧 해골터라는 곳”(마태 27,33)에서 십자가에 못 박는 형의 집행으로 끝난다.

예수님은 “왼쪽과 오른쪽”에 “강도 두 사람”, 곧 죄인들과 범죄자들 사이에 못 박힌다.(마태 27,38) 그리고 예수님 머리 위에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 예수다.”라는 죄명을 붙임으로써(마태 27,37) 종교 지도자들에게서는 신성 모독자로 판정을 받고 실패한 메시아, 정치 지도자들에게서는 범법자로서 십자가형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면서 조롱의 패러디는 절정을 이룬다. “하느님의 저주받은 사람이요 저주받은 몸”(신명 21,23 갈라 3,13)으로서 수치스러운 노예에게나 가능했던 형으로 예수님은 처형된다.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서까지도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초기에 악마로부터 들었던 말이자 공생활 내내 들었던 말,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 27,40)라는 말, 권능을 발휘해 보라는 말,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면 자신도 구해보라”(마태 27,42)는 말을 듣는다. 하느님을 끝까지 믿었음에도 버림받은 것처럼 여겨지는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당신의 사명에 충실하시고 시편으로 기도하시며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시편 22,2) 하고 절규한다. 이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흔들림에서가 아니라 어둠에 빛을 구하는 기도였으며 최후의 고백이었다. ‘오, 하느님! 당신께서 버리신 것처럼 느낄지라도, 당신께서 침묵하시어도, 당신께서 멀리 계시는 것처럼 느낄지라도, 저는 당신만을 믿습니다.’ 하는 기도였다.

예수님의 죽음에 “성전 휘장이…두 갈래로 찢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마태 27,51) 이제 모든 사람에게 지성소가 개방되고, 예수님의 죽음이 죽음의 힘을 꺾으며 그분의 사랑이 우주의 중심에 뿌려진다. 그분의 사랑이 닿지 않는 곳은 이제 없다. 아무도 이를 알아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방인이었던 “백인대장” 홀로 십자가 밑에서 “몹시 두려워하며”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 27,54) 하고 고백한다. 예수님께서 진정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이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판가름 난다.

“저녁때가 되자”(마태 27,57) “예수님의 제자”인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과 여성 제자들이(마태 27,61)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 “새 무덤에 모셨다.”(마태 27,60) 그 처참한 죽음에서 백인대장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께 끝까지 충실하신 분을 보았으며, 그 충실을 끝까지 은총으로 살아내신 분을 보았고, 모든 인간을 위한 사랑과 희망을 보았다. 바야흐로 그 죽음은 부활의 징조요, 생명의 표징이었으니, 사흗날에 예수님 부활의 위대한 신비가 드러날 것이었다.(마태 28,1-10 참조) 이렇게 이방인에게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무덤 맞은 쪽에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앉아 있었다.(마태 27,61)” 예수님의 무덤 옆에서, 한없이 슬프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지키면서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묵상하고 있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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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벤지
2023년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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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무교절 첫날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때를 아셨습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코헬 3,1-­7)

하는 일마다 꼬이고 이런저런 우환이 겹쳐 고민하던 시절, 이 말씀에 눈이 번쩍 띄어 크게 위로받고 힘을 얻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코헬렛의 이 구절 덕분에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러나야 할 때, 침묵해야 할 때임을 깨달았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나니 한결 편안하고 일의 앞뒤 사정이 더 잘 보이더군요. 무모한 욕심도 사라졌습니다. 때를 알아차리는 것도 하느님이 주시는 지혜입니다.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18절) 예수님은 비운을 예감하시며 다가온 죽음을 내다보십니다. 죽어야 할 때, 잃어야 할 때임에도 도망치지 않으시고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18절) 하시며 차분히 떠나실 채비를 하십니다. 아버지가 정하신 때를 아들로서 순순히 받아들이십니다. 온전히 아버지께 순종하십니다.

