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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소라도 잡아야 하는 거 아냐?
조회수 | 2,534
작성일 | 08.03.01
오늘 복음에서 한 태생 소경이 예수님에게서 치유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고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른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준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고 그를 동네에서 내쫓아버립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입니다. 소경이 눈을 떴으면, 그것도 평생 소경이 눈을 떴으면 동네 입구에 플래카드 걸고 대대적으로 환영해야하지 않습니까? 소라도 잡아서 동네잔치를 벌여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를 내쫓다니요. 인정사정없는 나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은 기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법적으로 따지고 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뜬 날이 안식일이었다고 예수님을 윽박지릅니다. 소경은 눈을 뜨고 바리사이는 장님이 되어버렸습니다.    

태생 소경의 증언을 들어봅시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17절)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25절)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30.33절)

그는 동네에서 쫓겨난 후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님, 저는 믿습니다.”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38절)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 신앙을 갖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빛을 가로막는 어두움이 있는지요?
이번 사순절 동안 그 어두움을 없애기로 노력합시다.
우리도 소 잡을 일을 만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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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방윤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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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순 제4주일이며, 동시에 예로부터 장미주일이라고 부르고 있는 주일입니다. 그러하기에 오늘은 자색 제의 외에도 핑크색인 장미색 제의를 입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생전에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데리고 타볼산에 오르셔서 천상의 신비를 미리 보여주어 그들에게 앞으로 닥칠 신앙의 역경을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을 주셨듯이, 교회에서도 사순절의 한 중간에 있는 우리들에게 주님의 자비와 사랑의 결실을 미리 맛보게 하여 이 사순절을 참으로 의미 있게 잘 지내고 주님 부활의 신비에 우리도 동참할 수 있도록 오늘 기쁨의 주일을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서는 독서와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소개하고 있으며, 그 빛이신 예수님을 올바로 알아볼 수 있는 참된 믿음의 눈이 열리도록 우리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두 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사람에게 두 눈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눈이 없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으며, 산과 강, 꽃과 나무의 아름다움인들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사람에게 두 눈이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고 확인할 수 있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눈을 갖고 태어났지만 제대로 볼 수 없다면,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도, 자연의 아름다움도 보지 못한다면 그런 눈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의 눈에는 난시, 근시 그리고 원시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외적인 눈의 문제는 과학적으로 전부 해결할 수 있지만, 내적으로 문제가 생긴 눈의 문제, 곧 이해타산으로 굴절된 시각을 가져 모든 사물과 사건을 왜곡하는 사람은 그러한 치료로는 고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적인 마음의 눈이 먼 사람에게 세상은 단절이요, 구속일 뿐입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세상까지도 묶어 어둠 속을 헤매게 만드는 것입니다.

도로의 상습 차량 정체구간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언제쯤 정체가 풀릴지! 짜증내고 있는데 앞에 있던 택시 하나가 옆의 길로 빠지더랍니다. 잔머리 굴리기 좋아하던 사람 하나가 택시 기사는 길을 잘 아니 따라가 보자고 했습니다. 샛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열심히 나아갔습니다. 같은 생각을 가진 몇 대의 차량이 뒤따랐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나가도 큰길은 나오지 않고 드디어 택시가 멈춰 섰습니다. 그 뒤를 따라서 줄줄이 멈춘 차를 앞에서 택시 기사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줌 좀 누려는데 왜 자꾸 따라와요?” 자기 생각만 하고 따라간 사람들은 황당한 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이기적인 마음은 우리 삶에서 안타까운 일을 많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뿐만이 아니라 제자들까지도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사람의 그 불행이, 당시의 종교적 관습에 따라 그의 부모나 혹은 자신의 죄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들은 어떠한 사물이나 사람을 대할 때에 늘 자신들의 잣대에 의해 판단을 내리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빛으로 오셨으며,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시는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은 그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그 사람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섭리를 보셨던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사무엘 예언자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어 주님께서는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말씀하시며 그의 눈을 뜨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에게 참된 빛을, 새로운 삶을 선사하셨을 뿐만이 아니라 그의 마음의 눈까지 뜨게 만들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영원한 생명까지도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반면에 너무나 잘 보인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아집과 자존심에 가려 곁에 계신 주님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점점 장님이 되어 갔으며 결국 주님으로부터 배척을 받았던 것입니디. 그들은 하느님의 놀라운 표징을 보고도 그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고 결국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붙이고 하느님 표지의 증인까지도 내쫓아버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을 보시고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9장 39절)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삶을 위한 영적인 눈을 열어주시는 분이시지만, 마음이 닫히고 아집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만심으로 인하여 하느님의 표징도 보지 못하고 하느님의 은총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
외로움에 지친 나머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선생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사람들이 왜 저를 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나도 외롭습니다.”
그 선생님은 이미 이 사람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이 사람이 어느 곳에 문제가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사람을 유리창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창밖을 손으로 가리키며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고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은 다시 그 사람을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거울을 가리키며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제 모습만 보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다시 이렇게 물었습니다.
“같은 유리인데 어찌하여 창유리에는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이고
거울의 유리에는 당신의 모습만 보이는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거울을 바라볼 때 내 모습만 보이는 것은 물론 거울의 유리 뒤에 칠한 수은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마음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마음에 이기심과 욕심이라는 마음의 때가 끼면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고 나만 보게 됩니다.
사람도 하느님도 보이지 않고
어떠한 하느님의 말씀에도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유리창을 닦아내는 이유는
밖을 잘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기심과 욕심을 버리고,
마음의 창을 유리처럼 맑게 해야
영적인 눈이 떠지며 이웃이 보이고
하느님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아집과 자존심이 단단해져서 감동할 줄 모르고, 남의 말은 들을 생각도 안하며 내 것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자신 안에 가득 찬 자존심을 허물 수 있다면 우리는 많은 시간과 기회를 얻게 될 것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버리면 많은 사람이 다가오고 많은 일을 하게 됩니다. 삶이 풍요로워지고 닫혔던 마음에 새로운 사랑과 희망의 찾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바리사이파 사람과 같이 눈 뜬 장님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겠습니다.

