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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주일 성경 말씀 해설
조회수 | 238
작성일 | 23.01.12
"예수님께서는 누구십니까?" 본문 해설

I. 서론

하느님은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려는 인류의 열망을 결코 나 몰라라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오히려, 당신 계획은 모든 사람이 온전히 자유롭게 살도록 하시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계획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하느님의 그런 계획이 실현되려면 예수를 체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누구신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나 바울로처럼 그 체험을 증거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 안에 잠기는 사람들은 당신 뜻을 따릅니다. 성령을 받습니다. 종・증인・사도가 됩니다. 오늘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그런 도전을 내놓습니다.

II. 성서본문해설

제1독서(이사 49,3.5-6)

하느님만이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도록 해 주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는 바빌로니아 귀양살이 시기에 서 있습니다. 예언자가 귀양살이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합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려 노력합니다. 얼마 안 있어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가리라고 선언합니다. 야훼께서 당신 종으로 삼아 보내신 인물이 자유와 해방을 안겨 주리라고 단언합니다. 사실, 오늘 제1독서 본문은 야훼의 종이 부르는 두 번째 노래입니다.

이 본문은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는 성소(聖召)라는 전통적인 도식을 채택합니다. 즉 그 부르심은 과정을 생략하는 부르심이라는 것입니다(1절). 그리고 그 부르심은 중요한 어떤 것을 전달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사명을 지웁니다(2-3절). 예언자는 자기가 헛수고만 했다고 생각합니다(4ㄱ절). 그러나 하느님이 예언자를 북돋아주십니다(5절). 그가 수행해야 할 사명을 더 분명하게 해 주십니다(6절). 오늘 전례에서 우리가 읽는 제1독서 대목은 야훼께서 종에게 말씀하시는 내용만을 담고 있습니다(3.5-6절).

여기에서 제시하는 인물이 지닌 특징은 야훼의 종이 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하느님의 가장 높은 뜻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그 종 안에서 야훼께서는 영광을 받으십니다(3절). 야훼께서 받으시는 영광은 당신 백성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도록 인도하면서 역사 속에서 현존하고 활동하시는 데 있습니다. 내적・외적 온갖 형태의 억압으로부터 백성을 벗어나게 하시는 데 하느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자기네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고 자기네 본모습을 온전히 지켜내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빛냅니다. 종은 그런 사명을 띠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야훼의 명령을 받아서, 그분의 이름으로 억눌리는 백성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종의 사명입니다.

예언자가 수행하는 사명은 야훼의 계획에 속합니다.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당신 종을 만드는 분은 하느님 자신이십니다(참조. 창조 2,7; 이사 42,6). 짓눌리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사명을 띤 종은 새로운 인간・새로운 종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해방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본모습(정체성)을 그 종에게 부여하십니다. 그것은 야곱을 당신께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뭉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당신 계획을 실현하는 사명을 맡기시기 위해서입니다(5절).

그러나 종이 맡은 사명은 특정한 백성에게 한정되는 사명이 아닙니다. 그의 임무는 보편적인 임무입니다. 6절에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국제적인 차원으로 넘어갑니다. 즉 종이 모든 나라의 빛이 됩니다. 온 세계의 온 인류 안에 생명과 자유를 심는 사명을 띠게 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2. 복음(요한 1,29-34)

예수님께서는 누구십니까?

이번 주일 복음서 본문은 예수께 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중심에 놓고 성찰하도록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에게 제안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예수께서 인류의 삶 속에서 현존하여 계심을 구체적으로 체험하려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발걸음을 성찰하고 있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단계들을 밟아나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분이 누구신지 모르다가(31절), 그분을 고통당하는 메시아로 알아보고(29절), 거룩하게 하는 분 또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33절), 하느님의 아들(34절)로 알아봅니다.

가. 세례자 요한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31.33절).

오늘 복음서 본문은 이 측면을 강조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를 모르고 있다는 말이 두 차례에 걸쳐 일종의 후렴처럼 나옵니다(31.33절). 조금 전에는, 세례자 요한은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 예루살렘으로부터 바리사이들이 요한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하여 파견한 사람들이 - 자기들 가운데 계시는 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26절). 아주 무지(無知)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 부족한 상태는 ‘앎’을 얻고 ‘체험’을 하도록 촉구합니다. 사실, 예수를 아는 일은 당신이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에 거처하시는지를 아는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를 안다는 것은 그분은 체험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를 체험하는 일은 그분과 함께 살면서 그분과 친해져야 가능합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알려면, 당신이 행하시는 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분의 사명을 그분과 더불어 수행하는 데 몸 바치는 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나.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세상의 죄를 없애십니다(29절).

물로 세례를 주면서 예수의 길을 준비함으로써 이미 예수와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은 예수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 알아봅니다. 그것은 단순한 직관이 아닙니다. 예수와 함께 한 결과입니다. 그 주장은 단순한 지적 주장이 아닙니다. 그 주장은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믿음을 세례자 요한이 이미 얻었음을 증명합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보다.’ 라는 동사는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예수 안에서 실현된 하느님의 계획을 관조하고 그 계획을 실현하는 일에 몸 바치는 사람들만이 참되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께서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를 모르고 있다가 당신을 체험하기에 이릅니다. 아람어 ‘탈랴’ 라는 낱말은 동시에 ‘종’과 ‘어린 양’을 뜻합니다. 그 두 가지 뜻을 합침으로써, 세례자 요한은 구약성서에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주제를 예수 안에서 종합합니다. 즉 예수께서는 이사 53,7.12에 나오는 야훼의 종임과 동시에 출애 12장에 나오는 파스카의 어린 양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생애의 두 측면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께서는 우리를 이집트 노예살이와 비슷한 노예살이에서 벗어나게 하고(파스카의 어린 양), 또한 바빌로니아 귀양살이와 비슷한 노예살이에서 벗어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종).

예수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는 분이십니다. 이 표현은 세상의 죄가 단 하나임을 가리킵니다. 인류 전체를 짓누르는 그 유일한 죄는 무엇일까요? 세례자 요한이 보기에, 그 죄는 아버지의 사랑에 결정적으로 응답하시는 예수를 배척하는 태도입니다.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참조. 1,10)은 죄 안에 있고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 기본적인 유일한 죄에서 나머지 죄들이 생겨납니다. 예수를 배척하고 어린 양과 종으로서 펼치는 그분의 해방실천을 배척한 결과로서 생겨납니다. 예수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분을 아는 상태로 건너가는 일은 어린 양・종이신 예수를 믿는다고 선언하고 그분을 믿고 따르며 그분과 더불어 몸 바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의 생애와 죽음은 ‘세상의 죄’를 깨부숩니다. 백성으로 하여금 모든 사람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서 살지 못하게 가로막는 불의를 결정적으로 망하게 합니다(참조. 요한 10,10).

다.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32-33절).

