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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생리적 갈증과 신앙적 해갈”
조회수 | 2,945
작성일 | 05.02.25
이번 주일 우리는 예수님과 한 여인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전해 듣는다. 겉으로 보면 그저 물이 귀한 지방에서 피곤을 느끼던 한 여행자가 물 한 모금 마시려다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 신변잡기를 늘어놓은 정도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 그것은 문학적, 신학적으로 생생한 의도와 메시지를 지닌 복음을 다루고 있다.  

대화는 갈증을 느끼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예수께서는 당대의 사회적인 벽들을 넘어서, 즉 ‘여인’에게 물을 청하고, 유다인으로서 사마리아인에게 말을 거신다. 우선 여인은 지치고 목 말라 물을 청하는 유대인 남자 예수님을 압도하는 처지에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물을 마시지 않는 데서 예수님의 의도가 다른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화가 진행되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물이 필요한 사람은 바로 여인으로 지목된다. 무릇 대화란 서로 다른 의견과 생각을 가진 이들을 적어도 이해와 동의의 차원에까지 인도하는 통교의 매체이다.

실제로 복음에서는 우선 실재(實在)를 바라보는 시각에 차이가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은 서로 다른 언어 차원에서 물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녀를 종교적, 상징적인 차원으로 인도하고자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자연과학적, 사실적인 차원에 머문다. 그녀는 물에서 다만 생리적 갈증을 풀기위한 수단을 볼 뿐 더는 보지를 못한다. 그러나 그녀의 오해에는 모호하기는 하지만 구원에 대한 깊고 진지한 갈망이 깃들어 있다. 갈증의 발원을 알게되면 이제 그 해결은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여인은 청하고, 예수께서는 생수를 주는 자로 역할이 바뀌게 된다.

그녀는 무엇을 목말라하고 있는가? 그녀는 텅 빈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즉 모시고 왔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신주 모시듯이 살아왔다. 비어있는 물동이는 여인의 생활이, 마음이 텅 비어있음을 상징한다. 그녀의 인생이 그렇게 별 것 아닌 것에 다 탕진되어 왔다. 여인은 5명의 남편과 살았다. 그리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진짜 남편은 아니라고 하였다. 사랑에 대한 욕구 역시 끝이 없어서 그녀는 어떤 자에게서도 마음의 평온을 찾지 못한다.

우리 역시 세상에서 어지럽게 방황하고 엉뚱한 방식으로 갈증을 해소하곤 한다. 즉 쉽게 다른 방법으로, 옳지 않게 살아 가곤 한다. 때로는 당장 급한 마음에 가까이에 있는 물을 마시지만 그것은 오염된 물처럼 탈을 일으키거나 소금물처럼 갈증을 보탤 뿐이다. 충동과 욕구를 따라 겉으로 사는 경우 삶은 끊임없이 공허한 순환에 빠진다. 그런 사람은 날마다 물을 긷기 위해 항상 똑같은 우물에 가는 수밖에 없다.

인간은 절대적인 것을 동경하며 산다. 우리 인생에는 생수나 싱싱한 물이 아니고는 해결되지 않는 갈증이 있다. 정작 문제는 내면적인 것, 절대적인 것, 영원한 것, 근원적인 것에 대한 갈증이다. 그것을 어떻게 해갈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야말로 본연의 종교적 차원에 속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 없는 인간이 얼마나 처절하게 순환 안에서 맴돌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에너지를 탕진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주제인 것이다. 하느님 없이는 사랑마저도 일종의 끝도 없는 불행의 사슬에 묶이고 만다. 인간은 절대자에게 내적으로 닻을 내리지 않는 한, 평안과 확신에 이를 수 없다.  

