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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빛의 자녀로 맡겨진 사명 수행하자”
조회수 | 2,662
작성일 | 05.02.03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소금과 빛의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금과 빛의 의미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소금

1. 정화 의식

옛날 희생제에서는 제물에 모두 소금을 쳐야 했다(레위 2, 13; 에제 43, 24). 이것은 「하느님의 음식」(레위 21, 6. 8. 17. 22)에 간을 맞추는 것을 의미하는지, 「하느님의 계약의 소금」(레위 2, 13)을 재확인하는 예절을 의미하는지, 즉 계약의 지속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향의 경우에 있어서 처럼(출애 30, 35) 소금은 정화의 기능을 갖는 것 같다. 엘리사가 소금을 뿌려서 「나쁜 물」을 좋은 물로 변화시킨 것은 그 한 가지 예이다(2열왕 2, 19~22). 그리고 갓난 아기를 소금으로 문지르는 관습은(에제 16, 4) 위생상의 관심에서라기 보다는 악마를 쫓는 의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소금의 정화 작용은 『누구나 다 불소금에 절여질 것이다』(마르 9, 49)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관련된다. 왜냐하면 불은 단련하고 정화하기 때문이다(1고린 3, 13).

2. 맛과 지속성

『만일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느냐?』(루가 14, 34; 마르 9, 50)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선 「계약의 소금」과 관련시켜 설명할 수가 있겠다. 즉 이 말은 주님과의 계약이 한번 깨어지면 그 계약을 다시 맺을 수 없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런데 마태오의 해석에 따르면 신앙인은 「땅의 소금」(마태 5, 13)이어야 하는데, 이것은 신앙인이 하느님과의 계약을 통해서 인간의 세계를 부패로부터 방지하고, 이것에 맛을 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는 아무 것에도 쓸모가 없어지고, 제자들은 당연히 밖에 버려질 수 밖에 없다(루가 14, 35).

그리고 『소금은 좋은 것이다….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마르 9, 50)라는 구절은 바울로에게서 그 주석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여러분은 언제나 소금으로 간을 맞춘 친절한 말을 사용하고, 묻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적절한 대답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골로 4, 6).



1.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예수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 5)라고 선언하신다. 다른 곳에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 12).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어둠속에서 살지않을 것이다』(요한 12, 46)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 세상을 비추는 것은 그 자신 속에 빛의 근원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즉 그 분은 하느님의 말씀 그 자체 이시며, 인간의 생명과 빛이시며,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시는 참된 빛이시다(요한 1, 4. 9). 따라서 그 분의 주위에서 전개되는 드라마는 빛과 어둠의 대결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께서 체포되실 때에, 『이제는 너희의 때가 되었고, 암흑이 판을 치는 때가 왔구나』(루가 22, 53)라고 선언하신다.

2. 빛의 자녀들

빛의 자녀다운 생활을 예수께서는 이미 강조하셨다(요한 12, 35~36). 인간은 몸의 등불인 눈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과 같이, 마음의 빛을 흐리게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마태 6, 22; 루가 11, 34~36). 바울로도 같은 사실을 자주 권고 하고 있다. 주님의 날이 갑자기 들이 닥치지 않도록(1데살 5, 4~8), 빛의 갑옷을 입고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려야 한다(로마 13, 12~13). 사람이 어둠속에 있는지, 또는 빛속에 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형제에 대한 사랑이다(1요한 2, 8~11).

