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가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523 97.6%
[군종] “못된 신부, 삐짐 할매 ”
조회수 | 2,472
작성일 | 05.01.28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덕담인 요즘 사람들에게 ‘가난’을 이야기한다면 조금은 모자란 사람이요, 얼빠진 사람취급을 받겠지만 예수님이 가난을 이야기하셨으니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마음먹은 우리 신앙인들은 가난에 대해 용기 있게 말해야 하겠지요...

얼마 전 시골에서 조그만 본당을 맡아 사목하고 있는 동창 신부가 전해준 이야기입니다.

동창 신부를 만날 때마다 항상 손을 잡아주시며 반갑게 인사하시던 루시아 할머니가 어느날 부터인가 아주 차갑게 대하더라는 겁니다. 몇 번이나 ‘할매요~’라고 능청을 떨어보고, 무게 있는 목소리로 ‘루시아 할머니!’라고 불러보았지만 여전히 시큰둥한 모습으로 외면하길래 아예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답니다. “할매~ 요즘 무슨 일 있어요? 왜 얼음공주가 되었는데요?” “일 없어유. 안녕히 계세유...” “아이 할매~” 한참동안 실갱이를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봇물처럼 터저나오는 할머니의 원망 “지가 만 원을 드리나유, 오 천원을 드리나유? 그래도 마음써서 드린건디. 어찌 그리 인정사정없이 거절한대유? 돈이 작아서 그런지 무척 서운하더라구유...” 울먹이시는 할머니를 꼭 안아 드리며 달래 드릴 수 밖에 없었답니다.

사연인 즉 매일미사에 오시던 할머니가 감기 몸살로 미사에 오시지 않자 동창신부가 할머니의 단칸방에 쌍화탕을 사들고 찾아갔고, 할머니는 신부님이 몸소 누추한 곳을 방문해주셨다고 감격하여 신부님이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실 때 신부님 손에 꼬깃꼬깃 접은 돈을 쥐어주었답니다.

이 못된 신부는 당황한 나머지 “일 없어요”라는 말과 함께 그 돈을 펴보지도 않은 채 문안으로 던져놓고 도망을 나왔답니다. 할머니의 궁핍한 처지를 잘 아는 터에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젊은 아가야 신부님” 새우깡이라도 사 드시라고 천 원짜리 두 장을 접어 건네주려 하셨던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론 그 못된 신부가 가끔 루시아 할머니에게 새우깡 신부름을 시킨답니다.

“할매요! 새우깡 다 떨어졌다니까요... 그리고 고래밥이 더 맛있어요...”

새우깡 한 봉지를 주고받으면서 몇날 며칠 동안 행복한 모습... 마음이 가난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행복입니다. 하늘나라에서만 가능한 모습입니다.

-------------------------

군종교구 김준래 마르띠노 신부
523 97.6%
행복하여라

가끔 병사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언제가 가장 행복하냐?”

“휴가 갈 때지요~”

“그럼 군 생활에서의 바람은 뭐냐?”

“당연히 전역이지요!!”

물어보는 말에 열에 아홉은 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렇게 질문을 던지고 나면 당연한 걸 괜히 물어봤다 싶습니다. 군에 오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자발적이기 보다 의무복무를 위해 오기 때문에 아무래도 군대생활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일 것입니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군대에서의 행복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어느 때 보다 행복에 대해서 깊이 체험할 수 있는 곳이 군대라 생각합니다.

제가 방문하는 곳 중에 특별히 마음이 더 가는 306보충대와 사단 신병교육대가 있습니다. 이곳은 이제 입대한지 하루나 이틀 된 보충병들과 훈련소에서 훈련받는 훈련병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군대는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하고 불편한 곳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어느 것 하나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할 수 없다는 것이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미사를 함께 봉헌하는 것과 초코파이를 나누어주는 것뿐입니다. 미사를 마치고 초코파이를 먹는 보충병과 훈련병들의 모습을 보면 이렇게 작은 것에도 저렇게 감사하고 맛있게 먹을 수도 있구나! 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기쁘게 먹을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바로 그 자체가 군대에서 삶의 행복을 배우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풍요로움 안에서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행복은 여전히 숨겨진 보물처럼 가려져 있습니다.

군대에 오는 많은 젊은이들이 부모님과 친구들과 누리던 그동안의 삶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다가 보충대와 신병교육대를 와서 당연한 것을 감사한 것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을 감사로 체험하면서부터 행복은 시작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얻어야만 행복하리라 믿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행복에 관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돌아보면 행복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었습니다. 집이 좀 가난해도 함께 하는 가족이 있었고, 슬퍼하는 순간에도 위로해주는 그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놀라운 기적이고 감사해야할 것들입니다.

