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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작은 희망의 등불을 들고
조회수 | 2,518
작성일 | 05.02.03
언젠가 제가 지독한 위장병에 걸려서 고생하던 때였습니다. 담당 의사는 제게 음식을 짜고 맵게 먹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당장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저는 어쩔 수 없이 그분 지시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동안 소금이나 고춧가루가 거의 들어 있지 않은 심심한 음식만 먹게 됐습니다.

거의 매끼니를 멀건 흰죽에다 시금치, 콩나물무침 등, 자극성이 전혀 없는 반찬들만 먹었는데 정말이지 그것보다 더 큰 고역은 없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저는 소금의 소중함이랄까 위력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때 저는 육개장의 그 얼큰하고 개운한 맛, 설렁탕의 그 은은한 맛, 그 기본은 다름이 아니라 소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소금을 치지 않고 찐 계란을 드셔본 적이 있으십니까? 소금 없이 찐 계란은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했습니다. 얼마나 먹기가 팍팍한지 모릅니다. 소금은 음식에 녹아 스며들어 전혀 보이지는 않지만 조미료 중 조미료입니다. 모든 음식에는 소금이 들어가야 제맛이 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올곧고 청렴한 삶을 통해서 악과 부패에서 세상을 정화시키는 사명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꽃이나 열매이기보다는 뿌리이기를 자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사람들을 향한 한줄기 구원의 빛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덤프트럭 운전기사였던 남편 부주의로 풍비박산이 난 한 가정을 알고 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가난을 딛고 일어서겠다는 지나친 욕심이 불행의 발단이었습니다. 하루를 쉬었어야 했는데…. 피로 누적은 졸음운전과 중앙선 침범으로 이어졌고, 9시 뉴스에서 자주 듣는 표현인 '마주 오는 승용차와 정면충돌'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모든 책임을 지고 '담장 안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사고 충격으로 평소에도 병약했던 아내는 몸져눕고 말았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 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딱한 신세가 됐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 동네에는 딱한 사람 보면 밤잠을 못 이루는 '해결사 수녀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수녀님은 즉시 3단계에 걸친 조치를 신속하게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하셨습니다. 제1단계로 수녀님은 근처 종합병원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병원에서 제일 '영향력있는' 사람 사무실로 돌격해 들어가셔서 그 자리에서 '오늘 즉시 입원'이라는 담판을 지으셨습니다. 제2단계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당장 아이들 받아들일 자리가 없다고, 보육사들 의견도 좀 들어봐야 한다"고 사정을 설명해도 막무가내셨습니다. 기어이 아이들을 제게 맡겨놓고 휑하니 달아나 버리셨습니다. 일단 큰불을 끄고 한숨을 돌리신 수녀님은 제3단계로 신자들을 이끌고 남편이 수감돼 있는 교도소로 향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의와 낙담으로 거의 폐인이 되어가고 있는 그 남편에게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당시 저는 솔직히 수녀님의 지나친 '밀어붙이기'식 일처리 방식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수녀님을 존경하게 됐습니다. 이웃의 고통을 마치 자신의 고통처럼 안타까워하며, 어떻게 해서든 도와주려는 그 마음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수녀님은 사고로 암흑의 한 가운데 놓여 있던 그 가정에 진정 '한줄기 구원의 빛'이셨습니다.

사회 전반적 분위기가 짙은 회색빛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작은 희망의 등불을 하나씩 손에 들 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한 실천신학자의 날카로운 지적은 우리 가슴을 쓰리게 만들지만, 수천 번 생각해도 옳은 말씀입니다. 그분 말씀이 이번 한 주간 우리들 삶의 양식이 되길 바랍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할 일이 아주 많습니다만, 다른 무엇에 앞서 아직도 부지기수로 외국으로 건너가는 우리의 어린 핏줄들을 위해 우리가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초대형 성당이나 예배당을 짓고 대대적 사목계획을 수립하는 것도 좋지만, 그에 앞서 이 땅의 수많은 신부님, 목사님, 장로님들이 그 아이들 한 명씩만 맡아 기르면 안될까요? 그리스도를 참으로 숭배하는 길은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금으로 도금한 십자가가 아닌 예수님이 매달리신 십자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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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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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과 색>

우리는 고유한 맛과 색을 지닌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 각자를 얼마나 독특하게 창조하셨는지요! 나와 똑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얼굴이 비슷하게 닮은 사람을 볼 수는 있습니다. 말투나 행동이 비슷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비슷할 뿐입니다. 70억이 넘는 사람들이 지구에 살고 있습니다. 이 많은 사람이 모두 다르고 각자가 모두 특별합니다. 우리들 모두는 다른 누가 흉내 낼 수 없는 특별함을 하느님께 받았습니다. 우리가 다른 어떤 사람을 따른다고 해도 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서로 다르며 특별하고 고유하고 독특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말 특별한가?”라고 의문이 들 때, “예, 특별합니다.”라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답해 주실 것입니다.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습니까?” 세상이 우리를 잃으면 어느 누구로 우리 자리를 메꿀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금의 짠맛이 음식의 맛을 냅니다. 우리의 고유한 맛, 역할, 존재가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흘러가게 합니다. 내가 없다고 세상이 안 돌아가겠냐고요? 내가 없다고 세상이 더 나빠지거나 더 좋아지겠냐고요? 어떤 답을 하시겠습니까? 내가 없으면, 우리가 없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직접 창조하셨잖아요. 우리를 빚어 만드시면서 고유한 사명을 새겨주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은퇴를 했거나, 실업의 상태이거나, 학교를 못 가고 있거나, 어떤 처지에 놓여있건 우리가 아무런 사명 없이 허송세월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별볼일 없어 보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나만의 맛을 내고 있습니다. 또 과거에 그랬습니다. 가장, 남편, 아내, 엄마, 아빠, 아들, 딸이란 이름으로 우리는 가족 안에서 많은 맛을 냈습니다. 짠맛, 신맛, 단맛, 쓴맛, 떨떠름한 맛까지 가족 안에서 냈습니다. 가족들은 나의 이 맛을 즐겼고, 함께 나눠서 만들어냈습니다. 학생, 신입사원, 대리, 과장, 부장, 사장이란 이름으로 우린 또 맛을 내왔습니다. 사회에서 우리 각자는 성공, 실패, 노력, 격려, 칭찬, 충고란 맛을 보았고 또 나눠줬습니다.

