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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세상의 빛과 소금
조회수 | 3,309
작성일 | 05.02.03
"나이가 들었어도 어떤 때는 미칠 듯이 보고 싶은 분이 바로 저 세상에 계신 어머님이죠.” 얼마 전에 칠순이 넘은 한 자매님이 성탄 카드에 쓰신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그리운 이름이 되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 꿈에서 돌아가신 어머님을 만났습니다. 돌아가신 후 3년 동안 꿈에서나마 어머니를 뵌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보자마자 등에 업히셨습니다. 어머니는 편안한 얼굴로 제 등에 얼굴을 기대셨습니다. 그런데 몸이 여위신 어머니는 마치 깃털처럼 가벼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꾸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이 눈물을 어머니가 보시면 안 되는데’ 하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가 걱정하실 테니까요.

꿈에서 깬 나는 생전에 한 번도 어머니를 업어드린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에 저를 어머니는 허리가 아프도록 업어 주셨을 텐데 말입니다. 꿈에서라도 어머니를 보니 뛸 듯이 기쁘면서도 한편 가슴이 아팠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빛이고 소금입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말과 걸음마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하느님을 알려 주시고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인생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빛이고 소금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신앙인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소금처럼 살라고 하십니다. 빛과 소금은 생활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빛과 소금의 상징적 표현은 신앙인의 임무를 단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삶에서 모방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도 모두 누군가로부터 보고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의 말과 행동을 보고 배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참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서 한순간도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을 철저히 닮아야 하고 모방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이 주님처럼 빛과 소금 같은 사람이 될 때 비로소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인생의 진리와 올바른 길을 보여 주고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부패할수록, 어두울수록 신앙인의 역할은 더 중요하게 부각됩니다. 주위가 칠흑같이 어두울수록 미소한 빛이라도 소중하고 긴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세상을 밝게 하고 썩지 않게 할 거룩한 책임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빛을 비추는 만큼 세상은 어둡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썩지 않게 하는 그만큼 세상은 건강해질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존경하지 않는다”고 했던 마하트마 간디의 말을 한 번 곱씹어 보는 한 주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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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영엽 마티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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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빛과 소금

미국의 신학자이며 사회학자인 토니 캄폴로 박사가 95세 이상 된 사람 50명에게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가?”에 대하여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이 조사에 응한 사람 대부분이 다음과 같은 답을 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날마다 반성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런 되새김 없이 무심코 흘려보낸 시간들, 그 시간들이 얼마나 아까운가를 새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실 지나온 하루를 돌아보며 자신을 반성하고 더 나은 내일을 계획하는 삶은 하루하루를 아름답고 가치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용기 있는 삶”을 살겠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눈앞의 이익을 좇아 양심을 버리고 불의와 타협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세상을 살면서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어 외면하며 산 날들이 인생의 막바지에 와서 뼈아픈 상처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세 번째는, “죽은 후에도 무언가 남는 삶”을 살겠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목표를 세우고 꿈을 꾸며 힘들게 달려왔지만 그게 다 물거품처럼 없어지고 마는 허망한 것들 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정 가치 있는 것들을 꿈꾸며 살겠다는 말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날마다 반성하는 삶”, “용기있는 삶”, “무언가 남는”, 즉 “참된 가치를 추구”하며 살겠다는 이들의 대답에서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소금은 값싸고 흔한 것이지만 음식에 없어서는 안 되는 절대 필수물이 바로 소금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물도 부패를 막고, 맛을 내는 소금이 없으면 모두 다 외면해 버립니다. 세상에서 바로 이 소금의 역할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빛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흔한 것이지만 우리 인간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빛입니다. 빛이있어야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볼 수 있고, 빛이 있어야 따뜻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둔 세상을 환히 밝히고 차갑게 얼어붙은 세상을 따뜻이 녹이는 역할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절로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커다란 일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을 날마다 반성하고 새로움을 향해 나아간다면,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쁨의 씨를 뿌리고 선을 행할 용기를 갖는다면, 그리고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남을 참된 진리를 추구한다면, 이러한 사람들은 이미 어떠한 말이나 행동이 없더라도 이미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고준석 신부
  |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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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이 되려면>

어릴 때 선생님들께서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 보시곤 했습니다. 그러면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유관순 누나 등을 말하곤 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오늘 저는 존경받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았으면 합니다.

