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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조회수 | 2,191
작성일 | 08.02.01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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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를 새롭게 시작하며 우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사를 통해 서로에게 기쁨을 주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복(福)이라는 것은 이렇듯 삶 안에서 기쁨과 용기를 주는 ‘큰 감사’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 안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은 일상 안에서 우리가 누리고자 하는 것과는 사뭇 다름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날마다 밝은 빛으로 채워지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빛을 통해 기쁨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흐린 먹구름에 빛이 가려진 삶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우리가 원하는 것처럼 그렇게 일 년 내내 빛이 비치는 것이, 결코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곳은 바로 사막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갖게 하는 수분인 빗물은 밝은 날이 아닌, 흐린 먹구름을 통해서만 뿌려진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루라는 시간 안에서 내 자신을 되돌아 볼 때가 있습니다. 무언가에 기뻐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반대로 마음에 상처를 입어 아파하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내 안에 있는 상처를 통해 그 상처의 치유방법도 발견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상처의 치유가 내가 찾고자했던 간절한 ‘행복’ 이라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은 분명 아픔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을 당신의 행복선언의 제일 앞머리에 두셨던 것은, 이러한 아픔의 삶을 경험하는 우리들 모두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며, 하느님께서 내 삶 안에서 함께 가난해 하며 나와 함께 눈물 흘리고 계시다는 점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눈물을 보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아픕니다.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마음 또한 결코 그 아픔의 눈물 안에서 멀리 있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가난한 이들, 슬퍼하는 이들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이제 잠시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통해서 삶의 행복을 채우고 있는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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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형준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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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지고 싶습니까?
행복의 답 예수님 안에 머물기

우선, 지난주 결론 부분이 약간의 실수로 인해 누락되어 조금은 속상했었습니다. 하지만 더 많이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니,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 내용은 “고 이태석 신부님이 나누던 사랑을 달콤하고 낭만적인 감성으로만 외칠 것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는 장한 꽃향기가 됩시다”는 것이었습니다.

속상한 것을 넘어, 여유를 가지니, 행복감도 밀려 왔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주에 예수님께서 산위에서 말씀하신 ‘참 행복’이 더 편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의 행복한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다는 소문을 듣고 온 이들이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성하고 의로운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로서, 기적적인 치유를 받고자 모여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몸과 마음의 병으로 세상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아 불행하게 살아왔기에, 예수님을 통해 새 세상에 다시 태어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이들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체험을 하며 잠시나마 하느님 나라를 맛보는 여유를 가지니,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더욱이 이러한 군중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지 생각해 봅니다.

이런 마음으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행복하여라, ~한(하는)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선언은 불쌍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새로운 가르침이자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더 이상 배고프거나 아프지 않고, 불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권위 있는 말씀은 그 자체로 군중에게 커다란 힘과 용기, 위안이었을 것입니다.

산상설교의 첫 가르침인 행복선언은 예수님께서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신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마음을 바꿔 당신을 따라오면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이고, 그곳에서 행복이 보장되어 있다는 장엄한 선언과 같은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행복 선언은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이들 모두에게 주어지는 행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한(하는) 사람들”이라는 문구 앞에 “예수님을 믿고 따름에 있어” 혹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함에 있어”라는 구절을 넣어보면, 더욱 정확한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시기에, 그분을 믿고 따라가면 모든 행복의 답을 얻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복팔단 묵상 중에, 지난해 9월 25일 시복된 끼아라 루체가 떠올랐습니다. 17살의 여학생이었던 루체는 골육종 암 판정을 받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는 25분 동안 방에서 혼자 있다가, 밖으로 나와 부모님에게 “이제는 저의 병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리고는 끝까지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고통스러운 치료를 감수했고, 의사들과 그녀를 찾아오는 이들을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이끌었습니다. 의사들이 죽음 직전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잊도록 모르핀 주사를 권했으나, 그녀는 조금이라도 맑은 정신으로 예수님과 함께하고 싶다며 투약을 거부했고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들은 도리어 그녀에게 위로를 받고 돌아갔습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잖아. 그리고 단 하나의 생명을 갖고 있으므로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잘 보내야 해!”라고 말하며, 젊음의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알려주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걱정하는 엄마에게 “하느님께 믿고 맡기세요. 엄마는 모든 것을 했어요. 내가 없을 때는 하느님을 따르세요. 그러면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울지 마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그녀는 “엄마, 행복하세요. 나는 행복해요!”라는 말을 남기고 19세의 나이로 예수님 안에서 기쁘고 행복한 모습을 끝까지 간직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각막을 세상에 선물하였습니다.

