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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마음의 눈으로
조회수 | 2,896
작성일 | 08.02.29
여름 철 마루에 누워 하늘을 바라볼 때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별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하늘과 우리 사이에는 이물질이 쌓이고 더 이상 하늘의 별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에서 멀어진 별은 어느덧 마음속에서도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매연과 공기의 이물질이 하늘을 가리어 버리듯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이물질은 하느님을 볼 수 없게 가리고 있습니다. 아는 것이 많아지고, 교육 수준도 높아졌지만 정작 하느님의 순수함과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우리입니다. 이러한 우리 모습이야말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온갖 지식과 우리만의 가치 기준으로 예수님을 외면하고 있는 우리, 많은 것을 알고 쌓아가고 있지만 그 잣대에 갇혀 사랑하지 못하고, 진리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자매여러분,
참된 진리는 눈에 보이는 것도, 단순히 법으로 판단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사랑의 마음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느끼고 탄복하는 가운데 볼 수 있는 무엇입니다. 비록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마음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하늘 가득한 별을 다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단순히 법조문이 아니라 참된 하느님의 뜻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 분명 법 규정으로 보았을 때 잘못된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생을 장님으로 빌어먹을 수밖에 없었던 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의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이 훨씬 더 값지고 아름다운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율법의 근본정신일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을 진정 바라보길 원한다면 마음의 눈으로, 선입관 없이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보이지 않는 하늘의 별을 바라보듯, 예수님에게서 또 세상에서 참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선입관 없는 마음의 눈으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들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넌 그런 사람이니까, 넌 내가 잘 아는 사람이니까, 또는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이 모든 생각은 이웃 안에 숨어있는 하느님을 가리는 이물질과 같은 것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사랑을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있는 곳이라면 반드시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오늘 마음의 눈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느끼고, 하느님을 발견하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 눈으로 당신을 직접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순수한 마음 안에서 아버지를 느끼고 또한 믿습니다. 오늘 선입관 없는 마음의 눈으로 우리의 이웃에게서 당신 사랑을 느끼고 바라볼 수 있게 하고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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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김선류 타대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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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눈을 떠야합니다

은총에 눈을 뜨니

작고하신 구상 세례자 요한 시인께서는 노년에 참된 신앙의 깊이를 깨달으시고 ‘은총에 눈을 뜨니’라는 시를 쓰셨습니다.

“이제사 비로서 두 이레 강아지만큼 은총에 눈이 뜬다.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 만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 이제야 하늘이 새와 꽃만을 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공으로 기르고 살리심을 눈물로써 감사하노라.”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화를 보면, 성인께서 젊은 시절의 방탕함을 접고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장면이 감동적으로 그려집니다.

한번 은총에 눈을 뜬 성인의 눈에는 이제껏 보아온 세상 만물이 시인의 표현처럼 예전 같지 않습니다. 나비와 꽃, 하늘을 나는 새들, 태양과 시냇물 모두가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게 됩니다.

세상 만물이 그러할 진데 하느님 창조물 중 가장 걸작인 인간에게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뒤 성인은 나환자의 흉측한 모습에서도 신령한 하느님의 빛을, 생명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는 세상 모든 만물이 찬미의 대상이 되며 감사를 드려야 하는 내 형제요, 자매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가난의 삶을 추구하며 살게 됩니다. 그 뒤부터는 세상 근심과 걱정, 욕심들이 사라지게 되어 자유를 살아갑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같은 눈뜸의 생활인 것입니다. 은총의 빛이 내 눈에 들어와 하느님 사랑의 손길을 느끼는 것, 그 같은 손길에 늘 감사드리며 사는 것, 그것이 신앙의 기적이며, 기적의 신앙을 사는 것입니다. 때때로 믿는 우리들은 세속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고, 세속의 눈으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눈은 열렸으나 영혼의 눈은 감겨 있었습니다. 그러니 삶이 기쁘지 않았고 하느님 창조의 모든 만물에 신령한 빛이 뿜어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사무엘 예언자 역시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여 선택하려 합니다. 우리 역시 사물과 사람을 눈에 보이는 모습, 내 자신의 가치관과 주관에 의해 자주 판단하려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 7).

눈을 뜬 자와 감은 자

예수님께서는 자주 눈을 뜬 이들에게 눈감은 소경이라 하시고, 눈을 뜨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볼 수 있는 자들이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태생 소경은 눈을 뜨게 되고, 예수님 곁에서 온갖 기적을 보면서도 마음의 눈을 감은 바리사이들은 볼 수 없게 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질책하셨습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마태 13, 14~15).

