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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완벽한 조연 세례자 요한
조회수 | 2,565
작성일 | 08.01.18
오세영 시인의 '12월'이란 시(詩)를 좋아하는데, 한번 읽어보십시오. 마치 세례자 요한의 삶을 두고 지은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불꽃처럼 남김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스스로 선택한 어둠을 위해서 마지막 그 빛이 꺼질 때,
유성처럼 소리 없이 이 지상에 깊이 잠든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허무를 위해서 꿈이 찬란하게 무너져 내릴 때,
젊은 날을 쓸쓸히 돌이키는 눈이여, 안쓰러 마라.
생애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사랑은 성숙하는 것.
화안히 밝아 오는 어둠 속으로 시간의 마지막 심지가 연소할 때,
눈 떠라, 절망의 그 빛나는 눈.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은 뛰어난 언변과 타고난 지도력으로 당대 백성들에게서 큰 추앙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삶이 얼마나 경건했던지 세상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야말로 오시기로 된 메시아일거야'라는 착각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세례자 요한은 진정 겸손했습니다. 자신의 신원,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 '예수님이 주연인 연극에 가장 충실한 조연'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자 예수님을 향해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고 거침없이 외칩니다. 긴가민가하고 의구심을 갖던 당대 백성들에게 예수님이야말로 그들이 그토록 고대했던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틀림없음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사명을 다한 세례자 요한은 깔끔하게 꾸며진 무대를 예수님께 내어드리고 조용히 뒤로 사라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주연인 구세사 무대에 최고의 '남우조연상' 후보였습니다. 자신의 신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요한이었기에 결코 주연이신 예수님보다 튀지 않습니다. 결코 나대지 않습니다. 주연이신 예수님이 더욱 확실하게 '뜨도록' 목숨 바쳐 열연한 조연 중의 조연이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눈발이 휘날리는 황량한 산 능선에 묵묵히 선 이정표와 같은 존재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위험한 겨울 산을 타는 등산객들이 길을 헤매지 않도록 안전하게 산정(山頂)으로 인도하는 고마운 이정표로서 삶이 세례자 요한의 삶이었습니다.
오랜 만에 아이들과 농구경기를 했습니다. 선수교체로 잠깐 들어가 뛰었는데도 숨이 턱까지 차 올라와서 '이제 나도 맛이 갈 때까지 갔구나'하는 느낌에 약간 서글퍼졌지요. 반면에 어느새 부쩍 커버린 아이들은 펄펄 날더군요. '정말 오랜만에 리바운드 하나 잡는구나'하고 흐뭇해하는 순간, 어느새 달려온 한 아이가 제 공을 낚아채 갔습니다.

힘으로, 실력으로 아이들을 이길 수 없었지만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 무대를 새로운 세대에게 물려주고 조용히 한 걸음 물러나는 일, 그것도 결코 속상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연 순리에 따른다는 것, 나이에 맞게 적당히 물러서는 일, 참으로 지혜로운 일이고 서로를 위해 너무도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떠날 때가 왔음을 알았을 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바람처럼 떠나는 수행자 뒷모습처럼 아름다운 것은 세상에 또 없는 듯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의 삶은 우리 수도자들에게 귀감 중 귀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물러설 때를 확실히 파악했습니다.

비록 그 순간이 가장 에너지가 넘치던 시절, 소나기 골을 마구 터트릴 수 있는 절정의 순간이었지만, 일말의 아쉬움이나 미련도 없이 확실하게 뒤로 물러섭니다. 때가 왔음을 알게 된 세례자 요한은 조금도 망설이는 법이 없습니다. 완전히 자신의 모습을 감춥니다. 주님께서 확실하게 '뜨도록', 주님께서 활짝 꽃피어나도록 철저하게도 자신을 죽입니다.