파스카 만찬 준비는 오로지 예수님의 지시에 의존하고 있습니다(17-­19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19절) 무교절 첫날은 과월절 양을 잡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그날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십니다. 각오를 단단히 하신 듯합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16절) 믿는 도끼가 꼭 발등을 찍습니다. 가깝지 않은 사람이 하는 배신은 배신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받은 상처의 크기도 훨씬 작습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1절) 만찬 내내 누가 예수님을 팔아넘길지를 두고 밥상머리 대화가 온통 거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서로 자기는 아닐 거라고 믿고 싶어합니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3절) 같은 숟가락을 쓰고 먹던 밥을 나눠 먹어도 허물이 되지 않는 사이, 한솥밥을 먹는 식구가 배신을 합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원수가 아니었습니다. 동고동락한 제자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계획이 아닌 돈의 계획을 따랐습니다. 그 대가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24절)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라니….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그의 책임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유다의 행동은 앞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위(6­13절 참조)와 대조를 이룹니다. 은돈 서른 닢에 그는 혹독한 대가를 치릅니다(27,3 이하 참조).

유다가 될 사람은 처음부터 따로 있는 걸까요? 성경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우리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열둘 가운데 하나, 그렇다면 그 확률은 십이분의 일! 그러나 꼭 그런 계산법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손가락질하는 유다의 모습이 우리 모두에게 숨어 있다는 사실에 동감합니다.

예수님을 돈 주고 팔아넘기는 것만이 배신은 아닙니다. 세례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약속한 몸입니다. 신자라는 자격에 안도하고 그리스도인임을 자랑스러워하는 것만으로 제자의 본분을 다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돈과 신앙을 저울질하는 일은 유다의 배신을 능가합니다. 유다 같은 사람은 따로 있을 거라는 착각, 나는 아닐 거라는 오만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멀게 합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22절) 가슴이 서늘해지고 등골이 오싹합니다.

파스카는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살이하던 이집트에서 해방되던 밤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탈출 12장 참조). 이집트 탈출 때 파스카 양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이제 당신의 때를 알아차리신 예수님은 몸소 파스카 어린양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 대가로 하느님 백성에게 영원한 해방을 안겨줄 것입니다.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26절) 빵을 떼어 나누는 것까지는 유다교의 여느 식사와 똑같지만 뜻밖의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이는 내 몸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조금 살을 보태어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22,`19)라고 전합니다. 1코린 11,`24 역시 비슷하게 회상합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몸은 단순히 육체만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전부입니다. 이 두 본문 속에는 대속죄 사상이 확연합니다.

예수님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시며 제자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다짐하십니다. 예수님이 내던진 목숨 덕분에 우리는 새 생명을 얻습니다. 전부를 내주는 것, 살신성인은 사랑의 절정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시고도 절망하지 않으셨나 봅니다.

“받아먹어라.” 다 내주심과 동시에 예수님처럼 살도록 초대하십니다. 빵을 나누심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제자들과 공유하고자 하십니다.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성찬식 또한 예수님의 계획에 투신하라는 요청입니다. 새 생명을 나누어 가진 이로서 새 생명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이 그분 계획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그분은 폭력 없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십니다. 그동안 삶으로 말씀으로 보여주신 모든 것을 온몸으로 실천하시겠지요. 죽음과 부활이 이를 증명할 것입니다. 때를 아시고 당신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을 우선으로 삼으신 성스러운 결단과 제자들을 위하시는 고결한 자세는 세상 무엇보다도 값집니다.

매일매일 성체성사를 행할 때마다 예수님의 단호한 결단과 고결한 뜻을 기억하렵니다. 과분한 사랑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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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숙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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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묵상한 구절을 중심으로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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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15“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16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17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8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19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0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21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23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4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5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26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27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28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29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이제부터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30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

▪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홀로 주님이 머무르신 그 자리에 함께 머무르게 하소서.

▪ 세밀한 독서(Lectio)

오늘 복음 말씀의 처음과 끝에 수석 사제들이 나온다.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고, 또 실제로 죽이고야 만 사람들이다. 자신들이 가진 권력으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거부한 극단적 단절의 자세를 견지한 그들이었다. 이들 곁에 유다 이스카리옷이 있었다. 그는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이었고, 예수님과 한솥밥을 먹고 살을 비비며 살았던 제자였다(23절).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수석 사제들에게 팔아버렸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넘겨버렸다. 베드로라는 예수님의 제자 또한 배신의 길에서 비켜서지 않는다. 예수님의 심문 과정 곁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 했었다.