나는 어떤 색을 내고 있을까요? 어떤 색을 내 자신에게 칠하고 계십니까? 옆 사람과 똑같은 색을 덧칠하고 계신 것은 아니겠지요? 하느님께서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색을 칠해주셨다는 사실 다 아시죠. 그 색을 우리는 자꾸 감추려고 하는 듯 합니다. 우리 눈에 더 좋아 보이는 어떤 색을 자꾸 만들고 그 색을 덧칠하는 모습을 적지 않게 봅니다. 얼마나 하느님께서 안타깝게 보실까요? 정말 아름답고 딱 맞는 색을 우리에게 입혀서 보내주셨는데, 거기에 이상한 색을 덧칠하는 모습을 보시는 하느님. 그래서 저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덧칠한 것을 벗겨내고 본래의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색을 볼 수 있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우리의 색, 우리의 빛을 덧칠해서 감추고, 함지로 덮어 감추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고 비춰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색을 가지고 이 세상에 파견되었습니다. 색을 더 입힐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 고유의 색을 드러낼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중요한 맛과 색을 지니고 하느님의 특별한 명령과 함께 이 세상에 왔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 명령을 착실히 수행해 왔습니다. 어떤 때는 기쁨과 환희, 성공이었을 때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날에는 좌절, 절망, 실패, 아픔, 상처의 일들이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명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그것이 성공과 실패로 나뉘어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시선에서는 우리의 맛과 색이 제대로 발휘된 사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맛과 색이 더 진해지고 그래서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맛과 색을 더 진하고 풍부하게 해 주시는 분은 예수님뿐이십니다.

<김동일 신부 (예수회 수련원 부수련장)>
  |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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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매력적魅力的인 삶-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이 참 간명하고 강렬합니다. 늘 들어도 새롭고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의 소금입니다. 세상의 빛입니다. 참 매력적인 삶이, 아름다운 삶이, 맑고 향기로운 삶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삶입니다. 마침 어제 읽은 서울대교구 주보 2면의 ‘생명의 말씀’란의 예화가 너무 생생하고 감동적이라 그대로 인용합니다.

-어느 겨울 저녁 맨발의 어린 소년 하나가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불이 환하게 켜진 신발 가게 진열장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한 중년 부인이 소년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애야, 뭘 그리 뚫어져라 쳐다보니?”

소년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저는 지금 하느님께 신발 한 켤레만 달라고 기도하는 중이예요.”

부인은 소년의 손목을 잡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양말과 신발을 달라고 주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점원에게 세숫대야와 수건을 빌려서 가게 뒤편으로 소년을 데리고 가서 발을 씻긴 뒤 수건으로 닦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점원이 가지고 온 양말과 신발을 소년의 발에 신겨 주었습니다. 소년은 부인의 손을 꼭 잡고 가게를 나오다가 부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아줌마가 하느님 부인이에요?”-

마지막 “아줌마가 하느님 부인이에요?” 물음이 뇌리에서 내내 사라지지 않습니다. 제가 옆에 있었다면 “그렇다. 이 아줌마가 하느님 부인이란다.” 서슴없이 대답해 주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가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입니다.

하느님 부인처럼, 하느님 아들처럼, 하느님 딸처럼 세상 곳곳에서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저 하늘 높이에서 찾을 하느님이 아니라, 바로 내 주변에서 찾고 만나야 하는 하느님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당부말씀입니다

“이와같이 너희의 행실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우리의 모든 선행은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반영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성사聖事입니다. 세상의 소금처럼, 세상의 빛처럼 살아갈 때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이요 저절로 사람들은 좋으신 하느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부패를 탓해 본들, 세상 맛 없음을 탓해 본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 나부터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변명도 핑계도 통하지 않습니다. 가진 것 없어도 존재 자체로 말과 행실로 누구나 결심하면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부패를 막아주는 소금으로, 세상 살이를 맛있게 하는 소금으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해 본들, 세상의 차가움을 탓해 본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상은 결코 밝아지지도 따뜻해지지도 않습니다. 지금 여기 나부터 세상을 밝히는,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역시 가진 것 없어도 결심하여 실천하면 누구나 존재자체로 말과 행실로 세상의 빛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존엄한 인간 품위을 지니고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의 소금입니다. 세상의 빛입니다. 세상을 떠난 소금이, 세상을 떠난 빛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입니다. 공동체의 소금이요 공동체의 빛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진짜 존재이유입니다. 진짜 살아있는 삶입니다. 진짜 거룩한 삶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그분 제자들이, 성인성녀들이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았습니다. 세상에 녹아 세상을 맛있게 하면서 세상의 부패를 막아주면서 흔적없이 사라지는 소금으로 살았습니다. 스스로 태워 세상을 따뜻하게 덥히면서 세상을 밝히면서 흔적없이 사라지는 빛으로 살았습니다. 말 그대로 사랑의 소금, 사랑의 빛으로 살았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내가 있음으로 맛있는 공동체, 깨끗한 공동체가 되고 있습니까? 내가 있음으로 밝은 공동체, 따뜻한 공동체가 되고 있습니까? 탓할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입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세상의, 공동체의 소금으로, 세상의, 공동체의 빛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아갑니까? 주님은 분명히 답을 주셨습니다. 바로 소금과 빛의 비유에 앞선 여덟가지 참 행복선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숙제입니다. 참 행복의 비결이자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사는 지름길입니다.

-1.마음이 가난한 겸손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2.이웃의 아픔에 동참하는 연민의 슬퍼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3.마음이 온유한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4.하느님을 배고파하고 목말라 하는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으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5.하느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6.마음이 깨끗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7.평화를 이루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8.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용기와 사랑을 요구하는 평생 숙제입니다. 이런 이들이 진짜 살아있는 참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참사람 되는 데 이보다 더 좋고 중요한 평생공부는 없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는 여덟가지 참행복의 길입니다.

