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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4주일 성경 말씀 해설
조회수 | 177
작성일 | 23.01.26
▦ 연중 제4주일 독서・복음 해설

▬ 제1독서(스바 2,3; 3,12-13) 해설

▪ 너희 가운데 오직 주님께만 의탁하는 가난한 백성만 살아남게 하리라

스바니아서는 이사야서가 쓰여진 지 1세기쯤 뒤에(주전 640년) 쓰여졌다.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 아시리아의 침공을 받아 망한 뒤(주전 733년), 남쪽 유다 왕국의 왕들은 전전긍긍하면서 신중하고도 세심한 정책을 펴서 국력과 국권을 세우려고 안간힘을 다했지만, 불안정한 정치 상황과 더불어 무너져가는 과정을 붙잡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더욱이 아시리아의 속국이 된 처지에서 이도교의 신들을 섬기고 제사를 바치도록 강요당하고 있었다. 성전 안에서까지도 그렇게 하도록 강요당했다(스바 1,4). 국권이 약해지자 그들은 주님의 법률 준수를 포기하고서 폭력과 불의를 일삼게 되었다(스바 3,1-17).

이 같은 비참한 상황에서 스바니아는 ‘주님의 날’을 선언한다. 주님의 날을 어렴풋하게 묘사하면서도 그 적극적인 면을 구체화한다. 소수의 ‘남은 사람들’, 주님께 충성을 바친 나머지 가진 것 없게 된 가난한 사람들이 멸망을 피하여 농사와 노역을 위해 남겨질 것이다. 스바 3,11-13의 신탁은 2,3의 약속이 실현되리라는 내용이다. 이 신탁은 구약의 ‘마음이 가나한 사람들’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적 본문 가운데 하나이다. ‘가난한 사람들’이란 말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겸손한 백성을 가리킨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자기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온 하느님의 것임을 인정하면서,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고 신뢰하는 사람들,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올바르게 살기로 노력하고, 그 노력 때문에 수탈당하고 가난해진 사람들을 가리킨다.

▬ 시편 145 해설

▪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히브리인들이 아침 전례에서 찬미가로 사용하던시편이다. 옛적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은 가난한 사람의 기쁨을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로 불러 바쳤듯이, 오늘도 그리스도의 교회가 정말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라면 구원받은 기쁨의 찬미가를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가족 전체가 사람이 되신 하느님 앞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면서 소유를 포기하여 서로 나눔으로써 참으로 부유해질 수 있다는 철저한 가난의 정신을 발휘할 때, 인류공동체는 기쁨의 찬미가를 하느님께 바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화해와 단합을 위해 몸 바치는 겸손한 종으로 오고 인류와 더불어 나그네 길을 함께 하는 왕이신 그리스도를 에워싸고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제2독서(1코린 1,26-31) 해설

▪ 하느님께서는 세상에서 어리숙하고 보잘 것 없은 사람들을 선택하신다.

바오로는 25절에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하다는 역설적인 말씀을 설파하면서 코린토의 신자들에게 그 말씀을 적용시킨다. 그들이 믿으라는 부르심을 받을 당시 그들은 부자도 귀족계급도 아니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천대받는 사람, 가난한 사람, 노예,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을 부르신다. 이것은 바오로의 기본 주장에 속한다. 믿음은 하느님의 자비로움과 어지심에서 비롯된 선물이지 사람 자신의 자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자랑하거나 교만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 자세가 철저한 가난이다.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자원, 재화, 소질, 능력, 믿음은 자랑하고 교만해지라는 자기 소유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해 발휘하고 바쳐야 하는 귀중한 선물이다.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자랑하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교만한 자들은 사사로운 욕망에 사로잡혀 불의를 저지르고 약한 사람들을 멸시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당신 것으로 알아 승복하는 사람을 받아들이신다. 욕심이 없고 자랑할 마음도 없는 천대받는 못나 보이는 사람들의 참된 가치를 알아주고 불쌍히 여겨 받아주신다.

▬ 복음(마태 5,1-12ㄱ) 해설

▪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참된 행복’에 관한 이 말씀을 초대 교회 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생활의 지침과 대헌장으로 여겼다. 동방 교회에서는 주일마다 이 대목을 노래한다.

▪ 예수께서는 새로운 모세처럼 ‘산위에서’ ‘참된 행복’을 선포하신다.

마태오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새로운 정의’의 전언을 설파한다. 마음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모든 것을 모든 사람을 위해 사용하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하느님 앞에서 아무 것도 내 것이 없고 내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능력은 아무 것도 없음을 승복하는 겸손한 마음 자세가 가난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가난인 겸손은, 자랑하고 자기의 이름을 인정받으려는 헛된 교만과는 반대 개념이다.

이 같은 겸손한 마음 자세를 지켜야만, 예수께서 “억눌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어진 마음을 싸매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라는 명령을 받고 파견되신 것처럼, 스스로를 비우고 소유를 제한하거나 포기한 교회(그리스도를 참되게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실제로 풀어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소수의 불의와 교만 때문에 빈곤과 기아에 시달리고 인권을 짓밟히는 인류 대부분을 풀어주는 유일한 길은, 교회가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깡그리 비우고 가난한 인류 대부분의 삶에 동참한 다음, 불의와 압제의 사슬을 끊어 소수의 불의한 사람들을 회개하게 하고 정의와 화해와 용서와 나눔의 사랑을 구현하여 인류가 하느님의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 공동체를 이룩하도록 온 힘을 기울이는 길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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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은 복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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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자기가 가진 것과 자기 능력을 뽐내고 자랑하는 자들, 그 능력으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수탈하는 자들에게는 벌을 내리신다. 공허함과 아귀다툼에 시달리도록 내버려두기도 하신다. 그것은 그들을 깨우쳐 돌아서게 하려는 채찍질이다. 재물을 쌓고 권세를 쥐는 것이 하느님의 복이 아니다. 그런 상태는 부당하고 불의하고 하느님의 벌을 자초하는 상태이다. 재물과 권세에 의탁함은 허깨비 짓이다. 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이시다. 이렇게 겸허한 자세로 사는 사람들이라야 인류의 하나 됨에 기여할 수 있고,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할 수 있다.

▬ 가난하고 천대받는 백성

스바니아 예언자가 살던 어지러운 시대, 정치적으로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떨어져 도덕적ㆍ종교적 가치들이 무너지던 시대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신다. 스바니아 예언자가 나타나서 백성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외세에 의지하여 다른 나라와 동맹을 맺거나 강력한 법령을 제정함으로써 열리는 것이 아니라, 겸허하고 신뢰에 찬 자세로 정의를 사회 안에 구현하도록 노력함으로써 주님이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만 비로소 열린다고 역설한다. 하느님의 초대는 정의를 찾아 나서기 위해 현실 한 가운데로 뛰어들라는 초대이다.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만족하고 안정을 구하는 자에게 구원을 주지 않고, 불안하고 고뇌하고 행동으로 찾아나서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 이러한 태도가 성경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의 태도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가난한 사람’을 택하고 사랑하신다. ‘가난한 사람’이 발휘하는 힘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이다. 성경의 ‘가난한 사람’은 흔히 불의한 사람들에게 탄압과 수탈과 경멸을 받기 일쑤다. 그리하여 빈곤과 기아를 견디는 것이 상례다. 그 수난은 그리스도께서 역사 안에서 당하시는 수난이요, 불의한 사람들을 돌아서게 하고 화해를 이루기 위한 수난이다. 가난하고 천대받는 인류 대부분은 실상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네 수난으로 소수의 불의한 계층을 기필코 돌아서게 하고야 말 것이다.

▬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되다

미래는 ‘가난한 사람들’, 마음이 선한 사람들, 정의를 추구하여 몸 바치는 사람들, 인류의 화해와 단합인 평화를 위해 나눔의 사업을 펴는 사람들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진짜 행복한 사람이다. 수탈당하고 억압당하는 빈곤과 속박의 상태는 어디까지나 악이고 악마의 소행에서 나온 것이다. 빈곤과 속박 상태를 즐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물질적 풍요 자체가 목적일 수도 없다. 능력과 물질을 골고루 넉넉하게 나누는 가운데 얻어지는 일치와 사랑의 기쁨이 행복이다. 그 참된 행복은 하느님 아버지의 생명과 풍요를 누리게 될 마지막 행복이다. 능력과 물질은 그 기쁨을 얻어내는 수단으로서만 귀중한 가치이다.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은 늘 깨어 있어 불의한 길에서 돌아서기로 노력하는 사람들이고, 올바른 정의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는 수난자로서 사회와 인류를 화해와 사랑의 공동체로 이끌어가는 사람들이다.