예수께서는 성령으로부터 기름부음과 사명을 받은 분이십니다. 성령께서 예수 위에 내려오신 일은 예수께서 메시아(구세주)로서 기름부음을 받으셨음을 가리킵니다. 하늘에서 내려와 예수 위에 머문 비둘기라는 상징은 이런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예수 안에 성령께서 거처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분을 당신이 원하시는 자연스런 거처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비둘기는 아버지께서 예수에 대하여 품고 계시는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 사랑이 예수를 아버지의 안정적이고 결정적인 거처로 만듭니다. 따라서, 예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당신 존재를 통째로 아들에게 주게 합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실현하실 모든 일(당신 생애에서 일곱 차례 보여주신 징표)은 당신과 늘 함께 계시는 성령의 충동을 받아서 한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한 다음, 그 똑같은 성령을 공동체에게 주십니다.

예수를 체험한 다음 세례자 요한은 당신을 증거합니다(32절). 위에서 열거한 단계들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누구신지 모르고 있다가(31.33절), 예수께서 누구이신지를 체험으로 알고(29.32-33),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예수께서 생명으로 가득 찬 분이심을 증거합니다(33절). 그 증거는 죽은 다음 부활하시는 예수와 나누는 친교를 전제로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숨을 거두는 순간에 성령을 아버지께 넘겨드리시기 때문입니다(33; 참조. 19,30). 따라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받은 성령을 나누어주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의 실천을 떠올리게 하실 것입니다(14,26).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도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행할 때입니다.

라.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34절).

세례자 요한은 가장 뛰어난 증언을 합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분을 낳고, 당신 자신의 생명, 즉 성령을 그분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생명,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충실하심을 온전히 지니고 계십니다. 여기에서도 예수의 사명을 최대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즉 인류에게 당신이 오롯하게 지니고 계시는 하느님의 생명을 전달하여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고 실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제2독서(1고린 1,1-3)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로는 일년 반 동안 고린토에 복음을 전하면서 그곳에 유다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세웠습니다(사도 18,1-17). 그 공동체 구성원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1고린 1,26). 그들 가운데는 틀림없이 노예들, 부두 노동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린토 공동체는 작지만 매우 활발했습니다. 복음의 새로움을 열성을 다하여 껴안았습니다.

얼마 뒤, 바울로는 고린토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소식을 듣습니다(1,11; 16,16). 고린토 공동체가 바울로에게 편지를 보내서 확실하게 밝혀야 할 중요한 문제들에 관하여 자문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 소식은 접한 바울로는 고린토 공동체 안에 갈등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간음, 근친상간, 이방인 법정에서 재판받는 일 등 내적 분열이 빚어졌습니다. 57년 에페소에서 바울로는 고린토 공동체에게 편지를 써 보내서 예수의 실천에 비추어서 그 갈등들을 해석합니다. 우상들에게 바친 고기, 전례를 거행하면서 지켜야 할 질서, 죽은 사람들의 부활, 어렵게 된 예루살렘 공동체를 돕기 위한 모금 등 논쟁이 일고 있는 문제들에 관하여 방향을 제시합니다.

오늘 제2독서 본문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 서론에 속합니다. 보내는 곳(1절), 전달대상자들(2절), 인사(3절)가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형식적인 편지 서두 정도로 알아들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바울로가 그 안에 그 편지 본문에서 길다랗게 펼칠 몇 가지 주제들을 끼워 넣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편지 서두에서 이미 자기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사람이라고 규정합니다. 바울로는 고린토에서 사도로서 자기 권위가 문제시되고 배척당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참조. 9장). 그래서, 자기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자기가 선포한 복음을 버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임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바울로는 고린토 공동체를 ‘하느님의 교회’라고 부릅니다(2ㄱ절). 다른 공동체들도 이미 그런 칭호를 받은 바 있습니다(참조. 1데살 1,1). 이 주장은 강력한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하느님의 백성은 이미 구약시대의 회중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이제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 현존해 계십니다. 사람들은 구약시대의 회중을 거룩한 회중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바울로에게, 참된 거룩함이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고,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집니다(2ㄴ절). 그렇지만, 거룩함이란 끊임없이 이어지는 과정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때까지, 우리가 하느님으로 가득 찰 때까지 완성되지 않는 과정입니다. 여기에서 바울로는 벌써 그리스도 안에서 살지 못하게 공동체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고린토 공동체는 전체 교회가 아니고 교회의 일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곳에서나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이 교회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2ㄷ절). 또한 바울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을 함께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서로 갈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서로 갈라지면 예수를 공동체의 주님으로 모실 수가 없습니다.

3절에 나오는 인사는 전례 인사입니다. 바울로가 만들어낸 인사입니다. 공식적인 인사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약속하신 호의(은총)과 충만함(평화)을 기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고린토서의 이 대목은,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을지라도, 오늘 복음과 아주 가깝습니다. 바울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세례자 요한을 닮은 증인입니다. 이 두 사람 모두 예수를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증거하는 내용도 거의 똑같습니다. 두 사람 모두 예수의 사명에 대하여 말합니다. 예수의 사명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는 사명이요, 예수와 친교를 나누는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는 사명입니다. 예수께서 교회를 거룩하게 하고, 교회로 하여금 당신을 증거할 수 있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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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과 놀이 출판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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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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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2주일입니다. 전례력으로 연중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제대 앞에 구유도 없고 성탄목도 없습니다. 내년 대림절이 되면 다시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대림절, 성탄, 공현, 성가정, 천주의 성모마리아 대축일 등 성탄시기를 고공 행진하였습니다. 이 시기 동안 하느님의 구원경륜은 급박하게 전개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대림시기 오랫동안 구세주 메시아의 강생을 예비하고, 영원한 말씀의 강생 때는 천사를 통하여 목동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리고 공현 혹은 내현(來現) 때에는 세 이교 동방 박사들을 밤하늘에 빛나는 별로 인도하여 왕중왕으로 에피파니하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세례식에는 성부께서는 음성으로 현현하시고 성령께서는 비둘기 모양으로 강림하심으로 예수님이 참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만 천하에 드러나게 해 주셨습니다. 특별히 지난 주일은 주님의 세례 축일에 예수님을 아드님으로 현양하여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드러나고 계시되었습니다.

이제 연중시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연중시기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연중시기(年中時期 , 영어: Ordinary Time, 라틴어: Per Annum)란 교회력에서 대림 시기, 성탄 시기, 사순 시기, 부활 시기를 제외한 시기로 특별한 그리스도의 신비를 기념하지 않는 날들입니다. 연중 시기에는 보시다시피 사제는 녹색 제의를 입습니다. 녹색제의는 일상적인 삶의 기쁨과 희망을 상징하는 제의입니다. 그리고 복음 말씀은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적 등 주님의 공생활의 일상에 관한 복음을 듣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이루어진 예수님의 세례사건과 예수님의 정체에 관한 요한의 증언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마태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세례장면에 관한 말씀을 듣고 묵상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세례 사건과 그 의미에 대해 묵상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무리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의 정체성 혹은 신원에 대해 직접 증언합니다.

