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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정성을 다한 기다림
조회수 | 2,431
작성일 | 08.01.18
오늘은 연중 제2주일입니다. 아쉬운 마음으로 정리했던 2007년, 그리고 들뜬 희망으로 시작한 2008년. 분주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이제는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메시아로 증언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는 곧 그분이 속죄의 양이심을 드러내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우리가 저지른 죄를 없애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께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된다(1요한 3,3)’는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죄의 사라짐을 경험하고 깨끗해집니다.

이렇게 우리 죄가 사라지고 순결해 지는 것은 자연스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사랑에 힘입어 하느님께서 그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눈감아 주심에서 올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선행을 행하고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아무런 죄도 짓지 않는 것은 바로 내가 “그래 오늘부터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야겠다.”는 내 자신의 결심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에 힘입어야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태도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인기 절정에 있던 요한이 자기보다 훌륭하신 분,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알아 뵙고, 그분을 증언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기 본분을 제대로 알고, 그분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수많은 죄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시는 그분의 은총을 얼마나 간절히 바라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반성해야 합니다. 준비 없이, 그리고 습관적으로 모시게 되는 주님의 몸인 성체는 바로 우리를 지켜주는 가장 큰 생명의 양식입니다.

주님을 모시고자 간절히 기다리며 준비하는 모습은 환자 봉성체를 하는 날 주님을 맞이하는 분들의 모습을 통해서 가슴깊이 느껴보곤 합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 힘겨워 보이는 많은 교우분들께서 성체를 받아 모시고자 아침 일찍부터 몸단장을 하고, 하루 종일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모습은 바로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기다리던 간절한 모습과 같음을 자주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맞이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준비 없는 기다림과 자신의 온 정성을 다해 그분을 맞아들이기 위한 기다림에는 분명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은 사랑의 원천이신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간절히 준비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사랑을 얻고,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이미 다가와 있는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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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규남 마티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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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오늘은 연중 제2주일입니다. 이제 교회 전례는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여러 이유 중에는 일상 생활이 바쁜 우리에게 충실한 삶을 살게하는 지표와 무언가 새로운 의미를 위해 삶을 변화시키고 투신하게 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 전례가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옴은 바쁜 일상에 매여 앞만 보고 달리는 신앙인들의 삶에 새로운 자극을 주고 하느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예언자 이사야는 야훼 종 노래에서 “나는 야훼의 종을 만국의 빛으로 세운다. 너는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이르게 하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실상 그 야훼의 종은 우리가 앓는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고, 우리의 반역죄를 대신 쓰고 사형을 당하였으며, 자기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으며,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자기의 잘못이 아니라, 이 세상의 죄를 뒤집어 쓰고 이를 대신 속죄하기 위하여 조용히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죽어가는 고난받는 야훼의 종, 그래서 만국의 빛, 구원의 인도자의 출현을 예언합니다.

오늘 요한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메시아로 증언합니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이는 곧 그분이 속죄의 양이심을 드러내는 말씀이었습니다. 구약성서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집트를 탈출하여 가난안 땅으로 이동할 때 그들은 40여년 동안 사막을 헤매면서 양떼와 가축을 이끌고 천막을 치면서 옳겨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천막 주위에 사나운 맹수들이 다가 와서 위협하며 괴롭혔는데 그 때마다 사람들은 염소나 양을 한두마리 맹수들에게 보내어 그들이 조용히 물러나게 하였습니다. 이때 내보내어지는 양이 속죄의 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매년 7월 10일이 되면 집집마다 자기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양을 잡아바쳤는데 이 때 죽이는 양이 인간의 죄를 위해 대신 피를 흘리고 죽는 속죄의 양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바라봤던 예수님은 바로 속죄의 양이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성령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러 오신 하느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셨습니다. 요한은 놀랍게도 성령이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시는 광경을 보았고, 그분이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라는 사실을 선포하였습니다. 또한 그 같은 선포는 사실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도 예수님을 이런 분으로 봐야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요한처럼 바라보는 눈을 가진다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에 겨운 삶을 살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눈을 가지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살며, 마음의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겉모습이 아니라, 듣고 바라보는 겉모양이 아니라 그 안에 잠재되어 있는 실재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혹시 우리가 예수님을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마술가로, 놀라운 언변으로 군중을 사로잡는 인기인으로, 나로서는 감히 하지 못할 얘기를 겁없이 하신 영웅으로, 위대한 현자 중의 한분으로, 그저 복이나 듬뿍 내려주는 고마운 신령님 정도로 보는 것이 아닌지?

