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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주님의 마음? 내 마음?
조회수 | 2,477
작성일 | 08.02.28
젊은 이교도 아가씨 “산세리트” 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열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 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어, 사제에게 자신의 소망을 피력하기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사제 면담에 앞서 그리스도교 성인들을 다룬 책과 그들의 저서를 닥치는 대로 읽어 두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책들을 밤낮없이 열심히 읽었습니다. 이제는 충분한 준비가 되었다고 믿은 산세리트는 자신 있게 사제를 찾아가 자신의 소망을 정중하게 피력했습니다.

“존경하올 신부님, 저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있나요?”
아가씨는 열심히 대답했습니다.
“알다마다요.
저는 성녀 데레사의 성스러운 단순,
성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가난,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사도적 열정을 비롯하여 여타
무수한 성인들의 삶을 두루 섭렵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무지의 구름」과 십자가의 성 요한이 쓴 「영혼의 어둔 밤」,
성녀 데레사가 저술한 「내면의 성」도 줄줄 외우고 있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사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딸이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니요?”
산세리트는 의아해하며 반문했습니다.
“신부님,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지요?”

『이야기 속에 담긴 진실』중에서

이야기 속의 산세리트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많은 저서들을 읽어봅니다. 하지만 그녀는 정작 알아야 할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마치 찐빵에서 소(앙꼬)를 빼어놓고 빵만 먹은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사람은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님을 보고, 눈을 뜨게 해 주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는 왜 그 사실 하나만으로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요?

2독서인 에페소서에는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기준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에 두어야 함을 뜻합니다.

눈먼 사람은 그 기준에 따라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반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리사이들은 그 기준을 율법에 맞추고 있습니다. 율법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에 의미가 있음에도 겉으로 드러난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판단 기준을 어디에 맞추어 두고 있습니까? 진정 주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것에 맞추어 두고 있는지, 아니면 겉으로 드러난 보기에만 좋은 것에 맞추어 두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사순시기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지금, 주님 마음을 더 잘 알고 행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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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박필범 야고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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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과 보이는 사람

오늘 주님께서 “나는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라고 하시며, ‘저희들은 지금 잘 보고 있읍니다’라고 하는 바리사이인들에게 ‘너희가 눈이 멀어있으면 차라리 낫겠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잘보고 있다고 하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이 말씀의 속 의미,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요? 육신의 눈과 실제 눈으로 보는 것만을 가지고 이해하려한다면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육신의 눈과 시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눈과 영적인 식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고등학생 자녀가 있는데, 눈에 보이는 시간이 아깝고, 눈에 보이는 점수가 소중해 주일미사도 가지 않고, 주일학교 교리는 아예 거들떠 보지 않는다면, 눈에 보이는 점수는 올라갈 수 있어도, 자녀의 장래에 영혼의 먹구름이 드리우는 것은 보지 못한다는 것이입니다.