형제적 사랑을 실행하고 참된 빛의 자녀로서 생활하는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하느님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춘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도 세상의 빛이 되어(마태 5, 14~16), 그리스도께로부터 맡겨진 사명에 응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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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허성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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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소금과 빛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오늘날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자연재해는 다가오는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는 것같이 보일뿐더러,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예견하는 듯하지만 이런 현시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는 언젠가 없어져버릴 세상에 희망을 두고 사는 존재가 아니기에 우리의 미래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밝은 모습을 드러내리라 믿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께서 원하시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 (마태 10,29)고 하신 복음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주시며, 현세적 아픔과 고통들은 새로운 생명에로 우리를 향하게 만드는 디딤돌이 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니게되는 세상 가운데서의 소명(삶의 태도)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정체성,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빛과 소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복음은 빛과 소금의 모습을 착한 행실로 말씀해 주고 있으며, 이 착한 행실의 결과는 모든 사람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착한 행실 즉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실 때 우리의 구원은 완성되는 것이고, 한층 더 나아가 모든 이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태도가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1독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빛과 소금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먹을 것을 굶주린 이들에게 나누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들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른 체 하지 않는 것 (이사 58,7)입니다. 그러나 이 러한 것에 선행해서 더 중요한 태도는 제 2독서에서 이모든 일들을 인간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느님의 능력에 바탕(1고린 2,5)을 두고 하라는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불리운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뿐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를 불러 세우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내적 태도인 하느님의 능력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의지를 하느님 안에 두어야 함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닌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나’ 라는 존재를 통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도록 의지적으로 협력해 나갈 때에 모든 이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손원모 요한크리소스토모 신부
  |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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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그러나 소금이 싱거워지면 무엇으로 그것이 짜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싱거워진다”라는 동사는 원문에 “어리석어진다”라는 단어입니다. 마태오복음서가 “어리석다”고 말할 때는 실천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마태 7,26)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앙인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인의 실천이 세상을 변하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라고도 말했습니다. 빛은 어둠을 밝힙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서가 예수님의 제자들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도 그분의 뒤를 따라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실천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보면 소금과 빛, 이 두 개의 단어가 모두 신앙인의 어떤 실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소금은 자기 스스로를 지키지 않고, 용해되어 음식의 맛을 바꾸어 놓습니다. 빛은 자기 자신을 과시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를 소모하여 어둠을 쫓아내고, 어둠으로 가려졌던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신앙인이 소금이고, 빛이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은 스스로를 소모하여,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실천을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서의 “행복 선언”(5-12)에 이어 나오는 말씀입니다. 소금과 빛으로 있기 위해 요구되는 구체적 실천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행복 선언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선언은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목말라하는 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선언이 의미하는 바를 실천하는 사람이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선언들은 지켜야 하는 계명도 아니고, 수양해야 하는 덕목도 아닙니다. 예언적 선언이고 권고입니다. 신앙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생명을 우리 삶 안에 실천하는 마음가짐입니다. 하느님은 인간 자유를 무시하고 인간에게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같은 계명을 지키고 같은 덕목을 수행하면서 획일적으로 살 것을 요구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 다양함을 만드셨습니다. 많은 피조물이 있고 다양한 생명들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동일하게 보는 획일적 강요는 생명을 위축시킵니다. 그리고 그 획일성의 강요는 인간의 창의력도 말살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억압하는 군주(君主)가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자유롭게 살 것을 원하셔서 창조에서 이 세상 안에 다양함을 뿌리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군림하지 않고 숨어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가 자유로운 실천으로 소금과 빛이 되어 세상에 살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도 자유롭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주어진 계획대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유대교가 요구하던 계명에 얽매여 살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당신의 창의력을 동원하여 자유롭게 또 다양하게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만나면 그 병고를 덜어주고, 죄인으로 낙인찍힌 이를 만나면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율법을 못 지켜서, 직업이 세리라서 소외당하는 이들을 만나면 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기쁨이고 해방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당부하신 말씀도 기쁜 소식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며 죄를 용서해 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실천하신 바를 제자들도 실천하여 사람들을 변하게 하는 소금이 되고, 사람들이 진실을 보게 하는 빛이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복음서는 먼저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은 재물을 자기 삶의 보람으로 생각하지 못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재물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합니다. 많이 가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쓰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많이 가지겠다는 욕심으로 그것을 목적으로 삼아버립니다. 복음은 그런 욕심에서 해방될 것을 권합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가진 것을 하느님의 선물로 보고 그것을 이웃과 나눕니다.

복음서는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신앙인은 이 세상에 고통과 슬픔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런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겪는 아픔을 함께 겪으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복음서는 또한 온유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무슨 일에도 자기를 기준으로 최종적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이웃의 생각을 알아듣기 위해 온유하게 경청하고, 이웃과 더불어 하느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복음서는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도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우리가 있기에 신앙인은 자기 자신도 이웃에게 베푸는 노력을 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의로움은 하느님이 베푸셨기에 우리도 베푸는 데에 있습니다. 복음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욕심 없는 사람입니다.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은 자기를 기준으로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자기를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먹고 살 수 있고, 품위를 유지할 재물이 있어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한 몸이 편하게 살 수 있어서 사람의 도리를 다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이웃보다 강하고 높아서 성공한 것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자기의 삶 안에 받아들여 실천합니다. 신앙인은 소금과 같이 자신을 용해시키면서,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어떤 섬김이 발생하는 지를 세상이 맛보게 합니다. 빛과 같이 자기 자신을 소모하여, 주변에 있는 욕심의 어둠을 사라지게 하고, 세상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자유로운 마음을 보게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께 빌어서 자기 욕심을 채우는 길이 아닙니다. 신앙은 삶을 변하게 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자유를 누리며 삽니다. 신앙인은 지키고 바치는 일에 전전긍긍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예수님에게서 배운 실천을 하게 합니다. 우리의 실천은 우리 주변 사람들의 실천에도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입니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이 있습니다. 욕심의 어둠이 사라지면 함께 계시는 하느님, 불쌍히 여기고 가련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일이 우리의 실천 안에 드러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이 있습니다.

