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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그 사람! 참! 개성(個性) 있네!!!
조회수 | 2,257
작성일 | 05.02.04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남들과 다른 성격, 성향, 기질 등을 흔히 개성(個性)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성들은 구체적으로 자신만의 옷차림, 머리 모양, 말투, 규칙적인 습관 등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과거에는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기준을 넘어서는 이러한 모습들이 ‘유별나다!’, ‘남보다 튄다!’ 등 그리 호의적으로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같지만, 오히려 지금은 남들과 차별화된 자신의 고유한 색깔로 인정을 받고 그래서 학교, 직장 등 공동체 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젊은 신부로서 저 역시 머리에 근사하게 염색도 하고, 조금은 튀는 옷차림(찢어진 청바지 등…)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많이 해 보았지만 아직까지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아마 저의 개성은 ‘평범함’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 신앙인 모두에게 아주 특별하고도 유별난 우리들만의 ‘개성(個性)’을 지니라고 또 구체적으로 표현하라고 촉구하십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그리스도 신자들의 본성, 특성이 두 가지의 상징적 개념, 즉 ‘소금과 빛’으로 정의되고 있는 오늘의 복음 말씀은 우리 자신들을 비 그리스도인들과 구별되게 하는 삶의 모습, 그리스도인만의 독특한 개성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소금의 기능이 소금 그 자체를 먹는 데 있는 것만이 아니라 음식의 맛을 내고 음식물들을 썩지 않게 보존하는 데에 있고, 또한 빛의 기능이 빛 그 자체만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고 주위와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데에 있다면, 우리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분명 “다른 사람들을 위한 존재”가 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인 우리들의 “삶과 행실”로 드러나는 그리스도인들만의 개성(個性)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도 기쁨과 평화의 씨앗을 뿌릴 줄 알고, 선함과 용서의 향기를 뿜어내는 내 자신의 모습은 그 자체로 다른 이웃들을 위한 소금과 빛이 될 것입니다.

지난 주 복음에서 이미 언급된, 마음으로부터의 가난, 온유함, 자비로움, 깨끗한 마음, 평화를 위한 노력, 박해 중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살아가려는 우리 각자 각자의 모습이야말로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과 구별되어지는 분명한 그리스도인의 개성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이기 때문에 가져야 하는, 신앙인만의 독특한 개성(個性)!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들의 삶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회개와 보속의 시기인 사순절은 남들과 다른 우리들만의 개성을 살리기에 좋은 시기가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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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황 현 율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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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빛과 소금

복음을 묵상하고, ‘나에게 소금 같은 사람들은 누구였던가?’ ‘나에게 빛과 같았던 이들은 누구였던가?’ 뒤돌아보면서 그들의 모범이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해 주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중요한 축구시합에서 심판도 모르고 넘어간 반칙을 솔직하게 고백하던 친구의 작지만 그러나 놀라운 정직함에서부터, 자신의 삶을 모두 바쳐 판자촌 철거민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아이들을 가르치시던 분의 삶에 이르기까지. 나이는 어리지만 옳고 깨끗하게 살려던 후배의 모습부터, 암으로 고생스럽게 투병하시면서도 불우한 청소년들을 그토록 아끼시던 노(老) 선교사신부님까지. 그 장소 그 순간에 빛나던 그분들에 대한 기억은 소중한 보석이 되어 제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서 묻게 됩니다. 나는 과연 그 누군가에게 빛과 소금 같은 존재가 되어 주었던가?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예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로 살아가라는 사명을 받고 파견된 신앙인들입니다. 그동안 나는 내 주위에 빛을 밝히고, 누군가의 절망에 희망의 빛을 가져다주었나요? 이 세상에 녹아들어가 맛을 내고 썩지 않도록 하는 소금의 역할을 하며 살아 왔나요? 지금의 내 모습은 혹시 짠 맛을 잃은 소금이 아닐까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진정 빛과 소금이 되어야하는 교회 공동체 본연의 모습을 초대 교회의 모범에서 보게 됩니다. 가진 것을 모두 서로 나누고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그들의 빛나던 복음의 기쁨을….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들을 부러워하며 그들의 일원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하느님의 빛을 밝히고 하느님의 맛을 내는 이들이었습니다.

