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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행복’이란 단어는 늘 우리를 설레게
조회수 | 2,404
작성일 | 05.01.27
시각 장애인 학교의 선생님 한 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시각 장애인이신 그 선생님은 보이지 않는 슬픔보다 가까운 가족의 몰이해가 자신을 더 슬프게 한다고 합니다. 방 안에서는 활동이 전혀 어렵지 않은데, 수십 년을 같이 살아온 어머니조차도 이 사실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아 속상할 때가 많다고 합니다. 물건이라도 혼자 옮기려 하면 “얘야, 그건 네가 못한다. 하지 말라니까, 웬 고집이 그렇게 세냐?” 하면서 핀잔을 주신답니다. 가장 가까운 어머니에게서도 이해받지 못하는 현실이 그분을 가장 힘들고 어렵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래도 속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장애인 친구라고 합니다. 친구랑 밤늦도록 전화로 서로의 처지를 하소연하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라고 합니다. 그 선생님은 아무리 서운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합니다. 왜냐고 물었더니 그분은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 다음에 죽으면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 가고 싶어요. 그래서 하늘나라에서는 정상의 눈으로 태어나 아름다운 것을 보고 싶어요. 만약에 지은 죄가 많아 하늘나라에 가지 못하면 내 인생이 너무 억울하잖아요.”'

‘행복’이란 단어는 늘 우리를 설레게 합니다. 모든 인간은 행복을 원하지만 정작 어떤 것이 진정한 행복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잠시 행복하다고 느꼈다가도 이내 사라져 버리는 것을 체험합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참된 행복을 가르쳐 주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5,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그 어느 것에도 희망을 둘 수 없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희망을 둘 수밖에 없는 마음이 가난한 마음이 아닐까요? 이렇게도 안 되고 저렇게 애를 써도 안 되는 그런 자포자기의 마음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하느님께 어린이처럼 매달리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많은 것을 가지고 누려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고 바람처럼 속절없이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 실패하고 패배를 맛본 사람이 오히려 인생에서 자신의 한계를 알고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진 소중한 것을 보는 눈을 갖게 됩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참된 행복은 인간편에서 찾고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행복입니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버림으로써 오히려 많은 것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참된 행복은 진정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헬렌 켈러 여사의 말처럼 “지금 내가 보고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지금 내가 듣고 있어도 듣지 못하는 것처럼” 산다면 우리의 삶은 더 행복하고 여유롭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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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영엽 마티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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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사람

우리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바로 행복일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한결같이 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행복을 좇아서 살아간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이 행복하게 된다면 무엇이든지 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인간의 행복에로의 욕망을 채워 주는 것은 참으로 다양하다. 물질적 재산 혹은 육체적 쾌락, 또는 권력, 명예, 화려한 직업 등… 우리 각자는 이러한 것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자녀들 교육도 남부럽지 않게 시키고 내 집을 장만하고 거기에 짭짤한 수입으로 화려한 가구와 골동품도 골고루 들여놓으며 고급 승용차를 타고 편안하게 사는 꿈을 꾼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있어야 존경받고 어깨를 피며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들이 모두 채워졌다고 해서 우리가 과연 행복할까라는 것은 의문이다.

우리 인간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행복이라면, 과연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 또한 행복에 이르는 조건은 무엇일까? 과연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가난함에도 연연해하지 않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해서 오늘 성경 말씀은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다.

제1독서에서 스바니야 예언자는 행복의 조건을 겸손하고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주님을 찾아라,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아! 의로움을 찾아라. 겸손을 찾아라”(스바 2,3). 세상 부귀영화에 집착하지 않고 하느님의 법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가난한 삶, 그리고 하느님 앞에 겸손한 생활자세가 바로 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말한다.

제2독서(1코린 1,26-31)는 하느님의 부르심, 성소의 소중함을 일깨우면서 우리 가운데 그 어떤 세속적인 기준도 결코 하느님 보시기에 자랑거리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하느님의 선택 기준은 보잘것없고 멸시받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세울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겸손이야말로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행복에 이르는 또다른 조건임을 말한다.

