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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일 성경 말씀 해설
조회수 | 212
작성일 | 23.03.24
이제 부활절이 가까운 시점에서 교회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 부활의 예표로서 라자로 부활의 표징을 묵상하도록 우리를 이끈다.(*이미지 출처-ilblogdienzobianchi.it “돌을 치워라!”-요한 11,39)

1.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사는 베타니아 마을의 라자로”(요한 11,1-45)

복음은 “어떤 이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사는 베타니아 마을의 라자로였다.”(요한 11,1)라고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체류하시는 동안 사랑하는 이 친구들을 자주 찾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근교 베타니아라는 마을에 사는 이 남매들의 가정에서 마르타의 따뜻한 환영과 마리아의 세심한 경청, 그리고 라자로의 진지한 우애를 즐기곤 하셨다.(참조. 루카 10,38-42) 라자로의 누이들은 오빠 라자로가 병이 들어 앓게 되자 당시 멀리 계시던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고”(요한 11,3) 소식을 전하였다. 친구가 아파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데 이를 모른 체하실 수 없는 예수님이었다. 오늘날도 예수님과 우정을 나누는 이들이 아픔을 겪을 때, 곧 인생의 고통 앞에서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우정이 흔들리는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이를 나 몰라라 하시는 분이 아니다.

소식을 접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요한 11,4) 하신다. 그런 인생고人生苦를 통해 인간사 안에 개입하시어 인간을 “끝까지”(요한 13,1)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영광을 드러내시리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을 병”과 “하느님의 영광”을 대비하듯 말씀하시면서 질병이 죽음의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으며, 죽음이 결코 승리할 수 없음을 밝히신다. 예수님께서는 남매들을 “사랑하셨으나” 소식을 접하시고도 “계시던 곳(요르단 강 건너편)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요한 11,5-6) 예수님께서는 사흘째가 되어서(부활에 대한 암시?) 제자들에게 “다시 유다로 가자.”(요한 11,8) 하신다. 이에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스승님,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요한 11,8) 한다.

예수님께서는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요한 11,9-10) 하시며 주님의 때, 더는 어찌할 수 없는 어둠의 때가 오기 전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어서 아버지께서 요청하신 대로 당신이 해야 할 바를 하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하시고,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요한 11,11) 하신다. 죽은 것이 아니라 실제 잠이 든 것처럼 오해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요한 11,12) 하면서 그쪽으로 가지 않고 싶어 하는 내색을 내비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라자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요한 11,15) 하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열두 제자 중에서 유일하게)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가 (충동적이고도 도발적으로 반응하면서)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하고 말하였다.”(요한 11,16) 토마스가 순간적으로 ‘욱’하여 말한 듯이 보이지만 토마스의 말에는 의외로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요한 12,26)이라는 뜻깊은 명제가 담겨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설령 죽음에 이를지라도-오늘 복음의 끝에 드러날 것이다-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2.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예수님께서도 눈물을”(요한 11,1-45)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베타니아로 돌아가셨을 때는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요한 11,17)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1-22) 하면서 예수님을 향한 신뢰가 담긴 말을 원망 조로 쏟아낸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는 죽음이 지배할 수 없으므로 오빠가 죽은 것은 예수님이 멀리 계셨기 때문이라는 믿음을 고백한다. 그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에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3-24)라면서 마지막 날의 ‘몸의 부활에 관한 신앙’까지 고백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 하시면서 마르타가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초대하신다. 마르타는 마침내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하고 최종적인 고백을 한다.

마르타를 만나신 예수님께서 “가만히” 마리아를 찾으시자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32) 하고 마르타와 같은 내용으로 예수님께 외친다. “그 발 앞에 엎드려”, 이어지는 구절에서 “마리아도 울고…”(요한 11,33)에서 보듯이 분위기는 마르타의 경우보다 훨씬 더 감정적이고 슬프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어서 “그분 발 앞에 엎드리지만” 슬픔이 앞서 그 슬픔을 이겨낼 믿음의 표시가 보이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마리아의 눈물은 전염성이 있어서 “마리아도 울고” 함께 있는 “유다인들도 울며”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신”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셨다.”(요한 11,35) 인간의 진실한 눈물은 하느님도 울릴 수 있는 전염성을 지닌다.

잠시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을 표출하시는 예수님을 두고 멈출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시고 산란해지신다.” 내적인 공감이다. 당신께서 무척 사랑하신 한 친구의 죽음 앞에서 어찌 죽음이 사랑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억울해하시는듯한 떨림이다. 도대체 죽음이 뭐라고 이 사랑과 관계를 부수는가 하는 반응이다. 떨림이 북받쳐 올라 상처가 되고 상처는 슬픔이 되며 분노가 된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임박한 죽음 앞에서(요한 12,27), 그리고 제자들에게 유다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실 때(요한 13,21)도 “마음이 산란해지셨다”라고 같은 표현을 통해 같은 감정을 보이신다고 기록한다.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눈물을 보고 사람들은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요한 11,36) 하면서 그 눈물을 라자로에 대한 예수님의 크나큰 사랑의 표시로 읽어낸다.

