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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과연 나는 보았다.”
조회수 | 2,473
작성일 | 08.01.18
어느 날 한 노인이 강을 건너려고 서 있었습니다. 날씨는 추웠고 강에는 다리가 없었기 때문에 노인은 무엇인가를 타고 그 강을 건너야만 했습니다. 노인이 오랫동안 강가에 서서 기다리는데, 마침 말을 탄 사람들이 줄지어 지나갔습니다. 네 번째가 지나가고 다섯 번째 말을 탄 사람이 지나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노인은 여섯 번째 말을 탄 사람에게로 다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나를 저쪽까지 좀 태워다 주실 수 있겠소?” 그러자 그 사람은 선뜻 말했습니다. “예, 타시지요.” 강을 건넌 후 노인이 말에서 내리자 기사가 물었습니다. “노인장께서는 왜 저의 말을 태워 달라고 하셨습니까?”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앞선 사람들이 타고 있는 말은 크고 건장하여 안심할 수 있었지만, 말 주인의 눈을 보았을 때 그들에게는 사랑이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타고 있는 말은 보잘 것 없어 보였으나, 당신의 눈을 보고는 금방 사랑과 동정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라면 틀림없이 나를 건너편까지 태워다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건너가기 위해서 는,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진실된 협조자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보이는 것을 바라보고 믿는 육적인 눈이 아니라, 그 이면의 것을 볼 수 있는 눈 즉, 영적인 혜안(慧眼)을 갖추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혜안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 주실 협조자를 잘 알아볼 수 있을 것이며, 그를 따를 때 안전하게 하느님 나라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 29)라며 예수님께서 구원자임을 한눈에 알아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처음부터 그러한 혜안이 생긴 것이 아니라,“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일러 주셨다.”(요한 1, 33)라고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가난하게 고행을 하면서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였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삶 안에 놓여있는 여러 가지 고통을 광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며,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살아갈 때, 그 안에서 “하느님의 어린양”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언하며, 예수님을 따라 그들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건너갈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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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승남 세바스티아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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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엇으로 사십니까?

한국 갤럽 조사에 의하면 올해 우리 나라 국민들의 최대 소망은 본인과 가족의 건강(26%)보다도 경제적인 안정(38%)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반면에 가정생활의 화목은 1.6%, 삶의 보람을 얻는 것은 0.2%,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은 0.2%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우리 나라의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원자 되시고 인류의 구세주 되심을 확신하며 생활하는 우리들에게는 올해의 소망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신앙 안에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으며, 믿음으로 충만한 성가정을 이루는 것이 최대소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톨스토이의 단편작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천사에게 3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사람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천사는 사람 안에는 사랑이 있고,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생사(生死)의 주권(主權)이며,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고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생명의 주님이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유일한 길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확신하며, 그 사랑 안에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믿으며 늘 체험토록 하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령이십니다. 아멘.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성령이 충만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성령은 바로 하느님의 거룩한 사랑의 영이십니다. 그 성령 안에서 성자는 혈육을 취하시어 사람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그 성령 안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종이 되셨습니다. 그 성령 안에서 당신의 사명을 깨달으셨습니다. 그 성령 안에서 제자들과 죄인들, 병자들, 친구들, 반대자들을 만나시고 동고동락하셨습니다. 그 성령 안에서 기도하셨으며 마침내 죽으시기까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기까지 하느님 아버지께 사랑으로 순종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세상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당신의 아드님을 성령으로 다시 부활케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세례를 받은 자에게는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예수 그리스도처럼 매일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죽으며, 성령으로 부활합니다. 당신은 무엇으로 사십니까?

조한영(야고보) 신부
  |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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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영혼 구하는 삶 살아야

모든 분이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맞이하며 기쁜 성탄 시기를 보내셨으리라 믿습니다. 여러분이 기쁘고 감사한 성탄 시기를 보내도록 기도했으니 말입니다.

