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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영(靈)으로 가난한 사람들
조회수 | 2,469
작성일 | 05.01.28
예수께서 갈릴래아 민초들을 향하여 연속적으로 행복을 선언하신 말씀이 산상설교(혹은 평지설교)에 딱 한번 전해 옵니다.(마태 5,3-12 = 루가 6,20ㄴ-23) 본디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민초들이 지금은 비록 가난하고 굶주리고 슬프지만 가까운 장래에 하느님 나라가 오면 그 나라를 차지하고 배부르게 되며 환히 웃게 될 것이므로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현실은 비참하지만 하늘나라가 오면, 곧 밝은 미래가 다가오면 그들의 불행이 행복으로 바뀌겠기에 복되다는 희망의 약속입니다. 복음서 작가 마태오는 예수님의 행복선언을 자신이 소속한 공동체에 전하면서 '마음이', '의로움에' 라는 수식어를 사용하여 윤리적으로 각색했습니다. 그냥 가난하고 굶주리고 깨끗한 사람들이 복되다고 하면 혹시 백수건달이 행복하다고 사람들이 오해할세라 "마음이 가난한 이들", "의로움에 굶주린 이들", "마음이 깨끗한 이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이들"이 복되다고 고쳐 썼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서에 실린 아홉 가지 행복선언 중에서 첫번째인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이 늘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우선 공동번역에서는 첫번째 행복선언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틀린 번역입니다. 그리스어 원문에는 "마음이"가 아니라 "영(靈)으로" 입니다. 여기서 "영"은 "하느님의 영"이 아니라 "인간의 영"을 뜻합니다. '영으로'라는 말은 다른 조건은 상관하지 말고 오직 '영'이라는 관점에서만 어떤 사람을 평가하자는 표현을 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돈이 많으냐 적으냐, 집안이 유력하냐 아니냐 하는 따위는 상관하지 말고 오직 '영'이라는 관점에서만 보자는 말입니다. 그리고 공동번역에는 "행복하다"가 맨 뒤에 나오는데 그리스어 원문에는 맨 앞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를 종합하여 3절을 "복되도다, 오직 영이라는 관점에서만 볼 때 가난한 사람들! 왜냐하면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그럼, "영 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가난한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가? 성서에 '가난'과 '영'이라는 낱말이 자주 나오지만 두 낱말이 함께 붙어 사용된 경우는 이 곳 뿐이기 때문에 그 뜻을 분명하게 밝히기가 쉽지 않습니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누가 보아도 가정생활, 사회생활, 교회생활에 있어서 모범적이지만 자신은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 항상 노력하는 겸손한 사람을 뜻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여러 면에서 성실하지 못한데 자신은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으쓱거리며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교회는 결코 완전하고 거룩한 단체만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성과 속이 뒤범벅이 되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하느님 나라)가 끊임없이 성장하는 이유는 아직도 교회 안에는 영으로 가난한 신앙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잘난 사람, 유능한 사람들 보다는 묵묵히 복음을 익히고 실천하는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인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교회(하느님 나라)는 이런 이들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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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유충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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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부자 되세요"

어느 회사에서 텔레비전 광고에 예쁘장한 연예인을 등장시켜 "여러분, 부자 되세요"하고 외치는 카피로 히트를 친 적이 있습니다. 이후 언젠가부터 "부자 되세요"란 말이 최고의 덕담이 되었습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이 부자 되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쓰여지는 지금 시대에 오늘 복음 말씀은 현실과 동떨어지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실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부자가 되어야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여덟가지 행복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이 여덟 가지의 행복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가난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슬퍼하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 등 그들 모두는 그 자체로 가난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복음 말씀을 전할 때는 지금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참으로 가난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랫동안 외세의 침략과 억압 속에서 착취를 당했으며 마땅하게 일할 자리도 없었고 또 일을 해도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삶에 대해 희망이 없었습니다. 있다면, 오로지 하느님의 손길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하는 참된 행복이 시작됩니다. 주님만을 의지해야만 하는 상태, 이것이 바로 가난이고, 이것이 바로 행복인 것입니다. 결국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한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텅 비어있는 마음을 가지고, 전적으로 하느님께 매달리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이가 바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부자 되십시오. 다만 부자를 향해가는 그 길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데 불편함을 준다고 생각된다면, 차라리 가난한 사람이 되십시오. 형제 자매 여러분, 가난한 사람으로 살아가십시오. 다만 가난 때문에 하느님을 포기해서라고 돈을 모아야겠다고 생각된다면, 차라리 부유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우리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어떤 처지에서든지 가난한 마음,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 앞에 나서는 것 뿐입니다. 내가 부자이든 아니든 내 마음이 하느님을 향해 있다면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양명모 신부
  |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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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복음 5장 1-12ㄴ절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훌륭한 표양

