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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우리 평생의 갈증을 채워주실 분
조회수 | 2,546
작성일 | 05.02.25
연례피정 중에 이 묵상글을 씁니다. 피정에 오기 전까지 피정에 대한 기대도 컸었고 계획도 많았습니다.

'이번에는 꼭 신구약성서를 한번 통독해야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오솔길도 마음껏 걸어야지. 피정때 식사도 잘 나오는데, 오랜 만에 영양보충도 좀 해야지. 광야체험의 날엔 나만 알고 있는 비밀 갯바위로 가서 씨알 굵은 우럭도 좀 건져 오랜만에 회맛도 좀 봐야지.'

그런데 하느님 계획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 모든 계획을 접게 하시고 특별 개인 피정을 시키시더군요. 고통 피정을 말입니다.

피정 시작한 날부터 난생 처음일 정도로 지독한 독감에 걸려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뼈마디 하나 하나가 다 쑤셔대면서 열이 오르기 시작하는가 하면 즉시 한기가 다가와 이빨마저 자동으로 딱딱거립니다. 즉시 이불을 안 덮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 몇분 지나지 않아 땀이 비오듯 흐르기 시작하지요. 그때부터는 입술이 바싹 마르면서 지독한 갈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고맙게도 한 형제가 날라다준 식판에 여러 가지 먹을거리가 있었지만, 시원한 물 한 그릇이 제일 먼저 제 눈에 띄었습니다. 제게 정말 가장 큰 위로였습니다. 한 그릇의 물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그 물 한 그릇은 제게 그야말로 생명의 물이자 구원의 물 한 그릇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시다가 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납니다. 여인에게는 운명적 만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기구한 운명을 지닌 여인이었습니다. 마음 한가운데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한 지독한 사랑의 갈증을 지닌 여인이었습니다. 그 허전함과 갈증을 채우려고 여인은 끊임없이 이 남자 저 남자를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남자를 다섯 명이나 바꿔보았지만 그래도 여인의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동네 사람들은 그 여인의 문란한 사생활을 이미 다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길을 가다가 그 여인을 만날 때마다 얼굴을 피한다든지 멀찍이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뒤에서 수군거렸습니다.

"저런 더러운 여자! 해도 해도 너무하지, 지금 남편이 도대체 몇번째야?"

그래서 그 여인은 여간해서는 밖으로 나다니지를 않았습니다. 그래도 물 없이는 살수가 없었기에 사람들이 물 뜨러오는 아침 저녁 서늘한 시간을 피해 뜨거운 한낮에 물을 길으러 온 것입니다.

그렇게 그 여인은 예수님과 운명적 만남을 가집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 가련한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 여인의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죽음과도 같은 갈증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자상하신 예수님과 '참 만남', '일생일대의 은혜로운 만남'을 통해 여인은 서서히 자신이 처한 비참한 실상을 파악해 나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채울 수 없는 갈망을 채워주실 분이 바로 자기 앞에 앉아 계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선생님이야말로 제 평생의 갈증을 채워주실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우리 삶은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만났다는 점에서 참으로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분은 아무리 퍼내도 언제나 시원한 샘, 영원한 구원의 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그분은 우리 인생의 여러 길목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루라도 빨리 우리 자신의 실상을 파악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에게 건네주시려고 시원한 샘물이 가득 담긴 물동이를 손에 들고서 말입니다.

너무나 돌고 돌다가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예수님을 찾게 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그렇게 되면 너무도 불행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진면모를 한 순간이라도 빨리 발견하면 할수록 우리는 훨씬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임을 확신합니다.

이번 사순절, 어떻게 해서라도 다시 한번 예수님과 은혜로운 만남을 체험하는 은총의 시기가 되길 기원합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예수님 그분과 '참 만남'으로 인해 의미있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을 스치는 순간, 우리 인생은 점화된 촛불처럼 의미와 활기를 지니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자취가 우리 삶에 각인되는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한번 영적 여정을 힘차게 걸어갈 수 있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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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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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목마르지 않는 물

공기, 물, 태양의 에너지는 생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입니다. 갈증을 느끼신 주님은 물이 있는 우물가에 가시여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하시다가 “생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 생명의 물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진실하시고 주님의 일은 자비로우시므로 주님께 청하는 것으로 우리는 생명의 물인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마시게 됩니다.

