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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진복팔단
조회수 | 2,430
작성일 | 05.01.28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여덟 가지의 참 행복이라 불리는 행복선언에 대해 듣습니다. 곧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이 바로 그것입니다(마태 5, 3-10).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복음에서 선포된 참 행복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찾고 얻고자 하는 행복과는 무척 차이가 난다는 데 있습니다. 과연 복음에서 선포된 행복이 이제껏 내가 얻고자했던 행복과 동일한 것인가? 참으로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행복선언은 분명 우리가 추구하던 행복의 가치들이 근본적으로 방향 전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 가치 전환의 출발점에는 “나만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를 위한” 삶을 살라는 요청이 내재되어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내용을 루가 복음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가 12, 16-21)에서도 봅니다. 복음에 나오는 부자를 어리석다고 하는 이유는 그가 쌓은 부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새로 지은 창고에 자기가 모은 부를 쌓아두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영혼까지 가두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비유의 핵심은 이 질문에 있습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루가 12,20). 이 질문은 ‘어차피 가져가지 못할 부라면 그렇게 애써 모을 필요가 있는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토록 원했던 부가 과연 참 행복을 주는지’에 관한 질문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마지막 구절에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루가 12,21). 정확히 번역하면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도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는 뜻입니다. 곧 이 부자의 문제는 그가 애써 모은 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만을 위해 부를 축적하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만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를 위한” 삶을 살기위한 방법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행복선언에서 그것을 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이란 성령의 인도를 통해 세속적 가치나 불의한 사회 구조적 체제를 하느님이 바라시는 진리로 변화시키기 위해 모든 고통을 감수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이 사람들은 세상과 인간에 대해 증오나 분노를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슬퍼하고, 모욕과 멸시를 받을 때에도 온유한 마음으로, 그리고 판단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 속에서 교만하거나 우쭐대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것으로 채워진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느님과 인간을 화해시킨 예수 그리스도처럼 모든 이들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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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홍승모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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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이상하게 생각될 만큼 저녁에 모임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모임이 그냥 단순한 모임이면 괜찮겠지만, 식사도 하고 술도 한 두 잔 하는 모임이라 늘 부담감이 있었지요. 왜냐하면 이렇게 늦게까지 술과 음식을 먹다보니, 허리 사이즈가 늘어나면서 체중도 많이 불게 되거든요. 따라서 이제는 이러한 저녁 모임을 좀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저녁, 모임이 오랜만에 없었습니다. 저는 책도 보고 글도 좀 쓰면서 나름대로 시간을 활용하려고 애썼지요. 그런데 갑자기 시장기를 느끼게 됩니다. 시계를 보니, 평소 술자리를 갖는 시간이었어요. 꾹 참았지요. 조금만 참으면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의 소망일뿐이었습니다. 시장기는 계속해서 저를 괴롭혔고, 무엇인가를 이 시간에 먹느니 그냥 자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이제 또 하나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평소에는 머리만 대면 잠이 왔는데, 배가 고파서 그럴까요? 잠이 좀처럼 오지 않습니다. 자고 싶은데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 정말로 괴롭더군요. 간신히 잠이 들었고, 새벽에 다시 일어났습니다. 어젯밤에 느꼈던 시장기는 완전히 사라졌고 기분도 상쾌했습니다.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와 명예에? 아닙니다. 부와 명예에 있을 수도 있지만, 꼭 여기에만 있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제발 나에게는 다가오지 않았으면 하는 고통과 근심과 시련에는 행복이 없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고통과 근심과 시련에는 행복이 없을 것 같지만, 여기에도 행복은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배가 좌초되어 단 한 사람이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파도에 밀려 사람이 살지 않는 섬에 도착했지요. 그는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날마다 바다를 바라보며 지나가는 배가 없는지 살폈지요. 그러나 도움을 받을 만한 것이 없자, 그는 그곳에 임시도 작은 오두막을 짓고는 좌초된 배에 남아 있는 물건들을 오두막에 옮겨 놓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먹을 것을 찾으러 섬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먹을 것을 구한 뒤, 오두막으로 돌아와 보니 불이 난 것이 아니겠어요. 너무나 큰 불이라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끌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절망감에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오두막은 금세 재가 되었고, 그는 당장 그 날 밤에 잘 곳도 없었지요. 그런데 잠시 뒤, 배 한 척이 섬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며 배에 다가가 선장에게 자신이 섬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알고 찾으러 왔느냐고 기뻐하며 물었습니다. 이에 선장은 이렇게 답했지요.

“당신 낸 연기를 보고 찾아왔지요.”

불행이라고 느끼는 순간 역시도 행복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한 행복의 조건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 등등 오히려 인간적으로 불행해 보이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이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이지요.

행복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이의 소원입니다. 그런데 이 소원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단지 너무 큰 것만을 바라는 우리의 욕심이 그 행복을 보지 못하게 할 뿐입니다.

조명연 신부
  |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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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너, 행복하여라.”

설 이후에 맞는 첫 주일입니다. 우리에게 또 다른 한 해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하느님 안에서, 이 한 해가 작년과는 다른 특별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너무나 유명해서 익히 잘 알고 계신 산상설교의 시작 부분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힘듦과 수고로움,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행복입니다. 그렇지만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물론 쉽지 않지만, 그리고 보이지도 않지만, 그래도 우리가 노력하면 그것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행복’을 글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의 움직임을 통해서 우리 삶 안에서 ‘행복함’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라는 희망과 용기의 말씀으로 설교를 시작하시며, 세상의 방식과는 다른 그리스도인의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과연 그러한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오늘 우리가 들었던 말씀 안에서 받아들여야 할 행복은 보통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름을 알게 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평화와 행복이라는 것은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우리는 반대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찾는가?”

