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가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523 97.6%
[대전] 영에 충만 해 있는 가난한 자가 행복합니다.
조회수 | 2,317
작성일 | 05.01.28
구약에서 하느님께서 산 위에서 당신 율법을 주셨듯이, 이제 예수께서 당신의 법을 선물하십니다. 가해 연중 4주부터 9주까지(5장-7장) 같은 가르침이 전개됩니다. 행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행복은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축복입니다. 축복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이 행복의 충만한 상태로 드나게 합니다. 마태오의 행복론은 소외되고 거절당한 보통 사람들이 극렬한 전망과 희망을 바라보는 내용을 선언합니다. 곧 자신의 조건에서 위로와 도움만을 기다리면서 더 나은 조건과 전망에 기대어 있는 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행복은 십자가의 징표가 나타내고 있는 것에서 언급된 해석입니다. 행복한 자로 있는 것은 십자가를 지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영에 충만 해 있는 가난한 자가 행복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안에 신뢰를 두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슬퍼하는 자가 행복하다구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슬픔 때문입니다. 삶의 고통들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인내하는 불행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성실하게 슬퍼하는 죄 때문에, 평화로서 수락하는 희생, 구원적 슬픔 때문입니다. 주님의 행복 안에 슬퍼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위로가 확실함을 살아갑니다. 이는 위로에 대한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하느님의 축복 가득한 사랑의 약속입니다(4절). 큰 믿음과 신심 그리고 참여적 자세로 사람들과 하느님을 향해 모든 앙갚음을 포기하는 자가 온유한 자들입니다.

하느님의 정의, 그리스도의 정의. 목마른 자와 양육하는 자는 영원한 하느님의 지혜입니다(6절).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를 뜻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아들을 주십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자녀들도 모든 이에게 자비를 살아가야 합니다(7절).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마음의 깨끗함과 맑음은 비합리적인 것입니다.

인간의 중심인 마음이 깨끗하고 맑지 못한 것은 오늘날 정신과 의지문제라고 봅니다. 하느님을 깨닫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모든 것을 시작합니다. 마음의 맑음, 청정이 하느님을 봅니다. 그들은 하느님 사랑의 아들들입니다. 그분과 비슷하게 되어, 하느님을 볼 것입니다(1요한 3,1-2). 하느님을 보는 것은 죽음(출애 33,20)이었는데, 이제 하느님 안에 그분처럼 변화됩니다. 이내 하느님을 봅니다(8절).

오늘날 평화는 전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내적으로 평화를 사는, 평화의 인간, 평화의 제작자(전도 4,11), 다윗은 성전을 지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전쟁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사람,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평화는 높은데서 옵니다. 평화는 평화 안에서 씨가 심어진 하느님 정의의 열매입니다. 거기서 평화가 진실로 발견됩니다(야고 3,18). 하느님은 평화이십니다. 독생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 2,14). 평화의 사람들은 하느님의 아들로 있도록 신적 부르심을 기뻐합니다. 평화의 사람은 아무에게서도 버림받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9절).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의 행복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자비입니다. 위험에 처한 당신 백성에게 전쟁, 인간적 계약을 제어하는(이사 8,11-13) 예레미야 예언자야 말로 하느님의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전형적 인물입니다. 고통받는 종은 박해자 앞에서 침묵합니다(이사 53,7). 이 모든 중심에는 구원적 십자가와 함께 하시는 주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박해받는 자들의 행복은 신약의 전통에서 반복됩니다. 그들은 하늘나라를 차지하게 됩니다(10절).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왕국을 차지합니다. 그분이 고통으로 슬퍼하시고 하느님의 위로와 성령을 받습니다. 그분이 모순하고 조국을 차지합니다. 배고픈 자가 그리스도이시고 모든 의로움에 목말랐으며 신적으로 지혜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그분이 자비로우시며, 인간에게 주는 자비를 아버지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분이 마음의 청정을 간직하시며 영원히 하느님을 뵈옵니다. 그분이 평화이고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박해, 저주를 이겨내고, 당신 때문에 중상모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기쁨에 남습니다. 그분만이 유일한 행복의 모델입니다. 우리에게 가능성을 보여주시고 우리 아버지의 큰  마음(대자대비)에 따라 복된 자로 현양되어 있습니다.