▬ 하느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선택하신다

하느님은 수탈과 인권침해를 당하는 힘없고 천대받는 인류 대부분을 선택하신다. 그들 안에서 그들이 무능하고 가진 것 없는 바로 거기에서 하느님의 위대하신 능력이 힘차게 발휘되어 불의한 압제자들을 벌주고 돌아서게 한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당신 구원과 해방을 위하여 사용하시는 도구는 능력과 재산을 뽐내는 유능하다는 불의한 수탈자들이 아니라, 한없이 병신처럼만 보이는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강력한 입김이신 성령께서 그런 사람들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신다. 그런 사람들 자신을 깨우치고 그들 스스로 일어나게 하신다. 가난한 사람들이 구원을 해방을 받는 것은 권력과 재물에 영합하고 결탁하는 데서 이루어지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구체적 역사 상황 안에다 실현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의 굳어진 잔인한 마음을 하느님의 강력한 팔의 힘, 가난한 사람들 스스로가 깨어나 인권을 되찾는 노력의 힘으로 녹여내어, 나누고 섬기는 따뜻한 마음으로 바꾸어놓기 위해 몸 바치는 것이 모두 구원받는 길이다.

모든 사람이 거듭 회개하고 화해하고 일치하여 하느님께만 신뢰하는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으로 변할 때, 빈곤과 인간차별이 사라지고 모두 넉넉한 가운데 일치와 사랑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며, 그 기쁨에 찬 인류가족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아주 새롭고 결정적인 하느님의 나라로 건너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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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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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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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4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행복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장소적 배경은 산입니다. 많은 신화에서 산은 초월적 하늘과 지상적 땅 사이의 접촉장소로 등장합니다. 산들은 하느님의 계시의 장소였다. 성서에서 산들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예수께서는 종종 혼자서 제자들을 떠나 산으로 가십니다. 오늘 복음인 마태 5,3-12에는 8복이 병렬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루카 복음에는 4복과 4화가 반의적 평행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5:1-12절(산상수훈)에 나오는 ‘진복팔단’은 여덟 종류의 복을 받을 사람들과 그들이 받는 복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반면에 루카복음 6, 20-26절(평지수훈)에 나오는 ‘네 가지 행복 네 가지 불행’은 네 종류의 복을 받을 사람들과 그들이 받을 복, 네 종류의 복을 받지 못할 사람들과 그들이 복을 받지 못하는 결과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팔복선언을 예수님께서 산에서 하신 말씀이라고 해서 산상수훈이라고 부릅니다. 루카 복음 6,20-23에 병행 구절이 나오는 이것은 평지에서 이루어졌다고 해서 평지 수훈이라고 합니다. 행복에 관한 선언이 연속저겨으로 나오는 오늘 복음을 우리 신앙 선조들은 진복선언(the Beautitudes), 팔복 등으로 불렀습니다.

팔복의 가르침은 그 형식이나 내용에서 볼 때 관념적인 좋은 말씀, 명령, 덕목, 강령 혹은 계명이라기 보다 하늘나라의 가치에 관한 일종의 선언이며 약속입니다. 팔복은 아닙니다. 반복해서 언급하는 팔복의 선언 형식은 지혜 문학이나 시편에서 자주 활용되던 형식(집회서 50、29 잠언3、13 시편2、13)이지, 기복주의(祈福主義)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본문의 “행복하여라”는 에릭 프롬이 말하는 상태, 즉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초점을 맞춘 표현입니다.

행복의 그리스어는 μᾰκάριος(마카리오스, makarios)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이니시아티브를 쥐고 인간에게 베푸셔서 인간이 누리게 되는 은혜로운 외적 내적 상태를 뜻합니다. 은혜의 구체적인 내용은 물질적인 것 뿐 아니라 수확, 호의, 위로, 보상, 격려, 칭찬 등입니다. 이는 하느님을 섬기다 당하는 어떤 고난이나 인내에 대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과 위로의 의미가 강합니다. 철저하게 하느님을 전제로 하는 행복 개념입니다.

산상설교(마태오 5장~7장)는 신약성서안에서 가장 호소력을 지닌 대표적인 대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능한 편안하게 살고 싶은 것이 모든 인간의 바램이다. 편안하게 살려면 생활 조건이 어느 정도는 갖춰져야 한다. 생활 조건이 복의 내용이다.

우리 동양 사상에 의하면 다섯 가지 복 즉 오복(五福 장수, 강녕, 부귀, 유호덕, 고종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장수하는 것(壽)이고, 재산이 넉넉한 것(富),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康寧), 덕을 좋아해서 두루 잘지내는 것(攸好德, 유호덕), 명대로 살다가 죽을 때 잘 죽는 것(考終命, 고종명)입니다.

구약성경에서의 복도 동양의 5복사상()과 흡사합니다. 대개 자손과 장수 땅과 부귀영화 건강 등입니다. 오늘날 웰빙, 힐링, 소확행 등의 표현들과 함께 ‘행복론’이라는 주제가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대구 가톨릭 대학교 인성교육원에서 신창석 교수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행복론’이라는 주제를 한 한기 강의가 개설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즘 최인철 서울대 교수가 행복 연구소를 차려 행복에 관해 많은 연구 결과를 내고 있습니다. 최인철 교수의 행복론이 가장 현실적인 족집게 가르침입니다.

우리 나라 행복학자들에 의하면 행복의 조건이 있습니다. 이들은 세 가지 질문에 답합니다. 첫째 누구와 함께 있는가? 최인철 교수에 의하면 함께 있으면 의미가 있고 동시에 즐거운 상대라야 하는데 이에는 친구, 배우자, 자녀, 연인이 상위에 위치합니다. 직장 동료, 상사, 사업파트너, 부하 등과 함께 있으면 즐겁지 않습니다. 둘째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말하거나 먹는 행위 산책과 운동, 자원봉사 등이 의미있고 재미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거의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여행이고 성지 순례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복이라고 선언합니다. 오늘 복음의 상황은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 앞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는 장면입니다.

한 문장 한 문장 떼어 읽어보면 진복선언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참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준다기 보다 어떻게 하면 고생하면서 힘들게 살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οἱ πτωχοὶ τῷ πνεύματι) 행복하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는 행복이라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행복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가난도 복인가? 뭐 이런 복이 다 있나? 이것도 복인가? 싶을 정도입니다. 마태 복음에는 앞에 ‘마음이’라는 표현이 붙어 있기라도 하지만 루카복음에는 그냥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설날이었는데 이때 아이들은 세배를 합니다. 절할 때 어른들은 새해 첫날 덕담(德談)을 하는데 오늘 팔복을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너는 한 해 동안 가난하고 슬퍼하고, 주리고, 배고프고, 박해를 받아라‘라고 덕담을 합니까?

공산주의자들은 산상수훈의 말씀을 비판합니다. 팔복 선언은 결코 약자들에 대한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약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내세에 대한 희망으로 미화시켜 현실을 회피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비난합니다. 실제로 오늘 복음의 팔복에서 물론 몇 가지 납득이 가는 내용도 있지만 어찌 가난하고, 슬퍼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박해를 받고, 모욕당하고, 온갖 사악한 말을 다 듣는 것이 어찌 복이라고 할 수 있는가?