3.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1-45)

이어서 우리는 예수님과 다시 살아난 라자로와의 만남이라는 오늘 복음의 정점에 다다른다. 라자로의 “무덤으로 가신” 예수님께서는 동굴 무덤 입구에 돌이 놓여있음을 보시고, “생명”이신 분(요한 14,1)과 죽음의 대결이 시작한다. 이 부분은 예수님과 하느님 사이의 깊은 일치를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심에 따라 사람들이 무덤 앞의 돌을 치운 다음,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요한 5,30>-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1,41-42) 하고 아주 다정다감한 어조로 아버지께 기도하신다. 예수님께서 어떤 표징을 이루시기 전에 먼저 기도하시는 유일한 경우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감사”로 시작하고 “믿게 하려는 것”, 곧 모든 선의 근원이 아버지이심을 사람들이 믿게 하시려는 기도이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하고 외치시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요한 11,43)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 없이 즉각적으로 효력을 발생한다. 예수님께서는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요한 5,28-29) 하고 말씀하신 바가 있다. 그렇게 무덤 속에 있던 라자로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무덤 안장 때의 모습처럼 천으로 감기고 수건으로 감싸인 채 예수님의 부활을 미리 보여주듯이 무덤에서 나온다. 라자로의 부활이라는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신” 많은 이들을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리라는 예표이며, 또한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시리라는 이유를 밝혀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죽음과 생명, 죽음과 사랑의 대결에서 예수님께서 살아내신 사랑이 승리한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아무도 그들은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8-29) 한 그대로 사랑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물리치시고 당신의 양들을 결코 죽음에 빼앗기지 않으신다.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친구가 되면 그 누구도, 심지어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를 예수님으로부터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일단 표징이 주어지면 그것을 읽어내는 것은 그 표징을 본 사람들의 몫이다.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11,45)라고 오늘 복음은 끝난다. 믿음 역시 육체적인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모든 이가 죽음을 거쳐야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최종적인 끝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우정을 맺는 이라면 영원히 살고, 자신 안에 질병과 죽음을 넘어선 승리를 안고 산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아가 8,6)에서 보듯이 단지 표현상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내시고 가르치신 사랑은 실제 죽음보다 강하고, 부활로 나아가는 주님의 모든 친구를 위한 예언이자 기다림이며, 이미 지상 생활에서 앞당겨 사는 생명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영광이며 사랑의 영광이다. 라자로의 부활 이후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 의회의 소집과 논란 끝에 대사제인 카야파가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더 낫다는 사실”(요한 11,46-53)로 결론지으며 실제적인 예수님의 죽음과 사형을 언도하여 예수님이 패배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그들이 범접할 수 없는 예수님의 영광이요 승리이다. 라자로가 부활한다. 라자로가 예수님의 생명을 얻는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하는 말씀에 따를 때 부활한 라자로의 생명은 예수님의 생명이다.

예수님의 사랑과 우정은 죽음을 이긴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만일 예수님을 믿고 우리의 믿음을 그분에게 둘 수만 있다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심지어 우리가 죽음에 이른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불확실하고 어둡게만 보이는 그 죽음의 문턱을 넘는 우리 곁에 당신 사랑으로 결정적인 생명 안에 우리를 맞이하여 안아주실 누군가가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시는 선물이다. 예수님의 삶에 참여하고자 하는 이에게 죽음은 마지막 말이 아니다. 누구나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이라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나찌안즈의 성 그레고리오께서는 『주 예수님, 당신의 말씀에 세 죽음이 빛을 보았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그랬고(마태 9,18-26), 나인에 살던 과부의 아들이 그랬으며(루카 7,11-17),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무덤에서 나온 라자로(요한 11,1-45)가 그러했습니다. 부디 제가 그 네 번째이게 하소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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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서 우리는 인간의 믿음, 그리고 하느님과 하느님 사랑의 전능하심이 서로를 찾고 마침내 서로 조우하는 것을 봅니다. 이는 마치 두 개의 길과 같습니다. 곧, 인간의 믿음과 하느님 사랑의 전능하심이 서로 찾고 결국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마르타와 마리아의 절규에서, 그리고 그들과 함께 부르짖는 우리의 절규에서 봅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하느님의 대답은 연설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하느님의 답변은 예수님이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 믿음을 지녀라! 비록 죽음이 이긴 것처럼 보이더라도, 눈물 흘리는 가운데 계속 믿음을 지녀라. 너희 마음에서 돌을 치워라! 하느님의 말씀이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을 다시 가져가게 하여라.”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말씀을 되풀이하십니다. “돌을 치워라.”(요한 11,39) 하느님은 무덤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신 게 아니라, 아름답고, 좋고, 기쁜 생명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지혜 2,24)라고 지혜서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악마의 올가미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돌을 치우라고 부르심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위선으로 신앙을 살아가는 것은 죽음입니다. 타인을 파멸시키는 비난은 죽음입니다. 모욕과 중상모략은 죽음입니다. 가난한 이를 소외시키는 것은 죽음입니다. 주님은 마음에서 이러한 돌들을 치우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그럴 때 생명은 다시 한번 우리 주변에 꽃을 피울 겁니다.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분과 일치하는 사람은 생명과의 만남에 들어갑니다. 그리스도 없이, 혹은 그리스도를 벗어나면, 생명이 없을 뿐 아니라 죽음으로 다시 떨어집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20년 3월 29일 삼종기도 훈화-출처. 바티칸 뉴스 한국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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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벤지
2023년 3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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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 먹도록 가장 가까이에서 죽음을 지켜본 것은 3년 전 아버지의 영면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다른 지인들의 부음을 듣거나 빈소를 찾아서는 그 순간 잠깐 가슴이 먹먹하고 삶이 부질없음을 느끼는 정도였으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말로만 듣던 죽음이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갑작스럽게 떠나신 게 아니어서 옆에서 지켜보는 내내 삶과 죽음의 경계가 크게 확대되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죽으면 다 끝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 죽음도 삶의 연장이고 우리가 모르는 다른 형태의 삶으로 이어질 거라는 기대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만큼 ‘죽음’이란 단어가 그토록 절실하게 제 마음을 꽉 채운 적도 없었습니다. 하루하루가 다른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느낌이었으니까요.