우리도 처음 영세 받을 때에는 마치 소경이 눈을 떴을 때처럼 모든 것을 새롭고 경이롭게 생각하고 감사하며 신앙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눈에 먼지가 쌓이고 양심은 무뎌져서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을 하게 될 뿐 아니라 단편적인 지식으로 인하여 하느님을 알아보는데 장애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하느님도 안 보이고
이웃도 안 보이며
끊임없이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제의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예전에 로마에서 공부를 할 때에,
성서 공부를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잠시 지낸 적이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 때에 안 베다 신부님께서 ‘예수님 무덤성당’에 계셨습니다. 반갑게 그분을 만나 뵙고, 신부님의 안내로 여기저기를 방문하였습니다. 서쪽 문을 지나 이슬람교도들이 장사를 하는 시장을 통과하는데 유난히도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도 궁금하여 신부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신부님, 여긴 이상하게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께서는 “그 사람들은 모두 열심한 이슬람교도들인데, 그들의 성지인 ‘메카’에 다녀와서 스스로 눈을 멀게 한 사람들이야. ‘메카’를 보았으니까 이젠 세상에서 다른 것을 볼 것이 없다는 거지. 다른 것들을 봄으로써 눈이 더러워지기 전에 눈을 멀게 한 거야. 대단하잖아!”

저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날 종일토록 남의 손에 이끌려 거리를 거닐던 그 이슬람 사람을 생각하였습니다. 심지어 “나도 예수님의 삶의 자리를 보았는데 과연 나는 내 눈을 찔러 소경이 될 수 있는가?”라는 생각에 깊이 빠져서 나 자신의 부족한 믿음을 슬퍼하였습니다. 아직도 저는 제 눈을 멀게 할 수 없으니 계속 저의 부족한 믿음을 슬퍼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눈을 깨끗이 하기 위해 감고 다니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눈이 뜨여 지금까지 제대로 보지 못했던 하느님 사랑의 표징들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사람의 육적인 눈만을 뜨게 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마음의 눈을, 영적인 눈을 뜨게 만들어 주셨듯이, 저의 영적인 눈을, 마음을 눈을 뜨게 하여 주실 수 있음에 용기를 갖고 주님께 한 걸음 한 걸음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 마음의 눈이 뜨이지 않는 사람은 부모의 사랑이나 형제간의 사랑, 이웃의 사랑, 또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을 보려면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볼 수 있고 진실을 볼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의 눈을 흐리게 만드는 장애물을 씻어내는 시기가 바로 이 사순 시기인 것입니다. 욕심과 이기심으로 오염된 우리 마음을 정화하는 시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순 시기를 은총의 시기라고 말합니다. 큰 축제를 앞두고 교회는 신자들에게 마음의 때를 씻어내는 시간을 의무적으로 갖게 합니다.