어린 그녀가 자신에게 주어진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기쁘고 행복하게 자신의 처지(죽음)를 받아들이며 여장부의 큰 모범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따랐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우리 역시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을 차지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 누구와 함께하며,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서로 느끼는 행복의 정도는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참 행복을 얻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최인각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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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빅 데이터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행복해지는 법’입니다.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정보와 더 빠른 속도, 더 안락한 환경이 조성되었음에도, ‘행복하세요?’라는 물음에 사람들은 대답을 망설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서점에는 행복론과 심리학과 처세술에 관한 책들이 가득합니다. 사람들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간절한 심정으로 그 책들을 정독하지만, 이내 더 큰 의문과 실망에 젖어들고 맙니다.

이런 현실에서 ‘주님을 찾아라!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스바 2,3;3,12).’라는 말씀은 ‘주님에게서 너의 행복을 찾아라, 불행 중에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여라!’라는 말씀으로 들려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결국 하느님을 모신 사람이 행복합니다.’라고 했고, 데레사 성녀도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기에 하느님만으로 만족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두 성인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이야말로 행복에 이르는 참된 길이라는 것을 증언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의 지혜와 의미를 주님에게서 찾고, 인생의 여정에서 온갖 시련과 위험을 맞닥트리게 될 때 주님을 부르며 그분 안에서 피신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안전합니다. 세상의 어떠한 정보들도 하느님을 아는 지식만큼 행복하게 할 수 없고, 세상의 어떤 곳도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보다 안전하고 평화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빼놓은, 하느님 없이 사는 삶은 중심과 방향을 잃은 것처럼 언제나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자신의 마음과 인격과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하늘나라가 그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느님은 그의 슬픔에 위로를, 목마름에 흡족함을, 어리석음에 지혜를, 약함에 강함을, 비천함에 존귀함을 주심으로써 하늘나라를 몸소 이루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행복선언은 속된 기준으로 보면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덟 가지의 행복선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앞부분은 ‘우리의 현실’이고 뒷부분은 ‘하느님의 몫’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결국행복선언은 하느님이 당신을 바라고 찾고 모시고사는 이들, 곧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이들의 행복을 위하여 당신의 몫을 다하시겠다는 선언이자 약속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하느님을 믿고 있으니, 하느님이 이루실 몫, 당신이 주실 상(賞)을 고대하며 행복의 찬양 노래를 부르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우리의 구원이 됩니다.

‘가난한 이들은 듣고서 기뻐하여라. 주님을 찾았더니 내게 응답하시고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에 넘치고 너희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여기 가련한 이가 부르짖자 주님께서 들으시어 모든 곤경에서 그를 구원하셨네.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사람! 주님을 찾는 이들에게는 좋은 것 하나도 모자라지 않으리라(시편 34,3.5-11).’

▦ 수원교구 강희재 요셉 신부 : 2017년 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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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가난은 행복의 필요조건

옛날 한 욕심 많은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젊고 아름다웠으나 정욕이 강하고 음탕하여 시어머니의 눈초리가 귀찮아, 하루는 꾀를 내어 남편에게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이렇게 가난하면서 어머니를 돌봐 드리는 것이 더 이상 효도가 될 수 없겠어요. 하늘나라에서 돌봐드리게 하지요.”

며느리는 남편에 동의를 얻어 큰 잔치를 벌여 하루를 즐겁게 지내고 손님들이 돌아간 뒤 노모를 불구덩이에 집어 던졌습니다. 그런데 불구덩이 속의 틈사이로 요행이 빠져나온 노모는 어둠에 깔린 밖에서 도둑을 만나 나무 위에로 몸을 숨겼습니다. 마침 나무 밑에서 몸을 쉬려던 도둑은 나무 위에서 나는 기척에 혼비백산 하여 훔친 보물도 팽개치고 달아나버렸습니다.