--------------------------------------------------------------

대전교구 곽승룡 신부
523 97.6%
하늘에서 받을 상

지난 한 해 가톨릭다운 바람을 일으킨 사건 중에 하나가 수단에서 선교활동을 이루셨던 故이태석신부님의 “울지마톤즈”였다. 해외선교를 통하여 그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보여주신 이 사건은 앞으로 우리 교회안에서 해외선교와 해외원조를 함께 고민해야함을 일깨워준 사건이었다. 그러한 해외원조는 단순히 물질적 측면을 뛰어넘어 문화적이고 영적인 측면까지도 끌어안아야하는 사랑이다. 때문에 해외원조주일인 오늘은 단순히 나눔의 의미를 뛰어넘어 그런 사랑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시간이기도하다.

우리 대전교구도 해외에 사제를 파견하여 선교활동을 통한 해외원조를 실천하고 있다. 몽골은 물론 대만 에콰도르 칠레 이제는 가톨릭국가인 프랑스에 까지 사제를 파견하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 대전교구가 실천 할 수 있는 감사의 마음일 것이다. 나아가 대전교구는 지난 한 해 자연재해를 겪었던 많은 나라 아이티 칠레 대만 중국 등에 신자들의 마음을 전달하였으며 교구가 지속적으로 해외원조를 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위하여 해외원조계좌를 상시적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러한 해외원조의 상시계좌 덕택에 많은 신앙인들이 한번으로 끝나는 해외원조의 개념이 아니라 지속적인 후원으로 나눔과 감사의 마음을 실천하고 있다. 해외원조의 이 마음은 분명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신앙의 결실이며 교회다운 신앙고백이 될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인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교회를 세워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하셨다. 그것은 영적 물적 어려움 속에서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지 할 수 있는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그 가난한 사람들이 지금도 해외의 여기저기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하느님께 의지하고자 하느님께 울부짖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그 애절한 기도의 소리에 응답하시고자 우리 신앙인들의 마음과 손길을 필요로하고 계신다. 하느님께 부르짖는 그 사람들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이 해외원조주일에 우리 안에 숨 쉬고 있는 뜨거운 사랑을 증거 해야 할 것 이다.

해외원조주일인 오늘 우리 신앙인들이 그렇게 하느님 사랑의 전달자가 되었으면 한다. 그렇게 하느님 사랑의 전달자가 되어 갈 때 오늘 해외원조주일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클 수밖에 없는 날이 될 것이며 그로써 기쁨과 즐거움의 축제가 되리라 믿어 고백한다.

박진용 F. 하비에르 신부
  | 01.29
523 97.6%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공산주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입니다. 종교에 대한 이런 오해는, 종교가 죽음 후에나 누리는 천당이라는 환상 속의 행복을 설정해 놓고, 사람들을 달래고 마취시켜서 착취 계급에 순종하도록 한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옵니다.

그러나 산상 설교의 참 행복은 오히려 현실의 역동성을 드러내는 것이지, 미래에 주어질 이런 몽상같은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가난하고 슬프게 살면 나중에 하늘 나라에서 행복해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현실에서 가난한 마음, 빈 마음이 되었을 때 누리는 하늘 나라의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슬픔의 밑바닥에서 들리는 ‘하느님의 위로’가 있고, 우리의 온유함 안에, 의로움과 자비로움, 깨끗한 마음 안에 그리고 평화를 일구어 가는 우리의 삶 안에, 이미 세상이 말하는 행복과 다른, ‘참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이런 참된 행복을 맛보고 살지 못한다면, 죽음 이후의 하느님 나라에서 주어질 기쁨은, 내가 누릴 수 없는 ‘낯선 기쁨’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한 번도 하느님 나라를 맛보지 못한다면, 미래에 주어질 하느님 나라도 결코 ‘나의 나라’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세상에 살면서 적어도 단 한 가지라도 참행복을 맛보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여덟 가지 행복 가운데 우리 자신은 어떤 행복을 맛보며 살고 있는지요? 이상은 매일미사 책의 오늘의 묵상글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산에서 선포하신 진복팔단, 여덟 가지 참 행복의 길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행복의 잣대를 벗어나 새로운 눈으로 보고 들으며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자신이 잘나고 못나고, 재산이 많고 적음을 떠나 세상 어떤 것에도 애착을 갖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 자신을 비운 사람입니다. 아멘.

방윤석 신부
  | 01.30
523 97.6%
우리는 같은 배를 같은 곳으로 가고 있다.