우리 안에서 매일 우리 자신이 조금씩 사라지길 바랍니다. 우리 안에서 매일 우리 자신이 소멸되길 바랍니다. 우리 자신이 사라지고 소멸되어야만 비로소 그 자리는 주님 현존으로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는 순간,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성장하시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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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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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요한 1,29-­34)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묘해서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 시시각각 잘도 변합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가려서는 안 되지만, 자기 과시나 자랑을 일삼는 사람을 보면 더 이상 그 사람과는 말을 섞고 싶지가 않고, 또 많은 재능을 타고 났음에도 내색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을 보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져 드러내 놓고 칭찬해 주고 싶어집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은 후자에 속합니다. 하느님께 그 누구도 받지 못한 특별한 소명을 받았으니 잘난 척할 만도 하고, 여느 소인배들 같으면 예수께 경쟁심 같은 것도 느꼈을 법한데요. 구름 떼처럼 몰려드는 요한의 무리에 위기감을 느낀 유다인 지도자들이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파견하여 그가 벌이는 활동의 정통성을 물었을 때도(19절),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며 오로지 예수님에 관해서만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독백으로만 이루어진 오늘 본문 어디에도 자신을 내세우고 드러내는 언급은 없습니다. 다만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라고만(31절) 할 뿐입니다.

‘증언’은 요한 신학의 중추개념이기도 하여 다른 복음서에 비해 자주 등장하는 낱말입니다. 이번에도 예수님이 요한에게로 가십니다(29ㄱ절). 요한은 먼저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합니다(29ㄴ절). ‘죄’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해 봤자 두말하면 잔소리겠지요. 죄가 무서운 것은 그것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유다인들은 속죄일에 두 마리 속죄염소를 잡아 한 마리는 속죄 제물로 주님 앞에 바치고, 나머지 염소는 그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자신들의 모든 허물을 옴팡 뒤집어씌운 채 광야로 내보내는 예식을 치렀습니다. 죄로 인해 깨진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대속죄 사상은 이사야 예언자의 ‘주님의 종’의 노래에서도(이사 52,13-­53,12) 잘 드러납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종’을, 도살장에 끌려가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양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암시하는 요한의 의미심장한 ‘하느님의 어린양’ 증언은 은연중에 십자가상의 죽음까지도 내다보고 있습니다. 어쩌면 요한 공동체의 깊은 통찰 내지는 고백이 이 안에 담겨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세상의 죄를 치워 없애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당신의 외아들을 통해 이루어진 셈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갈채를 받을 수 있는 쉬운 길을 포기하시고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걸어가야 할 힘든 길을 순종으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중간에 요한은 엉뚱한 말을 내뱉습니다. 그분이 요한 뒤에 오시기는 하지만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던 분이라 자신보다 앞선 분이시라고요(30절). 둘 중에 누가 먼저냐고 묻기라도 한 듯이, 내가 먼저가 아니라고 강하게 손사래를 칩니다. 아마도 자신의 큰 목소리에 예수님의 영광이 가려지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었나 봅니다. 그분께 누가 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요한의 속 깊은 마음 씀씀이가 엿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특별한 소명 따위로 우쭐해할 새가 없었습니다. 요한의 성실한 증언 덕분에 예수님의 신비가 하나하나 벗겨지고 있습니다.

한편 그는 실컷 그분에 관해 증언해 놓고 두 번이나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31ㄱ.33ㄱ절)고 실토합니다. 결코 스스로 그분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분께서 일러주셔서 알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자신의 증언마저도 하느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계시에 근거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물론 그 덕분에 그의 증언은 한층 더 가치가 높아졌습니다.

요한을 보내신 분께서 또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고 일러주십니다(33절). 그분에 관한 두 번째 증언입니다. 성령을 받으신 예수님은 이제 영험한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우리에게도 성령의 세례를 주신답니다. 나중에 부활하신 뒤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면서 “성령을 받아라.”(20,22)고 하셨지요. 이제부터 성령께서는 예수님과 함께 활동하십니다. 요한은 이렇게 외칩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34절) 그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하느님을 통해 그분 심부름으로 시작한 증언이, 이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자신의 확고한 신앙고백으로 바뀌었습니다. 변할 게 없을 듯한 요한도 소명을 수행하면서 그만의 신앙 여정을 걷습니다. 말로만 듣던 예수님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겠지요.