그러나 현재 눈에 보이는 점수 보다 장래에 더 크게 작용한 하느님 축복에 대한 영적 식별을 가지고, 일요일에는 학교 공부를 삼가고 주일미사와 주일교리를 충실히 한다면, 당장은 점수가 좀 덜 나올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축복속에 장래 더 크게 성장함을 보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사제들에게는 이러한 영적 식별이 보이고 또 미래에 어떻게 될는지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장래의 더 큰 행복을 위하여 영적인 권고를 해주는데, (영적인) 귀가 열린 사람은 이를 받아들이지만, (영적인) 귀가 닫힌 사람은 -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인들처럼-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 항상 두통으로 고생하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 자매의 자녀는 공부는 잘하는데 재수를 하고 있는 중이었고, 이 자매는 자녀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 항상 근심 걱정을 하느라 머리를 앓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권고로 본당신부와 면담을 하게 되었는데, 면담을 하다보니, 이 자매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이 눈이 보이듯이 확신이 왔고, 나는 이 자매님에게‘너무 가정일 자녀 일에만 신경쓰지 말고, 딸 입시는 내가 책임져 줄 테니, 그 구역에 공석으로 되어있는 반장 일을 해보시라’고 권하였습니다. 이 자매는 본당신부의 권고를 잘 받아들여서 나는 그 자매의 머리에 안수를 해주었는데, 신기하게 그 날로 수 년 동안 아파온 두통이 거짓말처럼 없어졌다고 하였습니다. 그해에 그 자녀는 서울의 명문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주일학교 교사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영적 분별의 한 예이지만 사목생활을 하다보면 이러한 일은 수도 없이 많이 체험을 합니다. 주님께 봉사하는 것에는 반드시 영적 축복이 있는데, 이는 금방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영적으로 눈이 뜨인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는 축복입니다. 사제들과 주교님들의 복음적 사업에 일치하면서, 그리고 주님 말씀을 매일 소중히 새기는 가운데 이 영적 식별(눈뜸)의 은혜를 얻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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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합수 신부
  |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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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나는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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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기운을 완연히 느낄 수 있는 4월 첫째 주. 나뭇가지의 새싹이 겨울의 추위와 싸워 이기고 막 돋아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추위를 극복하고 움터 나오려는 새싹들에게 수고했다고 인사하는 여유를 가져봄이 어떨까 합니다. 이런 여유를 가지면서,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참된 회개와 보속의 시간을 은혜로이 가지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먼 사람을 고쳐주신 것을 문제 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현장에
★눈멀었던 사람
❶이웃 사람들
❷바리사이들
❸유다인들
❹눈을 보게 된 사람의 부모가 등장합니다.

이 인물들 가운데 누가 옳고 바르며,
참 신앙인으로 성장해나가는지 정확히 나타납니다.

❶이웃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금까지 보아온 소경이 치유된 것을 보고 눈을 뜨게 된 경위를 묻습니다.

이에 ★눈멀었던 사람은 ‘예수님께서 진흙을 개어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대로 했더니 보게 되었다는 것’과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은 어디에 계신지 모르겠다는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이웃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 치유받은 소경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갑니다. 예수님께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준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❷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치유해주신 경위를 다시금 확인하고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 죄인의 행동이었는지 아닌지 논란을 벌입니다. 그에 대한 결론이 나지 않자, 바리사이들은 눈멀었던 이에게 “당신의 눈을 뜨게 해준 이를 누구라고 생각하오?”라고 다시 묻습니다. 이때 ★눈멀었던 사람은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라고 주저하지 않고 대답합니다.

❸유다인들은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고는 치유된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앞을 볼 수 있게 된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어떻게 그가 보게 되었는지 묻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렇게 했다는 증거를 얻으려했으며, 또한 치유된 소경과 그 부모를 모두 예수님과 같이 고발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❹눈을 보게 된 사람의 부모는
유다인들에게 ‘그가 자신들의 자녀이며,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라고 진술합니다. 그러나 그 부모는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는 모른다고 하며, 직접 물어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부모는 유다인들이 두려웠기에 회피성 대답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하면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다인들 사이에서 이미 합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부모는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❷바리사이들은
그 부모가 이렇게 회피성 발언을 하자, 눈이 멀었던 사람을 불러 예수님을 죄인으로 인정하라고 설득합니다. 그러나 ★눈멀었던 사람은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라고 확고히 대답합니다. 그리고는 다시금 눈을 뜨게 된 경위를 묻는 말에, ★눈멀었던 사람은 “당신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것입니까?”하고 반문합니다.

이에 ❷바리사이들은 그 사람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전혀 그렇지 않다고 강하게 부인합니다. 이 말을 듣고, ★눈멀었던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준 사람을 죄인으로 취급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예수님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분이며,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임을 고백합니다.

이 말에 ❷바리사이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하고 그를 밖으로 내쫓습니다. 그가 밖으로 쫓겨났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너는 나를 믿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이에 ★눈멀었던 사람은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합니다.

