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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5주일 성경 말씀 해설
조회수 | 193
작성일 | 23.02.02
복음의 맥락을 따라 이해하자면, “행복하여라!”로 시작하는 하늘 나라의 헌장과도 같은 진복팔단(마태 5,1-12)을 설파하신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의 시민이 세상 사람들 앞에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처럼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으로 살라고 가르치신다. “행복한” 그리스도인은 다른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가져다주는 이들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늘 나라에서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을 받았지만, 인류의 역사에도 책임이 있다. 세상에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 그들도 하느님께로 인도해야 한다. 오늘 복음은 공관복음이 공동으로 전하는 내용이다.

1. “세상의 소금…세상의 빛”(마태오 5,13-16)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라고 몸소 자신을 두고 말씀하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당신의 입을 통해서 우리더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3ㄱ.14ㄱ) 하신다. 이 짤막한 두 문장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신원 의식에 관한 명제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한 대로 이 땅 인간의 삶에 빛을 주시고 의미와 맛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빛이시며 실로 지혜의 소금이시다. 주님의 이 두 문장의 말씀을 진심으로 주님의 말씀으로 지켜갈 수 있다면 그 어떤 근본주의도 존재할 수 없다. 주님과 친교의 은총을 매일 새롭게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일 수 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시편 27,1)이라 한 대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빛이시고 구원이심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그 말씀을 무게를 살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추기시면서 우리를 통하여 사람들 사이에 현존하려 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아름답고 착한 행동들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할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두고 “빛이다. 소금이다” 하신 말씀들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다른 이들의 사랑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명료하게 밝힐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와 행동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이렇게 구별해서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달리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는 분명히 다르고 또 달라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형제나 자매들을 평가절하하자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소돔처럼 형편없는 세상이라고 판단하자는 것도 아니지만, “세상에 있으면서도…세상에 속하지 않은”(요한 17,11.14) 존재로서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분명한 의식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성경은 많은 곳에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휩쓸리거나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다. 바오로 사도는 그에 관해서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라는 말로 이를 정리해준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고 함께 연대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사회의 구성원인 시민으로서 져야 할 책임도 온전히 지고자 한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은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고, 시대의 논리를 따르지 않으며, 세속적으로 살려고 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사고방식을 따르지 않는다고 함은 세상이 쫓는 우상을 식별해낼 줄 안다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만이 갖는 고유성으로 세상과 맞서 싸울 용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무관심이 팽배한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사람을 위한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세상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찾아 제시하고, 그러한 세상을 위해 설득력 있게 공헌하고자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소금”은 “간이 맞지 않은 것을 소금 없이 어찌 먹겠으며 달걀 흰자위가 무슨 맛이 있겠는가?”(욥 6,6)처럼 음식의 맛을 내고, “사제들의 아내들도 제물의 일부를 소금에 절여 저장해 놓고서”(바룩 6,27)처럼 음식을 보존하는 특성을 지닌다. 또한 “너와 너의 후손들을 위하여 주님 앞에서 맺은 영원한 소금 계약이다.”(민수 18,19) “너희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소금 계약으로, 다윗과 그 자손들에게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권을 영원히 주신 것을 알지 않느냐?”(2역대 13,5)처럼 어떠한 약속이나 계약의 항구한 가치와 그에 대한 충실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뜻으로 마르코는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 9,50)” 한다.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의 세상을 하느님과 맺은 계약 안에 보존하고, 또 그 세상에 ‘살 맛’을 ​제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쓸모가 없어져 밖에 내다 버릴 수밖에 없다. 요리하는 이가 어느 정도의 소금을 가미해야 하는지 가늠하듯 어떻게 해야 세상과 인생의 맛을 가장 맛있게 낼 수 있는지를 헤아려야만 한다.

2.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마태오 5,13-16)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은 세상 사람들 안에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복음화와 선교를 실행하는 모습이 어떤지, 다른 타 종교인들이나 신앙을 갖지 못한 이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등의 삶의 양식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런 의미를 담아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5-16) 하신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새로운 예루살렘으로서 산 위에 우뚝 솟은 성도聖都이다. 새 예루살렘으로서,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교회의 소명이고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소명이다. 누구나 볼 수 있게 산 위에서 빛나 인류의 길을 인도해야 하는 소명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은 내용이나 본질보다 형식이나 외모를 중시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기쁜 소식을 어떻게 선포하느냐에 따라서 그 선포의 신빙성이 좌우된다는 것을 잘 안다. 이 말은 다른 면에서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을 전달하는 모양새가 그릇되면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도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하시면서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마태 6,2.5.16) 하시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하신다. 그리스도인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우리가 지닌 진실한 믿음을 보여 주는 스타일이 사실 결정적이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의 온유와 자비로 하느님을 알린다고 하더라도 거만한 태도나 강한 어조로, 더구나 세속적인 모습으로는 결코 복음을 선포할 수 없다.

3.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마태오 5,13-16)

예수님께서 “제 맛을 잃은” 소금을 두고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하신다. “밖에 버려지는” 소금에 대해 생각해 볼 만하다. 당시의 소금은 오늘날과 같이 정제된 소금이 아니었고 사해死海 등지에서 거칠게 채취한 돌소금이었을 것이며 이러한 소금이 습기 등과 접촉하여 그 형태나 맛을 상실하는 경우를 쉽게 상정해 볼 수 있다. 또한 이스라엘에서 성서를 공부한 캐나다의 Thomas Rosica 신부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시골에서 오늘날까지도 사용되는 토기로 만든 오븐을 생각해 볼 만하다 한다. 그에 따르면 대개 집 밖 길가에 설치되어 주식인 얇은 빵을 굽는 데에 사용하는 이러한 오븐은 낙타나 당나귀 같은 동물의 배설물에 소금을 넣어 떡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 말린 것을 연료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일정 기간 이렇게 사용된 것들은 소금기가 빠져나가고 나면 대개 길가에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소금이 소금의 고유성을 상실하면 버려지듯이 그리스도인 공동체도 그 고유성을 잃으면 존재 이유가 없다.