보다 많은 젊은이들이 군 생활에서도 감사함을 발견하길 기도합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어디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한상필 라우렝시오 신부
  | 02.02
523 97.6%
행복하여라!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말하는 그 행복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아마도 우리 모두가 느끼고 바라는 행복은 분명 부유하고 배부르며 항상 웃을 수 있는 여유로운 삶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행복의 가치관을 뒤엎어 버리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며 굶주리며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이 세상 그 누구도 가난하고 굶주리며 박해받는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행하고 불쌍하게만 생각할 뿐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시대가 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더욱 부자가 되기를 지향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세계는 서로 경쟁하고 쓰러뜨리는 생존경쟁의 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늘 복음 말씀은 더 깊은 묵상을 요구합니다. 진정 필요한 말씀이지만 잘못 이해하면 가난이 행복하다고 외치는 궤변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의 기준은 바로 자신의 삶의 중심이 하느님께 있느냐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있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행복하다는 사람들 앞에 ‘하느님을 위하여’라는 말을 붙여보면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을 위하여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하느님을 위하여 슬퍼하는 사람들을 어찌 행복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 부유한 사람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지금 배부른 사람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이 어찌 행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처럼 행복은 하느님을 위하여, 하느님 때문에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행복의 열쇠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 때문에 가난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선 마음을 비워야 가능한 일입니다. 비워야만 하느님께서 그 안을 채워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 즉 물질과 재산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다면 어떻게 하느님께서 그 안에 들어오실 수가 있겠습니까? 부유함 자체가 불행한 것은 아니지만 소유는 언제나 또 다른 소유를 부른다는 것에 위험이 있습니다. 부자가 자꾸만 부에 집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누구든 재물을 소유하면 더 많은 재물을 갖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래서 나중엔 사람이 재물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재물이 사람을 소유해 버립니다.

하느님 때문에 가난해지는 것은 이 끝없는 인간의 욕망 앞에서 절제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소유의 욕망 앞에서 멈출 줄 아는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하느님 때문에 가난해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될 때 진정 물질 앞에서 자유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결코 물질의 많고 적음이 결코 가난함과 부유함의 기준이 아닙니다. 그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실제로는 부유하지만 그것을 하느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재물에 집착하기 보다는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실제로는 가난하지만 자신의 가지고 있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은 오히려 부유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속은 온통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하여 하느님이 머무를 공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가난은 하느님을 위하여 소유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께서 언제든지 채워주시기를 믿기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실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더욱이 여러분은 수도자도 아니고 성직자도 아닙니다. 세속에 묻혀서 살아야 할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가난으로 초대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면 그 무엇도 우리의 가슴을 채워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박재우 신부
  | 01.28
523 97.6%
[군종] 하느님께 받은 것

많은 분이 알고 계신 글이겠지만 오늘 복음과 어울리는 글이라 소개해 드립니다.

나는 하느님에게 나를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도록. 하지만 하느님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겸손해 지는 법을 배우도록.

나는 하느님에게 건강을 부탁했다. 더 큰일을 할 수 있도록. 하지만 하느님은 내게 허약함을 주었다.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나는 하느님에게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 했다. 행복할 수 있도록. 하지만 난 가난을 선물 받았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나는 하느님에게 재능을 달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지만 난 열등감을 선물 받았다. 하느님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나는 내가 부탁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내게 필요한 모든 걸 선물 받았다. 나는 작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주셨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는 가장 축복받은 사람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잘 아는 산상 설교를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한 사람들’ 형식으로 구성된 이야기인데 …한 사람들이 심상치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이 오늘 예수님께서 행복하다고 선언한 사람들인데 이러한 사람이 실상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 안에서 핍박받고, 애처롭게 살아가는, 그래서 그러한 모습으로 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의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행복하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모두 의지할 곳이라고는 하느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답답해하거나, 아예 하느님을 외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는 기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주시기를 청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에게 필요한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주신다고 말입니다.