요한복음서에 있어서 세례 사건은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이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요한은 특별히 구약의 ‘어린양 표상’과 ‘야훼의 종’ 예표로 제시하면서 예수님이 이사야 예언 사상을 비롯한 구약 성경 전체에 의해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증언합니다. 먼저 요한은 예수님을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에 의해 예언된“하느님의 어린양”‘야훼의 종’으로 소개하고, 그러고 난 후, 예수님을‘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최종적으로 증언합니다. 세 가지 다 메시아를 표상하는 말인데 ‘하느님의 어린 양’과‘야훼의 종’은 구약의 메시아 예언의 표현인 반면, ‘하느님의 아드님’은 신약의 그리스도교적인 예수님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표현입니다. 요한은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이것은 발화자(發話者)인 세례자 요한의 놀라운 한 마디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표현하는 짧고 정확한 한 문장입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하느님의 어린양”인데, 예수님이 누구신지 증언하기 위해 이 보다 더 나은 표현을 찾기는 힘들 정도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메시아 대망사상이 고도로 정제되고 압축된 신학적 용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라는 표현은 얼핏보기에 ‘하느님의 종’+ ‘하느님의 어린양’이지만 그 의미의 역사적 디테일을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하면, 이는 ‘하느님의 종 혹은 야훼의 고난받는 종’+ ‘하느님의 어린양 혹은 속죄의 희생양’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어린양’라는 표현에는 하느님의 종 혹은 야훼의 종이면서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이 표현 안에는 ‘하느님의 종’이란 예표와 ‘대속의 희생양’이란 표상이 얽히고설켜 서로 가로지르기와 세로지르기를 창조적으로 반복하면서 핵융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린양’과 ‘야훼의 종’이라는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두 굵직한 표상이 합성된 고도로 정제된 메시아 실현 사상입니다.

세상을 오래 살고 구약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가졌던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구약의 메시아론과 신약의 그리스도론 사이의 연속성과 단절성 안에서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유목민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어린양’과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과거의 모든 유대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제사 제도와 예언자들의 교훈이 배후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전통 안에서 의미하는 어린양이라는 표상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그 다음에 야훼의 종, 하느님의 종 혹은 주님의 종에 관해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이 표현에는 무르익은 메시아 대망사상이 녹아져 들어가 내장(內藏)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린 양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로 암노스(αμνος)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4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린 양’의 히브리어는 ‘탈레’(הלט)입니다. 1~3년짜리 어린 양은 케베스이고 젖먹이 어린양이 탈레입니다.(레위기 9,3 혹은 민수기 8,8) 둘 다 속죄를 위한 번제로 드리는 희생양이지만 가장 흠 없고 티 없는 탈레가 바로 ‘죄 없으신 어린양’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탈레라는 이 히브리어가 예수님이 사용하시던 아라메아어 혹은 아람어‘탈랴’로 그 외연과 내포가 전승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초적인 사실을 한 번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했을 때 어느 나라 언어로 말했겠습니까? 참고로 구약성경의 대부분은 히브리어로 쓰였고, 신약성경은 희랍어로 쓰였으며, 그리고 예수님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신 실제 언어는 초세기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아라메아어 혹은 아람어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요한 역시 예수님이나 당대의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어의 한 갈래인 아라메아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은 ‘어린양’이라고 발화(Enonciation, 發話)했을 때 아라메아어로 말했겠습니까? 아니면 희랍어로 말했겠습니까? 당연히 아라메아어로 말하고 사도 요한이 성서로 남길 때 희랍어로 썼습니다. 세례자요한이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할 때 실제로 발화된 음성적 단어는 아라메어로 ‘탈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서에 기록되기는 그리스어로 αμνος(Amnos, 암노스)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에 의해 발음된 ‘탈랴’는 단어는 무슨 뜻이겠습니까? 탈랴라는 단어는 당시에 많은 뜻을 갖고 있는 일음다의적 말이었습니다. 이 탈랴는 ‘어리다’라는 말도 되고 또 그것은 ‘종’도 뜻하고 ‘얼라 혹은 어린 아가’를 뜻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서에서 희랍어로 번역되어 성서에 기록될 때 암노스(αμνος, Amnos) 즉 ‘어린 양’으로 자리매김을 하였습니다. 원래는 그 시니피앙(signifiant)이 다양했습니다. 즉 그 기의가 많았습니다. 당시에는 단어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단어 하나가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말씀으로 번역되는 로고스 같은 단어는 수십 가지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탈랴라는 단어도 그랬습니다. 이런 맥락에서‘하느님의 탈랴’라는 표현에서 탈랴라는 말 대신에 ‘어린양’이라는 말을 넣으면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지만 탈랴라는 단어에 ‘종’이라는 말을 대입시키면 ‘하느님의 종’이 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느님의 탈랴라는 아라메아어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기도 하고 ‘하느님의 종’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의 종’ 더 정확히 ‘하느님 종의 노래’가 나옵니다. 이렇게 하여 오늘 제1독서와 복음 말씀은 전례적으로 기가 막히게 궁합이 딱 맞는 조합을 이룹니다. 원래 탈랴가 의미하던 ‘종’과 ‘어린 양’이라는 두 가지 뜻이 그리스어 암노스에 하나로 합쳐짐으로써, 세례자 요한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구약성서에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주제 즉 ‘야훼의 종’과 ‘속죄의 어린양’이라는 그리스도론적인 핵심 주제가 예수님의 페르소나 안에서 종합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야훼의 종인 동시에 어린 양이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이사 53,7.12에 나오는 야훼의 종임과 동시에 출애 12장에 나오는 파스카의 어린 양이시고 구약성경 곳곳에 나오는 희생양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생애의 두 측면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께서는 우리를 이집트 노예살이와 비슷한 죄와 죽음의 벗어나게 하고(파스카의 어린 양), 또한 바빌로니아 귀양살이와 비슷한 억압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야훼의 종). 그래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사상은 예수님에 의해 <야훼의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어린양>으로 성취되고 완성됩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을 때, 이것에는 ‘야훼의 종’이라는 내용도 들어있고, ‘파스카의 희생양’이라는 내용도 들어 있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하느님의 탈랴라고 했을 때 사도요한은 그 목격자입니다. 그래서‘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증언을 들었을 때 사도요한으로 하여금 손바닥을 딱 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그 때 본 장면은 아주 인상 깊게 뇌리에 박혔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이것을 잊지 않고 나중에 생생하게 기억한 것을 자신의 복음서의 앞부분에 이 장면을 써 넣습니다. 그 후 교회도 이 생생한 기억의 전통을 이어받아 미사 전례에 ‘하느님의 어린양’을 삽입하게 되어 영광스럽게도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미사 때 대영광송에도 나오고, 영성체 전에 ‘하느님의 어린양 하느님의 어린양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세 번씩이나 나오며, 나중에 사제는 거양성체 때 즉 영성체 전에 성체를 번쩍 들고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까지 합니다. 그 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무죄한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고난을 받는 종이 되고 희생당하는 어린양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야훼의 종’에 대한 이사야서의 말씀과 성전에서 거행되는 ‘어린양’의 희생 의례를 정밀하게 연관하여 이해지평을 확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진 ‘고난 받는 야훼의 종’과 같고, 우리를 위해 대신 피를 흘리는 흠 없고 죄없는 ‘어린 희생양’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 죄에 대한 대가(代價)를 치렀다는 초대 교회의 믿음이 발생하였고, 급기야“많은 사람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목숨을 내어준다.”(마르 10, 45)는 말씀도 나타났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죄를 대신한 죽음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대한 초대교회 신앙인들의 해석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죄와 벌의 도식에 비례적이지 않은 수난과 죽음이 가지는 대속적 의미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고통은 범죄 행위에 대해 보속적 가치를 반드시 지닌다는 것이 성경 전체에 흐르는 사상입니다. 밀알 하나가 썩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무죄한 이의 피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누군가의 죄를 사해주는 데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대속사상입니다. 무죄한 이의 고난과 수난은 반드시 그 열매를 갖게 됩니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다 알 수는 없지만 이 세상은 선과 악의 전쟁과 전투 속에서도 무죄한 이들이 당하는 고통 덕분으로 죄와 벌이 균형이 이루고 있습니다.