이어 오늘 이사야 예언자도 구체적으로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 살 수 있는 실천 지침을 제시합니다. 바로 참된 단식은 이런 사랑과 정의의 실천에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리하면 우리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우리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 것입니다. 우리의 의로움이 우리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우리 뒤를 지켜 줄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주님을 부르면 주님께서 ‘나 여기 있다.’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리는 것입니다. 굶주린 이에게 우리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 오르고, 암흑이 우리에게는 대낮처럼 될 것입니다. 아, 이 모두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 수 있는 사랑의 실천 지침입니다. 내 할 수 있는 한 이렇게 살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맛을 잃으면, 인간미人間味를 잃으면 참 문제입니다. 세상을 성화聖化해야 할 우리가 속화俗化된다면 그건 분명 재앙입니다. 말 그대로 맛이 간 삶이라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부패로 인한 변질變質, 변심變心, 변절變節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계속 정화淨火되고 성화聖化되어 주님을 닮아 맛있는, 멋있는 삶이 될까요?

영혼에 불이 꺼져 어둡고 차가운 삶이라면 또 어떻게 합니까? 제 한가지 생활 습관을 소개합니다. 새벽 산책중 기도할 때 저는 집무실 전등불을 환히 켜둔채 합니다. 산책 중 보기 위해서입니다. 집무실에서 흘러나와 춥고 어둔 밤을 밝히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불빛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지요. 어둠 속에 묻혀버린 불꺼진 집무실같이 불빛 꺼진 캄캄한 영혼의 방이라면 얼마나 암담暗澹하겠는지요.

그러니 죽는 그날까지 세상의 소금으로 살기 위해선, 세상의 빛으로 살기 위해선 변질되지 말아야 합니다. 맛이 가지 않도록, 늘 제맛을 지니도록 해야 합니다. 불이 꺼지지 않는, 늘 환히 밝고 맑게 빛나는 영혼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의 빛, 희망의 빛, 사랑의 빛, 기쁨의 빛, 평화의 빛으로 빛나는 영혼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삽니까?

제2독서의 사도 바오로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산 최고의 고수高手가 사도 바오로입니다. 바로 바오로 사도처럼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가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모시고 배우며 사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실은 약하여 두려움에 많이 떨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인간의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지 않았고,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에다 집중했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둔 사도의 믿음이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모실 때 샘솟는 하느님의 힘이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게 합니다. 참 행복 선언을 살 수 있게 하고 이사야 말씀을 실행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중심에는 파스카의 주님이 계시고, 파스카의 주님은 하느님의 힘이 샘솟는 원천原泉입니다.

하여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를 통한 공동전례기도를 통한 파스카 주님의 은총이 우리의 변질과 부패를 막아주어 늘 싱싱한 제맛의 세상의 소금으로 살게 합니다. 늘 환히 빛나는 영혼의 온유한 빛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게 합니다. 그러니 세상의 소금으로 살기위해, 세상의 빛으로 한결같이 살기위해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공부와 실천은 필수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 분도회 이수철 신부 : 2017년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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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무엇으로 세상을 밝힐 수 있을까

과학과 물질문명은 끝을 모른 채 멈추지 않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그만큼 더 행복해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지구화와 신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돈이 인간을 도구화하고 존엄성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괴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온갖 것들이 소비를 부추기고 오감을 자극하며 유혹합니다.

또한 권력과 돈에 의한 지배구조가 점점 강화되면서 대부분의 사회질서와 경제생활이 불평등 독점 영역이 확장되어가고 있습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차별이 석고처럼 굳어져가고 출발점에서부터 공정한 경쟁이 허용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법 앞의 불평등이 일상화 하고 있는 현실이지요.

양심과 윤리의식이 실종되어가고, 거짓과 불의와 불평등이 독버섯처럼 자라나 어둠을 드리우는 이 세상에서 신앙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빛이신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의 소명은 무엇일까요? 오늘의 말씀들은 어떻게 빛의 자녀로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세상을 밝히려면 무엇보다도 빛이신 하느님 안에 머무르면서 그분의 말씀을 실행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냄으로써”(1코린 2,4) 어둠을 밝히도록 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세상을 밝히고 어둠을 이기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빛이신 하느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잊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은 자비의 실행입니다.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처럼 “굶주린 이와 양식을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맞아들이며, 헐벗은 사람을 덮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이사 58,7.10) 사랑은 그 어떤 불의와 악도 이길 것입니다. 냉정함과 무관심과 차별은 더 큰 악을 초래할 뿐입니다.

나아가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를 것입니다.”(58,10) 인간다운 세상이 되도록 정의를 실행하고 온갖 속박에서 해방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악을 악과 폭력으로 물리치려 하지 말고, 선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하느님의 빛을 품고 착한 행실을 할 때, 우리는 제 맛을 내는 소금이 되고 어둠을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추악한 인간의 모습과 암울한 현실을 보면 극도의 절망감과 자괴감과 회의가 들기도 하지요. 그러나 빛의 자녀인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거나 체념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자비와 선으로 다스리시어 당신 뜻대로 이끄시는 빛이신 주님께서 친히 어둠의 저 깊은 곳까지 낱낱이 비춰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님의 손길을 믿으며, 우리 또한 자비와 선과 정의를 실행함으로써 빛이신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빛과 소금이 되어야겠습니다. 설령 그 길이 험하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버리고 세상에 속아 어둠 속에서 헤매는 가련한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겠지요.

오늘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관대하게 내어줌으로써 빛을 발하는 아름답고 행복한 날이길 희망합니다.