요한 23세 교황님께서 『복음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어제의 그리스도인들보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훨씬 더 잘 이해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의 우리가 인류와 세상에 대해 져야 하는 부채 의식은 더 커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을 알고 있고, 그리스도의 빛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추어 줄 것인가 고민하면서 겸손하게 그들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세상의 빛이고, 세상에 어떻게 맛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는지를 알고 있고 또 사람들이 실제로 맛을 느끼도록 살아간다는 점에서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렇지만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ㄴ) 우리가 맛을 잃은 소금이라면, 우리는 짓밟히고 말 것이다. 우리가 그저 다른 사람을 비추는 척만 하고 있으면 우리는 결코 빛이 아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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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너희는 세상의 빛”(마태 5,13-14)이라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세상에서 증거하고 살아가는 데에 기준이 될 만한 내용을 상징적인 언어로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이미지는 소금입니다. 소금은 음식에 맛을 내고, 부패하지 않도록 보존하고 예방하는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사회를 위험으로부터, 사람들의 삶을 오염시킬 수 있는 세균으로부터 보호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이는 도덕적인 타락이나 죄에 저항하고, 정직과 형제애의 가치를 증거하며, 세속적인 스펙 쌓기나 권력과 부를 지향하는 사회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문제가 됩니다. “소금”인 제자는 누구나 마찬가지로 다 그러하지만, 매일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실수를 털고 일어나 다른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기 위해 매일 용기와 인내로 다시 시작합니다. “소금”인 제자는 입에 발린 아첨이나 칭찬을 추구하지 않고 겸손하게 건설적인 현존을 위해 노력하며, 섬김을 받으러 이 세상에 오시지 않고 오히려 섬기러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따릅니다. 실로 이러한 태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두 번째 이미지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하신 대로 빛입니다. 빛은 어둠을 흐트러뜨리면서 우리를 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둠을 몰아낸 빛이시지만, 세상과 개인 안에는 아직도 어둠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고 복음을 선포하여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임무입니다. 우리의 빛은 우리의 말을 통하여서도 비춰질 수 있지만, “그들이 너희의 선한 행실을 보고…”(16절) 하시듯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하여 비쳐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다른 이들을 도와 우리의 착함과 자비의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께 인도할 때 빛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설 자리가 별로 없는 좁은 세상 안에서도 신앙을 살아내고, 선입견이나 편견을 추방하며 비방을 없애고 위선과 거짓으로 훼손된 상황에 진리의 빛을 비출 수 있을 때 빛입니다. 빛을 비추기 위해서, 그러나 나의 빛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이 누구에게나 비칠 수 있기 위한 도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등과 죄라는 조건이 있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그 세상에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폭력과 불의, 그리고 억압에 맞서더라도 그리스도인은 안전한 자기 울타리 안에 숨거나 움츠러들 수 없습니다. 교회 역시 자기 안으로 물러날 수 없으며, 복음화와 봉사의 사명을 결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 때 하느님 아버지께 당신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악(정신)에서 지켜주십사고 빕니다.”(요한 17,15) 하셨습니다. 교회는 작은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향하여 관대함과 부드러움으로 자신을 늘려갑니다. 이런 것은 세상의 정신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빛이요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작고 소외된 이들의 외침을 듣습니다. 이는 교회가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현존을 연장하도록 역사 안에서 부름을 받은 순례자로서의 공동체임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복음인 말씀과 모범으로 사람들 가운데, 모든 이에게 빛이 되고 소금이 되도록 도와주시기를.(교황 프란치스코, 2020년 2월 9일 삼종기도 훈화, 영문에서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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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벤지
2023년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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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우리 마음 안에 오시어 세상의 소금과 빛인 우리의 정체성을 이해할 수 있는 지성과 그에 따라 살고자 하는 갈망을 주십시오.

▪ 세밀한 독서 (Lectio)

산에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참행복 (마태 5, 3 – 12) 에 귀기울이던 군중을 예수님은 직접 “너희” (13. 14. 16절) 라고 친근하게 부르시며 그분 때문에 세상 사람들한테 모욕과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첫째, 제자들은 소금입니다.(13절) 소금은 자신이 가진 고유한 짠맛으로 음식이 변질되는 것을 막고, 음식에 맛을 줍니다. 이런 역할을 해야 하는 소금이 ‘제 맛을 잃는다.’ 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세상(g )’ 이라는 말과 관련시켜 이해해야 합니다. ‘세상’ 은 제자들이 사는 곳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행복선언을 듣기는 했으나, 그것을 음미하고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기쁜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는 세상 사람들한테 외면당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복음의 맛을 전해주지 못하는 제자들은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7, 26) 과 같습니다. 그들은 외부의 혼란과 박해를 조금만 받아도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복선언 안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대헌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를 받아 그 위에 삶의 토대를 쌓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세상의 소금’ 이 됩니다. 세상에 비전을 주고, 변화된 세상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둘째, 제자들은 세상의 빛입니다.(14절) 소금처럼 자신은 죽어가면서 세상 안으로 스며들어갈 때, 제자들은 비로소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빛과 소금으로서 제자들의 정체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과 “등불” (5, 14ㄴ – 15) 에서 구체적으로 설명 됩니다. 산 위에 있는 고을은 성경 안에서 자주 복음화라는 공통적인 주제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예루살렘 도성은 모든 사람이 주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밀려드는 “주님의 산” 입니다.(이사 2, 2 – 3)

마태오에 따르면 예수님은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과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 사는 사람들한테 빛으로 떠오르시는 분입니다.(4, 12 – 17 참조) ‘등불’ 은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 과 비슷한 이미지입니다. 팔레스티나의 등불은 흙으로 만들어진 조그맣고 단순한 그릇입니다. 가운데 있는 심지 밑에 기름이 있는데, 이 심지에 불이 켜지면 등불은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방 안의 어둠을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자들은 등불이지 빛 자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에 의해서만 빛을 비추기 때문입니다. 빛 자체이신 ‘그분 안에서’ 현실을 해석하고, 판단하고, 식별하는 빛을 받으며, 다시 하느님의 딸과 아들로 태어납니다.