존경받는 사람의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첫째로는 그 사람의 직책이 있습니다. 많은 공부가 필요하고, 그 직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그러한 직책이 일정한 부와 명예를 보장해주기도 합니다.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판사, 의사… 등이 있겠습니다.

둘째는 한 분야에서 오랜 정진 끝에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운동 분야에 이런 사람들이 있고, 학문을 연마하는 사람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으며, 요즘에는 예술과 컴퓨터 분야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각 분야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 그러면서 일정한 경지에 이른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명예의 전당'에 추대되기도 합니다.

셋째로는 특정한 직책에 있지는 않고, 그렇다고 한 분야에서 입신의 경지에 이르지도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게 이런 사람들은 청렴하며, 희생과 봉사 정신이 뛰어나고, 남에 대한 배려가 크며, 자신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은 겉으로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향기가 은은하면서도 멀리 퍼지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분들 때문에 때로 슬픔 속에서도 웃음을 지을 수 있으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조건에서 존경을 받아야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신앙인들이 자신의 직분과 직책 때문에 존경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신앙인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경지에 이르러 존경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세 번째 이유로 존경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2000년 역사를 지닌 교회는 오늘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합니다. 그 빛과 소금은 엄청나게 많은 돈이 들어간 교회의 건물 때문에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신문에 자주 오르내리는 몇몇 사람들 때문에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의 향기를 이웃에게 전하는 그런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 교회가 그 이름값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희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참으로 아름다운 말입니다.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덕담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초는 자신의 것을 다 태워서 빛을 비추어 줍니다. 소금은 모든 것을 주고 녹아야 맛을 냅니다.' 빛과 소금처럼 모든 것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내어주신 그리스도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삶이 바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올해에는 지방자치 단체장을 뽑는 선거가 있습니다. 여당과 야당은 선거를 준비하면서 국민들에게 새로운 공약을 준비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발전과 성장의 그늘에 가려서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의료, 교육, 육아, 주택'과 같은 부분에서 국민들을 위한 복지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선택적 복지이든 보편적 복지이든 우리 사회가 발전과 성장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은 선진 국가를 향한 발걸음을 시작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교회는 더더욱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야 합니다. 각 지역에 있는 본당과 교회 시설들은 세상의 등대가 돼야 합니다.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사랑의 빛을, 희망의 빛을, 믿음의 빛을 밝혀줘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등대지기가 돼야 합니다. 그 삶이 비록 외롭고 고단할지라도 우리는 기꺼이 소금이 되어 모든 것을 내주었던 제2의 이태석 신부가 돼야 합니다. 제2의 마더 데레사가 돼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복지, 희생이 없는 복지, 십자가 없는 복지는 포장은 예쁠지라도 알맹이가 없기 마련입니다. 구호는 멋질지라도 공허한 메아리가 되기 마련입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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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교회는 연중 제5주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야 할 모습을 깨닫게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마태 5,13-14 참조)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참된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마음의 결단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1.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이사 58,8)

이미 고인(故人)이 되신 신영복 교수의 「떨리는 지남철」이라는 시(詩)입니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너의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는 새벽빛처럼 암흑을 대낮같이 밝게 하라”(이사 58,8-10 참조)는 주님의 말씀이 선포됐습니다. 사실 주님이야말로 우리의 빛이며 양식이고, 의로움이며 영광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그분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소명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2. 나는 하느님의 힘이 필요합니다!(1코린 2,5 참조)

C. S. 루이스(C.S.Lewis)라는 평신도 신학자는 “지옥으로 가는 길은 결코 벼랑이 아닙니다. 지옥을 향한 길은 밋밋한 내리막길입니다. 사람들은 그 길을 기분 좋게 걸어갑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하느님과 멀어지게 되는 길로 쉽사리 빠져들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바오로 사도는 항상 자신의 나약함과 두려움을 당당히 고백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하느님의 힘만이 자신의 믿음의 바탕이 된다는 지혜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믿음은 선물입니다. 그것은 책에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청하여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그 믿음을 청하십시오! 믿음만이 우리의 승리입니다”라고 항상 깨우쳐주십니다. 참으로 믿음은 우리 자신을 올바로 바라보게 하고, 올바로 설 수 있게 합니다. 결국 믿음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약하지 않고 두렵지 않게 됩니다.

