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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죽지 않으면, 닮지 않으면
조회수 | 2,516
작성일 | 05.02.04
"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은 자신을 죽이고 버림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산상 설교의 한 부분으로써 그리스도인 사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 이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신앙인들의 사명이요 지상명령입니다. 시대의 징표를 읽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인의 삶인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

소금이 녹지 않으면 음식의 맛을 낼 수 없고 부패를 막을 수 없습니다. 소금은 자신을 죽여 녹을 때 비로소 그 역할을 다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 신앙인들 역시 자신을 죽여 세상의 참된 맛을 내어야 하고, 세상의 부패를 막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처럼, 순교자들의 장렬한 죽음처럼 자신을 죽이지 않는다면 결코 세상을 온갖 죄악과 부패로부터 구원할 수 없을 것이며 성모님의 순명처럼 자신(생각, 지식, 판단, 인간적이요 세속적 가치)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구하지 않는다면 결코 참된 인간미 넘치는 세상을 만들 수 없습니다.

세상이 아직도 온갖 죄악과 부패, 불의가 판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이 자신을 죽이고 버리지 않은 때문입니다. 즉 소금이 제대로 녹아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빛

빛은 자신을 비추어 어둠을 밝혀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빛이란 스스로 광채를 내는 빛이 아니라 빛의 근원으로부터 빛을 받아 다시 그 빛을 비추는 반사체로서의 빛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 신앙인들은 빛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빛을 받아 죄악과 부패의 어둠을 밝혀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인들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존재들로서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할 때 죄악과 어둠을 밝히는 참된 빛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끊임없이 빛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닮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반사체들인 우리 신앙인들은 그리스도를 닮지 않고선 결코 빛을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빛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로 향한 삶의 자세만이 세상의 빛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은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노력해야 하며 자신을 죽이고 버림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인지라 자신을 죽이고 비우는 일이 그리 쉬운일이 아니기에 하느님의 도우심과 은총을 청하며 자신의 사명을 다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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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전병이 요아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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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이 되는 삶, 십자가를 지는 삶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의 길을 따라 빛과 소금으로 살도록 부르신다. 우리는 가끔 세상의 어둠에 압도되어 자지러지는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어둠이 빛을 이겨본 작이 없다"(요한 1,5)는 사실을 명심하고 좌절해서는 안 된다. 소금은 녹아야 하고, 초는 자신을 태워야 한다.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은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사는데 있다.

1. 참 빛이 요구되는 세상.

몇 년 전에 뉴욕 시 전역에 정전사고로 약 2시간 동안 전깃불이 나가버렸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 때의 보도를 보면 시 전체가 약탈과 방화와 범죄로 무법천지의 수라장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현대 문명도시의 대명사처럼 불리던 뉴욕은 2시간 정도의 정전으로 완전히 범죄의 도시가 되어버렸고 인간의 야만성과 미개함은 너무나 적나라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인간이 이룩한 법질서와 문명이란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거품 같은 것인지를 여지없이 드러내 보여준 사건인 것이다.

밤을 밝히는 전등이 없을 때 그토록 인간의 모습이 동물적인 것으로 전락해버렸다면, 인간의 인간다움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생각해 보면 인간양심에 빛을 주고, 그것을 다듬는 법과 종교와 교육이 없다면 이간 사회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정글의 법칙밖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세상창조의 기록에 의하면, 창조는 빛과 어둠이 뒤섞인 혼돈의 상태에서 "빛이 생기어라"하시는 창조의 말씀으로 빛과 어둠을 갈라 세움으로 시작되었다. 빛이 커질수록 어둠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인간의 역사는 빛과 어둠을 갈라 세워 질서를 잡아가는 창조의 과정이라고 하겠다.

2. 세상의 빛이신 예수.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하시면서 우리를 당신께로 부르신다. 우리는 예수님이 참 빛이시고, 그분을 따라 살면 참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믿었기에 세례로 그분의 제자가 된 것이다. 그러면 "빛과 소금이 되라."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그분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는 길은 무엇인가?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누어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라들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른 체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너희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이사 58,7)고 하신다. 이웃의 아픔을 나누는데 참 빛이 되는 길이 있다. 빛이 되는 길은 말로나, 탁상공론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행동 없는 결심만으로 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구체적으로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는데 있다. '오늘' , '여기서' 아주 작은 일을 시작하는 데서부터 사랑을 살아야 한다.