2005년 12월, 소록도의 마가렛 수녀님과 마리안나 수녀님이 40여 년의 생활을 접고 한 통의 편지만 남긴 채 고국 오스트리아로 떠났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저에게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한편은 사랑의 편지이지만 한편은 헤어지는 섭섭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떠나는 것에 대해 설명을 충분히 한다고 해도 헤어지는 아픔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겁니다. 각 사람에게 직접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되겠지만 이 편지로 대신합니다”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읽었을 때 두 수녀님들의 아름다운 삶을 보는 듯했습니다.

마가렛 수녀님은 1959년 12월에, 마리안나 수녀님은 1962년 2월에 한국에 오셔서 가난하고 소외된 나병환자들의 벗으로 봉사하며 살다가 노년의 삶이 병자들과 주민들에게 짐이 될까 남모르게 떠나셨던 것입니다.

문득 요한 금구 성인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훌륭한 설교는 감동을 주지만 훌륭한 표양은 사람의 삶을 변화시킨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여러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겠지만 요약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박해를 받던 예언자들을 본받으라는 분부와 함께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할 줄 알고, 온유하며, 의롭고 자비로우면서 끝까지 박해를 감수하며 의로움을 지키는 사람이 되라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가난하게 살다가 훌쩍 떠난 두 분의 수녀님을 생각하며 사제서품 때 상본에 새겼던 오늘 말씀을 다시 가슴에 새겨봅니다.

원주교구 정인준 신부
  |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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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어떤 사람이 환하게 밝은 가로등 밑에서 무언가 열심히 찾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행인이 궁금해 무얼 하느냐고 묻자 "잃어버린 시계를 찾는다"고 말했습니다. "시계를 어디에서 잃었는지…"하고 다시 묻자 "저쪽 어둡고 캄캄한 가시덤불 숲에서 잃어버렸다"고 대답했습니다.

행인이 "이 바보 같은 사람아, 잃어버린 곳에서 찾아야지 왜 엉뚱한 곳에서는 찾느냐"고 핀잔을 주자, 시계를 찾던 그 사람은 "이 바보 같은 사람아, 밝고 편한 가로등 밑에서도 못 찾는 시계를 어둡고 불편한 곳에서 어떻게 찾느냐?"고 되레 큰소리를 치더랍니다.

누가 바보입니까? 시계를 잃어버린 데서 찾으라는 행인이 바보입니까? 어둡고 불편한 곳이 싫다고 밝고 편한 가로등 밑에서 찾는 사람이 바보입니까?
 
어떤 사람은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합니다. 그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안정에서 행복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물질이 풍부하고 사회적으로 안정되면 밝고 편하니까 그 곳에 행복이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어둡고 불편하더라도 시계를 잃어버린 곳에서 시계를 찾아야 하는 것처럼 찾기 힘들더라도 행복이 있던 곳에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행복이 없는 곳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토끼를 잡으려면 산으로 가야 하고 물고기를 잡으려면 물로 가야 합니다. 산에서 절대로 물고기를 잡을 수 없고, 물에서는 절대로 산토끼를 잡을 수 없습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이 있는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는 줄 알고 악착같이 재물을 모았지만 재물에는 행복이 없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지식이나 권력이나 명예에 행복이 있는 줄 알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들을 차지했지만 거기에도 행복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의 건강이나 외모에 행복이 있는 줄 알고 외모와 건강에 온 힘을 다 기울여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를 만들어냈지만 거기에도 역시 행복은 있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행복이 있지 않는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참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참 행복은 어떤 것인지 8가지나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8가지 참된 행복 중에서 제일 앞에 나오는 것이 바로 가난에서 오는 행복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너도 나도 부자가 돼야 행복한 줄 알고 부자가 되려고 난리인데 예수님은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가난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이 말씀은 하느님이신 예수님 말씀이므로 100% 불변의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카 12,16-21)에서도 재산에만 의지하면서 끝없이 욕심을 부리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삶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가진 재물이 많아야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가진 것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고, 아니 가진 것이 없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오늘 복음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산다면 행복할 수 있고,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놓여도 하느님과 함께 산다면 행복할 수 있음을 복음에서 가르쳐 주십니다.