이 복음 상황을 떠올리다 보면 마치 예수께서 법정에 서 계시는 듯한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예수님을 예수님이라고,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본 대로 들은 대로 증언하는 이는 드물었습니다. 예수님 공생활을 통틀어 보아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기에 저절로 드러나는 분이십니다. 빛과 상극인 어둠은 빛을 밀어냅니다(지혜 7,30 참조). 로고스 찬가 5절 말씀처럼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요한이 예수님보다 먼저 와 그 길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만일 우리가 법정에 서 계신 예수님의 증인으로 나서게 된다면 어떻게 증언해야 할까요?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나는 증언하였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빛을 빛이라 증언하는 요한의 정직하고 용기 있는 태도가 부럽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그 고백이 예수님의 길을 곧게 하였습니다(23절).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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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희 눈을 여시어 ‘하느님의 어린양’ 께 인도하소서 !

세밀한 독서 (Lectio)

우리는 자신의 하느님 체험과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하느님을 알고 만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에 대한 증언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대면하도록 초대합니다.

요한복음은 1 – 2장에 걸쳐 ‘이튿날’ 이란 단어를 사용해 전후 문맥을 규정하며, 시간적 공간을 제시합니다. 머리글 (1, 1 – 18) 에 이어, 첫째 날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 (19 – 28절) 과 둘째 날은 세례자 요한의 ‘하느님의 어린양’ 에 대한 증언 (29 – 34절) 으로 이어 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 (29ㄴ절) 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 (34ㄴ절) 으로 증언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보다 앞서 계셨던 분’ 으로 묘사하면서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신원에 대해서는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고 두 번 고백합니다. (31. 33ㄱ절) 요한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자신을 보내신 분” 께서 친히 “일러주셨고” (33절), 또한 그분 위에 성령이 머무시는 것을 “보았다” (32. 34절) 고 두 번씩 언급합니다. 요한은 자신을 파견하신 분의 계시를 통해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 (33ㄷ절) 이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직무와 증언이 하느님한테서 비롯되었음을 나타내는 한편,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나타나엘이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신적 지혜를 갖춘 예수님께 압도되어 “하느님의 아드님이며, 이스라엘의 임금님” (1, 49) 으로 고백한 것과 마르타가 예수님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11, 27) 하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친히 베푸시는 성령의 세례를 통해 (33ㄷ절)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 (29ㄴ절) 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며,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3, 5 – 6) 라고 하십니다. 성령의 세례는 우리를 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베푸실 세례는 “당신이 받으실 세례” (마르 10, 38ㄷ) 를 통해 인류의 죄를 없애시는 대속의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일찍이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해방과 더불어 파스카의 체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탈출기 12장), 속죄예식에서 어린양을 하느님께 번제로 바쳐 죄의 용서를 받아왔습니다. (레위 4, 32 – 35) 그러므로 ‘어린양’ 은 하느님 백성을 위한 해방절 양인 동시에 하느님께 드리는 희생제물로서 우리와 예수님의 관계를 표상합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없애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신약의 해방절 양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단순히 희생제물로 바쳐진 어린양이 아니라, 번제로 바쳐질 이사악을 대신한 어린양처럼 하느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어린양으로서 (창세 22, 13), 우리의 병고와 고통을 대신 지고 우리의 악행과 죄악 때문에 자신을 속죄제물로 내어 놓는 “주님의 종” (이사야서 53장) 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어린양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이루는 중재자로 인간 역사 안에 들어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에서 해방되었고, 그분과 일치를 통해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1요한 3, 5 – 8)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그의 소명이자 직무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드러나도록 준비하고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요한 1, 31) 또한 그의 증언은 초대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인 동시에 오늘날 십자가상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고백이며, 무궁세세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묵상 (Meditatio)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요한 1, 29), 주님은 우리의 삶 한 가운데 우리를 위해 친히 제물이 되어 오신 “야훼 이레” (창세 22, 14) 이십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주님은 저를 위한 당신의 희생에 조건이 없으셨습니다. 오늘도 십자가 위에 두 팔을 드리운 체 묵묵히 우리를 바라보시는 당신 앞에 사랑이란 이름으로 강요하고 강박했던 욕망이란 이름의 집착을 내려놓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위한 제물이 되셨듯이 누군가를 위해 선뜻 저 자신을 희생양으로 놓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희생은 겸손 없이는 이룰 수 없음에도 교만이 자기의 존재를 보증하는 줄 알았던 무지를, 당신의 중재로 얻게 된 영원한 생명을 마치 제가 쌓은 공덕으로 얻으려는듯 매달린 저의 불신을 어린양이신 당신 앞에 내려놓습니다.

