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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본다는 것의 의미
조회수 | 410
작성일 | 20.03.21
[의정부] 본다는 것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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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상식의 지평에서 그것은 사물을 인지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로 비춰지지만 보다 근원적인 생각으로 나아간다면 진실을 알 수 있느냐 없느냐, 혹은 진리를 깨닫고 그를 실천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삶의 자리에 닿게 될 것입니다.

수없는 사건들이 오늘의 시간 속에서 구성되고 해체되어 가지만 그 사건들이 갖는 본래의 의미를 궁구하며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든 까닭도, 본다는 것은 단지 현상을 파악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하는 근거가 되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 눈을 뜨게 된 태생 소경이었던 사나이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에 의해 행해진 많은 기적이
그 기적 자체의 신비함을 보여주는 데에 있지 않고 기적의 행함을 통한 구세사의 실현과 계시에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이 개명사건 또한 단지 보지 못하던 사람이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이적행위에 있지 않고
그저 현상만을 받아들였던 한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현상의 배후에
도도히 흐르는 진실을 깨우치게 됨으로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구세사의 한 증인이 될 수 있었다는,
진리에 대한 개명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아의 여인들>에 예언자 카산드라가 등장합니다. 트로이아의 왕 프리아모스의 딸이었던 카산드라는 아폴론에 의해 예언의 능력을 신탁 받지만 신과의 약속을 저버림으로써 아무도 그 예언을 믿어 주지 않는 저주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허공의 거품처럼 떠도는 미래의 진실” 이것이 카산드라의 또 다른 이름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미래에 대한 분명한 예언이 있는데 그것은 인류가 현재와 같은 삶의 형태(대량소비, 환경파괴, 생태계 교란, 혹은 그것의 결과이자 원인인 독점과 탐욕)를 버리지 않는다면 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미래를 보장 받을 수 없으리라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그 예언이 불행하게도 카산드라의 저주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자명한 예언을 경청하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파멸의 미래를 불러 올 수 있는 독점과 탐욕의 삶을 성공의 깃발로 삼아 미친듯이 질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보게 된 사람이 외치는 진실의 외침을 거부하고 욕설을 퍼붓는 유다인들의 어리석음이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라면 너무 과한 생각일까요?

‘희망의 원리’ 저자 블로흐는
그리스인은 미래를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지만
히브리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미래의 운명을 피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닌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의 믿음을 따라 미래에 대한 자명한 예언이 무망한 울부짖음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뒤바꿔 놓는 선지자의 경고로 외쳐 질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열어야겠습니다.

사순시기 참회와 보속은
그 시작이며 마침인 것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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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장순관 빠뜨리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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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눈 먼 사람, 안식일 그리고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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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말씀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시는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를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만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누구의 죄 때문에 그가 눈을 잃었는지 묻습니다.

당시에 악성 질병이나 신체적인 결함은 모두 하느님께 죄를 지어서 나타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의 죄도 아니라 그를 통해서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라고 하시면서 새로운 해석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그의 눈을 뜨게 해주십니다.

눈먼 사람이 눈을 뜬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그를 바리사이들에게 데려갔고, 이 사건에 바리사이들이 개입하게 됩니다.

마침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일을 하신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게 됩니다. 바리사이들의 입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눈먼 사람에게 행한 예수님의 기적은 하느님의 힘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고 단정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여러 번 안식일을 어기고 하느님을 모욕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본래 의미는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그 날을 정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안식일을 통해서 사람은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과 화해하고 그분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행하신 이 기적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눈먼 사람을 죄에서 구원해 주신, 진정한 의미의 안식일 자체인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아직 어둠 속에 머물고 있습니다.
잘못된 관습에 얽매여서
진정한 빛이신 예수님을 올바로 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자신들의 뜻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 모습은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인간적인 악습에 젖어서
빛을 빛으로 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 머무르려는 우리의 나약한 모습입니다.

사순 시기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어둠에 빠진 우리를 어둠에서 구해내어 빛으로 이끄는 자기희생이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빛이신 그분께서 어둠을 자청하셨음을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비록 죄인인 우리지만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 빛이신 예수님을 뵐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진정한 빛이신 예수님을 뵐 수 있도록 그분의 수난의 길을 함께 걸어가고, 그분의 죽음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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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오혁 요한 보스코 신부
2017년 3월 26일
  |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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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빛으로 빛을 보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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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요한 9,41)

“성당 오가는 길에 꽃 잔치가 장관이네요. 성주간과 부활이 이 시기에 있는 것이 이해됩니다. 앙상하던 가지에서 꽃이 피는 신비가 기적 같아요. 분홍 눈이 내렸어요. 머리에 손등에요. 마음도 꽃잎과 함께 봄 하늘로 오르고요.”

20대 후반에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김백한 마리아 자매가 보낸 문자입니다. 지금은 칠순을 넘기셨고, 매일 성당 가는 게 유일한 낙인 분이십니다. 옛날 보았던 화려한 벚꽃을 기억했을까요? 저는 자매님에게 이렇게 답장을 보냈습니다. 본다는 사람들은 보여지는 것에만 집중하고 거기에만 꽃이 피어있는 줄 아는데, 마리아 자매님은 눈을 감고 우주 만물에 가득한 봄을 마음에 담고 있네요.

1.제대로 본다는 것의 의미

예수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하십니다. 몸이 빛이 아니고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눈은 마음의 등불이다”라고 하셨는데, 아마 비슷한 의미일 겁니다. 몸과 맘이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몸을 바로 하고, 맘을 밝히지 않으면 본다는 것이 자칫 자신을 묶는 어리석음이 될 수 있겠습니다. 눈은 진정한 의미의 감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것만을 진실이라고 보면 그리될 수 있습니다. 진정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고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고도 합니다. 하느님은 겉모습이 아니고 속마음을 보신다고도 합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39절) 잘 본다고 말하는 바리사이들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이렇게 들립니다. ‘보지 못한다고 할 때,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잘못을 바로잡을 여지도 생긴다. 그러나 너희는 잘 볼 뿐만 아니라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니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구나. 따라서 너희들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어설프게 본다(안다)는 것이 그만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고 말았구나.’

2.어떻게 하느님의 일로 드러낼 것인가?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그 누구의 죄도 아니고,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3절) 시각장애인, 앞이 보이지 않는 분들을 통해 어떻게 하느님의 일이 드러날 것인가? 우리가 그분들에게 눈이 되고 손발이 되어 드려야 한다는 의미일까요? 하느님의 일은 사회복지 차원을 넘어섭니다.

복음의 태생 소경은 거침이 없습니다. “내가 바로 그 눈먼 자다.”(9절)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36절)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37절) “주님 저는 믿습니다.”(38절) 그의 답변은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본다는 이들은 보이는 것에 주눅 들지 모르지만, 내면이 밝은 이들은 자기 길을 갈 뿐입니다.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무시하지 않지만, 또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분들 앞에선 하느님도 길을 비켜주실 것 같습니다.

지리산 일출을 본 적이 있습니다. 먼저 칠흑 같은 어둠부터 시작합니다. 그다음 여명의 순간이 한동안 지속됩니다. 드디어 손톱 끄트머리로 보이는 해가 올라옵니다. 조금씩 올라오는 순간순간 세상이 제 모습과 자기 색깔을 찾아갑니다. 제 눈이 있어 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 빛으로 빛을 본다는 시편 말씀이 새롭게 와 닿았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주님! 제 마음속에 빛을 넣어주십시오. 당신 눈으로 새롭게 보겠습니다. 당신 빛으로 빛을 보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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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서춘배 신부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3월 19일
  |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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