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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가난, 왜 복인가
조회수 | 2,304
작성일 | 05.01.29
복이란 무엇입니까. 전직 두 대통령(전두환, 노태우)의 부정 축 재와 구속 사건을 보면서 부귀와 권세, 그리고 세상의 영화라는 것 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국민 모두에게 깨우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그 복이라는 것이 세월만 지나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모릅니다.

성서가 말하는 복이란, 가난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가난 그 자체는 분명히 악입니다. 그리고 그 가난을 하느님이 원하시지도 않 습니다. 그래도 성서는 그들이야말로 바로 하늘(마태6,19∼21참조) 이요, 또한 그리스도 자신(마태25,31∼46참조)임을 천명합니다. 왜 냐하면 그들이야말로 하느님을 차지하는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기댈 것이 많고 가진 힘이 커도 붙잡을 것이 많게 됩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또 많이 배운 대로 자기 지혜에 의 지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있는 자들과 높은 자들, 그리고 지식이 많 은 자들은 붙잡고 기댈 수 있는 세속 사정 때문에 하느님이 잘 안 보입니다. 잘 안 보이니까 매달리지도 않고 찾지도 않으며 붙잡지도 않습니다. 거기서 불행이 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여덟 가지 행복에 대한 말씀을 하셨 는데 이 여덟 가지의 행복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가난한 사람이 라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슬퍼하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 등 그들 모두는 그 자체로 가난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헬라어에 '가난'이라는 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Penes' (페네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노동을 해야 먹을 수 있는 가난을 말합니다. 그러나 극빈자는 아니며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자들을 말 합니다. 그러니까 끼니 걱정은 없습니다.
다음에는 'Ptochos'(프토코스)가 있는데, 이것은 절대적인 극빈 을 말합니다. 사흘에 한 끼 먹기도 어려운 자들입니다. 거지 라자로 (루가16,19∼31참조)처럼 누가 돌봐 줄 이도 없고 그렇다고 제 손 으로 벌어 먹지도 못하는 극심한 가난을 말합니다. 이런 가난이 바 로 프토코스인데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은 바로 이 프토코스를 말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참으로 가난했습니다. 오랫동안 외세의 침 략과 억압 속에서 착취를 당했으며 마땅하게 일할 자리도 없었고 또 일을 해도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삶에 대해 희망이 없었습니 다. 있다면, 오로지 하느님의 손길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 난하게 되었을 때 하느님을 진실로 순수하게 찾았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스바니아는, 하느님은 진정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 계신다는 것과 그리고 그들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 주시리라는 위 로의 말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늘 가 난한 자들이었으며 그들이야말로 하느님 백성의 맥을 잇는 주체들이 었습니다.

어찌보면 부귀와 영화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때 당시에는 멋 지게 보이고 훌륭하게 보이지만 그러나 시간만 지나면 허무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참된 행복은 세상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이 교만하 지 않으며 하느님 앞에 겸허한 마음을 갖는 것이 됩니다. 많은 사람 들 중에는 실패한 뒤에야 비로소 세상을 깨닫는 자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의 참된 의미는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 그래서 자신의 무력함을 알고 전적으로 하느님께 매달 리고 의지할 수 있는 가난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가 바로 행복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가 과음을 자주 하다가 위장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술 때문에 그 좋은 건강 다 버리고 이제는 소화가 잘 되지 않아서 조금 만 지나쳐도 탈이 나고 고생을 합니다. 이 사람이 식사전의 기도를 할 때 보면 그렇게 경건하고 진지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그것이 마 지막 식사인 듯이 감사한 마음으로 먹고 있으며 밥풀 하나라도 아주 소중하게 씹어서 삼키고 있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 사람은 자기 잘못으로 건강을 잃어 불행하게 되었지만 자신의 건강,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오로지 하느님께 매달릴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는 참 행복을 찾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미 건강하면서도 건강을 하느님께 기도하고 감사 드릴 줄 안다면 그는 더 행복한 사람입니다.