누구한테나 공평하게 돌아가는 죽음 앞에 어느 장사가 당해 내겠습니까? 죽음이 무서운 것은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어느 작가가 그러더군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찬양할 수 없기 때문에 죽어 ‘셔올’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친히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되어주십니다.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일곱 번째 표징입니다. 이 표징은 일곱이라는 숫자에서 드러나듯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가장 완전한 표징입니다.

예수님은 라자로의 가족을 사랑하셨다면서 정작 라자로의 소식을 들으시고는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르시다가(6절)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에야(39절) 그 가족에게로 가십니다. 그것도 얼마 전 돌에 맞으실 뻔한 일로 유다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8절), 말리는 제자들을 뒤로한 채 앞장서 가십니다.

늑장을 부리신 것도 위험을 마다하지 않으신 것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4절)

라자로가 죽었는데, 죽을 병이 아니라니요? 여러 차례 예수님의 마음은 산란해지고 북받치십니다. 라자로의 죽음이 애통해서라기보다는 이토록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죽음의 세력에 화가 치미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당도하셨을 무렵 그의 육신은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나흘이나 되었으니 그는 확실히 죽은 사람입니다. 생명을 잃은 몸은 썩기 마련입니다. 생명이신 예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우리도 부패하여 본모습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아직 라자로를 살리기도 전인데 미리부터 예수님은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올리십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41절) 예수님은 무조건 아버지 하느님을 믿으셨습니다. 아버지께 기도하면 항상 들어주신다는 온전한 신뢰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하느님을 믿어야 할지 모르는 우리에게 참 신앙이란 이런 것이라고 본을 보여주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40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5­26절)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 죽음을 건너뛰지 못하셨으면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십자가상 죽음이 단순한 생명의 소멸이 아님을 미리 내비치신 듯합니다. 점점 죽음으로 가까이 가심을 예감하시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을 비장한 각오도 단단히 하십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11절) 무덤에 묻힌 라자로를 깨우러 가십니다. 편견·무관심·악습·상처·두려움의 무덤에 갇힌 우리를 흔들어 깨우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43절) 믿음은 무덤에서 사람을 일으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이어서 많은 유다인들이 이들 자매를 찾아와 위로하였습니다(18­19절). 그들은 모두 지켜보았습니다. 이 일로 많은 유다인들은 믿음을 갖게 되었고(45절) 제자들의 믿음 또한 풍요로워졌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곧 하느님이 하시는 일임을, 그분이야말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고(27절) 부활이요 생명이심을(25절) 라자로의 죽음과 소생이 그들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이 일로 신앙과 불신앙이 판가름납니다. 유다 지도자들은 여전히 마음이 완고하여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갈 결심을 합니다. 라자로의 죽음과 소생은 곧 맞이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앞당겨 내다보고 있습니다.

지난 가을에는 아버지를 모신 성당 근처로 이사 와 아버지와 한 본당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기쁜 일이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곧장 아버지께 달려갑니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막연하기만 하던 영원한 생명과 부활이 조금씩 피부에 와 닿습니다. 육신을 뛰어넘는 생명, 죽더라도 살고 살았으면 영원히 죽지 않을 그 무엇, 봉안당을 사이에 두고 저와 아버지가 주고받는 교감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5­26절) 어느 날 문득 돌이켜 보니 아버지께 하소연했던 일들이 많이 해결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어려운 고비를 탈 없이 잘 넘긴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하느님 가까이에서 백을 쓰시나 봅니다.