오늘 복음(마태 5,1-12遁)에서 예수님께서는 진정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말씀하신다. 복음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로 시작함으로써 영적인 가난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가난한 정신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지적인 능력, 사고, 계획, 우리의 성성(聖性)까지도 포함하여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그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이란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이다.

결국 오늘 성경 말씀 모두는 진정한 행복이란 철저히 하느님께 기초한 겸손한 믿음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행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어떤 처지에서든 감사하며 자신의 능력, 재물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때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듯이 진정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바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항상 감사하는 겸손한 믿음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고준석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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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간혹 "저 집은 잘 사는 집이에요"라는 말을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서 '잘 산다'는 뜻은 부자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지요. 그런데 이 말은 부자만 되면 잘 살고 행복해진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자가 된다고 자동으로 행복해지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대다수 국민들이 부러워하고 꿈꾸는 인기 연예인이나 수백만 달러의 연봉을 받는 운동선수, 큰 권력에 오른 정치인들 역시 인기나 돈, 권력 그 자체가 행복을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모두 가진 것 같은 이들이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에 빠져 스캔들을 일으키고 불행하게 일생을 마감하는 경우를 자주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많이 가지고,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고 살면 행복할 것이라는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참된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데 쉽게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하고, 모욕받고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할까요? 우리는 인생을 호의호식하며 살고 싶고, 남들에게 칭찬 받으며 살고 싶은데 정반대의 말씀을 하고 계시니 어찌 살아야 할지 난감해집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무소유의 삶이 행복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이지요. 가진 것이 많아 그것만을 의지하고 산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루카 12,16-21)에서 재산만을 의지하고 끝없는 욕심을 부리며 사는 삶이 얼마나 불행한 삶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산다면 가진 것이 적어도 하느님 때문에 어려운 처지에 빠져도 행복한 삶이라는 강조의 말씀이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다"(탈무드)는 말처럼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무엇을 소유했느냐,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얼마나 나누며, 얼마나 감사하고 사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삶을 통해 행복해지지 못하는 이유는 이기적인 욕심과 타인과의 상대적인 비교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날 영국의 콩글톤 경은 부엌에서 일하는 하녀들의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오! 나에게 5파운드만 있다면 정말 행복할 텐데…."
 
무심히 지나치다 들은 말이지만 그는 하녀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그는 정말 행복해 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부엌으로 찾아가 그녀가 정말 행복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한 뒤, 5파운드를 건네주었습니다. 하녀는 감격하여 그의 친절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콩글톤 경은 부엌을 나와 작은 돈으로도 한 사람을 행복하게 한 자신의 선행을 기뻐하며 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 그 때 안에서 하녀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난 참 바보야. 왜 10파운드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등장합니다. 살리에리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로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지만 모차르트가 등장하면서 열등의식으로 불행의 늪으로 빠져듭니다. 그를 화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이 밤잠을 설쳐가며 온 힘을 기울여 만든 작품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못하지만 놀 것 다 놀고 취미삼아 작곡한 모차르트의 곡은 불후의 명작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가진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절규합니다. "왜 저에게는 천재를 알아 볼 수 있는 능력만 주시고, 모차르트와 같이 천재적인 작곡 능력은 주시지 않았습니까?" 결국 비교의식과 열등감이 그의 인생을 파멸로 치닫게 합니다.
 