날이 밝자 노모는 나무에서 내려와 그 보물을 들고 집으로 집에 들어섰습니다. 노모를 본 부부는 무서워서 벌벌 떨었으나 노모는 태연히 말을 했습니다. 천상에서 수많은 친척들을 만나 이런 진귀한 선물을 얻었지. 내가 기력이 딸려 다 못 가져왔는데 이번에는 너를 보내달라는 구나.

이에 며느리는 무척 기뻐하며 자신도 불구덩이에 몸을 던질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졸라 불구덩이를 만들고 그 속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나오지 못했습니다.

참 어이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며느리가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지금 정선 카지노가 있는데 심지어 이런 말까지 돈다고 합니다. 그 동네 주변 숙소에서 목매달아 죽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몇 달 쉬었다 가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것은 장기를 적출해 팔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장기를 판돈으로 다시 도박을 하러 간다는 것입니다. 저도 마카오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실로 카지노 호텔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입니다. 보통 하나를 짓는데 10조 정도가 드는데 대부분은 짓고 나면 3년이면 투자를 회수한다고 합니다. 그런 호텔카지노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돈을 잃어주고 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호텔 주위에 깔린 가게들이 전당포입니다. 처음에는 귀중품이나 차와 같은 것을 맡기지만 나중엔 집과 목숨까지도 담보로 잡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다 알지만 여전히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어떤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백억씩 잃고 간다고 합니다. 도박해서 부자 됐다는 사람은 못 봤지만 그런 인간의 욕망을 이용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쉽게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마치 불나방이 자신이 타 죽는지도 모르고 불에 달려드는 어리석은 인간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아무리 해봐야 자신이 깊이 깨닫지 못하면 쓸데없지만, 모든 인간은 욕망 때문에 노예생활을 하고 자유와 행복을 빼앗깁니다. 도박에 빠진 사람이 행복한 얼굴을 할 수 있을까요? 그는 노예이고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런 돈에 대한 욕망만 우리를 행복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모든 욕망이 인간을 불행의 노예로 만들어 종살이의 고통을 줍니다.

며칠 전 출출하여 야식을 먹으로 한 식당에 갔는데 늦은 시간임에도 한 남성 어르신이 혼자 식사를 하시며 일하고 있는 여주인과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약주도 한 잔 하시고 이미 거나해진 그분은 제 착각일 수는 있지만 주인아주머니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아주머니는 단골손님이기 때문에 억지로 받아주고 계신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나가시면서 그 아저씨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미친놈이다. 내가 미친놈이여. 허허. 밥을 한 그릇 다 먹었는데도 배가 고프네. 그러니 내가 미친놈이지. 허허.”

