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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신성과 인성의 감사로운 결합
조회수 | 2,910
작성일 | 08.03.05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이신 분으로 고백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에 바탕을 둔 고백이 아니라 성서에 근원을 둔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우리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몹시 앓고 있다는 전갈을 받고서도 곧장 가지 않으시고 "그것으로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아들도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요한 11,4)라는 말씀만 하시고는 이틀동안 지체하셨습니다. 신성을 통하여 모든 것을 아셨을 터인데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러셨나 하는 의구심을 가져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여유있어 보이는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엎드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울부짖을 때 예수님께서도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던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라도 장례식장에서 즐거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상에서의 이별을 슬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일로 인해 하느님의 영광이 높아질 것을 알고는 계셨지만 인간으로서의 슬픔과 고통을 어찌할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또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시고 곧 "라자로야, 나오너라" 하고 큰 소리로 외치셨던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그분의 인성과 신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이 사람들에게 어서 드러나 사랑하는 이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빨리 바꾸어주고 싶었던 바람이 이 외침 속에 간절히 담겨 있었을 거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그 인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이기에 이 바람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할 때 그 신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도 있었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 이 과제 앞에서 인간들이 겪어야 하는 죽음의 세력과의 처절한 투쟁이 못내 안타까워 우셨던 예수님은 사람이셨던 하느님이십니다. 궁극적으로는 행복하게 될 것을 알지만 그 과정의 아픔을 아시기에 더욱 비통해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더욱 감사한 것은, 그분은 우리를 보며 그저 안타까워만 하시는 '높으신 분'이 아니고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는 십자가의 길을 용감하게 먼저 가셨으며 여전히 우리와 함께 가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벗'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당신의 본성, 곧 하느님으로서 누리시던 그 모든 것을 우리들도 누릴 수 있게 하시려고 당신을 낮추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의 방법으로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알려주시고 증거하셨던 예수님은 하느님의 따스하고 강한 사랑의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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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도현우 안토니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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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준비

한 6년 전 쯤의 일입니다. 내외가 미사 후에 찾아와서는 안수를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아파보이지도 않는데 자매님이 암에 걸려 얼마 살지 못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형제님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했고, 병원에 가기 전 안수를 꼭 받고 싶으시다는 말씀에 안수를 해 드렸습니다. 지향은 한가지였습니다. 물론 저에겐 그 자매님을 낫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살 수 있는 시간을 늘려줄 수도 없고, 고통을 줄여 줄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그런 유혹을 받게 되고 교만함이 앞서는 것은 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현대 의학으로도 어쩔 수 없는 환자들이 사제에게 찾아와 낫기를 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한결같이 슬픈 사연이 없는 사람이 없으니 안타까움은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만일 내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하느님의 모습은 찾을 수 없을 것이며 예수님의 이름 역시 온 데 간 데 없을 것은 자명한 일이니 얼마나 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 역시 공생활을 중에 많은 이들의 아픔을 보셨고 고통에 허덕이고 가난에 굶주리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당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만나주시고 그들의 삶의 한 가운데 함께 계셔 주시며 치유해 주신 예수님. 그래서 그분의 삶은 힘든 삶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면 안쓰러움 마저 듭니다.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또 다른 유혹을 받으시는, 그것도 당신이 사랑하셨던 사람의 죽음을 다시 살려야 하시는 부탁을 받으셨을 때의 마음은 어떠하셨겠습니까! 물론 부활의 신비를 미리 알려주시고자 하신다고 하지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는 말씀을 믿고는 있지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당신의 숨은 마음을 감히 읽고자 합니다.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도 사랑이요, 당신을 알 수 있는 방법도 사랑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 유혹과는 달리 사랑이 앞서서였는지 얼마 못산다는 그 자매는 의사가 놀랄 정도로, 한 마디로 기적이라는 말과 함께 암세포가 많이 사라져서 치료를 받으면 완쾌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또 다른 부활의 체험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어느새 사순시기도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이 가등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또 우리를 위한 사랑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세원 루도비꼬 신부
  |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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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라자로의 소생, 두 가지 의미

오늘 복음 말씀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를 전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돕는 자매로 등장하는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의 오빠인 라자로는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마르 타와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오빠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병이 죽을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자매를 위로하십니다. 그러나 라자로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였고,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계시던 곳에 머무르셨지만, 라자로를 만나기 위해서 유다로 향하십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며 죽은 라자로를 만나셨고, 그를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일으키시기 위해 향하셨던 유다는 돌을 맞아야 하는 곳,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실 수도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라자로를 살리기 위해 당신 목숨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것입니다. 유다 로 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분의 비장함과 라자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다시 살아난 라자로. 라자로의 소생 은 예수님의 부활을 미리 알려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라자로의 소생은 예수님의 부활과는 달리 생물학적인 소생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떠올리기에는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라자로’라는 이름은 히브리말 ‘엘르아잘(Eleazar)’의 축 약으로 이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라자로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힘이 그에게 전해졌습니다.