불행은 어느 날 하늘에서 날벼락 떨어지듯이 닥쳐오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욕심과 비교가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나의 삶을 이기적 욕심이 지배하는 대로 맡기고 산다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시고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살 때만이 부족하고 불편해도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소유나 위치를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채워지지 않는 갈증만 느낄 뿐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 주님만이 나의 행복임을 깨닫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기양 신부
  |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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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사람

우리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바로 행복일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한결같이 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행복을 좇아서 살아간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이 행복하게 된다면 무엇이든지 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인간의 행복에로의 욕망을 채워 주는 것은 참으로 다양하다. 물질적 재산 혹은 육체적 쾌락, 또는 권력, 명예, 화려한 직업 등… 우리 각자는 이러한 것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자녀들 교육도 남부럽지 않게 시키고 내 집을 장만하고 거기에 짭짤한 수입으로 화려한 가구와 골동품도 골고루 들여놓으며 고급 승용차를 타고 편안하게 사는 꿈을 꾼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있어야 존경받고 어깨를 피며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들이 모두 채워졌다고 해서 우리가 과연 행복할까라는 것은 의문이다.

우리 인간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행복이라면, 과연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 또한 행복에 이르는 조건은 무엇일까? 과연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가난함에도 연연해하지 않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해서 오늘 성경 말씀은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다.

제1독서에서 스바니야 예언자는 행복의 조건을 겸손하고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주님을 찾아라,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아! 의로움을 찾아라. 겸손을 찾아라”(스바 2,3). 세상 부귀영화에 집착하지 않고 하느님의 법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가난한 삶, 그리고 하느님 앞에 겸손한 생활자세가 바로 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말한다.

제2독서(1코린 1,26-31)는 하느님의 부르심, 성소의 소중함을 일깨우면서 우리 가운데 그 어떤 세속적인 기준도 결코 하느님 보시기에 자랑거리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하느님의 선택 기준은 보잘것없고 멸시받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세울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겸손이야말로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행복에 이르는 또다른 조건임을 말한다.

오늘 복음(마태 5,1-12遁)에서 예수님께서는 진정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말씀하신다. 복음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로 시작함으로써 영적인 가난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가난한 정신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지적인 능력, 사고, 계획, 우리의 성성(聖性)까지도 포함하여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그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이란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이다.
결국 오늘 성경 말씀 모두는 진정한 행복이란 철저히 하느님께 기초한 겸손한 믿음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행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어떤 처지에서든 감사하며 자신의 능력, 재물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때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듯이 진정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바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항상 감사하는 겸손한 믿음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고준석 신부
  |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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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모두 행복하세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는지 그 길을 보여주십니다.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바람이며 하느님께서도 원하시는 바입니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예외 없이 행복한 삶을 살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이 당신을 알아 뵙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저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과연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요? 지금 나는 행복한가요? 행복이란 어떤 욕구가 충족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욕구가 있을까요? 사람에게는 저마다 다양한 여러 가지 욕구, 즉 식욕, 성욕, 미에 대한 욕구, 재물에 대한 욕구, 권력에 대한 욕구 등등의 다양한 욕구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다양한 욕구들이 충족될 때 우리는 과연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있을까요? 어떤 욕구가 과연 우리 존재의 심층에서부터 올라오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최상의 욕구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받고 싶은 욕구, 사랑하고 싶은 욕구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행복해 질 수 없음을 많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지워 버릴 수 없는 갈망을 박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늘 조건이 붙은 사랑을 받아오면서 많은 상처를 안고 있고 그 상처는 우리 영혼에 깊은 어둠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어둠은 넓은 의미에서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죄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결국 우리 영혼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으며 이 죄와 죽음은 나에게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향해 전염이 됩니다. 내가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해 그 상처에 머물러 있으면 똑같은 방식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조건을 걸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살지 못하게 만드는, 그래서 늘 어떤 꾸며진 모습을 살아가게 만드는 크나큰 죄악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며, 하느님과 거래를 하고 있는 우리의 잘못된 신앙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데 있어서 아무런 조건이 없으십니다. 내가 무엇을 그분께 잘 해 드렸기 때문에 나를 사랑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 이유만으로 충분히 나를 사랑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거래를 하지 않으십니다. 아니 못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거래하는 모습, 조건있는 사랑을 훨씬 뛰어넘으십니다. 우리가 그분께 무엇을 잘 해 드려서 그분이 당신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자비는 아무런 조건 없이 그냥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체험하기만 한다면 그동안 우리가 조건 있는 사랑을 받아오면서 생긴 마음의 어둠과 영혼의 상처는 온전하게 치유될 것이고 그 사랑으로 타인을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안성철 신부
  |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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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참 행복