▦ 작은형제회 기경호 신부 : 2017년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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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사랑하며 사랑받기

지난 설에 가족 친척들과 시간을 보냈습니다. 청년이 된 조카들도 만났습니다. 조카들이 중고등학생이었을 때는 어떻게 지내는지, 꿈은 뭔지 이러저러한 것들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대학 입학, 졸업, 취업, 결혼, 출산 등 가장 기본적이고 누구나 다 물어볼 수 있는 것들을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제 조카들도 정말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많은 청년들과 같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청년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기가 너무 힘들어 울고 싶을 지경이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게다가 요즘 우리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참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직무를 받은 사제로서 이런 분들에게 과연 무엇이 복음,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을지 고민스럽습니다. 이렇게 고민하다보면 신앙이 사치스럽고 하루하루 힘겹게 생활하는 분들에게 그리스도의 계명, 하느님의 말씀은 복음이 아니라 마음에 무거운 짐을 하나 더 얹어주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분명 그럴 리가 없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주일미사 참례 의무, 고해성사, 교무금, 주일헌금, 봉사활동 모두가 짐스러워지는 느낌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빌론으로 끌려가서 오랜 시간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런 치욕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유배생활 전에는 경고성 메시지를, 유배 중에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그들은 정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 온 기쁨도 잠시 뿐이었고 그들은 폐허가 된 삶의 터전을 다시 일구어야 하는 냉혹한 현실과 만나야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느님은 또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이사 58, 7-8).”

종교와 국가가 분리되어 있지 않았던 그 당시 율법과 예배행위가 곧 그들이 지켜야 하는 국법이기도 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집과 살림살이 등 생계를 꾸려 나가는 것도 어려운 상황에서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와 율법준수는 짐스러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주위의 어려운 이웃을 돌보아 주는 빛나는 삶으로 하느님을 세상에 알리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니 정성된 마음 없이 형식적으로 하느님께 예배를 드렸을 겁니다. 그런 그들에게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 진정한 단식의 의미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날 식탁에서 한 형제가 로또라도 맞았으면 좋겠다고 농담처럼 말했습니다. 여기저기 자선과 기부하면 정작 자신을 위해 쓸 돈이 빠듯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되는 줄 알지만, 딱한 사정을 듣고 보면 자꾸 그렇게 하게 돼버린다고 했습니다. 수도자로서 절제의 덕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그 형제의 마음씀씀이는 결코 절제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앞가림하기도 버거운 백성에게 하느님은 더 어려운 이웃을 돌보라고 명령하셨지만, 그 명령 안에는 그렇게 실천하는 백성들을 반드시 돌보아 주시고 그들의 상처 또한 치유 받을 것이라는 약속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웃을 도와주며 하느님의 도움을 받고, 이웃을 사랑하여 상처를 치유 받는다는 약속입니다. 그 명령과 그 안에 들어 있는 약속은 오늘 우리에게도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살기 어렵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이들을 모르는 체 하지 않습니다. 나의 상처로 나도 힘들지만, 저 사람도 나처럼 그의 상처로 힘들어하고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 내게 위로해주고 따뜻하게 대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를 위로하고 따뜻하게 대해줌으로써 나의 상처는 치료받고 또 그렇게 위로받습니다. 사랑하며 사랑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참 하느님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처럼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이 그들을 다스려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알아서 마련해주신다고 믿습니다(마태 6,33). 이것을 글자 그대로 믿음이 너무 순진해서 위험해보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신앙은 부담스러운 마음의 짐이고, 교회는 쓸데없는 죄책감만 만들어내는 거추장스러운 조직일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금수저를 입에 물고 궁궐에서 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반대로 그분은 낮은 자보다 더 낮은 자로서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을 섬기셨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봉헌하셨습니다. 당신의 말씀과 약속을 보증이라도 하듯이 사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3.14.1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은 음식을 썩지 않게도 하지만, 그 음식을 맛나게도 합니다. 그리고 빛은 주변의 사람, 사물들이 드러나게 합니다. 즉 그것들의 존재가치를 부여해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마디로 이웃들을 살맛나게 해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느님이 챙겨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팍팍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를 나에게 다오. 그러면 나를 너에게 주겠다. 너는 너를 걱정하지 말라. 너는 내가 책임진다. 다만 이웃 안에 있는 나를 찾아와 다오.’

▦ 구속주회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 : 2017년 2월 5일
  |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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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 14)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는 빛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이 있습니다. 끝내 숨길 수 없는 빛이 있습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빛은 빛을 향하고 빛은 빛이라는 맑은 행실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의 빛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십자가로 더욱 밝아집니다. 빛의 자녀들은 십자가를 집니다.생명의 빛은 빵을 나누고 마음을 밝힙니다. 피할 수 없고 감출 수 없는 그리스도의 빛을 매순간 받아들이는 사랑의 자녀들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빛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빛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 14)

세상의 빛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7년 2월 5일
  |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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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저항하거나 거역하기 힘든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빛을 담고 있는 얼굴, 환한 햇살 같은 미소, 주변을 따뜻하게 하는 온화함…. 오늘 복음은 그런 ‘빛’을 머금은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임을 알려줍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3.14)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내고 간직해야 할 삶의 소중한 가치를 정직하고 성실하게 구현해온 사람에게서 발현되는 삶의 거룩한 열매가 바로 그러한 ‘빛’이고 그 빛으로 생산된 삶의 분말들이 ‘소금’입니다.

■ 복음의 맥락

연중 4주간에 이어서 연중 5주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셔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교훈적 가르침을 주십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무엇이 진정하고 참된 행복인지를 여덟 가지로 정리하여 알려주신 연중 4주일 본문(올해에는 ‘주님봉헌축일’을 지냈기 때문에 다른 본문을 읽었지만)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온유하며 의로움에 주리고 자비롭고 평화를 위해 애쓴다면…(마태 5,3-12 참조), 그 결과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이라는 이미지는, 제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어떻게 단련하고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개발 지침이 아니라,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대하고 구체적으로 해주어야 하는지 철저히 타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사랑의 규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맛있게 하고 사물을 밝혀주기 위해서 스스로는 소멸되어야 하고, 그 소멸을 통해 세상의 모든 사물들 안에 존재하게 되는 방식,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묵묵히 간직하고 걸어가야 할 삶의 지고한 신념입니다.