첫 번째 복(福)부터 살펴 보겠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가장 먼저 나온다는 의미에서 이 선언은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과 본질(本質)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먼저 희랍어 성경에서 가난은 프토코스(πτωχός)인데 절대적 가난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에비오님(אביונים, haebyonim)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그리스어로는 프토코스(πτωχοs)는 ‘웅크리다’는 의태어에서 나온 것인데, 웅크리고 앉아서 구걸하는 거지의 가난과 같이 매우 비참한 가난을 말합니다. 구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적 가난을 말합니다.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가난’을 뜻합니다. 성서에선 고아들, 과부들, 나그네(노숙자)들에게 이 말이 종종 쓰였습니다. 기댈 곳도 갈 곳도 없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저서 ‘국가론’에서 유토피아에서 없어져야 할 것으로 프토코스를 주장합니다. 이 단어는 세상에 없어져야 할 정도의 가난한 사람들의 절대적 빈곤 상태를 표현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 없어도 되는 사람들, 그냥 없어지면 좋을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처절히 가난한 상태가 프토코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민중들을 앞에 앉혀 놓고 ‘프토코스의 사람들이여 하느님 나라가 너희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언자이든 플라톤이든 누구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처음으로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난한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마음은 영적인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찢어지도록 가난한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가난한 사람이 불행하고 부자가 행복하다고 하는 게 맞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현실성이 없어 보입니다. 말씀을 듣는 가난한 사람도, 부유한 사람도 다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마음의 가난을 겸양(謙讓)이나 겸손의 아름다은 덕행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아닙니다. 욕심을 버린 가난한 마음 정도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 사람이 본성적인 차원에서 가르침을 받고 반복해서 훈련(訓練)하고 익히면 어느 정도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인문학의 영역이나 다른 종교(宗敎)에서도 열심히 추구(追求)하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실제로 인간적인 수련을 통하여 성과를 내기도 합니다. 불교의 하심(下心, 마음을 내려놓음)이나 무아(無我), 그리고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공사상(空思想)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진공묘유란 ‘참된 비움은 묘한 존재이다’ 정도로 해석됩니다. 욕심을 다스려 물(物)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마음을 텅 비워 가난하게 하면 오히려 아름답고 묘한 존재가 된다는 형이상학적 의미를 가집니다. 성철 스님은 진공묘유를 일차적으로 ‘자기를 버리고 남을 이룬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예수님 믿지 않고도 자신의 노력과 힘에 의지하여 겸손하게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마음을 가난하게 하고 욕심을 버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러한 인문학적 겸양은 사람들의 찬사와 칭찬을 받습니다. 그리고 표준과 기준을 만들어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단죄하게 됩니다. 자칫 바리사이가 되기 쉽습니다. 수준을 능가하는 사람은 미달한 사람의 게으름을 나무라고 은근히 무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가난이 이런 것일까요? 성경을 보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마음이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프뉴마티(πνεύματι, pneumati)인데 영어적 표현으로는 spirit가 됩니다. 대부분 성령이나 영, 영혼으로 번역되는 단어인데 왜 마음으로 번역했는지 의문입니다. 여하튼 육신이나 육체를 의미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과 연결되어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영의 내면에 가난함이 있는 사람 혹은 영의 관점에서 볼 때 가난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영의 내면에 있는 가난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말 속에는 자신이 자신의 무기력함을 한탄(恨歎)하고, 자기 영혼의 내면에 궁핍함이 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채우지 못하는 상황을 포괄합니다.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채우고 또 채우고 싶은 마음이지만 자기 스스로는 내면의 가난함을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통해 이 부족함을 채워지기를 간절히 희망하는 그런 내면의 가난한 마음을 말합니다. 하느님 없는 존재들이 그 절대적 제한성과 한계(限界)를 직시(直視)하는 것입니다. 피조물로서의 절대적 의존관계의 하느님의 영 앞에 서 있는 인간 실존의 마음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겸양, 겸손, 하심, 공사상 등은 인간 육신에서 나오기에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덕재중용의 입장에서 인간의 윤리나 도리(道理)라고 생각하고 인간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인문의 길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내려놓아야 해, 비워야 해, 내려와야 해, 겸손해야 돼, 욕심을 버려야 돼’ 등은 인간의 육신에서 성취할 수 있고, 수련 등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성인, 현인, 군자, 도사 등이 많이 있습니다. 익명의 그리스도 이론을 차치하고 이런 것은 하느님의 아가페나 도움 없이 많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영적인 가난은 이러 저러한 피조물 인간의 선한 행위와 노력(努力)까지도 하느님 앞에서는 셈 받을 수 없다는 무상성을 알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가난은 인간이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마음이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티끌의 운명임을 절절히 깨닫게 될 때의 영혼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이는 마치 다윗의 시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시편 42:1)라고 고백하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아가페적 사랑이 아니면 절망적인 허무의 존재자임을 뼛속깊이 새겨 인식하는 마음이며 영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영적인 가난함은 자기 충족으로는 불가능하고 외부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기에, 타자를 내려다 보며 비교우위(比較優位)의 자만감을 가질 수도 없고, 자신의 성취를 삶의 표준으로 제시하거나 내세울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가난은, 오히려, 따라서 심령의 가난은 ‘자아(自我)의 꺽어짐’이요, ‘닫힌 에고의 부서짐’이며, ‘육신적 인간성의 부정’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다윗은 이런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꺽인 마음을 시편 51은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12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13당신 면전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18당신께서는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시리이다.
19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위 시편을 노래한 다윗은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제사(祭祀)가 따로 있음을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께서 즐기는 제사는 짐승으로 드리는 번제의 제사가 아니라, ‘부서진 영의 제사, 부서지고 꺽인 마음의 제사’라고 노래합니다. 바로 이 마음이 ‘영이 가난한 마음, 깨어진 마음, 궁핍한 마음’입니다. 여기서 ‘부서지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샤바르( שָׁבַר>인데 그 의미는 “파열되고 부서지다, 찢기다, 무너지고 비어지다, 깨지다, 망가지다” 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에고가 터지고 깨지고 부수어진 궁핍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바로 마음이 상한 자들이며, 영혼의 궁핍함을 아는 자들이며,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 자기에게는 의로움이 없고 오로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올바른 관계가 유지될 수 있음을 알고 기대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가난한 마음은 인간 스스로 노력해서 만들어내는 것이라기 보다 발생하는 것이기에 마음의 가난함은 ‘하느님, 제발 저를 도와주시고, 살려주세요’라는 울부짖음과 부르짖음으로 접속됩니다. 하느님의 하느님 도움 없이는 ‘중꺽마’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좌절하고 주저 앉은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하느님 앞에 선 나의 에고는 바로 흙이나 먼지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바로 이것인 마음이 가난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흙에서 온 피조물로서 자기 존재의 무력함을 시인하며, 자기 존재의 나약함을 시인하는 자세가 바로 참된 제사의 의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사이들은 사람들의 죄를 들추면서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면서 주먹을 불끈 쥐면서 단죄하였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면서 오히려 자신들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모르는 그런 엉터리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마음의 가난은 외부의 절대 타자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가난은 ‘자 지금부터 마음을 가난하게 해야지’하고 선택이나 결단(決斷)을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가난은 하느님 안에서 자기의 고유한 존재 자체에 대한 새로운 발견(發見)과 깨달음입니다. ‘어, 내가 이 정도는 되는 줄 알았는데 아무 것도 아니구나. 착각이었어. 내 스스로 다 이룬것이 아니야!’ 라고 탄식하는 이런 마음이 바로 영적인 가난입니다. 절망, 좌절, 탈락의 경험을 당하게 될 때 피조물인 신앙인은 ‘아, 나의 소유와 존재 이 모든 것이 다 내 능력이나 실력(實力)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膳物)이구나’ 자복(咨覆)하게 됩니다. 요컨대 하늘나라로 가는 가난한 구원의 길에는 반드시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육적 자아의 꺾임이 동반됩니다.나의 신앙이라는 것도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가페가 부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되지 떨어져 나가면 거기서 쓰레기가 되는 이치입니다. 하느님의 존재 수유(授乳)가 끊어지면 지금 여기 와 있는 하늘나라를 체험할 수 없는 절대적 의존관계를 자각(自覺)하는 것이 마음이 가난한 상태입니다.

오늘 복음은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선언합니다. 진복팔단 중 제 2복은 ‘슬픔입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이 말씀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복이 많다. 슬퍼하는 사람아’하고 세배 때 덕담으로 할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은 있어도 슬퍼하는 사람에게 복이 온다는 말은 없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반드시 슬픔의 터널을 통과하게 됩니다. 마음의 가난함을 경험하면 반드시 뒤따르는 것이 “슬픔”이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지독한 마음의 가난을 겪은 사람은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의 실존에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인 사실에 관한 슬픔, 하느님의 아가페에서 멀어짐에서오는 슬픔,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와는 거리가 먼 자신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슬픔, 하느님 피조물로 당연히 실현되어 있어야 자신의 고유성이 말살됨에서 오늘 슬픔 등. 죄인인 인간이 지극히 거룩하신 분을 만나게 되면 공포와 전율 속에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빛 앞에 어둠이 확 드러나고 거룩함 앞에 죄가 통째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이때 피조물 인간의 자신의 비루함과 허접함으로 마음이 슬플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슬픔”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펜테오’(πενθεω)인데 슬픔을 표현하는 그리스어 단어 가운데 가장 강한 뉘앙스를 가진 표현입니다. 펜테오는 “노력해서 숨기려 해도 흐느낌이나 격한 울음으로 드러나게 되는 그런 큰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성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가지고 있는 소중한 물건이나 재물을 잃을 때 눈물과 더불어 터져 나오는 그런 격심한 애통과 비통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펜테오라는 슬픔의 표현을 마르코 복음 16절 10절에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그 분과 함께 지내던 분들이 슬퍼하고 울었다고 할 때 사용됩니다. 즉 펜테오는 예수님이 죽고 애통해할 때 사용됐던 그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이런 슬픔의 단어를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아럭ㅎ 오늘 팔복 선언에서 사용하십니다.

성경에 슬픔을 표현하는 단어는 9개가 나오는데 그 중 이 펜테오가 가장 처절하고 뼈아프고 통렬한 슬픔을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마음과 영혼이 완전히 난파되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가난한 마음에서 나오는 반응이 팔복에 나오는 펜테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슬픔은 단순히 감정적이거나 심리적인 차원의 슬픈 눈물이 아닙니다. 산상수훈이 말하는 슬픔은 하늘의 축복과 아가페 사랑을 받아 그 마음이 가난하게 된 사람의 탄식입니다. 자신의 소유와 존재 자체가 완전히 찢기고, 부서지고 낮추워진 이의 통곡입니다. 이 외침은 한과 고독 속에서 파열되어 터져 나오는 전인적인 반응입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의 올바른 관계의 의로움이 깨어진 것에 대해 슬퍼하는 죄인인 인간의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파열되고 부서지고, 찢기고, 무너지고 비어지고, 깨지고, 망가져서 대성통곡”하고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통곡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회심과 변화와 법고창신으로 이어질 때 그것을 팔복 중의 하나인 슬픔이라는 복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베드로와 유다 두 사람 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슬퍼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다릅니까? 유다는 죄장감으로 후회하다가 자살한 데 반해, 베드로는 슬퍼하면서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후회로 혼자서 괴로워하고 만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방향을 전환(turning)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슬픔은 복이 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현실에서 통곡하고 슬퍼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하느님과의 관계가 죄로 깨어진 현실 앞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통곡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슬픔과 아픔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타자의 아픔을 함께 겪으면서 ‘하느님의 구원경륜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기도합니다.