이제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행하신 바를 묵상하는 연중 시기입니다. 이 시기 동안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하느님의 아들로서 가르치시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신 구세주로서의 참모습을 묵상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세례자 요한을 통해 드러내는 장면이 전개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예수님께서 죄를 없애시러 오신 하느님의 어린양이며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복음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돈 많이 버는 부자로 만드시려는 것도 아니요, 머리를 좋게 해 공부를 잘하여 일류대학에 들어가 좋은 직장을 갖게 하기 위함도 아니며, 멋진 배우자를 만나 결혼해 자녀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또한, 우리를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게 하려고 오신 것도 아니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원하는 세상의 복을 내려주러 오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세상의 복을 채워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적합한 사람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상황에서든 가르치셨고, 병약한 이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며 다시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당신 말씀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과 행복이 선물로 주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지난 연말에 한 해 동안 있었던 일을 적어보며 한 해를 정리하였습니다. 맡은 직책들, 행한 일들, 많은 사람과의 만남, 많은 사건 등. 그중에서 내 영혼에 가장 잘한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저 없이 ‘고해성사’라고 쓸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크게 생각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 해를 잘 마무리하게 해 주심에 감사하는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계속해서 ‘내 영혼을 위해 가장 잘한 일’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새해를 계획하면서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하고, 나중에 하느님 앞에 떳떳하게 내놓을 것을 생각하니, 가장 중요한 것은 ‘내 깨끗한 영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많은 일을 맡고 있고, 그것을 잘 행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은 내 영혼을 책임질 수 있는 것이 아닌, 부수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주 복음을 묵상하며, 천주교 요리문답 제1번이 기억났습니다. 문: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났느뇨?” 답: “사람이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났느니라.”

제가 왜 지난 한 해 동안 내 영혼에 가장 잘한 일을 고해성사라고 쓸 수 있었을까요? 성직자로서 세상에 그리 몹쓸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하느님께 ‘…같은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고, 하는 일마다 잘되게 해 주시며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행한 것이 많건만, 다른 어떤 것보다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은 일이 기억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나의 내면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죄 없이 당당히 잘 사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의 내면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내밀한 원의를 아시고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영혼 내면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외치는 ‘순수하고 거룩한 하느님의 자녀로 살면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며 은총과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기도’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이며,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오신 것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세례자 요한이 외친 ‘세상의 죄를 없애시러 오신 하느님의 어린양’은 우리 영혼에게 가장 필요한 분이시기에 오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현재 자신의 영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최인각 신부
  |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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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이사49,3).”성경에서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뽑으신 백성으로서 자비의 사랑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이스라엘만이 아닙니다. 이레네오 성인의 말씀대로 당신의 모상대로 지어진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길 원하십니다. 아니, 이미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랑스러움과 선함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나약하고 부족한 모습을 통해서도 하느님은 자비와 사랑을 한없이 베푸심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자신만큼 하느님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만든 그 어떤 것도 우리 존재만큼 하느님의 자애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렇게 모태에서부터 하느님 영광의 빛으로 불림을 받은 우리는 거룩한 사람, ‘성도(聖徒)’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또 그 뜻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귀한 빛으로서의 소중한 삶을 사는 성도입니다. 그 삶의 모범을 하느님이시지만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비와 사랑으로, 특별히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난 지극한 자비와 사랑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본받아 성모님을 비롯한 수많은 성인들이 하느님의 영광으로 살았고, 하느님의 영광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으며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자비와 사랑으로, 겸손함과 온유함의 마음으로 가족과 형제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품어주면, 그들은 자비와 사랑이 지극하신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 입니다. 그들은‘과연 나는 보았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이 지금 이곳에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느님의 말씀이 정녕 우리와 함께 계시다(요한 1,29.34).’하며 하느님 영광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주간도 우리가 당신 영광을 드러내는 빛으로 살도록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우리 모두 기쁜 마음으로 응답합시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시편 40,8-9).”그러면 좋으신 하느님은 우리가 가는 곳마다 자비와 사랑의 빛이 드리워지고 구원이 다다르도록, 세례 때 주신 은총과 평화의 성령을 우리 위에 더욱 풍성하게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임을 언제나 어디서나 기억합시다. 하느님께서 담아주신 하느님의 영광, 그 풍요로운 사랑과 자비의 빛을 우리의 구체적인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봅시다. 그러면 불신의 어둠에 있던 우리의 가족과 형제들도 그 빛을 받아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받드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1코린 1,2)의자비와 사랑의 빛으로 우리가 사는 곳 어디든지 환하게 밝아지게 될 것입니다. 아멘.