제자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 삶의 성공 여부가 예수님과의 내밀한 일치 여부에 달려있음을 알게 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요한 15, 5)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제자들은 그들이 하는 ‘착한 행실’ 로써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궁극 목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찬양받기 위해서입니다. (16절) ‘착한 행실’ 은 인간적으로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삶 자체가 ‘하느님의 뜻’, 그분이 원하시는 것에 완전히 열려있어야 하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서 58장 7 – 10절과 화답송인 시편 112편은 우리한테 하느님 뜻에 따라 일상을 살아가는 의로운 사람들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가난한 사람들의 변호자인 하느님을 닮아가며 소외된 사람들에게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자세입니다. 그들은 언제, 얼마만큼 수확을 거둘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눈물로 뿌린 씨앗을 기쁨으로 거두리라는 희망으로 사방에 씨앗을 뿌립니다. 이 의인들한테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 자비의 빛이 흘러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하느님의 ‘의로움’ 과 ‘자비’ 를 드러내는 ‘착한 행실’ 을 통해, 그들이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과 딸로서 타락한 세상 안에서 별처럼 빛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이제 더 이상 율법이 기록된 책갈피나 성전에서만 빛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서 드러납니다.

▪ 묵상 (Meditatio)

주님, 우리는 깨지기 쉽고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불이 꺼져버릴 수 있는 등불입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우리 안에 있는 불빛이 꺼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우리 안에 있는 이 빛은 사람들의 신앙을 도와주고 그들에게 힘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 기도 (Oratio)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로 큰 즐거움을 삼는 이 ! (시편 1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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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숙희 성서영성 전공
  |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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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5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중요한 비유 두 가지를 들려줍니다. 첫째 소금의 비유이고 둘째 빛의 비유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이 소금이며 빛임을 밝혀줍니다. 소금과 빛, 이 두 개의 단어로 복음서는 그리스도인의 존재론적이면서도 기능론적인 정체성을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루카와 마르코는 “소금은 좋은 것이다”라고 말씀 하심에 비해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소금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존재 선언의 형식으로 말씀하십니다. 문맥으로 볼 때 마르코 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불소금에 절여질 정도로 열심히 살아야 함이 강조됩니다.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버리고 따라야 함을 강조하는 말 구절 다음에 나옵니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 나라와 관련하여 소금이 언급되고 루카 복음에서는 제자들의 추종과 관련하여 소금이 언급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거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짠 맛을 잃지 않는 소금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마태 복음은 제자들의 정체성을 선언하는 문맥 안에서 소금에 관해 언급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이 말씀은 세상에서 소금이 되라는 권고의 말씀이 아닙니다. ‘소금이다’는 말씀은 행동강령이 아니라 존재양식에 대한 선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지난 주 팔복에 관한 말씀에 이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팔복을 아우르는 말씀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모욕당하고 사악한 말을 듣는 사람’ 등이 행복하다는 선언이 바로 팔복선언입니다. 이 복은 십자가 상에서 피를 흘리며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의로움에 참여하는 행복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이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때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현상과 현실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살아갈 때 세상의 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소금이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소금이 되라”가 아니라 “너희는 소금이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Identity(정체성, 본분)과 신분 그리고 존재가 무엇임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소금이 되고 뭐고 할 것 없이 이미 너희는 소금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소금은 일차적으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단어입니다. 하느님과의 결약 즉 관계의 차원에서 다루어졌습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는 단순한 주종관계가 아니라 쌍무조건부 계약의 관계였습니다. 소금이 불변하듯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 역시 소금 계약으로 불변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에게 들어 올려 바치는 거룩한 예물들은 모두, 영원한 규정에 따라, 내가 너와 너의 아들들, 그리고 너와 함께 있는 너의 딸들에게 준다. 이는 너와 너의 후손들을 위하여 주님 앞에서 맺은 영원한 소금 계약이다.”(민수 18,19)

그리고 탈출기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분향제단에 바치는 향료를 장만할 때 소금을 쳐서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에서 소금은 깨끗하고 거룩한 것을 만드는 필수적인 정화용품으로 등장합니다.

“너는 향료들, 곧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을 장만하여, 이 향료들과 순수한 유향을 섞는데, 각각 같은 분량으로 하여라. 너는 향 제조사가 하듯이, 이것들을 잘 섞고 소금을 쳐서 깨끗하고 거룩한 것을 만들어라.”(탈출 34-35)

급기야 레위기 2장 13절에서는 모든 예물과 소금을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제사 예물로 등장합니다.

“너희가 곡식 제물로 바치는 모든 예물에는 소금을 쳐야 한다. 너희가 바치는 곡식 제물에 너희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소금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 너희의 모든 예물과 함께 소금도 바쳐야 한다.”

아마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귀중한 금 세 가지를 주셨다는 이야기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아주 소중한 금 세 가지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첫째 황금이고 둘째 오늘 나오는 소금이고 셋째 현재를 뜻하는 ‘지금’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세 가지 중에 '지금'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낸 스토리텔링입니다. 지금 소금처럼 살고 지금 빛처럼 살아라 등과 같이 현재를 강조하기 위해서 보통 인용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소금을 강조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소금과 빛의 두 상징어를 사용하셔서 우리 신앙인의 신원에 관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과 빛의 구실을 하면서 맛있고 멋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소금은 굉장히 소중한 물건입니다. 부엌에서나 식탁에서나 소금은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소금은 인간의 생활필수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소금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예수님 시절에도 소금은 몹시 귀했습니다. 소금 한 자루는 한 사람의 생명처럼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소금을 “하늘에서 온 것이라”(데이온)고 하였고, 로마인들은 “세상에는 해와 소금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과거에 소금은 대량으로 생산되지도 않고 운송 체계가 발달되지도 않아서, 오늘날처럼 소금을 쉽게 구할 수 없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금은 그 무엇보다 아주 귀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시고 루카와 마르코의 병행구절에서 “소금은 좋은 것이다”라고 말씀 하신 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십니다. 소금은 그 어떤 금은보화보다 소중한 존재이고 우리는 소중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소금이야. 너희는 그 어떤 존재보다 소중한 존재야. 너희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니? 너희는 소중한 존재답게 살아!”