이 사건의 현장에서 시비를 바로잡고, 사실과 진리를 옳게 증언하며, 최종적으로 예수님의 사람이 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눈멀었던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의 눈으로 보지 않고, 고정된 틀 속에서 눈에 보이는 대로만 보았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돌아가시게 하였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자신은 어떤가 생각해보니 내 방식대로 보아 잘못 판단하여 상대방을 곤경에 빠뜨린 경우가 많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 주에는 그동안의 잘못을 뉘우치며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바치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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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최인각 신부
  |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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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새롭게’ 보게 해주는 빛

‘만남’의 차원에서, 첫 만남일 때에는 상대의 생김새, 옷차림, 말투, 경력, 에티켓 등 외적인 모양에서 호감을 갖습니다. 하지만 좀 더 발전된 만남일 대에는 그러한 것보다 마음, 생각, 느낌, 의지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관심사의 변화는 누군가의 참모습을 알아가는 데 있어서 육적인 눈보다는 마음의 눈, 영적인 눈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1독서에서 사무엘을 일깨워주신 하느님의 방식과도 꼭 일치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눈에 진흙을 발라주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행동을 얼른 이해할 수 없지만, 순수하게 따르는 눈먼 이의 모습 안에 그가 지닌 믿음의 크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며 의심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끝까지 믿습니다.

비록 그의 육적인 눈은 ‘어둠’에 쌓여 있었지만 주님 앞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장애, 고통, 천벌이 아니었습니다. 눈멀음은 오히려 마음으로 영적으로 도움을 갈망하는 겸손과 열정을 불러일으킨 계기였습니다.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삶의 맨 밑바닥을 헤메고 잇던 그를 제대로 보게 해 주고 일으켜 준 것은 예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었고 한 줄기 빛과 같은 그분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는 이전까지 제대로 볼 수 없던 것들의 참모습을 주님 안에서 비로소 보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멀쩡한 눈으로도 예수님의 정체성을 믿지 않던 이들은 자신들이 ‘볼줄 안다’고 생각했기에 눈이 보여주는 외적인 것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에게 확실한 무언가가 있다고 자만하던 그들의 눈에는 ‘안식일’이라는 굴레만이 보였을 뿐입니다. 이미 마음의 눈과 문을 닫아버린 그들에게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은 빛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스스로 어둠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창조 때 최초의 모습, 순수하고 참된 인간의 모습을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내면을 끊임없이 비추어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빛에 이르기 위해 “선과 의로움과 진실만”을 실천할 것을 권고합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눈앞의 시련이나 유혹들은 우리 마음의 눈을 쉽게 가리곤 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오신 이유는 내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신앙인답게, ‘파견된 이’라는 뜻의 실로암 못가에서, 곧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예수님을 통해 마음의 눈을 다시 말끔히 씻어내도록 합시다. 그리스도님의 빛은 밤이 없는 낮이며, 끝이 없는 낮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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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성규 요한 보스코 신부
  |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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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의 브레이크를 열심히 밟아도 차는 계속 전진하려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나 생각도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하면 계속 그 방향으로 가려해서 잘 멈추지 못하게 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사무엘은 임금이 될 사람을 선정하기 위해 이사이의 아들들을 찾습니다. 그는 속으로 ‘임금이 될 사람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와 같은 사람을 보자 ‘이 사람이 임금이 될 사 람인가?’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고 말씀하시며 사무엘의 생각을 저지하십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시며 어둠 속에 살아가던 그 에게 빛을 안겨주시지만,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법에만 집착하며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생각만으로 판단하고는 소경이었던 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립니다. 그러나 정작 빛을 얻은 그 당 사자인 소경은 “주님, 저는 믿습니다”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고 전합니다.

우리도 때로 이러한 실수를 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이 사람은 나쁜 사람’, ‘못 믿을 사람’이라고 단정 짓고는 의심하고 미워하고 심판하고는 합니다. 마치 공부 잘하는 학생은 착한 학생, 모범 학생이라고 무조건 믿는 것처럼 말입니다. 수십 년을 사람의 몸에 대해 공부하고 치료한 의사가 아무리 “선생님 몸 상태는 이러이러 합니다”하고 알려 줘도, “됐어, 내 몸은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하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왜 그러는 것일까요?

예수님께로부터 빛을 얻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한쪽으로만 내 치닫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도 어두움이 있고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부분을 우 리는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은 느끼지 못한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불안감 을 느끼면서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빛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 마음속을 있는 그대로 환히 밝혀주셔서, 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다 볼 수 있게 해 주시는 ‘빛’ 말입니다.

