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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행복한 삶의 비결
조회수 | 2,500
작성일 | 05.01.28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얼굴이 어디 있나 한번 찾아봤습니다. 어머니 품에 포근히 안겨 곤히 잠들어 있는 갓난아기 얼굴, 그보다 더 행복한 얼굴은 없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행복함과 평화로움이 아기 얼굴에 묻어 있었습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안하고 초조해 보이는 얼굴을 찾아보았습니다. 세상 전체가 자신의 장난감인양 쥐락펴락 거드름을 피우는 몇몇 야심 많은 정치인들 표정에서는 행복함이나 편안함보다는 극도의 불안과 초조, 두려움의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제시하는 가난함ㆍ소박함ㆍ온유함ㆍ수용성ㆍ작음…. 이런 단어들은 이 시대에 다들 꺼려하고 의도적으로 외면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런 단어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에서, 특별히 그리스도교 수행생활에서 아주 긍정적 색조로 바뀝니다.

돌아보니 수도원 입회 초기만 해도 제 각오는 대단했습니다. '궂은 일은 내가 먼저'라는 구호 아래 '시켜만 주면 뭐든 다 한다'는 굳은 각오로 따지지 않고, 불평불만하지 않고, 그 어떤 일이든 고분고분 다 했습니다. 가장 밑바닥에서 생각하고 위만 쳐다보며 모두를 우러러보며 살다 보니 마음이 그리도 편했습니다. 내 견해를 고집하지 않고 상대방 의견에 따르다 보니 다툼도, 의견 차이도, 스트레스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행복한 나날 완벽한 평화의 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첫서원을 하고, 종신서원을 하고, 서품을 받고, 책임자가 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초심은 슬슬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제 마음에는 '이제 내가 뭔가 좀 해봐야겠다. 이제야말로 내 포부를 마음껏 한번 펼쳐볼 때다'는 생각이 슬슬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로 마음의 평화라든지, 행복한 생활은 끝이었습니다. 그렇게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날이면 날마다 이리저리 부딪치는 상처투성이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내 계획과 내 주장만을 내세우다 보니 사사건건 이웃들과 충돌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충돌로 입은 상처가 아물기 전에 또 다른 상처가 생기고, 상처 부위는 곪아터지고 그야말로 고통의 세월이 시작된 것입니다.

돌아보니 그 모든 괴로움은 결국 '내가 무엇인가 한번 해보겠다' '내가 주인공이다'고 마음먹는 그 순간부터 비롯됐다는 것을 지금에야 어렴풋이 알게 됐습니다. 마음에 '내'가 가득 참으로 인해 가난함, 소박함, 온유함, 작음 같은 단어들과는 거리가 먼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 작은 마음을 지닌다는 것. 어렵지만 행복한 삶의 지름길임을 언제나 체험하며 삽니다. 아쉽지만 내 의견을 접고 이웃 뜻에 따른다는 것, 서운하지만 내 의지를 접고 공동체 결정에 순응한다는 것, 정말 괴롭지만 내 계획을 포기하고 하느님 뜻을 추구한다는 것, 그것이 행복의 보증수표이자 평화로운 수행생활의 본질임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또한 수도자로서 가장 행복할 때는 내 뜻대로 뭔가 해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의 품에 온전히 안기는 때라는 것을 요즘에야 깨닫습니다. 내 의지를 과감히 접고, 바보처럼 이웃 품에 안길 때 상상할 수 없는 천상 평화와 내면에서부터 진정한 행복이 어느새 소리 없이 제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느님 손 안에 노는 것, 그분 품에 안기는 것, 그분 선택에 따르는 것, 그것이 때로 서운하고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우리 신앙인들 본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 그 안에는 묘하게도 행복의 씨앗이 싹트고 있습니다. 아직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역경은 우리를 향한 극진한 하느님 사랑의 표시입니다. 이 역설의 진리를 깨치는 순간 우리는 더욱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야말로 우리 신앙이 한 단계 더 도약하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굳건히 자리하실 때, 그분께서 우리 중심에 살아계실 때, 우리는 그 어떤 세찬 역풍 앞에서도 보란 듯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내면 깊숙이 그리스도 그분께서 형성돼 있다면 세상 그 어떤 풍랑 앞에서도 내적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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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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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기도

오소서 성령이여, 저의 길을 밝히시어 제 영혼을 빛으로 채워주소서 !

