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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복된 삶이란
조회수 | 2,330
작성일 | 05.01.28
믿음의 목적은 구원받는데 있다. 내 문제가 해결되고 내가 잘 되기 위해서 믿는 것은 아니다. 물론 문제가 잘 해결되고 잘 되면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에 있어서 후차적인 것이요. 덤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일차적인 목적은 될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내 문제가 잘 해결되고 내 집안이 잘 되고 내 자식이 잘 되기 위해서 신앙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무언가 씁쓸하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무엇이 복된 것인가를 말씀하신다. 하지만 여기에도 믿음과 마찬가지로 그 뜻하는 바가 좀 다른 것 같다. 즉 예수께서 생각하신 것과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는 이야기하다. 차기 올림픽은 2008년도 베이징에서 열린다. 그런데 개막 날짜와 시간을 보면 복(福)에 대한 동양 특유의 사고방식을 볼 수 있다. 2008년 8월8일 8시에 열린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중국어의 8이란 숫자는 복과 발음이 비슷하다. 그래서 8이란 숫자를 매우 좋아한다. 복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려 8이란 숫자가 네 번이나 들어갔으니 올림픽을 통해 엄청난 복을 기원하고 있는 셈이다.

2005년 새해에도 국내에서는 복 받기 행사가 여러 군데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열리는 것을 보았다. 정월 첫 하루 떠오르는 해를 보기 위해 사람들은 산으로 바다로 엄청나게 몰려갔다. 매일 똑같은 해인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갔을까? 복 받기 위해서 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추운 겨울인데도 반바지만 입고 뛰기도 하고 바닷물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다들 복 받기 위해서이다. 또 어떤 이들은 바다 가까이에 세워진 절에 가서 부처님께도 절하고 바다에 사는 용왕님께도 절을 하였다. 왜 그랬을까? 이 모든 것이 다 복 많이 받기 위해서이다.