오늘 2독서를 통해 바오로 사도는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 빛으로 밝혀집니다. 밝혀진 것은 모두 빛입니다”하고 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우리가 가진 것들 중 좋은 것만을, 예쁘고 아름다운 모습만 을 드리려 하지만, 이미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어둠과 그림자도 알고 계십니다. 굳이 좋은 것만을 가려 서 주님께 봉헌하려 마십시오.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드리면 주님께서 당신의 빛으로 밝혀주셔서 어둠 도 빛으로 만들어 주실 것이니 말입니다.

어느덧 사순 제4주일입니다. 사순 시기, 어떻게 보내고 계십니까? 때로 지금의 자신이 부족하다 해 도, 처음에 가졌던 결심이 퇴색하고 있다하더라도, 그러한 어둠은 주님께서 주시는 빛으로 몰아내고 빛 자체이신 주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다시 일어서 나아갑시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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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노인빈 엑벨트 신부
  |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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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우리가 바라야 할 표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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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눈이 멀었던 사람이 이제 눈을 뜨고 다시 보게 되어도 그 일을 놀라워하고 기뻐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인정한 사람과 범주 내에서 벌어진 일이어야만 받아들일 수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오. 그러나 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오.” 이와 같이 그들은 자신들이 세워놓은 가치와 신념에서 벗어난 일들에 상당히 경계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전통이라는 기치로 새 술을 새 부대에 넣으려하지 않고(루카 5,36-38), 인습마저도 전통이라는 범위 안에 넣어서 우리가 쌓아 놓은 성을 무너뜨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가 그 성안에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를 때가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믿지 않는 이들을 보고 어떤 마음이 드셨을까요? 아마도예언자는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고향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으셨을 때와 같이,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을 것입니다(마르 6,5-6).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이들을 질책하기보다는 눈을 뜬 사람의 믿음을 확인하시고, 그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하십니다.

우리는 눈먼 이가 눈을 뜨는 것과 같은 기적을 바라거나,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것이 저절로 해결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표징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느님의 표징들이 있고 나면,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마태 12,39-40).” 이레네오 성인은 요나의 기적에서 말하는 사흘 밤낮을 자신의 책 『이단 반박』 5권 31장에서 ‘예수님 부활의 전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오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향한 신앙 안에서 기대해야 할 표징은, 물론 눈먼 이가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귀머거리가 들을 수 있는 ‘기적’도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이 세상 삶을 마칠 때 당신의 부활과 같이 우리도 부활하리라는 믿음과 희망이 우리 마음 안에 쌓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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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한창용 시몬 신부
2017년 3월 26일
  |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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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요한복음 9장 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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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 유럽을 여행하는 분들이 놓치지 않고 방문하는 명소(名所)를 하나 꼽아보자면 쾰른 대성당일 것입니다. 쾰른 대성당은 고딕 양식을 대표하는 교회 건축물로서 1996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동방박사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장소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쾰른 대성당 내부는 무척 어둡습니다. 하지만 내부의 어두움은 성당을 찾은 순례자들에게 방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성당 내부가 어두울 때, 성경의 이야기와 쾰른 대교구의 역사가 담긴 유리화를 선명하게 감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부로부터 빛이 창문을 통하여 성당 안으로 비추어 들어오면서 어둠 속에 숨겨진 ‘이야기’는 드러나고, 유리화는 단순한 ‘예술품’ 차원을 넘어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거룩한 장소’가 됩니다. 어둠 속에 있는 순례자들은 빛의 도움을 받아 하느님의 구원 역사 안으로 인도됩니다.

요한이 전하는 오늘의 복음 말씀에는 이러한 빛과 어두움의 대조 관계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주었고, 이로써 그는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치유를 받고 눈을 뜨게 된 소경에게 예수님은 주님이자 구원자입니다.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소경은 짧지만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9,38).

소경은 죄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를 ‘어두움’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빛”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그를 “빛의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증언하듯이, 그는 어둠이었지만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빛이 되었습니다(에페소편지 5,8 참조).