자신의 죄는 고스란히 덮어 두고, 세상의 죄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며 점점 죄에 무감각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크게 잘못보는 것이 틀림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분을 통해서 성령으로 새로 태어날 마음조차 가지지 못한다면 더욱 큰 잘못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을 바라보며서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고,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그분이 바로 하느님의 어린양이시고, 성령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과감히 선포하도록 합시다.

한관우 신부
  |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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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의 인상은 매우 인상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었어요. 코는 넓고, 입술은 두꺼웠습니다. 그리고 눈은 매우 작았습니다. 더군다나 팔다리는 키에 비해서 무척이나 길었지요. 바로 이러한 외적인 외모 때문에 소년은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흉한 모습으로 태어나게끔 한 부모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차츰 이 소년은 문학에 대한 재능을 조금씩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남들보다 뛰어난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소년을 변화시키기 시작했지요. 그는 외모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대신 자신의 이 재능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소년은 실제로 어른이 되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이 소년은 누구일까요? 바로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누구는 많이 가지고 있고, 또 누구는 적게 가지고 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요. 그런데 그 차이가 삶에 있어서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적은 사람일수록 지금이라는 현재를 보다 더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은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내쳐서 지금과 같은 고통과 시련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기에 남과는 다른 재능을 주셨다는 것.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쁘게 살 수 있도록 나를 창조하셨다는 확신이 있다면 우리들은 삶 안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두려움의 크기와 그 수를 줄여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향해 이러한 증언을 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하느님의 어린양 모습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즉, 고통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억울한 모습과 세상에 새 활력을 일으킬 하느님 종의 모습이지요.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아드님이 오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지요. 그보다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받으시는 동시에 이 세상에 새 활력을 일으키신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분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렸던 메시아의 모습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분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고,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돌아가시게 하는 엄청난 불충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지요.

세례자 요한이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셨을까요? 아니면 그냥 느낌에서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판단력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세상의 어떤 악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를 갖출 수가 있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시련에 쉽게 좌절합니다. 그러나 이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충분히 극복이 가능합니다. 부족한 나의 믿음을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주시길 기도합시다.

조명연 신부
  |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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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아침, 성당에 가려고 준비를 하던 아내가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천 원짜리 몇 장만 주머니에 넣고 지갑 자체를 서랍에 넣어둡니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이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친구 만날 때에는 제일 먼저 챙기던 지갑을 성당 갈 때에는 왜 두고 가는 거야?”

“지갑을 가지고 가면 봉헌 성가로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라고 할 때 너무나 괴롭더라고.”

아내의 이 대답에 남편이 걱정스러운 듯이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예수님도 당신 기도 소리 듣고 괴로울까봐 응답 주머니를 하늘에 두고 오시면 어떻게 하려고 해?”

받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주는 데에는 너무나도 인색한 우리들의 모습을 꼬집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받는 것, 소유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다보면 다른 사람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는 곧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도 제대로 볼 수 없지요. 왜냐하면 내 안에 하느님의 모습이 있는 것처럼, 다른 이들 안에서도 하느님의 모습은 분명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하느님께서는 자기만을 위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인 성녀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하느님을 발견했던 성인 성녀들은 항상 자신이 아닌 이웃에 관심을 두고 있었고, 이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학생이 버스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버스에 함께 타고 있었던 할머니께서 자기 옆에 있는 부추 다발을 두고 내린 것입니다. 이 학생은 착한 행동을 하려고 창문을 열고 “할머니, 여기 부추여!”하면서 부추 다발을 창밖으로 던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옆에 계신 아주머니께서 황급히 말씀하십니다. “그거 내건데…….”

제대로 보지 않았기에 원 주인의 것을 창밖으로 던지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하느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않으면 어리석은 행동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세례자 요한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느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광야로 나갈 수가 있었으며, 그 결과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제는 하느님을 제대로 알아 볼 수 있도록, 그래서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철저히 나의 입장은 배제하고 하느님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한 노력들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더욱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으니까요.