아직은 풀어야 할 일들이 좀 남았습니다. 아버지께 또 도움을 청합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42절) 사순절 막바지에 접어들어 새 생명을 얻을 준비를 합니다. 미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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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지숙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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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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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신 이야기는, 당신의 부활을 미리
암시하신 일이기도 하고, “예수님은 생명과 죽음을 지배하는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제자들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내용을 보면 사람들의 슬픔과 눈물이
두드러지게 보이는데, 그것은 인생살이에서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슬픔과 눈물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큰 기쁨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되고 영원한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또 이 이야기에는 그 기쁨을 향해서 스스로(‘능동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가르침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저절로 나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은총을 내가 적극적으로 받으면서, 은총을 향해 능동적으로
나아가야 은총이 내 안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요한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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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병자를 직접 만나거나, 직접 접촉하지 않아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말씀만으로 병자를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요한 4,50-53), 라자로의 경우에도,
‘계시던 곳’에서 말씀만으로 그를 고쳐 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안 하셨고,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셨습니다.
라자로가 죽을 때까지 일부러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의도적으로 하신 일입니다.
복음서 저자가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라고 특별히 언급한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의도를
잘못 해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가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시고
이틀을 더 기다리신 것은, 그들 남매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하셨기 때문이고, 일시적인 위안이나 작은 기쁨이 아닌,
영원하고 참되고 큰 기쁨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계획하신 일이었습니다.>
병을 고치고 건강을 되찾는 것은 누구에게나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작은 기쁨’일 뿐입니다.
진짜 큰 기쁨은, 그리고 참되고 영원한 기쁨은,
죽음에서 완전히 해방되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일은
그 기쁨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주신 일입니다.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남매에게만 주신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요한 11,43-44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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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나인’ 고을의 어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실 때에는
‘관에 손을 대시고’,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7,14).
또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실 때에는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아이야, 일어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8,54).
그러나 라자로를 살리실 때에는 그의 손을 잡지 않으셨고,
무덤에 손을 대지도 않으셨고, 그냥 무덤 밖에서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죽은 사람을 말씀만으로 살리신 일은 세 이야기의 공통점이고,
어떤 동작 없이, 오직 말씀만으로 살리신 것은
라자로 이야기의 특별한 점입니다.
<나인의 어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일과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은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이고,
라자로를 살리신 일은 ‘가르침’을 주기 위한 일입니다.>