얼마 전 신자들과 함께 행복 지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난 2015년 미국의 한 기관에서 행복의 날을 맞이하여 세계 143개국의 행복지수를 조사하였는데, 안타깝게도 한국은 118위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과테말라는 그 조사에서 무려 공동 2위를 하였습니다. GDP 기준 세계 118위인 과테말라의 행복지수가 2위라는 발표는 우리 가슴에, 그리고 현재 과테말라에 살고 있는 우리 신자들의 마음에도경종을 울려줍니다.

사실 세계의 많은 이들이 행복에 대한 기준을 물질적인 것에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급변하는 현시대에서 어쩔 수없이 이러한 흐름에 끌려가며, 행복을 잃어가는 모습이 너무 가슴 아프기도 합니다. 가끔 과테말라를 방문한 한국 청년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대부분 한국에서 느끼지 못했던 행복을 과테말라에서 맛보았다고 고백합니다. 분명 행복은 물질적인 것들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희 마을만 보더라도 한국과 비교해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과연 과테말라 신자들이 느끼는 이 행복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행복은 어디에서 다시 찾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올라가시어 제자들에게 참 행복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분명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현실적으로 가슴에 와 닿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내 마음이 가난하게 느껴지고, 슬픔이 가득할 때 결코 저 자신이 행복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의롭게, 온유하게, 깨끗하게 살아가려면 가끔 손해도 봐야 하고,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기에 행복을 느끼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제가 느낀 과테말라에서의 행복, 그리고 우리 신자들이누리고 있는 삶을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아직 세상의 물질적인 가치가 깊숙이 들어오지 않아서인지 서로 나누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익숙한 마을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주소지도 배정받지 못하고, 인터넷 선도 들어오지 않은 마을이지만, 더 가난한 이들, 더 아픈 이들을 위해 조그마한 식료품이라도 함께 나누려 합니다. 그냥 예수님이 주신 순수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아가는 신자들의 모습을 통해 저도 참 행복의 가치를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사람으로서,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가치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참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가장 잘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간다면, 분명 세상이 주지 못하는 행복, 하느님 나라에서 맛볼 수 있는 참 행복을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 서울대교구 김현진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 2017년 1월 29일
  |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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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어려운 지역에 본당 신부님이 부임하셔서, 성당을 짓기 위해 모금도 다니시고, 교구에 빚도 얻어서 간신히 성전을 짓고 떠나셨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그 신부님을 아주 훌륭한 신부님으로 칭송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신부님이 오셔서, 전임 신부님이 갖은 고생을 다 하시면서 이렇게 훌륭한 성당을 짓느라고 진 빚을 갚아야 하니 돈을 내시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신자들이 나쁜 신부님이 오셨다고 불평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세상에서의 한계와 장애를 벗어나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사목을 펼치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 물질로 이루어진 현세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요한 17,14)를 실현하는 가운데 어려움을 겪고 있음은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나 봅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살펴보다 보면, 줄 것 안 주고, 낼 것 안 내고, 남의 것 빼앗아 가면서, 남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도록 하며 자신의 부를 축적하여 사는 생활양식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 사는 것을 내심 부러워하며 기회만 되면 나도 그렇게 살아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겠다고 기회만 보고 있는 생활양식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줄 것 다 주고, 낼 것 다 내고, 남에게 바보 멍청이 취급을 받아가면서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민초들의 생활양식이 있는가 하면, 안 줘도 되는 것을 주고, 안 내도 되는 것마저 찾아서 내며, 자기 이익을 포기하고, 자기 것을 나누며,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 사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생활양식이 있습니다.