요사이는 강물을 그대로 먹는 사람도, 우물물을 먹는 사람도 없으며 수돗물도 그대로 먹지 않고 정수기를 통해서 마시고 있습니다. 여행하는 사람들 손에서 생수통을 흔히 볼 수 있고, 차 안에는 생수통을 가지고 운전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모시고 머리에 기억하면서 살고 있다면 주님의 말씀 안의 목마르지 않는 물을 마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으로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공급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입니다. 사제는 하느님 말씀의 전달자입니다. 이 직분을 직무유기 하거나 중지한다면 사제로서 탄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샘솟는 주님의 말씀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기도와 깊은 묵상의 삶에서 나옵니다. 사제의 마음 안에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이는 사제의 역할 만이 아닙니다. 세례성사를 받은 모든 신자도 같은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사 끝에도 "복음을 전하시오." "복음을 실천하시오."하는 말을 듣고 이웃에게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지 않으면 신자로서 직무를 유기하는 삶입니다. 생수통을 들고 여기저기 다니며 자신이나 다른 이에게 전해주는 것같이 주님의 진실한 말씀과 자비로운 업적을 전해주어 모두가 목마르지 않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 분도회 이석진 신부 : 2017년 3월 19일
  |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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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은혜로운 만남

해외 출장 다녀오는 길에 기내 서비스로 제공되는 최신 영화 두 편을 보았습니다. ‘덕혜옹주’와 ‘밀정.’ 두 편 다 개화기 한국 근대사의 슬픈 과거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더군요. 꽤나 서글펐던 우리 민족의 지난 세월을 다시 복기하는 듯해서 마음이 싱숭생숭했습니다.

두 영화는 모두 나라 잃은 것만 해도 서러운데, 아버지 고종황제마저 억울하게 여의고, 강제로 일본으로 건너갔던 덕혜옹주의 신산한 삶과 죽음,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기 위해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청춘을 불태우던 앳된 얼굴의 독립투사들의 고뇌를 실감나게 묘사했습니다.

영화 내내 펼쳐지는 장면 장면들이 결코 돌아보고 싶지 않은 우리 민족의 수모와 굴욕, 서러움과 아픔의 시나리오여서 더욱 그랬습니다. 더구나 아직도 우리나라의 현실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아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참 그랬습니다.

따지고 보니 그렇습니다. 그리 길지도 않은 우리 인생, 어찌 그리도 우여곡절을 거듭하는지요? 우리 네 삶이란 것,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우리네 인생은 멋진 영화 배경처럼, 혹은 고급스런 인테리어 잡지 화보처럼 그렇게 아름답다거나 화려한 것이 아닌 듯합니다.

그보다는 삶이란 것, 얼마나 팍팍한지 모릅니다. 때로 얼마나 더 굴욕을 견뎌내야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네 인생, 결코 호화롭지도 그렇게 낭만적이지도 않습니다. 따스하고 환한 햇볕이 드리운다거나 멋진 무지개가 뜨는 순간은 한 순간입니다. 대부분의 순간은 비참과 슬픔을 그저 묵묵히 견뎌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대낮에 물을 길으러 몰래 마을 공동 우물가를 찾은 사마리아 여인의 삶 역시 만만치 않았습니다. 때는 햇빛이 가장 강렬한 정오 무렵이었습니다. 대체로 근동 지방에서는 정오 무렵, 너무나 뜨겁고 건조하기에 가급적 외출을 삼갑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하필 정오 무렵 물을 길으러 우물가로 나왔습니다. ‘정오 무렵 우물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인은 사람들을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보통 이스라엘 아낙네들은 한풀 더위가 꺾인 저녁 무렵 우물가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 시간 거기서 여성 특유의 잡담과 뒷담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정오에 물을 길으러 나온 것은 그들의 시선, 그들의 입방아를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는 사실 다섯 번이나 남편을 교체했던 사연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다섯 번이나 새로운 사람을 만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만큼 내면의 상처가 깊었던 것입니다. 남자로부터 받은 충격이 컸던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컸던 것입니다. 아마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녀의 욕구를 완벽하게 충족시켜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여인은 혹시나 하고 이 남자 저 남자를 찾아 헤매 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롭게도 사마리아 여인은 기적처럼 예수님과 일대일로 만납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 가련한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 여인의 채워지지 않는 죽음과도 같은 갈증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자비하신 예수님과 ‘참 만남’, ‘일생일대의 은혜로운 만남’을 통해 여인은 서서히 자신이 처한 비참한 실상을 파악해 나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채울 수 없는 갈망을 채워주실 분이 바로 자기 앞에 앉아 계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선생님이야말로 제 평생의 갈증을 채워주실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인생 역전은 그냥 주어진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마음은 새 삶을 향한 절박함, 간절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자비와 능력만을 신뢰하며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외친 것입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요한복음 4장 15절)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2017년 3월 19일
  |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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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비록 두레박이 없을지라도!

저만 그렇게 느끼거나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욕구와 갈구가 다르게 저에게 다가오고, 욕망과 갈망이 저에게는 다른 의미로 이해됩니다.

욕구와 욕망이 많은 경우 안 좋은 뜻, 다시 말해서 육체적이고 쾌락적인 뜻으로 쓰이는데 비해 갈구와 갈망은 영적인 것을 구하고 바라는 것으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영적인 갈구나 갈망은 어색하지 않지만 영적인 욕구나 욕망은 흔히 쓰이지 않기에 어딘지 어색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 인간의 갈증에 대해서 얘기하고 그 갈증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에 대해서 답을 줍니다.