무덤에 있는 라자로를 불러내신 일은,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은 각자 스스로,
능동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지만, 그 생명의 힘을 받아서
자리에서 일어나고, 무덤에서 걸어 나가는 일은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열어 놓으셨고,
그곳까지 가는 길을 알려 주셨고, 그 길을 앞장서서 걸어가십니다.
예수님 뒤를 따라서 걸어가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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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에서 ‘많은 사람’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믿은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어쩌면 믿은 사람들의 수보다 안 믿은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믿은 사람들’은 전부터 예수님을 믿으려고 노력했던 사람들로,
그리고 안 믿은 사람들은 전부터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했던
사람들로 생각됩니다.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놀라운 기적을 보아도,
그 일을 기적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라자로를 살리신 기적을 보고서도 안 믿은 사람들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그 일을 알렸고(요한 11,46), 최고의회는
예수님과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했습니다(요한 11,53; 12,10).
안 믿은 자들은 안 믿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일을 덮으려고 한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일이 그렇게 진행되었을까?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권한과 권능이 드러날수록
악의 세력이 더욱더 기승을 부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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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3년 3월 26일
  | 03.24
528 45.2%
요한복음서는 기원 후 100년경에 기록된 초기 교회의 명상록입니다. 이 복음서를 집필한 공동체는 다른 복음서들에서 주제들을 택하여 명상하는 식으로 엮었습니다. 지난주일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서 9장은 시각장애인 한 사람을 등장시켜, 예수님이 그의 시력을 회복해 주시자, 그가 예수님에게 “주님 믿습니다”라고 고백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력을 얻어 새롭게 믿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장이 요한복음서 10장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이 당신 양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목자라는 사실을 부각시켜서 앞으로 일어날 수난에 대해 독자들을 준비시켰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바로 그 다음 장인 11장입니다. 착한 목자가 자기 양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버리듯이, 예수님은 라자로를 살리고, 당신 스스로는 죽음으로 가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리는 과정을 장황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서 나오는 것이 유대 최고회의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서 11장은 라자로를 살린 예수님은 그 일 때문에 당신의 목숨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라자로를 살린 오늘의 이야기는 사람 하나를 살린 기적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복음이 기록되기 약 70년 전에 예수님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죽음이 지닌 의미를 명상합니다. 그러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어떻게 살아 계시고 그분 죽음의 의미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지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역사 안에 흔히 일어나는 무죄한 자의 억울한 죽음만이 아닙니다. 그분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셨고, 그것이 그분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고 당신은 죽임을 당하셨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리기 전에 “비통한 마음”이었다는 사실을 두 번이나 강조하면서 그분이 라자로를 사랑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오늘의 복음이 말하는 것은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살리고, 당신 스스로는 죽어 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라자로를 살렸다는 말은 다른 복음서들 안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들 안에도 있습니다.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어린 딸을 살린 이야기가 마르코, 마태오, 루가 복음서들 안에 있고,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어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린 이야기가 루가복음서에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그런 이야기들을 자료로 삼아 라자로를 살린 오늘의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마태오복음서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라고 질문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답하시기를 “소경들이 보고 절름발이들이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일으켜진다”(11,5)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이고, 초기 교회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요약하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이런 자료들을 가지고 오늘의 이야기를 구성하여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주인공의 이름이 ‘라자로’인 것도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루가복음서에 부자와 라자로의 예화(16,19-31)가 있습니다. 그 예화에서 가져온 이름입니다. 루가복음서에 따르면 부자와 라자로 두 사람은 죽어서, 부자는 지옥으로 가고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안으로 갔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청합니다. 라자로를 자기 아버지 집에 보내어 이 사실을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서 그들이 자기와 같은 운명을 당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서는 오늘의 복음 이야기에 라자로를 등장시켜 죽었던 라자로가 실제 살아서 돌아왔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삶의 길을 가르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실제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행하셨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 일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의 수난사를 시작하면서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야 할 때가 온 것을 아시고, 그동안 세상에서 사랑해 온 당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끝마쳤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다 이루어졌다”(19,30)는 것이었습니다. 끝까지 당신 사람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실천들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고 같은 실천을 하겠다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실천들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계십니다. 오늘의 복음에 마르타가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실천 안에 주님, 곧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계시면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요한복음서 공동체의 믿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듯이,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실천을 하여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살아 계시면, 우리도 죽음을 넘어서 하느님 안에 부활하여 살아 있다는 초기 교회의 믿음이 반영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으로 우리의 생명을 보장하려 합니다. 이 세상의 재물과 권력을 얻어서 우리의 생명과 삶의 질을 보장하려 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비롯된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보장해 주시는 생명을 찾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삶에서 그 생명의 이야기를 읽어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는 비통해 하시면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실천이 당신 목숨을 대가로 요구하는 일로 이어지더라도 사람을 살리는 예수님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분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어주고 쏟아서 이루시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에서 우리 생명과 삶의 질을 보고 배우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사랑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흐른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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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 03.25
528 45.2%
찬미예수님!
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이제 사순시기가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지난 사순시기의 복음의 말씀을 돌이켜 보면,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말씀으로는 단식과 기도와 자선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관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순시기 첫 주에는 세상이라는 험난한 광야에서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최고의 무기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임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순 둘째 주에는 다볼산에서의 예수님 변모를 통해서 주님의 신원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계시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타나심 즉 신현에 대한 ‘두렵고 떨리는 거룩한 체험’이 제자들과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지를 묵상하였습니다. 셋째 주에는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 주님이야말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이시고 주님이심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지난주 즉 사순 제4주 장미주일에는 실로암 못에서 태생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님의 치유기적 사화를 들었습니다. 태생소경에게 육안만이 열린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알아보는 영안의 열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 오늘 사순 제5주를 지내고 나면 곧 우리는 사순시기의 긴 터널을 통과하고 부활절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입니다.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고 장엄하게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확언합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엄청 깁니다. 등장인물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과 제자들, 특히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유다인들, 마르타와 그 여동생 마리아 그리고 오늘 복음의 주요 인물인 라자로가 나옵니다. 제 세례명이 라자로인데 바로 이 라자로입니다. ‘라자로’라는 이름은 히브리말 ‘엘르아잘(Eleazar)’의 축약으로 이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원적으로 볼 때 나자로가 아니라 라자로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절친 라자로입니다. 성경에 나오는‘부자와 라자로’의 우화에 나오는 라자로는 가공의 인물이지만, 오늘 복음에 나오는 라자로는 실재인물입니다. 제 본명은 바로 이 라자로입니다. 축일은 2월 23일이었는데 7월 29일로 바뀌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 세 남매를 모아서 한 번에 축일을 지내게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소생한 라자로는 나중에 프랑스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주교가 됩니다. 성 라자로는 프랑스에서는 꽤 유명한 성인입니다. 성 라자로의 이름을 딴 수도회도 있고 파리에 가면 지하철 역 이름으로 ‘성 라자로 역’도 있습니다. 그리고 인상파 화가 모네는 성라자로역 연작을 그려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라자로 삼남매를 매우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라자로 집안은 각별한 관계였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웃었다는 기록도 없지만 예수님이 울었다는 기록도 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유다인들 조차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합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속이 북받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미래를 위해 탄식하셨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기록은 복음서에서 여기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11, 5) 하신 것은 실질적이고 사실적인 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유다인들도 말합니다.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라자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친구이고 마리아와 마르타는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친구 여동생들입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마르타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오빠 친구입니다. 오빠 친구 중에 가장 멋진 친구입니다. 예수님과 라자로는 친구로서 서로 사랑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라자로 삼남매와 예수님은 아주 각별한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좀 쉬고 싶을 때 라자로의 집에 갔습니다. 라자로의 집은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베타니아에 있었는데 이곳은 예수님의 쉼터이며 아지트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끔 가서 잘 먹고 기분 좋게 마시며 푹 쉬는 곳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에 보면 ‘마르타와 마리아’의 유명한 일화도 있습니다.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을 보고, 언니 마리아가 왕짜증을 내는 스토리입니다. 언니 마르타는 부엌에서 열심히 밥도 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하는데, 동생 마리아는 딴 사람이 보기에는 놀면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밉상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주님으로부터 칭찬도 듣고 자신의 몫이 좋은 몫이라고 인정도 받습니다. 아무튼 마르타는 활동적이고 마리아는 내면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마리아와 마르타의 언행도 그 연장선에서 보면 이해하기가 수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죽은지 나흘이 지난 라자로를 다시 살리십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린 사건이 몇 번 나옵니까?