3. 소금과 빛: 하느님을 찬양하라!(마태 5,13-16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 안에서 ‘소금과 빛’의 삶을 살도록 소명을 주십니다. 소금은 주위를 썩지 않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도리는 부패(腐敗)하지 않으려고 끝까지 애쓰는 결단(決斷)입니다. 빛은 주위를 밝게 비춰줍니다. 때문에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모습은 다른 이들에게도 ‘착한 행실’(마태 5,16)에 자연스럽게 눈뜨도록 해주는 증거(證據)입니다.

지난달에 서울대교구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 소속 지니(GNY, God needs you) 소속 학생들이 저희 성당에 와서 벽화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이 학생들 덕분에 그동안 황무지처럼 방치됐던 공간이 불과 이틀 만에 생명력 넘치는 초원으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하였습니다. 이런 젊은이들이야말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하느님께 찬양을 드린다고 생각합니다.

4. 찬란하게 삽시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모름지기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힘쓰고 매사에 자기의 생활이 더욱 성실하도록 힘써야 합니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맡겨주신 소명을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늘 자신을 살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소금과 빛’의 삶으로써 응답하여, 그분의 충만한 은총 안에 늘 머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 서울대교구 정연정 신부 : 2017년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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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눈 뭉치를 굴리게 됩니다. 눈사람이 조금씩 커지면서 주변의 눈들을 더욱 많이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눈덩이처럼 불어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말의 어감에 ‘눈덩이처럼 불어난다.’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미국은 ‘군사, 경제, 문화, 과학’의 분야에서 세계 최강입니다. 미국의 움직임은 당연히 세계의 많은 나라와 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주기 마련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반이민 법’을 실행하겠다고 합니다. 멕시코 인들의 돈으로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에 장벽을 쌓겠다고 합니다. 미국이라는 눈덩어리가 굴러가면서 미국인들은 물론, 다른 많은 나라 사람들에게 우려와 걱정을 주고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민족의 분쟁 때문에, 정치적인 신념 때문에 ‘난민’이 된 사람들을 받아 주는 것은 국제적인 관례입니다. 이웃의 아픔과 슬픔을 보듬어 주는 것은 인간이 지닌 고귀한 품성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이유로 특정한 국가의 사람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판단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국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아프리카에서 많은 노예들을 데려왔습니다. 노예들의 땀과 피가 미국 경제의 축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노예를 데려왔던 미국이 적은 수의 난민을 받아 주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일 수 있습니다. 깨어있는 미국의 지성과 시민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잘못된 진단은 잘못된 처방을 내릴 수 있고, 몸의 병을 더욱 키울 수 있습니다. 반이민 법과 장벽의 설치는 잘못된 인식에 의한 잘못된 처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많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지체들은 서로 협력하고,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기 때문에 균형 잡힌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눈의 도움 없이 발이 얼마나 걸을 수 있을까요? 손의 도움 없이 입은 음식을 어떻게 먹을 수 있을까요? 귀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는 아름다운 음악을, 흐르는 시냇물의 소리를, 사랑하는 연인의 속삭임을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완벽하게 서로 소통을 하고, 협조를 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의 몸이 소통이 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심장질환, 당뇨, 고혈압, 암’은 소통이 되지 않아서 생기는 질환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이민 법과 장벽의 설치는 분명 잘못된 처방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희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이것이 올바른 처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말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해주고 있습니다. ‘초는 자신의 것을 다 태워서 빛을 비추어 줍니다. 소금은 모든 것을 주고 녹아야 맛을 냅니다.’ 빛과 소금처럼 모든 것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삶이 바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 2017년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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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눈먼 이에게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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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의 ‘참행복’ 선언(마태 5,3-12)에 바로 이어진 오늘 복음에서는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절로 두 번째 행복 선언이 연상됩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마태 5,4) ‘슬퍼하는 사람들’이란 표현 대신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울고 있는 사람들’이란 표현을 즐겨 사용하시는데, 저도 이 표현이 너무나도 마음에 와닿습니다. 성공 지향적이고 이기주의적인요즘 세상의 주된 흐름에 반해서, 같이 아파하고 같이 울어주는 사람들을 하느님께서는 축복해주신다는 말씀에 용기가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저절로 ‘나인’이라는 마을에 들어서다가 외아들이 죽어 삶의 모든 희망이 사라진 어느 과부의 안쓰러운 모습을 본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함께 마음아파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그 과부에게 다가가 위로해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봅니다(루카 7,11-17 참조). 동시에 교황님께서 교도소에 있는 죄수들의 발을 손수 씻어주시며 안아주시는 모습도 떠올려봅니다.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리고 교황님의 모습에서 저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놀라운 능력이 빛나는 걸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 빛나는 능력이란 바로 ‘공감’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약자를 돕고자 하는 ‘공감 능력’이 사람에게만 주어진 게 아니라고 합니다. 세계적인 영장류학자인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은 예컨대 쓰러진 동료를 일으켜 세우려고 애쓰는 코끼리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이렇게주장합니다. “동물들은 서로를 짓밟거나 자기 것만을 챙겨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협동하고 공유하면서 살아남는다.” 이렇게 약자를 돕는 모습을 동물 사회에서는 자주 볼수 있다고 합니다.