저는 여기서 자문을 합니다. 나는 갈증 목마름을 느끼고는 있는지? 있다면 그 목마름은 어떤 목마름인지?

저는 사춘기와 20대까지의 방황을 끝낸 후에는 내내 행복했고, 지금은 더더욱 행복합니다. 저는 제 나이의 다른 사람들보다 건강하고, 무엇보다도 사랑을 참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행복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 미안합니다.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지금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고 불행해 하는데. 그런데 다른 한 편 나의 행복이 참 행복인지, 이 행복 때문에 영적인 갈증이 크지 않은 것은 아닌지 성찰케 됩니다.

문득 군대 생활 할 때가 생각이 납니다. 노상 군가만 부르고 꽥꽥 소리 지르는 분위가가 너무도 삭막하고 처량할 때 국군의 방송을 시작할 때면 으레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 나왔지요. 이때처럼 클래식 음악이 감미로웠던 적이 그 전도 그 후도 없었지요. 너무도 메마른 그때의 감성이 그렇게 음악의 갈증을 느끼게 했던 거지요.

음악보다 더 갈증을 느낀 것은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성당이 그리웠고 영성체가 너무너무 그리웠습니다. 그런데 성당이 없으니 법당에도 나가고 교회에도 가 그 갈증을 덜었습니다.

그때와 비교할 때 저는 저의 지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좀 헷갈립니다. 그때만큼 영적인 갈증이 부족한 지금을 걱정스러워해야 할지, 갈증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충족된 삶을 살고 있음을 그저 감사하면 되는지.

그야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이 세상의 행복이 영적인 갈증을 못 느끼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저를 경계하면 되겠지요. 그럼에도 이 얘기를 한 이유는 저와 달리 영적 갈증을 느끼는 분들에게, 다시 말해서 제가 미안하게 생각하는 분들에게 격려를 드리기 위해섭니다.

지금 여러분이 너무 고통스럽고 불행하다고 느끼신다면, 지금 아무 즐거움도 기쁨도 없고 무미건조하시다면, 지금 내 곁에 아무도 없고 그래서 너무도 외로우시다면 오늘 사마리아의 여인처럼 영적인 갈증을 호소하십시오.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왜냐하면 영적우물은 깊은데 두레박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사마리아 여인처럼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우리는 갈증만 느끼면 되고 갈망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여인처럼 천진난만하게 청하면 됩니다. 주님은 청하기도 전에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시잖아요?

▦ 작은 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2017년 3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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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일상에서 하느님을 알아보는 해방의 길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푼 꿈을 안고, 종살이를 하던 이집트를 탈출합니다. 그들은 이제는 파라오의 지긋지긋한 속박도, 목마름과 배고픔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은 해방의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픔과 목마름과 배고픔이 없는 세상이 있을까요?

이집트를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금 고통스런 일상을 맞습니다. 그들은 목이 말라, 모세에게 불평합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왔소? 우리와 우리 자식들과 가축들을 목말라 죽게 하려고 그랬소?”(탈출 17,3) 그들은 자신들을 해방시켜주신 하느님께서 더 이상 함께 계시지 않고 자신들을 돌보지도 않은 것처럼 아우성을 칩니다.

그러나 우리와 사랑의 대화를 원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떠나 홀로 계신 적이 없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리라 약속하셨지요, 우리가 아파하면 함께 아파하시고, 우리가 배고프고 목마르면 하느님께서도 배고파하시고 목말라하십니다. 부활을 향한 길목에서, 나의 고통과 상처, 외로움과 억울함 가운데 언제나 함께해주시는 주님을 굳게 믿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유다인(4,9), 선생님(4,11),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4,12), 예언자(4,19), 그리스도, 메시아(4,25.29), 세상의 구원자(4,42)로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시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물을 주러 오신 메시아이심을 알려줍니다.

부활을 향한 발걸음은 메시아 예수님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에게 다가가는 몸짓과 사마리아 여인의 예수님을 향한 태도를 통해 가능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다인들로부터 멸시를 당하고 소외된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다섯 남자와 살았기에 자기 민족에게서조차 거부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하느님의 법에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가장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올바로 살라고 훈시하기 위해서나, 행동을 탓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그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십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오히려 그녀에게 물을 달라고 청합니다. 상처받고 소외된 그녀에게 희망과 평화의 씨앗이 숨어있음을 보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안에 있는 생명과 희망의 씨앗을 발견하고, 그들의 고통 안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데서 해방이 시작됨을 알려주십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아름다움과 좋음을 인정하고 보도록 해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바로 가난하고 상처받고 소외된 이들과 보잘것없고 무능하고 말썽부리는 이들 한 가운데 계심을 알아보도록 힘써야겠지요.