교회는 물질적인 가난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이상적인 삶의 형태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지향하고 원하는 것은 어떤 처지에서든지 가난한 마음, 마음을 비우는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 앞에 나서는 것입니다. 즉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만을 붙잡고 매달릴 수 있는 믿음을 가집시다. 이것이 참된 행복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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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강길웅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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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한 행복

언젠가 자매님들한테 언제 가장 기쁘고 행복했었냐고 물어보았다.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면서도 한 자매님이 조용히 “애 날 때요!” 그러셨다. 그래서 다른 자매님들한테도 “동감하시나요?”하고 여쭙자 모두들 웃으면서 그렇다고 하셨다.

이번엔 형제님들한테 “형제님들은 언제가 가장 기쁘고 행복했습니까?”하고 물어보았더니 물음이 끝나자마자 “장가 갈 때요!”하고 어느 형제님이 소리치셨다. 모두들 한바탕 웃고 난 후 다시 물어보았다. “그럼 지금도 자식들 덕분에 행복하시나요?”

“아따, 신부님은 장가 안가 애들 없응께 그 속 모르신다요. 때론 자식이 아니라 왠수일 때도 있어라!” “그럼 결혼생활은 어떠세요? 아직도 좋으세요?” 그러자 형제님들은 대부분 웃으면서 “그저 그러지요” 하며 대충 얼버무리는데 한 자매님이 “에이 신부님. 뭐가 좋다요. 그냥 헐수 없이 의무로 살제.” 허걱!!!

세상에서 행복한 삶의 조건을 무엇으로 많은 사람들이 돈과 사회적 지위를 든다. 돈이 많아야 근심걱정 없어 행복하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어야 무시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수 있다고 생각해서 일게다. 하기사 돈만이 주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상, 이웃 형제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세상,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인 세상인데. 과연 그런 행복은 영원할까?

다시 신자들한테 세례성사 받을 때 기분이 어땠냐고 물어보니 솔직히 좋은지 어쩐지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게 행복하시요?” 하고 물으니 “그래도 지금이 행복하지요.” 웃으며 대답한다. 왜일까?

주님을 몰랐었다면 인생의 부조리와 삶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지냈을 것을, 주님을 알고 그분이 짊어지신 십자가를 느끼고 나니 더 이상 고통스럽지만은 않다. 그분을 몰랐다면 괴로움과 고통에 짓눌려 어쩌면 포기하고 지낼 인생이었을 것을, 그분 안에서는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솟아남을 느끼게 된다. 세상에서 겪는 고통도 십자가 안에서 이겨낼 수 있기에 조용히 눈을 감고 그분과 함께 걸어온 지난 날 들과 현재의 내 삶을 되돌아보니 어느 순간 내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드리운다. 은은한 행복이 내 삶을 감싸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세상에서 얻는 행복은 처음엔 강렬하고 자극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퇴색해 버리는 반면, 그분 안에서 느끼는 삶의 행복은 처음엔 아무런 느낌도 없고 밋밋했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은은하게 밀려들어 온다.

김태균 신부
  |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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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행복에로 ‘다시 태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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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동창 모임 중에 ‘요즘 웹툰이나 소설, 드라마의 트렌드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동기 중 한 명이 ‘환생’,‘회귀’라고 말하였습니다. 모두들 의아해했지만 최근에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제게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진양철 회장의 비서실장을 배신한 회장 손주가 ‘머슴이 자기 것을 갖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다시 태어나세요.”

왜 이 세대에 환생과 회귀가 인기 주제로 떠올랐을까? 그것은 아무리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노력해도 지금의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절망감, 무력감, 자괴감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시 태어나세요’라는 말은 지금 이 삶에서는 신분 상승, 인생역전은 없다는 것, 희망을 갖기가 어려운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가?
하느님의 ‘다시 태어나기’와 이 세대의 ‘다시 태어나기’는 닮아있는가?