세밀한 독서 (Lectio)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 (마태오복음 5 – 7장) 의 진수인 ‘참행복’ 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5, 1 – 2) 를 산상설교의 배경으로 도입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에서 ‘산’ 은 하느님의 계시가 이루어지는 장소 (17, 1; 28, 16) 로 모세가 호렙 산에서 율법을 받았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베푸시기에 ‘산상설교’ 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산에 오르시자 옥좌에 좌정하듯 ‘자리에 앉으시어’  절대적 권위로 가르치며 율법의 참뜻을 밝히시는데, 그 가르침의 대상은 ‘군중’ 입니다.

행복선언에서 ‘행복’ 의 근거는 “하늘나라” (3ㄴ. 10ㄴ절) 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가치를 압도하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당신 백성에게 베풀어질 것이 ‘행복하다.’ 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는 대상이 되는 것일까 ? 병행문인 루카복음 (6, 20 – 23) 에서는 가난한 이들과 부유한 이들을 대비시키는 반면, 마태오는 내적 가난을 받아들여 윤리적 가치를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참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의 가난과 품행에 따라 (5, 3 – 9), 그리고 박해와 (5, 10 – 12) 관련되어 나타납니다.

마음은, 단순히 육과 구분되는 ‘영’ 만이 아니라, 인간의 중심으로 인격의 원천입니다. 전인격을 드러내는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 “마음이 가난” (3절) 하다는 것은 어리석은 부자처럼 세상의 재물에 자신의 생명을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루카 12, 16 – 21)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께 희망을 둔 겸손에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늘로 채워져 하느님의 통치를 받아 하느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고백하며, 두 마음을 품지 않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 입니다. (8절; 시편1, 1 – 6 참조) 맑은 호수가 산 그림자를 비추어 내듯, 깨끗하고 단순한 마음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성전이 됩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깨끗한 성품은 다른 품성과 구분되지 않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온유함, 자비로움” (5. 7절) 을 겸비합니다. 이들은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서도 주어진 여건에 순응하며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한테서 약속의 땅을 받았듯, 이들은 이웃과 더불어 이뤄가는 이 땅에서 “새 하늘, 새 땅” (묵시록 21, 1) 에 대한 주님의 약속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슬퍼하는 사람들” (4절) 은 왜 행복할까 ? 그들이 지닌 상황, 곧 가난이나 슬픔이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들을 눈여겨 보아주시고 그들의 유산이 되어주시리라는 믿음, 곧 최종적 위로의 근거를 하느님께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의 삶에서 올바른 관계를 최고 가치로 여기며, 이웃과 평화를 이루고, 하느님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완덕을 이뤄가는 사람들은 “의로움” (6ㄱ절) 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과 더불어 자신들이 이뤄가는 사랑의 길 때문에 “흡족하며” (6ㄴ절) 행복합니다.

행복선언은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 (10절) 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의로움” 과 “나 때문에” 를 동일시하며,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11 – 12절)  의로움을 위한 고통은 하늘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의로움을 행하는 그 자체가 고통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삶에서 때때로 경험합니다. 또한 의로움의 길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참행복’ 은 우리가 지니는 의로움에 기초해 종말론적 구원에 맞추어져 있지만,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3절) 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10 – 12절) 이 수미상관 (Inclusio) 을 이루는 것으로 보아 어떤 상황이나 조건에 처해도 그리스도인 삶의 궁극 목표는 ‘하늘나라’ 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참행복의 유일한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그분께 바라고 희망하며 그분을 따르는 올곧은 삶만이 참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시편 1, 1 – 6 참조)

묵상 (Meditatio)

“행복하여라.” (마태 5, 3) 하시는 예수님의 선언은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는 여정인 동시에 우리한테 하시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그 말씀의 길을 따라갈 때 그 길은 하늘나라로 이어지고, 그곳에 이르는 이정표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주님의 약속에 충실하고자 내가 중요하게 여기던 가치는 무엇이었는지 되새겨 봅니다. 가난한 마음과 온유, 그리고 자비와 평화가 나와 내 이웃을 행복하게 했는지, 이 모든 것에 앞서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하고자 했는지 …. 하지만 내가 어떤 처지에 있다 해도 내 앞에 계시는 예수님의 손을 잡을 수 있어서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이정표인 동시에 동행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Oratio)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듯 복을 받으리라. 주님은 시온에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너는 한평생 모든 날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리라. (시편 128, 1. 5)

반명순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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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안에서 참 행복을 누리며 살아갑시다.