제자들 전체가 예수님이 겪으시는 죽음의 고통을 외면했다. 예수께서 당신의 넘겨지심에 극도로 고통스러워했을 때,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깨어있지 못한 제자들은 예수께서 온갖 거짓 증언 속에서(26,59), 온갖 모욕 속에서(26,67-68) 홀로 외로이 당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때, 그 어디에도 존재치 않았다. 죽음을 불러오는 권력과 폭력의 힘에 수석 사제, 유다, 베드로 그리고 제자들은 완전히 매몰되어 있었다.

예수님의 태도는 수석 사제, 유다, 베드로 그리고 제자들과는 사뭇 달랐다. 당신을 잡으러 온 이들에게 칼로 저항하던 사람에게 무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다그치셨고(26,52), 당신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빌라도 앞에서는 당신을 변호할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다(27,14). 다만 그분이 능동적으로 외치신 한마디 말은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였다. 시편 22편 2절의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소리쳐 부르건만 구원은 멀리 있습니다.” 라는 말씀을 예수께서는 당신의 지상 삶 마지막에 목놓아 외치셨다. 시편 22편은 ‘신뢰의 시편’이다. 하느님 아버지께 무한한 신뢰를 표현하는 시편저자의 처절한 외침을 예수께서 당신의 죽음 앞에서 되뇌이셨다.

수석 사제, 유다, 베드로, 그리고 제자들은 배신의 길을 걸었고, 예수님은 그 배신의 길 안에서 아버지께 대한 신뢰의 길을 묵묵히 만들어 가셨다. 화려할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는 수치심 가득한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세상 그 누구도 보여주지 못한 절대적 신뢰의 모습을 만들어 가신 것이다.

▪ 묵상(Meditatio)

요즘 들어 가톨릭교회 안에 갈등이 많다고 세상 사람들이 말한다. 가톨릭이라는 말마디가 보편성을 지향하는데, 갈등이라는 말이 가톨릭교회 안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가톨릭적이지 못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의 갈등은 대개 시대적 사명의 굴곡에서 벌어진 현상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대답을 위해 가톨릭교회의 갈등은 필요한 것이다. 남북이 갈라져 있고, 동서가 갈라져 있으며, 진보와 보수가 첨예하게 대립한 우리나라. 이 나라에서 우리 가톨릭교회는 ‘신뢰’의 길을 보여주어야 한다.

거룩한 독서는 편안한 자리에서 편안히 머릿속으로 하느님 말씀을 곱씹어내 마음의 평화를 염원하는 주술적 행위가 아니다. 거룩한 독서는 삶의 자리에서 내 몸짓과 실천으로 드러나야 하는 하느님 말씀의 확장이다. 내 말과 생각과 행동이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는 데 사용되는지, 아니면 서로에게 삿대질하며 갈라놓는 데 사용되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서로에게 삿대질할 바에야 침묵해야 한다. 마치 예수께서 당신의 심문 과정 중에 그러하셨던 것처럼⋯. 사랑의 행동은 절대적인 신뢰를 지향한다. 하느님께 온전히 나를 내어 바치듯 이웃에게도 그리하는 것, 이것이 우리 가톨릭교회가 지녀야 할 종교적 전위성이자 정치적 전위성이다.

▪ 기도(Oratio)

주님, 서로 보듬어 안게 하소서. 서로에게 서로를 내어 맡겨 서로 안에 당신이 함께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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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신부
  | 03.31
528 66.4%
우리가 지금 들은 수난사는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복음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말씀이 강생하여 사람이 되셨고, 그 말씀은 땅에서 하느님의 일을 성취하고 하느님에게로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서(55,10-11)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가...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듯이...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고 나에게로 돌아온다.” 요한복음서는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수난사를 기록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일을 다 이루고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시는 당당하고 의연한 예수님의 모습을 장엄하게 그려내었습니다. 이 수난사에 나타나는 예수님은 모든 장면을 주도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할 바를 다 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수난사가 말하는 예수님은 체포되면서도 의연하십니다. 무장을 갖추고 등불과 횃불을 든 경비병들과 군인들이” 그분을 잡으러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앞에 나서서 물으십니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는다는 그들의 말에 “내가 그 사람이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군인들은 뒷걸음을 치다가 넘어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재차 물으십니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는다는 그들의 대답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고 있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두어라.” 예수님은 체포되면서도 사람들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요한 10,11)이십니다. 당신의 생존이 위협 당하는 상황에서도 그분은 주님다운 의연한 모습으로 제자들의 안전을 도모하십니다.