기도 (Oratio)

“너희는 내 얼굴을 찾아라.” 하신 당신을 제가 생각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습니다. (시편 27, 8)

반명순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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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중 제2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언합니다. 곧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동시에,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선언합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미사 중에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표현이 다섯 번 나옵니다. <대영광송>에 한 번나오고, <영성체 예식>에서 네 번 나옵니다. 곧 <대영광송>에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와 평화 예식이 끝나고 사제가 축성된 빵을 나눌 때 신자들은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두 번).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라고 기도하며, 이어서 사제는 성체를 높이 들어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고 외칩니다. 곧 주님께서는 세상의 죄인들을 쓸어 없애 버리는 분이라고 하지 않고, 죄를 없애 버리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세상의 죄를 없애고, 평화를 주는 어린양으로서 살겠다는 결심을 다집니다.

<성경>에서, 우선 ‘어린양’은 네 가지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느님께서 준비한 제물로서의 ‘어린양’(야훼이레: 야훼께서 준비하신다)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산으로 갔을 때, 이사악이 "아버지, 제사에 쓸 나무와 불은 있는데, 제사에 쓸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자, 아브라함은 "아들아, 그 어린 양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준비하시리라."라고 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준비한 참된 어린양은 예수님입니다.

<둘째>. 파스카의 ‘어린양’입니다(탈출 12,1-27;레위 23,5-6;신명 16,1-7).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죽음의 재앙을 내리는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셨습니다. 이날 저녁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의 맏이들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은 ‘희생양’을 파스카의 어린양이라고 부릅니다.

<셋째>. 대신 죽는 속죄의 희생양으로서의 ‘어린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이동할 때 그들은 40여 년 동안 사막을 헤매면서 양떼와 가축을 이끌고 천막을 치면서 옮겨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천막 주위에 사나운 맹수들이 다가 와서 으르렁거리며 위협하며 괴롭혔는데 그 때마다 사람들은 염소나 양을 한두 마리 맹수들에게 보내줍니다. 그 때 맹수들에게 보내지는 양이 '아자젤'이라 불리던 ‘속죄양’입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한 다음, 대속사상이 나타나게 되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는 희생양 제의가 생겨나게 되었고, 일 년에 한 차례(매년 7월 10일)씩 지난 일 년 동안 지은 모든 죄악을 용서받기 위해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때 희생양 두 마리를 준비하여 한 마리는 하느님께 번제로 불살라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대제사장이 그 위에 자기의 손을 얹고 자기와 온 민족의 죄를 자복한 후에 광야로 내어 보냈습니다. 이 둘은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습니다.

4. 승리하신 천상의 ‘어린양’이시다(묵시 5장). 어린 양은 목자로서, 모든 믿는 이들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인도하실 분이시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야훼의 종’의 둘째노래를 들었습니다. 많은 학자들과 선지자들은 이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이 도대체 누구인지? 개인적인 한 인물인지? 아니면 하나의 집단인지? 남은 자들(렘난트)의 무리인지? 야훼의 가난한 사람(아나빔) 인지?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신진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에게 재조명해 보았지만, 여전히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침내 세례자 요한에 의해, 그 정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표상을 통해서 이를 밝혀줍니다. 이 표상에는 ‘야훼의 종’과 ‘대속의 희생양’의 두 가지 표상이 동시에 들어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이사> 53,7.12에 나오는 ‘야훼의 종’임과 동시에, <출애> 12장에 나오는 ‘파스카의 어린 양’인 구약성경 곳곳에 나오는 희생양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는 예수님에 의해 “야훼의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어린양”으로 성취되고 완성됩니다.