그에 반해서 우리 인간은 공감 능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이 크다면, 너무 지나친 걱정일까요? 적어도 교황님은 비슷한 걱정을 하고 계신 듯 싶습니다. “오늘날 세상의 가장 큰 위험은 온갖 극심한 소비주의와 더불어 개인주의적 불행입니다. 이는 안이하고 탐욕스러운 마음과 피상적인 쾌락에 대한 집착과 고립된 정신에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 더 이상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가 없어 가난한 이들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고 … 선행을 하고자 하는 열정도식어 버립니다.”(「복음의 기쁨」 2항)

그렇다면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까요? 교황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있든 바로 지금 이 순간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 날마다 끊임없이 그분을 찾으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도록”(「복음의 기쁨」, 3항) 권고해주십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조금은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며 사랑과 자비의 예수님을 닮아, 다른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세상의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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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신희준 루도비코 신부
2020년 2월 9일
  |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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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일어나 비추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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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산상설교’로 구성된 마태오 복음 5―7장은 ‘참행복 선언’을 비롯하여 내용 전부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한 말씀을 담고 있다. 예수께서는 가장 먼저 ‘여덟 가지 복’으로 사는 사람에 대해 언급하시며 이들이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강조하신다. 즉,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이미 하느님께 선택받았고, 이를 축복으로 받아들여 사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참행복 선언’을 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 하시며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일깨워주신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참행복 선언’으로 하느님 백성이 되었기에 이미 세상에 속해 있지 않지만, 아직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과는 다르게 드러내야 할 사명과 정체성에 대해 가르침을 주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소금과 빛’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갖는 사명과 영향력이다. 소금은 세상의 어떤 물질로도 낼 수 없는 독특한 짠맛을 가진다. 사실 이 짠맛 자체는 통증에 가깝다. 하지만 소금의 짠맛이 음식에 스며들면 그 음식 맛을 원래 맛 그대로 맛나게 하는 엄청난 영향력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음식 맛을 좋게 내는 소금처럼 흰 ‘MSG’라는 조미료가 있다. MSG가 들어가면 모든 음식 맛이 좋아진다. 하지만 맛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이것을 넣지 않는다. MSG는 음식이 가진 고유한 맛을 죽이고 다른 맛을 내기 때문이다.

빛의 사명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볼 수 있게 만들고 사물을 분별할 수 있게 한다. 빛의 밝힘으로 세상이 의미를 가지며, 어둠을 넘어 서로의 정체를 깨닫게 해준다. 이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5)라는 말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빛으로 영향력을 보이라고 권고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영향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이다. 소금은 음식의 참맛을 낼 뿐 아니라 음식의 부패를 방지하고, 빛은 어둠을 밝혀 사물을 분별할 수 있게 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구분되는 독특한 맛과 빛으로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향하게 하는 영향력을 보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영향력은 모든 하느님의 백성에게 동일하게 드러나야 한다.