근현대시기에 우리나라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하청업자에게 납품을 받아놓고 줄 것도 안 주고, 그나마 자기가 줄 것을 담보삼아 상대가 가지고 있는 것마저 빼앗아 챙기고 나서 고의부도를 내고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가며 성장 가도를 달려간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회에서 약삭빠르고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이런 사람들을 만나서 그야말로 당하고 돌아오는 남편을 보고 집안에서 부인들은 자기 남편이 무능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왜 남들은 다 그럭저럭 먹고사는데, 왜 우리 남편은 하는 일마다 안 되느냐고 하면서 말입니다. 과연 고의부도를 내고 자기만 살찌우는 사람들이 잘하는 것인지, 아니면 거기에 당하는 사람이 잘못한 것인지. 아니면 똘똘하지 못해서 자기 몫을 미리 챙기지 못하고 자기가 받아낼 것을 악착같이 쫓아가서 얻어내지 못해서 그냥 손해보고 마는 사람이 나쁜 사람인지.

오늘 저는 세상에서 돈 벌고 살아남기 위해 남의 것을 꿀꺽꿀꺽 먹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거나, 아니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악착같이 자기 것을 찾아내고 기어이 받아내고야 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든가, 아니면 지금은 손해를 보지만 언젠가 있을지 모르는 이익과 보상을 기대하면서 참고 기다리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는 것인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제가 나누고 싶은 내용은 바로 슬퍼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의 행복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라고 선언하십니다.

세상의 똘똘이들에게 당하고, 냉정히 잘라 말하지 못하고, 악착같이 받아내지 못해서 손해보고 결국 슬퍼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식을 보자니 남편이 걸리고. 남편을 생각하자니 자식이 걸리고, 시댁을 생각하자니 친정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고, 친정을 생각하자니 남편의 얼굴이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선한 마음에 죄책감과 부담감만 가득 안고 그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고 슬퍼하는 사람들. 부모와 자식의 죽음을 잊지 못해 한 없이 아파하는 사람들, 이별한 배우자와 친지들의 기억이 잊혀지지 않아 그리워하며, 아직도 자기 삶의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떠도는 사람들. 심지어는 이웃의 불행과 아픔 앞에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아파해주고, 이웃의 불행과 아픔을 적절히 도와주지 못해서 주님의 십자가 아래 꿇어 자신의 부족함과 이기적인 모습을 뉘우치며 아파하는 사람들, 세상의 행복과 구원을 막고 지연시키는 불의와 사리사욕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슬퍼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잘살고 있는 것 같은 사람들,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하기는커녕 그 사람들에게 아픔을 선사하고 상대의 아픔을 전제로 자신의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지 못하고 오로지 사리사욕에 빠져 자기만 챙기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현세에서 재물을 모으기는 하지만, 그 재물을 지키기 위해 모든 사람을 경계하고 멀리하며 불안 속에 살아가며, 자기보다 더 잘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현재 자기가 가진 재산이 누구보다도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늘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불만과 불평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주님의 위로를 위로로 감사히 받아들이기는커녕, 어쩌면 이웃의 손가락질만을 받을지 모릅니다.

그런 반면에 자기의 것을 빼앗기고 자기 것을 받아내지 못해서 억울해하다가 결국 분노와 미움에 갇혀버린 사람은 참으로 안쓰럽습니다. 차라리 잊어버리고 포기해 버린 사람은 편안하기라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중의 고통을 겪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비록 안 주기 때문에 못 받고, 빼앗아 가기 때문에 빼앗겼지만, 그것을 원망하지 않고 자기를 괴롭힌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오히려 염려해주는 사람은 주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비단 세상 안에서만이 아니라, 술 먹고 괴롭히는 남편이나 바람난 아내, 부모의 속을 갈가리 찢어 놓는 자식들을 바라보면서 그 괴로움을 호소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끌어안은 사람은 위로를 받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대신 아버지께 간구해주신 것같이, 슬픔을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성화시키는 사람은 주님의 진정한 위로와 구원을 얻습니다.