종교학적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의 뜻에 불순종한 인간의 악과 죄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분노하게 하고 하느님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하느님의 분노가 풀리고 하느님이 당한 모욕이 해소되고 하느님의 영광이 다시 드러나야 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준엄하신 하느님의 의로움과 선하심을 심각하게 손상시킨 인간의 범죄행위는 지옥의 형벌로 보상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한하고 죄 많은 인간이 무한하신 하느님이 당한 수모와 분노를 해소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보속행위가 이미 심각하게 파괴된 하느님의 진실되심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성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죄는 갈수록 증가합니다. 인간은 무한자에 비해 유한합니다. 유한자가 무한자의 충족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인이고 하느님은 진선미 자체이십니다. 죄인이 진선미 자체이신 분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인간은 성모님을 제외하고 예외 없이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무한자이신 하느님의 공의로운 위엄이 요구하는 무한한 보상을 지불할 수 없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도무지 하느님의 훼손된 존엄에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없습니다. 의로우신 하느님을 만족시켜드리기 위해서는 죄 없는 사람의 속죄행위가 필요합니다. 무한자 하느님이 당한 모욕은 무한자 하느님만이 풀수 있습니다. 죄인인 인간이 하느님의 분노를 풀어드릴 수 없고 죄 없는 옥의 티도 없는 무죄한 속죄양 하느님이 필요하고 이 속죄양이 바로 ‘하느님의 어린양 혹은 천주의 어린양(Agnus Dei)’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학에 있어 계시에도 불구하고 밝히 다 드러나지 않는 어떤 어두운 영역이 있습니다. 이 영역은 반합리적이지는 않지만 이성적으로 명쾌하게 해명되지 않는 비이성적인 영역이 있습니다. 알쏭달쏭하게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다 설명되지 않는 이런 영역을 가브리엘 마르셀은 신비의 영역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을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주체가 그것을 자신의 바깥에 세워 객관적인 대상으로 삼아 탐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는 주체가 거기에 실재적으로 연루되어 있기에 그것을 대상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대상으로 삼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더 주체는 거기에 함몰되어 빠져 들어갑니다. 악과 선, 죄와 벌, 고통, 수난, 속죄, 대속, 선과 보상 등의 주제가 바로 이런 영역에 속합니다. 다 설명되지 않는 경계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신앙입니다. 신앙은 계시가 다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주제도 바로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생(衆生)의 행위에는 업보(業報)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고통과 고난은 죄의 결과이며 그 벌이라고 보았습니다. 죄와 벌의 비례적인 균형은 어느 정도 들어맞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 비례는 항상 어느 곳에서나 다 딱딱 들어맞는 것은 아닙니다. 자주 내로남불의 약삭빠른 악인이 더 잘 살고, 쓸 찬스가 없는 흙수저 무지랭이는 용이 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더 보편적일 지경입니다. 카오스모스의 비례적 균형은 깨지고 카오스(혼돈)가 코스모스(질서)로 오인될 상황입니다. 세상의 죄는 넘쳐나고 선인의 공로는 항상 부족합니다.

악인의 인과응보 문제와 ‘이 세상에 악과 고통은 왜?’라는 근원적인 의문은 제쳐두고, 그 보다 더 큰 합리적인 의문은 ‘죄 없는 사람이 왜 고통을 당하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가브리엘 마르셀이 말하는 신비의 영역에 속하는 일입니다. 이성적으로 어느 정도 설명하다 보면 다른 모순에 부딪힙니다. 결국 신앙에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신비와 맥락이 닿아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은 다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습니다. 의미 없는 고통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이 죄에 대한 벌이든 아니면 그 다른 무엇이든 고통은 다 의미가 있습니다. ‘고통은 범한 죄에 대한 벌이고 보속’이라고 하면 다 쉽게 해결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속죄적 가치가 없는 고통이나 고난은 없습니다. 모든 고통은 속죄적 혹은 대속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그 고통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선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지는 못하고 심지어 불합리하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누군가의 고통은 반드시 누군가의 범죄로 인해 증폭된 세상의 죄를 완화시켜 줍니다. 속죄양 이론에 의하면 선인이 당하는 고통은 악을 당하는 사람 자기을 위해서나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나 항상 세상의 죄를 경감시켜 줍니다. 어린 속죄양의 피가 아무 결실 없이 그냥 소멸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존재의 인과업보(因果業報)의 복잡한 인타라망(因陀羅網)을 타고 탈주와 정주의 주름잡기를 반복하면서, 반드시 나비의 작은 날갯짓을 통하는 것과 같은 선한 결과를 낳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고통이나 수고로 세상은 정화되고 균형이 잡힙니다.