신학자 한스 큉은 “사제들이 교회를 향해서 파견된 성직자라면, 신자들은 세상을 향해서 파견된 성직자”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파견된 모든 분야에서 ‘예수의 제자’라는 의식을 갖고 세상과 구별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이를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자기에게 부여된 ‘소금과 빛’의 정체성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야 ‘참행복 선언’이 완성되며 세상의 복음화가 이뤄진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며 당신 제자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라고 이르신다. 소금으로, 빛으로 세상에 합당한 영향을 미치라는 말씀이다. 소금은 식탁 위 소금통에 소담스럽게 담겨 있을 때가 아니라 콩나물국에 적당히 들어갔을 때 진가가 드러난다. 빛은 됫박으로 덮여서가 아니라 등경 위에서 주위를 밝힌다. 우리도 세상에 스며들고 세상 비추며 살아야 한다. 세상에 익숙해져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정체성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며 살지 않기를 노력해야 한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이사 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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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임상만 신부
가톨릭신문 2020년 2월 9일
  |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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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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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복음의 앞 문맥을 살펴보면, 산상수훈 담화문을 시작하는 ‘참행복(진복팔단)’에 바로 뒤이어 나오는 구절들이 오늘의 복음 구절입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 행복선언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 하신 다음에 바로 오늘 말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라는 말씀이 이어지기에, 여기에서 ‘너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참행복의 정신으로 살고자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금과 빛은 일상생활에서 보거나 성경의 전통에서 볼 때, 굉장히 중요한 은유입니다. 예로부터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낼 때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첨가물일 뿐만 아니라, 염장(鹽藏)을 통해 식료품을 오래 저장하는 데에 필수적인 물품이었습니다.

‘빛’은 신약성경, 구약성경을 막론하고 익숙하고 중요한 은유인데, 신약성경이 아직 쓰여지기 전인 예수님 당대에는 유일한 성경이었던 구약성경에서는 ‘빛’이 주로 ‘하느님, 메시아, 하느님께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 토라(율법), 성전, 예루살렘’ 등을 가리키는 은유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청중인 당대의 유다인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으로 들렸을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너희는’이라는 희랍어 원문 표현에서 강조법을 써서 “(예수님 당신을 따르는) 바로 너희 자신이 빛과 소금”이라는 뜻으로 ‘너희’를 강조하여 표현하십니다.

뒤이어지는 산상수훈 담화문(마태 5,17-7,12)의 가르침들이 말하자면, 어떻게 살아야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의 모습을 살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 담화문 대신에, ‘빛’을 모티브로 오늘 제1독서를 복음과 연결지어 읽어 보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곧,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세상의 빛’으로 살 수 있는 길은, ‘굶주린 이에게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주는 데’에 있다고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바오로 사도가 ‘뛰어난 말이나 (인간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뛰어난 언변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복음 선포하셨듯이(제2독서),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 등을 통해 화려함을 자랑하기 바쁜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적으로) 뛰어난 능력이나 인간적인 드러남’으로써 ‘빛’이 되는 게 아니라, 이웃들에게 애덕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거라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 자신이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통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예수님은 오늘 우리를 촉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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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정순택 대주교
2023년 2월 5일 주보
  |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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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민자들의 삶은 힘들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삶은 견딜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타향도 정이 들어 고향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잘 이겨낼 수 있지만 이민자들이 가장 어려워하고, 힘들어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식의 문제입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자식의 신앙 문제입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을 따라서 성당에 가고, 주일학교에도 다니고, 복사도 합니다. 그러나 대학에 가면서부터 많은 자녀들은 성당을 멀리하고,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부모님들은 성당에서 봉사를 많이 했고, 아이들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했는데 어째서 자녀들은 신앙의 등불이 점점 꺼져갈까요? 대화와 소통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길은 잘 찾아주고 도와주었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지시와 명령은 있었지만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대화하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매일 컴퓨터 게임만 하는 아들에게 엄마가 밖에서 놀고, 친구들도 만나라고 했답니다. 아들이 엄마에게 컴퓨터 게임에도 나름 스토리가 있고, 그 안에서도 만남이 있다고 합니다. 엄마의 시대에는 밖에서 친구를 만나고 놀았지만 우리들의 시대에는 컴퓨터 온라인에서 친구를 만나고 논답니다. 학업에 지장이 있지 않느냐는 엄마의 말에 아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요즘 대부분의 직업은 컴퓨터와 관련된 직업입니다. 쇼핑도, 은행업무도, 예약도 대부분 컴퓨터로 하는 세상입니다. 컴퓨터 게임 때문에 아이들이 폭력적으로 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과장된 말이라고 합니다. 컴퓨터 게임이 있기 전에도 폭력과 전쟁은 있었고, 폭력과 전쟁을 하는 이들은 컴퓨터 게임을 하는 아이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들의 말에 엄마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고 합니다. 엄마도 예전에 컴퓨터 게임을 좋아했었다고 합니다. 직장에서 하는 컴퓨터 게임에서 우승을 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건강을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가끔 나가서 운동을 하겠다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화는 마무리 되었다고 합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나는 견진성사 안 받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아버지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들이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견진성사는 내가 확신이 있어야 받는 것인데,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중에 신앙에 확신이 서면 그때 ‘Confirmation’을 받겠습니다.”
그러면서 아들이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어릴 때 교리 시간에 배운 것과 실제 역사에서
드러난 교회의 모습이 다릅니다.
교회가 인류와 역사 앞에 공헌한 것도 많지만
교회가 잘못한 것도 많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유 있는 답변을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지만 안심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들은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다시 신앙의 길로 들어설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네가 나의 집에서 사는 동안은 내가 정한 규칙을 지켜야 한다.
내가 정한 규칙은 주일에는 성당에 가는 것이다.
집안에 기일이 있으면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아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 대화를 마쳤다고 합니다.