1.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현재 우리는 과연 어디에 행복의 가치를 두고 살고 있습니까? 제가 지금까지 가장 감명 깊게 봤던 영화들 중에서 ‘씨암 썬셋’(Siam sunset)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에는 새로운 색상을 창조해내는 ‘조색가’인 페리와 그의 아내 메리가 등장인물로 나타납니다.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던 페리에게 불행이 찾아옵니다. 어느 날, 그는 아내와 함께 자기 집 앞마당에서 세차를 하다가, 호수로 물장난을 즐겁게 칩니다. 그런데 가전제품을 싣고 가던 비행기 화물선에서 갑작스런 사고가 나서 모든 제품이 땅에 떨어집니다. 그 물품 중 하나인 냉장고가 폐리의 마당에 떨어지고, 또 불행하게도 그 냉장고에 아내가 깔려 사망합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에게는 늘 불행의 그림자가 따라 다닌다고 믿게 됩니다.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재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페리에게는 계속 일이 꼬이고 뒤틀립니다.

그렇게 실의에 빠져서 살아가던 그는 우연히 당첨된 관광상품권으로 호주를 여행하게 됩니다. 그곳에서도 일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버스 고장 때문에 허름한 곳에 머무르고, 또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야 했습니다. 페리는 인생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가지 않고, 행복과 불행이 교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결국 그는 석양을 바라보면서 죽은 아내를 위해 색깔을 발견하는 데, 그것이 바로 ‘시암 선셋’ 색깔입니다.

2. 비정상인들도 정상인들처럼 행복과 불행을 느끼겠습니까? 저는 부제품 직전에 고령 들꽃마을에서 최영배(비오) 신부님과 3개월을 살았었습니다. 그때 저는 정박아들의 심리상태와 행동방식에 대해 유심히 살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머리를 계속 벽에 쳐박기 때문에 머리에 보호대를 늘 착용해야 하는 아이들, 뾰족한 것이나 칼이 있으면 피가 나서 살이 다 드러나도록 그어대는 무서운 아이들, 배고프다고 고함지르다가도 밥만 주면 조용해지는 아이들 등 여러 종류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정박아들은 행복과 불행이 무엇인지, 또 아픔과 괴로움이 어떤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 정박아들이 부러울 때도 있겠지만, 우리 인생에 행복과 불행이 함께 있지 않다면 진정한 행복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참다운 행복에 관한 8가지 선언을 하셨습니다. ‘진복팔단’ 혹은 ‘산상설교’라고도 불립니다. 예수님은, 1) 마음이 가난하고, 2) 슬퍼하며, 3) 온유하고, 4)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며, 5) 자비롭고, 6) 마음이 깨끗하며, 7) 평화를 이루고, 8)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정말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현세에서도 행복해야겠지만, 천국에서 더욱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인생살이 새옹지마’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늘 행복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 또 늘 불행하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행복과 불행이 늘 공존하고 있는데,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늘 행복할 수도 있고, 늘 불행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에 몰두하면서 사는지, 아니면 우리를 만들어주신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면서 사는지에 따라 행복과 불행의 차이가 생깁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했다고 해도, 하느님을 모르고 또 하느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면 불행한 사람일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이 막강해도, 돈과 권력이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인생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지, 또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주 명쾌하게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돈도, 명예도, 인간적인 사랑에서 오는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행복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갈 때,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늘 행복하기를 바라시고 또 우리를 늘 보호해주시는 하느님 안에서 참 행복을 누릴 수 있기 위해, 하느님께 늘 감사드리면서 그분 뜻에 맞갖게 살아가야겠습니다.