특히 이스라엘 백성은 소금바다라고 불리는 사해 주변에 살았기 때문에 소금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기후에 음식의 보존을 위해 소금은 절대로 필요했기에 소금 한 자루는 한 사람의 생명처럼 귀하게 생각했습니다. 소금은 가장 깨끗한 해와 바다에서 왔기에 가장 순결한 것이라고 로마인들은 생각했습니다. 소금에 흙이나 모래가 섞이지 않아야 했습니다. 소금은 또한 하느님께 드리는 예물인데 유대인의 제사에 소금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금을 거룩한 제사에 사용하였고(출애 30,35; 레위 2,13), 하느님과의 영원불변한 결약(結約)을 맺을 때에도 소금을 사용하였습니다(민수 18,19).

옛날에는 소금을 돈이나 화폐처럼 취급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Salt(소금)은 음식을 요리하거나 음식을 보존할 때 사용이 되고 있지만, 로마제국에서 한 때 군인들에게 월급줄 때 소금으로 지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소금을 가지고 가면 금방 다른 물건들과 바꿀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월급, 봉급, 급여를 뜻하는 Salary라는 영어 단어의 라틴어 어원은 salarium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요즘 월급쟁이를 샐러리맨이라고 부르는데 소금을 급여로 받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샐러리라는 말이 라틴어로 소금이라는 말인 Sal살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샐러리맨이라는 소금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월급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샐러리맨이라는 단어가 나올 정도로 이 소금이라는 것은 우리 실생활에 중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소금이 중요한가? 첫째 소금은 맛을 냅니다. 소금은 음식을 더 맛있게 하는 조미료입니다. 간을 맞추지 않으면 음식이 맛이 있습니까? 맛이 없습니까? 맛이 없습니다. 훌륭한 요리사는 간을 잘 보고 간을 잘 맞추는 사람이 훌륭한 요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금은 식욕을 촉진합니다. 소금은 무덤덤한 음식에 짠 맛을 줍니다. 소금은 음식에서 느끼한 맛을 제거합니다. 밥맛나게 하는 반찬 즉 밥도둑이라고 할 수 있는 반찬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게장 젓갈 등입니다. 대개 다 짠 맛을 지니고 있습니다. 소금은 자기를 음식의 맛을 바꾸어 놓습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많이 먹는 것이 아니라 맛있게 먹는 것입니다.

저는 요리하는 것이 취미생활인데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간보기를 하고 간을 맞추는 일입니다. 음식이 짜면 짜다고 말하지만 음식이 싱거우면 싱겁다고 하지 않고 맛이 없다라고 보통 말합니다. 이런 경우 음식을 다시 맛있게 하려면 소금이나 간장을 더 넣어 간을 다시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간이 맞으면 이것 맛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밥값하고 밥값 잘 내고 밥 맛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때 이 사람은 살맛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은 인생에 살맛나게 해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생(生)에 맛과 멋을 주어야 합니다.

또 소금은 부패를 막는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팔레스타인의 기후에 음식의 보존을 위해 소금은 절대로 필요합니다. 소금은 원래의 순수와 순결이 유지되게 해줍니다. 또한 소금은 음식물을 발효시켜고 숙성시켜 오래 보관하게 합니다.

자아∼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바닷물은 썩지 않지요? 바닷물이 얼지 않고 지구상의 그렇게 많은 오물과 쓰레기를 받아들이고도 썩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닷물이 얼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 이유는 소금이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바닷물에 3%의 소금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3%의 소금 덕분에 바닷물은 얼지도 않고 썩지도 않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천주교 신자가 10% 정도 된다는 데도 부패지수가 매우 높은 나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최순실이나 조국 사태 같은 것을 볼 때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제대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정도 되는 천주교 신자만이라도 제대로 방부제 역할을 하고 있다면 우리나라 부패지수가 이렇게 높지는 않을 것입니다. 깨끗한 나라의 상위권은 역시 덴마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노르웨이 싱가폴 등입니다. 일본도 18위 미국은 22위입니다. 주사파가 좋아하는 인민의 나라 북조선은 176위입니다. 우리나라의 랭킹은 45위인데 도미니카 르완다 등과 비슷한 부패 수준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세상을 부패하고 무미 한 것이 되지 않게 하는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천주교 신자들이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잘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맛이 간 신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나이롱이라서 맛이 없었던지 아니면 처음에는 맛이 짭짤했는데 나중에 맛이 가출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옳은 소금 구실을 하는 사람이 확 적어졌다는 것은 분명한 현실인 것 같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겠지만, 현상적으로 볼 때, 하위 성직자나 수도자 가운데 어떤 이는 부패혐의로 검찰이나 경찰조사를 받기도 하고, 심한 경우 인권유린의 죄목으로 징역살이까지 하는 실정입니다.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와 위상에 따라 각자 나름대로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주님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퇴색되고 미지근해지는 우리의 신앙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소금이 소금 구실을 못하면 소금이 아닙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맛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면 회복이 됩니까? 그런데 소금이 제맛을 잃는다는 말을 잘 알아듣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에서 많이 발견되는 소금에 관한 전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리, 풍토, 특히 사해와 암염에 관해 좀 알아야 합니다. 사해는 해수면보다 421미터 낮은 지점에 있는 호수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이라고 합니다. 400만년 전 기후와 지각의 대변동으로 지중해의 바닷물이 흘러들어와 호수가 형성됐습니다. 사해의 염도는 보통 바닷물의 열 배 정도 되는 34.2%입니다. 물고기가 살 수 없습니다. 사해에는 부력이 높아 저절로 몸이 뜨기 때문 헤엄칠 필요가 없습니다.