이번 새해에 좋은 일도 많겠지만 고통스런 십자가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각자 자기만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건강문제이든, 가정문제이든, 경제문제이든 각자 자기 나름대로 죄의 악순환 안에서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새해를 맞은 우리에게 인사하고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을 빌어줍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저 역시 오늘 이 미사에 참여하는 모든 분들에게 인사합니다. “새해에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에 가정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야훼의 종의 두 번 째 노래’에서 세상의 죄에 빠져 시달리고 있는 우리 죄인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는 말씀을 하십니다.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라고 합니다. 지금 이 미사에 참례하고 있는 우리 모두는 누구나 하느님께서 모태에서부터 신경쓰서 당신 종으로 만들어 낸 사람입니다. 그것도 그냥 뚝딱 만든 것이 아니라 옹기를 만들듯이 정성을 다해 빚어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주님의 눈에 넣어도 주님이 아파하지 않을 소중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하느님의 종’이거나 ‘희생양’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사야 예언자는 뒷 부분에서 희망을 주시기를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힘 혹은 하느님의 뒷배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번 새해에는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시고 하느님께서 나의 백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제 점점 더 환하게 밝아오는 새해에 우리 모두 하느님이 만든 질그릇답게 힘을 내 아름답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어떤 십자가 앞에서도 용기를 잃지 말고, 하느님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자녀답게 씩씩한 모습으로 살아갑시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죄(peccata mundi)를 없애시고 우리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우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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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
2023년 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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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리는 대림절 동안 우리를 동행했으며, 지난주 월요일 ‘주님 세례 축일’에 만났던 세례자 요한을 오늘 전례에서 다시 만난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어린양”이요 하느님의 종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기꺼이 자신을 내놓는다. 성탄 시기를 마감한 교회는 연중 시기를 시작하면서 연중 제2주일 복음은 요한복음에서 취한다. 연중 시기 ‘가, 나, 다’ 해의 복음은 마태오, 마르코, 루카에서 각각 취하는데, 연중 제2주일의 복음만큼은 모두 요한복음(‘가’해-하느님의 어린양 ; 요한 1,29-34 / ‘나’해-첫 제자들 ; 요한 1,35-42 / ‘다’해-카나의 혼인잔치 ; 요한 2,1-11)에서 취한다.

제4복음서의 서문에서부터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파견을 받아 “빛을 증언하러 왔으며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이”(요한 1,7)로 등장한다. 종교계의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세례를 주고 있는)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으며 “그리스도(메시아)”냐고 물어도 아니라 하고 시대의 마지막에 다시 올 “엘리야”냐고 거듭 물어도 아니라면서 “서슴지 않고 고백”하며, “아니다”, “아니다” 하면서 자신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부득부득 부인한다.(참조. 요한 1,19-22) ‘~이 아니다’라고 부인하다가 ‘~이다’라고 할 때는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이사 40,3)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라고 자신을 정의한다. 파견하신 분의 거짓 없는 “소리”, 망설임 없이 순종하는 “소리”이다. 자신을 두고 그 어떤 말도 하기를 꺼리는 세례자 요한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로지 자기가 가리켜야 할 분을 가리키는 것뿐이다.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요?”(요한 1,25) 하면서 고집스럽게 물어대는 사제들과 레위인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6-27) 하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께서 이미 숨은 모습으로 와 계시며, 제자가 되어 세례자 요한의 뒤를 따르는 이, 심지어 세례자 요한 자신마저 그 메시아의 종이 되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는 것으로 말한다.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요한 1,28)

『…신약성경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통해 자기애의 해체를 전적으로 살려고 했던 모습을 만난다. 세례자 요한은 선구자로서 메시아보다 먼저 등장하면서 하느님께서 오신다는 사실을 알리는 메신저가 되어 사람들 앞에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고 가장 먼저 말하는 이가 된다. 그렇지만 그는 사람들이 정작 들어야 하고 보아야 하는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누누이 강조하면서 자기가 외치는 회개에로의 초대가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밝힌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마르 1,17 마태 3,11 요한 1,15.30)고 하는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내 뒤에(ὀπίσω μου, opíso mou)” 오시는 분,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의 일개 제자에 불과할 뿐임을 거듭 강조하고,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 3,14) 하고, 심지어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 1,7) 하면서 자신은 가당치 않은 존재임을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제4복음서에 따를 때 세례자 요한은 심지어 자기의 제자들에게마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아니다”(요한 1,20-21) 하면서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님”(요한 1,25)을 세 번이나 되풀이한 후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보고 따라가 그분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자기 제자들더러 예수님의 “뒤에” 따라가라고 하면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는 말로 자신의 처지를 요약한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자기애의 해체에 성공하면서 항상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만을 중심에 둔다.…( https://blog.naver.com/kbenji/memo/222785675741 )』

1.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34)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요한 1,29-30) 하고 외친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두고 “어린양”이라고 표현한 말속에는 이사야 예언자가 기록한 ‘주님의 종의 노래’에 나오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이사 53,7)이라는 표현과 함께 “파스카 축제 준비일”(요한 19,14)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상기하는 표징으로서의 어린양,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위해 청하며 “온전한 번제물”로 바치는 “젖먹이 어린양”(1사무 7,8-9)과도 같은 세 겹의 의미가 담겼으니, 주님의 종으로서의 어린양, 언약의 표징으로서의 어린양, 그리고 죄 사함을 위한 희생제물의 어린양이다. 예수님께서는 일방적인 사랑으로 인간의 종이 되시고 당신의 생명을 바치고자 하셨다. 예수님의 그 사랑은 “끝까지”(요한 13,1) 가는 사랑이며,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마태 26,28)라고 하신 바로 그 사랑이다.

『제단에 바쳐지는 동물은 암양, 암염소,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 다섯 가지였습니다. 세 가지는 땅 위의 짐승이고 두 가지는 날개 달린 것이었습니다.(참조. 레위 5,6-7.18) 그런데 구세주를 두고 세례자 요한이 다른 어떤 동물도 아니고 “어린양”이라 한 것을 두고 곰곰이 되새겨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어린 숫양은 “일일번제물이며 주님을 향한 향기로운 화제물”입니다.(탈출 29,38-44)…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라 우리 인성을 취하시고 하느님 앞에 우리를 위하여 번제물이 되실 분, 말씀이신 분, “도살장에 끌려갈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던”(이사 53,7) 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예레 11,19)이셨던 바로 그분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하지 않고 어찌 달리 표현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어린양께서는 참으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습니다.”(묵시 5,9) 인간에 대한 성부의 사랑에 따라서 세상을 위하여 살해당하신 어린양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로 우리 자신을 팔아넘겼을 때 당신의 피로 우리를 다시 사신 분이십니다.…(오리게네스, 200~254년)』

2.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성령이 내려와”(요한 1,29-34)

세례자 요한은 이미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31) 하면서 자기의 경험을 담아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견해를 밝힌다. 몰랐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예리하게 관찰하며 마음이 지적으로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모실 정도가 되었고, 그분 앞에 나섰으나 그분 뒤를 따르게 되었으며, 특별히 그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 1,32)라고 증언한다. 그리고 한 번 더 강조하듯이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요한 1,33) 한다. 세례자 요한의 외침 안에서 “어린양”과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성령”이라는 두 가지 이미지가 예수님께서 살아가실 비폭력과 온유의 사명을 상징하듯이 드러난다.