정재성 신부
  |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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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짜리 미완성의 행복을 넘어, 보다 완성되고 충만한 행복을 추구하며

공생활 기간 동안 펼쳐진 예수님의 다섯 번 설교 가운데 가장 먼저, 가장 깊이 있게, 그리고 가장 길고 장엄하게 펼쳐진 설교가 산상(山上) 설교(마태 5,1-7,29)입니다. 산성 설교는 복음 전체의 요약이요 진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행복 선언’으로 산상 설교를 시작합니다. 마태오는 행복 선언 메시지를 다른 복음 사가들과는 달리 더 많이, 여덟 가지로 집약하고 있기에, 이를 진복팔단(眞福八端)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 활동의 주 무대였던 갈릴래아 지방은 정치·사회·문화·종교 등 모든 면에서 낙후된 지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뒤지고 소외된 갈릴래아 민중들을 위해 행복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행복 선언의 골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갈릴래아 백성들이 비록 지금은 가난하고 굶주리고 목마르며 슬픔에 가득 차 있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새 하늘 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충만한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굶주림과 갈증이 해결될 것이며,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며 자비를 입을 것입니다.”

행복 선언의 메시지는 현실이 고통스럽고 비참하니 복되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비록 현실이 불행하지만 메시아로 오실 분으로 인해 밝은 미래가 동터올 것이므로 복되다는 희망의 약속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희망찬 미래로 인해 복되다는 힘차고 장엄한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할 것이라고 강조하시는데, 가난한 사람들이란? 곰곰이 생각해보니, 공연한 객기나 별 도움 안 되는 오기를 내려놓은 사람들입니다. 기진맥진한 사람들, 의기소침한 사람들, 결국 인간만사 부질없음을 깨달은 사람들, 결국 믿을 대상은 하느님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 그래서 교만하거나 기고만장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니 가난한 사람들이란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초라하고 부끄러운 지난 삶이지만 언제 가장 행복했던가 돌아봅니다. 아무래도 내가 나답게 살아갈 때가 행복했습니다. 신원에 걸맞게 충만히 살아갈 때가 행복했습니다. 내 인생이 영적, 육적으로 활짝 꽃피어날 때가 행복했습니다.

많은 순간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이라 여기며 착각하며 살아오기도 했습니다. 세상이 주는 세속적 행복은 반쪽짜리 행복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반쪽짜리 미완성의 행복을 넘어, 보다 완성되고 충만한 행복을 추구해야 마땅합니다.

그 행복은 주님 안에 머묾으로 인한 행복입니다. 주님의 뜻에 온전히 승복함으로 인해 얻는 행복입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충만히 현존하시고 활동하심으로 인한 행복입니다.

진실한 사랑을 주고받을 때 우리는 행복합니다. 내 삶이 누군가에게 큰 의미가 될 때 참으로 행복합니다. 나로 인해 그 누군가가 참혹한 고통 속에서도 견뎌낼 힘을 얻게 될 때 행복합니다.

자세를 낮추면 행복이 찾아옵니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는데, 찬찬히 주변을 돌아보니 감사할 일들, 행복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뭐니 뭐니 해도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 그 하느님께서 과분하게도 ‘오늘 하루’라는 은총의 선물을 지속적으로 주고 계시다는 것, 죄인임에도, 나약함에도, 불충실함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기회를 주신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비록 티격태격하지만 홀로 고독에 밥 말아 먹으며 외롭게 살아가지 않고 형제들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

자세를 낮추니 사방이 행복거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밑으로 내려서니 모든 것이 감사거리들입니다. 손에 쥔 것을 놓으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너무나도 과분한 은총 속에 살아가고 있군요. 그렇다면 얼굴을 활짝 펴야 되겠습니다.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로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너무 기뻐 어쩔 줄 모르며 그렇게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지나고 나서 되돌아보니 왜 그리 좀생이, 좁쌀영감처럼 살아왔는지 후회막심입니다. 왜 별것도 아닌 것들에 그리 목숨을 걸었는지 부끄럽습니다. 한때 인생의 전부라고 여겼던 대상들, 그래서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부어 움켜쥐려고 발버둥쳤던 대상들이 사실은 물거품이요, 뜬구름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보폭은 짧은 반면 하느님의 보폭은 깁니다. 인간의 호흡은 촉박하지만 하느님의 호흡은 여유롭습니다. 앞으로는 좀 더 큰 걸음을 걸어야겠습니다. 좀 더 많은 여유와 너그러움을 나 자신과 이웃들, 그리고 하느님께 보여드려야겠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바라볼 때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처지의 사람들로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가난하고 굶주리며 우는 사람들에게 직접 위로의 메시지를 건네시면서 격려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걸어온 역사를 통해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이 하느님께 희망을 걸 때, 하느님께서 어떻게 그들의 편이 되시는지를 온몸으로 체험하며 살아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가난하고 굶주리며 우는 사람들, 비참한 사람들에게 더 큰 사랑과 자비를 베푸십니다. 더 가까이 다가가시고 그들의 마음을 읽어주십니다.