현세에서는 주님께서 나의 결백함과 나의 용서를 알고 계시니 위로를 받을 것이고, 나의 슬픔과 고통을 주님께 봉헌함으로써 세상을 구하시는 주님의 남은 고통에 참여하여 짐을 덜어주고 있으니 주님의 사랑을 받을 것이며, 마침내는 자기가 위로하고 용서해 준 사람들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구원의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죽여서 죽었지만 죽지 않고 부활하신 것처럼, 비록 현세에서 당하면서도 용서하고, 복수하라고 자신의 마음을 충동하는 악마에게 빼앗기지 않고, 끝까지 선하게 주님께서 주신 사랑을 간직한 사람은 한없이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그의 죄를 묻지 않고 부활시켜 주실 것입니다.

오늘 현세에서 어려움을 겪고 슬픔에 잠겨 있는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주 친히 위로해 주시고, 주님을 믿고 복음을 실현할 힘과 용기를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성령의 이끄심에 의탁하며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갑시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오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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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심흥보 신부
2023년 1월 29일
  | 01.28
523 97.6%
진정한 행복은 ‘욕심을 내려 놓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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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내 월급 빼고 모두 오른다.’는 말이 실감이 날정도로 물가는 치솟고 통장의 잔고는 점점 비어갑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선진국 대열에 들었다는 우리나라가 이렇게 휘청거릴 정도인데, 하물며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빈곤한 지역 사람들은 얼마나 더 큰 고통을 겪을까요? 유엔세계식량계획(WFP)이 발표한 ‘2022 세계 식량 위기보고서’를 보면 2021년에 53개 국가에서 총 1억 9,300만 명이 심각한 식량 위기 상태로 식량 지원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코로나와 기후 위기가 더해지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식량과 에너지 및 금융 위기가 한층 더 고조되는 상황에서 기아 문제는 사상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여 있습니다.

탄자니아에서 선교사로 있었을 때, 제가 있던 마을 사람들도 정말 가난했습니다. 좁은 흙집에서 대부분의 부모들은 대여섯명의 아이들과 함께 지냈는데, 먹을 것이 부족해서 매일 끼니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씻고 마실 물도 모자라서 오염된 물을 길어와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어려운 삶 안에서도 늘 감사를 잊지 않고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것을 나누며 살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작은 것에 행복해하며 잘 웃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잘 웃지 못했습니다. 분명 그들 안에서 물질적으로 가장 큰 부자였음에도 더 편하고 좋은 것들을 찾으며 욕심을 부리고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돈이나 물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내려놓는 것’에서 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은총은 ‘감사’와 ‘나눔’에서 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정 행복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의로움을 찾으며 자비를 베풀고 평화를 위해 힘쓰는 이들’, 그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님 성탄 대축일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구유 안에서 성탄의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고 하시며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게 태어나셨고, 가난하게 평생을 살아가셨으며, 가난하게 돌아가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가난을 사랑해야 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애덕 실천으로 초대받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
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온 삶을 통하여 가난한 삶을 사셨지만 그 어떤 것에도 욕심을 부리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신가요? 만약 행복하지 않다면 지금 어떤 것에 욕심을 부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욕심을 내려 놓고 가진 것에 감사하며 자신의 것을 나눌 때 우리는 진정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고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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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창원 다니엘 신부
2023년 1월 29일 주보
  | 01.28
523 97.6%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엠이 부부모임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그에 대한 나의 느낌은?’이라는 주제로 나눔을 하였습니다. 함께 했을 때의 기억들을 많이 나누었습니다. 여행을 갔을 때, 식구들과 한 침대에서 누워있을 때, 손자가 태어났을 때와 같이 작고 소소한 것들에서 행복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예전에 ‘행복과 행운’의 차이를 읽었습니다. 4잎 클로버는 행운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행운은 쉽게 찾지 못하고, 얻을 수 없습니다. 마치 복권을 사지만 당첨될 확률이 적은 것과 같습니다. 3잎 클로버는 행복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돌아보면 행복은 쉽게 찾을 수 있고, 얻을 수 있습니다. 마치 숨을 쉴 수 있는 공기와 같고, 목마르면 마실 수 있는 물과 같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면 ‘행운’은 많지 않았습니다. 외모와 체격이 크게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선천적으로 운동신경이 발달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술적인 감각도 별로 없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거의 문맹과 같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행복’은 늘 가까이 있었습니다. 4년 전에 이곳 뉴욕으로 왔는데 다정한 친구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는 동료사제들이 있습니다. 새해 첫날에는 은경축을 맞이하는 신부님과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갈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무덤 성당과 부활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축복도 있었습니다. 매일 새벽에 조배하러 가니 수사님이 배려해 주었습니다. 이 또한 행복입니다. 매주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에 가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기쁨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3달만 도와주려고 했는데 어느덧 3년이 되었습니다. 도움을 주려고 했는데, 지금은 제가 더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팬데믹의 긴 터널을 교우들과 함께 나올 수 있었습니다.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자유롭듯이, 사제는 신자들과 함께 어울려 미사를 봉헌할 때가 행복합니다. 언제나 자리를 지켜주는 직원이 있어서 든든합니다. 매주 새로운 지면을 만드는 것은 때로 전쟁과 같습니다. 직원들이 함께 하기에 부족한 제가 잘 지낼 수 있습니다.