우리 동양에서는 복을 이야기 할 때 그것은 현세적인 복을 말한다, 즉 집안 잘 되고 자식 잘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마음의 밑바닥에는 현세적인 복을 강하게 지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개신교 신자들은 축복 받는 것을 좋아하고 천주교 신자들은 강복 받는 것을 좋아한다. 강복했는데 또 달라고 한다. 여러 번 받으면  좋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물어보면 좋은 일이 혹시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물고기는 아마 복어가 아닌가 싶다. 제일 좋아하는 국은 복국이며, 제일 좋아하는 찜은 복찜이고, 제일 좋아하는 튀김은 복 튀김이며, 제일 좋아하는 껍질은 복 껍질일 것이다. 하도 복 받는 것을 좋아하니 말이다. 물론 모든 것이 잘 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에서 그럴 것이다.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너무 티를 내는 것 같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말한 복은 영적이요 내면적인 것이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복되다. 마음속에 연민을 간직하고 옳은 일을 갈망하는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신다. 영적이 요. 내면적인 삶이 복된 삶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우선 일차적인 것이지 현세적인 복은 그 다음의 문제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과 동상이몽을 하는 것은 아닐까? 같은 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생각하는 바가 전혀 다른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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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민 미카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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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믿는 이유가 행복하기 위해서라면...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왜 믿느냐고 물어보면 그 사연이 사람마다 다르게 나옵니다. 하느님을 믿게 된 사정도 사람마다 다르고 하느님을 믿는 이유도 다 다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든지 집안에 나쁜 일이 없었으면 한다든지 자신이 하는 일이 모두 행복하기를 원하는 등 거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얻으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그렇게 원하는 행복의 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내용이 ‘... 한 사람은 행복하다’로 끝나기 때문에 행복선언, 산 위에서 가르치셨다고 해서 산상설교라고 불립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 나선 수많은 사람들을 산 아래에 두시고 높은 곳에 올라서 이런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일까요? 모두 한 번 알아봅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는 사람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옳다고 말하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반면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세상에 사람들이 비웃는 바보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답답하다, 융통성이 없다, 그저 착하다는 말로 비웃고 이용당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골치아프게 세상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다 말씀하시면서 그 각각의 사람이 누릴 복을 말씀해주십니다. 그 복은 모두 하느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내려 주시는 엄청난 은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사람에게 하느님이 주실 복들 때문에 행복하다는 말씀으로만 알아들으면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생각처럼 그 자체로는 고통스럽고 힘겨운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그 자체로 행복을 느끼는 길이며, 예수님이 말씀하신 후에 돌아오는 하느님의 선물은 그것이 하느님 나라에서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 그런지 생각해 봅시다. 물론 우선 우리가 이렇게 산다고 가정하고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답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은 어떤 의미로 생각하든 욕심이 없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 어떤 것도 자신을 위한 것으로 생각지 않고 사는 사람들, 그래서 있는 것 모두가 그저 좋게 보이고 가진 것조차 모두에게 필요한 만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예수님은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가지려 들지 않는 사람, 그들이 온통 하느님의 것인 그 나라에서 욕심없이 살 수 있기에 하느님은 오히려 그 좋은 나라를 그 사람들에게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답니다. 세상의 일에 진심으로 가슴아파 할 수 있는 사람, 그들의 눈물은 가슴 아프지만 그렇게 울어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우리는 우리의 아픔이 혼자 감당하는 엄청난 고통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슬퍼하는 사람도 그 슬픔 안에 들어 있는 세상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조차 그들을 위해 진심으로 아파하시고 함께 눈물 흘리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답니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서로가 가진 것을 더 가지기 위해 다툼을 벌입니다. 그것이 물질에서 나온 것이든 정신에서 나온 것이든 말입니다. 그런 다툼이 있는 곳에 참고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래서 세상을 다툼으로 대하지 않고 이해하고 기다려줌으로써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에게는 미워하는 사람도 없고, 남에게 미움을 사지도 않기에 그가 사는, 그리고 그를 아는 이들은 모두 그에게서 쉬게 됩니다. 그러니 그가 있는 땅이 곧 그로 인해 사랑을 얻게 됩니다. 하느님은 그런 그에게 결국 땅을 맡길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그리고 그 일로 인해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답니다. 옳은 일은 다수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불의할 때도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거나 홀로 외로워질 수 있지만 그 자신이 모든 이를 위해 사는 사람이기에 그는 홀로가 아니라 모든 이들을 진심으로 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삶에 행복함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은 만족할 것이라고 그들 자신들의 생활을 인정해주십니다. 그 삶이 바로 하늘나라의 삶입니다. 그래서 그들 역시 하늘나라의 주인이 됩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답니다. 자비는 사랑하는 마음과 슬퍼하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그런 그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서 헤아리고 함께 해 주실 것이라고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죄를 피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 어디에 서도 부끄러움이 없기에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조차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답니다.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이루시려 하신 당신이 즐겨하시던 인사말씀입니다. 모든 이가 서로를 사랑하는 삶을 살며 그 사랑을 주신 하느님을 모든 것을 다해 사는 세상이 바로 예수님이 만드시려 하신,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것을 사는 사람들, 곧 예수님이 세상을 사신 방식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은 이기적인 사람들의 눈에 가시처럼 미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이유도 없는 미움을 받고 박해를 당하고, 갖은 비난을 받게 되지만 사실 그 사람은 스스로 늘 행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힘겹지도 어렵지도 않습니다. 그 사랑이 모든 것을 견딜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생활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에게 하늘에 큰 상이 마련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들이 걱정하지 않아도 그렇게 살 수 있는 생활이 그래서 더 이상 어떤 고난과 시련 없이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곳이 곳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선언, 이 선언은 그렇게 사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진리입니다. 아니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이 행복이 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생활 속에 깃들여 있음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해보셨습니까? 그럼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유가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분을 믿는다고 말만 하지 마시고 바로 움직이십시오. 바로 이렇게 말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복음에 그렇게 분명 적혀 있으니 그 길을 따라삽시다. 그럼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곧 삶에 그 길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정호 신부
  |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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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섬기다 죽는 이들 행복하다