복음서는 또한 온유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온유(溫柔)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성격, 태도 따위가 온화하고 부드럽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흔히 '온유한 사람'이라면 꾹 참고 화를 잘 내지 않으며 태도가 유순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런 의미로만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온유’는 그리어로 ‘프라우테스 (πρᾳΰτης, prautes)’인데 야생동물의 훈련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사납게 날뛰던 거친 야생마가 훈련을 통하여 준마가 된 것과 같은 모습이 온유의 얼굴입니다. 따라서 온유란 거칠고 난폭한 야성적인 성품이 잘 훈련되고 길들여져서 따뜻하고 온순한 성품으로 바뀌게 된 것을 말합니다. 야수의 눈빛은 살아 폭풍처럼 거세지만 주인의 통제 아래 아주 부드러운 성품입니다. 성경에서의 온유함은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여 제어 된 힘(Power Under Control)이며 외유내강(外柔內剛)을 의미합니다. 온유와 대척점에 있는 개념은 강함이나 야성적인 격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굴함이나 비겁함입니다. 약강강약 즉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하다”는 것이 비굴함이고 온유한 사람은 그 반대로 약약강강의 사람입니다. 온유함의 반대되는 사람은 “약자에게 온갖 갑질을 다하며 강자에게는 설설 기며 아부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팔복의 주제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면 온유 즉 파라우테스는 팔복 중 앞의 두 복 즉 가난함 사람의 행복, 슬퍼하는 사람의 행복과 연결됩니다. 마음이 가난한 프토코스의 사람이 곧 슬픈 사람이며 슬픈 펜테오의 사람이 더 많은 시련과 좌절을 당하면서 온유한 사람 즉 파라우테스의 사람이 됩니다. 가난으로 마음이 부서지고 낮추어져 흙보다 못한 존재가 되고, 여기에 중층적으로 고통과 단련을 당해 외유내강의 존재양식이 발화한 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태생적으로 유순하고 착한 성품을 지녔거나 스스로 수련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충분히 담근질을 받은 결과 회심하여 성품이 다듬어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 8, 28에서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고해의 인생살이에서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먹고 살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상태, 하느님 밖에는 기댈 곳이 없는 사람, 극도의 경쟁사회에서 패배하고 실패한 인생, 자신은 먼지와도 같은 존재라는 자기 인정 등은 신앙인을 가난하게 만들고, 슬퍼게 만들며, 마치내 잘 훈련된 준마처럼 온유의 사람이 됩니다.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수 많은 부조리, 고난, 좌절, 탈락, 실패, 징계, 2차 가해, 3차 가해, n차 가해, 계속 이어지는 완장들의 가스라이팅 등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루어 온유함이 되고 복, 행복 그리고 축복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여덟 가지 행복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이 여덟 가지의 행복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가난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슬퍼하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 등 그들 모두는 그 자체로 가난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결론적으로 감히 한마디 한다면 이렇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주는 위로와 기쁨을 갈망하는 가난하고 배고프고 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하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은총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없었으면 감사와 찬미의 잔치인 미사에의 초대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말에 부자들은 할 일이 많습니다. 낚시도 가야하고, 테니스도 쳐야 하고, 골프도 치고 스키도 타야 합니다. 세속에는 다른 더 좋은 것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 여기 오시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참된 행복은 스스로 찾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미사는 하느님의 선물인 동시에 초대입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은 자주 선물을 받거나 초대받지 않기 때문에 주어지는 선물과 초대를 저울질하지 않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한 마음을 가집니다. 지금 이자리에 있는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미 하느님의 초대와 선물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이고 또 종말에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잔치에 초대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팔복의 처음과 끝이 하늘 나라의 축복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되고 마무리됩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진복팔단의 핵심이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프랑스의 노숙자의 대부 피에르 신부는 행복 선언에 사용된 동사의 시제에 주목하였습니다. 모든 행복의 구절이 '~일 것이다'라는 미래형으로 되어 있는 반면 유독 첫번째 행복과 여덟 번째 행복 두가지 행복만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처음과 끝의 복이 하늘나라로 되어 있고 현재형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들은 지금 여기 하느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미래가 아니라 현재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의 참된 의미는 자신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전적으로 창조주께 매달리고 의지하는 가난입니다. 죽으면 썩을 몸과 자기 주먹을 믿지 않는 사람이 영적으로 가난하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더 이상 기댈 곳이 없고 오로지 하느님에게만 매달리는 사람이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고 복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겪는 극한의 아픔으로 눈물이 터져 나올 정도로 슬픈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조롱과 멸시, 완장들의 갑질과 가스라이팅을 겪으면서 다듬어지고 훈련되어 온유하게 된 사람이 복이 있다고 진복팔단은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정말 하느님 앞에서 먼지와 같은 가난한 존재임을 자각한 적이 있는가? 주님의 거룩한 신비 앞에 내 자신이 얼마나 쓸모없는 죄인인가를 자복하고 흐느끼며 슬퍼한 적이 있는가? 부조리와 갑질에 고통당했지만 어긋나지 않고 야수의 눈빛을 가진 채 잘 수련된 온유함을 가지고 있는가?

이 질문에 ‘예’ 할 수 있으면 우리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고, 슬퍼하는 사람이고 온유한 사람이고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라는 대답 안에는 마음의 가난함, 슬픔 그리고 온유함 등이 서로가 서로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기에 더욱 보배롭습니다.

아무쪼록 이번 한 주간 동안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보다 하느님께 예비하고 부어주시는 복을 많이 받는 한 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행복한 한 주간이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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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
2023년 1월 29일
  |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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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오늘 예수님의 이른바 ‘산상설교’(마태 5,1-7,27)의 첫 부분 ‘참행복’에 관한 묵상을 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오늘 복음은 ‘모든 성인 대축일’과 ‘위령의 날 첫째 미사’에서도 같은 대목이 읽힌다.

이 복음 대목에 관해 ‘시적詩的’인 텍스트나 ‘윤리 강령’ 정도로 이해하는데 익숙해진 나머지 불행하게도 이 대목이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1코린 1,18)에 관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경향이 있다.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부수어버리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를 치워버리는”, 궁극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 “하느님의 어리석음”에 관한 말씀임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참조. 1코린 1,19-25)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일상적인 현실을 아프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은 먼저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들을 두고 어떻게 “행복하다”라고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인지 자문할 수밖에 없다.

1. “산으로 오르셨다…가르치셨다”(마태오 5,1-12ㄱ)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마태 5,1-2)라는 구절로 복음은 시작한다. “산”은 하느님의 계시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정체를 밝히실 때 산 위에서 하시고(참조. 마태 17,1),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전도 사명을 주실 때에도(참조. 마태 28,16) 산 위에서 하신다. 마태오의 산상설교와 같은 내용은 루카 6,20-49에도 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루카 6,17)라는 도입구로 시작하므로 산상설교와 대비하여 ‘평지설교’라 한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한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서 이 ‘참행복’은 어떤 면에서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서 회자하는 것처럼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무성한 사회, 힘 있고 가진 자들을 위한 소위 법치 아닌 법치 사회, 부富를 중시하는 사회, 폭력과 권력이 결탁하는 사회와 같은 사회적·문화적 배경을 안고 말씀하셨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행복들”이 어떤 면에서는 스캔들(물의를 빚는 사실이나 내용)이라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선언하신 그 내용을 오롯이 몸으로 살아내셨다는 점에서, 곧 십자가에서 생을 마감하신 분이라는 점에서, ‘참행복’은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는 선포이자 “십자가라는 걸림돌”(갈라 5,11)에 관한 말씀이다. 그런 면에서 이 ‘참행복’을 두고 혹자는 ‘예수님의 초상화’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예수님께서는 과연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가난하신 분, 슬퍼하시는 분, 온유하신 분. 주리고 목마르신 분, 자비로우신 분, 깨끗하신 분, 평화를 이루시는 분, 박해를 받으시는 분, 모욕을 당하시는 분이시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쪽이든 저쪽이든 어떻게든 결정적인 선택 앞에 설 수밖에 없게 된다.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하나의 이상향으로 치부하든지, 아니면 이 복음 내용을 제대로 살아내고, 우리 주 예수님을 따르면서 우리의 믿음은 어찌 되어야 할 것인가, 또 복음을 제대로 살아가는 우리의 기쁨과 행복은 도대체 무엇인가, 실로 우리가 어떤 인간이고 어떤 존재인가를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행복이 내 삶의 의미, 정확한 방향성, 삶의 가치, 살아가는 이유, 생명을 내어놓는 것 등에서 온다는 것을 잘 안다. 참행복은 우리에게 이러한 이유와 근거를 제시하면서 인간으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2. “행복하여라”(마태오 5,1-12ㄱ)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의 온전한 통교를 향해 나아가는 태도, 그러한 지향을 마음에 지니고 삶의 양식을 온전하게 취하는 태도를 지닐 수 있을 때 행복하다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대로 사는 사람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사는 대로 말하고 말하는 대로 사는 분으로서 그렇게 선언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행복하여라(마카리오이, μακάριοι, makarioi)”라는 말이 서두에 후렴처럼 여덟 번 되풀이 되고, 이어서 ‘(이러저러한) 사람들’이라는 내용이 이어지며, 그에 따른 예수님의 약속이라는 형식으로 일정하게 반복되는 구조적 틀을 갖춘다. 마카리오이라는 말의 어근인 μακάριος라는 말은 영어로 blessed, happy 등으로 번역되는데, 『…본래 신들에게만 유보된 단어다. 복되다고 칭송되는 여덟 가지 태도를 통해 인간은 하느님의 영광과 행복에 참여하고,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하게 된다. 하느님은 새로운 방식으로 살 줄 아는 인간에게서 드러난다. 인간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요, 예수님의 형제와 자매임을 증명하는 여덟 가지 태도(안셀름 그륀, 예수-구원의 스승, 분도, 2008년 3쇄, 49쪽)』가 밝혀진다.