대사제인 안나스 앞에서도 예수님은 당당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심문에 답하지 않으십니다. “나는 언제나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 내가 숨어서 말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라.” 대사제 앞에서도 예수님은 이렇게 의연한 주님이십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도 예수님은 그를 당당히 가르치십니다. “내 왕국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인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그러나 부하들이 싸우고 빼앗고 죽이면서 이룩하는 그런 나라의 왕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전혀 다른 질서로 운영되는 하느님 나라의 왕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나라는 “진리 편에 선 사람들의 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에 빌라도는 반문합니다. “진리가 무엇인가?” 천하를 호령하는 빌라도지만 그 진리를 모릅니다. 오늘의 수난사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새로운 나라를 시작하셨고, 그 나라의 왕이십니다. 그 나라에 실천되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 진리를 이 세상을 통치하는 사람들은 모릅니다. 예수님은 “오직 그 진리를 증언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서 8장에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여인을 돌로 치려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의 손에서 그 여인을 살려내신 이야기입니다. 그 여인을 용서한다고 말씀하신 다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십니다”(8,29), “여러분이 내 말에 머물러 있으면...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8,31-32). 예수님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은 사람을 용서하고 살리시는 분이며, 그 용서하고 살리는 일이 우리가 배워 실천해야 하는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오늘의 수난사는 예수님이 증언하신 진리는 바로 이 “용서하고 살리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에는 용서하고 살리는 질서가 지배하는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수난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당신 어머니와 당신이 사랑하시는 제자를 어머니와 아들의 인연으로 묶어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 제자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부언합니다. 요한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에 성모님은 이미 신앙인들의 마음속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복음서는 마리아에 대한 신앙인들의 각별한 애착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맺어주신 인연 때문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다음으로 하신 말씀이 “목마르다”라는 말씀과 “이제 다 이루어졌다”는 마지막 말씀입니다. “목마르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신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어느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요한 4,7). 그 여인과의 대화중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샘이 되고 거기서 물이 솟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요한복음서가 말하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샘”은 성령입니다. 오늘의 수난사는 예수님의 죽음 후에 성령이 오신 사실을 “목마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예고하였습니다.

“이제 다 이루어졌다”는 말씀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하고, 아버지께로 가시는 예수님이 당신의 개선을 알리는 장엄한 선언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최후만찬 하신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예수께서는 “그 동안 세상에서 사랑해 온 당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13,1)고 언급하였습니다. 그 끝까지 간 사랑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다 이루어 진 것입니다. 죽기까지 아버지의 일을 이루고 이제 아버지에게로 개선하신다는 선언입니다.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서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사랑은 자기 스스로를 내어주는 데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대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대들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13,35)라는 말씀도 전합니다. 사랑은 섬기고 살리고 용서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증언하신 진리이고 제자들이 배워서 실천해야 하는 진리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빌라도가 알아듣지 못하는 진리이고, 우리가 죽음을 넘어서 만나는 하느님의 진리이며, 이 세상 그리스도 신앙인들의 실천 안에 보이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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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 03.31
528 66.4%
고통이 가라앉자 구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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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시기 내내 포스트잇에 써서 기도서에 붙여놓고 보았던 구절이 있습니다. “밭은 기침 콜록이며 겨울을 앓고 있는 너를 위해….” 이해인 수녀님의 ‘촛불 켜는 아침’이라는 시의 첫 구절입니다. 콜록 콜록 사투를 벌이며 아파하시는 분들을 기억하면서 간절한 마음을 모아 봉헌한 사순절이었고 그 막바지인 성지주일에 와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고 완성된 ‘성주간’에 들어서게 됩니다.

■ 복음의 맥락

오늘 본문의 처음과 마지막은 배신과 음모의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첫 번째 인물로 나타나 수석 사제들과 은밀히 협상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마태 26,15) 긴 죽음의 여정이 끝난 결말 부분에도 악인들의 공모가 언급됩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사흘 만에 되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빌라도에게 가서 “셋째 날까지 무덤을 지키도록 명령”하기로 공모합니다.(27,62-64) 이처럼 고통과 음모, 배신으로 가득 찬 수난의 이야기를 마태오복음서는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로 이끌어 나갑니다.