사목 중에 가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이들을 만납니다. 크게 사고를 당했거나 큰 병에 걸린 이들 중에 사정이 너무 딱한 이들이 있어, 이에 대해 공지를 하면 참으로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시곤 하셨습니다. 초대 교회의 모습처럼…. 직접 병원을 찾아가 위로하고 건강식을 챙겨 주시던 분들, 봉사할 기회가 오면 열 일 다 제쳐놓고 앞장서시던 분들. 그분들 덕분에 많은 이들이 따뜻한 사랑의 온기를 느끼며 다시금 용기 내 살아갈 힘을 얻게 되었고, 때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곤 했습니다. 혹은 본국으로 돌아가 세례 받았다거나 그 곳 신부님, 수녀님들을 찾아갔다는 소식을 전해오기도 합니다.

각자 어느 위치에 있든,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빛과 소금으로서의 빛나는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5).”

▦ 수원교구 김영삼 요셉 신부 : 2017년 2월 5일
  |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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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세상의 빛과 소금인 신앙인들

오늘 전례의 주제는 ‘빛’이다. 그러나 이 ‘빛’의 의미는 연중 제3주일의 ‘빛’과는 다른 의미이다. 3주일의 ‘빛’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지만, 오늘의 전례에서는 ‘세상의 빛’이 그분의 제자들로 나타나고 있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반영시켜 세상에서 그분의 정체를 계속 이어나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러기 때문에 언행의 일치를 요청하게 될 것이다.

▪ 복음: 마태 5,13-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지난 주일의 산상수훈의 내용을 확대하는 것이다. 마태오는 오늘의 말씀을 산상수훈에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마음으로 가난하고’, ‘온유하고’, ‘자비롭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신자들이 바로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 ‘행복한’ 사람들의 생활은 ‘새로운 실체’ 즉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하느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빛으로 변화된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빛으로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13-14절). 그리스도인의 본성을 ‘소금’과 ‘빛’으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소금’이란 일반적으로 ‘지혜’를 뜻한다. 그런데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다. 그러므로 소금과 빛의 개념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 이 관계는 기능적인 ‘상대성’에 찾아야 한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고, 음식물을 썩지 않도록 보존하고,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예수께서도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13절)라고 하셨다. 복음에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였다. 이 땅의 개념은 세상(14절)과 일치하는 말로 모든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신앙인들이 어떻게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커다란 일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평범한 행동들을 통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면 이 행위가 모든 것에 새 ‘맛’을 주는 것이 아닐까?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쁨의 씨를 뿌리고 선과 이해의 향기를 뿜어내는 신자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삶의 ‘맛’과 ‘의욕’을 갖게 해줄 것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짓밟힐 따름이다.”(13절). 그런데 천연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릴 수 있겠는가? 자연의 영역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비극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그들 안에 구원의 ‘맛’과 그 맛을 전파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빛’의 상징적 개념도 알아들을 수 있다. 이 빛의 비유는 ‘산 위에’ 있는 마을의 비유(14절)와 등경 위에 얹어 비추게 하는(15절) 등불로 설명하고 있다. 빛이 제 기능을 할 수 있으려면 빛 자체로 드러나야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어야 생명과 기쁨, 움직이고 행동하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빛의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이 빛과 같이 온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14절)에 시선을 모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16절)고 결론을 내리고 계시다. 즉 행실을 통한 증거를 보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행실’은 산상수훈의 정신에 따르는 행실을 말한다. 즉 가난, 온유, 자비, 깨끗한 마음, 평화, 박해 중에도 평온을 잃지 않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오늘 복음은 교회의 선교사명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소금’과 ‘빛’이라는 존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교회가 세상에 봉사하고 또한 그 자체의 생명력과 사랑의 증거로써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빛’ 자체를 자신의 모습을 통해 세상에 비추어줄 수 있고 교회가 ‘구원의 보편적 성사’(교회 1.48)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 제1독서: 이사 58,7-10: 너희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

1독서도 ‘행실’에 의한 증거를 강조하고 있다. 의식주의를 벗어나서 사랑의 실천의 우위성을 강조한다. 즉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베푸는 ‘자비의 행위’ 이것을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갈 것이다. 그 행위는 새벽 동이 트는 것과 같이 시작되어 대낮같이 밝아 온다고 말하고 있다. 즉 사랑은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사랑이 폭발하고 입증되고 받아들여지고 확신을 주게 될 때, 그 사랑은 모든 사람을 뜨겁게 하고 비추어주는 불꽃이 되며 또한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게 된다.