언젠가 영국 「런던 타임즈」가 영국인들을 대상으로 가장 행복한 사람을 조사했는데 상위에 뽑힌 네 부류 사람은 뜻밖에도 소박한 서민들이었답니다. 제일 행복한 사람은 바닷가에서 멋진 모래성을 완성한 어린이고, 둘째가 아기를 목욕시킨 후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는 어머니, 셋째는 멋진 공예품을 완성하고 손을 터는 예술가, 넷째가 죽어가는 생명을 수술로 살려낸 의사였답니다. 행복한 사람들 중에 재벌이나 귀족은 거의 없었답니다. 행복은 물질이나 부귀영화에 있지 않음이 또 한 번 입증된 것입니다.

적게 갖고 있으면서 적게 바라는 사람이 많이 갖고 있으면서 더 많이 갖기를 바라는 사람보다 행복합니다. 그래서 신부와 수녀들은 행복합니다. 가진 것도 적고 바라는 것도 적기 때문입니다. 콜튼이라는 사람이 이야기하듯이 진정한 만족감은 얼마나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행복도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님을 복음에서 배웁니다.

행복하기 위해 디오게네스에게는 목욕통 하나로 충분했지만 알렉산더 대왕에게는 온 세상도 너무 좁고 부족했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박용석 신부
  |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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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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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오로는 신앙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6-27)

그래서 하느님께서 세상의 강하고 지혜롭다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약한 것을 선택하셨다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까지도 선택하셨다는 말씀도 전합니다.

스비니야 예언서 저자도 종말의 날을 준비하며 사는 의인들에게 ‘겸손함을 찾아라.’라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백성들이 악을 피하게 하시려고 그들 가운데 ‘가난하고 가련한 사람들을 남길 것이다.’라는 말씀을 또한 전하는 것입니다.

설날에 우리는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인사합니다. 동양인에게 복(福)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네이버 국어사전을 ‘복’의 의미를 찾아보면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또는 거기서 얻는 행복.’ 또는 ‘배당되는 몫이 많은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 복에서 꼽는 것을 ‘무병장수(無病長壽)’를 우선으로 꼽습니다. 그리고 재산이 많아 부유하고 덕 쌓은 것을 좋아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대접을 받으며 제 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을 또한 복으로 꼽는 것입니다. 그 복은 남의 입장보다는 내 자신이 초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참된 행복의 조건으로 몇 가지를 들어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온유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 ‘모욕을 겪는 사람.’ ‘온갖 사악한 말로 모함을 당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행복과 반대되는 이치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본다면 행복은커녕, 슬픔과 고통 한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행복이 될 수 있으면 축복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일까요? 그런데 이 축복의 의미를 더 자세히 보면 이 행복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예수님 자신이심을 알게 됩니다. 결국 주님의 삶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11-12절) 신앙인은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히브리 서간의 저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코린 1.30-31)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태 11,28)고 하시며 당신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온유와 겸손이 사실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혼란과 교만에 지친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를 삶의 지혜로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삶에서 사도 바오로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삶의 기쁨’이라는 삶의 지혜를 우리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겸손이라는 그릇에 덕이 우러나는 법이지요.

중국의 노자(老子)는 물을 통해 만물과 인간의 겸손을 설명합니다.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다. 그러나 물은 단단하고 강한 것을 뚫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서 강이 되고 바다로 흐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물은 만물을 편리하지만 그들과 다투지 않는다.’라고 했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라는 지혜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겸손은 스스로 낮은 데에 머물고 남을 자기보다 더 올려주는 데에 있다고 주님께서도 설명하셨습니다.

맹자(孟子)는 이 물의 지속성을 더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은 낮은 데로 흐르는데 웅덩이에 잠시 머물기는 해도 ‘밤낮 흐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물은 끊임없이 아래로, 약함으로 강한 상대를 감싸고 돌아가는 양보를 통해서 바위도 깎아 세우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순명하신 성자께서는 그 어떤 것보다 가난하고 겸손하신 모습이셨습니다. 십자가 보다 못나고 가난하고 또 약한 모습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늘 ‘진복팔단(眞福八段)’ 말씀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실천하고 완성하시며 세상 구원의 진리를 우리에게 남기십니다. 세상의 지혜와 권세는 주님의 가르침을 어리석은 것으로 보려하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가르침이 바로 한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진리임을 깨닫고 또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거창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일상생활의 한 순간에서도 또 사소한 것을 통해서 실천할 수 있게 우리를 잡아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이 세상을 이미 천국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과 기쁨을 미리 맛보며 살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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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신부
2023년 1월 29일
  |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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