부유한 사람들, 그들이 쌓아올린 부 때문에 맨날 행복해할 것 같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부를 잘 활용하지 않으면, 언젠가 큰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많은 부자들이 자신 삶의 기반을 하느님에게서가 아니라 재물에 두고 있습니다. 그 기반이 영원할 것 같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순식간에 허물어집니다.
혹시라도 오늘 가난 때문에 너무 힘겹습니까? 지금 굶주리고 계십니까? 홀로 돌아서서 속울음을 울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너무 슬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조만간 당신 자비의 손을 펼치시며 가까이 다가오실 것입니다. 항상 함께 해주실 것이며 든든한 산성이요 성채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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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신문 2023년 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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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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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행복 선언인데 그 시작 부분을 언뜻 보면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군중이 있는 곳에서 가르침을 주시지 않고, 굳이 산으로 올라가 거기까지
따라온 제자들에게만 행복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그런데 이것은 제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행복 lesson을 배제하신 겁니까?
이는 어떤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레슨을 해주는데
돈 많은 집 아이들만 제자 삼아 피아노 레슨을 해주고
가난한 집 아이들은 제자로 삼지 않는 것과 같은 겁니까?

그러니까 일반 군중은 놔두고 제자들만 데리고 올라가 행복을 가르치신 것이고,
결과적으로 제자가 아닌 군중에게는 ‘행복 배제’와 ‘행복 차별’을 하신 것입니까?

우리의 주님은 그럴 분이 아니라고 우리가 믿는다면
하늘나라의 행복을 얻으려는 사람은 산 위로 올라오라는 뜻이고,
그런 열정이 있는 사람만이 힘들어도 산 위까지 올라와
주님의 행복 레슨을 받는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저희 형제들에게 오르간 레슨을 해준 적이 있고,
저의 레슨을 받은 형제가 100명을 넘는데 배우고픈 열망이 커,
저에게 끝까지 배우고, 지금까지 오르간을 치는 형제는 10명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행복 레슨도 이처럼 배우고픈 열망이 커야지만 배우는 것인데
주님의 행복 레슨은 이 세상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행복이기에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을 만나는 산까지 올라야 배울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성무일도 초대송 시편 중에, “주님의 산에 오를 이 누구인가?” 이런 시편이 있는데
복음에서 산은 하느님 계신 산이요 하느님 나라의 행복 레슨이 이뤄지는 곳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이 세상 나라의 행복과 다릅니다.
부자가 행복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며,
가난도 물질적 가난이나 마음의 가난이 아니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야 참으로 행복합니다.
(현재 우리의 번역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잘못 번역되어 있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욕심이 없는 사람 정도인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가난은
욕심이 없는 가난 정도가 아니라 영으로 가난한 것입니다.

왜냐면 영으로 가난해야지만 하느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고,
하느님 나라를 소유해야지만 물질이 아니라 영으로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성령 충만하면 그것이 참 행복이고,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가난뿐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 조건은 이 세상 나라의 행복 조건과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는 슬픔이 없고, 고통이 없고, 박해가 없는 것이 행복 조건인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이런 것들을 오히려 감수하고 감당할 수 있어야
영으로 행복할 수 있는데 이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얻으려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얻고자 하느님의 산으로 오를 제자가 얼마나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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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신부
2023년 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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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오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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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행복을 주님께 묻습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행복을 보게 하십니다. 우리의 슬픔을 바라보며 주님 없이는 행복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슬픔도 주고받으면 행복이 됩니다. 행복은 주님에게서 시작됩니다. 행복이 깨어나야 우리의 삶도 깨어납니다. 하느님 중심의 행복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는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알아보고 만나는 행복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야말로 행복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행복의 나라입니다. 행복의 최전선에 계시는 주님과 함께 행복을 우리의 삶에서 실천합니다. 마음의 가난함을 슬퍼할 줄 아는 슬픔과 성숙한 온유와 목마른 정의와 마음의 깨끗함과 평화의 실천과 모욕과 박해가 참된 행복입니다.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이 행복입니다. 삶은 행복을 향하고 행복은 삶을 가치 있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어떤 분이신지를 묻는 행복입니다. 새로운 모습의 행복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반대쪽에 있는 우리가 십자가의 참 행복을 깨닫습니다. 십자가는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느님의 가치를 만나는 은총 가득한 주일 되십시오. 여기에서 다시 시작되는 참된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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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23년 1월 29일
  | 01.29
523 97.6%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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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행복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갈망한다 해도 유일한 목표는 행복이다.”