우리 역시 복음 속의 소경처럼 한때 ‘어둠’이었으나 예수님을 통하여 ‘빛’이 되었습니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우리를 찾아오시어 “빛의 자녀”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동안 앞을 볼 수 없었던 우리는 예수님의 도움으로 눈을 뜨고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치유를 받아 우리의 믿음은 더욱 깊어질 것이고, 그 믿음 안에서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자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 각자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복음 말씀 속에서 만난 그 소경처럼
우리도 구원자 예수님께 믿음을 고백합시다.
“주님,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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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
2020년 3월 22일
  | 03.22
528 45.2%
믿을 마음이 생기지 않는
이유는 죽을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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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몬테팔코라는 동네에 가면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가 모셔져 있습니다. 8백 년이 지났지만 신체가 썩지 않는 성녀로도 유명합니다. 성녀는 어렸을 때부터 수녀원에서 살아서 정결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신심이 강한 분이셨습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매우 슬픈 표정을 하고 계셨습니다. 성녀가 예수님께 왜 그리 슬퍼하시느냐고 물었더니 예수님은 “지금 시대에 내 십자가를 꽂을 굳은 땅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너무 슬퍼진 성녀는 “예수님, 그러면 당신의 십자가를 제 심장에 꽂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성녀의 심장에 꽂았습니다. 아마도 성녀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심장에 불화살을 맞은 것처럼 큰 고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성녀가 20대 중반쯤 기도 중 탈혼 되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동료 수녀들은 성녀의 심장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하였습니다. 분명 그런 일이 있고 나서의 수녀님의 변화가 그 수녀들에게도 믿음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녀들이 글라라 수녀의 몸을 열었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는 큰 심장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심장을 칼로 갈라봤더니 그 심장에서 예수님의 수난 도구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채찍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심장 살이 그런 모습으로 응고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글라라 성인은 수백 년 동안 매우 많은 사람에게 자신이 가진 믿음을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에게 옆 아씨시의 글라라 성녀를 더 많이 찾고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는 거의 잊혀가고 있습니다. 16세기까지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만큼 관심을 끌었던 성녀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왠지 부담스러운 분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그분의 십자가의 칼로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것이 된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나를 죽이는 십자가로 연결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성당에서도 십자가 없는 예수님의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십자가의 신심을 잃으면 참 예수님의 신심도 잃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만나면 우리에게 먼저 십자가를 질 수 있느냐고 물어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왜 태생 소경이 치유된 것을 보고도
유다 지도자들은 믿지 않고 그
를 내쫓았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가단합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거부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왜 가난하고
병들고
죄의 삶을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 쉽게 받아들였을까요?

그들은 삶이 지치고 힘들어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반면 부자고 지식과 권력을 지닌 이들은
왜 예수님을 배척했을까요?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변해야 함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고
표징을 보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믿을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표징이 부족하다고
자기 합리화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변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아주 작은 표징에도 민감합니다. 마태오는 그저 “나를 따라라!”(마태 9,9)라고 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갑자기 모든 것을 집어던지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얼마나 세리로 살아가는 삶이 지겨웠으면 그렇게 쉽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유다 지도자들은 없던 눈이 생겨서 온 사람의 증언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만약 자신들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버리면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함을 직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눈을 뜬 태생 소경은 아무리 미소한 표징이라도 잡고 따라갔습니다. 누군가 진흙으로 자신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자 그렇게 하였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어도 그 사람은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손해 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죄를 짓고 사는 지금의 자신이 너무나도 지긋지긋하여 조금이라도 변화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탈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그렇게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을까요? 파라오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파라오의 지배 아래에서 종살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없다면 누구도 우리 자신에게서 탈출할 수 없습니다.

사랑받는 자 마카리우스 성인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속에서 주님이 더없이 힘겹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마카리우스는 주님께로 달려가서 십자가를 대신 져 드리겠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주님은 그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실 따름이었습니다. 마카리우스는 또다시 주님께로 달려가 간청했습니다.

“주님, 제발 저에게 십자가를 넘기십시오.”

그러나 이번에도 주님은 그를 모른 체하시며 십자가를 양어깨로 무척 힘들게 걸쳐 매고 묵묵히 걷기만 하셨습니다. 마카리우스는 가슴이 아프고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끈기 있게 주님 곁을 따라붙으며 십자가를 넘겨 달라고 다시 한번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이윽고 주님은 여전히 십자가를 양어깨에 둘러맨 채 발걸음을 멈추더니 마카리우스에게로 몸을 돌리셨습니다. 그러고는 마카리우스가 당신을 처음 목격했던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이것은 내 십자가란다. 네가 조금 전에 내려놓은 네 십자가는 저기 있지 않으냐? 내 십자가를 져 주려고 하기 전에 네 십자가부터 져 나르려무나.”