교회가 지나치게 제도화되거나 의식주의적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 즉 다른 사람을 위하고 세상을 위하는 ‘사랑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사랑의 교회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 교회의 소명이며, 세상이 바라는 교회의 모습일 것이다. 이 때에 교회는 ‘그의 빛이 어둠에 떠올라 그의 어둠이 대낮같이 밝아지게 될 것이다’(10절).
제2독서: 1고린 2,1-5: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심오한 진리

이러한 교회의 사랑에 대한 소명을 재발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선포하는 메시지의 중심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면 된다.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1-2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그것이 무상으로 베풀어진 사랑의 선포이며,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의 선포이며, 그 ‘나약하고’ ‘무기력한’ 행위로부터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1고린 2,4) 세상에 증거해야 할 가장 큰 ‘빛’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으로써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때, 교회는 진정 산 위에 있는 마을과 같이, 온 집안의 식구들을 비추는 등경 위의 등불과 같이 자신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2017년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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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의문하지 않고 질문하는 사람이 세상의 빛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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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오프라 윈프리, 다이에나 황태자비 등 많은 유명 인사들에게 자신의 지혜를 전달하고, 베스트셀러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라는 책으로 수많은 세계 독자의 삶을 바꿔놓은 토니 로빈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넬슨 만델라에게 “어떻게 감옥에서 그 긴 세월을 견딜 수 있었습니까?”를 물었을 때 만델라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난 견뎌냈던 적이 없다오. 준비하고 있었던 거지.”

토니 로빈스는 넬슨 만델라의 말에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의문하지 말고, 질문하라!”는 말로 사람들 안에 있는 거인을 깨우려합니다. 분명 만델라에게서 의문하지 않고 질문하는 모습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의문하는 사람’과 ‘질문하는 사람’, 두 부류가 있다고 합니다. 물론 성공하는 사람은 질문하는 사람입니다. 넬슨 만델라는 의문하지 않고 질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의문하는 사람은 ‘이것을 내가 할 수 있을까?’, ‘나에게 그럴 능력이 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의 감정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질문하는 사람은 ‘이것을 어떻게 하면 해 낼 수 있을까?’, ‘나의 잠재력을 어떻게 하면 발휘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그 사람 안에는 이미 자신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의문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하는 것이고 질문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보통 사람이라면 ‘내가 그 오랜 세월을 이 감옥에서 견디어낼 수 있을까?’를 의문하겠지만, 믿음이 있었던 만델라는 ‘분명히 건강하게 걸어 나갈 것인데 그러려면 오늘 무엇을 해야 하지?’를 질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70이 넘어 감옥에서 나와서도 건강하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유일한 빛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 사도는 세례자 요한을 가리키며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 1,8)라고 말합니다.

참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빛이라고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어떻게 빛이 될 수 있느냐고 의문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믿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으시겠습니까? 그것에 따라서 빛이 될 수도 있고 어둠으로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께서 확언하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혹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야합니다.
소금의 짠 맛과 빛의 밝음은 생겨날 때부터 가진 ‘본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성은 자신이 그 본성임을 믿을 때만 밖으로 나옵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는 자신이 늑대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늑대의 본성을 가지게 되고 늑대의 행동이 나옵니다. 그 아이가 인간의 본성으로 행동하려면 먼저 자신이 인간임을 믿어야합니다. 그 전에는 인간의 행위가 절대 안 나옵니다.