그동안 행복의 기준이었던, 아니 세상 사람들이 쫓아 살았던 명예, 출세, 부(富)와 같은 맹목적이고도 일차적인 것들은 쉽게 그리고 이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 안에는 참된 가치를 찾아보기 힘들고, 또한 무엇인가를 채우려고 했던 모습 안에서 그것을 만족하지 못할 때 오는 괴리감은 우리를 희망에서 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한 사람이란, 이미 인생에서 오는 것들에서의 행복보다는, 우리의 인생과 경험을 통해서 무엇인가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올 한해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들과, 내가 바라는 행복상(幸福像)을. 그리고 우리는 어디서부터 행복을 바라고 있는가를. 지난 한 해 우리 모두의 행복에 관해서 생각해볼 때, 자신 있게 “네”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더 가슴 깊게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기에 여덟 번이나 나오는 “행복하여라.”라는 이 짧은 말에는 예수님의 진심과 우리의 행복을 바라는 예수님의 사랑이 더욱 느껴집니다. 우리의 행복이 곧 예수님의 기쁨이자,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시편 37,4).

▦ 인천교구 최지훈 루치오 신부 : 2017년 1월 29일
  |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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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으로 생겨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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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요즘 살아가면서 어렵지 않은 분은 없을 겁니다. 몇 년 전에 비해 물가가 더욱 상승하여 같은 양의 생필품을 사더라도 돈이 더 많이 들고, 식당에서 식사할 때 지갑이 과거보다 더 빠르게 얇아지는 것을 느끼셨던 분도 계실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회 현상을 두고 개인마다 느껴지는 그 차이는 있겠지만, 아무리 절약해도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 조금 여유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일은 오늘날 쉬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여유로운 삶을 바라는 분들은 삶이 넉넉하지 않더라도 먹고 살아가는 데 크게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는 분들은 과거에 비해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증가의 원인은 개인주의를 비롯하여 바이러스, 전쟁, 물가 상승 등이 있겠지만, 이러한 현상에 영향을 받아 굳게 닫아버린 우리의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를 살펴보면서, 가난한 이들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우리 주변 가까운 곳에서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분들부터, 직접은 아니어도 여러 미디어를 통해 해외에서 어려움을 호소하는 분들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분들을 보실 때마다,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드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어떤 방법으로 도와드리는 것이 좋은 방법인지를 고민하다가 그 기회를 놓치시는 분들도 계신 것 같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 속에서 다른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 자체를 어려워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분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나만 어렵다는 생각이 세상을 점점 어렵게 만들고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어떤 분은 이런 생각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나눈다고 해서 그 많은 이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겠는가?’ 물론 한 사람의 노력은 미비할지라도 하느님 안에서 가난한 이들을 소외하지 않고 우리가 가진 것을 조금씩 나눈다면 분명 많은 이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사랑을 받은 분들이 그저 받은 것에서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없는 가운데서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이며, 이러한 선한 마음이 점차 많은 이들에게 퍼져 나갈 것입니다. 누군가와 자신의 것을 나누는 일은 많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내 소유가 사라지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사라지는 것은 전부 보이는 것뿐이며, 그곳에 남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큰 다리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시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십니다. 그 손길은 바로 우리 자신이며, 우리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오늘은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전 세계의 어려운 분들을 위해 우리 각자가 어려운 가운데 나눌 수 있는 마음을 지니셨으면 좋겠고, 더 나아가 오늘 말씀을 다시금 되새기며, 그동안 누군가와 내 것을 나누지 못했던 시간이 있었다면, 그 시간만큼 앞으로의 시간을 조금씩 나눌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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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신현규 그레고리오 마카르 신부
2023년 1월 29일 주보
  |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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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저는 전혀 하지 못하는 것이 꽤 많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저이지만 스키도 또 골프도 이제까지 해 본 적이 없어서 전혀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을 부러워할까요? 굳이 하고 싶은 마음이 없기에 부러움도 없고, 못한다고 해서 부끄럽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전혀 하지 못하지만, 꼭 해 보고 싶은 것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토바이 타는 것입니다.

특히 쿠바 혁명가인 체 게바라가 젊은 날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 대륙을 여행했었다는 글을 읽으며 나도 한번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만 가지고 있었지, 오토바이 위에는 단 한 번도 올라가 본 적도 없습니다.

전에 살았던 강화도에서는 종종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의 행렬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을 보며 어렸을 때의 소망이 떠오르면서 부럽기도 하면서 또 그들이 너무나 멋져 보였습니다. 하지만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그들과 나란히 신호대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실망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차림새였습니다. 오토바이 타는 한 사람을 볼 때는 멋있었는데, 똑같은 차림새에 개성이 전혀 보이지 않아 실망한 것이지요.

남만큼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남을 쫓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멋져 보이지 않습니다. 그보다 자기 개성을 드러내며 자기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이 훨씬 더 멋져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를 모두 다르게 창조하신 하느님 뜻에 어떤 삶이 맞을지를 묵상해 보십시오. 어렵고 힘들어도 나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남들과 비교하면서 그들처럼 사는 삶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들만큼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삶 역시 옳지 않습니다. 자기 고유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의 삶,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행복 선언’을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굶주리는 사람,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행복해 보이지 않지만, 주님만을 바라보며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과 함께하며 자기만의 삶을 살고 있기에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들만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하십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과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7 참조). 그렇다면 우리 역시 세상의 관점이 아닌 주님의 관점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은 해외 원조 주일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향한 관심을 기울이는 날입니다. 자기만을 생각하는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 가난한 이들과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우리가 될 것을 다짐하고 또 할 수 있는 것을 실천하는 날입니다. 과연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다시금 묵상하면서 사랑하며 사는 나만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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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2023년 1월 29일
  |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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