라자로 소생의 첫 번째 의미는 완전한 의미의 부활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다시 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이 희망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행하신 기적, 죽음이라는 한계를 지닌 사람이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오히려 죽음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가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를 다시 살리시기 위해서 당신은 죽음의 위험 속으로 기꺼이 뛰어 들어가신 것입니다.

사순 시기는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서 가장 소중한 목숨마저도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희생을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라자로를 살리기 위해서 죽음을 자청하신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이 우리를 다시 살리실 것이고, 그 살아남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라자로가 그랬던 것처럼 소생으로 그치지 않고 육신과 영혼의 완전한 부활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그분의 수난과 죽음의 길을 함께 걸어가 며 우리도 남을 위해서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의 삶을 살아 야 할 것입니다.

▦ 의정부교구 오혁 요한 보스코 신부 : 2017년 4월 2일
  |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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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대 장례 관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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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유적지에서 흔히 발견되는 매장 양식이 있습니다. 산기슭에 형성된 동굴이나 일부러 깎아 만든 굴을 가족 무덤으로 썼던 것입니다. 굴 안에는 방을 여럿 만들고 시신을 누일 돌 판을 두었습니다. 시신을 안치한 뒤에는 냄새가 배어 나오지 않도록 돌을 굴려 입구를 막았습니다. 관은 대체로 쓰지 않았고, 시신은 상여로 운반한 듯 보입니다(2사무 3,31). 이런 식으로 묻은 뒤 1년가량을 기다린 다음, 동굴에 들어가 남은 뼈를 모아 그곳에 따로 마련된 구덩이로 옮겨 넣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후손이 묻힐 공간을 마련했던 것이지요.

아브라함이 사라를 묻은 막펠라 동굴(창세 23장)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라 이후 아브라함, 이사악과 레베카 그리고 레아가 그곳에 묻혔고, 야곱도 같은 곳에 묻어 달라고 유언합니다(창세 49,29-33). 판관 8,32에서는 판관 기드온이 죽어 아버지 요아스의 무덤에 묻혔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 한 구덩이 안에 온 가족의 뼈가 모이게 되므로 ‘조상과 함께 잠들다.’(창세 25,8; 1열왕 2,10 등)라는 표현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풍습은, 기원전 6세기 예언자 에제키엘이 본 바빌론 넓은 계곡에 뼈가 잔뜩 쌓여 있던 환시(에제 37,1-14)를 이해하게 해줍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은 야곱을 조상으로 둔 거대한 가족 공동체이기에, 그들의 바빌론 유배가 마치 가족 무덤에 묻힌 것처럼 표현되었던 것입니다.

신약 시대 매장 방식도 이와 비슷하였지만, 한 가지 변화가 생깁니다. 시신을 안치한 뒤 1년 정도 기다린 점은 같지만, 가족의 뼈를 한 구덩이에 모으지 않고 저마다 뼈관에 이장한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 시대부터 강해진 부활 사상(2마카 7,14.23; 다니 12,2 등)의 영향으로 개인의 부활을 위한 조치로 보입니다.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 학자들도 물론 있지만, 신약 시대에 부활 사상이 강해졌다는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도 처음에 관을 쓰지 않는 관습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나인에 살던 과부의 아들 장례식(루카 7,11-17)이 그 일례인데요, 여기서 “관”으로 의역된 그리스어 [소로스]는 ‘뚜껑 없는 들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라.”(14절) 하시자, 과부의 아들이 일어나 말을 하기 시작하지요(15절). 이때 덮개를 치울 필요 없이 곧장 일어났다는 점과 그것이 바로 들것의 형태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년여 간격을 두고 치른 이런 매장 풍습은, 예수님을 따라 가기 전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 달라던 이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이해하게 해줍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 주님의 공생애가 3년임을 생각할 때, 1년은 기다려 주기 어려운 시간이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옛 관습을 당시 문화에 맞춰 읽으면, 보이지 않았을 여러면을 인식하게 되어 성경을 보는 눈이 깊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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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숙 소피아 :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의정부교구 주보 2023년 3월 26일
  |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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