한편 사마리아 여인은 유다 남자를 거부하지 않고 만납니다. 다가와 물을 달라는 예수님께 물을 건네고 대화하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깨달아갑니다. 그녀는 사회적 금기나 한계 밖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뜻을 용기 있게 받아들입니다. 그녀는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과의 단절을 뛰어넘었고, 모세가 세운 가리짐 산에서의 예배를 극복하고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오늘도 내 삶의 모든 순간에 함께하시는 주님을 발견하고 믿도록 힘써야겠습니다. 또한 사마리아 여인처럼 지금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건과 사람과 상황에 대해 깊이 숙고하고, 삶의 한계와 사회적 금기를 벗어남으로써,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마실 수 있었으면 합니다.

▦ 작은 형제회 기경호 신부 : 2017년 3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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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생수의 샘이자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지금이 바로 그때다-

지난 사순 제1주일 주제는 ‘광야에서 유혹을 이기신 예수님’이었고, 사순 제2주일 주제는 ‘예수님의 변모체험’이었고 오늘 제3주일은 ‘생수의 샘이자 세상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제4장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와의 만남이 참으로 흥미진진합니다. 바야흐로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요한4,6).

바로 우리 삶의 자리 지금 여기가 예수님이 앉아계신 ‘야곱의 우물’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야곱의 우물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탈출기에 모세가 호렙의 바위를 쳤을 때 바위는 샘솟는 우물로 변했고 목마른 백성들은 갈증을 해갈했습니다. 샘솟는 우물로 변한 호렙의 바위가 상징하는바 역시 예수님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도 이와 관련됩니다.“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시편95,7ㄹ.8ㄴ).

바로 오늘 탈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므리바에서처럼, 마싸의 그날 광야에서 했던 것처럼 우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주님을 시험하였고 주님이 하신 일을 보고도 그분을 떠보았다고

오늘 화답송 시편은 노래합니다. 그러나 오늘 사마이라 여자는 이들과는 달랐습니다. 진짜 야곱의 우물이신 주님과 마음 활짝 열고 구원의 대화를 나눴습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다오.”(요한4,7).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정답게 말을 거시며 우리의 마음문을 여십니다. 정작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의 내적갈증을 통찰하셨고 당신 친히 생수를 주시고자 했음이 분명합니다. 마침내 사마리아 여자뿐 아니라 영혼이 목마른 우리 모두를 향한 예수님의 복음 말씀입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4,13-14).

우리가 원하는 물도 바로 이런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예수님이 주시는 물입니다. 바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를 마시고자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세상 무엇도 우리의 갈증을 해갈시켜 주지 못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궁극으로 원했던 물도 이런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수였습니다. 생수가 상징하는 바 성령이요 주님께서 주시는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적절한 가르침이 고맙습니다.“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은총 속으로 들어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5,2-5).

그대로 믿음, 희망, 사랑이 하나로 연결되지 않습니까? 바로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참 좋은 신망에信望愛 향주삼덕向主三德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주시는 예수님 자체가 바로 샘솟는 물입니다.

그러고 보니 바로 이 미사가 거행되는 오늘 지금 여기가 야곱의 우물가입니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진짜 야곱의 우물이신 주님께서는 또 하나의 사마리아 여자인 우리의 내적 갈증을 해소시켜 주십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목마른 우리의 갈증 해소 시켜주십니다. 눈이 열려 예수님이 예언자임을 알아보는 사마리아 여자는 물론 눈이 열린 우리 모두에게 주님은 또 귀한 말씀을 주십니다.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4,23-24).

정말 우리의 영적 갈증을 해갈시켜 주는 은혜로운 복음입니다. 주님은 언제 어디서나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는 이들을 찾으십니다. 하느님은 영이십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입니다. 사마리아 여자의 눈이 열려가는 깨달음의 과정이 점입가경입니다. 선생님에 이어 예언자, 그리고 마침내 오매불망 꿈에 그리던 그리스도입니다.

-“저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요한4,25)

곧장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이 은혜롭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4,26)

사마리아 여자의 놀라움은 얼마나 컸겠는지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아, 바로 우리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와 만나 말씀을 주시는 바로 그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어 마지막으로 제자들은 물론 우리에게 세 번째 귀한 진리를 밝혀 주십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이미 수확하는 이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알곡을 거두어 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씨 뿌리는 이도 수확하는 이도 기뻐하게 되었다.”(요한4,34-36)

예수님의 활짝 열린 눈은 바로 우리의 눈입니다. 우리의 양식 역시 우리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수확의 기쁨을 내다보며 복음 선포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알곡을 거두어들이는 기쁨을 누리며 주님과 함께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양식입니다.

주님은 오늘 사순 제3주일 야곱의 우물가 미사를 통해 참 귀한 깨우침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눈을 활짝 열어주시어 당신이 바로 생수의 샘이자 세상의 구원자 그리스도임을 알아보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갈증을 완전히 해갈시켜 주시고 당신 친히 우리 안에 영원히 샘솟는 우물, 야곱의 우물로 자리 잡으십니다. 아멘.