나의 약함은 하느님을 뵙기 위한 도구일 수 있습니다. 내가 부끄러워하는 것들이 하느님 앞에서는 자랑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하지 못했던 것들이 하느님이 그토록 바란 것일 수 있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사람들의 눈에서 하느님의 눈으로 바꿀 때 하느님이 그토록 행복하다고 외쳤던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 군종교구 강재원 미카엘 신부 : 2017년 1월 29일
  | 01.27
523 97.6%
“영원한 행복”

----------------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학교에 가고, 열심히 일하고,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여가를 즐기는 등 우리의 모든 활동이 행복을 좇는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라는 오늘 주님의 말씀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가난과 행복은 너무나도 상반된 개념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행복을 ‘이 세상 것들’ 안에서 찾곤 합니다. 특히 적지 않은 현대인들은 ‘돈’이 나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는 절대적인 믿음 속에 부자가 되는 것을 삶의 유일한 목표로 삼기도 합니다. 물론 월급날, 혹은 목돈을 쥐게 되었을 때 우리는 짧은 만족과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손에 쥔 재물이 언제까지고 내 손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돈을 좇는 데 혈안이 된 사람들이 원하던 재물을 손에 쥐었을 때 만족과 기쁨은 찰나에 스쳐 가고 불안과 초조, 더 큰 재물을 갖고 싶다는 욕심이 싹트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정말 소중한 것들을 놓치며, 삶이 깊은 나락에 빠지게 되는 것을 목도하게 됩니다.

우리는 영원한 것, 저승의 세력도 앗아갈 수 없는 것들 안에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행복이 영원한 천상 낙원 위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설령 지금 내가 가난하거나 슬퍼하여도, 박해를 받고 세상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도, 우리가 누리게 될 행복은 그 누구도 앗아가지 못할 겁니다. 성실하게 일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재물을 취득하고 만족하되,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그것을 이웃과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또 재물, 권력, 명예 등 찰나를 스쳐 가는 쾌락이 아닌 소중한 사람들과 나누는 사랑, 이웃들과의 우정, 더 나아가 신앙, 진리, 자유, 평화, 영원한 생명 등 참된 것, 영원한 것들 안에서 행복을 찾아야합니다.

세상 것들의 유혹은 참 달콤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주지 못함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단편적인 세상의 쾌락이 아닌, 영원한 기쁨, 참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시다.

----------------

군종교구 박시용 베드로 신부
2023년 1월 29일 주보
  | 01.28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823   사순 제5주일 성경 말씀 해설  [2] 8
822   [수도회] 눈물 흘리시는 하느님  [5] 2740
821   [수원] “000야, 이제 그만 혼자 가두어 있지 말고 이리 나오너라.  [6] 2787
820   [인천] 부활.....누구와 함께 있는 것?  [7] 2736
819   [서울]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  [9] 2828
818   [마산] 나는 부활이며 생명이다  [6] 3017
817   [부산] 라자로의 부활사건  [8] 3289
816   [안동] 생명의 삶  [4] 2438
815   [대구] "너는 나를 믿느냐?"  [8] 4792
814   [청주]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  [1] 354
813   [대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5] 2835
812   [제주] “돌을 치워라”  [1] 229
811   [전주]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자매의 믿음  [3] 3108
810   [광주] '죽은 자여 일어나라'  [2] 248
809   [군종] 라자로의 소생  [2] 240
808   [의정부] 신성과 인성의 감사로운 결합  [3] 2781
807   [원주] "주님이 계셨더라면…"  [2] 2589
806   [춘천] 우리 안에 사랑의 영으로 부활을  [2] 288
805   (자) 사순 제5주일 독서와 복음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  [6] 2593
804   사순 제4주일 성경 말씀 해설  [7] 99
803   [수도회] 무거운 십자가는 은총의 도구로 사용된다.  [9] 2847
802   [수원] 주님의 마음? 내 마음?  [9] 2432
801   [인천] 눈이 멀었던 사람의 신앙고백  [9] 2739
800   [서울] 세 가지 발견  [12] 2750
799   [마산] 나날이 눈 떠가는 삶  [6] 2677
798   [부산] 눈 뜬 것도 죄가 되는가?  [9] 2699
797   [안동] 제대로 본다는 것은  [4] 2534
796   [대구] 영적인 눈을 뜬다면  [9] 3542
795   [청주] 맑은 눈을 지니길 희망  [1] 340
794   [대전] 소라도 잡아야 하는 거 아냐?  [6] 2441
793   [전주] 어둠 속에 머무르려는  [2] 2293
792   [광주/제주]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기  [2] 327
791   [군종] 얼굴을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3] 2654
790   [의정부] 본다는 것의 의미  [2] 331
789   [원주] 동상이몽(同床異夢)  [2] 339
788   [춘천] 마음의 눈으로  [5] 2838
787   (자) 사순 제4주일 독서와 복음 (태경소경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6] 2281
786   사순 제3주일 성경 말씀 해설  [2] 163
785   [수도회] 우리 평생의 갈증을 채워주실 분  [10] 2505
784   [수원] “생리적 갈증과 신앙적 해갈”  [10] 2873
1 [2][3][4][5][6][7][8][9][10]..[21]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3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