서공석 신부
  |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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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고 하는 우리들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생명을 유지하는데, 음식의 맛을 내는데 어떤 내적 힘을 주듯이, 빛이 방향을 잃고 어둠에 주저앉아 있는 곳에 희망과 용기를 주듯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힘과 맛을, 어둠 속에 헤매는 이들에게 생명과 진리의 길을 걷도록 하는 것이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사명임을 알려줍니다. 즉 생명의 말씀을 따르는 우리들이 귀한 존재로서, 그러나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형제를 위한, 형제와 함께 하는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우리는 먼저 나눔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참된 제사는 바로 이웃을 위한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누어 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고 제 혈육을 모른 체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참된 제사임을 말하며, 우리의 삶에서 내게 필요한 것을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사랑의 결단과 용기를 강조합니다.

우리들의 현실 안에서 자신의 뛰어난 재능과 많은 재물, 높은 권력이 마치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인 양 내세우며 사리사욕과 부정축재, 횡포 등으로 형제를 내치고, 나누지 않고, 가슴에 한이 맺히도록 하는 어리석은 이들과 일부 잘못된 사회 구조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안에서 참된 소금과 빛의 삶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또한 좋은 것(?)과 최고를 외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지내는 우리에게 큰 유혹입니다. 나누는 것보다 더 가지고 싶고 내세우고 싶은 유혹이 항상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수없이 많은 유혹 앞에서 흔들릴 수 있는 많은 시간과 일들 안에서 내가 어떤 길을 걷고 있는 지 돌아보도록 노력합시다. 우리의 생명은 주님을 통해서 받는다는 사실과 매일의 삶이 가족과 형제들의 나눔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는 신앙인의 자세를 잊지 맙시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오 5, 16)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탁하고 명하신 것입니다. 나의 정성어린 나눔의 사랑이 외롭고, 쓸쓸한 삶에 맛을 내는 소금이 되고, 실망과 좌절에 빠져 있는 형제들에게 희망의 빛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며, 또한 정성어린 우리의 사랑을 통해 사람들이 주님을 찬양하도록, 더 나아가 주님을 찾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김정욱 신부
  |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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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빛과 소금의 생활

현대 과학을 통해 소금의 성분 안에는 짠맛을 내는 나트륨과 각종 미네랄이 들어 있음을 알게 되었고, 빛에도 식물의 광합성을 돕는 좋은 역할을 하는 가시광선과 화상이나, 피부암 등 인간의 건강을 해치게 하는 자외선, 인간의 건강을 이롭게 하는 적외선 등의 물질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구원에 필요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결정짓는 상징어로 소금과 빛의 모습이 되기를 호소하고 계신다. 이 말씀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금과 빛의 성분이나 유용성에 관한 관점이 아니라 소금과 빛의 특성을 통해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하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금과 빛의 특성을 잘 살린 신앙인의 모습이 착한 행실을 통해 드러남을 말씀하고 계신다. 신앙인들이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기 위한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독서의 말씀을 통해 들여다보았으면 한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누어 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들을 집에 맞아 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며 제 골육을 모른 체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너희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공동번역 이사 58, 7∼8)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는 길이 곧 참된 소금이요 빛의 길이 됨을 가르치고 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함에 있어서“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1코린 2, 2)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을 비우시고 속죄의 제물이 되어 인류를 구원하시는 희생의 제사이고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까지 인간의 구원을 위한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사건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기쁜 소식을 전할 때 어떤 지식이나 지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설파하시길 원하셨다. 우리들도 소금과 빛의 길을 가기 위해서 오직 십자가의 삶을 살 때야말로 진정한 신앙인의 길이요 착한 행실을 실천하는 길이 된다.