부활과 성탄 판공성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은혜로운 이 사순 시기에 눈먼 소경이 주님의 은총을 힘입어 주님께 신앙을 고백하고 찬미를 드렸듯이 영세 때의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회개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찔러 소경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십자가의 길인 회개의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삶은 우리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어렵습니다. 우리 안의 묵은 아집과 세상의 욕심 등 주님께로 나아가지 못하는 장애물은 하느님의 말씀으로만 씻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을 볼 줄 알뿐 영원한 세상을 보지 못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오늘 예수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바리사이파 사람과 눈먼 사람의 모습이 공존합니다.

비록 우리의 눈을 찔러 눈을 멀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을 닦듯이
마음의 찌꺼기를 정성껏 닦아내어
영적인 눈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축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이 미사를 봉헌하며 오늘 복음의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사람의 삶이 바로 우리들의 삶이 되어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주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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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민병섭 바오로 신부
  |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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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파견된 아들 구원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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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은 각자 또는 부모로부터 내려온 죄의 결과라고 믿어 왔습니다(탈출기 20,5; 34,7; 신명기 5,9; 민수기 14,18; 시편 79,8; 토비트 3,3).

예수님은 그러나 소경이 된 이번 경우 모든 인간적 잘못 형태를 배제하십니다. 인간의 고질병은 생명의 창조자, 하느님의 구원이 발생하는 기회가 됩니다.

하느님의 업적을 완성(성취)하는 것은 모든 이를 위한 빛(이사야 42,6; 49,6), 세상 안에 있기까지 세상의 빛, 당신 파견(3,21; 5,17.36; 6,29)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진흙을 개어 맹인의 눈에 바르는 행위는(욥기 10,9; 이사야 64,8) 진흙으로 아담을 창조하시는(창세기 2,7) 하느님의 행위가 분명히 재연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는 여섯째 날은 바로 메시아의 날입니다(요한 2,1). 새 인간의 탄생, 창조를 말하고 있습니다. 새 인간은 바로 예수, 하느님 아들 메시아입니다. 기름 부음 받는 것, 씻어주는 것, 바라보는 것, 파견받은 것, 모든 요소들은 세례적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파견된 아들 구원자이십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이름으로 증거하며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치유된 소경에 대해,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을 하여 율법을 준수하지 않은 것에 대해 딴지를 걸며 개입합니다(13-17). 유대인들의 우두머리들은 소경의 부모를 불러 묻고(18-23), 또 소경을 불러 심문하듯 말합니다(24-34).

예수님의 부르심(성소)은 일정한 스케마(’지나가시다-보시고-부르시다’)로 시작됩니다.

태생 소경, 고통 중에 있는 사람입니다.
누구의 죄 때문인가요?
구약에서 부모의 죄가
자녀들에게 덮어 씌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일이 그에게도 드러나기 위해서입니다.
고통 중의 소경은 하느님 영광의 징표를 따릅니다.
그에게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현시는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이는 성령과 함께 아버지의 최고의 업적입니다.

주님은 밤을 말씀하십니다.
밤에는 아무도 일할 수 없습니다.
원수들의 시간,
어둠의 힘입니다(루가 22,53).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5절).
빛은 늘 생명이고 어둠은 밤이고 죽음입니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개어서 맹인의 눈에 바르며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시오." 말씀으로
맹인은 곧 가서 씻고 보게 되었습니다.

실로암 못은 오늘날 세례 물을 의미합니다.

이웃들이 소경으로서 구걸하다 치유 받은 그를 바라보자 정말 소경이었던 자인가 묻습니다. 결국 소경을 시험하기 위해 사람들은 바리사이들에게 데려갑니다. 예수님의 치유행위는 율법에 따라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는 불법으로 낙인찍힙니다(14절). 치유된 자는 같은 치유체험을 고백합니다(15절).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죄인이랍니다.

그러나 치유된 자는 예수님이 예언자라고 고백합니다(17절). 그러자 사람들은 부모를 불러다가 물어보고 부모는 치유된 당사자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 치유된 사람과 바리사이들이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영적 체험자와 율법, 형식주의자와의 대화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새 모세 주님 안에서 생명과 창조 역사 안의 구원자, 해방의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저 딱딱하게 굳은 형식적인 율법만, 죄만을 고집합니다. 하느님은 죄인들의 청을 들으시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죄인들을 위해 어떤 힘, 능력도 주시지 않으십니다(욥기 27,9; 시편 65,18; 잠언 28,9; 이사야 1,15). 그러나 누구든지 주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면 그의 청을 들어주십니다(31절).