▤ 수원교구 강희재 요셉 신부 : 2017년 1월 15일
  |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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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성령은 하느님의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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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한 시골마을에도 평범한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 출근길에 올랐습니다. 버스는 사람들을 가득 싣고 비탈길을 조심스럽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운전기사는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커브가 5개나 남았다는 표지판이 보였습니다. 운전기사는 능숙한 솜씨로 커브를 틀었고 이제 곧 오르막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길 한 가운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습니다. 버스 기사는 경적을 울렸고 아이들은 재빨리 길가로 피했습니다. 한 아이만이 신발이 벗겨진 채 버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운전기사는 아이를 피하던지 절벽으로 차를 몰아붙이던지 결정을 내려야했습니다.

결국 아이를 희생시키기로 결심을 하였고 아이는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습니다. 비탈에 차를 세워둔 버스 기사는 황급히 뛰어내려 아이에게로 달려가서 아이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버스에 탔던 사람들은 운전기사를 탓했습니다. 운전 실력도 없고 인정사정도 없는 인간이라며 심지어는 고발하겠다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버스 기사는 눈물을 흘릴 뿐이었습니다. 버스에 함께 탔던 한 노파가 말했습니다.

“그럼, 어쩌겠습니까? 우리가 다 죽는 편이 낫습니까? 저 운전기사는 우리 대신 자신의 아들의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그제야 운전기사가 아이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며 흐느끼는지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아들아, 내 아들아, 아빠가 미안하다! 흑흑!”

누구도 더 이상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이 먼저 등장합니다. 그도 세례를 주고 있었습니다. 세례는 물로 씻는 정결례가 발전한 형태라 볼 수 있습니다. 죄를 없애는 것이 세례입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어린양”을 소개시켜 줍니다. 요한의 세례는 참 세례를 주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볼 수 있게 하는 씻음인 것입니다.

요한에 따르면 하느님의 어린양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은 성령을 받은 분이셔야만 합니다. 어떤 인간이든 받은 것만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물로 세례를 주라고 요한을 보내신 분께서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를 통해 씻겨야 하는 인간의 죄는 무엇일까요? 새로 태어나기 위해 벗어버려야 하는 인간의 옛 본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가 부모의 사랑을 받고 부모를 알게 되면 기어 다니고 싶은 본성을 벗어버리고 걷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만약 두 발로 걷게 된다면 옛 본성에서 깨끗해진 것입니다. 이를 위해 부모의 희생이 요구됩니다. 부모의 희생이 아이에게 믿음을 주어 옛 본성을 정화한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와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인간으로 살고 싶은 본성을 벗어버리지 못하면 하느님의 본성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바로 인간의 본성을 벗겨버리는 힘이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하느님의 희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에서 사무라이가 되고 싶은 천민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민은 사무라이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성을 짓는 성주에게 가서 자신이 그 기둥에 들어갈 테니 자신의 아들을 사무라이 교육을 시켜달라고 했습니다. 성을 지을 때 기둥에 산 사람을 넣고 지으면 그 성이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아이는 그 성에서 사무라이 교육을 받았고 귀족 아이들의 괴롭힘에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어머니가 들어가 계신 기둥을 부여잡고 울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에서 나오는 그 피는 도망치고 싶은 그 아이의 자아를 죽여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사무라이로 새로 태어납니다.