하느님의 ‘다시 태어나기’는 강생과 부활, 성체성사라는 사건으로 드러났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똑같은 처지에서 사는 모습으로, 더 나아가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모습으로, 보잘것없는 빵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다시 태어나기’는 신분 상승으로 남보다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서,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서, 더 큰 권력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자신의 원한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봉사하기 위해, 죄를 없이 하여 죄인들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이미 ‘다시 태어나기’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다시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이를 통하여 어리석은 것이, 약한 것이,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이 하느님의 선택으로 참으로 지혜로운 것이, 강한 것이, 하느님의 자랑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다시 태어났으니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말씀하신 여덟 개의 참된 복은 주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행복이요, 주님과의 일치됨으로써 누리는 참 행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다시 태어나기’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갈 때만이 우리는 세상의 행복과는 다른 주님의 행복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 삶 속에서 우리는 세상이 모르는, 애써 외면하려는 행복의 빈칸을 기쁘게 채우게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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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재중 베드로 신부
2023년 1월 29일 주보
  |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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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가지 모습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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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관점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자를 바라는데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똑똑하고, 높은 지위와 존경을 원하지만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안정되고 평화로운 삶을 원하지만 “행복하여라,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믿음과 행복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과 지위, 사랑이 있으면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리린 몬로는 온 세상 사람들로부터 아름다움을 추앙받았으며 재산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너무나 외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가 외로움과 우울증으로 스스로 삶을 끝냈을 때 그녀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고급스런 여행이 유행하지만 배낭족들을 보면 생각이 많아집니다. 그들은 허름한 옷에 배낭만을 메고 어느 곳, 누구와도 말을 건네고 같이 먹고, 허름한 곳에서 잠을 잡니다. 그들은 왜 좋은 옷과 멋있고 안락한 잠자리를 택하지 않을까요? 그들은 아마 소박한 생활의 의미를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락함보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노력하는 삶의 가치와 자연과 하나되는 삶을 좋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행복일 것입니다.

부와 편안함, 욕망, 지위, 사랑에 대한 집착은 사람들을 점점 더 힘들게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진정한 행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본질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교리만을 따른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는 단지 주님을 만나는 수단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가장 고귀하고 거룩하신 하느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본질은 주님을 만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바로 진정한 행복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혼안에서 주님을 만난다면 더 이상의 바램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젊은 시절, 욕망과 쾌락을 쫒아 방탕한 생활을 하며 많은 쾌락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만족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밀라노 주교인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들은 그는 통한과 참회의 구원을 얻게되고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와 사제가 되고 주교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사랑을 체험한 그는 다음과 같이 참회하였습니다.

“주님, 저를 주님의 자녀로 사용하시기 위해, 주님의 품에 편안히 쉴 때까지 영원히 저의 마음에 고통과 고뇌를 주소서”

이처럼 예수님의 ‘여덟가지 참 행복’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여덟가지 모습의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으로 태어나 돌아가실 때까지 집도 없이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거센 파도를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니셨지만 항상 겸손하고 온유한 삶을 사셨습니다. 온갖 잔혹한 형벌과 치욕, 고난 등 모든 것을 침묵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자비로운 예수님께서는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시고, 환난에 처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시고, 병자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평화의 마음을 나누어 주시고, 우리가 다시 이웃에게 하느님의 평화를 나누도록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 박해를 당하셨고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여덟 가지 참 행복’은 바로 주님께서 가신 길이며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 길을 따라간다면 언제든지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 살아간다며 주님처럼 살 수 있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바쳐 그 길을 따라간다면 우리도 한 사람의 주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뜻을 버리고 온전히 주님의 뜻을 따를 때만이 진정한 행복, 온전한 행복, 영원한 행복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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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하노이대교구 키엣대주교
2023년 1월 29일 빠다킹 사이트
  |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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