행복은 무엇인가를 채워서는 얻을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의 욕망은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채우면 채울수록 갈증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참된 행복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행복한 것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아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루가 복음 19장을 보면 예리코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서 세리 자캐오를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리 자캐오는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도 늘 허전하였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캐오를 무시하였고 돈만 아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캐오를 부르셨고, 자캐오의 집에서 하루 지내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자캐오는 자신의 가진 재물의 반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합니다. 또 자신이 부당하게 이득을 취한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아 주겠다고 합니다.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무도 세리 자캐오를 기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 때문에 변화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캐오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가난하고 소외되어 있고 불쌍한 이들을 보살펴 주고 도와주며 그들과 하나 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그들과 우리의 마음을 함께 나누는 것은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의무이며, 그와 같은 삶은 바로 하느님 나라에로 우리를 초대한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참된 행복을 얻는 것은 지위, 능력, 가문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무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자캐오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길을 가다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의 이정표를 보면 안심하고 갈 수 있듯이, 우리들의 이정표인 주님을 바라보며 행복의 길, 하느님을 만나는 길을 충실하게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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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2023년 1월 29일
  | 01.29
523 97.6%
사랑에서 변화의 힘이 생겨납니다.

살아있는 권위(마태오 복음 5장 1-12ㄴ절)

예전에 신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참 많이도 규율의 권위를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학생들로 하여금 자율적이지 못하게 기계적으로 생활하도록 복종을 강요하였습니다. 학생들에게 처벌을 두려워하도록 윽박지르지 말고 지혜를 사랑하도록 말해야 했습니다. 내 말을 따라야 한다고 회유하기보다 내가 신뢰받을 만한 사람인지 물어야 했습니다. 사람은 순명을 강요하는 이의 권위가 아니라 그가 살아가는 모습에 신뢰심을 갖습니다. 순명을 거부하는 것은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몸으로 가르치니 따르고, 말로 가르치니 반항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바로 허리 굽혀 몸으로 가르치는 겸손에서 우러나옵니다. 이제는 제도적 권한을 가진 것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는 시대가 왔음을 절감합니다. 자신이 몸으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그 권위를 잃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제도적인 권한에 의존하시지 않고,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셨습니다.

“진정한 순명은 마음으로 듣는 것, 삶을 변화시키는 말씀을 연모하여 수용하는 것이다”라고 베네딕토 성인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복종하여 받아들이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사랑하도록 안내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을 진정한 권위자로 받아들였던 것은, 규율이 주는 공포나 압박 때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살아있는 권위는 살아있는 사랑에서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온유하고 자비로우신 목자를 따르는 우리도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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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효석 요셉 신부
생활성서 2023년 1월 29일
  |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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