세 번 나옵니다. 첫째 오늘 복음에 나오는 라자로이고 이외에 또 무엇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죽었는데 다시 살린 사람에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루카 8,40-56)과 또 과부의 외아들(루카 7,11-17)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사건은 단연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라자로의 극적인 소생입니다. 죽어서 사흘이나 지나 악취가 풍기고 희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불러오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런데 라자로를 비롯해서 야이로의 딸과 과부의 외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은 엄격히 말하면 부활이 아닙니다. 요렇게 소생한 사람들은 결국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다 죽습니까? 죽지 않습니까? 언젠가 다 죽습니다. 마르타는 암묵적으로 부활에 관한 신앙은 갖고 있었지만 생사대권을 지닌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르타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는 부활에 대한 믿음은 있었습니다.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고 합니다.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부활이고, 소생(甦生)은 다시 살아나는 것은 맞지만 언젠가는 다시 육체적인 생명이 다 소진(消盡)되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라자로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나 과부의 외아들은 죽었다가 소생하지만 나중에 다 죽었습니다. 라자로도 프랑스에서 선교하고 죽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소생입니다. 다시 살아났지만 수명이 다하면 다시 죽습니다.

라자로의 소생은 부활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부활의 전조나 징표가 될 수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에 비해 부활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생과 부활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라자로 소생은 신학적 의미의 부활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다시 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상징합니다. 인생은 죽음으로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또 다른 삶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죽음도 예수님의 컨트롤 타워 아래 있다는 것을 계시합니다.

라자로의 소생은 예수님의 부활을 미리 알려줍니다. 물론 라자로의 소생은 예수님의 부활과는 달리 생물학적인 소생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선취하기에는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라자로를 소생시킴으로써 당신이야말로 인간의 생사대권을 쥐고 있는 생명의 주인이심을 증명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예수님이 아닌 어느 철학자나 어느 사상가도 죽음에 대한 절대적인 해답을 준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분의 가르침과 그분의 기적과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죽음에 대한 완전하고 긍정적인 답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길이요 진리임을 밝혀 주십니다. 많은 사람들도 이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였고 이 기적 후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마음을 굳힙니다.

다른 한편, 루가복음서에 부자와 라자로의 예화(16,19-31)가 있습니다. 그 예화에서 부자와 라자로 두 사람이 죽어서 부자는 지옥으로 가고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안으로 갔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청합니다. 라자로를 자기 아버지 집에 보내어 이 사실을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서 그들이 자기와 같은 운명을 당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서는 오늘의 이야기에 라자로를 등장시켰는데, 역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합니다.

오늘 사순 제5주 복음에서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이미 부활시기가 다가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일입니다. 라자로의 소생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미리 보여 주는 희망의 전조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 주제는 부활의 예고 혹은 선취입니다. 교회는 오늘 사순 제5주에 앞으로 다가올 부활을 준비하기 위해 라자로의 소생 기적을 복음 말씀으로 배치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예수님께서 여태까지 하신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 중의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오늘 전례 말씀에서 우리가 장례미사 때 드리는 감사송의 한 구절과 마르타의 신앙고백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평 섞인 말을 하는 마르타에게 이르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묻습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대답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마르타의 이 믿음은 바로 ‘지금 여기’의 우리 모두의 믿음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고 새로운 삶으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장례미사 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는 예수님을 말씀을 확인하며 부활신앙을 일상의 삶에서 살아갑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복음과 관련하여 한 가지 첨언(添言)하면, 오늘 복음 중에 아주 유명한 대목이 한 가지 있습니다. 라자로가 죽게 됐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요한 11,4).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라고 일컬어지는 덴마크의 그리스도교 사상가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는 이 성경 구절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 제목을 따왔다고 합니다.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가 성경을 읽다가 오늘 이 구절을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동안 인간의 실존에 관하여 많은 사색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사유해오던 것을 글로 쓰기 시작하면서 적당한 제목을 찾지 못했는데 바로 오늘 복음에서 그 제목을 발견합니다. “죽을 병”이라는 표현을 인용하여 자기가 쓰던 글의 제목을 「죽음에 이르는 병」(Sygdodommen til Doeden)이라고 붙였습니다. 키에르케고로는 실존의 불안한 현상의 원인을 먼저 우리가 짓는 ‘죄’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절망이 바로 우리에게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갈파하였습니다.