그런데 진정한 ‘참 행복’은 무엇일까? 사실 우리는 ‘행복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값지고 좋은 것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미국 자본주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록펠러는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느냐?’는 질문에 “1달러라도 더 가지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욕망과 애착을 채우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 될까요?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첫 번째 참 행복’을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 한편, 삶에는 결핍과 슬픔이나 고통이 끝없이 전개됩니다. 그러나 행복의 반대는 이러한 결핍이나 슬픔이나 고통이 아니라 생기 없는 무기력함과 무감각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결핍과 슬픔과 고통은 오히려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깨우쳐주기도 합니다. 그러니 ‘행복한 삶’은 생기 있는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살아있을 때일 것입니다.

‘충만하게 살아있다’는 것은 자아의 깊은 곳을 살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곧 자신이 자신일 수 있는 자리요, 존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영혼을 살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행복선언’으로, 비록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어도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행복하다는 하늘나라의 성취에 대한 예언자적 선언이며 축복입니다. 사실 당시의 유대교는 재물을 가진 자, 배부른 자, 웃는 자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자이고,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는 하느님이 버린 결과로 비참하게 된 이들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재물이 많고 적음, 배부름과 배고픔, 기쁨과 슬픔을 넘어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우리에게는 “참된 행복”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 우리가 가난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비록 우리가 가난하지만 이미 그분을 차지한 까닭에 부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슬퍼할 줄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죄를 슬퍼하되 이미 자비 안에서 위로받고 기쁘기 때문이요, 우리가 진정 온유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있어야 할 하느님 품 안에 있기에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감미로움에 빠진 까닭입니다. 우리가 진정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야하는 이유는 주님을 극단적으로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결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기에 그분 외에는 결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기 때문이요, 우리가 진정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주님의 마음을 품은 까닭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그분의 손길에 매만져진 까닭이요, 진정 우리가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의 영에 끌려 다스림을 받기 때문이요,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인 까닭입니다. 그러니 ‘기뻐하고 즐거워 할 일입니다.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이란 필요한 한 가지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삶 안에서 가장 필요한 것을 찾아내기만 하면 나머지 것들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 바로 이때 필요한 한 가지는 물론 다른 모든 것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필요한 한 가지’는 무엇인가?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 내용은 같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실현하는 것, 곧 하느님이 바라시는 모습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제 가슴이 찔리게 하소서.
온유해 지게 하소서.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지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하소서.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어지게 하소서.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게 하소서.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지게 하소서.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손이 저를 이끌게 하소서.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제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되게 하소서.
이 복된 삶이 제게는 참된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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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신부 2023년 1월 29일
  | 01.29
523 97.6%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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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오 5,3)

우리는 거짓과 탐욕의 산을 쌓고 또 쌓으며 국민을 처참한 자괴감에 빠뜨린 전대미문의 사태를 접하며 돈과 권력이 인간을 얼마나 추악하고 비열하게 만드는지 보고 있습니다. 헛되고 헛된 세상것들이 결코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함을 다시금 각성하는 때입니다.