단순히 사건을 시간상으로 배열하는 데에 집중하기보다 이 죽음이 구약성경에 이미 예고된 내용에 얼마나 충실히 부합하는지를 거의 매 구절마다 확인합니다.(26,24.31.53-54.56; 27,9-10 등) 심지어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십자가상의 절규도, 해면을 가져와 신포도주에 적셔 목을 축인 것도 모두 시편 22,2과 69,22의 실현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냅니다.

■ 배신에 대하여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주제는 ‘배신’입니다.

①유다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고발하지만 사실 이 사건은 돈 때문에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생긴 의심과 자기식의 판단이 문제였습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유다의 배신 직전에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와 그때 생긴 갈등을 묘사합니다.(26,6-23)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문학적 복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큰 무리를 대동하고 다가왔을 때 그를 “친구”로 부르며 말씀하십니다.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26,50)

②베드로와 제자들

겟세마니의 처절함 속에서도 마냥 잠에 빠져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26,40)고 호소하지만, 이후 여전히 잠들어 있는 제자들의 어이없는 태도를 그냥 놔두십니다.(26,44) 잠시 뒤 결정적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주님을 버리고 달아났다.”(26,56) 베드로는 그래도 멀리서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26,58) 하지만 세 번이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26,70.72.74)라고 부인한 후 닭이 울자 비참함에 슬피 웁니다.(26,75) 이후 베드로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그는 어디에서 숨죽이고 있었던 것일까요?

③빌라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의인’이며 ‘무죄한 사람’으로 고백한 사람이 있는데 빌라도의 아내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꿈 내용을 전하며 충고하고(27,19) 빌라도 역시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게 되지만 군중의 위협 때문에 사형을 선고합니다. 불의에 휘말려 정의를 배신한 것입니다.

④군중들

빌라도가 판결을 주저하자 유다인들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이 지겠습니다.”(27,24-25) 하며 단호히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합니다. 불과 며칠 전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21,9)라고 외치며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환호했던 이들이 그토록 빨리 변할 수 있다는 인간의 한계와 가벼움을 여실히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 자발적 사랑으로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다

이 모든 배신과 음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침묵을 지키십니다.

빌라도가 “매우 이상하게” 여길 정도였습니다.(27,14)

제2독서는
그 이유를 알려주는데,
모욕과 배신에 대응하는
예수님의 방식은 ‘낮아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원래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고
하느님과 같은 분”이셨지만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십니다.(필리 2,6-8)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시고
‘하느님과 같은 분’이 ‘종의 모습’을 지니시고
‘사람들과 같아’ 지셨다는 극명한 대조를 통해
그분의 자발적 낮아짐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1독서는
이런 낮아짐이야말로 하느님이 일하시는 절대적인 조건이 됨을 선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발적 희생과 내어줌으로 낮아지신 분에게 당신 말씀을 직접 듣고 전할 수 있는 혀와 귀를 주시고 “아침마다 일깨워”(이사 50,4) 주셔서 모든 고통과 모독을 감내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는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신다는 믿음으로
뒷걸음치지도 위축되지도 않는데,(50,5-6)

현재가 하느님의 주도권 안에 있다면
그 어떤 고통도 두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낮아짐을 선택하고
그렇게 낮은 자리에 조용히 침잠하고 있을 때
비로소 올라오는 구원의 맨얼굴이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행하는 동안 많은 계획들이 취소되고 일상이 고요히 가라앉자 떠오른 삶의 진실들이 그러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들 중 뜻밖의 깨달음으로 다가온 것은 ‘모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모두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 전쟁 같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과연 우리가 지킨 것이 사랑이었는지,
혹시 피로와 분노, 혐오로 비뚤어진 일상은 아니었는지,
하느님께서 나에게 부여하신 삶과 구체적 소명은 외면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외롭게 하면서 미안한 일만 더 많이 만든 삶은 아니었는지…. 어쩌면 바이러스만큼이나 무서운 치사율을 갖고 있던 것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의 자유를 박탈하고
노예화시키며 조정한 경쟁과 탐욕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정부의 지침은
2미터라는 물리적 간격을 요구한 것이었지만,