구원의 약속 실현

여덟 가지 행복론은 마태오 복음 5, 1~12에 나오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시작하는 설교의 첫 부분이며, 그리스도 신자들의 행복에 대한 강령이다. 루가의 기록에서 그 행복론은 그와는 대조적인 불행과 함께 제시되어 있으며, 어떤 생활 형태들의 뛰어난 가치들을 찬양하고 있다(루가 6, 20~26). 그러나 덕행이나 생활 형태들을 찬양하는데 있어서 이 두가지 설명은 어느 쪽도 삭감될 수 없다. 그것은 상호 보완적이며, 예수께서 전해 주신 의미를 살림으로써만 그 행복론에 진리가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약속을 장엄하게 실현하시기 위하여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시다. 하늘 나라는 이미 지상에 도래했으며,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궁핍과 비탄을 제거하시고, 인간에게 자비와 생명을 주신다. 어떤 행복론이 미래를 위하여 전해졌다면, 그 첫째(『복되다 가난한 이들』)는 다른 행복들을 포함하면서, 지금부터 실현되어가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행복론은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말씀하신 응답이기도 하다. 구약성서가 행복을 하느님 자신과 동일시하게 된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그분 안에 하늘 나라가 현존하고 있으므로 그 분 자신이 행복에 대한 인간의 열망을 충족시켜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신다.

행복의 중심인 그리스도

더 나아가서 그분은 스스로 이 행복을 사심으로써, 그리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마태 11, 29)가 되심으로써 그 행복을 구현하셨다. 기타의 복음적인 행복들도 역시 예수님이 행복의 중심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마리아는 믿었기 때문에(루가 1, 45) 구세주를 낳을 수 있었고, 『행복한 사람』(루가 1, 48: 11, 27)이라고 불리었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루가 11, 28), 보지 않고 믿는(요한 20, 29) 모든 이들에게 행복을 알려 준다. 바리사이파 사람들(마태 11, 21)은 화를 입을 것이다!

봉사. 헌신하는 자의 행복

그러나 성부께서 예수님 안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을 계시하신 시몬(마태 16, 17)은 복되다. 예수님을 본 눈은 복되며(마태 13, 16), 특히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충실하게 깨어 있고(마태 24, 46), 서로 봉사하는 데에 헌신한(요한 13, 17) 제자들은 행복하다. 구약성서는 부유와 성공과 지상적인 가치에, 가난과 실패 속에서 바라보는 정의의 가치를 연결시키려고 조심스럽게 애쓰고 있다.

굶주리고 박해받는 자

그러나 예수께서는 행복에 대한 지상적인 표현의 모호함을 거부하신다. 이제부터는 이 세상에서 행복한 자란 부유한 자, 포식하는 자, 아첨을 받는 자들이 아니라, 굶주린 자, 우는 자, 가난한 자, 박해를 당하는 자이다(1베드 3, 14; 4, 14). 이와 같은 가치의 전도는 모든 가치 자체인 예수님에 의해서 가능하였던 것이다. 두가지 중요한 행복이 다른 모든 행복을 포함한다. 하나는 가난으로서, 거기에는 정의, 겸손, 온유, 자비, 평화를 구하는 마음 등이 따른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당하는 박해이다.

신앙 증거위해 목숨 바쳐

그러나 이러한 가치들도 모든 가치에 의미를 부여하시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를 자기 신앙의 중심으로 놓은 자만이 묵시록에 나오는 행복론을 들을 수 있다. 묵시록의 말을 듣고 이를 잘 지키는 사람(묵시 1, 3; 22, 7) 깨어 경계하고 있는 사람(묵시 16, 15)은 복되다. 그들은 부활에 참여하기 위하여(묵시 20, 6),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묵시 19, 9)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앙의 증거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자는 생명을 잃지 않을 것이다. 『주님을 섬기다가 죽는 사람들은 행복하다!』(묵시 14, 13).