▦ 작은 형제회 이수철 신부 : 2017년 3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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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에 따르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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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제 영혼을 비추시어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칠 수 있는 영적 지혜를 열어주소서 !

▪ 세밀한 독서 (Lectio)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예수님께 다가설 수 없도록 가로막는 장벽은 무엇이며, 청해야 할 것과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오늘 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세례를 베풀던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시던 길에 ‘시카르’ 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십니다. 먼 여행에 지친 예수께서 “야곱의 우물” 가에 앉아 계실 때, 마침 물을 길러 온 한 “사마리아 여자” 한테 물을 청하지만 여인은 “유다 사람과 사마리아 여자” 라는 이유로 거절합니다. 여인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편견은 서로 “상종하지 않았다.” 라는 역사의 상처입니다.(요한 4, 7 – 9;2열왕 17장 참조)

이것은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방해하는 장벽이 되어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우물물’ 과 그분한테 받을 수 있는 ‘생명의 물’ 을 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선물” 과 “내가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생수를 청했을 것” (요한 4, 10)이라고 하시며 여인과의 사이에 관계의 지평을 여십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유다 사람” 에서 “선생님” 으로 바꿔 부르지만, 자신의 고정관념에 묶여 “두레박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 야곱보다 훌륭하다는 말씀입니까 ?” (11 – 12절) 하고 반문합니다. 세상의 사물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에 집착할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알아볼 수 없게 합니다. 니코데모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3, 9),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이 생명의 빵을 오해했던 것처럼 (6, 34) 여인은 자신의 고착된 가치 앞에서 “영원히 목이 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 (4, 14) 이 의미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보다 자신의 노고를 비켜 가게 할 마술적인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15절) 하고 청합니다.

야곱의 후손으로 선민답게 살지 못했던 단절된 그녀의 삶은 소외되고 무시당하던 ‘사마리아’ 처럼 자신의 운명에서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어둠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섯 남편” 과 “남편이 없다.” 는 진실이 드러난 상황에서 여인은 더 이상 어둠 속으로 도망치지 않고 자신의 부도덕한 결혼생활을 직시하는 예수님을 “예언자” 로 받아들입니다. (16 – 19절)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막았던 장벽을 치우고 샘물의 물꼬를 틔우는 근원을 찾고자 “예배 장소” 에 대해 묻습니다. (19-20절)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를 존경이 담긴 “여인” 이란 호칭으로 부르십니다. (2, 4 참조) 그리고 “내 말을 믿어라.” (4, 21) 하시며,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가 ‘지금, 바로 당신과 함께 시작된다 .’ 는 것을 더욱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때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며, 아버지께서도 참된 예배자들을 “찾으신다.” (23절) 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여인을 찾고 계셨던 것일까요 ? (27절 참조)

“메시아께서 오시면”, “영과 진리 안에서의 예배” 가 무엇인지 가르쳐 줄 것이라는 여인의 희망 앞에서 예수님은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26절) 하고 당신을 계시하십니다. 이는 생명 자체이신 예수께서 당신을 믿는 이들한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며, ‘생명의 물’,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 의 대상이 예수님 자신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둔 채” 고을로 가서 사람들한테 “와서 보십시오.” (29절) 하고 전합니다. 이제 여인에게 중요한 것은 ‘물동이’ 가 드러내는 ‘우물물’ 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내면에 샘솟게 된 ‘생수’ 로 충만해진 여인은 예수님에 관해 증언합니다. 여인의 증언을 듣고 달려온 마을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예수님을 “세상의 구원자” 로 고백함으로써 예수님에 대한 신비가 절정을 이룹니다. (40–41절) 이 신앙고백에는 성 (性) 과 민족과 종교의 장벽을 초월해 이루어지는 보편적 구원사상과 그리스도론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어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도록 제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께서 “사마리아를 가로질러 가셔야 했던” (4, 4) 까닭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잃었던 양을 찾으시며 (27절; 루카 15, 6 참조) 모든 죄인을 위한 세상의 구원자로서 “하느님의 뜻” 을 이루기 위함이셨습니다. (4, 31 – 38)

▪ 묵상 (Meditatio)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요한 4, 7) 예수께서는 제가 무시하고 싶었던 여자한테 물을 청하십니다. 그 여자는 세속적이고 안하무인이며 생활은 문란하기 짝이 없고, 더군다나 사마리아 여자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저라면 감추고 싶었을 것을 그 여인은 서슴지 않고 예수님 앞에 열어 보이며 자신의 신원과 어둠 그리고 무지를 인정했습니다. 자신한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부끄럼 없이 밝히며 청할 줄 알았기에 예수님을 ‘세상의 구원자’ 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자신을 감추고 과장하며 정작 제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습니다. 샘물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잊고 세상이 바라는 능력과 힘을 빌려 교만으로 펌프질을 하며 애써 물을 퍼 올리려 했습니다. 세상에 휘둘리면서도 이웃의 작음에 빗긴 눈길을 보냈던 저한테 오늘 사마리아 여인은 마중물이 되어 다가왔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물이신 주님, 저한테도 샘이 되어 솟아오르도록,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15절)

▪ 기도 (Oratio)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에게 구원이 되어주셨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이사 12, 2ㄷ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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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반명순 수녀
  |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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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의 장면을 들었습니다.