오늘 복음은 참 행복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얻을 수 있는지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산상설교에서 말하는 행복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요. 행복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실제로는 주저할 때가 많지요. 하느님께서 주시겠다는 행복은 세상에서 바보가 되고 고통을 겪고 죽지 않으면 얻을 수 없으니 쉬운 일이 아닌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5,3)고 하십니다. 여기서 '영'은 성령이나 인간의 지성이 아니라 인간의 중심, 더 나아가 그 인간 전체를 뜻합니다. 또한 영은 정체된 어떤 상태나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역동적인 측면을 함축합니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물욕에서 이탈하는 것을 넘어 하느님과 의로움을 추구하는 겸손한 사람(스바 2,3)을 말합니다. 영으로 가난함은 하느님을 향한 전인적인 존재 방식을 뜻합니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고 열린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살아갑니다.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갈망합니다. 주님이야말로 생명의 원천이요 그분 없이는 살 수 없고 삶의 의미가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며,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을 첫 자리에 두고 기쁨으로 여깁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며, 하느님의 얼굴을 보여주는 사랑의 행동을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 나라의 기쁜소식을 선포하는 것이기에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의 마음과 눈을 지니기에 언제나 자신이 아니라 자신 밖의 다른 이들이 행복하도록 집중하고 헌신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갈증을 알기에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먼저 선택하고 사랑으로 연대합니다. 행복 자체이신 하느님을 갈망하는 가난한 사람은 그 목마름으로 사랑이 결핍 속에 살아가는 이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지요.

영으로 가난함, 슬퍼함, 온유함, 의로움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 자비로움, 깨끗한 마음, 평화, 의로움 때문에 받는 박해는 하느님 통치의 전제이자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제자의 덕목이기도 합니다. 영으로 가난함은 다른 일곱 가지 덕목을 통해 드러나고 강화되기도 하지요. 주님 때문에 이런 것들을 받아들여 살아낼 때 참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하느님 때문에 가난하고 슬프고 박해 받는 삶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스럽고 실패한 인생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원한 행복을 주실 것입니다. 참 행복을 주시려고 세상의 어리석고 약한 것과 비천하고 천대받는 것을 선택하시고(1코린 1,27-28),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의로움과 겸손함을 찾으러(스바 2,3) 기쁘게 걸어가야겠습니다.

주님, 영으로 가난해져 세상이 찾는 헛된 행복과는 전혀 다른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참 행복을 찾아가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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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23년 1월 29일
  | 01.29
523 97.6%
참 행복한 성인들 - “찾으라, 회개하라, 행복하라”
선택, 훈련,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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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제 첫시집 ‘하늘과 산’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러니까 1997년 손수 제본하여 만든 것이니 26년전 작품입니다. 모두 제가 지금도 아끼는 시이고 그중 ‘하늘과 산’은 자주 인용했고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는 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불암산 기슭, 요셉 수도원에 정주하기 35년 동안 가장 많이, 하루에도 수없이 바라본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과 하늘입니다. 바로 하늘과 불암산의 관계를 주님과 나의 관계로 빗댄 시입니다. 정말 날로 주님과의 관계, 형제들과의 관계가 깊어졌으면 소원이겠습니다.

혼자서는 못삽니다. 혼자의 구원이 아니라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있습니다. 오늘은 연중 제4주일이자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한국천주교회는 2003년부터 매해 1월 마지막 주일을 해외 원조 주일로 정해 이날 특별헌금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세계 여러 나라들을 돕는데 쓰고 있습니다. 이 또한 더불어 삶의 사랑 실천입니다.

어제 오랜만에 9명의 소규모 젊은 남녀들의 피정팀에게 ‘명상기도’방법을 가르치고 실습도 했습니다. 모두가 신자인줄 알았는데 후에 알고보니 천주교, 개신교, 원불교등 다양한 구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강의로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명상기도 방법을 택하여 청했던 것 같습니다. 좌우간 이분들에게 강조한 것도 영성생활에서 선택과 훈련, 습관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참 좋은 선택을 하셨으니 아름다운 수도원에 피정을 온 것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좋은 선택 또한 은총입니다. 명상기도 참 좋은 선택입니다. 선택에 이어 한결같은 훈련입니다. 도대체 수행생활에서 훈련아닌 것이 없습니다. 명상기도를 부단한 훈련하여 습관화하십시오. 성격이 바뀌고 운명이 바뀝니다. 부정적 비관적 수동적 인생관에서 긍정적 낙관적 적극적 인생관으로 바뀝니다.”

요지의 내용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참행복입니다. 참행복 역시 은총에 이어 우리의 선택과 훈련, 습관에 달렸습니다. 세 구체적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찾으십시오.

무엇보다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주님과 나의 탐구는 함께 갑니다. 주님을 찾으며 주님과의 관계도 날로 깊어집니다. 이렇게 주님과의 관계가 우리 영적 삶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제1독서의 스바니야 예언자의 권고가 고맙습니다.