허성 신부
  |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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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와 행복…

우리 시대 가장 대중적인 영성작가로 불리는 존 포웰 신부님이 쓰신 ‘행복의 조건’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내면의 행복에 이르기 위한 10가지 훈련과업’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의 출발점은 ‘기대의 충족과 행복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많은 기대를 하며 살아갑니다. 직장을 잃은 사람은 새로운 직장을 얻기를 기대하고, 학생들은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이런 자신의 기대가 충족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포웰 신부님은 이는 단지 기쁜 일이지 행복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즉, 기대해서 얻은 기쁨은 언제든지 또다시 슬픔으로 바뀔 수도 있지만, 참된 행복은 영원하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2000년 전 참된 행복에 대하여 말씀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먼저 예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선언합니다. 복음에는 ‘마음’이라고 나와 있지만 그리스어 원문에는 ‘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의 내면세계, 더 나아가서 겸손한 사람을 말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는 말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이나 하고, 쪼들려 신세타령이나 하는 속 좁고 무능력한 사람이 아니라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빈손을 벌려 하느님을 향할 줄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슬퍼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슬퍼하는 사람이란 자신들의 불행한 처지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 현존이 멀어졌기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타인으로부터 받은 피해나 어려운 세상살이 때문에 슬퍼하는 자기중심적 생활태도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라, 이 불의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지 못하기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또 예수님은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옳은 일,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본질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파괴되어 목마름을 느끼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이지요.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갈망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갈망하는 행복이란 어떤 모습입니까? 풍족한 돈의 행복입니까? 굶주리지 않는 배부름의 행복입니까? 목적 달성의 만족입니까? 우리 신앙인들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님 때문에’라는 수식어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 때문에 가난할 수 있고, 그분 때문에 울 수 있고, 그분 때문에 목말라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참된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껏 나는 과연 어디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아 왔는지 잠시 생각해 봅시다.

박종주 베드로 신부
  |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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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이소!

“여러분, 새로운 한 해도 모두 행복(幸福)하시기를 빕니다.” 이제 며칠 있으면 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가는 호랑이(庚寅年) 겁내지 말고 새로운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토끼(辛卯年)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면서 서로에게 “새해 복(福)많이 받으십시오.” 하고 인사를 나누게 됩니다. 이러한 인사는 서로에게 기쁨을 주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그리고 참으로 큰 말입니다. 복(福)이라는 것은 이렇듯 삶 안에서 기쁨과 용기를 주는 ‘큰 감사’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인사하는 ‘복’(福)과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행복’(幸福)이 뭐가 다르겠습니까? 결국 우리 인간이 그렇게 살고자 하는 바람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한결 같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또 행복을 찾아서 살아갑니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이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이는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참된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권력입니까? 명예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또 이 행복을 엉뚱한 곳에서 찾아 헤매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것은 참 많습니다. 물질적 부유함, 쾌락, 권력, 명예 등…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얻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로 인해 남들이 나를 존경하고, 내가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고, 그래서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이러한 것들이 모두 채워졌다고 해서 사람들이 행복할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장엄히 선포하십니다. 이름 하여 ‘산상설교’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가지고 누려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줄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고 썩어 없어질 것들입니다. 많이 가진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많이 가진 것을 없는 이들과 함께 나눔으로써, 내가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될 때, 나는 비로소 가난해지고,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나는 행복한가?’생각합시다.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이 든다면 나눕시다. 이웃과 함께, 오늘 특히 해외 원조 주일임을 기억하고 이웃들과 함께 행복을 나누고 살아갑시다. 행복하이소!

오창근 신부
  |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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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파악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음의 산상설교는 유명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이르신 뜻을 그대로 실천하기보다 달달 외워 성경을 ‘아는 척’하는 데 이용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신앙마저 세상에서 하듯이 자랑하는 일인 줄 착각하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일이 오직 은총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은 탓입니다.