사랑받는 자 마카리우스는 뒤로 돌아 주님이 가리키신 지점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그의 십자가가 모래 바닥에 나둥그러져 있었습니다. 그는 얼른 그 십자가를 걸머지고 주님이 기다리시는 곳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와 보니 놀랍게도 주님의 어깨에 걸려 있던 십자가가 없었습니다. 마카리우스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의 십자가는 어디로 간 겁니까?”

주님은 빙긋이 웃으며 대꾸하셨습니다.

“아들아, 네가 사랑으로 네 십자가를 질 때는 내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진배없단다.”

변화는 이전의 자신을 십자가에 죽이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지금의 자신을 죽이기 싫다면 구원을 주는 믿음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으라고 하는 것부터 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을 씻었는데 눈이 낫지 않았다면 사람들로부터 커다란 비웃음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존심을 버리고 실로암에서 눈을 씻는 행위는 이미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의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의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아야 할 만큼 자신을 힘들게 하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표징으로 보일 것이고 쉽게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자신을 버리기를 원치 않는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믿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십자가에 죽을 마음이 없다면
구원을 주는 믿음은 생겨날 수 없습니다.
믿지 못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죽을 거 같아서 안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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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2020년 3월 22일
  | 03.22
528 45.2%
[수원] 빛과 어둠의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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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는 빛과 어둠 사이의 ‘대립’에 관한 것이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요한 1,5).

이것은 빛이신 하느님께서만이
인간들의 눈을 열어 보게 해주시지 않으면
눈먼 상태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도 고쳐주실 수 없는 ‘소경’들이 있다.

자신들이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잘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모습이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있다.”(요한 9,41).

제2독서 : 에페 5,8-14: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이 빛과 어둠의 대립은 ‘어둠’ 속에 살다가 세례를 통하여 “주님 안에 있는 빛”(8절)이 된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 속에서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삶을 위하여 사도 바오로께서는 우리에게 ‘빛의 자녀답게’ 살며, ‘모든 어둠의 행위’를 어디서든 또 누가 행하든지 고발하고 단죄함으로써 피하라고 권고하고 있다(8-11절).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의 책임도 커진다. 즉 빛의 증거자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불의한 일들, 악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발할 수 있는 ‘예언적’ 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존재 전체, 삶 전체를 통해 입증되어야 한다.

복음 : 요한 9,1-41: 태생 소경의 치유

태생 소경에 대한 치유 기적은 우선,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까지 ‘밝음’의 상태에 서서히 이르고 있는 태생 소경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의 진실성이 입증되는데도 그 분명한 사실을 부정하려 하면서 신적인 현존의 표지 확인을 고집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유다인들의 모습이다. 보기를 간절히 원했던 소경은 눈을 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28절) 하느님과 율법을 온전히 안다고 하던 자들은 장님이 되고 만다.

이 태생 소경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기적을 이루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다. 신앙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모든 적대행위와 거짓된 논리를 이긴다. 그 소경은 치유 받은 후 모든 사람과 대립하고 있다. 부모들도 위험을 느끼고 모든 책임을 아들에게 돌린다(20-22절). 또한, 명백한 사실을 부인하기 위해 온갖 협잡이 이루어진다(16.24절). 그러나 이 모든 문제의 쟁점은 기적이 아니라, 예수에 관한 것이다.

지금 예수께서는 곤란한 문제를 일으키고 계시며, 사람들 간의 의견을 엇갈리게 하는 분도 그분이시다. 기적을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생기는 문제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치유 받은 소경에 의해 해결되고 있다. 소위 ‘지혜로운 자들’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그런 사실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28-33절 참조).