사해의 소금은 물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암석에서도 발견되는데 이것이 암연입니다. 사해 주변에는 오래전 흙과 소금이 뒤섞여 퇴적되어 이뤄진 땅들이 있습니다. 기후의 변화에 따라 진짜 소금은 침전되어 퇴적된 불순물보다 쉽게 용해되어 나옵니다. 소금이 추출되고 남은 나머지 흙들은 쓸모가 없고 짠맛을 잃은 소금은 길에 버려지거나 지붕의 흙 위에 뿌려졌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소금은 차이를 내고 새롭게 하는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밥맛이 나게 하고, 살맛이 나게 합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는 이는 인간 세계에 얼음이 아니라 기쁨을 넣어 주는 사람입니다. 이웃의 삶에 맛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녹아 없으져야 합니다. 그렇지만 맛을 잃어 버리면 안 됩니다. 소금이 음식과 융복합되면 새로운 맛이 생겨나서 창신이 이루어집니다. 원래의 음식 재료를 기본으로 삼아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집니다. 법고창신입니다. 너는 소금이다 라는 말은 너는 법고창신의 사람이다라는 말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은 세상을 법고창신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둘째 우리가 소금으로 살아야한다는 말은 세상이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직장과 가정과 세상에서 나를 죽이고 비워서 건강한 사회가 되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가정 안에서, 직장 안에서 소금으로서 역할을 한다고 하는 것은 얼거나 썩지 않게 할 뿐만이 아니고, 밥맛을 나게 하고 쌀맛을 나게하고 살맛을 나게 하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소금은 음식을 변화시켜 맛을 나게도 하고 또한 음식을 변화시켜 부패를 방지하기도 합니다. 맛은 촉진하고 부패는 방지합니다.

우리가 쓸모없는 소금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이런 반성을 오늘 한 번 해봐야 하겠습니다. “제 맛을 잃은 소금” 은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소금 같은 방부제 신자는 소수라도 괜찮습니다. 많고-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있고-없음의 문제입니다. 소수의 남은자가 세상을 맛있게하고 멋있게 만듭니다. 음식 맛을 내고 세상을 부패하지 않게 하는 데에 다량의 소금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바깥에 내버려져서 짓밟히지 않으려면 이제부터라도 쓸모없는 소금이 아니라 ‘옳은 소금’으로 제 역할을 제대로 다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다른 비유 하나는 빛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Ὑμεῖς ἐστε 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

창세기의 세상 창조 이야기에서 빛이 맨 먼저 만들어졌다는 데에도 빛의 중요성이 드러납니다. 빛은 인간 생명에 절대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이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존재입니다. 빛은 주변이 캄캄할수록 더 밝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빛을 발할 때 어둠이 물러갑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πόλις...ἐπάνω ὄρους κειμένη)은 숨겨질 수 없고 그 존재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빛을 비추면 어두움의 숨은 것들이 드러납니다.

여기서 산은 예루살렘 성산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그 당시 복음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구약의 모세 및 선지자들이 가리키던 참 빛을 거부하고 대항함으로서 구약에서 받았던 진리의 빛들마저 다 놓칠 뿐만 아니라 완전한 짙은 어둠으로 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습과 율법에 묶인 성산 예루살렘의 종교는 빛을 보지 못하는 어둠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가 만든 인습과 낡은 종교적 틀에 예수님을 가둘 수는 없습니다. 어둠의 세상에 나타나신 참 빛이 예수님이십니다. 빛이 비치었는데 그 빛을 못 알아보는 상태가 어둠의 상태입니다. 빛과 어둠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빛 자체에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 빛이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어둠은 물러가고 빛으로 환하게 됩니다. 다만 그 햇빛이 가려지는 곳에 어둠이 깃들 뿐입니다.

산 위에 자리 잡은 빛의 도시 예루살렘과 그 안의 성전에서 사는 사람들이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가 바로 어둠입니다. 산 위의 고을에 사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스스로 의로운 빛이며 발광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등불로 삼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자체가 어둠입니다. 율법주의와 인문주의로 자신에게 밝음이 있다고 자만하면서 다른 빛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큰 빛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빛이 왔고 빛 덕분에 세상은 환하게 다 보이도록 탈탈 털립니다. 전통의 더러운 것도 드러나고, 인습의 잘못된 것도 드러납니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에는 백성들이 모여사는 집들이 있습니다. 말씀이 산위에서 집안으로 공간을 이동시킵니다. 집 안에는 어디에나 등불이 있습니다. 이제 등불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여기서 함지로 번역된 그리스어 모디오스(μόδιονς)는 약 약 8.75리터를 담는 그릇으로, 빛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십일조를 계산하는 데 꼭 필요하기 때문에 유대 가정에는 반드시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디오스는 등불을 밝히는 도구가 아니라 끄는 도구인데 등불을 덮어 껐습니다. 등불을 켜면 등경을 모디오스 밑에 두는 것이 아니라 빛이 두루 잘 퍼지는 곳에 두어서 집안 모든 사람에게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세상을 비춥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으로 자기가 깨달은 진리로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4차 산업혁명후 평균실종의 시대에는 모든 것이 변화하고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모방하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의 빛은 인간의 욕망과 목표에 올바른 네비게이션이 되어야 합니다. 인도하는 두 가지 방법은 언행 즉 말과 행동 정론과 정행을 통해 빛을 역할을 합니다. 인도하는 빛에는 길을 비추어 행인을 인도하는 가로등, 배를 인도하는 등대, 비행기를 인도하는 조명들이 있습니다. 빛의 자녀인 신앙인은 약한 형제를 위해 선두에서 인도하고 서비스를 해야 합니다.

빛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일어나지 못하는 허약한 이들은 인도자인 빛의 도움을 희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옳은 일에 선두에 서서 모범이 되고 봉사의 마중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의 목적은 내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려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자기에게로 이끌어 자기가 만든 틀 안에 구겨넣어 자기 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색깔 그대로 하느님께로 이끌어 하느님의 빛의 자녀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사람들을 진선미의로움성스러움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가집니다. 우리는 빛 자체가 아니라 큰 빛이신 주님을 반사하는 작은 빛일 따름입니다.