특히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Agnus Dei, Qui tolis peccata mundi)라는 표현에서 “세상의 죄”라는 말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세상’이란 물질적 공간적 그릇이 아니고, 온 세상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곧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방 사람들도 포함하며, 옛날에 있던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사는 사람들도 장차 이 세상에 태어날 사람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사람들, 곧 전 인류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죄’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악들, 동서고금의 전 세계 모든 인류의 죄들을 포괄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의 어린양이심을 드러내줍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그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삶 또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어린양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주님!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도, 세상을 위해서도 십자가를 질 줄을 알게 하소서.
허물을 뒤집어쓰고도 원망하지도 억울해하지도 않는 오히려 자신의 내어 주고 피 흘려 구원하는 제물의 삶이 되게 하소서.
당신께 드리는 사랑의 산 제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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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2020년 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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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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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찡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살리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십니다. 매일 매일 미사를 통해 하느님의 어린양을 또한 들어 높입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어린양이 되십니다. 어린양처럼 누군가의 희생이 우리를 살게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수난과 죽음 부활로 우리를 이끕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보며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뜨거운 사랑입니다.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 삶을 치유하여주십니다.

죄를 없애십니다.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십니다. 우리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어린양 어린양의 힘이십니다. 약할 때 오히려 하느님을 드러내는 강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어린양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 앞장서시며 삶의 방향을 잡아주십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과연 보았고 마침내 믿습니다.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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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20년 1월 19일
  | 01.19
523 97.6%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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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의 전례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언해줍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통해 당신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민족들의 빛으로 세울 것’이라는 예언자 이사야의 예고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와 소스테네스 형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증언하며, 성도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를 빌어 줍니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두 가지로 증언합니다. 먼저, ‘첫 번째 증언’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는 증언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그런데 예수님이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말은 대체 무슨 말일까요? 사실 우리는 오늘도 미사 중에는 ‘하느님의 어린양’란 이름을 다섯 번이나 부릅니다.

대영광송에 한 번(“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영성체 예식에서 네 번(“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두 번).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부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어린양”의 네 가지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야훼이레”, 곧 하느님께서 준비한 제물로서의 “어린양”(야훼이레; 야훼께서 준비하신다)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산으로 갔을 때, 이사악이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하고 묻자, 아브라함은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에서 보듯이, “어린양”은 하느님께서 제사에 쓰기 위해 준비한 ‘제물’입니다.

둘째는 ‘파스카의 어린양’(탈출 12,1-27; 레위 23,5-6; 신명 16,1-7)입니다. 곧 하느님께서서 모세를 통해 이집트의 맏자식을 치는 죽음의 재앙을 내렸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맏아들을 살리기 위해 문설주에 발라진 ‘희생양’입니다.

셋째는 “아자젤”, 곧 대신 죽는 ‘속죄양’으로서 “어린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여 년 동안 사막을 헤매면서 사나운 맹수들이 위협할 때마다 염소나 양을 한두 마리 맹수들에게 보내주었고, 가나안에 정착 후에는 일 년 동안 지은 모든 죄악을 용서받기 위해 제의로 바쳐지면서(매년 7월 10일), 인간의 죄를 대신하는 속죄양 두 마리를 준비하여 한 마리는 하느님께 번제로 불살라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대제사장이 자기와 온 민족의 죄를 자복한 후에 광야로 내보냈던 “아자젤”, 곧 ‘속죄양’입니다.

넷째는 승리하신 ‘천상의 어린양’(묵시 5장)으로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함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신 분”(묵시 5,13)임을 드러내줍니다.

이처럼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표상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원을 밝혀줍니다. 그런데 특별히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라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물질적 공간적 그릇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방 사람들도, 옛날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사는 사람들도 그리고 장차 이 세상에 태어날 사람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사람들, 곧 ‘전 인류’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죄’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들, 동서고금의 전 세계 모든 인류의 죄들을 포괄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의 어린양’이심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우리는 주님께서 ‘세상의 죄인들을 없애시는 분’이라고 하지 않고 “죄를 없애시는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듯이, 우리 또한 세상의 죄를 없애고, 평화를 주는 ‘어린양’으로서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곧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을 따르는 우리 역시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소명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자신보다 뒤에 오신 분이지만 당신보다 앞서신 분이요, 이미 전에 증언한 분이요, 자신이 세례를 준 것이 바로 이 분을 세상에 알려지시게 하기 위함’이라고 덧붙인 다음, ‘두 번째 증언’으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증언입니다.