조명연 신부
  |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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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십계명의 제8계명은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관하여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증언합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예수님에 관한 증언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뿐만 아니라 성경 곳곳에서 우리는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타볼산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실 때에는 빛나는 구름 속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또 우리가 오늘 들었던 제1독서처럼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노래 이야기는 우리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는 단 하나의 책이며, 그 하나의 책은 바로 그리스도이시고 성경 전체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가톨릭교회 교리서』134항)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관한 증언은 성경뿐만 아니라 사실 그리스도교의 이천 년 역사 안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은 자신들의 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으며, 수많은 성인 성녀들은 자신들의 거룩한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수없이 많은 증언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수많은 증언들이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었던 세례자 요한의 증언처럼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처음부터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드러나셨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라는 것입니다(요한 5,36).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채,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처참한 죽음은 그분의 삶이 실패였음을, 또 그리스도가 아니었음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 말씀이 성취되었으며 성경 말씀이 예언한 바로 그분이심을 드러내고 보여 주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과 마침은 그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시며 또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우리에게 변함없이 알려 주고 또 증언하고 있습니다.

연중 시기가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본격적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우리 역시 그분께서 떠나시는 공생활의 여정을 함께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페 6,16-17)처럼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고,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고, 머리에는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인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쥔 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복음 선포 사명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그분의 성탄과 재림을 준비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인천교구 이효민 시몬 신부 : 2017년 1월 15일
  |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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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을 지금 우리는 언제 하는가? 매 미사 때 성체를 모시기 직전에 사제가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라고 말한다.

이 순간 어떠한 감동이 있는가? 나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난다는 설렘과 기쁨이 있는가?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고 하는데 정말 복되다고 여기고 있는가? 대부분 미사 중 이루어지는 응답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조금은 굳어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그러나 봉성체를 하면서 이 말씀이 힘이 있음을, 이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어린양을 영접하는 분들을 매번 보게 된다.

성체를 모시고 집을 방문하면 문을 여는 순간 하얀보를 씌운 상 위에 십자가가 가운데 모셔져 있고 양쪽에 초가 켜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주님을 기다리며 맞이할 준비를 하고 계신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는 말을 하고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그리스도의 몸” “아멘” 이 순간 나는 항상 보고 느끼게 된다. 하느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하심을…….

하느님의 어린양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날에 100살 할머니도 90세 할머니도 80세 할머니도 70세 할머니도 나이에 상관없이, 주님을 모시고 간 나를 항상 웃으며 맞이해주고 연신 해맑게 웃으시고 안 들리던 귀도 열리고 입이 열리며 연신 “고맙다! 감사하다!”라는 말씀을 계속하신다. 더욱이 손을 꼭 잡고 손을 놓지 않으려는 모습에서 하느님의 어린양을 영접하는 분들을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것이고 더욱이 주님을 모시는 순간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에서 나는 고백할 수 있다.

“나는 보았다. 지금 이 순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요한의 증언이 이제는 나의 증언이 되어야 한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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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복기 야고보 신부
2020년 1월 19일
  |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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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대지’로 노벨 문학상을 받고 세계적인 인권사회운동을 펼쳤던 펄 벅(1892~1973)의 나이가 일흔이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다시 청춘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이 질문에 그녀는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오는데 치른 값이 얼마인데요. 나는 다시 그것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지금이 좋습니다. 지금 이 나이를 누리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많은 이가 과거로 다시 돌아가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면 더욱더 잘 살 것만 같고 지금의 후회를 만들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작가 펄 벅의 말처럼 지금까지 치른 값을 생각한다면 다시 돌아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 싶습니다.

지금을 살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던 시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 지금이 내 인생에서 최고의 시간입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최고의 시간인 ‘또 다른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도 과거에 연연하면서 후회하는 삶이 아닌, 우리에게 다가올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면서 지금, 이 순간을 최고로 만드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죄 속에서 힘들어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완벽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강생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오늘 세례자 요한이 증언하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통해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제단에 봉헌되는 짐승들은 다섯 종류였습니다. 즉, 황소, 양, 염소, 산비둘기, 집비둘기입니다. 이 중에서 특별히 양은 숫양, 암양 그리고 어린양으로 구분합니다. 그렇다면 이 어린양은 어떤 때 봉헌될까요? 바로 일일 번제물을 가리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매일매일 번제물로 우리 대신 봉헌되시는 어린양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그래서 이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주님의 일에 충실할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주님과 함께 하는 하느님 나라에 우리 모두 들어가야 합니다. 이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은 결코 지금을 함부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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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2020년 1월 19일
  |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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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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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신학생일 때 유럽 배낭여행을 갔던 적이 있습니다. 로마에 2박3일 정도 머물렀는데요. 선배 신부님이 2박3일 동안 저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구경시켜 주셨습니다. 제가 도착한 게 금요일이었는데, 토요일쯤에 신부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주일 정오쯤 성 베드로 광장에 가면 교황님을 볼 수 있어. 짧은 훈화도 하시고 강복도 주시니까, 내일은 거기 가 보자.” 그 말을 듣고 교회의 최고 목자이신 교황님을 뵐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고 설렜습니다.