■ 소금과 빛

예수님께서는 ‘빛과 소금’이라는 두 개의 상징적 은유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본질적 역할을 설명해주십니다. 소금은 인간의 일상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요소입니다. 정상적 생활을 하는 가정이라면 소금 없는 집이 없을 것이고 인간의 신체에도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러한 소금을 만들기 위해 전제되는 것이 ‘빛’입니다. 빛은 하느님의 첫 번째 창조물이고, 따라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빛’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두 가지 은유를 제시하시는데,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14절)이며 ‘등경 위에 올려놓은 등불’(15절)로 설명하신 부분입니다. 생소하고 외딴 길을 갈 때, 저 멀리 불빛이 있는 마을이 보인다면 그것은 길을 가는 사람에게 두려움과 불안을 몰아내는 고마운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집 안에서도 등불이 등경 위에 있을 때 주변 전체를 볼 수 있어 일상이 아무 충돌 없이 진행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은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이고 등경 위에 올려진 빛이기에 모두에게 가시적으로 공개되고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보여주어야 할 현실과 감추어야 할 현실이 따로 존재하는 삶이 아니라 일관적으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16절) 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 빛이 되려면

제1독서는 세상의 빛이 되는 방식을 정확히 제시해줍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사 58,7)입니다. 인간의 의·식·주에 대한 기본권을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며, 인간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 요구는 사회보장제도나 정치적 기구를 통해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발적이고 구체적인 내어줌을 통해서 가능해짐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의 후반부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다시 한 번 언급됩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준다면”(9-10절)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10절)

■ 하느님의 힘

바오로 역시 자신의 연설이나 활동이 하나의 ‘의견’ 혹은 ‘사회적 담론’에 머무는 것을 철저히 경계하면서, 자기가 하는 일은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1코린 2,5)이라고 선언합니다. 자신의 모든 활동이 인간의 언변이나 지혜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힘”(5절)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4절)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활동했던 헬레니즘적 배경을 염두에 둘 때, 당시의 모든 지식인들이 자발적으로 추종하고 찬양했던 ‘지혜’(소피아)를 배격하고 ‘하느님의 힘’을 강조했다는 것은 매우 파격적인 선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관계 맺음을 통해, 그러한 하느님의 힘으로 가능해짐을 당당히 선포했던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생활 안에서 크고 작은 혁명을 주도한다고 해서 공동선과 구원이 쉽게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치밀한 조직과 사회적 연대로 인간의 기본권 보장을 촉구하고 구현하였다 하더라도, 그러한 복지적 협약 이후에도 여전히 도래하는 갈등과 모순, 파괴와 소외를 완벽히 해결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인간의 구체적 노력과 정성이 실종된 채, 공동선이라는 이념만으로 미화된 사회적 제도들은 인간의 품격과 존엄을 방기하는 무책임한 이기주의로 전락될 수 있습니다. 그런 미화된 가식과 위선으로는 결코 인간을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류의 구원은 ‘세상의 빛과 소금’인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빛과 소금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전히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진리를, 자신들의 언변이나 말재주가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산위의 고을이나 등경 위의 빛처럼 드러내 보이는 이들일 뿐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구원 능력을 왜곡되지 않게 보존하고(소금) 밝히 드러나게 하여(빛) 인류가 그분의 힘으로 살아가도록 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인 것입니다. 세상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오고, 이러한 진리의 증거는 온전히 나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타인을 빛나게 할 때 비로소 나는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빛과 소금의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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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김혜윤 수녀
가톨릭신문 2020년 2월 9일
  |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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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에게 폭탄선언과 같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예언합니다.

“너의 빛이 새벽처럼 터져나오리라.”(이사 58,8)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10)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사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참으로 당혹스럽게도 ‘우리의 빛’, 더 나아가서 ‘우리가 빛’이라고 선언합니다. 곧 ‘우리 안’에 빛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곧 ‘빛’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단지 빛을 들고서 비추는 것도 아니고, 빛을 반조해서 비추는 것도 아닌, 우리의 빛을 비추는 것이라니, 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된 존재인가?

그런데 여전히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빛의 자녀”(요한 12,36;에페 5,8)이니 ‘빛의 존재’임에는 틀림없고, 그리고 “세상의 빛”임에도 분명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세상에 타오르는 않고 있는 불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빛은 타올라야 빛이 되는데, 그리고 타오르려면 자신을 태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아직 밝게 환히 타오르지 못하고 있는 불이고 맙니다. 소금이 타인 안으로 들어가 녹아야 부패를 막고 맛을 돋우고, 빛은 자신을 태워야 세상을 품고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함은 세상 안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신원을 말해줍니다. 곧 ‘소금’은 타인 안에서 녹고, 빛은 타인을 품고 비춥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세상 안에 살되, 세상의 정신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정신, 곧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영혼”(<디오그네투스에게>)으로서의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저 ‘피안의 세상’이 아닌, 바로 이곳의 이 세상에 당신을 내어주시어, 빛의 하늘나라를 건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장소가 ‘이 세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서만 살거나, 세상과 결별하고서 피안의 세계에만 몰두하고 사는 이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촉구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러한 ‘세상의 빛’에 대해서, <제1독서>에서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10)

이러한 착한 행실에 우리의 사명이 있음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이는 우리의 본질적인 사명이 단지 어둠을 피하거나 막거나 몰아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선을 보호하고 행하고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일꾼이 되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불꽃으로 삼으십니다.’(히브 1,7 참조).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여전히 세상에서 타오르지 않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이 불은 바로 말씀이요 말씀의 영이신 성령의 불이요, 빛입니다. 이제 성령을 받은 우리에게서도 말씀의 불꽃이 타올라야 할 일입니다. 마치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그렇게 성령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살았듯이 말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1코린 2,4)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마태 5,16)

주님!
빛이 불타오르게 하소서.
제 안에 심으신 심지에 불을 붙이시고, 제 몸을 녹여 빛이 되게 하소서.
어둠을 피하지만 말고, 막고 부수게 하소서.
빛을 비추지만 말고, 껴안고 이끌게 하소서.
제 행실이 사람들을 비추고, 세상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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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2020년 2월 9일
  | 02.09
523 97.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오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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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누군지를 일깨워 주십니다. 빛처럼 뜨거워지는 신앙인이길 기도드립니다. 빛은 그 어떤 환경에서도 빛으로 존재합니다. 일상(日常)을 비추는 세상의 빛입니다.