세례자 요한은 “알지 못하였다.…나에게 일러 주셨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과연 나는 보았다” 한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것을 성령의 계시와 일러주심으로 알게 되면 보게 되고, 보게 되면 믿게 된다. 이것이 신앙의 리듬이고 패턴이다.

3. “나는 보았다…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요한 1,29-34)

예수님을 힘주어 소개한 세례자 요한은 오늘 복음의 끝 절에서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 한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모습을 두고 최종적이고도 결정적으로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 때문에 결국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두 사람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게 된다.(참조. 요한 1,35-37) 바로 이 부분이 세례자 요한의 위대함을 발견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요한이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하고 스스로 말한 것처럼 세례자 요한은 시종일관 자신을 작게 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커지시도록 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도록 인도하면서 자신은 물러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례자 요한처럼 나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내세우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주도권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일까? 이렇게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 주님이심을 확실하게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

“증언”은 자기가 본 것으로 변화된 사람의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의 인도로 자기가 본 그리스도로 변화되어 “증언”하는 것을 궁극적인 인생의 목적이요 목표로 삼는다. 참된 증언은 세례자 요한처럼 올바르고 현실적이며 겸손한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증언은 자신과 타인, 그리고 현실에 관하여 진실을 말하는 예술이요 기술이다. “증언”은 누군가에게 무엇을 말할 때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 인생의 기원을 묻고 질문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답을 얻고, 내가 어떻게 이런 인생을 살게 되었는지를 누군가에게 밝히는 것이다. 그래서 “증언”하는 사람은 의문을 제기하고 인생이 가야 할 길을 일관성 있게 가리키는 사람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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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첫 번째 증인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부르셨고 이를 위해 그를 준비시키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려는 절실한 열망을 억누를 수 없어 이렇게 밝혔습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4) 요한은 무엇인가 획기적인 것을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아드님이 죄인들과 연대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성령이 요한에게 전대미문의 새로움을, 그야말로 완전히 뒤바뀐 반전을 이해시켜 주었습니다. 사실 모든 종교에서 인간은 신에게 무엇인가를 바치며 제사를 지내는 데 반해, 예수님의 사건에서는 하느님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당신 아드님을 바칩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되풀이하는 함축적인 표현을 통해, 요한은 예수님이 가져다주신 이 새로움에 동의하며 놀라움을 표현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항상 다시 출발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곧, 성부께서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자비로 충만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서 다시 출발하는 겁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우리가 우리 편에 서시고, 우리 죄인과 연대하시며, 세상의 짐을 완전히 짊어지면서, 악에서 세상을 구하시는 하느님의 선택에 다시 놀라게 해 줍니다.

이미 예수님을 알고 있다고, 그분에 대한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과신하지 않도록 세례자 요한에게서 배웁시다.(요한 1,31 참조)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거룩한 얼굴” 성화를 관상하면서, 복음에 잠시 머무릅시다. 눈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마음으로 관상합시다.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치실 수 있도록 내어 맡깁시다. ‘그분이시다! 사랑을 위해 제물이 된, 어린양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그분은, 오직 그분만이 우리 죄를 짊어지셨고, 그분 홀로 고통을 겪으셨으며, 우리 각자의 죄, 세상의 죄, 그리고 나의 죄까지 속량하셨습니다. 모든 죄를 말입니다. 우리가 마침내 자유인이 될 수 있도록, 더는 악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모든 죄를 스스로 짊어지시고 우리에게서 죄를 없애주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불쌍한 죄인이지만, 노예는 아닙니다. 아닙니다. 종이 아닙니다.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20년 1월 19일 삼종기도 훈화, 출처-VaticanNews 한국어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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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벤지
2023년 1월 15일
  |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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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세례자 요한이 한 말을 전합니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그러나 이 말은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하던 신앙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믿는 신앙 공동체는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다가 죄 없이 죽음을 당한 예수님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그분을 당신 안에 살려 놓으셨다는 부활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도록 버려두셨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신앙인들은 그들의 성서인 구약성서에서 그 답을 찾으려 하였습니다. 이사야서에는 “야훼의 종”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스스로는 죄가 없으면서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벌을 받는 인물에 대한 말입니다. 오늘 요한이 말하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표현은 이사야 예언서가 이 “야훼의 종”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기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53,7). 이 말씀은 그 시대 유대인들의 해방절 관행을 상기시킵니다. 유대인들은 해방절에 어린 양(출애 12장 참조)을 잡아 성전 구내에서 피를 흘리고 집에 가져와 가족들이 그것을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이사야서의 말씀과 성전에서 거행되는 ‘어린양’의 희생 의례를 참고하여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진 “야훼의 종”과 같고, 우리를 위해 해방절에 성전에서 피를 흘리는 “어린 양”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죄에 대한 대가(代價)를 치른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사람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목숨을 내어준다”(마르 10,45)는 말씀도 등장했습니다. 오늘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사용하는 언어 안에도 우리를 대신한 죽음이라는 말이 쉽게 나타납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초기 신앙인들의 해석입니다.

과거 사회에서 사람들은 모두 높은 사람 덕분으로 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백성은 임금님의 성은을 입고 삽니다. 고을의 주민은 원님을 잘 만나야 무사히 삽니다. 원님이 사람 하나 죽이려 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자기 운명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세상이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우리 죄를 대신 갚아 주신 덕분으로 우리가 구원 받게 되었다고 말하면, 수긍이 가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은혜로운 일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남의 몸값을 대신 치르는 일은 그 시대에 흔한 일이었습니다. 노예나 전쟁 포로를 해방시키려면 그 몸값을 지불해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상황은 다릅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 자신이 결정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나의 운명을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남의 몸값을 대신 지불하는 관행도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똑 같은 권리를 가졌습니다. 지위가 높다고 혹은 재물을 가졌다고 남의 운명을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합니다. 인권과 평등은 이제 우리 사회 질서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각자 자기 운명을 자기가 결정합니다. 각자는 자기 인생을 삽니다. 노예도 없고 전쟁 포로의 몸값을 지불하고 해방시키는 일도 오늘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현대인에게 2000년 전 예수라는 한 인물이 십자가에 죽어서 내 죄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고 말하면, 현대인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서가 예수님을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은혜로운 일을 하고 목숨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율법에 얽매이고 성전 제물 봉헌을 강요당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치던 유대교당국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천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죄인이라고 버려진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 들렸다고 외면당하던 이들을 정상 삶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유대교 당국의 가르침에 혼선을 빚는 일이었고 죽임을 당하신 이유였습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알고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초기교회가 그분을 주님이라 부른 것은 그분 안에 하느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의 세례는 예수님의 성령 세례를 예고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물에 잠기는 세례를 주었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성령 안에 잠기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성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류 역사 안에 일어난 모든 변화를 성령이 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 창조도 성령이 하신 일이었고, 예언자들의 출현도 성령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교회의 설립에도 성서는 성령을 언급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일어난 일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새로운 삶이 발생한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요약합니다. “진리의 영, 그분이 오시면 여러분을 모든 진리 안에 인도하실 것입니다...그분은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니, 이는 내 것을 받아서 여러분에게 알려 주시겠기 때문입니다”(요한 16,13-14). 성령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하신 실천이 신앙인의 진리이기에 그것을 돋보이게, 곧 영광스럽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실의에 찬 병자들, 절망에 빠진 불구자들을 고쳐 주면서,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람을 단죄하고 벌주는 분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웃을 고치고 살리는 우리의 실천들 안에 하느님의 숨결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인간은 심판하고 벌주시는 하느님을 즐겨 상상하였습니다. 우리 세상의 강자가 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하느님의 어린양”은 우리가 상상하는, 두려운 하느님을 버리고 베풀고 용서하는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하신 일을 실천하는 것이 성령이 우리 안에 일하시게 하는 일이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가 할 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의 세례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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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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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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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29ㄴ-31).”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2ㄴ-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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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라는 말과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일은 하느님께서 직접 계시를
내려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무슨 공부나
연구를 통해서 얻는 지식도 아니고, 무슨 수행이나 수련을 통해서
얻는 깨달음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직접 내려 주시는 은총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알려 주셔야만 예수님을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은총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요한 7,28).”