치유자 주님과 치유된 자가 다시 만났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인자를 믿는가’라고 물어보십니다.
당신은 인자를 보았습니다.
실물로도 보지만
인자를 믿는 것이 인자를 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습니다(38).
치유 받은 자가 이제 영적으로도 완전히 눈을 떴습니다.
믿는 자들을 위해서는 구원을 보겠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은 보지 않는 자들을 위해 빛을 주십니다.
보는 자에게는 볼 수 없도록 하십니다.
후자는 바리사이와 같이
거짓으로 보거나 의심하여 보는 자들에게 해당됩니다.

사순절은 우리가 받은 거룩한 세계를 기억하는 것이고,
빛으로 태어난 것을 기억하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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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곽승룡 신부
  | 03.31
528 45.2%
하느님의 영광은 가난하고 소외받은 자들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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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끼 100원 나눔운동본부에서는 작년 11월부터 나눔 밥차를 운영하면서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 교구민의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 들에게 따뜻한 한 끼의 식사로써 하느님의 은총과 교구민의 사랑을 전달하는 것은 참 으로 행복한 사목임을 고백해 봅니다.

간혹‘ 요즘 밥 굶는 사람들이 어디 있냐?’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가진 것이 없어 노숙을 하고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참 많이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같은 은총을 주시는데 왜 한쪽은 먹지 못해 굶어 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 비만으로 고민해야 하는 지를 묻곤 합니다. 이는 가진 자들이 독점하고 함께 나누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오 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치유를 통하여 가난과 고통 그리고 죄악이 단순히 나쁘고 피하고 싶은 것이 아닌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기 위함임을 알려줍니다. 그럼으로써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구원의 빛이심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역경과 고난의 시간들을 시시각각 마주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을 탓하고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좌절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련의 시간 속에서 신앙인들은 눈먼 이의 믿음을 통하여 우리가 나아가야 할 구원의 길을 봅니다. 그리고 고통과 고난의 시간 안에서 하느님의 일이 과연 나의 믿음을 통해 어떻게 변화될 것인 지 그 답을 찾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를 진정 구원하여 주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바리사이들 은 눈먼 이를 의심하고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갔지만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 하여 희망을 찾고 믿음과 사랑의 실천으로 나와 이웃이 함께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가난하고 소외받고 고통받는 이들 편에 서 계시며 기적과 치유를 통해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십니다. 이제 우리도 욕심으로 감았던 신앙의 눈 을 떠 내 주변의 가난한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의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하느님의 일이 나를 통해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은총의 사순시기 안에서 내가 돌아보지 못한 어려운 이웃에게 신앙의 눈을 돌려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다짐하고 실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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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유창연 사도 요한 신부
  | 03.31
528 45.2%
[대전] 내게 주신 은총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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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이 엊그제였던 것 같은데 벌써 사순시기의 중반이 되었다. 이 시기의 모든 전례는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고통을 묵상하며 영광스런 예수님의 부활 파스카 축제를 준비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예수님의 파스카 잔치에 초대된 모두는 회개, 단식, 자선, 용서, 정화란 말들이 상징하듯이 이를 생활 속에 실천하며 사순시기를 보낸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얼마나 부활을 잘 준비하고 있는가?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기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

본당에서 사목할 때와는 다르게 병원에서 일을 하다 보니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어쩌면 다른 어느 곳보다 간절함과 절실함이 가득한 사람들이며 마지막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안타깜게도 모두가 그 희망과 바람을 이루지는 못한다. 오히려 더 절망에 빠져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 중에는 열심한 신앙인들도 있는데 고통 앞에서 너무도 쉽게 무너져 버리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울 뿐이다. 왜 고통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결까?

그것은 개개인이 얼마나 많은 은총을 받고 살고 있는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세례성사를 통해 나의 모든 죄가 사해졌으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체성사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은총 속에 있다는 믿음이 약해진 것은 아닐까? 이보다 더 큰 은총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께 청하기만 하고 받 기 만을 바라고 있지 정작 내가 받은 은총에 대한 기억은 잊고 감사는 하지 않는다. 때문에 쉽게 절망하고 세상의 유혹에 너무도 쉽게 무너져 버린다.

오늘 복음에 등장한 태생 소경은 고통 앞에 무기력 해지는 우리에게 은총을 체험한 사람의 본보기가 된다. 기적을 체험한 소경은 예수님을 통해 보게 되었지만 세상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괴로워한다. 바리사이들 동네 사람들 심지어 부모님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젊은이는 자신이 받은 은총을 기억하였고 끝내 예수님께 “주님 저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였으며 이제 영적인 눈까지 뜨게 되었다. 이처럼 내가 받은 은총에 대한 기억은 모든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빛을 발하며 더 큰 축복으로 다가온다.