바리사이들이 볼 수 없었던 것은 세상 명예와 기득권에, 그리고 자신들의 교만에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라는 교만에 자신들은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 소경들이었습니다.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남을 깨끗하게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하며, 가르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하고, 비추기 위해서는 빛이 되어야 하며, 남을 하느님께 가까이 이끌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야하고, 거룩하게 하고, 인도하고, 지혜롭게 충고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거룩해져야 합니다.”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 현대인들 역시 눈을 뜨지 못한 소경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거지가 죽었는데, 그가 가지고 다니던 깡통이 너무 묵직하여 사람들이 자세히 살펴보니 황금이었습니다. 그 거지는 불탄 집에 갔다가 우연히 단단한 그릇을 발견하고는 깡통으로 쓰면 좋겠다 생각하여 가지고 다녔는데, 그것이 황금인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귀한 것을 귀히 알지 못하니 거지로 사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소중함을 소중히 여기지 못할 때 그 신앙은 눈먼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일전에 어느 일간 신문에는 “신앙이 깊은 나라는 가난하다?”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신문은 미국의 시사 월간지의 내용을 인용하여 “종교의 힘이 강한 나라일수록 가난하고, 1인당 국민소득이 높아질수록 종교의 영향력이 줄어든다.”는 통계를 실었습니다. 참된 신앙의 눈이 멀어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또다시 눈을 뜨고 있어야 함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배광하 신부
  |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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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뜬 장님이란?

예수님께서는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하고 그에게 이르셨다(요한 9, 6-7).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감탄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눈멀었던 그 사람은 눈을 뜨면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알고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눈이 멀쩡했던 바리사이에게는 예수님이 오히려 안식일 날 율법을 거스른 죄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전해 주시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람은 두 가지 눈으로 세상을 보며 살아갑니다. 하나는 ‘육체의 눈’이고 하나는 ‘마음의 눈’ 입니다. 어떤 눈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마음의 눈이 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눈뜬 소경이 참으로 많습니다. 재물에 눈먼 사람, 술에 눈먼 사람, 도박에 눈먼 사람, 미움과 증오에 눈먼 사람,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눈뜬 장님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육체의 눈만으로 살아가기에 턱없이 부족합니다.

세상의 많은 문제들을 제대로 보고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바로 ‘마음의 눈’ 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맑지 않으면 마음의 눈으로 본다고 할지라도 밝게 보일리가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 안에 편견과 시기, 질투와 증오, 불만과 욕심과 미움, 이런 것들이 박혀 있으면 마음의 눈도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생각대로 세상을 보게 될 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에서처럼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바리사이와 같은 이들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 엄청난 기적 앞에서도 감동은커녕 악한 마음을 품고 눈을 뜨게 된 경위를 따져 묻는 데에만 열을 올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감사해야 할 분을 오히려 죄인으로 몰아붙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의 눈은 떠 있지만 마음의 눈이 소경이 되어버린 사람이 저지르는 딱한 행태입니다. 눈뜬 장님이란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바른 믿음은 마음의 눈으로, 하느님과 그 분의 말씀을 생명의 빛으로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람과 세상의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순 시기는 우리에게 마음의 눈, 영적인 눈이 뜨이는 더없이 감사한 은총의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믿음의 눈을 뜨도록 도와주십시오.

임헌규 신부
  |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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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얼굴의 낙서

어느덧 사순시기의 네 번째 주일입니다. 창 밖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햇살처럼 주님 부활의 기쁨도 한결 가까이 다가오는 듯합니다. 우리를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감내하신 주님 수난 안에서 하느님 자비의 얼굴을 바라보며 설레는 마음으로 부활을 준비합시다.

어린 시절 여름신앙학교를 가게 되면 아침마다 자주 보던 모습이 있습니다. 바로 얼굴에 우스꽝스러운 낙서를 한 채 돌아다니는 친구들의 모습입니다. 밤늦도록선생님들 몰래 놀던 친구들이 먼저 잠든 친구들의 얼굴에 이런저런 낙서를 해 놓은 것입니다. 특히나 재밌는 것은 자기 얼굴에도 낙서가 그려져 있는 줄 모른 채 다른 친구 얼굴의 낙서를 보며 웃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얼굴에그려진 낙서를 우리의 죄로 비유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얼굴에 낙서가 그려진 줄도 모른 채 여전히 잠에 빠진 모습, 남들의 낙서를 보며 웃고 있는 모습은 죄에 물든 자신의 꼴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보여줍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 먼 이를 고쳐주신 오늘의 말씀에는 이 사건을 두고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여러 인물이 등장합니다. 주님의 기적을 믿지 못한 이웃 사람들은그와 닮은 사람이라 이야기하기도 하고, 바리사이와 유다인들은 그가 앞을 보게 된 사실을 두고 그와 그의 부모에게 따져 묻기도 합니다. 그의 부모들은 자신의아들이 분명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음을 알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대답을 피합니다. 그러나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난 이로 낙인 찍혔던 오늘의 주인공은 예수님을 만나며 온전한 믿음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대로 ‘우리는 잘 본다’ 며 착각하는 이들과, 눈먼 이로 어둠 속에 살았으나 참된 빛의 자녀가 된 이가 분명하게 대조됩니다.