“마음(영)이 가난한 사람”(마태 5,3), 그리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마태 5,8)은 물질적인 재화와의 연관을 논하기 전에 현실에 급급한 처지의 의미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물질적인 재화나 풍요와 관련하여서만 이 구절을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영으로 가난하고 마음으로 순수하다는 것은 현실이 현실인 만큼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이고, 타인으로부터 주어지는 굴욕적인 상황마저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임을 뜻한다. 그런 이들은 겸손하여 쉽게 눈에 띄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있어 누구나 금방 알아볼 수 있다. 고통에 익숙해서 타인의 고통을 금방 이해하는 사람이며,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려 하지 않아도 자신이 도움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있겠지 하는 면에서 낙관주의자들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 일찍 일어나야 하는 사람, 꾸준히 인내하며 노력하는 사람이다. 믿을 곳이 그 어디에도 없고 자신이 지고 있는 십자가가 너무도 커서 하느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다. 하느님 아버지만을 바라보고 그분이 도와주심을 믿어 희망이 헛되지 않음을 매일 발견하는 사람이다. 자기의 힘보다 더 큰 힘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 때로 슬프고 막막해도 그런 상황이 자신을 더 나은 상황으로 이끌 수 있음을 배우는 사람이다. 하느님 없이 사는 이는 누구나 “가난”하다. 혼자이면 실패이지만 하느님과 함께이면 성공임을 믿는 사람, 때때로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도 그것이 성공임을 믿는 사람, 그저 ‘그분의 뜻’을 믿는 사람, 하느님의 지혜를 얻는 사람, 하느님께서 자기 편이시니 그 무엇도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평온한 마음으로 가난을 받아들이는 것은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 가난을 즐거워하는 것은 큰 지혜니, 가난하여 부족함을 즐기는 것은 하늘로 날아가는 날개다. 성경이 말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이미 하늘 나라를 얻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가난을 즐거워하는 것은 가난한 것이 아니다. 몸이 가난하고 마음 또한 가난해야 가난은 덕이 된다. 몸은 가난한데 마음은 욕심 사나우면 가난은 덕이 아니라 근심이 된다. 이제 가난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진짜 가난한 것이 아니라, 단지 거짓으로 가난을 꾸몄으나 실상은 탐욕스럽고 인색하다.(판토하, 칠극-해탐 3-30, 정민 옮김, 김영사, 2021, 241-242쪽)』

“슬퍼하는 사람”(마태 5,4)은 울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다. 심리적이나 감정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자신과 다른 이의 비참함과 가련함에 마음을 다쳐 눈물이 터져 나오는 사람이다. “온유한 사람”(마태 5,5)은 어떤 형태의 폭력이라도 포기하는 연습을 하는 사람이다. 사실 최악의 공격성과 치명적인 증오는 거짓된 온유와 가식적인 미소 뒤에 숨어있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마태 5,6), 그리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마태 5,10)은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라 정의와 진리로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으려 하는 이들이다. “자비로운 사람”(마태 5,7), 그리고 “평화를 이루는 사람”(마태 5,9)은 행동과 태도에서 다른 이가 나에게 가해오는 악을 잊고 용서하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예수님) 때문에 모욕받고 박해받으며 거짓으로 사악한 말을 듣는 이”(마태 5,11)는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요한 15,20)이라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우리 인생이 진정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살아가고 있음을 밝혀주는 구체적 증거를 지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3.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마태오 5,1-12ㄱ)

예수님의 가르침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2ㄱ)라는 구절로 마감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러한 상황에 부닥친 사람들, 이러한 태도를 살려고 애쓰는 사람은 하느님다운 행동과 모습이 자신의 것이 되기를 추구하는 사람이며 진정으로 참행복을 체험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심오하고도 값진 기쁨, 주님과의 친교에서 솟구치는 기쁨, 절대 빼앗기지 않을 기쁨을 누린다.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하늘 나라를 차지한 사람, 하느님의 위로를 받는 사람, 새 하늘과 새 땅을 차지하는 사람, 진정 흡족한 사람, 자비를 입은 사람, 하느님을 보는 사람,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는 사람,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큰 사람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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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일 복음은 이른바 ‘산상설교’라고 알려지는 대목에서 신약성경의 대헌장 격인 참행복에 관해 묵상하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행복으로 이끌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원의를 드러내십니다. 이 메시지는 하느님께서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과 가까이 계시고 그들을 그렇게 대하는 자들에게서 구해내시리라고 말하는 예언자들의 설교에 이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설교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행복하여라” 하시는 말씀, “행복”으로 말씀을 시작하시고, 그렇게 행복할 수 있는 행복의 조건들을 계속 가리키시며, 약속으로 끝맺으시는 형식을 취하십니다. 복, 곧 행복은, 예를 들어 “마음이 가난”하고 “슬프고”, “의로움에 주리고”, “박해를 받고”… 하는 조건들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뒤이어 말씀하시는 약속, 하느님의 선물을 환영하는 그 안에 행복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선물에 자신을 열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세계,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어려움을 무릅쓰는 것에서 행복은 시작합니다. 이는 (이렇게 저렇게 하면) 저절로 행복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삶의 방식입니다. 고난과 역경의 현실을 새로운 전망으로 보게 되면서 뒤따르는 회심으로 체험하게 되는 행복입니다. 하느님의 선물과 은총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회심을 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늘 저는) “행복하여라, 마음(영)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하는 첫 번째 행복에 머무르겠습니다. 마음(영)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가 처한 처지에 반항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은총에 마음을 열어 겸손하고 온유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진정) 가난한 사람들의 감정이나 태도를 지닌 사람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행복, 영으로 가난한 사람의 행복에는 부富와 하느님이라는 두 차원이 있습니다. 부富, 소유, 물질적 풍요를 두고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굳이 희생을 무릅써야 한다는 것은 아닐지라도, 본질적인 것에 충실하면서 나눌 수 있는가 없는가에 관한 능력의 문제입니다. 곧, 매일매일 새로운 상품들의 매력에 현혹되어 탐욕스러운 소비에 나도 모르게 짓눌리지 않으려는 능력 말입니다. 무엇인가를 더 가지게 되면서 더 원하게 되는 것이 탐욕스러운 소비입니다. 이는 영혼을 죽입니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고 이런 식의 태도를 지니게 되면 행복하지 않으며 행복을 얻지도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이라는 차원을 생각하면 세상이 축복이며 그 기원이 아버지의 창조적인 사랑임을 인정하고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의 주권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야말로 위대하신 분이시며 주님이심을 알아 모시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소유한다고 해서 누군가가 위대한 것은 아닙니다. 진정 위대하신 분은 온 인류를 위하여 세상을 원하시고 그 세상에서 인간 하나하나가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이나 물질적 부富에 의존하는 사람이나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이의 말을) 존경으로 들어(경청) 기꺼이 다른 이의 결정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우리 사회나 공동체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더 많아진다면 분열이나 불화, 그리고 적대감이 더 줄어들 것입니다. 겸손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덕목입니다. 복음적 의미에서 가난한 사람은 소유보다는 나눔을 추구하는 형제적인 공동체의 씨앗으로서 하느님 나라라는 목표를 흘낏 이라도 보여 주면서 이를 계속 살아내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소유보다는 나눔이라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마음과 손은 닫혀 있지 않고 항상 열려있습니다. 마음(심장)이 닫히면 마음(심장)이 수축합니다. 그런 마음은 사랑할 줄 모릅니다. 마음이 열리면 사랑의 길 위에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모델이시자 첫 열매이신 동정녀 마리아께서는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응하셨으니 우리가 풍요로운 자비의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은총으로, 특별히 그분의 용서로 가득하기를 빕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7년 1월 29일 삼종기도 훈화, 영문에서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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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벤지
2023년 1월 29일
  |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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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론이 아니라 구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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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설교에 있는 ‘참 행복 선언’ 말씀은
‘행복론’이 아니라, ‘구원론’입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가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라는 말씀의 ‘행복’은
일반적인 의미의 행복이 아니라, 구원받는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 안식, 기쁨, 생명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참 행복’입니다.