다섯 번이나 결혼하고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지만, 결코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사랑의 목마름으로 빈 물동이를 들고 우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한 사마리아 여인과 자신을 내어주어도 결코 다할 수없는 사랑의 목마름으로 샘솟는 물을 들고 우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렇게도 목말랐던 이 여인은 이제 마침내 일곱 번째 남자, 완전한 사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목마른 두 영혼의 만남, 이 아름다운 만남은 곧 십자가에 메달리신 예수님과의 만남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사랑과 생명에 대한 목마름으로, 영과 진리에 대한 목마름으로, 여기 양주 올리베타노 수도원이라는 우물에 물을 길으러 와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주님께서 주시는 “샘솟는 물”(요한 4,10)을 마시겠다고 이 ‘거룩한 미사’에 함께 모였습니다. 참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름 아닌 바로 우리 모두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다”(요한 19,28)라고 하셨던 것처럼,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7) 라고 청하면서,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이 아름다운 만남의 때는 십자가에서처럼 우물가에서도 “정오 무렵이었습니다.”(요한 4,6). 그리고 우리에게는 “바로 지금이 그때입니다”(요한 4,23). 바로 이때가 서로 상종하지도 않던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벽이 무너진 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성전 휘장을 찢으신 때요(마태오 27,51),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과 몸을 쪼개어 오시는 바로 지금입니다. 바로 지금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네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요한 4,10)

이 질문은 우리가 지금 목말라하고 있지마는 진정 참된 목마름이 무엇인지, 대체 무엇을 목말라해야 하는지, 그것을 채워줄 자가 누구인지를 깨우쳐줍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첫째 주제는 ‘하느님의 선물’, 곧 “샘솟는 물”(요한 4,10)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요, 그 사람 안에서 샘이 되고 물이 솟아날 것이요, 그 물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입니다(요한 4,13-14).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 아닌 것에는 그 어떤 것에도 더 이상 목마르지 않음이요, 아니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만을 만나게 될 것이요, 그 사람 안에서 샘이 되고 물이 솟아난다는 것은 그 물이 그 사람 안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이웃에게 번짐이요, 그래서 이제는 채워야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목마름이 아닌, 자기를 내어주지 않고는 못 베기는 예수님의 목마름이 솟아오름이요, 원한 생명을 누리게 한다는 것은 우리를 새로운 삶에로 변화시키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시킴을 말해줍니다. 바로 이 물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쏟아진 그 물이요(요한 19,34),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생명, 곧 구원이요, 예수님과 아버지께로부터 좇아나신 성령, 곧 영이며 진리요, 바로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바로 이 물이 제1독서에서 예표된 호렙의 바위에서 터져 나온 그 물입니다(출애 17,6).

그래서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로마서 5,5)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로마서 5,8)

오늘 <복음>의 둘째 주제는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것입니다.

곧 참된 예배에 대해 모든 것을 알려주실 분, 메시아인 그리스도라는 계시입니다(요한 4,25). 참된 예배는 장소가 문제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드리는가? 그리고 영과 진리로 드리는가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지금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요한 4,23)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영이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 참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드리는 이 미사는 십자가에 제헌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드리는 참된 예배입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로마서 5,1-2)

이제, 이 아름다운 만남의 마지막 장면을 보겠습니다.

이 아름다운 만남의 마지막은 신앙고백으로 마무리 됩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이방인 백부장이 “이분이야말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코 16,39)라고 고백했듯이, 이방인으로 취급되었던 사마리아인들이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분이야말로 진정 세상의 구원자이십니다.”(요한 4,42)

이처럼 만나는 이를 믿는 일, 주님으로 고백하는 일, 이만큼 아름다운 만남은 없을 것입니다. 이 만남이 바로 오늘 복음의 우물에서의 만남이요, 또한 십자가에서의 만남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에서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부분인 짧은 복음만을 살펴보았습니다. 긴 복음에서는 제자들과의 대화 부분입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는 ‘물’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제자들과의 대화에서는 ‘빵’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거룩한 미사 중에 이러한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드려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은총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내 안에서 하느님의 선물이 이루어지는 일, 그래서 하느님 아닌 그 어떤 것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일, 아니 모든 일에서 하느님만을 찾는 일, 하느님이 내 안에서 샘솟게 하고 그 물을 이웃에게 퍼주는 일, 그리하여 이웃들과 함께 “이분이야말로 진정 세상의 구원자이십니다.”(요한 4,42)라고 주님 예수님을 고백하고, 영과 진리로 아빠 아버지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일을 몸소 실행하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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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빈 물동이의 목마름으로 우물에 긷게 하소서.
당신을 만남이 믿는 일, 사랑을 고백하는 일, 그 아름다운 일이 되게 하소서.
십자가의 우물에서 샘솟는 물을 마시게 하소서.
몸을 쪼개는 일, 장벽이 무너지는 일, 그 아름다운 일이 되게 하소서.
제 몸을 부수어 샘솟는 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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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2020년 3월 15일
  |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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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요한복음 4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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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여정은 목마름의 여정입니다. 사무치는 목마름을 품고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목마름은 참된 믿음을 향하게 합니다. 목마름에 필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목마름은 주님과의 만남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목마름이 닫힌 문(門)을 엽니다. 드디어 우리를 살리는 생수(生水)를 맛보게 됩니다.