대화가 깊어짐에 따라 여인도 점점 예수님의 진면모에 내적으로 접근해 간다. 처음에는 예수님에게서 목마르고 지친 유다인(요한 4,9)을 보았지만 곧 야곱보다 훌륭한(요한 4,12) 사람, 예언자(요한 4,19), 메시아(요한 4,26), 마침내는 구세주(요한 4,42)임을 전하게 된다. 예수님과의 대화로 인해 그녀는 물질적 갈증을 해결하려던 물동이, 전에는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것을 내버려 두고 새사람이 되어 영적인 여행을 떠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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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배영호 베드로 신부
528 45.2%
[수원] 네 남편을 불러 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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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감히 제가 감히 그녀를 사랑합니다.
조용히 나조차 나조차도 모르게,
잊은 척 산다는 건 살아도 죽은 겁니다.
세상의 비난도 미쳐 보일 모습도
모두 다 알지만 그게 두렵지만 사랑합니다.
어디에 있나요?
제 얘기 정말 들리시나요.
그럼 피 흘리는 가엾은 제 사랑을 알고 계신가요?
용서해 주세요.
벌하신다면 저 받을게요.
허나 그녀만은
제게 그녀 하나만 허락해 주소서.”

임재범의 노래 ‘고해’ 가사입니다.

이런 노래를 신학생에게 보내오는 자매들도 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신학생이 더 즐겨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왜 하느님과 여자를 함께 사랑할 수는 없을까? 사랑은 하난데.’

꼭 여자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 어떤 사람은 명예, 어떤 사람은 꿈, 어떤 사람은 성공 등 매우 다양합니다. 이럴 때면 주님께서 “나는 질투하는 신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그런 것들이 주님께 대한 사랑을 갉아먹는다고 마음을 다잡곤 합니다. 그렇지만 또 마음 한 구석에서는 ‘세상에서 성공하고 돈도 많이 벌어서 주님을 믿으면 주님께서 잘 이끌어주시고 또한 그런 힘으로 더 많은 선교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솟아오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갈등 끝에 주님을 좋아하지만 적당히 술도 마시고, 여자도 쳐다보고, 권위적인 모습도 부려보고, 부자인 척 해보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마음 한 편에서는 이런 미지근한 자세로는 주님을 절대로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는 믿음이 그런 것을 조금이라도 더 끊어보려는 노력으로 이끌어갑니다. 어정쩡한 모습이 더 힘들게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신앙인들도 이런 양극단에서 왔다 갔다 하며 신앙생활을 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라라랜드’란 영화에서 다루는 내용은 ‘사랑이냐, 꿈이냐’란 주제입니다. 서로 사랑하게 되었지만 두 사람 다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째즈카페를 차리는 것이고 한 사람은 배우로 성공하는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꿈을 이룹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룬 장소에서 서로 다른 사람과 결혼한 모습으로 만나게 되며 영화는 끝납니다.

둘이 헤어지게 된 이유는 한 사람이 상대자가 자신의 꿈을 소중하게 여겨주지 않는 것 같은 서운함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상대의 꿈을 밀어주지만 결국 그것이 완전히 결별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위해 꿈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인가?’

저는 그래야 한다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꿈을 포기하지 않으면 완전한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 꿈이 자신과 하나가 되어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만다는 사람은 자신의 걸림돌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돈을 좋아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돈이 있으면 이웃을 더 도와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돈을 좋아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이 좋은 것이지 남편 자신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남편이 돈을 더 이상 벌어주지 못할 때, 혹은 병원에 입원해서 돈만 들어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아내는 힘들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어느 날 길에서 거지의 구걸을 받았습니다. 돈을 주고 싶어 주머니를 찾았으나 그날따라 동전 한 푼도 없었습니다. 그는 거지에게 미안한 말을 전했습니다.

“형제여, 마침 한 푼도 가진 것이 없으니 정말 미안하오.”

그러나 거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돈이 문제입니까?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훨씬 값진 것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형제’라고 불러 주셨으니까요.”

만약 톨스토이가 돈이 있었다면 돈을 주며 ‘형제’라고는 말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돈을 주며 스스로 만족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고 영적인 것입니다. 사랑이 순결해지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묻은 모든 때를 벗겨내야 합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 피조물입니다. 피조물과 하느님은 같은 수준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피조물에 대한 애정은 참 영적인 사랑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아는 사마리아 여인에 관한 내용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왜 예수님은 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유독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셨을까?’

