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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동상이몽(同床異夢)
조회수 | 399
작성일 | 20.03.21
[원주] 동상이몽(同床異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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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과 독서는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오늘 복음과 독서를 읽으며 떠오르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러한 이야기였다. 어린자녀를 둔 부모의 이야기인데, 어느 날 아이가 친구의 집에 초대를 받고 친구 집에 다녀온 것이었다. 아이는 친구의 초대에 기쁘게 다녀왔다. 집으로 돌아온 부모님은 아이에게 그 친구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어 보았다. 그 친구의 집은 얼마나 큰지? 집에 정원은 있는지? 친구의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지? 부자인지? 가난한지? 하지만 아이는 금새 얼굴이 좋지 않았다. 그런 아이에게 부모님은 왜 그런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아이는 그것은 내 친구에 대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이였다. 내 친구는 참으로 착하고, 귀엽게 생겼고 친구들을 생각하는 배려심도 깊다고…

그렇다! 우리는 한 사람을 새로 만나면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재산은 어느 정도인지? 집은 몇평인지? 무슨 옷을 입는지? 그렇게 그 사람의 외형만을 먼저 바라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오늘 독서에 나오고 있는 사무엘도, 복음에 나오고 있는 바리사이들도 그러했다.

외적으로 키 크고 멋지게 생긴 이가 임금으로 뽑힐 것이라고 하지만 그분의 시선은 달랐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그렇다. 정말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그 사람의 내면인 것이다. 그것을 먼저 보려고 하고, 그 마음을 먼저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안식일에 소경의 눈을 고쳐주고 앞을 보게 했다고 그래서 하느님이 아들이 아니고 하느님으로부터 온 분이 아니라고 하는 바리사이들, 이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형식과 틀에 갇혀 진실을 외면하는 모습. 형식에 벗어났고 틀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인정하지도 않고 받아들여 주지조차 않는 우리의 모습이라면 또 다른 바리사이의 모습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히려 그분의 말씀처럼 차라리 앞을 못 보는 소경이 되는 것이 낳지 않을까?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고 했던가? 우리는 혹시 하느님 앞에서 동상이몽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분이 바라는 모습과는 달리 세상적이고, 물질적이고, 외적인 것에 우리의 시선이 머물러 있고 그것을 이루어 달라고 하느님께 애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이제 바꿔야 한다. 이제 그분의 시선을, 그분의 마음을 먼저 배우고 담는 우리들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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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배현하 안토니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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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소경의 투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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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불통. 똥고집. 색안경. 말이 통하지 않는다. 설득되지 않는다. 귓구멍이 막혔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내 이익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한다. 내가 먹고 싶은 것만 먹는다. 내 의견이 가장 옳고 바르다. 왜 남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가재는 게 편이다. 팔은 안으로만 굽는다.

내 안의 바리사이들...

매우 유용하고 개성이 뚜렷해 보이며 때론 삶의 오래된 지혜인 것 같은 삶의 방식들. 그것들은 때론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게 한다. 아무리 맞는다고 주장하여도 내 마음의 결정은 이미 내려진 상태. 이쯤 되면 상대방은 이미 회피의 길로 돌아선 뒤다. 더 이상 떠들고 용을 써 봤자 기운만 빠질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상대방과의 교감을 단절하고 관계를 청산한다.

소경의 안타까운 투쟁사다.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현실이다.
나는 그 순간 또 다른 원수가 된다.

보지 않으려 하고 듣지 않으려 하는 것은 결국 가정과 이웃에서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을 넘어 현실과 세상과의 관계마저 단절시킨다. 소통의 부재는 모든 조직 구성원을 숨어들게 하고 야합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바리사이와 소경의 소통의 부재와 관계단절을 지켜보는 답답함이다.

예수의 죽음이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결국 예수의 부활은 관계와 소통의 부활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지나친 주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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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장수백 신부
  |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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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을 본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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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앞을 볼 수 있게 되는 치유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앞을 못 보던 사람은 주님께 육체적인 치유를 받게 되고, 나아가 신앙고백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상황을 바라보면 사실, 눈이 먼 사람은 눈을 고쳐 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을 만남으로서 거저 주어지는 치유였지요. 그 과정을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는 조금은 황당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이 먼 사람은 그 말씀에 그대로 순명함으로써 앞을 보게 됩니다. 이로써, 주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신다는 것과 그분의 말씀을 의심 없이 따르는 그 '순명의 정신이 신앙의 중요한 요소임을 깨닫게 됩니다.

한 가지 예화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떤 눈이 먼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밤길을 걸을 때마다 항상 등불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지요. 심지어는 한심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사람들이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앞을 보지도 못하는 사람이, 빛이 있으나 없으나 낮이나 밤이나 캄캄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불편한 그 등불은 왜 날마다 들고 다니는 거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이 등불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겁니다. 이 불빛을 보고 길을 좀 더 편안히 걸을 수 있고, 또 앞을 보지 못하는 저를 피해서 옆으로 비켜갈 수가 있지요.”

이 예화에서 누가 진정으로 앞을 본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등불을 들고 있는 눈이 먼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상대를 자신의 잣대로 평가해버리기 급급했지요. 이처럼, 조금 볼 줄 안다는 사실 때문에 하느님 말씀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깊이를 스스로 평가하고, 그러한 잣대로 타인을 바라보기도 하며, 여타 활동이나 희생과 봉사에 자신만만해하기도 합니다. 나름대로 열심하다고 자부하던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우리가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하고 따지듯이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 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하신 말씀을 곰곰이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역시 '우리는 잘 본다' 말하는 순간 겸손함이 결여된 '눈뜬장님'이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먼저 다가오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순명함으로써 영적인 눈이 더욱 밝아지게 되기를 희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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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심상은 베네딕토 신부
2023년 3월 19일 주보
  |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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