‘구원’은(‘참 행복’은)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따라서 이곳에서의 ‘신앙인의 삶’은, ‘참 행복’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의 삶’의 시작이고, ‘그 삶’을 미리 사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오 5,10-12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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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에서 ‘의로움 때문에’ 라는 말과 ‘나 때문에’라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의로움’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고, ‘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의로움 때문에, 또는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종교박해를 받아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을 지킨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모욕, 거짓말, 온갖 사악한 말’은
박해자들이 신앙인들을 박해하고 괴롭히는 방법들입니다.
여기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라는 말씀은, 박해받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차지하게 되는 것과
하늘에서 큰 상을 받게 되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뜻입니다.
모욕, 박해, 거짓, 온갖 사악한 말이 기쁨의 원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기쁨의 원인이 되기는커녕 참기 힘든 고통이 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박해 너머에 있는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는
사람들이고, 나중에 누리게 될 그 영광을 생각하면서
지금 받는 박해를 참고 견디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박해만 보이고,
하늘나라의 영광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 없는 사람들은
신앙인들을 어리석고 미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짜로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그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사도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기뻐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사도행전 5,41-42).”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라는 말은,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함으로써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라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점은, 사도들이 박해를 받았어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더욱 열성적으로 복음을 선포했다는 점입니다.
‘하늘나라의 영광’을 차지한다는 믿음과 기쁨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의 열성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오 5,5).”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오 5,7).”

‘온유’와 ‘자비’는 ‘박해에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오 5,39).”,
또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오 5,44).”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악을 악으로 앙갚음하지 않는 것, 박해자들의 악을 사랑이라는 선으로
물리치는 것, 그리고 박해자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그것이 ‘온유’와 ‘자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서 12,19-21).”

스테파노가 순교했을 때, 만일에 당시의 신자들이 박해자들에게
앙갚음했다면, 즉 박해자들을 심판한다는 명목으로 박해자 사울을
제거했다면, 우리는 위대한 사도 바오로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이 앙갚음하지 않고 박해자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한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위대한 가르침인지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오 5,3).”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오 5,8).”

‘마음의 가난함’과 ‘마음의 깨끗함’을 하나로 묶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재물의 힘’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힘’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을 제대로(온전히) 받으려면, 마음속에서 탐욕을 버려야 하고,
재물에 대해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돈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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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3년 1월 29일
  | 01.28
523 97.6%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행복선언입니다. 루가복음서에도 같은 행복선언이 있습니다. 루가복음서의 것은 짧고 간결하지만, 오늘 우리가 들은 마태오복음서의 것은 길고 더 발전되어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서 공동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선언을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더 길게 만들어 기록하였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루가복음서의 것이 행복선언의 원형이라고 말합니다. 마태오복음서는 행복한 사람들을 여덟 가지로 나누어서 말하는 반면 루가복음서는 세 부류의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 지금 굶주리는 사람 그리고 지금 우는 사람입니다.

행복선언은 하나의 예언이고 축복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가난해도, 지금 굶주려도, 또 지금 울어도 행복하다는 예언적 선언입니다. 예언은 닥쳐올 미래의 일을 미리 알려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가 예언자라고 말할 때는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의식하면서 현실에 대해 말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언자는 강자나 권력을 가진 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치를 봐가며 그들이 기뻐할 일을 말하고, 그들의 마음에 들어, 그들로부터 혜택을 받아 누리려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언자는 자기 자신의 안일과 부귀영화를 위해 하느님의 일을 왜곡하거나 현실에 영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오히려 강자의 횡포를 고발하고 약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말합니다. 권력을 가진 자의 오만과 독선을 지적하고 비난합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라고 촉구하는 사람이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는 자기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그 피해를 감수합니다. 예수님도 유대교 기득권자들의 말과 다른 말을 하다가 그 대가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마르 8,34). 예수님은 예언자적 삶을 살다가 그 대가로 십자가를 지셨고 제자들도 같은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인류역사의 통념(通念)을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이 보여 주신 가치관을 따라 살기 위해 그 통념을 수정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오늘의 선언은 많이 가진 자가 행복하다는 인류역사의 통념을 깨는 말씀입니다. 재물이 우리 삶의 보람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 굶주리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은 먹는 일에만 매달려 살 수 없는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비록 현재 굶주려도 보람 있는 삶이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은 기쁘고 즐거운 것만 쫓아다니면서 살 수 없는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저자의 말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은 타버린 재만 남기지만 우리가 겪는 비극과 함께 하는 아픔은 우리 삶의 진실을 보게 한다.” 자기가 겪는 고통을 감수할 뿐 아니라, 이웃의 고통에도 참여하면서,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인생의 진실을 보고 성숙한 인간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의 시선에서 우리의 삶을 봅니다. 예수님은 재물의 유무, 배부름과 배고픔, 기쁨과 아픔을 넘어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유대교는 재물을 가진 자, 배부른 자, 웃는 자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고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는 하느님으로부터 벌 받았다고 가르쳤습니다.

행복선언은 예수님이 하시는 축복의 말씀이며 또한 예수님의 삶을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 지금 굶주리는 이, 지금 우는 이도 축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통념에서는 하나같이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그들을 축복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그들을 외면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선언은 하느님은 그들과도 함께 계신다는 선언입니다. 사람은 그들을 외면하고 버려도 하느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즐겨 부르셨고, 우리에게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가난하다고 버리지 않습니다. 굶는다고, 고통을 당한다고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 하느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부요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하느님이 원하셔서 된 일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드는 빈부의 격차입니다. 19세기 유럽의 산업혁명 당시 산업만 발달하면 하느님도 해결하지 못한 기근을 퇴치할 수 있다고 사람들은 호언장담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산업이 고도로 발달되어, 온 세상이 오염되고 기상마저 이변을 일으키지만, 빈부격차는 사라지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심화되었습니다. 한 편에서는 영양의 과다섭취로 병들어가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굶주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인간이 모색하는 발전은 인간에게 피해를 줍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떤 사람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불행한 사람들을 축복하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을 듣고 가난과 굶주림의 영적 의미, 슬픔과 아픔의 영적 의미에 대한 이론을 애써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그런 사람들을 왜 축복하시는지 설명하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통념 안으로 하느님을 끌어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지름길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단순한 선언이고 축복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그들을 축복하시기에,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도 그들을 축복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축복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축복이 되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움이 그들을 위한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 않아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이해타산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가난도 있고, 굶주림도 있고, 슬픔과 아픔도 있습니다. 우리의 통념은 그것을 자업자득의 결과라고 말하며 외면합니다. 그러나 오늘 행복선언을 들은 사람의 눈에는 우리의 축복을 기다리는 일들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우리라면, 그분의 축복을 그들에게 실천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느님의 축복을 빌지 않고 하느님의 축복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그 축복을 실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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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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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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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순례길은 늘 즐겁지만 기쁨을 최고조로 느끼게 해주는 성지는 ‘참행복 선언 성당’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진복팔단(眞福八端) 곧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로 시작하는 가르침(마태 5,1-12)의 장소입니다. 갈릴래아 호수 한 언덕에 자리한 이 성지는 진복팔단이라는 명칭 답게 팔각형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마태 5,1에 따르면, 예수님은 산에서 참행복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늘과 가까운 산을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모세도 시나이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아온 바 있지요(탈출 24,12).

사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모세와 여러모로 비슷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 예수님이 헤로데의 위협 때문에 이집트로 피신하였다가 돌아오게 된 일(마태 2장)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탈출한 뒤 가나안이 바라보이는 곳까지 걸었던 여정과 비슷합니다. 유다 임금의 탄생 소식을 접하고 어린 남아들을 학살한 헤로데는 히브리인의 번성을 두려워해 사내아이들을 죽인 파라오(탈출 1,22)가 생각나게 합니다. 아기 예수님이 헤로데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건 파라오의 살해 위협에서 살아남은 어린 모세와 유사하고요.