이렇게 볼 때 빛은 자기 자신을 과시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를 소모하여 어둠을 쫓아내고, 어둠으로 가려졌던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또한 빛의 기능이 빛 그 자체만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고 주위와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데에 있다면, 우리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분명 “다른 사람들을 위한 존재”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빛은 자기 스스로를 과시하지 않고, 스스로를 불태워 어둠을 쫓아내고, 보이지 않던 현실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또 예수님은‘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세상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착한 행실’입니다. 빛을 비추고 빛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오늘 복음에 의하면 바로 ‘착한 행실’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해서‘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생활에서 착한 행실을 하지 못하고 나쁜 행실을 많이 하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 믿는다는 사람들이 왜 저 모양인가? 꼬락서니 좋다. 신자들이 더 나빠. 저들이 믿는 하느님은 제대로 된 하느님이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 신앙인이 착한 행실을 하면 이렇게 생각하고 말할 것입니다. ‘아아 하느님 믿는 사람들은 역시 다르구나! 천주교 신자들은 어려운 사람들 잘 돌볼 줄 알아! 천주교 신자들 행사하고 나면 행사 전 보다 더 깨끗이 해 놓고 가. 나는 나중에 종교를 가지게 되면 천주교로 갈 거야.’ 제자가 빛과 소금의 구실을 잘 할 때 사람들이 하느님께 인도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신앙인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서, ‘과연 신앙인이라서 다르구나!’ 하면서 그들도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착한 음식을 맛본 사람은 그 음식이 아니라 그것을 장만한 세프를 칭찬합니다. 마찬가지로 제자가 소금과 빛으로서 착한 행실을 하는 경우 그 제자가 찬미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제자를 통해서 일을 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찬양이 돌아갑니다. 착한 행실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 제자는 짠맛을 잃은 소금이나 됫박 속에 들어 있는 등불처럼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느님이 참 하느님이심을 세상 사람들이 알고 인정하는 것은 그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오늘 제2독서는 이런 우리의 착한 행실이 결코 자신을 과시하거나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암시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1고린 2,4-5).