3.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한 나눔의 삶은 바로 십자가의 삶이다.

참 빛이신 그리스도의 삶은 인간의 비참 속에 인간의 모습으로 신을 낮추어 오시는 사랑의 실천이며, 그분의 수많은 기적도 인간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사랑의 표현이었으며, 십자가의 죽음은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제물이 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메시지의 핵심은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완전히 내놓고 죽어야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과 함께 머물면서 "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밖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제2독서)고 고백하면서 십가의 어리석음이 참 구원의 길임을 역설하신다. 소금은 녹아야 짠맛을 낼 수 있고, 초는 자신을 태워야 빛을 발할 수 있다.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자신을 희생하고, 자기 주장을 양보하고, 가진 바를 내놓고, 자기 시간을 쪼개는 그런 일을 구체적으로 사는 삶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며 십자가의 삶임을 알아야 한다.

한국에는 가톨릭과 프로데스탄트를 합쳐 천만에 가까운 그리스도 신자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데는 별로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요즘 "하나뿐인 지구를 살리자", " 창조질서 보존"등의 소리가 요란하다. 환경보호에 대한 필요성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 일회용품을 줄이고, 샴푸나 합성세제를 거부하고, 농약 없이 농사를 짓고, 에느지를 절약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는 바를 사는 힘'이 절실히 요청된다. 그 힘은 어디서 오는가?

예수님은 빛이 되고 소금이 되라고 말씀만 하시지 않으시고 성체성사로 계속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고 쪼개어 주신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의 약함을 받아들이고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 살면서 , 그분께 의지하며 나를 내맡겨야 한다. 인간적인 노력만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길 수 없고 빛도 소금도 될 수 없음을 깨닫자. 소금이 싱거워지면 교회는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는 그리스도의 무덤이 될 뿐이다.

유영봉 신부
  |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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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의 또 다른 용도

우리는 대개 음식을 준비하고 간을 맞추는데 소금을 사용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해마다 생산되는 소금의 총량 가운데 고작 5%만을 이 용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소금은 시장에 출하되는 거의 모든 화공품의 제조에 반드시 들어가는 물질로 강철, 유리, 플라스틱, 제약, 심지어는 TV생산에도 사용되며, 인류가 사용하는 광물 가운데서 다이아몬드 다음으로 견고한 물질이기도 합니다. 이밖에도 소금은 중요한 속성 한 가지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얼음과 눈을 녹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금은 도로건설 및 겨울철 도로 유지관리에 많은 양이 사용됩니다.

유난히 춥다는 올해 겨울 때문인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예수님이 말씀하신 ‘빛과 소금’은 어둠을 몰아내고 음식에 맛을 내는 역할 이외에도 한 가지 공통적인 속성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빛과 소금’이야말로 꽁꽁 얼어붙은 것을 녹여버릴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신 것은 이것까지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기 위해 애쓰신 분입니다. 체념의 얼음에 갇힌 사람에게는 해방의 빛과 소금으로 녹여주었고, 고통과 아픔의 얼음에 갇힌 사람에게는 치유의 빛과 소금으로 녹여주었으며, 슬픔과 괴로움의 얼음에 갇힌 사람에게는 희망의 빛과 소금으로 녹여주었습니다. 게다가 완고의 얼음에 갇힌 사람에게는 끊임없이 해빙의 빛과 소금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은 더없는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예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차갑게 식어버린 얼음심장을 어루만져 온기가 흐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얼어붙은 마음에 온기를 전달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 안에 훈훈한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웅크리고 주저앉은 마음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박철현 신부
  |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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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내 마음의 소금과 빛

우리는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을 정말 많이 들었고,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말씀을 때때로 실천하지 못할까요?

우리가 느끼는 여러 마음 중에는 이기심과 이타심이 있습니다. 먼저 이기심은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좋은 것, 더 좋은 몫을 가지고싶기 때문에 나타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바탕에는 욕망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욕망은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형인 카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동생이 부러웠고, 이것이 곧, 질투와 증오로 이어져 동생을 죽이기에 이릅니다.