당연한 대답은 아마도 ‘그 사람이 가장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날 준비가 가장 잘 되어있었다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될 수 있을까요? 물을 좀 달라고 하는데도 떠 주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주시려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인 성령님에 대해 말씀을 하실 때 이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이 여인은 삶에 지쳐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물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하시자 그런 물이라도 있으면 달라고 합니다. 그녀는 세상에서 자신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줄 많은 물을 찾았지만 갈증만 더 심해진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성령님을 주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여자는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대답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던 대답이었습니다. 성령님은 참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려는 순수한 사랑,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그 성령님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 여인은 남편이 여섯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누구도 자신을 만족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신 말씀은 “네가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남편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것과 한 몸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과 한 몸이고,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잃으면 자살을 해 버립니다. 자신을 잃는 것과 같은 아픔을 겪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과 하나인 사람에겐 참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순수한 사랑이신 성령님을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과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것에 대한 애정을 끊는 것이 참 예배의 시작인 것입니다.

중국 한 금은방에서 한 젊은이가 금품을 훔치다가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정말 희한한 것은 그가 도둑질을 할 때 그 가게 안에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있는데도 어떻게 도둑질을 할 생각을 했느냐는 질문에 그 젊은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때는 금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십니다. 우리가 세상 것을 좋아하면 그 세상 것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용하는 하느님은 우상이 되십니다. 구약의 금송아지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해 주어야만 하는 분이 되시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카나의 혼인잔치 때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포도주를 만들어달라고 청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무언가를 청한다면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감소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청하면서 동시에 “당신만을 사랑해요.”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돈을 청하면서 “주님만을 사랑해요.”라고 고백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포도주가 없구나!”라고 사실만을 전달하십니다. 나머지는 예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온전히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이미 그만큼 예수님에게서 시선이 떠나있는 것입니다. 바라보지 않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와는 아담을 바라보지 않고 선악과를 바라보았고, 아담은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하와를 바라보았습니다. 순결한 사랑을 위해 사마리아 여인처럼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좋아하고 애정이 가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인 성령님을 충만히 부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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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2017년 3월 19일
  | 03.14
528 45.2%
[수원] 하느님은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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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음 안에 묻었던 무언가를 이야기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이야기 속엔 때론 삶의 상처가 가득 묻어 있기도 하고 회한이 숨쉬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그러한 마음을 이야기할 때면 숨겨왔던 눈물이 흐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고백을 통해 어떠한 격려나 덕담을 들어서가 아니라, 바로 고백이라는 것을 통한 내 자신의 투명한 인정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마주한 한 여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여인의 모습을 통해 지금의 내 자신과도 마주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꺼려하는 시간에 홀로 물을 길러 가는 모습, 예수님을 알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 그리고 예수님과의 대화 안에서 자신의 상처와 만나는 모습, 분명 이 여인의 모습은 또 다른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여인은 참으로 상처가 많은 여인 같습니다. 분명 이 여인은 믿었던 사랑에게 버림을 받은 적도 있을 것이고, 사랑하였지만 마음 안에서 현실 안에서 연인을 잊어야 했던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의 멍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점점 짙어져만 갔을 것입니다. 결국 우물가에 그녀를 홀로 있게 하는 것은 그녀의 마음 안에 있는 미움과 상처, 그리고 그로인한 외로움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물가로 걸어 온 이 여인에게 말을 건넵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다오.” 우리는 삶 안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지만 그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마치 이 여인이 예수님과 대화를 하지만 그 내용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왜냐하면 상처가 깊을 때는 상처의 아픔 밖에 느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듯이, 마음의 상처가 가득한 그녀의 귀엔 물을 청하는 예수님은 단지 갈증에 힘겨워하는 청년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후에 이 여인은 변화합니다. 그동안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는데, 예수님과의 대화는 그녀에게 삶의 희망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삶의 작은 조각들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과 같이, 하느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영혼을 위로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위로를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음성은 나를 더욱 외롭게 하기도 하고 더욱 눈물 나게 하기도 합니다. 마치 오늘 이 여인이 사랑의 상처 속에서 하느님을 알게 되었듯이 말입니다.