우리가 정녕 지키고 사랑해야할
소중한 대상에 대한 마음의 거리를 좁히고
가까이가게 했다는 점에서는
분명 하느님의 은총이며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계획하고 질주해야할 때가 아니라
사랑하고 토닥이며
생명의 꽃을 피울 때입니다. 부
활을 기다리는 시간, 봄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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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김혜윤 수녀
가톨릭신문 2020년 4월 5일
  | 04.01
528 66.4%
예루살렘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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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렇게 암나귀와 어린 나귀를 끌고 와서 그 위에 겉옷을 펴 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앉으시자, 수많은 군중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다. 그리고 앞서가는 군중과 뒤따라가는 군중이 외쳤다.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이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도성이 술렁거리며, ‘저분이 누구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군중이 ‘저분은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 예언자 예수님이시오.’ 하고 대답하였다(마태오 2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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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사람들에게 권세를 부리러 가신 길이 아니라, 사람들을 섬기려고
가신 길입니다(루카 22,25-26).
그 길에서 타고 가신 ‘어린 나귀’는 겸손과 평화를 상징합니다.
(반대로, 군마(軍馬)는 교만과 전쟁을 상징합니다.)
‘암나귀’와 ‘어린 나귀’가 함께 언급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올라타신 나귀는 ‘어린 나귀’입니다(마르 11,7).
‘암나귀는 그 어린 나귀의 어미였을 텐데,
어린 나귀가 어미 곁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아서
암나귀도 함께 끌고 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에 사도들과 신자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예수님께서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세상에 공개적으로
선포하면서 예루살렘을 정복하려고 들어가시는 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루카 19,11).
그러나 그 일은 ‘십자가 수난’을 향해서 가신 길이었고, 세상을
‘정복’하려고 가신 길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가신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높은 자리를 얻으려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기 위해서’ 따릅니다.

2)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행렬에 참여한 ‘군중’은,
사도들과 신자들(루카 19,37), 그리고 ‘축제를 지내려고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이었습니다(요한 12,12).
그들은 대부분 갈릴래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재판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군중은
사제들과 원로들이 동원한 사람들이었습니다(마태 27,20).
그들은 주로 예루살렘 사람들이었습니다.
‘군중’이라는 말만 보고서, 입성 때 ‘호산나!’를 외친 군중과
재판 때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고 외친 군중을
‘같은 군중’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두 군중은 ‘다른 군중’입니다.
그러나 사도들 가운데 하나였던 유다가 배반한 것처럼, ‘호산나!’를
외친 사람들 중에서 몇 명은 변절했을 수도 있습니다.
“호산나” 라는 말은, 원래는 “야훼여, 구원하소서!” 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만세!” 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는 “메시아 만세!” 라는 뜻이고,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는 “하느님 만세!” 라는 뜻입니다.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깔아놓은 것은 존경과 환영을 뜻합니다.
대사제나 빌라도가 재판 때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그들 입장에서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작은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뒤에, 이 일이 예수님을 두고 성경에 기록되고
또 사람들이 그분께 그대로 해 드렸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요한 12,16).”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라는 것을
드러내는 중요한 표징입니다.

3) ‘예루살렘 입성’은 ‘십자가 수난’으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부활과 승천’의 시작입니다.
언제나 항상 십자가는 목적이 아니라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신앙인들의 신앙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지만(마태 16,24), 누구에게나 십자가 자체는
신앙의 목적이 아니라 ‘방법’일 뿐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조금 더 무거운 십자가, 또는 조금 더 가벼운
십자가가 있을 수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각자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십자가를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십자가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7).”

이 말을 간단하게 ‘단련’과 ‘정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여서
지고 가는 것은, 십자가가 우리를 더욱 강하게 단련시켜 주고,
우리의 영혼을 더욱 순수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의 끝에서
‘승리, 부활, 구원,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4) ‘성주간’은 부활절의 전 단계이고,
부활절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처럼
감상에 빠져서 성주간을 슬프게 지낼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주셨음을 묵상하면서,
또 진심으로 회개하면서 성주간을 지내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절을 맞이한 뒤에도 십자가를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알고 있고
믿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십자고상을 벽에 걸어놓고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여정과 십자가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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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3년 4월 2일
  | 04.01
528 66.4%
이제 성주간이 시작된다. 전통적으로 이 주간을 “성대주간”(Hebdomada major)이라 한다. 왜냐하면 “이 주간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위대한 일들이 이루어기 때문이다.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죽음이 소멸되며 저주가 사라지고 악마의 노예살이가 종식되어 그에게 빼앗겼던 모든 것을 찾게 된다. 또한 하느님께서 인간들과 화해하시고 하늘의 문이 열리며 인간들과 천사들이 하나로 일치된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을 평화롭게 하신다.”(In Genesis Homil. 30 in PG 29,273-274)라고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말한다.