“주님을 찾아라.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아! 의로움을 찾아라. 겸손함을 찾아라. 그러면 주님의 분노의 날에, 너희가 화를 피할 수 있으리라.”

참으로 주님을 찾는 이들은 구체적으로 의로움을, 겸손함을 찾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주님을 찾는 이들은 의롭고 겸손합니다. 수도자를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라 정의합니다. 수도원은 하느님의 집이요, 수도자는 하느님을 찾는 하느님의 사람이라 합니다. 어찌 수도자뿐이겠습니까? 마음 깊이에서는 누구나 진리이신 하느님을 찾는 수도자입니다.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애송시 중 한연이 생각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이 고백에서처럼 하루 이틀이 아닌 죽을 때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하느님을 찾으며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사랑의 맑은 강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래야 방황하지 않습니다. 일일시호일, 늘 좋은 날에 늘 새로운 날입니다. 이래야 안주가 아닌 정주의 삶입니다. 주님을 찾는 일 역시 우선적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회개하십시오.

회개 또한 참 좋은 날마다의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이 살아계시기에 회개입니다. 하느님 거울에 날 들여다 보는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해 참나의 발견이요 제자리에서 제대로 제정신으로 살 수 있습니다. 회개에 따른 참 겸손입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이요 지혜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겸손한 고백은 그대로 회개의 열매입니다. 회개를 통한 이런 깨달음이 겸손이요 이런 겸손이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다음의 고백은 얼마나 겸손하며 삶의 진실을 직시하고 있는지요! 꼭 저를 두고 하는 말씀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역설의 진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신의 한 수는 이토록 오묘합니다. 굽은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듯이 참으로 보잘 것 없는 무명의 이들이 교회를, 수도원을, 세상을 지킵니다. 참으로 회개로 겸손한 이들만이 이렇게 일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셋째, 행복하십시오.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참행복의 비결을 보여주십니다. 죽을 때까지 끝없는 노력의 훈련을 요하는 결코 완성이 없는 미래로 활짝 열려 있는 수행의 참행복입니다. 바로 성인이 되는 길은 이 참행복의 길뿐입니다.

십계명은 너무 소극적입니다. 금령만 지키다 보며 거기서 끝나지 이웃과의 적극적 사랑의 관계는 맺을 수 없습니다. 모세의 한계입니다. 모세도 예수님의 이런 경지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세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새삼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모세를 격하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진상을 제대로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십계명을 지켜서는 좋은 신자가 될수는 있어도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신자. 자비로운 신자, 온전한 신자가 되기는 불가능합니다. 결코 참행복도 없고 성인도 될 수 없습니다. 이웃에 열려 있는 삶이 아니라 자기 안에 닫혀진 이기적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십계명을 전제로 하고 적극적 자기개방의 나눔과 사랑이 절대적이요, 바로 오늘 산상설교중 진복팔단 참행복이 의도하는 바입니다.

1.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2.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3.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4.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5.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6.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7.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8.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이런 삶자체가 참행복이니 바로 하느님이 직접적 배경이, 보상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 불가의 성철 큰 스님은 물론 종파를 초월하여 대영성가들이 공감하며 극찬한 참행복의 내용들입니다. 영원히 하느님의 나라로 열려 있는, 완성이 없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참행복입니다.

아무리 오르고 올라도 저 멀리 높이 있는 하늘처럼 느껴지는 참행복의 수행들입니다. 참으로 끝까지 한결같은 열정으로 참행복을 위해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이들이 성인입니다. 마지막 말씀이 우리의 분투의 노력에 불을 붙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자신의 성덕 점수가 어떻게 되는지 한번 계산해 보시기 바랍니다. 100점 만점에 20점은 기본으로 하고 8개 항목을 각자 10점 만점으로 계산해 보는 것입니다. 영원히 미완성의 참행복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 참행복의 절정에 하느님 곁에 계신 예수님이요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성인이 되는 유일한 참행복의 길이겠습니다.

참행복한 성인이 되고 싶습니까? 선택과 훈련, 그리고 습관화하는 분투의 노력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부단히 주님을 찾는, 부단히 회개하는, 부단히 참행복을 추구하는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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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신부
2023년 1월 29일
  |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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