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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세상의 소금과 빛
조회수 | 490
작성일 | 20.02.08
[전주] 세상의 소금과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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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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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에서 ‘너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제자들)’입니다(마태오 5,1-2). 산상 설교는 신앙인들에게 하신 설교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는 “신앙인은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라는 명령이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는 “신앙인은 세상의 빛이(등불이) 되어야 한다.”라는 명령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소금과 빛에 관한 말씀을, “‘나를 따르려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등불이) 되어야 한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등불로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소금이 하는 일은, 자기 자신을 맛있게 하는 일이 아니라, ‘남’을 맛있게 하는 일입니다. 등불이 하는 일은, 자기 자신을 비추는 일이 아니라, ‘남’을 비추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일에 관해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고 말씀하셨는데, 신앙인이 ‘남’을 위해서 소금과 등불로서 살아가는 것은 곧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감수하는 것은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에 관한 말씀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살지 않는 사람은 신앙인이 아니다.” 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나는 신앙인이다.” 라고 말하려면, 우선 먼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살아야 합니다.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신앙인이라고 말할 자격을 잃게 됩니다.

또 이 말씀을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살지 않는 것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생활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생활인데, 그 ‘믿음’과 ‘섬김’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살아감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 말에 대해서, “남의 구원보다 나의 구원이 첫 번째로 중요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남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면 내가 먼저 ‘구원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남의 구원을 도와주려면 내가 먼저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방식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소금과 빛이 되어 주는 것은 남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나의 구원을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남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기도하고, “남이야 구원을 받든지 말든지 내가 구원받으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걷고 있는 길은 ‘구원의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외면하고 골방에 숨어서 기도만 열심히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사실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방식은 ‘사랑 실천’입니다. 원래 신앙생활 자체가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입니다. ‘사랑 실천’을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로 나누어서 생각한다면,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실현되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완성된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하느님만 사랑하고 이웃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하느님 사랑은 ‘거짓 사랑’이고, ‘위선’입니다.

반대로, 이웃은 사랑하면서도 하느님은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그 경우에는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고 실행하다가 방향을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하느님 사랑 없이 이웃만 사랑하다가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고서 빗나가는 일이 흔히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신앙인이 아니면서 신앙인들보다 더 사랑 실천을 잘하는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따로 판단하실 것이고, 따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그런 경우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 사랑 실천은, 아주 작은 일이라도, 결코 헛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라는 말씀은, 심판 때의 상황에 대한 말씀인데, 소금 역할을 하지 않는 소금은, 즉 사랑 실천을 하지 않는 신앙인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께도 쓸모가 없고, 이웃들에게도 쓸모가 없고, 심지어 자기 자신의 구원에도 쓸모가 없어서 ‘밖에’ 버려지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지금 계속해서 ‘사랑 실천’만 강조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그러면 ‘믿음’은 중요하지 않고 ‘사랑’만 중요하다는 것인가?” “‘믿음’은 소용이 없고 ‘사랑’만 필요하다는 것인가?” 라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올바른 믿음’과 ‘제대로 실천하는 사랑’은 ‘하나’입니다. 이 말은, 앞에서 말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믿음에서 사랑이 나오고, 사랑을 통해서 믿음이 완성됩니다. 지금 말하는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신앙인이 신앙인으로서 실천하는 ‘아가페’입니다. 이 사랑에는 불우이웃 돕기뿐만 아니라, 선교활동도 포함되고, 사람들에게 신앙을 증언하는 일과 순교도 포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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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0년 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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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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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소금과 등불의 비유를 통해서 각자에게 주어진 본연의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특별히 제자들에게 ‘착한 행실’이라는 구체적인 역할을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착한 행실’이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수 있을까요? 단순히 세상에서 말하는 어떤 착한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어느 정도 일부분은 맞습니다.

제1독서를 통해서 굶주린 이들, 헐벗은 이들, 고생하는 이들을 도와주는 행동이 ‘빛’의 행동이고 세상을 밝게 비추는 행동임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 대답을 세상의 기준에서 말하는 어떤 좋은 것들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 그 기준을 두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를 넘어서는 다른 어떤 것을 더 중요시한다면, 그것은 마치 짠맛을 잃은 소금이 되는 것이고 함지 속에 갇힌 등불이 되는 것과 같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2000여 년 전, 예수라는 나자렛 출신의 한사람이 세상에 보여준 삶의 모습을 통해서 참된 구원의 길이 열렸다고 고백하는 우리를 가리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부르는 우리에게 ‘그리스도 같음’이 빠진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덧 새해도, 연중 시기도 한 달이 지났습니다. 지난 생활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중심을 어디에 놓고 살아가는지 다시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그저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착한 사람들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에 합당하게 살았는지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에게 펼쳐질 더 많은 은총의 시간을 그에 합당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그 필요한 은총을 간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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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소명섭 바오로 신부
2020년 2월 9일
  |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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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본질과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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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모로부터 자주 들었던 말 중에 하나가 “어디 가서 무엇을 하든지 부모 욕 먹이지 말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 말은 “어디서든지 행동을 반듯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나뿐만 아니라 나를 낳으신 부모님에게도 칭찬이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금과 빛의 상징을 통해 신앙인의 본질과 사명을 설명해 주십니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고 부패를 막아줍니다. 반면에 빛은 어둠을 밝히고 사물을 식별하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신앙인의 사명이 소금과 빛과 같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소금은 신앙인의 내적 자질을, 빛은 신앙인의 외적 활동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적 자질과 외적 활동은 사실상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고대 철학자들은 “행위는 본성을 따른다.”고 했고, 중세 철학자들은 “가지지 않은 것을 줄 수는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인간이 겉으로 행하는 어떤 행위든 그것은 내면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가지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사람은 본성에 따라 행동할 것이고, 무엇이든 스스로 가진 것을 남에게 줄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신앙인은 내적 자질을 잘 갖추어 하느님의 선하심을 세상에 드러내어 세상이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잘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소금과 빛의 긍정적 역할보다 부정적 역할을 더 강조하십니다. 소금과 빛의 부정적 역할이란 곧 역할 상실을 말하는 것인데, 즉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소금과 빛의 의미와 역할이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신앙인의 본질과 사명을 역으로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는 분명 교회와 신앙인에 대한 경고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하여 꿀이나 기름, 또는 설탕이나 버터가 되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세상을 위해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이 되어 살아주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되어 살아주길 원하십니다. 교회가 설탕이나 버터가 된다면 세상의 존경과 사랑을 자기가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금과 빛이 된다면 세상의 찬양과 감사는 하느님께서 받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합시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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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박찬길 미카엘 신부
2023년 2월 5일 주보
  |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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