----------------------

1990년대부터 국경을 넘어 세계 전체의 상호 의존성이 높아지면서 지구촌 전체가 단일한 체계로 통합되어 가는 현상. 즉, ‘세계화’라는 개념이 구체화되었습니다. 단어의 의미만 놓고 보면, 세계의 모든 나라가 서로를 신뢰하고 의존하는 가운데 함께 성장해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 의미를 되돌아보면 그렇지 않음을 많은 이가 이야기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같은 의미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계화되면서 우리는 서로 이웃이 되지만 형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개인의 이익만 북돋울 뿐 삶의 공동체 차원은 약화시켜 더욱 고독합니다. 세계화의 진전은 대개 스스로를 보호하는 가장 힘센 자들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반면, 가장 약하고 가난한 지역의 정체성을 약화시켜 더욱 힘없고 의존적으로 만들려고 합니다”(모든 형제들, 12항).

2020년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코로나19의 영향과 우크라이나-러시아 간의 전쟁으로 ‘세계화’에 대한 의미는 더욱 퇴색되어 가는 듯합니다. 전 세계를 뒤흔드는 혼란은 주위를 둘러보고 함께 헤쳐나가기보다 자기 민족부터, 자기 나라부터라는 민족주의와 국가 이기주의의 형태를 더욱 강하게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에 나라 간의 상호 의존성이 깨지게 되었고, 약소국들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라들은 더욱 비참한 생활을 해 나가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흔히 말하는 ‘분배의 정의’, ‘형평성’ 등과 같은 말이 그 누군가에게는 그림의 떡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시대의 사회적 불평등 속에서도 교회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달 교황님께서는 성탄 메시지를 통해 전쟁의 아픔뿐만 아니라,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는 가정, 난민, 노인, 고아, 수감자와 같은 전 세계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이들을 기억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에 깊이 감동하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자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해외 원조 주일’을 맞이한 오늘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지의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을 위한 우리의 정성을 뜻깊게 모아야 하겠습니다. 비록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지만, 그 모두가 주님의 사랑을 받아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이들임을 기억하면서 말이죠.

“인류는 각자의 배를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배를 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모든 형제들 32항).

----------------

대전교구 권지훈 베드로 신부
2023년 1월 29일 주보
  | 01.28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823   사순 제5주일 성경 말씀 해설  [2] 8
822   [수도회] 눈물 흘리시는 하느님  [5] 2740
821   [수원] “000야, 이제 그만 혼자 가두어 있지 말고 이리 나오너라.  [6] 2787
820   [인천] 부활.....누구와 함께 있는 것?  [7] 2736
819   [서울]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  [9] 2828
818   [마산] 나는 부활이며 생명이다  [6] 3017
817   [부산] 라자로의 부활사건  [8] 3289
816   [안동] 생명의 삶  [4] 2438
815   [대구] "너는 나를 믿느냐?"  [8] 4792
814   [청주]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  [1] 354
813   [대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5] 2835
812   [제주] “돌을 치워라”  [1] 229
811   [전주]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자매의 믿음  [3] 3108
810   [광주] '죽은 자여 일어나라'  [2] 248
809   [군종] 라자로의 소생  [2] 240
808   [의정부] 신성과 인성의 감사로운 결합  [3] 2781
807   [원주] "주님이 계셨더라면…"  [2] 2589
806   [춘천] 우리 안에 사랑의 영으로 부활을  [2] 288
805   (자) 사순 제5주일 독서와 복음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  [6] 2594
804   사순 제4주일 성경 말씀 해설  [7] 99
803   [수도회] 무거운 십자가는 은총의 도구로 사용된다.  [9] 2847
802   [수원] 주님의 마음? 내 마음?  [9] 2432
801   [인천] 눈이 멀었던 사람의 신앙고백  [9] 2739
800   [서울] 세 가지 발견  [12] 2751
799   [마산] 나날이 눈 떠가는 삶  [6] 2677
798   [부산] 눈 뜬 것도 죄가 되는가?  [9] 2699
797   [안동] 제대로 본다는 것은  [4] 2534
796   [대구] 영적인 눈을 뜬다면  [9] 3542
795   [청주] 맑은 눈을 지니길 희망  [1] 340
794   [대전] 소라도 잡아야 하는 거 아냐?  [6] 2441
793   [전주] 어둠 속에 머무르려는  [2] 2293
792   [광주/제주]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기  [2] 327
791   [군종] 얼굴을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3] 2654
790   [의정부] 본다는 것의 의미  [2] 331
789   [원주] 동상이몽(同床異夢)  [2] 339
788   [춘천] 마음의 눈으로  [5] 2838
787   (자) 사순 제4주일 독서와 복음 (태경소경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6] 2281
786   사순 제3주일 성경 말씀 해설  [2] 163
785   [수도회] 우리 평생의 갈증을 채워주실 분  [10] 2505
784   [수원] “생리적 갈증과 신앙적 해갈”  [10] 2873
1 [2][3][4][5][6][7][8][9][10]..[21]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3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