잠시 이 시간, 오늘 이 여인에게 하셨듯이 나에게 말을 건네시는 그 하느님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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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형준 프란치스코 신부
  | 03.14
528 45.2%
[수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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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을 결혼한 여인의 마음은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무슨 사연이 그리 많았기에…. 한 많은 인생을 살아온 인생 여정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손에 물 안 묻히고 몸종을 거느리며 편하게 살지는 못해도, 한 남자 만나 그 품에서 쉬며 자녀들 낳아 기르고 오붓한 가정을 꾸미고 싶었던 여인이었을 텐데….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어느새 여섯 번째 남편을 맞아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인적이 뜸한 정오 시간을 이용하여 물을 길으러 가는 여인의 심정…. 누가 무어라 손가락질 하지 않는데도, 누군가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려고 주변을 살피며 우물가로 향하는 여인의 발걸음이 무겁게만 느껴집니다.

이 여인을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만나십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라고 말을 건넵니다. 그 여인은 곧바로 물을 떠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는 예수님과 상종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주저거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나에게 마실 물을 청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예수님에게 “선생님은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주실 수 있습니까? 선생님은 이 우물을 마련해준 조상 야곱보다 훌륭하다는 말씀입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그 여인은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이렇게 이어지는 예수님과 여인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이 여인은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이렇게 여인이 기쁨과 희망으로 바뀌게 되는 원인을 곰곰이 살펴보면,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불쌍한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러한 안목으로 우물가에서 이루어진 대화를 재구성하면,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여, ‘도움을 주는 여인’으로 승화시켜주십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그럴만한 위인이 못된다고 주저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인정하기만 하면, ‘물을 떠주는 여인’이 아니라, ‘물을 받아 마시는 여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또 주저하고 믿음이 부족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물도 깊고 두레박도 가지지 않고 어떻게 물을 줄 수 있습니까? 당신이 이 우물을 마련해주신 야곱보다 훌륭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을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권위있게 당신이 누구이며, 당신이 주는 물이 어떤 물인지를 알려주면서, 차츰 이 여인을 구약의 전통과 인간의 굴레에서 벗어나 예수님께 마음을 돌리는 ‘믿음의 여인’으로 승화시켜주십니다. 이로써, 불쌍한 처지에 있었던 여인이 예수님과 만나면서 새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새사람이 된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그러자 이 여인은 주저하지 않고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더 이상 거짓이나 꾸밈이 없는 답을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맞는 말이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라고 칭찬해줍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막연한 희망 속에서 왠지 모르게 복잡하고 죄스럽게 살아왔던 사마리아 여인을 ‘올바른 여인’, ‘믿음의 여인’, ‘사랑을 받을 만한 여인’, ‘도움을 주는 여인’으로 바꿔주십니다. 이렇게 변한 여인은 세상으로 가서,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전합니다. 그러자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오늘 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불쌍하고 과거의 죄스러운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이끄심에 의해 새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솟는 생명수를 주시기 위해 우물가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번 주에는 조그마한 감실에서 나를 기다리는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성체조배 시간을 자주 가지려 합니다. 그 시간에 여러분을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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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최인각 신부
  | 03.14
528 45.2%
[수원] 하느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 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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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파스칼에 의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빈 구멍을 하나씩 가지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 구멍을 채우기 위해 권력과 부귀, 영화, 지식에 매달리려고 하지만 결국은 환락, 방탕, 쾌락, 영예의 유혹에 밀려 공허, 무상, 외로움 속에서 살게 된다고 합니다. 결국 파스칼은 ‘그 빈 구멍은 하느님이 만들었기에 하느님만이 채울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파스칼이 말하는 빈 구멍은 ‘진정한 행복에 대한 갈망, 갈증’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오늘 복음 말씀에 등장한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빈 구멍을 채우기 위해 숱한 노력을 한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에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를 상징적으로 잘 드러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끊임없이 찾는 이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는 이유 또한 진정한 행복에 대한 갈망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중에 예수님께서는 참된 예배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진정한 예배는 장소와 상관없이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요한 4,24)”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나의 빈 구멍은 하느님과의 진실한 만남을 통해서 채워지고 참 행복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갈망하고 있지만, 하느님은 우리와 본질이 다른 분이십니다. 하느님과 진실한 만남을 가지려면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빈 구멍을 채울 수 있는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분과의 진실한 만남에 목말라 해야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번 사순 시기에 우리는 하느님과의 진실한 만남에 목말라 해야 합니다. 이러한 목마름을 지닐 때, 비로소 우리가 갈망하고 있는 것들이 채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요한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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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서용운 미카엘 신부
  |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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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순 제3주일입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했던가요? 예전에 이스라엘에서도 그러했다고 합니다. 도시에 사는 여성들 은 집 밖을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고, 외간 남자와 대화를 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시골에 사는 아낙들은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밖에 나오는 일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외부인과 대화를 하는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 여성에게 먼저 말씀을 건네십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첫째로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원수 같은 관계였던 사마리아 사람이고(우리 집 할아버지가 독립운동 하실 때 그 앞집에 살면서 매일 괴롭히던 친일파의 후손과도 같은 사이?), 둘째로는 그가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는 일체의 모든 경계를 허물고 편하게 말씀하십니다.