빛과 소금의 구실을 하는 착한 행실은 세상적인 명예나 인기에 영합하여 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이름을 팔아 내 욕심을 채우는 또 하나의 신앙팔이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신자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산다는 것은 악한 행실이 아니라 착한 행실을 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 말씀의 핵심 알갱이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착한 행실’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해, 오늘 제1독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한 번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먼저 이사야 예언자는 나의 것을 가난한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사랑의 결단을 강조합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고, 집 없이 떠도는 노숙자들(homeless, sans abris)에게 거처할 곳과 이불을 내주며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그 갚음은 하느님께서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이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희망이 되는 말씀입니까? 나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나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게 된다고 하십니다. 내가 받은 상처와 아픔이 치유되고 힐링된다는 것을 선포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의 뒤를 지켜주시고 백 그라운드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부르고 간청하고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이에 응답해주십니다. 이 얼마나 든든한 말씀입니까? 달리 이야기 하면 나의 기도가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빛과 소금으로 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부르고 또 부르짖으면 하느님께서는 ‘나 여기 있다’라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예언합니다.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오늘 제1독서에 따르면 ‘나에게’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대낮처럼 되게 하려면 이웃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오늘 독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른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이라는 구절입니다. 필요한 대목을 자르고 붙이기를 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우리의 말은 로고스 즉 하느님의 말씀과 접속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이 말씀하실 때, 하느님은 창조하십니다. 하느님이 "빛이 있으라"(창세기 1:3) 하고 말씀하시자 빛이 생겼습니다. 하느님에게는 말씀과 창조는 동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말씀의 창조적인 힘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타락한 바벨의 말에서 원초적인 아담의 언어 즉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말은 말씀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화종구생(禍從口生)입니다. 옛날부터 입을 화근(禍根)이라고 하였고 인간의 모든 재앙은 입에서 나오는 나쁜 말에서 옵니다. 거짓말, 속임수, 욕지거리, 중상(中傷)과 모략(謀略), 일구이언(一口二言) 그리고 각종 악플 등은 모든 액(厄)과 화(禍)의 원천입니다. 장자는 언자풍파야(言者風波也)라고 갈파하였습니다. 나쁜 말을 잘못하면 풍파가 일어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 모든 ‘나쁜 말’을 치워버리라고 하십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몸이며 말하는 몸입니다. 몸이 생각하고 생각하는 몸이 발화(發話)하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에 말조심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말에는 좋은 말이 있고 나쁜 말이 있습니다. 좋은 말은 말씀이라고 하고 나쁜 말은 그냥 소음입니다. ‘라떼는 말이야’의 할 때의 ‘말’은 꼰대의 말이며 억압하는 소음입니다. 말씀은 생명을 못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잘 살게 하고 삶의 약동을 펼쳐나가도록 하는 말입니다. 좋은 말은 말씀이며 말씀은 생명을 유지시키고 살리는 말이며, 존재를 풍부하게 해주는 말이며, 사랑의 말이며, 격려의 말이며, 기쁨을 넣어주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식욕을 촉진시키는 말이며, 세상에 살 맛을 나게 해주는 말이며, 우리의 어둠을 밝혀주는 빛의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착한 행실과 좋은 말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세상에 나타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쌀맛나고 살맛나며 밥맛나는 세상, 3%의 소금바다처럼 얼어붙지도 썩지도 않는 세상이 되게 합니다. 골로새서 4장 6절은 세상의 소금인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정답고 또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아야 합니다.”고 권고합니다.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은 말 말입니다. 오늘 주일 복음과 공관 병행 구절인 마르 9장 50절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이번 한 주간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면서 ‘나쁜 말’을 치워 버리고 착한 행실을 앞세우는 한 주간이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의 언어습관을 돌아보고 내가 하는 말이 나쁜 말인가? 아니면 좋은 말인가? 반성해보고 나쁜 말, 상처를 주는 말, 생명을 죽이는 말, 다른 사람을 해하는 말이나 존재를 깍아내리는 말, 타락한 바벨의 말, 오염된 말, 악한 말, 더러워진 말, 새빨간 거짓말 등은 과감하게 치워 버리는 한 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말, 바른 말, 좋은 말, 다른 사람에게 격려가 되는 말, 다른 사람에게 힘이 나게 하는 말, 다른 사람에게 신바람과 휘파람이 나게 하는 말, 그런 말을 많이 하고 소금과 빛이 되는 착한 행실을 실천하는 오늘 하루 그리고 이번 한 주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고 착한 행실을 많이 하며 나쁜 말을 치우고 고운 말 좋은 말을 많이 하게 될 때, 우리의 빛이 솟아오르고, 새벽빛이 터져나가고 우리의 상처가 아물어 치유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악한 행실을 버리고 착한 행실을 실천할 때 이번 한 주간도 혹은 오늘 하루도 주님께서 바로 내 옆에 계시면서 나의 힘이 되어 주시고, 나의 지혜가 되어 주시고, 나의 방패가 되어 주시고 나의 뒷배가 되어주시고 나의 창이 되어 주시고 나의 눈이 되어 주시어 우리를 잘 이끌어 주시는 한 주간이 되고 오늘 하루가 될 것입니다. 소금은 맛을 내고 빛은 멋이 나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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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
2023년 2월 5일
  | 02.05
523 97.6%
제1독서(이사야 예언서 58,7-10)는
단식과 자선에 대한 참된 의미를 깨우칩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열심한 유다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월, 목요일) 단식했습니다(루카 18,12).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 바빌론의 침략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것에 대한 깊은 참회의 표시였으며, 둘째는 율법에 따라서 동족 가운데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신명기 15,7-11). 유다인들에게 착한 행실(마태 5,16)이라 불리는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자비를 실천하는 일이며, 세상의 떠받치는 기둥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야 하는 거룩한 예배(신명기 5,6)와 직결됩니다. 참된 단식의 의미는 굶주린 이와 식량을 함께 나누기 위한 것이며,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 떠도는 이들을 집에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고, 헐벗은 이들에게 옷을 나눠주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들이 단식하지 않아도 될 구실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일꾼들을 더 다그치기 때문에 다른 날보다 더 힘든 멍에를 그들에게 메어주었으며, 자기들은 못된 주먹질이나 했습니다. 유다인으로서 단식은 당연한 일인데 마치 대단한 자랑거리인 듯이 머리를 숙이고 다니며, 남루한 옷을 골라서 입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단식의 참된 의미를 잘 살려서 실천해야만 유다인의 하느님으로 그들 곁에 머무르실 것이며, 유다인들도 세상의 빛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마태오 5,13-16)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바리사이와 비교하시면서 복음 선포자로서의 행실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모욕당하고 박해를 겪을지라도 하늘에서 받을 상이 있으니 행복하다(마태오 5,11-12)고 하신 뒤,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하십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들이 지녀야 할 지혜와 희생정신과 모범적인 삶을 강조하십니다. 사실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린다면 이미 소금이 아니라 전혀 다른 효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소금은 자신을 위해서 짠맛을 간직하지 않고, 물기에 닿아 자신의 형체를 없애면서 다른 것이 보존되거나 감칠맛이 나게 합니다. 이렇게 소금은 자기희생을 통하여 다른 것에 짠맛이 스며들게 함으로써 소금의 역할을 다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처럼 복음을 선포하게 될 당신의 제자들이 신앙 공동체에 녹아 들어가서 활기를 불어넣는 소금처럼 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버려지고, 짓밟힌다면서 제자들에게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를 훨씬 능가하는 의로움으로(마태오 5,20) 공동체에 활기를 불어넣으라고 강조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하시면서 자기 행실로 하느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라고 하십니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잘 드러나는 곳으로서 항상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도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를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습니다.”(마태오 28,16) 높은 곳에 있는 불빛은 쉽게 드러납니다. 높은 곳에서 반짝이는 빛이 멀리 퍼져나가듯이 제자들의 거룩함과 행실이 마치 빛처럼 많은 이들에게 가 닿아 그들이 제자들의 거룩함과 행실을 보고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요한 1,9).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이사야 예언서 9,1). 예수님이야말로 산 위에서 세상을 밝히는 참빛이시며, 제자들은 그분의 빛을 받아서 반사해야 할 사람들이라서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놓는 사람이고 하십니다.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넣어두는 사람은 복음 선포라는 미명으로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를 선포하고, 그리스도 편이 아니라 자기편을 만들기를 일삼습니다. 또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몸부림치는 것은 물론 그리스도의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매력을 심어주려고 애씁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그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의 행실을 보고 더욱더 적극적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됩니다. 그런데 복음 선포자가 자기만 드러내려고 하거나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편을 만들려고 할 때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아버지가 아니라 자기를 찬양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금이 제맛을 잃어버린 것이며,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넣어둔 것입니다.

제2독서(코린토1서 2,1-5)는
복음의 진리와 인간적 설득 수단을 혼동하지 말라고 합니다.