생수는 말씀에 맞닿아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터져 나오는 생수입니다. 생수가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삶의 순리가 바로 예수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과 함께 기쁘게 사는 법을 다시 배우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을 마신다는 것은 걱정을 내려놓고 먼저 예수님을 향한다는 것입니다. 삶이라는 사순이 목마름을 채워줄 예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길 바랍니다. 세상 모든 것은 먼저 주님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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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20년 3월 15일
  | 03.15
528 45.2%
따스하고 환한 햇볕이 드리운다거나
멋진 무지개가 뜨는 순간은 찰라의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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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많던 어린 시절, 꽃 같던 청춘 시절, 우리 모두 잔뜩 기대했었습니다. 내 앞에 펼쳐질 인생이 마치 멋진 드라마에 등장하는 특급 주연배우의 인생처럼 탄탄대로가 펼쳐지길...내 삶이 고급진 인테리어 잡지 화보처럼 우아하고 고상하게 전개되길....

그러나 막상 다가온 현실은 어떻습니까? 기대와는 너무나 상반된 경우가 많습니다.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현실은 결코 내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 절대로 만만치 않다는 것을 배워갑니다.

희망 사항과는 달리 우리네 인생은 마치 퀴퀴하고 후질구레하며 어두컴컴한 뒷골목 같습니다. 우리들의 인생, 결코 호화롭지도 않고 낭만적이지도 않습니다. 우리네 인생에서 따스하고 환한 햇볕이 드리운다거나 멋진 무지개가 뜨는 순간은 한 순간입니다. 대부분의 순간은 비참과 슬픔을 그저 묵묵히 견뎌내야만 합니다. 얼마나 더 굴욕을 견뎌내야 되는지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여인의 삶이 그랬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는 참으로 컸습니다. 그러나 기대만큼 현실이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잔뜩 기대했던 결혼생활에서의 기대가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대낮에 물을 길으러 몰래 마을 공동 우물가를 찾은 사마리아 여인의 삶이 그랬습니다. 때는 햇빛이 가장 강렬한 정오 무렵이었습니다. 대체로 근동 지방에서는 정오 무렵, 너무나 뜨겁고 건조하기에 가급적 외출을 삼갑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하필 정오 무렵 물을 길으러 우물가로 나왔습니다. ‘정오 무렵 우물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인은 사람들을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보통 이스라엘 아낙네들은 한풀 더위가 꺾인 저녁 무렵 우물가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 시간 거기서 여성 특유의 잡담과 뒷담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정오에 물을 길으러 나온 것은 그들의 시선, 그들의 입방아를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는 사실 다섯 번이나 남편을 교체했던 사연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다섯 번이나 새로운 사람을 만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만큼 내면의 상처가 깊었던 것입니다. 남자로부터 받은 충격이 컸던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컸던 것입니다. 아마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녀의 욕구를 완벽하게 충족시켜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여인은 혹시나 하고 이 남자 저 남자를 찾아 헤매 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롭게도 사마리아 여인은 기적처럼 예수님과 일대일로 만납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 가련한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 여인의 채워지지 않는 죽음과도 같은 갈증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자비하신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여인은 서서히 자신이 처한 비참한 실상을 파악해 나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끝도 없는 갈망을 영원히 채워주실 분이 바로 자기 앞에 앉아 계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선생님이야말로 제 평생의 갈증을 채워주실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리더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밀어붙이지도 않습니다. 그릇되게 살아온 삶에 대해 질책하지도 않습니다. 편안하게 말 할 수 있도록 놔주십니다. 그렇다고 완전 방임하지도 않습니다.

스스로 다 털어놓을 수 있도록 자극도 주시고, 다른 한편으로 격려도 하십니다. 천천히 인내롭게 과정을 밟으면서 그를 영원한 구원의 샘물로 인도하십니다. 참된 리더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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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2020년 3월 15일
  |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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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사람들

-주님과의 만남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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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리라.”

어제 저녁 성무일도시 마리아 노래 후렴이, 오늘 아침 성무일도시 즈카르야 노래 후렴이 감미로운 여운으로 남아 있습니다. 목마른 사람들, 사람에 대한 정의입니다.