소금이 짠맛을 내기 위해서는 녹아야 하고, 초는 주위를 밝히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태워야 하듯이 하느님의 자녀인 신앙인들은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의 욕망을 비움으로써 착한 행실의 삶을 드러내어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신앙인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 부산교구 임영민 신부 : 2017년 2월 5일
  |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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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주님 영광 드러내는 진정한 단식

오늘 1독서는 시작 부분이 다소 어색합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구절 시작 부분에 한 구절이 빠져 있기 때문인데,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라는 이사 58,6의 구절입니다. 이렇게 되면 오늘 1독서의 내용은 아무리 단식을 하고 고행을 해도 알아주지 않는다며 불평을 하던 이스라엘에게 무엇이 참된 단식인지를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는데” 그게 무슨 단식이냐고 지적하시면서 주님께서 반기시는 참된 단식은 굶주린 이들과 양식을 나누고, 가련한 이들을 잘 대접하며,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 혈육과 원수가 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버리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주는 것”이 진정한 단식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이 바라시는 단식은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고, 자신이 바라는 것을 남에게 해 주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의로운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사 58,8은 이렇게 올바로 단식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빛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남을 위해 희생하며 생긴 상처가 낫게 되고 주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오늘 복음은 우리를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합니다(마태 5,13-16). 이 대목은 지난주 복음에서 봉독한 ‘참 행복 선언’에 이어지는 단락으로 산상설교 전체를 도입하는 부분인데,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산상설교가 이야기하는 “착한 행실”이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올바른 단식을 말합니다(마태 6,16-18). 더 나아가 올바른 기도와 자선, 올바로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것,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마태 5,17-7,27).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착한 행실을 통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기 위함입니다(마태 5,16). 우리가 행하는 착한 행실은 자신이 칭찬받고, 자신이 드러나 영광 받기 위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고자 한다면 자신을 온전히 버리는 진정한 단식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2독서로 봉독한 코린토 1서에서 자신이 지닌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 하지 않고, 약함과 두려움, 떨림을 바탕으로 그들에게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였다고 강조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힘이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만약 자신의 능력으로 복음을 선포했다면 모든 영광은 자기에게로 돌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는 자신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전해진 것을 보면 하느님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곧,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착한 행실을 보이는지, 얼마나 의로운지를 드러내곤 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그런 행실은 올바르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그러면서 참된 단식을 요구합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낮추며, 자기 자신의 약함만을 자랑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말입니다. 그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더욱 분명히 드러나고,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번 나의 행실은 어떠한지 되돌아봅시다. 나는 진정한 단식을 행하고 있는지 되돌아봅시다. 그리고 참된 단식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더욱 크게 드러나도록 합시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7년 2월 5일
  |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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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빛과 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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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 예수님의 제자,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며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어느 성가의 가사처럼 ‘당신을 몰랐더라면 더욱 편했을지도 모를 세상이지만’과 같은 마음이 될 때도 더러 있을 것입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 역시도 수많은 빈민들을 돕다가 너무 지치고 숨이 막혀 모든 일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어둠을 체험하신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녀가 어둠을 체험했던 그 순간,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많은 세상 사람들이 그분을 통해 빛이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어둠이 들어오면 가끔 ‘세상 사람들은 당신 없이도 잘 사는 듯한데, 주님, 왜 저만...?’ 이라는 물음표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때엔 ‘굳이 나만 왜?’라는 억울한 의문이 아닌, 하느님의 사랑을 먼저 체험하고 보여주신 분들, 곧 부모님, 예수님을 따랐던 신부님과 수녀님, 위로와 격려로 기도해 주었던 교우분, 내 잘못을 용서해 준 친구들, 그들이 나에게 빛과 소금이 되어준 순간들, 예수님을 증언했던 희생과 봉사, 사랑과 자비를 기억해봅시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흔하고 세상 살기 각박한 현실 속에, 성전에 신자 수가 확연히 줄어드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 때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도구로 쓰시고자 부르고 계십니다.

내가 가진 재능은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으로 주어진 나의 짠맛(선물)입니다. 그런데 그것 자체를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부정하고 나 자신조차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세상을 위한 소금이 되지 못합니다. 다시 한번, 주님께서 내게 주신 좋은 점을 발견하고 타인의 장점도 칭찬하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제자로 부르셨듯이, 우리도 서로가 서로를 주님께서 부르신 이로 인정하며 세상에 서로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으로 바라시는 모습입니다.

쓰러져 있는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다시 짠맛을 내고 그분을 증언하는 빛이 되도록, 일으켜 세우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제자로 그 생명의 삶에 동참하여 살아가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한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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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광우 토마스 신부
2023년 2월 5일 주보
  | 02.03
523 97.6%
사랑의 연료, 함께 더불어 지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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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2월 5일, 서품을 받았습니다.
시간의 리듬은 성실하게 흘러, 서른 해를 쌓아 놓았네요.