소금과 빛은 하나입니다. 비우는 소금 비우는 빛입니다. 빛과 소금은 자신을 내어줍니다. 소금은 소금의 맛이 나야 합니다. 깨소금 같은 신앙생활을 희망합니다. 우리 또한 가톨릭 신자의 맛이 나야합니다. 소금은 소금덩어리로 있는 것이 아니라 소금은 녹아야 합니다. 자아가 녹아야 예수님이 보입니다.

자신을 녹이며 타오르는 등불처럼 비우지 않고서는 빛이 될 수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비울 때 사랑은 빛이 됩니다. 자신을 낮추지 않고서는 소금과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친히 소금과 빛이 되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랑의 나날들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빛과 소금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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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20년 2월 9일
  | 02.09
523 97.6%
살맛나게 하는, 어둠을 밝히는 사람들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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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문을 읽던 중 다음 세 말마디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라는 박노해(가스파르) 시인의 사진전 제목입니다. 이어지는 글도 좋았습니다.

“최고의 삶의 기술은 언제나 가장 단순한 것으로 가장 풍요로운 삶을 꽃피우는 것이니, 하여 나의 물음은 단 세가지다. 단순한가 단단한가 단아한가. 일도 물건도 삶도 사람도. 내 희망은 단순한 것, 내 믿음은 단단한 것, 내 사랑은 단아한 것. 돌아보면 그랬다. 가난이 나를 단순하게 만들었고, 고난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고, 고독이 나를 단아하게 만들었다.

그것들은 나를 죽이지 못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들은 나를 더 푸르게 하였다. 가면 갈수록 나 살아있다.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단순한 희망, 단단한 믿음, 단아한 사랑의 삶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참으로 한결같은 깨어있는 살아있는 매력적인 삶입니다. 참으로 희망할 때 단순한 삶이요, 참으로 믿을 때 단단한 삶이요, 참으로 사랑할 때 단아한 삶이겠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단순하고 단단하고 단아한 삶이겠습니까? 오늘 복음 말씀처럼 소금과 빛으로서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신자들의 삶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무 분명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신원입니다. 과연 소금과 빛으로서 단순하고 단단하고 단아한 삶입니까?

세상의 소금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빛이라 했습니다. 세상이 없는 소금과 빛은 무의미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속의 소금이요, 세상속의 빛입니다.

소금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녹아 스며들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이요 맛을 내는 역할입니다. 참으로 세상의 부패를 막는, 세상에 살맛을 내는 소금 역할을 하는 신자들인 우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어떻게 됩니까? 쓸모가 없어 버리게 됩니다.

“맛이 갔다!” 종종 듣는 말입니다. 음식은 맛이가면 버리기라도 하는데 사람은 맛이 가면 버릴 수도 없다는 말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변질變質, 변절變節, 변심變心, 변덕變德으로 맛이갈 때 음식이든 사람이든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그러나 소금이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도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일 따름이다.”

이런 삶이라면 너무 비참합니다. 아무리 풍족한 의식주의 외적 삶이라도 제맛을 잃은 이런 내적 삶이라면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 나이들어도 변질되지 않고 세상의 소금처럼 제맛을 잃지 않고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살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화두처럼 주어지는 물음입니다.

다음은 소금에 이어 빛입니다.

세상속의 소금이듯 세상속의 빛입니다. 세상이 없는 빛은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세상의 어둠은 밝히는 빛같은 존재가 바로 우리 믿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평상시는 너무 흔하고 당연한듯 잊고 지내지만 없으면 당장 필요로 하는 소금이요 빛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 없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겠는지요? 세상을 날로 부패하고 세상을 날로 어두워지는 절망적 현실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세상의 빛임을 선언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그렇게 하여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바로 ‘산위에 자리잡은 고을’의 빛같은 존재가, 집안을 밝히는 ‘등경위에 놓여진 등불’같은 존재가 바로 우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금과 빛은 바로 교회의 존재이유입니다.

세상의 중심에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우뚝 자리 잡은 여기 정주의 요셉수도원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살 때 저절로 복음 선포의 선교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소금과 빛으로서 우리의 신원입니다. 세상 탓, 남 탓할 것 없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나부터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참으로 아름답게 한결같이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이 소금이요 빛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세상의 소금이요 빛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 빛이 되기 위한 일차적 과제는 말씀 공부와 실천에 있습니다.

참으로 진짜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신 예수님과 일치에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갈수록,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록 저절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역할을 잘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여 우리가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 기도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신 주님과의 깊어지는 일치로 우리는 썪지 않고, 어두워지지 않고,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살기위한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 예수님과 사랑의 일치입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로 다음 고백을 통해 바오로 사도의 주님과의 일치가 얼마나 깊은지 깨닫게 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과의 일치에 있음을 봅니다. 사실 우리에게서 소금인 예수님이 빠져 버리면 우리는 곧 부패하게 되고, 빛이신 예수님이 빠져 버리면 마음도 몸도 온통 어둠 속에 빠져들게 됩니다.

허무와 무지, 무의미의 어둠이 우리를 지배할 것이고 온갖 해로운 영적 바이러스들이, 더러운 영들이 우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일치만이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게 합니다.

하여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약하고 두려움이 많고 많이 떨었던 약한 바오로가 어떻게 그렇게 강한 사람이 되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 수 있었을까요? 바로 성령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을 들어 보세요.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이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되어 성령의 힘,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갈 때 어눌함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공자의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 말재간이 번지르한 달변에 안색을 잘 꾸미는 사람치고 어진 사람은 드물다.’는 말씀도 생각이 납니다.

