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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아낌없이 주는 나무
조회수 | 2,484
작성일 | 05.01.28
옛날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날마다 놀러와 줄기로 그네를 타고, 사과도 따먹고, 숨바꼭질도 하였습니다. 그러다 피곤해 지면 나무 그늘 아래서 잠을 자기도 하였습니다. 나무는 소년을 사랑했고 소년도 나무를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소년도 점점 나이가 들어 나무는 혼자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어느 날 소년이 찾아오자 나무는 소년을 반기며 함께 놀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었습니다. 나무는 돈 대신 사과를 내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나무의 몸에 붙었던 사과를 몽땅 따서 떠나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소년은 다시 나무를 찾아왔습니다. 나무는 반가움에 가지를 떨며 함께 그네를 타며 놀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집이었습니다. 나무는 집 대신 자신의 가지를 모두 내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나무에게서 가지를 몽땅 잘라 떠나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떠나간 소년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고 나무는 슬펐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소년은 다시 나무를 찾아왔습니다. 나무는 소년과 함께 놀고 싶었으나 소년은 나이가 많아 놀 수가 없었습니다. 소년이 필요로 한 것은 여행을 다닐 배였습니다. 나무는 소년에게 자신의 몸인 둥치를 주었고 소년은 배를 만들어 멀리 떠나버렸습니다. 나무는 소년을 도울 수가 있어 행복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소년은 다시 나무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나무는 소년과 함께 놀기를 바랬으나, 그는 서 있을 기력도 없었고, 사과를 먹을 이빨도 없었습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쉬는 것뿐이었습니다. 소년을 돕고 싶은 나무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밑둥을 내어주어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줍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방금 들으신 이야기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동화를 짧게 줄인 것입니다. 나무는 소년에게 놀이터가 되어 주었고, 사과도 주고, 자신의 팔다리와도 같은 가지를 주었고, 자신의 몸뚱아리까지 다 내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렇게 가난했지만 소년에게 도움이 되고자 했으므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마치 모든 것을 자식에게 내어 주고 행복할 수 있는 우리 부모님들의 마음과 비슷합니다. 자식만 잘된다면 나야 어찌되어도 상관없다는 부모님의 마음과 소년에게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준 나무는 같은 면이 참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부요하고..더 배부르고..더 웃고..더 칭찬 받는 것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미움받고, 쫓기고, 욕먹고, 누명을 쓴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해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행복의 기준이 ‘내’가 아니라 ‘너’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나보다 네가 부요해지고, 나보다 네가 더 배부르고, 나보다 네가 더 더 웃고, 네가 더 칭찬 받는 삶이 바로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나를 가득 채움으로 느끼는 행복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를 채워줄 때 느끼는 행복입니다. 내가 가진 몫으로 누군가를 채워줄 때 느끼는 행복입니다. 남을 채워 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의 것을 희생해야 됩니다. 그러한 희생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과 기쁨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행복은 돈을 더 많이 버는 것, 권력을 더 많이 가지는 것, 더 많은 정력을 과시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을 때에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삶의 목적을 나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하고 좋은 의미가 되어 주는 것으로 삼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부모님들이 자식에게 내어 줄수록 행복해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무가 소년을 위해 자신의 가진 것을 다 내어주고 행복했듯이, 우리도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내어 놓아야하겠습니다. 가족과 돈을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의 시간과 나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그분의 뜻에 남김없이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비록 가난하게 되어도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었지만 소년과 함께라면 행복할 수 있었던 나무처럼 우리가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하느님과 함께 하면 행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나무가 소년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주었듯이 우리 역시 하느님께 우리의 삶을 돌려드려야 하겠습니다.

주님, 오직 당신만으로 행복하게 하소서.

류한빈 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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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밧테리

"예수께서는 군중들을 보시고 산에 올라가시어 그들을 가르치셨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모두들 평안하십니까? 날씨가 많이 풀리긴 해도 감기 조심은 늘 해야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라고 한 전전주일 말씀 기억하시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며 사는 사람은 세상을 "기쁘게" 살아가게 된다고 한 말씀도 잊지 않으셨지요?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가면서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착한 마음'과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께 채널을 맞추어야 한다"는 전주일 말씀도 생각나시지요?