그는 먼저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요한 1,32-33)라고 환시를 통해 보고 들은 바를 말하고,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라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성령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예수님 위에 머무르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원이 존귀하신 분, 곧 아버지의 권능이신 성령으로 도유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은 노아의 홍수 때 비둘기가 생명의 푸른 잎사귀를 물어온 것처럼, ‘새로운 생명’을 물어오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줍니다. 곧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려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 안에서는 하느님 아드님의 신적 생명이 자라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토록 우리는 그분을 옷 입듯이 입었고(갈라 3,27), 그분은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된 일인지요! 그러니 이제 그분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당신의 생명을 활짝 드러내실 수 있도록 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과 세상을 위해서도 십자가를 질 줄을 알게 하소서.
자신을 내어 주고 피 흘려 죄를 없애는 어린양이 되게 하소서.
허물을 뒤집어쓰고서 위하여 바쳐지는 사랑의 산 제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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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신부 2023년 1월 15일
  | 01.14
523 97.6%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는 예수님의 정체성과 우리의 정체성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제1독서인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에서는 하느님의 직접적인 증언이 들립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이사 49,3).

교회는 이 "종"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주님의 종은 이스라엘을 주님께로 모여들게 하고, 주님께서 이루실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게 하는 사명을 지닙니다. 종은 주인의 뜻에 순종과 사랑으로 따릅니다.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6).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십니다. 빛에서 나신 빛이시고,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십니다(요한 1,4-9 참조). 그분은 세상에 짙게 드리운 어둠을 물리치시고 새 빛을 선사하십니다.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증언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증언은 단순한 해설 이상의 선언입니다. 게다가 증언하는 이의 공신력이 증언 내용에 무게를 더하지요. 요한은 온 이스라엘이 예언자로 인정한 존재이니 이 증언은 과연 참되고 진실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우리도 매일 미사 때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이시라고 고백하며 자비와 평화를 청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희생된 어린양, 율법에 따라 희생제물이나 번제물로 바쳐진 어린양이고, 또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바로 그 어린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이사 53,6)지요.

"주님이 제게 상을 차려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영성체송).

예수님께서 기꺼이 내놓으신 당신의 살과 피로 상을 차리시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 앞에 놓인 잔에 넘치도록 가득 부어진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이고, 또 그분과 우리의 혼인잔치에 마련된 사랑의 포도주이며 성령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그 답을 들려줍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 받은 여러분"(1코린 1,2). 그렇습나다. 우리는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우리 정체성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고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거룩한 무리, 거룩한 제자를 가리키는 "성도"라는 말씀 안에 곧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새겨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되짚어 보는 일은 참 행복하지요. 그런데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그분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존재라면, 우리의 사명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그분의 본질까지 받아들여야 합니다. 곧 어린양이신 그분처럼 되어야 합니다.

피 흘리고 죽어간 창백한 모습의 희생된 어린양을 관상합니다. 약하고 힘 없고 아무 보호장치도 없이 제단 위에 누워 있습니다. 그의 살은 세상을 풍요롭게 할 생명의 양식이 되고 그의 피는 세상을 정화하고 흥겹게 할 포도주가 됩니다.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악의와 독기 앞에서 무장해제가 된 존재입니다. 저 어린양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자기애로 똘똘 뭉쳐 살아온 우리가 저항도 항변도 없이 침묵하며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매달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작고 소소한 일에서라도 세상을 돌고 돌아 우리에게까지 도달한 악의와 독기가 우리에게서 더 확산되지 않고 멈출 수 있다면 세상은 한층 더 선량해지고 더 밝아지고 구원의 길도 더 확장될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위한 예수님의 엄청난 희생만큼은 못되지만, 보복과 앙갚음을 포기해 악과 독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닮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친한 이라도 섣불리 이 선택은 강요할 수 없습니다. 다만 어린양이신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 따라야 하는 죽음이니까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더 애틋하고 더 감미롭게 느껴진다면, 지금 그분이 함께 어린양이 되자고 부르시는 겁니다. 우리에게 남은 건 응답입니다. 주님의 종이고 어린양이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그래서 작은 빛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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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2023년 1월 15일
  |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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