그 소경의 신앙이 점점 명백해져 가고 있는 사실도 주목해볼 만하다. 예수님께 관해 연달아 질문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예수님을 ‘예수라는 분’(11절) ‘예언자’(17절)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33절) 이라고 하고 마지막에 예수님을 만날 때, ‘주님’(38절)으로 고백한다. 여기서 그의 신앙이 완전해진다. 이제 완전한 의미에서 ‘보게 된다.’ 육체적으로 시력을 얻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사람의 아들’(다니 7,13-14)이신 영광의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유다인들은 소경이 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율법의 근본정신에는 귀를 막고 또 하느님의 ‘판단’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눈이 먼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그분을 ‘죄인’으로 배척하고 있는 유다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눈이 먼 것은 그들이 빛을 피하여 어둠으로 숨어버렸기 때문이며, 그들의 탓인 것이다.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이미 단죄의 심판을 내리신다(39절). 이 심판은 따지고 보면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 내리는 단죄의 ‘심판’이다. 인간들의 구원이나 멸망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의 ‘빛’으로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능력 여하에 달려있다.

또 여기서는 세례성사에 대한 가르침이 있음을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소경이 실로암 연못에서 눈을 뜬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세례의 물을 통하여 밝은 빛을 얻으며,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 ‘주님’으로 고백하게 된다. 히브리서에나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례가 ‘빛’으로 제시되고 있다(히브 6,4; 10,32; 에페 5,14 참조). 소경이 눈을 뜬 ‘실로암’ 연못의 이름도 의미가 있다. 그것은 ‘파견된 자’(7절)라는 뜻이다. 이 파견된 자는 바로 성부께 ‘파견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 연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낫게 한 것은 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세례는 하나의 ‘빛’이다.
그 빛은 우리를 모든 사람에게 보내어
그들도 우리의 빛에 참여함으로써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
다른 사물,
다른 사건들을 하느님의 눈,
즉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야 하는 빛이다.

제1독서에서도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
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우리가 주님께 받은 빛을 통하여
항상 어둠의 세력을 이기는
그리하여 주님의 빛이 세상에 퍼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빛이 빛나는 곳이면
어디서나 어둠은 물러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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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20년 3월 22일
  | 03.22
528 45.2%
보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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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병은 하느님께 죄를 지은 결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병이 있는 이들과 가까이하지 않으려 합니다. 부정한 존재라고 여겼기 때문이죠.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태생 소경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했죠. ‘죄를 지
을 기회가 없던 아이가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은 부모의 죄다.’

태생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눈을 뜨게되죠. 예수님을 통해서 그의 죄든 부모의 죄든 용서받게 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치유된 소경은 안식일에 치유를 받은 것이나 죄를 사함의 권한이 하느님에게만 있는 것이란 생각과 자신이 죄를 용서받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합니다. 그저 보지 못하던 세상을 깨닫게 된 기쁨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달랐습니다. ‘왜 안식일에 치유했느냐? 어떻게 인간이 병을 치유할 수 있느냐?’라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병을 치유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죄의 용서는 하느님께 유보된 것인데, 알지도 못하는 웬 청년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어떻게든 흠을 찾으려 했던 것이죠. 그래서 그 이후에 기적을 체험한 사람에게도 찾아가고 앞을 볼 수 있게된 사람의 부모에게도 찾아가서 흠을 찾으려 노력합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눈앞에 있는 메시아를 알아보
지 못했고 자신들에게 찾아온 구원의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제대로 보지 않았고’ ‘다른 곳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바라본 이는 눈이 떠지는 것과 더불어서 예수님의 제자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눈이 멀었다’는 것은 영적인 눈이 감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잘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율법을 잘 준수하며 하느님의 뜻을 지키고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명이 었던 율법은 ‘조상들의 전통’과 합해지며 그 의미가 퇴색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든다면, 하느님께서는 하얀색 물감을 주셨지만, 유다인들은 그 물감에 조금씩 다양한 색을 섞었고 온갖 색이 섞인 색을 하얗다고 믿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세상은 눈에 보이는 우물 크기가 전부입니다. 벼룩은 자신의 몸의 100배를 뛸 수 있지만, 닫힌 병에 들어가게 되면 병의 높이만큼만 뛸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잘 보고 있다’고 고백하며 살아가지만, 정말로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나에게 다가온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어둠 속에서 ‘잘 보고 있다’라고 여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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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윤호 윤호요셉 신부
2023년 3월 19일 주보
  |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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