오늘은 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생각나던 것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울릉도나 아니면 외딴 섬에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오늘은 울릉도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가 울릉도에 갔을 때 "죽도"라고 부르는 작은 섬까지 가보았습니다. "죽도"는 덩그런 바위 섬에 다섯 가구가 덩그렇게 사는 아주 작은 섬, 전기도 없는 아주 작은 섬입디다. 그런데 거기서도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전기도 없는데 어떻게 텔레비전을 보느냐고 물어보니 충전하는 밧테리로 본답니다. 전기가 없는데 어떻게 밧테리를 충전하느냐고 물었더니 밧테리를 아껴쓰느라고 텔레비전을 하루에 두세 시간씩만 본답디다. 그래도 한 주간에 한번씩은 큰 섬에 가서 충전을 해와야 한답니다. 그렇습니다. 전기가 없으면 텔레비전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러 오신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은 복된 일이고 또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착한 마음'과 '열린 마음'으로 아무리 채널을 맞추어도 전기가 없으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데 꼭 필요한 전기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건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와 하느님을 연결해 주는 전기선이고 외딴 섬에 사는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밧테리 입니다. 텔레비전은 있어도 전기가 없으면 안 되는 것과 같이 아무리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해도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가 비록 "착한 마음"과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외딴 섬에 사는 사람들이 MBC 채널도 KBS 채널도 알지마는 밧테리가 떨어져서 재미있는 연속극을 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서는 밧테리 충천부터 해 와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행복한 세상을 살아가고 싶어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삽시다. "착한 마음"과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과 채널을 맞추어 가면서 살아가자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재미있는 연속극을 보기 위하여 늘 밧테리를 충전하듯이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늘 기도하며 살아가자는 말입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텔레비전의 전기와 같고 섬 사람들의 밧테리와도 같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자주 기도 하셨고 우리한테도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가며 살려고 "착한 마음"과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과 채널을 맞추어 가며 사는 사람은 더 행복한 사람입니다. 연속극을 보려고 늘 밧테리를 충전해 가며 사는 사람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늘 기도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더 더욱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한 한 주간이 되기 바랍니다.

김재문 이냐시오 신부
  |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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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느님을 믿는 것은 큰 은총입니다.

“자신에 대해 자랑해 보세요”라는 질문을 들으면 어떤 것이 떠오르시나요? 자신에 대해 자랑하는 것은 조금은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막상 찾아보려고 해도 “뭐가 있지?”라고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쉽게 답변이 나오지 않습니다. 굳이 찾아낸다면, 나의 장점들 혹은 내가 가진 좋은 것들을 찾아서 이야기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건강합니다”, “저는 착한 자녀들을 두고 있습니다”, “저는 책을 빨리 읽습니다” 등의 자랑입니다.

혹시 자신에 대해 자랑해 보라는 질문에, “나는 신앙을 가졌어”라고 답하신 분이 계신가요? 조금은 의아한 답일 수 있습니다. “신앙은 내가 선택한 것인데, 어떻게 신앙을 가진 것이 자랑이 될까?”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너무나도 유명한 행복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보기엔 행복해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행복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 상황의 행복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에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들이 하느님의 계심을 믿지 않는다면 그런 상황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하느님 때문에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행복을 줍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 게다가 오늘 독서를 볼 때,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믿는 것은 단순한 우리의 선택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소중합니다. 지혜로움도, 가문이 좋음도, 강함도 하느님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하느님은 세상의 지혜로운 자들과 강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합니다. 이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부족하더라도, 우리의 지혜가 되어 주시고, 힘이 되어 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하느님뿐입니다. 성녀 예수의 데레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인생이 그다지 대단치 않고 해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지세요? 그렇다고 낙담하지 마세요. 세상을 변화시킬만한 큰 업적을 이루어도 하느님께 가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이라도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성녀의 말처럼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믿고 있다는 것, 이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큰 은총입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큰 자랑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고 있나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을 나의 자랑으로 여기고 있나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찾고, 주님을 보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찾던 그 분을 알고 믿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믿고 있다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십시오. 그리고 이 사실만으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하느님을 알고 믿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여러분은 큰 은총을 받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행복 안에서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전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 안동교구 박석일 베드로 신부 : 2017년 1월 29일
  |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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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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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예수님께서 행복 선언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행복하게 되어라’는 축복의 말씀이자, ‘행복하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인으로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선언을 이해하지 못하면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선언한 참 행복과는 다른 엉뚱한 것을 찾아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은 무엇인가? 우리가 생각한 행복과는 어떻게 다른가?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은 많습니다. 영적 평온함, 지적 왕성함, 물질적 풍요로움, 사회적 명예, 강인한 체력과 건강, 원만한 인간관계 등, 이 모두를 다 가져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는 행복하다.’

‘마음이 가난한 이’, 다른 말로 하면 ‘영이 가난한 이’, ‘마음이 깨끗한 이’입니다. 우리 인간의 영적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내 의지를 비운 사람들입니다. 그 어떤 현세적 재물이나 쾌락으로도 채울 수 없는 텅 빈 상태입니다.

참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오로지 하느님만이 그들의 목표이며 그분의 나라만이 유일한 보상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현세의 재물을 축적하는 데 몰두하지 않습니다. 또한 가지고 있는 재물에도 집착하지 않고 속박되지도 않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은 오로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자유로움 안에 머물게 됩니다.

이 참된 행복을 이루는 ‘마음이 가난한 이’는 뒤에 나오는 참된 행복의 가르침을 담을 수 있습니다. 가난한 비운 마음에 슬픔과 온유와 자비와 평화와 의로움이라는 하느님의 가치들을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은 사실 가난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고, 그들의 가난한 마음에는 행복이 깃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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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김기현 모이세 신부
2023년 1월 29일 주보
  |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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