이건 누가 봐도 배가 고픈 상황이 아닙니다. 욕망에 허기가 진 것입니다. 그런데 욕망에 허기가 지는 곳이나 음식이 들어차는 곳이나 같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욕망의 배고픔을 음식의 배고픔으로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욕구가 솟구치면 배가고픈 줄 알고 계속 먹어대지만, 마치 목이 마른데 음식을 자꾸 먹는 것처럼 그 갈증이 해소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그런 욕망이 해결된다고 고통이 끝날까요? 돈을 땄다고 더 이상 돈을 바라지 않게 될까요? 더 욕망하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가 더 돈을 욕망합니다. 왜냐하면 돈 맛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벌들이 기를 쓰면서 자녀들에게 세금 안 내고 그 재산을 물려주려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정치와 결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도 벌어지게 됩니다. 지금 국정농단 사태도 돈을 몰랐던 순수한 사람들에게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그 맛을 누리던 사람들에게서 시작된 것입니다. 욕망엔 끝이 없다는 것은 더 이상 말을 안 해도 우리 스스로도 잘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욕망이 커지면 그것에 노예가 되고 그 만족시켜주지도 못하는 욕망 때문에 고통스러워야 하는데도 그 욕망을 쫓아가는 사람이 많을까요? 이 또한 경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욕망을 끊는 자유와 평화를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이 욕망이 솟구치고 그것을 채워가는 것이 행복이라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일단 욕심을 버리고 소득의 십분의 일이라도 봉헌해 봤어야 거기서 오는 마음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 텐데 성경에서 아무리 십분의 일은 주님의 것이고 그것을 내지 않으면 마치 선악과를 먹는 것처럼 하느님 재산을 도둑질 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드라마를 보며 어떤 누군가가 멋지게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되면 행복할 것이란 생각에 빠지는 수많은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런 욕망이 생기는 것 자체가 고통임에도 그런 욕망이 생기도록 더 TV 앞에 앉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행복입니다. 행복은 가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가난은 돈 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욕망이 비워진 상태를 가난이라 합니다. 욕망이 비워져야 그 안에 주님께서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뱀이 있는 곳에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부산행이란 영화에서 주인공 공유는 딸에게 선물을 사 줍니다. 그러나 그 선물은 이미 작년 생일 때 해 주었던 것과 똑 같은 것이었습니다. 자녀는 사랑의 눈빛을 원하지만 다른 것을 원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자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습니다. 사도란 영화에서도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아버지에게 사도세자는 그저 자신의 목적을 위한 도구밖에는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욕망을 지니고 있으면 하느님을 믿는다고 해도 자신의 가정이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꼭두각시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 욕망과 함께 공존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누가 이용당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하물며 하느님이신데 말입니다.

불교에서도 이를 알아서 집착을 끊는 것을 행복의 기본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는 교회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거든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자신을 버리라는 말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버렸고 그 결과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욕망으로 아랫배가 가득 차게 되면 숨이 그 밑에까지 내려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배로 숨을 쉬지 못하고 가슴으로 쉬게 됩니다. 배가 비워지는 것을 우리는 ‘가난’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배가 두둑하니 부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잃기 싫으니 두려워지게 되고 더 움켜쥐려고 하는데 그 결과가 숨을 다 내뱉지도 않고 또 들이쉬는 것입니다. 욕망이 커지고 두려움이 커지면 숨을 몰아쉬게 되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는 숨을 있는 끝까지 내 뱉으며 자신의 욕망까지 함께 내 뱉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힘들이지 않아도 공기가 들어옵니다. 배가 따듯해야 온 몸으로 열이 전달될 수 있고 장기도 따듯해져 병에 걸리지 않으며 허하지 않습니다. 가난해져야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이 의미가 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왜 만드셨을까요? 부모가 자녀를 왜 낳을까요? 행복하라고 낳습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의 행복을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희생할 자세가 되어있습니다. 혹 인간인 부모가 그럴 준비가 안 되었을지라도 사랑 자체이시고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 하느님은 모든 준비를 다 해 놓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세상에 내신 이유는 바로 행복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처럼 복음을 선포하실 때 가장 처음으로 행복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선포하실 때 가장 처음으로 ‘가난’을 강조하셨습니다. 스스로 행복해지려는 마음만 버리면 다 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마치 아이가 가출만 하지 않으면 부모가 다 해 주겠다는 뜻과 같습니다.