이전 본성을 죽일 수 있는 힘은 ‘피’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인간의 본성을 씻어주시기 위해 피를 흘리셔야 했습니다.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바다를 왜 ‘홍해’, 즉 ‘붉은 바다’라고 하였을까요? 옛 본성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느님의 어린양의 ‘피’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닷물은 십자가의 신비를 상징하고” 그 물에 세례를 받는 것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함을 의미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20항)고 가르칩니다. 누구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로 이루어진 그 붉은 바다를 건너면 옛 본성이 그 피 속에 수장되고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지닌 인간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하늘나라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들의 옷을 깨끗이 빤 정결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묵시 7,14 참조). 예수님은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냥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라고도 말합니다(1코린 12,13 참조).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로 세례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작용으로 교회 안에서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도록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았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981항)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피가 곧 성령이고 그 성령으로 인간의 옛 본성인 죄가 씻기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할 때 성령으로 죄가 사해집니다. 그 성령이 바로 그리스도의 피임을 안다면 비로소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 할 때마다 자신의 자녀의 팔을 하나씩 잘라야 한다면 죄를 지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 사함의 값이 그리스도의 목숨 값임을 믿어야합니다. 그래야만 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성체가 그리스도의 몸임을 믿어야만 그 효과를 발휘하듯 성령도 그리스도의 피임을 믿어야만 우리가 정화됩니다. 기도를 통해 오시는 성령의 은총이 하느님의 피 흘리심임을 믿으며 “아멘!”합시다.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물과 피와 성령은 하나로 모아집니다(1요한 5,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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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2020년 1월 19일
  |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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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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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리 채프먼 박사의 『5가지 사랑의 언어』라는 책을 살펴보면, 인간관계 안에는 사랑을 표현하는 언어가 있으며 그것은 ‘인정의 말’, ‘함께하는 시간’, ‘선물’, ‘봉사’, ‘스킨쉽’ 다섯 가지로 정의 내리고 있습니다.

‘인정의 말’은 행동보다 말이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애정과 칭찬의 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죠. 그래서 “사랑해”, “고마워”, “잘했어” 등의 말을 듣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표현하지 않아도 다 알겠지?’라는 생각보다 적극적인 말로 표현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함께하는 시간’은 절대적인 시간뿐만 아니라 관심사를 공유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하고 함께 공유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나아가 단순하게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함께 하고 있지만, 다른 것에 집중하거나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을 때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선물’은 물건을 통해서 사랑을 확인받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선물은 값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물을 준비하는 노력과 마음처럼 선물 이면의 것을 통해 사랑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기념일을 잊는 것은 커다란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선물을 받을 때는 커다란 반응을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봉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식사, 설거지, 청소 등과 같이 노력과 수고가 필요한 일을 해주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알아서 챙겨주는 사람에게 커다란 사랑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자발적으로 임하는 모습은 커다란 표현이 됩니다.

‘스킨십’은 신체적인 접촉을 의미합니다. 서로의 손을 잡아주거나 포옹을 하는 것은 상대에게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사랑하는 관계에서의 스킨십은 가장 쉬운 표현 방법의 하나지만, 상대가 원치 않는 스킨십은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이처럼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 중 가장 선호하는 나의 모습을 통해서 상대방과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령, 나는 ‘함께하는 시간’을 원하는데, 상대방은 ‘스킨십’을 원한다면 오해가 생기게 되고 사랑이 식었다고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과 내가 보이는 모습이 다를 때, 우리는 올바른 사랑의 관계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내가 원하는 사랑의 언어만 내세우며 일방적인 사랑을 이어나간다면, 그 관계는 결국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나 하느님과의 관계는 모두 쌍방일 때 의미가 있습니다. 상대방의 언어를 이해하고 노력하는 모습이 좋은 관계로 변화시키는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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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윤호 윤호요셉 신부
2023년 1월 15일 주보
  |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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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사라질 것들이 말끔히 사라졌을 때 내 증언은 참됩니다.

소개하고 사라지다(요한 복음 1장 29-34절)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지도록 힘껏 가리키는 것이 자기 사명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라질 때가 온 줄을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이것은 호흡처럼 바쳐온 그의 기도였습니다. 받은 사명에 대한 충실함에서 흔적 없이 사라질 줄 아는 힘이 나옵니다.

“진리가 무엇이오?”