예수님이 전하신 진복팔단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태 5-7장에 나오는 ‘산상수훈’(山上垂訓)의 첫 가르침이 진복팔단이니 그 중요성이 엿보이지요. 다만 루카 6,17-23에서는 예수님께서 산이 아닌 평지에서 행복과 함께 불행 선언을 하신 걸로 서술합니다. 그 이유는, 마태오 복음이 모세를 아는 주로 유다인들을, 루카 복음은 이방인들과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을 대상으로 한 데 있습니다.

당시 군중은 유명한 설교가이자 기적을 행한다는 라삐의 가르침이 궁금하기도 했겠지만, 실은 굶주리거나 몸이 아파서 치유를 바라고 따라온 경우가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들을 측은하게 여기신 예수님은 이사 61장을 인용한 말씀으로 희망을 주십니다.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이 하늘나라를 차지하기 더 쉽다고 말입니다(마태 5,3-4). 그리고 하늘나라는 ‘내세에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시고자, 미래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선언하십니다(3.10절). 사실 그렇지요, 부족함이 없으면 하느님을 찾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하늘나라와 멀어지게 됩니다. 고통은 결코 반가운 게 아니지만, 그 때문에 하느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갈구하게 되니 하늘나라로 가까이 인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비를 넘을 때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셨음을 깨닫게 되므로, 고통과 행복은 서로 모순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가리켜 ‘가련한 이들의 보호자’라고 하셨나 봅니다(시편 9,13; 34,7 등). 예수님은 결핍이나 역경이 불행과 동의어가 아님을, 하느님을 아는 것이 최고의 지혜이며 행복의 원천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진복팔단 성지에서는, 행복이란 쟁취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지혜로써 발견하는 것임을 되새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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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숙 소피아 :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2023년 1월 29일 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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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의 중심 주제는 산상수훈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 중에서도 "마음이 가 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이다 1-2 독서가 함께 이 행복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복음은 진정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것임을 알아야 한다.

제1독서 : 스바 2,3. 3,12-13
가난한 사람만을 네 안에 남기리라

제1독서는 `야훼께서 오실 날` 있을 대소동에 관한 것을 전하고 있다(1,14-18). 그 날 야훼께서는 야훼를 믿었던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만이 화를 면하고 모두가 화를 입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 가난한 사람들이 바로 야훼께서 다시 `양육하실` 새 백성의 `씨`가 될 것이다. "너희는 야훼를 찾아라"(2,3)는 말은 회개의 권고이다. 진정한 회개만이 야훼의 날에 화를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훼께서는 `거만을 떨며` `흥청거리는` 자들을 정의로 다스리시고, 그분은 오로지 가난하고 순박한 정신으로 그분께 나오는 모든 이에게 마지막 날에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제1독서에서는 가난의 의미가 단순한 사회학적 의미에서 `영적` 차원의 의미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가난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판단`에 신뢰심을 갖고 자신을 내맡기는 하느님 안에서의 완전한 `자기포기`를 말한다. 이러한 가난은 회피해야할 저주스러운 것이 아니라, 도달해야 할 높은 `목표`이다. 바로 이 `가난`이라는 것은 항상 `정의` 즉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의무와 결합되어야 한다. 이렇게 겸손하고 가난한 사람은 `살아남게 되고`,`야훼의 이름만 믿을 것이고`(3,12) 또한 불의한 짓을 범하지 않고 `거짓과 사기`를 입밖에 내지 않을 것이다(3,13). 여기서 `가난하다`는 `개념과 겸손하다`는 개념은 일치한다. 이 개념을 통해 예언자들은 메시아를 예고한다(즈가 9,9 참조).

마태오 5,1-12 : 산상 수훈

오늘 복음의 산상수훈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고도 극적인 삶으로 사신 것들이다. 산상수훈 하나 하나를 그분의 삶을 통해 입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산상수훈은 모든 윤리규범을 초월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인간의 정상적 지혜가 부서지고 만다. 그 지혜는 하느님 앞에서 `어리석은 것`,즉 `우리 자신이 회개할 때`만이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이 산상수훈의 메시지는 `회개`에 대한 권고(마태 4,17 참조)를 받아들였거나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를 갖춘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산에 올라가셔서(1절), 산 위에서 법을 가르치는 `새` 모세처럼 군중들을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바위에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1고린 3,3 참조)에 새겨진 그리스도인의 새 `법`으로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켜 새롭게 하는 것이다. 이 산상수훈은 가난하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가난해지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고, 박해를 받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이 아니라, 옳은 일을 위해 박해를 받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10절). 이 모든 것은 우리 모두가 `회개하여` 이루어야 할 최상의 목표라고 하겠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3절). `예루살렘 성서`는 이 구절을 `가난한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행복하다.‘로 훌륭히 번역하고 있다. 이렇게 마태오 복음은 제1독서의 `가난`의 영적인 차원에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가난`의 `이라는 것은 비록 우연히 소유하였을지라도 재물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난한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의 지적인 능력, 사고, 계획, 우리의 성성까지도 포함하여 우리가 선익을 위해 소유할 수 있는 그 모든 것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조차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탁함으로써 그분을 통해 자신을 무한히 부요하게 하고, 또 그분이 베풀어주시는 모든 선물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사람이다. 우리가 물질적으로 가난하건 부요하건 상관없이 다른 모든 행복을 함축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첫 번째 행복의 정신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살고있는가 하는 것은 집착으로부터 내가 얼마나 해방되어 있느냐, 그리고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통해 부요해지고 그분께 받은 선물을 나눌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근본적인 `회개`가 있어야 한다. "회개가 있는 곳에서는 현세생활의 물질적 선에 대한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이러한 변화가 그리스도교 사상의 특성이다"(1978. 1. 11. 수요담화문)라고 바오로 6세 교황은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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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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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마태 5,1-­12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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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대학원 후배가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어 함께 공부하던 동기 예닐곱 명이 송별회를 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한 친구가 참행복 선언 문구가 적힌 고운 엽서를 가져와 서로에게 어울리는 것을 뽑아 기념으로 나눠 가졌는데, 그때 제 몫으로는 ‘온유한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다들 저에게 잘 어울리는 문구라며 부러워했지만, 내심 머릿속으로는 삐딱한 생각을 했습니다. ‘남들 보기에도 내가 결단력 없고 우유부단하며 자기 표현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이나 보지?’라고요. 그땐 자신의 변신을 꾀하는 데 몰두해 있던 터라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바꿔 보려고 무진 애를 쓰던 시절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행복한 사람으로 꼽은 여덟 부류의 무리 가운데 어느 하나 제가 변신하고 싶은 모습은 없었습니다.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행복하여라, 능력 있는 사람들!
하는 일마다 척척 이루어져 만인의 부러움을 살 것이다.
행복하여라, 씩씩하고 당당한 사람들!
남들 눈치 보는 일 없이 자존심 상하지 않고 살 것이다.
행복하여라, 결단력 있는 사람들!
만사가 그의 뜻대로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먹고살 걱정 없는 사람들!
굳이 아등바등 경쟁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시간이 많은 사람들!
놀고 싶을 때 놀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건강한 사람들!
나처럼 위장병·목 디스크·알레르기로 고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

행복해지고 싶고 그 행복을 위해 가지고 싶고 되고 싶은 게 많았으나 의외로 여덟 가지를 채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고심했건만 이건 행복 선언이 아니라, 피해의식과 콤플렉스로 똘똘 뭉친 불행 선언에 가깝습니다. 이렇게만 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막상 글로 적어놓고 보니 주변 의식하지 않고 혼자서만 잘살아 보겠다는 심보일 뿐 오히려 행복과는 거리가 멉니다. 만인의 부러움을 사면 뭐하나, 만사가 내 맘대로 되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먹고살 만하다고 걱정이 없을까, 시간이 너무 남아돌아도 지루하겠지, 늘 건강하다면 건강이 소중한 줄이나 알까 등등, 뭔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남습니다. 분명 지금 여기서 내가 원한 것임에도 불평과 한탄·텅 빈 느낌은 여전합니다. 그렇다면 참행복이 무엇인지 자못 궁금해집니다.