고해소에서 어떤 분이 자신은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을 절대 믿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분이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면 아직도 부자로 불행하게 사실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숨을 거두실 때 마지막으로 숨을 내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숨을 들이쉬기 위해서는 먼저 내보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설 때 절대 부자여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한 숨까지도 내보내고 가야합니다. 욕망을 빼내는 것이 가난입니다. 가난한 사람 안으로 성령께서 들어오셔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면서 나의 욕망을 빼버리는 연습을 규칙적으로 가져야합니다. 뱀은 결코 죽지 않고 다시 독을 내 뿜습니다. 규칙적인 기도가 아니면 욕망에 금세 사로잡힙니다. 먼저 내가 어떤 것에 욕심이 생기게 되면 다시 하느님 나라가 들어올 자리를 빼앗긴 부자임을 깨달읍시다. 그리고 기도로 나의 욕망을 빼어버립시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루어내시는 일을 보며 주님께서 우리를 왜 창조하셨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왜 살아야 되는지에 대해 묻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미 주님께서 세상에 우리를 살게 해 주신 삶의 이유인 행복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2017년 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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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지금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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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 : “신부님은 언제 가장 행복하세요?”
사제 : “저는 교우분들과 주님을 믿고, 공동체가 함께 미사를 봉헌할 때 행복합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사제를 만난 분들은 참으로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언제 가장 행복하냐는 질문에 늘 대답을 망설입니다. 스스로 성찰해보았을 때, 제가 행복을 자신 있게 고백하지 못하는 이유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과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이는 행복을 갈망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살아가는 모든 이가 그토록 원하는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누군가는 재물을 많이 소유하는 것, 질병 없이 삶을 살아가는 것, 죽음을 피해 장수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할 겁니다. 이처럼 오늘날 세상이 말하는 행복의 척도는 생로병사를 극복하는 것과 재물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행복이란 주님 안에 머물며, 세상 안에서 이웃과 부대껴 살아가는 삶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행복은 ‘지금 여기’에 충실히 머무는 이들의 삶 한가운데 있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과거의 죄와 잘못으로 인해 고통받고 후회하며 살아가는 삶을 바라지 않습니다. 또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염려하며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 앞에 펼쳐진 이 순간에 온전히 그리고 충실히 살아가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제가 좋아하는 동창 신부가 서품 성구를 정할 때, 우연히 그 구절을 보게 되었습니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 12,15).

저는 속으로 ‘멋있는 성경 구절을 정하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짧은 제 인생과 사제생활을 돌아보니, 기뻐하는 이들과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새삼 느낍니다. 이웃의 미소가 나의 미소가 되고, 이웃의 눈물이 나의 눈물이 되는 것은 겸손함을 지니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15절의 말씀은 행복을 찾는 신앙인들에게 현 재의 행복을 느끼고 실천하게끔 이끄는 좋은 묵상 구절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1월을 마무리하며, 나의 행복은 ‘지금 여기’에 펼쳐져 있음을 알고 믿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 노력합시다. 또 이웃에게 미소 지어줄 줄 아는, 세상의 고통과 아픔에 눈물을 흘릴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다짐해봅시다. 그때 우리는 “행복하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은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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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재혁 요한 사도 신부
2023년 1월 29일 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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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만 대답해주면 지금 너의 행복 수준이 얼마인지 알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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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릴 적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경험하며 덕분에 ‘행복’이란 목표를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두려웠던 죽음의 공포가 행복하니까 줄어드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조금 더 행복에 대해 생각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도 진복팔단, 곧 행복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뉩니다. 동물-인간-하느님입니다. 그리고 각 존재는 자신이 행복이라 믿는 것을 위해 살아갑니다. 여기에 도움이 되는 것이 사이먼 시넥의 골든 서클 이론입니다. 인간의 뇌는 이유(Why) - 방법(How) - 목적(What)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마음의 영역이고, 방법은 이성의 영역이며 목적은 육체의 영역입니다. 사람에도 깊이가 있는데 동물과 같은 사람은 목적을 먼저 생각하고 영적인 사람은 이유를 먼저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유가 중요한데, 동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이 동물이라 믿습니다. 곧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나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사람은 내가 왜 마음이 가난해야 하는지, 내가 왜 슬퍼해야 하는지, 내가 왜 온유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를 당해야 하는지 대답할 수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의 목적은 그저 생존이기 때문입니다.