오늘 스바니야 예언자의 선포역시 우리에게 익숙한 말씀입니다. 의롭고 겸손한 사람을 그분께서는 반기신다는 사실 쯤은 모두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 바오로사도의 이야기도 전혀 생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자랑이란 별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모든 것이 그분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주님의 이름”으로 보호하는 분이시며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저지르지 않고 사기 치지 않는 맑은 영혼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진리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알면서도 그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는 일이 불의이며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고서도 행하지 않는 것이 거짓이며 그분께서 주신 것을 내 것인 척 하는 것이 그분께 사기 치는 일이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이란 으레 그러려니 하는 일은 믿음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을 아시나요? 매사 시큰둥하게 지내는 삶이라면 전혀 복음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아시나요? 주님께서 오늘도 거푸 세상의 속된 기준에 묶이지 않을 방법을 알려주시고 세상의 가치관에 매이지 않도록 힘을 주시며 세상의 것들에서 풀려나서 온통 자유 할 길을 꼼꼼하게 일러 주시는 이유를 알고 계신가요? 그분께서 주신 행복을 철저히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을 쏟으시는 성심을 헤아리시나요?

약간 막막하고 어찌 그럴 수 있겠나 싶고 좀 더 성숙해지면 그러리라고 미뤄대는 우리를 위해서 매일 매일 그 방법을 알려주시는 주님께서는 오늘 특별히 바오로사도의 날카로운 지적을 보태어 일깨워주십니다.

그 길을 따르고 그 길을 완성하고 그 길을 살아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비법은 자기 주제를 깨닫는 일이라고 콕 찍어 설명하십니다. 그분을 모르던 지난 삶들의 못난 짓들을 돌아보아 부디 부디 ‘주제 파악’을 하라고 부탁하십니다.

사랑도 섬김도 봉사도 모두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알고 그분의 뜻임을 깨닫고 너무 큰 사랑을 얻은 일에 감격한 사람만이 행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분의 사람,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무엇도 자랑할 것이 없고 아무것도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지혜자이신 분, 그분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베푸신 속량을 알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찬미할 줄 아는 일이 지혜입니다. 그분의 높고 높음을 깨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분께 사랑받는 존재임을 느낄 때 인간은 참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혹시 자랑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내가 낫다’ 는 생각이 들 때에 오늘 바오로사도의 말씀을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런 생각이 들면 ‘읍!’하고 입을 꽉 다무는 연습을 해도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그분께서 마련하신 그 큰 상을 받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장재봉 신부
  |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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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의무’이행이 아닌 ‘복음’의 실천

갈릴래아는 역사적으로 이방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는데, 그곳 갈릴래아에서 살아가는 이방인인 갈릴래아인들은 동족에게 갖은 수모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그들, 이방인들이 살아가는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때 갈릴래아의 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따랐고, 그 군중들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중에서 첫 번째 가르침이 오늘의 복음인 참 행복입니다. 참 행복의 가르침은 복음적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윤리강령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삶의 이정표인 셈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참 행복의 가르침은,‘의무’와 구별되어야 하는‘복음’입니다.‘의무’를 이행하는 것과,‘복음을 살고, 실천’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의무’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된 노력이 필요하며, 구속력을 수반합니다. 그러나‘복음’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분을 알고 깨달아 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요,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영혼의 힘에 의한 완성된 사랑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참 행복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행하여야 한다는 조건을 걸고, 그 조건에 멍에를 씌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용서받고 구원을 얻어 새로운 삶이 시작됨을, 이로써 복음을 생활화하며 실천하는 기쁨을 맛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진정한 행복의 가르침입니다.

복음을 살아가는 우리는, 주님께서 일러주신 이 가르침을 우리의 생활에서 실천하고 있는지 늘 살펴야 합니다. 혹, 필요 이상으로 부유함에 집착하지는 않는지요? 허영과 오만으로 다른 이를 무시하거나 조롱하지는 않는지요? 자신의 많은 시간을 짜증과 분노로 쓰지는 않는지요? 정의를 비웃지는 않는지요? 흑색 거짓을 선동하지는 않는지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이러한 유혹에 빠질 수 있고, 그 유혹에 오히려 안주하며, 행복을 찾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경계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참 행복이 무엇인지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 예수님 때문에 모욕과 박해받는 사람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의무에만 그치지 말고, 참된 복음을 실천하여 완성된 사랑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 부산교구 김형근 블라시오 신부 : 2017년 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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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의 참행복