예전에 어머니는 비가 오는 날이면 가끔 ‘수제비’를 해 주셨습니다. 수제비는 밀가루에 물을 넣어 반죽을 만들면서 시작됩니다. 어머니는 찰지게 반죽을 하였습니다. 물이 밀가루에 완전히 스며들어 반죽이 찰져야만 수제비는 끓여도 잘 풀어지지 않고, 맛이 쫀득쫀득 했습니다. 수제비는 어머니의 손맛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구수한 육수와 호박과 감자가 들어간 수제비는 비오는 날 저녁 별미였습니다.

시장에 가서 새로운 부식을 사오지 못한 날에는 ‘비빔밥’을 해 주기도 하셨습니다. 양푼에 야채와 밥을 넣고 구수한 들기름을 넣고 비벼 주었습니다. 맛을 더하기 위해서 고추장을 넣기도 했습니다. 수제비가 밀가루와 물이 하나 된 작품이라면 비빔밥은 야채와 밥이 기름에 어우러져서 각자의 맛을 내는 것입니다. 기름도 자신의 맛을 잃어버리지 않고 비빔밥의 고소한 맛을 더해줍니다.

저는 신앙에는 두 가지의 영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물이 스며들어 밀가루를 맛있는 반죽으로 만들어주는 수제비의 영성입니다. 다른 하나는 들기름처럼 밥과 야채의 풍미를 살려주면서 조화를 이루는 비빔밥의 영성입니다.

가정에 문제와 어려움이 있다면 자녀들의 고유한 인격과 품성을 생각하지 않고 부모의 방식대로 하나가 되도록 강제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뿌리가 땅 속에서 양분을 끌어 올려 꽃이 피게 하듯이 부모의 사랑이 자녀들에게 스며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육화의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며 이를 행하여라.” 저는 이것이 스며듦의 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사도를 파견하시면서 각자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기름이 제자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각자의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가정이 건강하고 화목하기 위해서는 ‘반죽’이 되기보다는 ‘비빔밥’이 되어야 합니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 기름이 되어 아이들의 삶을 더욱 빛나고 풍요롭게 해 주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금과 빛’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소금은 스스로 녹아서 맛을 내는 스며듦의 영성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빛은 각자의 품격을 잃지 않지만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비빔밥의 영성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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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2023년 2월 5일
  | 02.05
523 97.6%
언젠가부터 교계 일각에서 ‘교회쇼핑’이라는 단어가 생겨났습니다. 우리가 쇼핑센터에 가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골라 사듯이, 교회도 자기 마음에 드는 교회를 찾아다닌다는 현상을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이것이 자칫 잘못되면, 우리가 예수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우리 마음에 드는 예수님을 만들어 내려고 하지는 아닐까 하는 위기감마저 들게 합니다.