주일이 돼 성 베드로 광장에 나갔습니다. 광장에는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삼종기도를 바치고 잠시 기다리니, 교황청 4층 건물에 창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로 교황님이 보였습니다. 돌아가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셨는데요. 교황님은 떨리는 목소리로 짧은 훈화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강복을 주셨습니다.

저는 대단한 분에게 강복을 받았다는 생각에 기뻤습니다. 그리고 선배 신부님께 “저 교황님께 강복 받았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사제가 될 수 있을 거 같아요”라고 미소 지으며 말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꿀밤을 한 대 때리시면서 “임마, 교황님이 아니라 그 뒤에 계신 예수님을 봐야지”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며, ‘그동안 더 중요한 분을 바라보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저와 같은 실수를 범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곧 표징에만 머물러 있고, 그 너머에 있는 분을 바라보지 못하는 분들입니다. 예를 들면 사제 너머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우리 신부님은 강론이 어떻고, 외모는 어떻고, 성격이 나와 안 맞고’ 하는 것에 머물러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또 전례에서도 ‘노래가 나랑 맞아, 안 맞아. 미사 분위기가 어떻다’ 하는 것에 머물러 계신 분도 있을 겁니다. 또 공동체 안에서 ‘저 사람이 나와 맞아, 안 맞아. 공동체 분위기가 좋아, 안 좋아’ 하는 것에 머물러 계신 분들도 있겠죠.

그런 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말 중요한 것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리라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표징이 되는 사제의 역할, 전례의 역할, 공동체의 역할도 중요하겠지만, 표징에는 한계가 있고 제약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요한의 손가락도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가리키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데요. 우리의 시선이 요한에게 멈춰 있어서는 안 될 겁니다. 그 너머에 이미 계시고, 와 계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제가 섬에 살 때 한 번은 오후 늦게 배를 타고 섬에 들어왔었습니다. 해가 지고 있었는데요. 구름도 적당히 붉게 물들고, 바다에도 붉은 빛이 감도는 게 참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서, 배가 섬에 도착하는 동안 일몰을 감상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아주 느리게 변화가 있었습니다. 구름의 모양이나 바다의 색깔, 그리고 해의 위치가 조금씩 변화를 보이면서 지루하지 않은 감동이 지속됐는데요. 아마 세례자 요한도 성령님이 내려오시는 그 장면에 감동했을 뿐만 아니라, 미묘하고 섬세하고 작은 변화를 바라보면서 지루하지 않은 느낌을 받았을 겁니다.