이러한 위대한 일들 때문에 이 주간이 ‘승리’의 장면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왕이신 그리스도를 공경하여 기념하는 ‘팔마 가지’의 축성과 행렬로 시작되지만, 이것이 또한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 예수님을 육체적으로 압박하는 음모로 바뀔 것이다. 오늘의 전례는 ‘무죄한 이’를 거슬려 자행되는 이유 없는 폭력으로 꾸며지는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승리’의 기치를 높이 들어 올리신다. 즉 십자가 위에 승리의 ‘팔마 가지’를 높이 매다신다. 이러한 이유로 독서들은 ‘주님의 수난’을 감격적인 뜨거운 사랑으로 되새기고 있다.

이사야 예언서 50,4-7
고통 받는 야훼의 종

제1독서는 ‘야훼의 종’의 셋째 노래의 일부만을 전해주고 있는데 여기서 야훼의 종은 굴욕적인 모욕을 당하고 있지만, 하느님께 대한 결코 흔들리지 않는 굳은 신뢰심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이사 50,6-7).

필리피서 2,6-11
십자가 위에까지 순명하신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찬가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주 강하게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참담한 ‘모욕’의 여정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능욕’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신성을 ‘비우시고’, ‘벗어버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렇게 하여 스스로를 낮추시는 마지막 단계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기 위해 받아들이신 ‘십자가의 죽음’에서 나타난다(6-8절). 그러나 바오로는 이 그리스도의 참담한 능욕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고 놀라운 부활의 영광을 통하여 ‘영광의 주님’으로 들여 높여지시는 것까지 내다본다.(9-11절)

마태오 26,14-27,66
마태오의 수난기

마태오 복음의 수난기를 전체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개념은 ‘자유’이다. 즉 예수께서는 이 ‘자유’로써 죽음을 맞으신다는 것이다.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이끌어 가신다. 당신이 원하셨다면, 피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칼로 대사제의 종의 귀를 쳤을 때 예수께서는,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 26,52-54)라고 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뜻’이다. 이 ‘뜻’ 때문에 자진하여 당신을 해치려는 사람들의 손에 당신 자신을 맡기신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39절). “아버지, 이 잔이 비켜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42절)

그리고는 세 번째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잠이든 제자들에게 깨어있지 못하느냐고 하시며, “이제 때가 가까웠다.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26,45-46)라고 하신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그 ‘때’에 맞춰져 있음을 본다. 그 ‘때’는 예수께서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될 ‘때’이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이 외에도 예수께서 현실에 이끌려 가시지 않고 자유롭게 다스리심을 알 수 있는 말씀이 여러 군데 나타난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26,24), 또는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단 말이냐? 예언자들이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26,55-56). 이것은 모두 아버지의 뜻에 ‘완전한 순명’(필립 2,8 참조)에서 나온 것이며, 그것은 죽지 않을 수 있지만 친구를 위해서 죽는 무한한 사랑에서 나온다. 이러한 사랑의 표지로 나타나는 마태오 복음이다.

또한 마태오 복음의 수난기에는 그렇기 때문에도 예수님을 ‘죽을죄인’(26,66)으로 만들려고 애를 쓰지만, 그분의 ‘무죄하심’이 명백하다는 것이다. 빌라도의 아내는 남편에게 무죄한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하고(27,19), 빌라도는 손을 씻으며 책임을 회피하고, 군중은 책임을 자기들이 지겠다고 한다(27,24-25). 이렇게 무죄한 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함으로써 그 잘못에 대한 선언을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자신들에게 스스로 하고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길을 달리함으로써 더 이상 하느님의 백성이 되지 못한다. 그들의 자리를 교회가 대신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백인대장의 고백이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백인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이들이 지진과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며 말하였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27,54).