아기가 두 발로 걸으려고 한다면 그 안에 자신이 인간이라는 믿음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걸음마도 하게 만들고 옹알이도 하게 합니다. 인간이라는 믿음이 들어와서 이제 어떻게 하면 자신의 믿음에 도달할까를 질문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임을 믿지 않으면 하느님의 본성이 우리를 통해 나오지 않습니다. “나는 나지.”, 혹은 “나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닮으려면 절대 세상의 빛이 될 수 없습니다. 그냥 예수님을 흉내만 내는 것입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으니 내가 예수님임을 믿어야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

내가 살지 않고 그리스도가 사신다면 이젠 나는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렇게 믿으면 이제 의문하지 않고 질문하게 됩니다. ‘예수님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

그렇게 나오는 행동이 세상의 빛이 되어 사람들이 주님을 찬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미국 슈퍼맨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정확한 기억인지는 모르지만 이렇습니다.

슈퍼맨은 자신이 슈퍼맨으로서 가진 힘을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찾아간 어떤 사람이 “네가 슈퍼맨임을 믿지 않는데 어떻게 슈퍼맨이 될 수 있느냐?”라고 하면서 높은 곳에서 세 발짝을 뛰고 밑으로 뛰어내려보라고 합니다. 슈퍼맨은 겁을 집어먹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세상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 절명의 순간이 오자 그 스승이 알려준 대로 그렇게 목숨을 걸고 뛰어내렸더니 밑으로 떨어지다가 결국엔 슈퍼맨이 되어 하늘을 날게 되고 세상을 구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고 할 때, 이것은 그리스도를 흉내 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본성이 자신을 통해 드러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자신이 하느님이라 믿을 때 드러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참 사랑을 실천한 것이지 그 전에는 흉내를 내며 살아온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로 일단락됩니다. 오직 하느님만 하느님처럼 완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라 믿어야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이 나옵니다. 하느님이라 믿지 않는 상태에서 하는 행동들은 겉으로는 선행 같아보여도 그것은 원숭이의 사람 흉내 내기에 불과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을 때 즈카르야가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라고 말한 것은 의문입니다.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벌을 받습니다. 빛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다고 했더니 성모님은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질문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믿지만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고 세상에 빛을 전해 주셨습니다.

나의 믿음은 앞으로 내가 변하게 될 목적지와 같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는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이라고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믿지 않으면 그분의 본성은 나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참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계속 본인은 원숭이라고 믿으며 사람 흉내만 내다 죽습니다.

우리는 믿고 오늘 빛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질문하는 사람이 되어 세상의 빛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믿지 않아 ‘저희가 정말 빛이 될 수 있을까요?’만을 의문하다 어둠으로 끝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너희는 빛이다, 너희는 소금이다’라고 하셨으면 이미 우리는 빛과 소금이 된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이고 하느님입니다. 이것을 믿고 의문하는 삶이 아닌 질문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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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2020년 2월 9일
  |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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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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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어제는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立春)이었습니다. 아직 따듯한 봄날의 햇살이 잘 느껴지지 않더라도, 하루하루 포근해지는 날씨를 통해 하느님의 따듯한 사랑이 여러분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제1독서에서도 하느님의 따듯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굶주리는 이, 가련하게 떠도는 이, 헐벗은 사람의 보호자이시며, 우리가 언제나 찾으면 ‘나 여기 있다’하고 말씀해 주시는 자애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가 그 사랑을 실천하기를 바라십니다. 주님의 자애를 간청하는 모두가 당신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죠.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찬란한 광채가 우리와 함께 머무르고, 하느님의 사랑은 구체화됩니다.

이어지는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기를요. 당신의 사랑이 구체화되고 더 많은 사람이 당신의 따듯한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지요.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에서 딱 한 가지만을 이야기합니다.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선포하겠다고요.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잘 드러내주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고, 듣고, 만지고,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사실 자체가 하느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가장 잘 드러내는 표징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점을 강조합니다. 실제로 바오로 사도는 오로지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셨고,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시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께서는 우리가 바오로 사도처럼 당신 사랑의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길 바라고 계십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우영우가 친구 최수연에게 이렇게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너는 봄날의 햇살 같아. 로스쿨 다닐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너는 나한테 강의실의 위치와 휴강정보와 바뀐 시험 범위를 알려주고 동기들이 날 놀리거나 속이거나 따돌리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해. 지금도 너는 내 물병을 열어주고 다음에 구내식당에 또 김밥이 나오면 나한테 알려주겠다고 해. 너는 밝고 따뜻하고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야. 봄날의 햇살 최수연이야.”