빌라도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진지한 열의가 있어서 묻는 것은 아니고, 시끄러운 일을 발생시킨 이 사내가 로마에 위협이 될 임금인지 아닌지가 궁금해 시들한 질문을 던지는 중입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 우리는 진리가 누구신지 압니다. 예수님은 ‘육화 강생’의 이유가 진리를 알게 하고, 진리에 속한 이들을 불러 모으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단 증거이고, 높이 들리심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는 십자나무의 열매이시지요. 그분의 삶으로 들어가 자신을 단련하는 사람들이 제자들입니다. “진리가 무엇이오?” 이 질문을 끌어안고 예수님만 바라보라고 가리키고 싶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께 매혹되었기에 이것을 실천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삶으로 들어갔기에 저것은 하지 않습니다.”

이런 충성스러운 고백들이 모여 진리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소개하고 사라질 힘도 갖추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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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현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신부
생활성서 2023년 1월 15일
  |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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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건 몰라도 ‘사랑’은 가르치며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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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행복하지 않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행복일까요? 제가 지금까지 얼마 안 되는 시간 살아오며 깨달은 것은 사랑할 때, 그래서 사랑 받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한 여대생이 워렌 버핏에게 성공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워렌 버핏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나를 사랑해줬으면 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면, 그게 성공입니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사랑해줄까요? 사랑은 주는 만큼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먼저 주시기 위해 인간이 되어 우리 양식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증가시키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받고 구원받습니다. 세상에는 법칙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25,29)

복음에는 이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가지려면 먼저 더 가져야 합니다. 더 가진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감사하면 가진 것입니다. 돈이 없어도 있는 것에 감사하면 더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진 자의 특징은 기쁘게 나누어준다는 데 있습니다. 사랑은 어떻게 나누어줄까요? 다른 이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바로 하느님 사랑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증언하면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사랑을 더욱 충만히 내려주십니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내용의 복음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증언하였지만, 처음엔 알지 못하고 증언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말합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31)

알지 못하는 분을 증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증언하는 중에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알아볼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요한 1,33)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 복음 선포 소명을 받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다고 믿음이 강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해야 합니다. 해야 어렴풋이 아는 분을 확실히 알게 됩니다.

저도 대학생 때 수녀님의 강요에 못 이겨 교리교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교리교사를 하다 보니 내가 가르치는 분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었습니다. 그 알고 싶은 마음이 하.사.시.를 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명확하게 알게 되었고 주님의 부르심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더 폭넓게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함께 성장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을 ‘깔때기 효과’, 혹은 ‘싱크대 효과’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한 곳에 무언가가 빨려 들어갈 때 주위에 있는 것들이 그곳으로 모입니다. 주님의 은총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내가 좋은 곳으로 당신 은총을 내보내려 할 때 은총은 그곳으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주려고 하는 자가 받는 법입니다.

우리가 아는 게 없다고 선교하지 않으면 아는 것마저 잊어버립니다. 가진 사랑마저 빼앗깁니다. 그러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억지로라도 선교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이 차게 됩니다.

제가 보좌 신부 때 사제인 제게 선교한 할머니가 계십니다. 그 할머니는 저의 미사를 6개월씩이나 나오셨지만, 저를 알아보지 못하고 되려 선교하셨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할머니는 모든 사람이 사제일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게 됩니다. 이것이 선교하는 사람이 받는 은총입니다. 김하종 신부도 그랬고 이태석 신부도 그랬으며 마더 데레사도 그랬습니다. 모두가 선교하려고 하다가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마련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하느님 지식과 사랑은 가르쳐야 늡니다. 가르치면서 자신의 부족한 면을 발견하게 되고 보충하고 더 배우게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전하는 이들이 당신을 모른 채 선교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 마음을 주시고 마치 모세의 지팡이처럼 힘을 실어주십니다.

하느님을 만나지 못해서 전하지 못한다고 하지 말고 전하지 않기 때문에 만나지 못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모든 이들의 스승이 되도록 파견하십니다. 누구든 사랑의 교사가 되도록 합시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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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2023년 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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