상어는 사람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상어는 그저 생존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아기처럼 무조건 내 앞에 있는 것이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를 구별하기 위해 덥석 물어보는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배를 채울 필요가 없거나 맛이 없으면 물었다가도 그냥 놓습니다. 만약 그런 존재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물으면 반드시 “나는 나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나는 나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배만 곯지 않으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채워야 할 행복의 정도가 그저 동물의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고 분류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구분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노숙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 가면 근처에 그분들이 거저 숙박을 할 수 있게 나라에서 만든 시설들이 존재합니다. 거기 가면 이슬을 맞지 않아도 되고 따듯한 물도 나와서 몸도 씻고 빨래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밖에서 얼어 죽을망정 그곳에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일까요? 나의 자유를 침해 받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인데 타인이 끼어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지만 않는다면 밖에서 떨면서 자도 그것이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만약 노숙자로 살면서 살기 힘들고 행복하지 않다고 여기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런 분들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누구의 아빠”, “나는 누구의 남편”, “나는 누구의 딸”이라는 대답을 할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이유(why)가 나가 아니라 타인이 되어버린 결과입니다. 타인이 자신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신 안에 들어오려면 그 누군가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합니다. 내가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나는 부모의 자녀가 됩니다. 저는 부모의 굳은 살을 보면서 내가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자녀로 살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학교 성적이 좋지 않아 부모의 마음이 아픈 것을 보면 나도 행복하지 않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럴 때 인간의 행복 정도에 오릅니다.

행복은 이제 생존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누군가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 됩니다. 하지만 나만을 만족시키던 동물적 행복보다는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행복을 느낍니다. 이런 사람이 먹고 마시고 돈이나 명예욕으로 살아가는 동물적 인간을 볼 때는 불쌍함을 느낍니다.

7조 원의 재산을 모았지만, 결국 사형을 선고 받은 한룽 그룹 류한 회장은 다시 태어나면 그저 가족과 함께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죽기 전에 비로소 가족의 행복이 동물처럼 생존을 위한 행복만을 좇을 때보다 더 크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만약 세속-육신-마귀의 욕망 추구가 행복이라 여기는 이가 있다면 아직 동물적 행복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물론 행복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가족의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화 ‘정이’(2023)에서 내용 상 안타까운 것은 딸이 사이보그 엄마를 풀어줄 때 자신에 관한 기억을 지워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존재는 “나는 나”로 살아갑니다. 생존만이 행복이고 돈과 음식과 힘만이 행복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사이보그 엄마는 죽더라도 딸을 위해 싸울 때가 더 행복했습니다. 딸은 엄마에게 그 행복의 가능성을 빼앗아버린 것입니다. 인간이 동물보다 행복하다 할 수 있는 이유는 동물보다 더 뜨거운 가족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자녀 행복의 수준이 있습니다. 인간이 사실 나의 ‘이유’(why)를 다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나는 가족을 위해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족이 나를 존재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다시 눈을 만들어주고 생명을 되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존재 이유는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자동차의 존재 이유가 자동차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 부모도 존재하게 만든 창조자가 나의 존재 이유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정체성을 바꿔주러 오셨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살과 피가 되셔서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영하는 성체가 바로 하느님의 피 흘림임을 믿기만 한다면 우리 안에 하느님께서 거하게 되시고 이제 나의 존재 이유는 하느님의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해집니다. 하느님만 있으면 되니 이 세상 것들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게 없어지는 것입니다.

또 슬퍼집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인데 하느님의 자녀 수준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고 다른 수많은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라 믿지도 않고 그저 인간으로, 혹은 동물로 살아감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온유합니다. 자기 힘으로 하느님 자녀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랑하거나 화낼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의로움에 주립니다. 오직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로움만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자비롭습니다.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자비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또한 마음이 깨끗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됩니다. 세상의 생존 법칙에서 벗어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박해를 받습니다. 다른 이들은 다 자기를 나라고 하고 누구의 자녀나 남편이라고 말하는데 그 사람은 자신을 하느님이라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교만을 참아내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쁘고 행복합니다. 나의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복권에 당첨되어 이제 돈을 바꾸기만 하면 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것만 대답해주십시오. “당신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하느님 자녀의 행복을 주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행복은 우리 정체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제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믿읍시다. 그러면 그 믿음이 내가 어떻게(how) 살아야 하는지 알려줄 것이고 무엇을(what) 해야 하는지 알려줄 것입니다. 삶이 육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시작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내가 누구를 기쁘게 하려고 사는지 생각해봅시다. 나를 기쁘게?, 가족을 기쁘게?, 하느님을 기쁘게? 이것이 나의 행복 정도를 말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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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2023년 1월 29일
  |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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