여러분도 누군가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는 따듯한 ‘봄날의 햇살’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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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시몬 요한 사도 신부
2023년 2월 5일 주보
  |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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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면 무엇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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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K’라는 한 유튜브 채널에서 소개된 내용입니다. 최근 한 프랑스 방송사에서 이러한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파리 한복판에서 한 여성이 여자아이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며 데려가려 할 때 시민들의 반응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 실험에서 단 두 사람만이 “저 사람 엄마 맞니?”라고 물으며 아이를 보호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공교롭게도 두 사람 다 한국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도와주려는 마음이 들었느냐 질문하니 보통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모르는 사람은 아이에게 “엄마 어딨니?”라고 묻는데 그 사람은 바로 아이를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하는 것 같아서 자기가 나서야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빛과 소금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은총과 진리를 주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은총은 사랑이고 소금입니다. 소금은 자신이 녹아서 어떤 것에 맛을 더하고 부패하지 않게 합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빛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줍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위 이야기에서 두 한국 청년들은 프랑스 파리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주었습니다.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아이들을 보호하는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소금입니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을 본 모든 프랑스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이것이 빛입니다.

그런데 빛과 소금이 되려면 먼저 자신이 짠맛과 빛을 받아들였어야 합니다. 가진 것만 줄 수 있습니다. 두 한국 청년들은 한국에서 그러한 사랑을 받았을 것이고 그러한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당신의 가르침을 주었고 십자가의 희생으로 피를 쏟아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은총과 진리로 새로 태어났고 그러니 당연히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세상으로부터는 별개의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청년일 때 한 본당 선배도 군대 첫 휴가를 나와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이러한 상황에 마주쳤습니다. 친구들은 그 선배를 사창가로 데려갔고 자신들도 들어가려 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 선배는 몸부림을 쳤고 그 과정에서 옷도 찢어지고 안경도 깨졌습니다. 그러다 결국 어쩔 수 없게 되자 친구들도 술만 한잔 더 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이 선배도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친구들에게 소외당할 두려움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한다는 두려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견뎌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부활로 그러다 죽어도 부활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된다고 무엇이 좋을까요? 바로 ‘창조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은총과 진리를 주는 이는 창조자입니다. 창조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창조자가 됨은 생명의 주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서 결혼도 실패하고 말기 암 환자로서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로서 열심히 살다가 생을 마친 일명 ‘풀빵 엄마’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자녀들은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엄마는 자녀들을 위해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끝내 돌아가셨습니다.

아이들은 죽음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점차 알아갈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신들의 빛과 소금이었다는 것을. 어머니가 끓여준 새해 첫날 떡국이 그들에겐 소금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보여준 가르침이 그들에겐 빛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들도 자녀를 낳으면 그렇게 부모가 될 것입니다. 받지 않으면 줄 수 없습니다.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 진리와 은총을 준다는 것. 이것은 어머니가 되는 길입니다. 창조자가 되는 길입니다. 왜 하느님은 우리가 창조자가 되기를 원하실까요? 피조물은 소멸하지만, 창조자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창조자가 되어야 합니다.

창조자는 능력자이기도 하지만 그 능력은 에너지에서 나옵니다. 생명이 에너지입니다. 에너지의 소유자만이 영원히 자신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자만이 영원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오늘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떤 어머니가 되는 것일까요? 자녀에게 인간이란 믿음을 주는 부모를 넘어서서 하느님이란 믿음을 주는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각자가 가진 믿음을 줍니다. 내가 먼저 하느님 자녀임을 믿어 하느님 자녀처럼 은총과 진리를 흘려주면 나에게서 또 다른 하느님 자녀들이 태어납니다. 그러면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 자녀의 어머니가 됩니다.

인간을 낳은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피조물이기에 영원할 수 없지만, 하느님 자녀를 낳는 어머니는 창조자 하느님의 협조자가 되어 영원히 삽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처럼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을 주는 이들이 영원히 삽니다. 그 믿음을 주는 방식이 은총과 진리를 흘려주는 것입니다. 은총은 하느님 생명이고 진리는 그리스도의 모범입니다. 하느님이란 믿음을 가진 자녀를 낳는 어머니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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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2023년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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