이렇듯 우리는 거의 매 순간 타인을 비교 대상으로 삼고, 타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타인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손해를 가져다주는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로 이 관계 안에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만을 찾는 악한 마음을 ‘이기심’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한편, 우리의 마음에는 이기심과는 다른, 내가 아닌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찾는 선한 마음인 ‘이타심’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녀를 대하는 부모님의 마음, 정말 딱한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기심과 이타심은 타인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차이점은 나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지, 다른 이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지 즉, 그 마음의 방향성입니다.

2000년 전, 나자렛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한 마음, 즉 이타심을 가지고 살아가셨던 예수님의 행적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의에 의해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게 되었음을 역시 알고 있고,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범을 따라 살아가려는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요청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나와 타인 모두의 구원을 위해 나에게만 집중하는 이기적인 마음보다는, 다른 이에게 소금이 되는 이타적인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시간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 우리 안에 주님의 빛을 모시고, 생명의 빛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아갑시다.

▦ 마산교구 임성섭 유스티노 신부 : 2017년 2월 5일
  |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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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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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착한 행실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신앙인들은 착한 행실이라면 하느님과 나 사이의 관계로만 국한 시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한 신자들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개인의 영성생활에만 관심을 두고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고, 성경공부도 열심히 하고, 좋은 말씀을 찾아 들으려고 노력하고, 피정도 찾아다니고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충실히 하는 것을 또 교회의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신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신자들은 교회에서 맡겨진 일들을 열심히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을 책임 있게 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신앙의 본분을 다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요즈음은 이런 신자들도 보기가 힘들어서 이 정도만 해 주어도 참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의 관심을 나 자신과 교회생활 안에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말씀은 우리의 관심이 나 자신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관심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향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모습이 세상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때 하느님께서는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 신앙인들이 하느님께 꼭 듣고 싶은 말씀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을 향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바라시는 “세상의 빛”이요 “세상의 소금”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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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남경철 루도비코 신부
2020년 2월 9일
  |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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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과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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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 마태오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소금은 맛을 내는 조미료이며 또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입니다. 소금은 자신을 녹여 음식에 맛을 주고, 10%도 되지 않는 염분은 세상에서 가장 큰 담수호인 바닷물을 섞지 않고 온갖 생물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합니다. 이렇게 소금은 자기희생과 변치 않는 마음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맛을 내는 사명이 주어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촛불, 등잔불, 전등 빛 등 그 어떠한 것도 빛의 본래 의미는 주변을 밝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그가 자리한 그 현장에서 빛을 던져 주어야 합니다. 기쁨의 빛, 구원의 빛, 웃음의 빛, 화해의 빛, 해방의 빛, 자유의 빛, 또 앞과 미래를 밝혀 주는 길잡이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반딧불의 불빛만으로도, 눈에 비치는 달빛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어른들은 말합니다. 칠흑 같은 망망대해에 등대 불빛은 제대로 가야 할 길을 알려준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실 이 세상을 사람들이 제대로 된 길을 갈 수 있게 하는 빛의 사명이 주어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금과 빛의 긍정적 역할뿐 아니라 부정적 역할도 말씀하십니다. 소금과 빛의 부정적 역할이란 곧 역할상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등불을 됫박으로 덮어두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금과 빛의 의미와 역할이 왜곡될 수 있다는 점으로부터 제자들의 본질과 사명이 역으로 강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세상을 위한 맛과 부패 방지의 상징인 소금이, 그리고 밝음을 주는 빛이 되어 살아주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신자임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라!입니다.

2. 인간은 소금의 원천이 되는 장소나 소금을 교역할 수 있는 장소 주위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경향이 늘 있어왔습니다. 그래서 과거 소금은 금의 무게와 가치가 거의 동등했을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인류가 발명한 것 중 최고는 바퀴이며, 발견한 것 중 최고는 불이다.”고 말합니다. 이 둘을 통해서 인류는 문명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고, 특별히 불 때문에 어둠과 추위의 공포를 극복하고, 화식을 통해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 빛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은 “너희는 소중하고, 귀하며, 최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신에 대해서, 상대에 대해서 특별함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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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박영진 베드로 신부
2023년 2월 5일 주보
  |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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