이 말씀은, “너희는 내가 나자렛 출신 목수 예수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은 모르고 있다. 그러니 너희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입니다.
인간 예수가 누구이고, 어디 출신이고, 무슨 일을 하면서 살다가
죽었는지를 아는 것은 누구든지 조금만 공부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는
은총을 받은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은총은 누가, 어떻게 받는가?
하느님께서 누구에게는 그 은총을 주시고 누구에게는 안 주시는가?

특별히 선택되고 뽑힌 사람만 그 은총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은총에 응답하고 믿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응답하기를 거부하고 안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알게 되지만,
안 믿는 사람은 만나지 못하고, 예수님을 모르는 채로 끝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쪽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이라는 말은, 죄 자체를 없애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는”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
즉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신 방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분입니다.>
죄에서 구원되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믿는다면 회개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저절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라는 말은,
“나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 곧 오시는데” 라는 뜻입니다.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라는 말은,
요한복음 머리글에 있는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이 한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신 분이라는 믿음은,
“지금 여기서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분”이라는 믿음과 하나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옛날의 예수님이 아니라 오늘의 예수님,
즉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는 말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머리글에 있는,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받는 일이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일이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구원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며,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신앙인들을 가리켜서 ‘하느님의 자녀’ 라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토마스 사도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요한 20,28).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며,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믿는 종교가 그리스도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런 분으로 믿기 때문에
예수님께 기도하고,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오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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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3년 1월 15일
  |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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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이사 49,3.5-6)는
주님의 종이 민족들의 빛이 된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야곱(이스라엘)이 태어날 때부터 당신 종으로 삼으셨고, 그의 입에 당신의 말씀을 담아주셨습니다(이사 49,1-2). 주님을 배신하고 바빌론으로 유배 갔던 이스라엘을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일을 하느님께서 당신 종에게 맡기실 텐데, 그 종과 이스라엘(야곱)을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비록 주님의 종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까지 많은 고통을 겪고, 힘을 다 쓰게 될지라도 주님께서 종을 지키는 힘이 되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종은 구원의 기쁜 소식이 세상 끝까지 다다르도록, 그리고 모든 민족이 온전히 하느님께 돌아서도록 그들에게 빛이 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종은 바빌론 유배에서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면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미리 앞당겨 보여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삶을 미리 말해줍니다.

복음(요한 1,29-34)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과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증언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세례를 줄 때 어디에서 오시는지 몰랐지만, 자기쪽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당신께 세례를 베푼 요한에게 당신이 누구신지 말씀하시려고 오신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공적으로 처음 등장하시는 예수님을 눈여겨본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던 분이 ‘당신 팔로 왕권을 행사하기 위해 하느님의 권능을 떨치며 오시는 분’(이사 40,10)이심을 즉시 알아봅니다. 그리고 느닷없이 나타나신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죗값을 치르러 오신(이사 40,2)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외칩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저분은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1요한 2,2)이시니 눈여겨보라고 합니다.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세례자 요한은 구세주가 온 세상에 알려지게 하려고 ‘내 뒤에 오시지만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 하고(1,30),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종이 될 자격이 없음(1,26-27), 예수님께서 지니신 믿는 이들의 신랑 자격을 빼앗을 수도 없다(신명 25,5-10; 룻기 4,1-8)고 합니다. 예수님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분께 세례를 주었지만, 하루가 지난 뒤에 자기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눈여겨보고, 자기가 세례를 줄 때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와 예수님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자기에게 세례를 주라고 파견하신 하느님께서 일러주신 분이시며, 주님의 영이 머무르시는 구세주이심을(이사 11,2)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세례자 요한은 증언합니다. 그분은 자기가 주는 물의 세례가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데, 그분을 통해서만 은총과 진리를 받을(1,16-18)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많은 이들은 자기 죄를 깨끗이 없애주실 구세주를 기다렸으며, 종말이 오면 그분을 통해 모두 거룩하게 되고, 하느님께 충실하게 될 것을 기대했습니다(말라 3,1-5). 세상 끝 날에 이루어질 것이라 여겨서 죄를 깨끗하게 해주실 분이 누구신지 기대했는데, 세례자 요한은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고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의 어린양“은 “주님의 종“(이사 49,3)이며, 일곱 임금을 무찌르고 승리하실 분이시고(묵시 17,14), 우리를 죄를 위해 희생제물로 봉헌되실 파스카 양이십니다(1코린 5,7; 1베드 1,19). 그러나 이 고백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문설주와 상인방에 피를 바르기 위해 잡아먹었던 양이나(탈출 12,22-23) 대사제가 일 년에 한 번 성전의 장막 안에 들어가 속죄 제물로 피를 봉헌하는(히브 9,7-13) 희생양과 전혀 다른 차원의 “어린양”(히브 10,1-12)이십니다.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주시는” 대사제(히브 10,14.21), 그리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를 위해 중개자 역할을 완벽하게 이루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10,36; 히브 9,11-29). 세례자 요한은 세례 주라고 자기를 보내신 분을 성부로, 예수님의 위에 머무르신 분을 성령으로, 그리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면서 하느님을 증거합니다.

제2독서(1코린 1,1-3)는
코린토 공동체에게 보내는 문안과 감사의 인사입니다.

바오로는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있었던 회개 체험(갈라 1,15-16; 사도 9,1 이하)을 강조하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라고 합니다. 또한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할”(1,23) 수 있게 된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네 번씩 반복하는 인사말에서 바오로는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형제”라고 부르면서 코린토 교회에 인사합니다. 코린토 공동체를 “하느님의 교회”라고 부르면서 예수님을 통하여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소집된(선택된) 이들의 모임이라고 합니다. 또한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은 모두 그분을 통하여 거룩하게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바오로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내리기를 빌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은총과 평화”는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선물(성령)로서 코린토 공동체가 친교를 이루는 중요한 원칙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은총과 평화”(성령의 선물)가 넘친다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될” 수 있으며, 공동체가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1코린 3,17; 6,11).