이러한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은 거의 잊어져 갔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부터 소환되기 시작합니다. 계몽주의 이후 최고의 가치는 과학을 발전시킨 인간의 이성이었습니다. 감성과 의지는 변방으로 밀려났습니다. 한동안 인간의 이성이 최고인줄 알았는데 이러한 사조가 가져온 결과는 재앙이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수 백만의 사람들이 죄없이 부조리하게 죽었고 인간은 절망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싸늘하고 음울한 현실 앞에서 실존주의(實存主義, 프랑스어: Existentialisme) 철학이 등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존재주의(Existentielisme)와는 다릅니다. 실존주의는 야스퍼스, 마르셀 등으로 대표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하이데거, 사르트르, 보부아르, 카뮈 등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키에르케고르로부터 ‘절망’이라는 음산한 키워드를 공동유산으로 받습니다. 이들은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라고 답하고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과 길에 따라 유신론과 무신론으로 나뉘어집니다. 이러한 실존주의 중 특별히 무신론적인 실존주의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우리나라에 들어옵니다. ‘사의 예찬’을 부르고 자살한 심사덕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신론적인 실존주의는 허무주의나 비관주의로 매몰되기 마련입니다. 이들 실존주의자들은 죽음에 이르는 병인 절망을 부조리에 접속하여 사유합니다. 부조리 앞에서 인간은 절망할 수밖에 없고 이 절망은 우리를 사회적육체적인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 된다는 것입니다. 부조리란 카뮈에 의하면 인간의 선한 의지를 꺾어 절망에 빠지게 하는 세상의 죄나 구조적인 악을 의미합니다. 인생을 열심히 잘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삶의 의지를 꺽어버리는 일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어떻게 할 수도 없는 환경에서 발생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죽고 싶은 마음 밖에는 생기지 않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요즘 이른바 젊은 삼포세대 혹은 오포 세대들은 소확행이라는 탈출구를 찾습니다. 더 자세히 설명하면 우리가 더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착한 생각을 꺾는 부조리와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기 이전에, 이미 죽음이라는 본질이 지금 여기 침투해 있는 현상입니다.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선취되어 있는 것이 절망이라는 것입니다. 부조리와 절망에 빠져 있는 허무주의자들은 이미 죽음을 선취하고 있으면 현재 죽음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브리엘 마르셀이나 칼 야스퍼스 같은 유신론적인 실존주의자는 일상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불러오는 힘을 발견합니다. 지금 여기의 일상이 아무리 뒤틀려 있고 부조리와 구조적인 모순과 절망이 가득하더라도, 이 세상에는 그보다 더 크고 많은 희망과 기쁨이 선물로 주어져 있고 작고 세세한 일상 안에서 감사할 일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꼬이고 꼬이는 일상도 죽음이 침투해 있는 삶이 아니라 생명과 부활의 힘이 침투되어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죽음을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와 마리아는 라자로의 무덤에서 죽음과 죽음의 악취를 보고 맡지만,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고 말씀하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그러자 죽었던 라자로가 무덤에서 탈주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라자로의 소생과 마지막 날의 부활을 믿는 우리 신앙인은 죽음에서 생명을 보고 비일상에서 일상을 봅니다. 지금 여기 와 있는 생명의 힘과 부활의 힘을 믿기에 우리는 부조리와 절망을 이겨나가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절망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으로 보지 않고 생명에로의 초대로 받아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환난의 부조리가 별 것 아닌 것이라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가공할 만한 죽음의 힘을 갖고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라도 가공할 코로나 사태 앞에서 공포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즐거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상에서의 죽음과 이별이 너무 리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이보다 더 리얼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바로 우리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이미 지금 여기에 와 있는 생명의 힘과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의 생명이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꽃같은 젊은이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끝이 끝이 아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희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아직 사순시기이지만 이미 와 있는 부활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우리 신앙인은 부조리와 죽음과 비틀어진 일상 앞에서도 그 현상의 밑바닥에 있는 본질은 구원이요 생명임을 굳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생명의 신앙이며 부활의 신앙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다 소생하지는 못하더라도 마지막 날에 우리 모두 부활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우리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 힘에 겨워 지쳐있는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안고 계시며 우리를 업고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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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
2023년 3월 26일
  |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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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에제 37,12ㄷ-14)는
하느님께서 에제키엘에게 보여주신 환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돌같이 딱딱하고 차가운 마음이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처참하게 시작된 바빌론 유배 생활은 마치 죽어서 계곡에 흩어져 있는 뼈들과 같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새 영의 숨을 불어넣으셔야만 이스라엘은 죽어서 흩어졌던 뼈들이 힘줄로 다시 붙고, 살이 오를 것이며, 그들이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서는 날이 올 것입니다(에제 37,1-10). 하느님의 영(말씀)에 의해 바빌론에 유배된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처절한 유배의 무덤을 열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영을 불어넣으신 다음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시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느님이야말로 자기들의 주님이심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제껏, 아니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복음(요한 11,3-7.17.20-27.33ㄴ-45)은
죽은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는 문제가 많았던 삼 남매였습니다. 마리아는 돌로 맞아 죽을 위험에서 예수님에 의해 구출되었고(8,1-10),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사람이었습니다(12,1-8). 마르타는 말씀의 식탁에서 봉사하시는 예수님을 몰라보았기에 “더 좋은 몫”을 놓쳤던 사람이었습니다(루카 10,38-42). 라자로는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했던 사람인 듯합니다. 마리아와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자기 집 근처에 오셨다는 것을 알고 즉시 사람을 보내어 주님께 자기 오빠 라자로의 치유를 호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느님과 그분 아드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와 멀지 않은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셨고, 심지어 돌을 던져서 당신을 죽이려는 이들이 많은 무덤 같은 유다 땅(죽음의 장소)으로 다시 가자고 제자들에게 제안하십니다(7,1-9). 그러나 제자들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반대합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집에 오셨을 때는 라자로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마리아는 집에 그냥 있었고, 맞으러 나온 마르타는 왜 이렇게 늦으셨느냐고 퇴박하듯이 말합니다. 죽은 라자로에 대한 예수님과 마르타의 대화는 마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처럼 계속 엇갈립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믿으면서도 오빠의 죽음을 예수님의 탓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마르타는 늦은 시간이었을지라도 예수님께는 정확한, 그리고 적절한 시간이었습니다. 마르타의 얄팍한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소생을 말씀하시자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을 안다면서 예수님께서 지니신 하느님의 힘(라자로의 소생)을 부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하시자, 마르타는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형식적이고 율법주의적이라서 진실한 고백은 아닐지라도, 마르타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합니다.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볼 때 이 고백이 여인(법정 증거력이 없다)에게서 발설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충격이었으며, 그래서 진실임을 복음사가는 강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했기에 죽은 라자로(유다인)에 대한 자비와 연민으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고, 눈물까지 흘리셨습니다. 무덤 입구의 돌을 치우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마르타는 라자로가 묻힌 동굴 무덤에서 악취가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라고 다그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하신 예수님의 기도는 간절한 청원(12,27)이나 원망(1열왕 17,20-24)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게 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5,28)라고 하셨던 것처럼, 그리고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에제 37,14ㄴ)라고 하셨듯이, 큰 소리로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하십니다.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습니다.”