갈망渴望, 갈애渴愛, 갈증渴症, 갈구渴求 목마른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어들입니다. 외로워 사람이듯 목말라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목마르게 찾는 갈망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목마름, 바로 성소의 표지입니다. 하느님이 목말라 하느님을 찾는 영혼들입니다.

다음 시편의 고백 누구나 공감하는 실존적 체험입니다.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없이 목마르고 메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시편63,2)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사람 누구나 깊이에서는 하느님을 목말라 그리워 찾습니다. 예전에 써놨던 글도 생각이 납니다.

-“목말라 눈떴고 눈뜨면 목말랐다
그리워 눈떴고 눈뜨면 그리웠다
아파서 눈떴고 눈뜨면 아팠다
어제도 오늘도 그랬고 내일도 그러할 거다
오, 하느님, 내 영혼의 하느님!”-

그러니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이른 새벽 저절로 잠깨 일어나 강론을 씁니다. 하느님을 찾는,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영혼들입니다.

오늘 긴 요한복음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과의 극적인 구원의 만남이 참 아름답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긴 대화가 펼쳐집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상징하는 바 목마른 우리들입니다. 주님을 목말라 하는 보편적 인간상을 보여줍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 깊이에서는 주님을 목말라하는, 그리워하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남편이 다섯이었다니 얼마나 목마른 여인이었던지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남편이 다섯이 되기까지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영육靈肉의 갈망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런 사마리아 여인이 야곱의 우물에 물을 길러 옵니다. 마침 목마른 예수님이 거기 기다리고 계십니다.

‘야곱의 우물’이란 잡지 이름도 생각납니다.

야곱의 우물이 상징하는 바 영원히 생수가 샘솟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야곱의 우물가에 앉아 계신 예수님이 바로 진짜 야곱의 우물임을 보여 줍니다.

야곱의 우물만이 아니라 오늘 탈출기의 목이 말라 불평하는 이들의 목마름을 해갈 시켜 준 생수가 샘솟아난 호렙의 바위 역시 진짜 생명의 우물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탈출기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신으로 인한 목마름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화답송 후렴이 우리의 무딘 마음을 일깨웁니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므리바에서처럼, 마싸의 그날 광야에서처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참으로 주님을 신뢰하여 목말라 찾을 때 열린 마음입니다. 진정 무서운 마음의 병은 무지의 병이자 무디어 굳어진 완고한 마음, 눈먼 마음입니다. 참으로 사마리아 여인처럼 목말라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을 만날 때 해갈되어 열린 마음, 부드러운 마음이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시는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오늘 주님이 목말라 미사잔치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아무리 마셔도 여전히 목마른 세상의 물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물이 샘솟아 영원한 생명을 누릴 때 비로소 해갈解渴되는 영혼이요, 영혼의 평화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되었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이,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이 우리의 목마름을 일거에 해갈시켜 줍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느님의 사랑이 샘솟는 희망의, 사랑의 원천이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만나야 할 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 야곱의 우물가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진실한 예배자들에게는 어디나 주님을 만나는 성전입니다.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안에서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얼마나 자유롭게 하는 말씀인지요.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어디나 현존해 계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이 성전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 참 행복입니다.

바로 코로나 바이러스 19 사태로 성전 미사에 참석치 못한 우리가 바로 이렇게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참으로 언제 어디서든 예수님과 일치하여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릴 때 영원한 생명의 행복입니다.

참으로 사마리아 여인처럼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우리도 예수님을 선생님이자 예언자이자 그리스도로, 마침내 세상의 구원자로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양식이 우리의 양식도 됩니다. 역시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얼마나 깊고 오묘한 말씀인지요.

예수님처럼 우리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우리의 참 양식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궁극 목표요 영적 목마름과 더불어 영적 배고픔을 해결하는 첩경의 지름길입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바로 지금 여기가 영적 수확이 이뤄지는 구원의 현실이 됩니다. 바로 당대의 예수님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이미 수확하는 이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알곡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씨뿌리는 이도 수확하는 이도 함께 기뻐하고 있다.”

종말 구원을 앞당겨 체험하는 당대의 예수님 제자들이요 오늘의 우리들입니다. 눈을 들어 세상 밭들을 보십시오. 이미 수확이 시작되고 있으며 씨뿌리는 이들도 수확하는 이들도 함께 기뻐합니다.

바로 우리가 씨뿌리는 자들이자 동시에 수확하는 기쁨의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만날 때 해갈되는 영혼의 목마름입니다. 어디서나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니 차고 넘치는 영원한 생명에 영원한 행복입니다. 참 양식인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 주님의 일을 완성하니 영적 배고픔도 해결됩니다.

세상의 구원자 예수님은 우리 눈을 활짝 열어 주시어 오늘 지금 여기가 씨뿌림과 수확의 구원이 동시에 이뤄지는 기쁨의 현장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시어 우리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일거에 해결해 주시고 오늘도 씨뿌림과 수확의 기쁨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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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020년 3월 15일
  |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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