이미 시편에서도 여러 차례 행복을 노래하였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시편 1,1-­2),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이 덮여진 이!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얼에 거짓이 없는 사람!”(32,1­2), “행복하여라, 가련한 이를 돌보아 주는 이! 불행의 날에 주님께서 그를 구하시리라”(41,2), “행복합니다, 당신께서 뽑아 가까이 오도록 하신 이! 그는 당신의 뜰 안에 머물리이다”(65,5ㄱ), “행복합니다, 당신의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늘 당신을 찬양하리니”(84,5), “행복하여라, 공정을 지키는 이들 언제나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106,3),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로 큰 즐거움을 삼는 이! 그의 후손은 땅에서 융성하고 올곧은 이들의 세대는 복을 받으리라”(112,1-­2),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 모두 그분의 길을 걸은 이 모두! 네 손으로 벌어들인 것을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이 있어라”(128,1-­2). 성공이나 육신의 안위를 행복으로 추구하던 불평 선언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예수님도 긴 설교(5­7장)를 시작하시면서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를 외치십니다. 시편과 양식은 닮았으나 그 내용은 전혀 예상 밖입니다. 비상하시다는 예수님 소문을 듣고 벌 떼처럼 몰려든 군중에게 그들이 그토록 염원하는 축복을 내리시는데, 정작 여덟 가지 행복(八福)은 알아듣기도 어렵고 과연 가능하기나 할지도 의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그들이 직면한 현실 곧, ‘가난·슬픔·박해’ 등이 앞으로 그들이 누리게 될 하느님 나라를 보장하는 지름길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들이 버거워하며 짊어지고 살아온 위태위태한 삶의 방식이 바로 행복이었고 하느님 나라에 쌓는 덕행이라고 말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뒤집는 하느님 나라의 가치는 우리의 고달픈 현실에 그 씨앗이 있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이들에게 주어질 기쁜 소식은 바로, 비록 지금은 그들이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사람들로부터 거짓된 사악한 말을 듣지만(11절) 하늘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상은 크다는 약속입니다(12ㄴ절). 하느님은 복의 원천이십니다.

원고지 십여 장 채우는 것도 힘에 겨워 주말마다 백지와의 전쟁을 치르는 제 처지로서는, 여전히 ‘능력 있는 사람’, ‘시간 많아 여유 있는 사람’이 행복해 보입니다. 그러나 글쓰기 재주를 타고나지 않은 이상 그 능력이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도 아닐 터, ‘이렇게 말씀을 곱씹고 맛들이며 기도하다 보면 나에게도 성령의 영감이 찾아와 주시겠지, 그러다가 차차 시간도 단축되어 여유 있게 깊은 묵상 글을 나눌 수 있게 되겠지, 가끔 누군가는 허술한 내 나눔을 통해 마음이 열리겠지.’ 하며, 까마득히 멀리만 있어 보이는 행복을 지금 이 자리로 끌어당겨 봅니다. 불만스런 현실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새삼 깨달으며 이렇게 믿고 싶습니다. 우리는 가난하니까, 지금 슬프니까, 의로움을 갈망하니까, 능력이 없으니까, 하느님의 보상은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눠질 것이라고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12ㄱㄴ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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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숙 소피아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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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스바 2,3; 3,12-13)는
의로움과 겸손을 갖추라고 합니다.

스바니아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파멸(기원전 587년)이 있기 불과 5-60년 전에 하느님의 법규를 잘 실천하는 이들에게 의로움과 겸손을 찾으라고 외칩니다. 이민족이 쳐들어올 때, 하느님을 모르는 체하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님의 분노가 닥칠 것이니, 그날 화를 피하려면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라고 합니다. 정작 주님을 찾고, 주님께 피신해야 하는 이들은 예언자의 외침을 못 들은 척하고, 파멸 뒤에 예루살렘에 남아 고통을 겪게 될 사람들은 하느님의 법규를 실천하는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뿐입니다. 잘 살고, 잘 났다는 이들이 오만에 젖어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멸의 땅에 남아 고생하게 될 사람들이 진정한 하느님의 백성이 되리라고 선언합니다. 겸손한 이에게는 지혜가 따르고 오만한 이에게는 수치가 따르듯이(잠언 11,2) 오만하고 권력을 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분노가 내릴 것입니다. 남아 있는 의롭고 겸손한 이들은 지혜로워서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을 줄 알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목자가 되시어 풀밭에서 풀을 뜯으면서 쉬는 양처럼 남아 있는 이들을 보살펴주실 것이라고 합니다(시편 23).

복음(마태 5,1-12ㄴ)은
산상설교로서 하늘나라를 차지할 조건을 말합니다.

마태오복음의 설교들(5-7; 10; 12; 18; 24-25장) 가운데 방금 들으신 산상설교가 가장 깁니다. 참행복은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완성하러 오셨으니(5,17; 7,12),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6,19)는 가르침으로 요약됩니다. 또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가 하늘나라를 차지하도록(4,17.23; 5,3.10; 7,21) 유다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라는(5,16) 격려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해야(5,20) 하는데, 그때 모욕당하고, 박해받을 것을 각오하라고 하십니다.

여덟 가지 행복 선언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담긴 복음의 핵심 내용으로서 여섯째와 여덟째 행복의 주인공이 하늘나라를 차지할 것입니다. 첫째 행복의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하느님의 선물로 알고 기다리는 사람들, 하느님의 이름에 피신한 남은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은 평화를 위해 애를 쓸 것(일곱째)이므로 그들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행복의 “슬퍼하는 이들”은 멸망한 예루살렘을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실 메시아(이사 61,2-3)를 기다리던 이들처럼 온갖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의 약속에 희망을 두고 있는 이들에게 주시는 위로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셋째 행복의 “온유한 이들”은 “마음이 가난한 이들”(첫째)과 “평화를 이루는 이들”(일곱째)을 합친 것으로서 악인들의 횡포로 가진 것을 다 빼앗긴 이들이 받을 상속이란 하늘나라이므로 행복하다고 합니다(시편 37,11). 넷째 행복의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은 하느님의 승리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을 말합니다(5,20). 처음 네 가지 행복은 거저 주어지는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살아가실 것이기 때문에 주어질 것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도 실천적으로 동참해야만 주어질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제시합니다.

다섯째 행복은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호세 6,6)라고 두 번 반복하시는(9,13; 12,7) 예수님의 뜻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율법보다 더 중요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무시하는 이들(23,23)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하고, 제자들이 다른 이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느님께서도 용서하실 것이기 때문에(6,14)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를 베푸는 이들”이 행복하다(18,33)는 것입니다. 여섯째 행복은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시편 24,4)가 하늘나라를 차지할 것이라서 행복하다고 합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게 되므로 하느님을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행복은 완전한 평화의 나라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5,45)에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원수는 물론(5,44) 자기들을 모욕하고 박해하는 사람들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여덟째 행복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려고 애쓰다가 겪을 아픔은 물론 예수님 때문에(5,11) 제자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겪을 박해(도미시아노 황제: 1베드 3,14.17; 4,14)가 클지라도 최후의 날(25장)에 하늘나라를 차지할 수 있으므로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고 정의를 실천하기 때문에 박해받는 이들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제2독서(1코린 1,26-31)는
그리스도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행복을 주는 지혜라고 합니다.

바오로가 선포하는 복음을 받아들인 코린토 공동체에 지혜롭다거나 유력하거나 가문이 좋다고 하는 이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몇몇 사람들이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다.”(1코린 25)는 사실을 잊은 채 허접한 지식과 인간적 재주와 매력을 가지고 몹시 잘난 체한 것 같습니다. 구원될 자격이 없음에도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음을 까맣게 잊어버린 이들은 오만에 젖어 복음이 아니라 자신의 매력을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교육 방법은 약한 것을 통하여 굳셈을, 어리석은 것을 통하여 지혜를 드러내시는 것이며, 약한 것을 통하여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면서 교만한 자들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비천하고 천대받는 이들을 선택하셨음을 잊었던 것입니다. 오만한 이들보다는 겸손한 이들을 선택하시어 의롭게 해주시는 하느님 외에 아무런 자랑거리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바오로는 상기시킵니다. 지혜이든 자신의 재주와 인간적 매력이든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주님의 업적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위하여 기쁜 소식과 참행복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지혜라고 선포했는데, 코린토인들은 바오로가 어리석은 짓을 한다고 반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탁월한 지혜이므로 그분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하고(로마 13,8-10) 하늘나라에 들기 위해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않고 의롭고 겸손하게 사는 것이 참행복의 조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범적으로 사셨던 참행복의 원칙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는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지녀야 할 덕목으로서 겸손과 신앙을 간직하고, 세속적 유혹과 죄악을 끊어버릴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계명)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입니다.”(마태 5,19) 물론 여덟 가지 행복의 조건대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의롭게 살려고 애쓰고, 주님을 피신처로 삼아 겸손하게 살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주실 것입니다.

행복이란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무엇을 지칭하기 위해 편의상 붙인 단어로서 매우 주관적인 경험이기에 비교나 측정 불가능하고 남에게 설명하기 어려우며, 진위를 평가하기 매우 힘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객관적인 경험으로 비교할 수 있고, 측정할 수 있으며, 남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진위를 평가할 수 있는 잣대를 주시면서 행복의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참행복은 매우 역설적이라서 겸손과 의로움을 실천할 때 맛볼 수 있는 기쁨입니다. 겸손과 의로움을 찾는 이들이 겪어야 할 아픔이 클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에 따르는 상급을 주시려고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너는 행복하다!”(마태 16,17)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행복하기에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주고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행복하지 않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행복의 조건이 무엇인지 잘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면 우리가 신앙 안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나의 행복이, 나의 자랑거리가 이웃에게 사랑과 평화로 남아야 함께 행복합니다. 나의 어리석음과 교만이 이웃에게 아픔으로 남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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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방효익 바오로 신부
2023년 1월 29일
  |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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