얼마 남지 않은 사순시기에 내가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내 삶에 주어지는 모든 악의 유혹과 시련을 이겨 내어 축복의 부활절을 맞이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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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창선 안드레아 신부
2017년 3월 26일 대전교구 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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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태생 소경의 눈을 치유해주십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된 인간의 눈은 우리들에게 하느님의 속성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눈을 통해 이웃을 보고 또 이웃을 통해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듯이, 그렇게 하느님께서는 바로 우리들은 항상 지켜보시고 보호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의 눈동자는
엄청난 신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안과 의사들은 우리의 눈동자가
자동으로 조절된다고 말합니다.

가령 사람의 눈에 먼지나 모래와 같은 이물질이 들어오려고 하면
어느새 눈꺼풀이 감겨 눈동자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런 작용이 가능한 것은
눈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구조 때문입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사람의 눈에는 자그마치 30만 개의 회로가 있고
1억만 개의 신경세포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그 무엇이라도 눈에 들어오려고 하면
이것을 눈동자가 감지하고
눈꺼풀에게 지시하여 자동으로 감겨 보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열악한 환경과 위기 가운데서도
하느님께서는
눈동자처럼 항상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하느님의 눈은 앉아서 천리를 본다는
신비의 눈보다도 더 뛰어납니다.
이 눈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다 보고 계십니다.

특별히 코로나-19로 고생을 하며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들의 그 모든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보고 계십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의 과정에서도
우리들의 마음이 이웃들에게서 멀어지지 않도록
서로에게 힘이 되는 격려의 기도를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코로나-19로 전염으로 고생하는 환우들이나
치료하고 봉사는 사람들에게도
주님께서 용기와 희망을 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보고 지켜주신다는 것을
믿고 있는 신앙인입니다.
희망 속에서 서로 격려하며
모든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우리 모두에게 주시기를 성모님과 함께
주님께 기도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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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민병섭 바오로 신부
2020년 3월 22일
  | 03.31
528 45.2%
“신앙”으로 눈뜨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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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반 경기인 ‘축구’는 전반전이 끝난 시간이 참 아름답습니다. 감독과 선수들은 경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새로운 작전을 세우고, 후반전을 향한 희망과 용기로 경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반은 지났지만, 아직도 반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사순 시기의 전반전이 끝났습니다. 초조하거나 두려운 마음의 게임은 질 수밖에 없지만, 사순 제4주일을 봉헌하는 우리는 초조하거나 두렵지 않습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다.”(로마 5,20)는 말씀처럼, 나약한 인간의 욕망 때문에 비복음적인 것에 매달리며 살아왔던 우리지만, 지난 3주간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풍요로운 은총을 허락하신 주님을 믿고 있었고, 앞으로 남은 사순의 시간 속에서도 주님의 은총을 믿는 까닭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5)

오늘 복음에서 태생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준 예수의 사건은, 소경의 간절한 기도를 넘어 소경을 향한 ‘예수의 자비’였습니다. 세상에 눈먼 우리는 태생 소경보다 더 부끄러운 모습이지만, 우리는 지난 3주간의 사순 시기를 통하여 미약하나마 십자가의 예수와 내안의 예수, 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시는 예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세상의 빛’을 선포하는 ‘기쁜 소식’은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며, 후반전을 향한 희망과 용기를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빛’으로 새롭게 눈을 뜨고 우리 앞에 펼쳐진 세상을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진흙 속에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주신 하느님을 본 것처럼, 태생 소경이 눈에 바른 진흙의 씻어냄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와 성사’인 예수를 본 것처럼, 이제 우리도 이 사순 제4주일에 ‘자비와 용서’로 다가오시는 예수의 구원역사를 바라볼 때입니다.

이기심과 욕망을 내려놓지 못하는 인간의 비겁함이 세상의 ‘진실’에 대하여 눈을 감고, ‘세상의 어두움’을 탓하고 있는 이 시대에 오늘 ‘세상의 빛’은 신앙과 세상에 대한 우리의 ‘영적 식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로암 못에 들어가 자신의 몸을 씻는 태생 소경의 이야기를 묵상하며, ‘영적 식별’을 향한 ‘화해의 성사’를 희망합니다.

두려운 마음이 아니라 치유되는 ‘감사의 마음’으로 ‘화해의 성사’에 임하고, 통회와 속죄의 시간을 넘어 ‘자비와 용서’로 서로의 ‘화해성사’를 이루며, 아직도 남은 사순의 시간에 ‘희망과 용기의 시간’으로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청합니다. 동시에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는 이 은총의 시간에 우리도 눈뜬 소경처럼, 두려움 없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
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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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박진용 F.하비에르 신부
2023년 3월 19일 주보
  |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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