바오로는 “하느님의 신비(복음)를 선포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사도)으로 코린토에 갔으며, 자기 지혜를 과시하거나 말재주를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적인 허영심에 젖어 잘 꾸며진 말로 복음을 선포하는 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지혜를 과시한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아니라 자기를 드러나게 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자기 재주를 과시하려는 이는 복음을 선포할 때 성령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자기가 이룬 일처럼 떠들게 될 것입니다. 이런 교만과 착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오로는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성령의 힘을 드러내기 위해 두려움과 떨림으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인간적인 매력과 지식을 자랑하려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가장 정교하게 꾸며진 속임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언변이 수려하지 않았고, 외모가 빼어나지 못했으며, 인간적 약점이 많았을지라도 바오로는 성령의 힘을 드러내려고 갈라지지 않는 마음과 성실함은 물론 착한 행실로 복음을 선포했다고 자랑스러워합니다. 바오로는 오로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드러나도록, 코린토인들의 믿음이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도록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려고 애를 썼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공동체 안에 자신을 녹여 스며들게 함으로써 활기를 불어넣는 소금 역할을 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이웃이 기쁜 소식을 잘 듣도록 빛을 반사하라는 것입니다. 빛이란 외부로부터 내게 와서 내가 드러나게 합니다. 빛이 와 닿으면 나의 행실이 다 드러납니다. 빛으로 말미암아 환하게 드러나는 나의 착한 행실을 바탕으로 복음을 선포한다면,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와 닿은 빛으로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하는 나의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단식과 희생을 많이 하지만(마태오 9,14), “의로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마태오 5,20) “기도한다면서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 바리사이들”(루카 18,11)을 닮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오로지 자기만 드러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기 패거리를 만든다면 공동체는 온전하게 남아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자기 행실을 통해 그리스도를 반사하는 역할과 성령의 힘에 바탕을 두는 소금 역할을 하는 사람이 많아야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려면 겸손과 사랑의 실천이 요구됩니다. 사랑은 소금의 맛을 오래 간직하게 하고, 겸손은 빛을 멀리 보내는 역할을 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현하기 위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입니다. 먼 훗날,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아갔을 때 당신 곁에 머물게 해주시는 기준은 자기 업적이나 자랑거리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겸손한 태도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착한 행실 때문일 것입니다. 착한 행실이란 그리스도와 복음 때문에 박해와 모욕을 견뎌내는 삶, 가난하고 온유한 마음과 의로움으로 자비의 실천, 그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평화를 이룸을 뜻합니다. 그래서 단식과 희생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드러나도록 하는 증거 행위로서 선교적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도록(마태 28,20) 도와주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가정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활기를 불어넣는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거나, 속된 말로, 공동체의 활기가 아니라 분란을 일으키기 위해 뿌려지는 잿가루처럼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우리가 정녕 공동체를 밝히는 참빛(그리스도)이 잘 퍼지도록 등불을 높이는 지혜로운 사람인지, 아니면 나를 드러내기 위해 등불을 함지 속에 넣는 어리석은 사람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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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방효익 바오로 신부
2023년 2월 5일
  | 02.05
523 97.6%
제 맛을 잃은 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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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오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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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또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은,
세상의 악을 막고,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인도하라는 명령입니다.
모든 신앙인은, 또 그리스도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고, 소금과 빛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됩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행전 2,46-47).”

믿음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신앙인들의 모습과
사랑이 가득 넘치는 공동체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소금과 빛이 되었습니다.
<삶 자체가 곧 복음 선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라는 말은,
신앙인 공동체의 삶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감화시켰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
라는 말은, 날마다 신자가 계속 늘어났다는 뜻인데,
이 말에는 자기 발로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요한 13,34-35) 실천한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 실천’은, 그 자체로 신앙을 증언하는 일이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고, 소금과 빛으로서 사는 일입니다.
따라서 신앙인 공동체가 실천하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세속의 단체나 집단과는 분명히 다른 공동체라는 것을,
즉 ‘거룩한’ 공동체라는 것을 드러내는 중요한 특징이 됩니다.
반대로 말하면, ‘사랑이 없으면’ 신앙인 공동체라고 말할 자격을
잃게 되고, 복음 선포는 거짓 선포가 되고,
‘제 맛을 잃은 소금’이 되고, ‘함지 속에 감춘 등불’이 되어버립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끼리만
서로 사랑하여라.”가 결코 아닙니다.
우선 먼저 공동체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하지만,
그 사랑은 반드시 밖으로 흘러 넘쳐야 합니다.
만일에 사랑이 밖으로 향하지 않고 안에만 있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단 이기심일 뿐이고, 그 공동체는 공동체가 아니라
자기들끼리만 뭉쳐 있는 이기적인 집단일 뿐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안티오키아 교회를 주목하게 됩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키프로스 사람들과 키레네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하면서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사도행전 11,20ㄴ.26ㄷ).”

“그 기근은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에 일어났다. 그래서 제자들은
저마다 형편에 따라 유다에 사는 형제들에게 구호 헌금을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그대로 실행하여 그것을 바르나바와 사울 편에
원로들에게 보냈다(사도행전 11,28ㄴ-30).”

안티오키아 교회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인’(크리스천. Christian)이라고
불린 첫 신자들이고, 그들이 대기근 때에 유다 지역의 신자들을
도와준 일은, 사도행전에서는 한 지역 교회가
다른 지역 교회를 도와준 첫 사례입니다.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말은,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는 구분되는 다른 종교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정받았음을
나타내는 말인데, 이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신앙인들이라는 영예로운 호칭입니다.
또 안티오키아 신자들은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모범을 보인
사람들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그리스도(메시아)이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증언하는 호칭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자격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인답게 충실하게 살아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
자체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명령만 하신 것이 아니라,
소금과 등불 구실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 말씀도 하셨습니다.
제 맛을 잃은 소금은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힌다는 말씀은,
신앙인답게 살지 않은 사람은 심판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으니’ 라는 말씀은,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 것은, 하느님에게도, 세상 사람들에게도, 그 자신에게도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또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라는 말씀은,
신앙을 감추지 말고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증언하라는 명령입니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감추어진 등불은 제 맛을 잃은 소금처럼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배반자 유다는 스스로 ‘제 맛을 잃은 소금’이 된 사람이고,
스스로 등불을 끈 사람입니다.
그의 배반은 그 자신이 멸망을 향해서 가게 된 일이면서,
동시에 교회 전체에, 또 사도들의 활동에 큰 타격을 준 일이었습니다.
성경에 특별히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사도들 안에서 배반자가 나왔다는
사실은 사도들의 위신을 추락시킨 일이었고, 사도들이 복음을
선포할 때 계속 ‘걸림돌’로 작용했습니다.

<한 사람의 신앙인이 소금과 등불 구실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그 자신이 구원을 못 받는 것으로만 그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방해하는 ‘악한 일’이 됩니다.
복음 선포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가로막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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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3년 2월 5일
  |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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