성경은 가난한 이들의 행복에 관하여 자주 언급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 봉독한 스바니야 예언서는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에게 의로움과 겸손함을 찾으라고 권고합니다(스바 2,3). 여기서 겸손한 이들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아나빔”으로 가난한 이들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아나빔, 곧 가난한 이들은 단순히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를 ‘겸손한’이라고 번역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경이 말하는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오직 그분께 의지하며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이들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라고도 표현되는 그들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 입에서는 사기 치는 혀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스바 3,13).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참행복 선언’은 이러한 가난한 이들의 특징을 더욱 상세히 묘사해 줍니다. 먼저, 그들은 영적으로 가난한 이들입니다(마태 5,3). 우리말 성경에서는 “마음”으로 번역하지만 그리스어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영이 가난한 이들”입니다. 영이 가난하다는 말은 영적이지 못하다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고 자신을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스바니야 예언서가 이야기하는 겸손한 이들입니다.

이렇게 가난한 이들은 타인의 아픔과 고통, 세상의 죄 앞에서 슬퍼합니다. 또한 온유하여 다른 이들의 짐을 대신 짊어집니다(마태 5,5; 12,28-30 참조). 언제나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며, 자비로운 모습을 지닙니다. 마음이 깨끗하여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살아가며(마태 15,15-20 참조) 분열이 아니라 평화를 이룩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때문에 박해를 기꺼이 참아 받습니다. 이렇게 보니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철저히 자신을 내어놓는 사람입니다.

‘참행복 선언’은 이처럼 가난한 이들이 진정 행복한 이들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늘 나라를 차지한다는 것은 약속된 땅을 차지하는 것, 곧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을 영원히 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나중에 상속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이미 그들의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5,3). 하늘 나라의 행복은 나중에 가서야 얻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누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땅의 시각에서 볼 때 슬퍼하고, 박해받아 고통 속에 사는 듯 보이지만 실은 그들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이들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늘 나라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늘 나라를 온전히 차지하는 것은 종말에 가서이지만 가난한 이들은 이미 하늘 나라에 속한 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상속받게 될 하늘 나라가 당신을 통해서 이미 가까이 와 있다고 선언하십니다(마태 4,17). 그러면서 이 나라를 차지하려면 회개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개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가난한 이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슬퍼하며, 온유하여 타인의 짐을 대신 짊어지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의로움에 목말라하며, 자비로운 사람으로 살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며, 평화를 이루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생겨나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것이 참된 회개의 삶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 번 가난한 이로 살아가기로 다짐합시다. 다시금 회개의 삶을 살아 하늘 나라를 상속받읍시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7년 1월 29일
  |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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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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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통해 행복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행복은 누구나 바라고,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대부분의 노력은 행복을 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공부하고 직장인들이 바쁘게 살아가는 것과 같은 모든 것은 행복을 향한 순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리고 있고 누리기를 바라는 행복이란 무엇인지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사실 행복을 정의하는 것이 참으로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행복은 어떤 걱정이나 고민도 없는 즐겁고 기쁜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오늘 복음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모욕과 박해를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나 다르기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세상살이에 지치고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며 무시당하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행복의 조건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나가면, 우리가 바라는 어떤 조건이 충족
되어야지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힘겹게 하는 모든 순간에도 행복은 우리와 함께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마음이 힘들고 주변사람들에게 상처를 받는 순간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지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에 우리는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즐겁고 기쁜 순간에도 행복하고, 힘겹고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행복하며, 삶의 어둠을 경험하는 순간에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의 조건이 채워졌기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하기에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는 순간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웃고 계시고, 우리가 지치고 힘든 순간에 하느님의 위로와 격려를 경험하게 되며, 삶의 어둠 속에서 헤맬 때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누리는 행복이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힘겹게 살아가 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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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주홍 디모테오 신부
2023년 1월 29일 주보
  |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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