라자로의 소생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기 위해”(이사 42,7) 오셨고,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하기 위해”(이사 49,9)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확인해주십니다. 부활하신(20,7) 예수님 모습과는 달리 죽었던 라자로의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여있었고,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긴 채 나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를 풀어주어 걸어가게 하라.”(예수님의 부활과 다르다) 하시면서 벳자타 못 가에 있던 환자(5,1-13)와 태생 소경의 치유(9,1-41) 때와 같이 당신의 뒤를 따르고 믿게 하십니다.

라자로의 소생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던 이들(유다인)에게 말씀을 듣게 해주시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드러내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죽음과 생명을 결정해주는 영이며,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께 대한 믿음(하느님의 아드님)을 고백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그리고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입증하기 위해 라자로를 소생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고 했던 마르타는 정작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서도 당신의 무덤을 덮었던 돌을 스스로 치우실 예수님의 힘을 믿지 않습니다.

제2독서(로마 8,8-11)는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세례를 받은 이들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고”(8,2),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주신 은총으로 말미암아 율법이라는 “옛 방식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새 방식으로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기”(7,6) 때문입니다. 그런데 육 안에 머물러 있다면 하느님의 법에 복종할 수 없으므로(8,7)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성령을 따라서”(8,4), “성령 안에”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2코린 5,17)이기 때문에 그의 관심은 오직 생명과 평화입니다(8,6). 이렇게 세례를 받은 이들은 하느님의 영을 따라 살기 때문에 죄에서 해방되었고(8,4),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7,22)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얻게 된 의로움 때문에,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어 주시므로 우리의 죽을 몸도 살려주실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하느님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외면할 때 라자로처럼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고, 유배된 이스라엘 백성처럼 뼈만 남아 악의 계곡에 흩어질 것입니다(에제 37,1-2).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 때만 온전히 그리스도인이 되고,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생각으로는 하느님을 잘 섬긴다면서 몸으로는 실천하지 않는다면, 죽은 믿음이기에(야고 2,26) 라자로와 똑같은 병을 앓고 있는 것이며, 무덤 속에 있는 라자로처럼 썩은 냄새가 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라자로는 그 사랑(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병을 알았습니다. 바빌론에 유배(무덤)갔던 유다인처럼, 돌같이 딱딱하고 차가운 마음을 지녔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병이었습니다. 라자로는 자매들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예수님과 가깝게 지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형식적으로만 들었지,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할 수 없고, 그분 안에 있는 구원의 풍요로움을 맛볼 수 없을 것이며, 라자로처럼 무덤을 열고 나오는 부활의 삶을 체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순간 우리에게도 “너를 결박하고 있는 무덤에서 나오너라!” 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15) 하십니다. 우리는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당신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시편 130,5: 화답송)라고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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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방효익 바오로 신부
2023년 3월 26일
  |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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