비슷한 유형으로, 최근 들어서는 점점 내가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깨달아 내 삶에 적용하며 하늘 나라를 만들어 내려는 노력보다는, 누군가가 대신 만들어 놓은 하늘 나라를 마치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처럼 여겨서 취사 선택하려고 하는 모습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연구하여 참고, 희생하는 영적 수련 과정을 거쳐, 주님의 뜻을 이루려는 자세보다는 누군가가 해설해 놓은 주석서나 훌륭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제나 수도자나 영성가를 아는 것으로 대리 만족하기도 합니다. 또는 그분들의 인격과 삶에 맞는 신앙생활 양식을 다른 인격체인 나에게 무조건 대입하려고 하는 우를 범하기도 합니다. 좋은 책이나 영신 서적을 읽거나 예술작품이나 성화를 보거나, 음악회나 성가를 듣거나, 영화나 성극 등을 감상하면, 가슴으로 찐한 감동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감동이 나를 주님께 한껏 다다르게 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감동은 일정 시기 동안 나에게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나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기에, 그냥 시간이 지나면 스쳐 지나가고 맙니다. 그 감동을 받은 후에 그 감동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내 방식의 무슨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나와는 관계없는 성직자, 수도자, 영성가들의 성스러운 한 장면이 되고 맙니다. 작가와 주인공의 피나는 노력에 걸맞은 노력을 우리 스스로도 기울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와 더불어 신앙인 개인과 교회 공동체 활동도 영적인 노력과 헌신도 돈으로 사는 것으로, 희생과 봉사도 돈으로 대신하게 됩니다. 애써 일해서 번 돈을 기부하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대상자와의 공감과 교류 없이 단순히 생색내기나 의무방어전으로 그치지 않도록 유념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마치 화장품 광고에서 이 화장품을 사면 이 광고의 모델처럼 예뻐질 수 있다는 식의 헛된 허상의 유혹에 빠지기 쉽듯이, 신앙생활도 같은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자신의 몸과 영으로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실현하고 이루려는 노력이 아니라, 더 찐하고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을 찾아 헤매게 됩니다. 심지어는 경제적으로 풍요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거나 행사를 거창하게 치르는 것이, 역설적으로 주님의 모범을 따라 기도하고 절제하고 희생봉사하며 도달하게 되는 깊이 있는 영성 생활의 신비를 대신하는 것으로 혼동하기까지 합니다. 그러자니 끝까지 남는 것은 나 자신의 채워지지 않는 갈망과 허전함이며, 만족하지 못하고 기쁘지 않은 신앙입니다.

하루아침에 부자가 될 수 없듯이, 신앙생활도 복음을 읽고 깨닫고 그 깨달은 주님의 뜻을 내 삶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에 수많은 실패와 좌절에 떨어지기도 하고, 단계마다 다른 난관과 고비를 겪으면서, 주님의 도우심과 이끄심으로 매번 되살아나는 체험을 해야만이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면서 나를 이끌어주고 계시다는 깨달음으로 감사드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 머릿속으로는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주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간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 내가 그렇게 신앙의 길을 따라 우여곡절을 살아가면서 스스로 깨닫게 되는 주님과의 영적 체험이 없으면, 선배신앙인들의 체험에서 비롯된 신앙의 신비나 교회의 가르침은 한낱 도서관이나 내 집안의 책장에 비치된 책 안에나 쓰여있는 명제나 공염불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맙니다. 더군다나 그러한 체험이 쌓이지 않으면, 계속 또 다른 책을 사거나, 또 다른 강의를 듣거나, 또 다른 찐한 체험을 내 노력 없이 다른 곳에서 듣고 보고 채우려고 허상을 좇아 허공 속에서 헤매며 돌아다닐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듣느라 보면, 우리에게 커다란 부담이 되어 돌아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할 능력도 자격도 없음을 잘 압니다. 그저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반사할 뿐이며, 때로는 반사는커녕 오히려 주님에게서 나오는 빛을 우리의 부족하고 나약한 삶으로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을 내 세우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고자 했지만, 실패하고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에, 주님께서 나에게 다가오셔서 나를 일으켜 주시고 이끌어주셔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는 체험과 고백이 세상 다른 이들에게는 빛일 수 있습니다. 현실 안에서는 불가능하게만 여겨 망설이다가 실현하려고 시작했더니 신비롭게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체험이 세상의 빛입니다. 오히려 ‘내가 잘했다.’고, ‘내가 이루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오만불손한 사람이겠습니다. 지금 당장 우리 삶의 한 단면이 어떠하냐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하는 신앙의 여정이 우리 신앙인의 빛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면서 나와 함께 내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 겪으시고, 함께 아파하시고 흐뭇하시면서 나를 보호하시고 이끌어주시고 계시다는,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고 있는 내 신앙 체험이 세상의 빛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사도 성 바오로는 증언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사도 2,1) 바오로는 자신이 빛이라거나 자신의 말로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오로는 내가 아니라 내 생애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2절) 바오로는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스스로 자신감에 차서 또는 스스로 이루어낸 뭔가 자랑스러운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3절) 사도 성 바오로는 자신이 나약하고 부족한데도 주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주님께서 무엇을 어떻게 말하도록 이끌어주시기에, 사람들 앞에 서서 자신이 주님을 따르면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지는 신비에 대해 깨닫고 알게 된 체험에서 나온 신앙을 선포하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4절)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스스로 주 예수님을 찾고 그 말씀을 통해 드러난 주님의 뜻을 이루어나가려고 시작하면, 주님께서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함께하시면서 이끌어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이 옳고 좋다고 여기는 것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임도 밝혀줍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5절)