여기서는 또한 인간들의 잘못이 역설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빌라도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수님을 사형장에 내몰고 있지 않은가? 대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조차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깨닫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분을 단죄하고 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유다는 예수님을 30은전에 팔았고, 베드로는 큰 소리를 치고도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쳤다.

유다처럼 돈을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기 자신마저도 팔 수 있는 것이며, 스스로 목을 맨 절망적 행위는(27,5) 지나치게 자신의 목적에만 눈이 어두웠던 행위의 반작용이다.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은 아직도 용기가 부족하다. 빌라도의 모습은 진리나 정의보다 자신의 안이함을 추구하는 양다리를 걸친 자들이며, 많은 형제들의 고통스러운 상황 앞에서 맥을 놓고 있는 사람들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그분과 더불어 “단 한 시간도 깨어있지 못하는”(26,40) 사람들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이 수난사는 우리의 문제가 아닌가? 그 비극적 사건의 장본인들이 우리이기 때문에 수난사의 주역들이 무대 위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 나 자신이 하느님과 형제들 앞에 어떠한 자세로 있으며 살아가고 있느냐에 따라 수난의 비극을 재현하고 있을 수도 있고,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삶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성대주간을 지내면서 참으로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순간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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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23년 4월 2일
  | 04.02
528 66.4%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과 허세 때문에 창조주의 명령을 어겼으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시면서 악마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의로움의 지배가 아담과 하와로 상징된 인류에게 적용되었던 죽음을 통한 지배보다 훨씬 더 강하다고 합니다(사순 제 1주).

하느님을 올바르게 섬기길 원한다면, 아브람처럼 이제껏 살던 생각과 행동에서 벗어나라고 합니다. 이런 떠남과 벗어남은 거룩하게 변화될 수 있음을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 하얗게 변화되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생명과 불멸의 은총을 보여주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사순 제 2주).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구원해주셨건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잊어버린 이스라엘은 불평불만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과 긴 대화 끝에 사마리아 여인은 그분을 사랑과 자비로 우리를 찾아오신 구원자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속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사순 제 3주),

하느님과 우리가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잣대가 얼마나 다른지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임금으로 삼을 때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태생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시면서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시려고 오신 분이심을 밝히십니다. 세례를 받은 이들은 그리스도를 입었으므로 분별력을 갖추고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빛(향기)을 반사해야 합니다(사순 제 4주).

하느님의 말씀에 굶주린 백성은 마치 죽어서 바빌론 계곡에 흩어져 있는 뼈들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새 영의 숨)을 넣어주셔야만 죽어 흩어졌던 이들의 뼈들이 힘줄로 다시 붙고, 살이 오를 것이며, 그들이 살아나 제 발로 걸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라자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병을 앓았습니다. 바빌론에 유배(무덤)갔던 유다인처럼, 돌같이 딱딱하고 차가운 마음을 지녔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병이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이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 때문에 죄에서 해방되었고,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사순 제 5주).

하느님께 반항하지 않고 인간들의 폭행과 조롱도 꿋꿋하게 견뎌낸 주님의 종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이제 십자가 위에서 백인대장의 입을 통하여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이 확인되었습니다(마르 15,39).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큰소리로 부르짖으신 것은 버림받았다는 저항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명을 마치셨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받아주실 것에 대한 희망으로 확고한 신뢰를 고백하는 기도(시편 22,24-32)를 하셨는데, 첫 구절만 들렸기 때문에 마치 하느님께 저항하듯이 울부짖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히브리어로 “당신은 저의 하느님이십니다!”(Eli atta: 시편 22,2)라고 하신 말씀을 로마 병정들은 마치 아람어로 “엘리야, 오소서!”(Elia ta)라고 하신 말씀으로 알아들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더불어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진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와 같이 하늘이 열렸으며, 우리 구원을 위한 하느님 아버지의 역사하심(개입)이 새롭게 시작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성주간은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낼 것을 묵상하고 다짐하는 기간입니다. 특히 성삼일의 전례에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묵상할 수 있다면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 마음에 들어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말씀이 머무르게 할 자리가 있을 때, 그리고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성삼일 전례에 적극적으로 함께 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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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방효익 바오로 신부
2023년 4월 2일
  |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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