오늘 말씀들은 우리 모두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고, 성령을 통하여 거룩하게 되었음을 묵상하게 합니다. 성령께서 머무르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는 물론 죄의 권세까지도 물리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희생제물인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살과 피를 내주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체를 모시기 전에 사제가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고 선언하면, 모두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고 응답합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힘을 지니고 계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의 죽음을 통하여 구원의 은총과 평화를 받았고, 그로 인해 거룩한 백성이 되었으며, 바로 이 미사에서 구원의 기쁨을 맛보고 체험했기 때문에 믿음으로 고백하고, 삶으로 증거하겠다는 다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 이들의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의 종”, “하느님의 어린양”, 그리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고백한다면, 이미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시며 자기를 구원해주시는 분, 자기에게 은총과 평화를 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앎을 동반합니다. 알지 못하면, 제대로 믿을 수 없고, 믿지 못하면 잘 알 수 없습니다. 누구를 믿고 안다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깨닫고 겪어보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안다는 것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자기 삶에 적용해보았을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인격적인 체험과 사랑의 교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그리고 남들로부터 들은풍월로만 안다는 것은 진정한 앎이 아니며, 그래서 제대로 믿을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요한 6장)을 듣고 난 뒤,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라고 고백합니다.

세례자 요한도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고 두 번 말한 뒤에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또 눈여겨보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은 하느님께 날아오르기 위해 필요한 두 날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당신을 믿고, 알고자 하는 열망을 심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은 거룩하게 되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은 물론 알려고 애를 씁니다. 예수님을 믿고 알려면, 성경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물론 그분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필리 3,8)의 중요성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혹시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분(요한 4,22)을 하느님이라고 믿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을 만나고 겪어봄으로써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더욱 잘 믿을 수 있고, 그분이 누구신지 잘 알게 되는 것은 물론 거룩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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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방효익 바오로 신부
2023년 1월 15일
  |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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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명과 희생의 어린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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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그리스도의 형상과 사명을 참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빛나는 신비에 우리를 참여시키고 일치시키기 위하여 그 신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과 정신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화답송의 내용을 잘 묵상하여 나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무엇보다도 순명과 희생의 신비이다. 그분은 순한 ‘어린양’처럼 우리 모두를 위해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다.

요한 1,29-34
하느님의 어린양!

이 ‘어린양’은 세례자 요한의 모든 증언의 핵심이다. 이 ‘어린양’의 의미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떤 사람들은 과월절 어린양(출애 12,1-28)과 연관시켜 해석하기도 하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성전에서 행했던 어린양의 봉헌(출애 29,38-46)과 연결시켜 생각하기도 하고,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 번 열지 않고 참았으며,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는 고통 받는 야훼의 ‘종’과 관련시켜 생각하기도 한다. 요한복음에서 어린양의 의미는 이 세 가지의 의미를 다 포함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오직 한 번 희생되심으로써 결정적 ‘파스카’를 성취하여 실현시키는 ‘고통 받는 종’이시기 때문이다.

이 ‘어린양’의 사명은 바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29절) 것이다. 여기서 ‘없애다’(희: áirein)는 말은 ‘자기의 어깨로 나르다, 짊어지다’; ‘제거하다, 없애다’의 의미가 있다. 아마 요한복음사가는 이 의미를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고 본 것이다. 즉 우리의 죄를 ‘당신 어깨 위에 짊어지시어’ 그 죄를 ‘없애주심으로써’ '거룩한' '때'를 시작케 하시고 당신 제자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셨다(1요한 3,5-6 참조). 또 이 내용은 '야훼의 종'에 관한 내용과도 일치한다. 이사야는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죄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였다”(이사 53,12)고 하고 있다. 이것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으신‘ 그분과 같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당신 자신을 거저 내어주시고 단신의 겸손과 순명과 무구함을 통해 ’종‘의 사명인 구원의 사명을 이루시는 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구원을 역사의 매순간 모든 사람을 위해 실현시키고자 하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당신 안에 ‘잠기게 하신다’. 즉 성령의 세례를 베풀어주신다. 이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에 베풀어주시는 항구한 선물이다. 그러므로 이 구원의 선물들, 특히 ‘세상의 죄’를 태워버릴 성령의 선물이 우리에게 넘쳐흐르기 위해서는 ‘어린양’이 반드시 죽임을 당하셔야 한다. 그러기에 요한복음사가는 십자가 사건을 전해주고 있다. “이미 숨을 거두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는 대신 군인 하나가 창으로 그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이렇게 해서 ‘그의 뼈는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졌다”(요한 19,34.36). 이 것은 과월절의 어린양(출애 12,46)을 상기시키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희생되시어 모든 사람을 항구한 당신 성령의 선물로써 죄의 종살이에서 끊임없이 해방시켜주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는 것이다.

제1독서 : 이사야 예언서 49,3.5-6
너를 만국의 빛으로 세운다

제1독서는 ‘야훼의 종’의 노래의 둘째 노래의 일부를 전하고 있다. 여기서 ‘야훼의 종’은 야훼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구원의 사명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있다(5-6절). 야훼의 종의 활동은 이스라엘의 재건 뿐 아니라 땅 극변의 모든 민족들에게 이르게 된다. 즉 구원은 커다란 빛과 같이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유일하고 참되신 하느님과 그분이 보내시는 그리스도를 알게 해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믿는 사람이거나 믿지 않는 사람이거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빛과 구원이 필요하다. 현대의 인류가 가지고 있는 인류 생존 자체에 관한 문제들만 보아도 그렇다.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우리의 이성과 마음을 흐리게 하는 우리 안에 있는 ‘죄악’으로부터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다. 그분만이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모든 악의 뿌리 즉 ‘죄’를 ‘없애실’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죄’라는 말이 단수로 씌어졌다는 것을 주목하여야 한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되심으로써 이 세상으로부터 ‘없애러’ 오신 것은 어떤 구체적인 죄가 아니라, 바로 ‘죄성’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 같은 방법으로 그분은 또한 우리 모두가 그분의 도움으로 영신적 물질적 구원을 실현시켜 나가기 위해 추구해야할 길, 즉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의 길, 순진무구함, 겸손을 가르쳐주셨다. 세례자 요한의 ‘어린양’에 대한 증언은 바로 이러한 의미가 아니었겠는가?

그리스도의 이러한 모습을 우리가 닮아 우리 자신 또한 구원을 구체적으로 세상에 전해주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만국의 빛이 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우리 자신에게서도 드러날 수 있는 삶을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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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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