지난 2월 2일 봉헌축일이었습니다. 이날 서울대교구 20분의 부제서품식이 그리고 3일 24분의 사제서품식이 있었습니다. 새로 사제와 부제로 서품되신 분들과 인사이동을 하시는 사제분들과 수녀님들의 삶 속에 사도직과 복음삼덕의 기쁨이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주간에 정 아가다 수녀님께서 떠나셨고, 오늘 배 젬마 수녀님께서 새로 오셨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우리 본당에 오셔서 여러 가지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불편한 내색을 일절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사도직을 수행하면서 복음삼덕을 살아내고 계신 유 신부님과 수녀님들께 존경과 감사의 정을 드립니다. 주님과 함께 꾸준하고 성실히 수도생활을 하고 계신 수녀님들께 감사드리며, 기도와 축하의 인사를 드리기로 합시다. 여러분이 사제생활이나 수도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 인생을 통해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같은 여정이지 않겠습니까? 저는 사제생활로 수녀님은 수도생활과 교회생활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생활과 사회생활로. 여러분께서 살아가시면서 매 순간 주님과 함께하고 있다는 체험을 통해 행복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잘 살고, 훌륭하냐의 여부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세상의 빛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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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심흥보 신부
2023년 2월 5일
  |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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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2   [수도회] 눈물 흘리시는 하느님  [5] 2740
821   [수원] “000야, 이제 그만 혼자 가두어 있지 말고 이리 나오너라.  [6] 2787
820   [인천] 부활.....누구와 함께 있는 것?  [7] 2736
819   [서울]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  [9] 2828
818   [마산] 나는 부활이며 생명이다  [6] 3017
817   [부산] 라자로의 부활사건  [8] 3289
816   [안동] 생명의 삶  [4] 2438
815   [대구] "너는 나를 믿느냐?"  [8] 4792
814   [청주]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  [1] 354
813   [대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5] 2835
812   [제주] “돌을 치워라”  [1] 229
811   [전주]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자매의 믿음  [3] 3109
810   [광주] '죽은 자여 일어나라'  [2] 248
809   [군종] 라자로의 소생  [2] 240
808   [의정부] 신성과 인성의 감사로운 결합  [3] 2782
807   [원주] "주님이 계셨더라면…"  [2] 2589
806   [춘천] 우리 안에 사랑의 영으로 부활을  [2] 288
805   (자) 사순 제5주일 독서와 복음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  [6] 2594
804   사순 제4주일 성경 말씀 해설  [7] 99
803   [수도회] 무거운 십자가는 은총의 도구로 사용된다.  [9] 2847
802   [수원] 주님의 마음? 내 마음?  [9] 2432
801   [인천] 눈이 멀었던 사람의 신앙고백  [9] 2740
800   [서울] 세 가지 발견  [12] 2751
799   [마산] 나날이 눈 떠가는 삶  [6] 2677
798   [부산] 눈 뜬 것도 죄가 되는가?  [9] 2700
797   [안동] 제대로 본다는 것은  [4] 2534
796   [대구] 영적인 눈을 뜬다면  [9] 3542
795   [청주] 맑은 눈을 지니길 희망  [1] 340
794   [대전] 소라도 잡아야 하는 거 아냐?  [6] 2441
793   [전주] 어둠 속에 머무르려는  [2] 2293
792   [광주/제주]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기  [2]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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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0   [의정부] 본다는 것의 의미  [2] 331
789   [원주] 동상이몽(同床異夢)  [2] 339
788   [춘천] 마음의 눈으로  [5] 2838
787   (자) 사순 제4주일 독서와 복음 (태경소경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6] 2281
786   사순 제3주일 성경 말씀 해설  [2] 163
785   [수도회] 우리 평생의 갈증을 채워주실 분  [10] 2505
784   [수원] “생리적 갈증과 신앙적 해갈”  [10] 2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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