참으로 진짜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하나될수록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잘 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배치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앞에 진복팔단의 참행복 선언이 있습니다. 참 행복의 진복팔단,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슬퍼하는 자, 온유한 자,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자, 자비로운 자, 마음이 깨끗한 자. 평화를 이루는 자,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자,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처럼 살아갈 때 우리는 예수님과 일치가 되고 하늘 나라는 우리의 것이 되며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살아갈 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고 참 행복한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때 참 단순하고 단단하고 단아한,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이겠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영원한 롤모델은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주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살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참된 단식이란 주제에 이어지는 오늘의 말씀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야 예언자들 통해 쏟아내는 하느님의 말씀이 오늘 이사야서 제1독서를 통해 제시됩니다. 통째로 인용합니다. 이렇게 사랑과 정의, 공정을 살 때, 진짜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실천이 없는 우리의 유약한 사랑을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 네 가운데에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리는 것,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주는 것, 그러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 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얼마나 확신에 넘치는 힘차고 고무적인 하느님 말씀인지요. 사랑은 감상이나 낭만이 아닙니다. 구체적 오늘 지금 내 삶의 현장에서 사랑과 정의의 실천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참된 단식이요 세상의 소금이자 빛으로 사는 구체적 사랑 실천의 처방입니다.

녹아 스며드는 소금처럼, 자기를 태워 빛을 내는 촛불처럼 사랑 실천의 소금이요 빛입니다. 새삼 끊임없이 녹아 스며들어 사라지는 소금의 원천이, 끊임없이 타오르는 빛의 원천이 주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 예수님 안에 정주할 때 영원히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바로 믿는 이들인 우리의 신원이자 존재이유입니다.

이런 삶자체가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영광이요 복음선포의 선교가 됩니다. 세상 탓, 남 탓할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나부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단순한 희망, 단단한 믿음, 단아한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선적인 것이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신 예수님과 사랑의 일치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깨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살도록 부단히 격려하고 자극합니다. 살맛나게 하는 세상의 소금으로, 어둠을 환히 밝히는 세상의 빛으로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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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020년 2월 9일
  | 02.09
523 97.6%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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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에게 폭탄선언과 같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예언합니다. “너의 빛이 새벽처럼 터져 나오리라.”(이사야 예언서 58,8)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야 예언서 58,10)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오 5,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사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참으로 당혹스럽게도 ‘우리의 빛’, 더 나아가서 ‘우리가 빛’이라고 선언합니다. 곧 ‘우리 안’에 빛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곧 ‘빛’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단지 빛을 들고서 비추는 것도 아니고 빛을 반조해서 비추는 것도 아닌 우리의 빛을 비추는 것이라니, 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된 존재입니까?

그런데 여전히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빛의 자녀”(요한 12,36 ; 에페소거 5,8)이니 ‘빛의 존재’임에는 틀림없고, 그리고 “세상의 빛”임에도 분명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세상에 타오르는 않고 있는 불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빛은 타올라야 빛이 되는데, 그리고 타오르려면 자신을 태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아직 밝게 환히 타오르지 못하고 있는 불이고 맙니다.

소금이 타인 안으로 들어가 녹아야 부패를 막고 맛을 돋우고, 빛은 자신을 태워야 세상을 품고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함은 세상 안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신원을 말해줍니다. 곧 ‘소금’은 타인 안에서 녹고, 빛은 타인을 품고 비춥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세상 안에 살되 세상의 정신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정신, 곧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영혼”(<디오그네투스에게>)으로서의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저 ‘피안의 세상’이 아닌, 바로 이곳의 이 세상에 당신을 내어주시어 빛의 하늘나라를 건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장소가 ‘이 세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서만 살거나, 세상과 결별하고서 피안의 세계에만 몰두하고 사는 이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촉구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오 5,16)

이러한 ‘세상의 빛’에 대해서 제1독서에서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야 예언서 58,10)

이러한 착한 행실에 우리의 사명이 있음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오 5,16)

이는 우리의 본질적인 사명이 단지 어둠을 피하거나 막거나 몰아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 선을 보호하고 행하고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일꾼이 되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불꽃으로 삼으십니다.’(히브리서 1,7 참조)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여전히 세상에서 타오르지 않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이 불은 바로 말씀이요 말씀의 영이신 성령의 불이요, 빛입니다. 이제 성령을 받은 우리에게서도 말씀의 불꽃이 타올라야 할 일입니다. 마치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그렇게 성령의 타오르는 불꽃으로 살았듯이 말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코린토1서 2,4) 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빛이 불타오르게 하소서.
제 안에 심으신 심지에 불을 붙이시고 제 몸을 녹여 빛이 되게 하소서.
어둠을 피하지만 말고 막고 부수게 하소서.
빛을 비추지만 말고 껴안고 이끌게 하소서.
제 행실이 사람들을 비추고 세상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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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신부 2023년 2월 5일
  | 02.05
523 97.6%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 안에서 우리는 결코 작거나 보잘것없지 않습니다.

우리는 빛과 소금(마태오 복음 5장 13-16절)

수도원 가까이 장식용 전구를 파는 가게가 있습니다. 가게가 작고 아담한지라 주인이 있을 때는 보고 싶어도 쑥스러운 마음에 그냥 지나치다 영업이 끝난 뒤나 가게가 쉬는 날 유리 앞에 멈춰 서서 가게 안을 한참 들여다보곤 하지요. 가게 안에는 다양한 모양과 형형색색의 전구들이 가득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예쁘고 재밌고 신기해보였습니다. 보는 것만으로 파티에 온 듯 괜히 설레고 신나고 기분 좋은 웃음이 나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소금처럼 세상이 상하거나 썩지 않게 해줄 힘이 있고 다른 사람을 비추어 하느님께로 이끌만 한 빛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빛과 소금을 결코 숨겨두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하지만 때때로 스스로에게 그만한 능력과 자질이 부족하다면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사람들 앞에 드러낼 수 없다 생각해 함지 속에 더 감추어놓기도 하지요.