회개의 시기를 보내며 자주 나의 삶을 성찰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론 나는 이만하면 괜찮다는 착각 속에 진정으로 나의 내면을 깊숙이 바라보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슬쩍 내 몸을 본 뒤 팔과 다리에는 낙서가 없으니 얼굴도 깨끗한 줄 착각한 채 돌아다니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마음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겉에 보이는 모습만 치장하는 어리석은 이의 모습입니다.

죄의 어둠에 빠져 잠들어 있던 우리를 주님은 빛의 자녀로 일으켜 주셨습니다. 잠에 취해 내 얼굴의 꼴이 어떤지 모르던 우리는 아침 햇살과 함께 눈을 떴습니다. 우리 얼굴이 지금 어떤 모습인지 제대로 비추어 봅시다. 우리의 내면을 밝게 비추어주시는 주님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돌아봅시다. 내 얼굴은 깨끗하다, 나는 잘 본다며 착각하는 어리석은 이의 모습을 버리고 빛의 자녀답게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밝게 드러냅시다.

▦ 춘천교구 안효철 디오니시오 신부 : 2017년 3월 26일
  |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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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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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오늘은 사순 제4주일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기적을 표징이라고 표현합니다. 단지 하나의 기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목격한 이들을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끌어 가는 사건이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확증하는 표징으로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태생 소경의 치유는 요한복음서 안에서 나타난 7가지 표징 중 6번째입니다.

사건의 시작은 이러합니다. 구걸하며 살아가는 태생 소경을 예수님과 제자들이 목격합니다. 제자들은 그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 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라고 이르신 후 태생 소경에게 나아가십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이르십니다. 그 말씀을 따른 그는 앞을 보게 되어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 큰 기적의 사건 앞에서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놀라거나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냉담하기 그지없는 반응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그가 구걸하던 이가 맞는지에 대해 논쟁합니다. 그들에게 그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고 증언하고서야 논쟁이 끝을 맺습니다. 그제야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유대인과 바리사이들은 그 일을 보고 들어도 믿지 않았습니다. 하필 그 일이 있던 날은 일하는 것이 금지된 안식일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진흙을 개어 붙여 준 행위는 치료 즉 일이었기에 예수님은 율법을 어긴 죄인이고, 죄인에게서 그러한 기적이 일어나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부모를 찾아 그가 태생 소경이 아니었을 가능성까지도 확인합니다. 그러나 눈 뜬 이는 다릅니다. 그는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해 여러 번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이 반복 안에서 그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확신하게 됩니다. 처음 유대인들에게는 “모르겠습니다.” 라고만 말하지만, 바리사이들에게는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표징이 태생소경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지만 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우리는 잘 본다’ 말하며 안식일에 치유를 하였으니 죄인이라 이야기하는 이들과 눈 뜬 이는 대비됩니다.

복음의 태생 소경이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잘 본다고 말하는 눈뜬 장님입니까? 아니면 참 빛이신 예수님께 나아가는 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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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김영태 시몬 신부
2023년 3월 19일 주보
  |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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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이리 나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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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우리는 사순 제5주일 맞이하고 있습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겠지만 이번 주일부터 미리 십자가와 성화 상들을 가려둘 수 있기에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성금요일이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음을 느낄 수 있는 때가 되었습니다. 저는 6년 만에 교우 분들과 함께 보내는 사순 시기라 매일 강론과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며 복음 말씀을 더 열심히 들여다본 덕분인지 그동안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했었던 것을 새롭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순 시기 전례 때 듣는 말씀들이 자신의 죄를 돌아보는 성찰과 통회의 과정을 거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고 배운 뒤에 예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해 나가도록 함으로써, 마침내 주님의 부활에 온전히 함께할 수 있도록 단계별로 이끌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 수련 프로그램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세 가지 유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자리한 죄와 부족함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그분을 바라보았습니다.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을 통해 참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임을 다시금 기억하는 가운데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은 분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물이시며 나의 모든 어둠을 밝히는 참된 빛이심을 느끼는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그분께서 우리 모두를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시는 분임을 분명하게 체험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이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우리는, 죄와 어둠 속에서 벗어나도록 밝은 빛을 비추시는 그분을 만난 우리는 이제 그분께서 베풀어 주시는 참된 생명과 부활의 기쁨을 함께할 수 있도록 초대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무덤에서 끌어내어 약속된 땅으로 이끌어 주시는 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다만 부활에 대한 참된 믿음을 위해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이 무덤 속에 있는 존재, 죽은 이들 가운데 있는 존재였음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날 것’ 이라는 제자들의 어리석은 대답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라자로의 경우와 같이 주님을 믿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다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은 참된 생명이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먼저 우리 자신 안에 자리한 죄의 어둠을 깨달읍시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향한 너무나도 분명하고 생생한 주님의 목소리를 들읍시다.

“(디오니시오)야, 이리 나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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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안효철 디오니시오 신부
2023년 3월 26일
  |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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