우리도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한다면 그런 체험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보통은 기도하기가 지루하고 힘들지만, 매일 꾸준히 그 자리를 지키고 견디어 낸다면 다를 겁니다. 어느 순간 일몰의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것처럼, 기도 안에 숨어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작은 감동과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전에 기도 중에 하루는 요셉과 성모님이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는 장면을 묵상했었습니다. 복음의 상황은 급박하고 위태로웠습니다. 헤로데가 아기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두 살 이하의 아기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요셉과 마리아는 피신하라는 천사의 말에 따라 급하게 피신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렇게 피신하는 요셉과 그 품에 안긴 예수님을 바라보는데 문득 요셉의 모습이 그리 믿을 만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는 군사들은 무장하고 있었지만, 요셉은 무장한 군인도 아니었고, 군인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해를 입을 것만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옷차림과 신발도 제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도망가는 데에 적합한 그런 차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은 자신의 생사가 달려 있고 구원이 달린 중요한 그 일을 위해 ‘이런 요셉을, 시골 청년을 믿어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지나가는데, 그 ‘시골 청년’이라는 단어에서 문득 요셉의 모습이 제 모습으로 바뀌어서 생각됐습니다. 제가 시골에 살면서 시골 청년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인지, 아니면 부족한 제 모습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예수님이 부족한 나를 신뢰하고 믿어주시는 느낌, 일을 잘 해낼 거라고 믿어 주시는 느낌이 많아서 한참을 감동하고 감사했었습니다. 믿어 주시는 그 모습과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요. 믿어 주시는 주님의 시선과 마음을 생각하면 요한의 고백이 마음에서 흘러나옵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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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
가톨릭신문 2023년 1월 15일
  |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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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아름다움과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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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속 정신’에 길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가리키며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고 증언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가리키며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마태오 27,54 참조)라고 증언하는 것은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이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회개와 보속, 죄를 없애는 희생과 자비 등과 같은 신앙의 핵심 개념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무신론과 과학만능주의적 사고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차별금지법, 낙태, 안락사 등에 찬성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은 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안타깝게도 세례를 받고 열심한 신자들의 내면에서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신자 수가 줄어드는 것보다 심각한 문제는 교회 안에서 신앙과 진리에 대한 확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말씀을 받아들이기보다는 현대적이고 과학적인사고방식으로 삶의 해법을 찾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제거해주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하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조롱합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허용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여기면서도 사랑의 계명을 미워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교 신앙과 전혀 상관없는 새로운 신앙이 탄생합니다.

이 ‘새로운 종교’에 빠진 이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구식이고 철 지난 사상 정도로 생각하며, 자신들의 지식과 합리성을 절대화하는데 이릅니다. 당연히 예수님이 세상에 알려지도록 증언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습득한 지식과 삶의 방식을 전하는 것에 기뻐합니다. 죄를 없애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에 투신하는 것보다 죄짓는 이들을 단죄하고 심판하며 불만과 증오를 퍼뜨리는 악마의 자녀로 사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고, 예수님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며, 예수님의 눈물에서 하느님의 눈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성모님의 학교에서는 묵주를 손에 쥐고 신비를 묵상하며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몸과 피가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원과 승리의 상징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워합니다.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행복 선언의 주인공이 되는 길이라는 것도 믿지 못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본래의 아름다움과 존엄성을 회복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증언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은 것을 쓰레기로 여기게 하고, 무엇보다 우리를 영적인 인간, 하느님의 자녀, 천국의 시민이 되게 합니다. 바로 그분,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그분을 우리는 하느님이시며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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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이병근 대건안드레아 신부
2023년 1월 15일 주보
  |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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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을 읽다가 저자가 수도원에서 피정하면서 성직자와 수도자가 매일 바치는 시간경이라고 하는 성무일도를 함께 한 체험을 적었습니다. 자신이 이제까지 바쳤던 기도보다 훨씬 길고, 또 시편이 주를 이루기에 이해하기 힘들었음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신심이 깊지 않고 전례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사람들은 시도하기 어려운 과업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기도 한 번 참석했다가 끝나자마자 지쳐 쓰러졌다고 자기 책에 적었습니다.

아마 이 작가의 글을 읽는 사람은 성무일도를 끔찍할 정도로 어려운 기도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성무일도를 바쳐온 저로서는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어쩌다 한 번 경험하는 것과 30년 넘게 해오는 것의 차이는 이렇게 큽니다.

성인이라면 그 누구도 매일 아침 씻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는 머리 감기도 너무 어렵고 무서웠던 일로 생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 좋아하는 연인도 처음에는 만남에 어려움이 있지 않았을까요? 아직 만남이 익숙하지 않아서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이렇다고 봅니다. 신앙생활이 어색하고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그만큼 주님을 알지 못하고 또 주님을 많이 만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익숙해질수록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과 행복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향해,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라고 말합니다. 거친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이 세례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우리 모두의 구원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구원자를 알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본인 스스로 “나도 저분을 알지 못했다.”(요한 1,31)라고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알게 된 것은 예수님을 알기 위해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소리를 듣게 되었고, 사람들 앞에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지요. 예수님의 인기보다도 압도적인 인기였습니다. 요한의 말 한마디면 군중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엄청난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알기에 자신을 높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도 없는 겸손을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6)라는 메시지가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이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1코린 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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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2023년 1월 15일
  |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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