또 다른 사랑의 삶으로 뛰어들었던 그 소스라치게 어여쁜 시간을 기억했고 찬란했던 그날의 영롱한 꿈과 멀어졌던 날들을 아쉽게 돌아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믿음이 밥벌이가 되지 않도록 서로를 격려하며 무수한 어긋남을 바로잡았던 동기 사제들과 포콜라레 신부님들의 사랑에 감사드렸습니다. 그들의 사랑으로 저는 사제의 삶을 ‘제대로 살겠다’라는 의지를 거듭거듭 다질 수 있었으니까요. 우리는 서로 함께하며 거짓으로 치장하지 않을 용기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 시간이야말로 서로의 축복이고 행운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오늘 복음 말씀이 진심으로 무겁게 다가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에 의구심마저 솟구쳤습니다. “정말요?” “진짜요?”라고 주님께 되물을 뻔했습니다. “이렇게 모자란데요?”, “이렇게 탄탄하지 못한데요?”라면서 투정을 부릴 뻔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선언에 어떤 토를 달지 않는다는 사실이 제 마음을 점령했습니다. 믿음은 무수한 세상의 제한과 구속 안에서도 무한한 자유를 선물해주는 것임을, 비록 보잘것없어 보이는 삶일지라도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다는 진리를 다시 새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 더 열심히 자신을 닦고 연마해서 빛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추궁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진짜 고마웠습니다. 정말로 순수한 진짜 소금이 되기 위해서 스스로 더 노력하라거나 현재의 상태는 100%의 순도에 미치지 못한다고 경고하지도 않으시다니,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당신의 은혜로 이미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었으며 세상을 지탱시키는 소금의 삶을 살게 되었음을 명확히 밝혀주시기에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빛이라 하셨으니, 우리는 이미 빛입니다. 주님께서 소금이라고 이르셨으니 의심할 이유가 도무지 없습니다. 못내 미심쩍어하며 머뭇댈 사안이 전혀 아닙니다. 때문에 우리가 흔히 청하는 기도 “세상의 빛이 되게 해주십시오”라거나 세상의 소금이 되어 부패를 막는 삶을 살게 해달라는 기도는 옳지 않은 것이라 싶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참이며 진리이니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모자람을 우리 자신보다 더 분명히 파악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당신의 잣대를 우리의 자격이나 능력, 혹은 성품에 두지 않으십니다. 개개인의 허물에 전혀 상관치 않으시고 오직 가없는 은혜로써 소금이 되게 하셨고 빛이 되어 살게 하셨습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은혜를 우리 모두가 온전히 느끼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만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모든 영화를 버리고 온통 당신을 비우며 봉헌하시는 일에 주저함이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아직은 빛이 아닙니다”라며 뒷걸음치며 손사래를 친다면, “소금의 순도를 조금 더 높여 주십시오”라고 청하고 있다면 이야말로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 행태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빛이라 하셨으니 빛이 되어 살아가는 것, 반짝반짝 영롱한 빛을 발하기 위해서만 힘쓰는 게 마땅합니다. 우리가 소금임을 깨달았으니 소금처럼 세상을 살리기 위해서 녹아들어 지내야 옳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사랑에 깊이 반응하는 존재이기에 그렇습니다.

믿음은 무한한 하느님을 이 작은 영혼에 담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님의 흔적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곧잘 주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따르지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 방향을 잃고 갈라지고 흐릿해지기 일쑤인 것도 사실입니다. 결국 그럴듯한 겉모습으로 스스로를 속이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주신 축복의 완전함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곤고함을 어찌해야 할까요?

사실 우리는 모두가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코린토1서 15,9) 그런 우리들이 오직 주님 은혜로 소금이며 빛으로 변화됐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성실하심으로 오늘 우리를 더욱 “굳세게 하시고”, “기름을 부어” 새롭게 해주십니다. 하느님을 마음에 담아서 말하고 표현하며 실천할 능력을 선물해주십니다. 주님의 뜻에 항상 ‘예’라고 응답해드리지 못하는 우리 안에 튼튼한 당신의 뜻을 채워주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당신의 뜻을 위한 소금과 빛의 역할에 모자람이 없도록 응원해주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주님의 말씀 속에서 한없이 품어주시는 사랑을 느끼면 됩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믿어주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감격할 수가 있습니다. 끝없이 용납해 주시는 너른 사랑에 기대어 소금과 빛의 삶을 살아낼 수가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똑같이 소금과 빛이 되는 은혜인임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삶에서 주님의 뜻을 ‘생략’하거나 묵살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함께하는 마음이야말로 자신의 빛을 함지 속에 감추어 두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해줄 사랑의 연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한마음이 될 때, 세상을 더욱 환하게 밝히는 큰불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반짝이는 빛이며 순도 100%의 소금입니다.

이 진리에 민감하여 우리 모두의 삶이 진리의 빛으로 초롱초롱 빛나고 생기발랄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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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신문 2023년 2월 5일
  |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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