하지만 가게 안의 그 많은 전구가 서로 다르면서도 각각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뽐내듯 우리에게도 분명 하느님께서 주신 고유한 빛과 소금이 있습니다. 그것은 작아 보여도 한 접시에 담긴 음식의 맛을 내는 데 충분하고 한 사람의 발걸음을 비추는 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 가진 고유한 다정함과 따뜻함을 슬며시 꺼내놓을 때 그것은 세상을 이롭게 하고 다른 이들에게 환한 선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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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선교수도회 이승복 라파엘 신부
생활성서 2023년 2월 5일
  | 02.05
523 97.6%
참 멋지고 매력적인 삶
세상의 소금처럼, 세상의 빛처럼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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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바로 우리 믿는 모든 이의 신원입니다. 참으로 세상의 소금처럼, 세상의 빛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진정 신자들입니다. 참으로 세상의 소금처럼, 세상의 빛처럼 살아갈 때 참 멋지고 매력적인 삶입니다. 세상이 이처럼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세상 곳곳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이 짓밟힐 따름이다.”

설명이 필요없는 너무 자명한 말씀입니다. 참으로 변질, 변절, 변심하지 않은 한결같은 제맛을 지닌 삶인지요. 늘 제맛을 지닐 때 참 멋지고 매력적인 삶입니다. 부패로 맛이간 변질된 삶이라면 원상복구는 참 힘들 것입니다. 그러니 제맛의 소금으로 살아가기 위한 항구한 노력이 필수이겠습니다.

“음식이 맛이 가면 버리기라도 하겠는데 사람은 맛이가면 버릴 수도 없고 참 난감합니다.”

오래전에 들은 말마디가 지금도 생각납니다. 소금은 조미료나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있으면 모르지만 적절량이 없으면 금방 맛이 드러납니다. 또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 역할입니다. 그러니 소금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합니다. 음식 맛을 내기 위한 소금이요 음식의 부패를 막기 위한 소금입니다. 또 소금은 보이지 않으면 자신은 점차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면서 서서히 녹아 사라집니다.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작용하면서 자신은 서서히 사라지니 그대로 한결같고 묵묵한 희생적인 사랑을 상징합니다.

세상의 소금이라 했습니다. 세상을 떠난 세상과 단절 격리된 소금같은 존재라면 참 무의미한 삶일 것입니다. 세상을 떠난 존재라면 말그대로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너희는 세상이 소금이다”, 너희는 단수이면서 복수입니다. 참으로 변질되지 않고 한결같은 제맛을 지닌 세상의 소금같은 개인이요 교회공동체인지, 수도공동체, 가정공동체인지 성찰하게 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듯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같은 개인이나 공동체가 되라는 것입니다. 과연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같은 개인이요 공동체의 삶인지요? 서서히 꺼져가는 희미한 빛은 아닌지요? 늘 한결같이 세상을 은은히, 환히 밝히는 개인이요 공동체의 삶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행복한 삶일까요.

촛불의 이치가 소금의 이치와 똑같습니다. 마지막 끝나는 순간까지 서서히 녹아 사라지며 세상을 밝히는 촛불같은 사랑과 헌신의 삶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삶이겠는지요.

오늘 마태복음 소금과 빛의 상징어는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계속되는 예수님 산상설교에 나오는 일부입니다. 바로 산상설교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 몸소 산상설교의 말씀을 사셨기에 이렇게 힘차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앞의 참행복의 진복팔단에 이어지는 산상설교 말씀의 수행에 한곁같은 분투의 노력과 공부를 다할 때 비로소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같은 삶이겠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의 빛나는 모범이자 영원한 롤모델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입니다. 예수님에 계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따랐던 숱한 성인성녀 신자들이 없었다면 세상은 벌써 부패로 변질되어 사라졌을 것입니다. 마찬가지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따랐던 선의의 무수한 성인성녀들이 신자들이 없었다면 세상은 이미 캄캄한 어둠속에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른다는 교회공동체가, 또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해야 할,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제반 종교공동체들이나, 수도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세상에 동화, 속화되어 제맛을 잃고 부패된다면, 또 제빛을 잃는다면 그 폐해가 얼마나 크겠는지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하면서 세상을 성화聖化해야 할 종교공동체가 속화俗化된다면 참으로 절망적일 것입니다.

이런 자각이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에 속한 우리를 분발케 합니다. 다시 세상의 소금이 되어, 세상의 빛이 되어 살게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 역시 그 아득한 옛날에 우리를 위한 참 귀한 가르침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참된 단식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입니다.

하느님께서 참으로 좋아하는 단식은 밥을 굶는 단식의 아니라 사랑과 정의의 실천에 있음을 역설하십니다. 예수님이 참으로 좋아하셨던 이사야 예언자가 그대로 예수님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는 것은 막연한 추상이 아니라 다음 같은 구체적 사랑의 실천입니다. 참으로 말뿐, 마음뿐, 실천이 결여된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도 생략할 수 없는, 단숨에 읽혀지는 내용이라 제1독서 전문을 그대로 다 인용합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저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넔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흙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어찌 수천년전에 오늘날도 그대로 공감이 가는 이런 진리 말씀이 선포됐는지 참 불가사의한 하느님의 예언자 이사야입니다. 이런 사랑과 정의의 실천이 없는 삶과 유리된 단식이나 전례행위는 얼마나 공허하겠는지요!

어떻게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 수 있을까요? 답은 단 하나 진짜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살아가신 대로 온힘을 다해 살아내는 것입니다. 바로 제2독서의 바오로가 그 모범입니다. 참으로 겸손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성령의 힘, 하느님의 힘으로 파스카의 삶을 살아갔던 바오로 사도입니다.

“나는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애오라지 이런 죽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과 사랑으로 하나된 삶이라면 그 삶자체가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같은 삶일 것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파스카 예수님과 하나되어 세상의 소금이자 빛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빛은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하나될수록 비로소 우리 또한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평생 날마다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와 이 거룩한 미사의 공동전례기도 은총이 우리가 변질 부패되는 것을 막아 한결같은 제맛을 내는 세상의 소금으로, 또 한결같이 세상을 밝히는 환한 빛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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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신부
2023년 2월 5일
  |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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