적어도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미약하게나마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사람 사이에 경계와 선을 긋지 않는 ‘모두를 포용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십니다. 마침내 그 동네의 모든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낸 연후에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제2독서에서 가르쳐 주는 대로,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면 평화도, 희망도, 은총도, 하느님의 사랑도 알 수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사순 시기를 보내는 이유는 건강을 위하여 금연하거나, 간을 보호하기 위해 금주를 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사순 시기에 희생과 보속과 절제를 하는 까닭은 그러한 희생을 통해 예수님을 더 많이 생각 하고, 더 많은 시간을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생각하며 지낼 기회를 갖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조금 이나마 우리가 믿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 얼마나 좋은 분이기에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어 주셨는지 를 배워 나아가며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아무런 허물없이 다가오십니다.

내가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든, 죄인이든 상관하시지 않고 다가오시어 당신의 사랑을 전해 주십니다. 그런 예수님께로 나아가는데 있어 ‘바쁘다, 아프다, 내가 너무 모자란다 혹은 넘친다, 예수님이 너무 높은 분이라 어렵다,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경계와 선을 긋고 어색해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 우리 옆에 함께 하고 계시니 그저 우리 작은 마음을 열어 예수님께 다가가도록 합시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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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노인빈 엑벨트 신부
  | 03.14
528 45.2%
[수원] 자신이 먼저 샘의 물을 채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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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야곱의 우물’물을 청하십니다.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다사람들이 상종을 한다는 것은 율법의 차원에서 보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마실 것을 청하신 이유는 당신은 그런 계율에 마음을 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율법을 폐지하실 참이었으니 당신부터 그것을 무시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요한 복음 강해』 31,4).”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사람들이 당신께서 주시는 물을 마실 수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물’은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요한 7,39)”을 가리킵니다. 이 물은 또한 영적이며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는 구원의 음료입니다. 그래서 이 물을 마시려는 사람이란 성령을 통하여 복음 말씀이 자신의 마음 안에 샘솟게 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입니다.

지난 사순 제1주일에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오 4,4).”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만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빵만으로도 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빵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 또한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성경을 읽고 하느님의 말씀이 내 마음 안에 깊이 다가와 그 말씀이 내 삶 안에서 이루어졌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 체험들 안에서 샘솟는 물이 내 안에 가득 채워짐을 느낍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모든 일이 짜증스럽고 내 주변 사람들이 평소와는 다르게 그냥 미워질 때가있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의 샘에 물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 수 있는 신호와 같습니다. 나의 샘에 물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물을 나누어 줄 수 있겠습니까? 내 안에 사랑이 없는데, 다른 이들에게 어떤 사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샘에 하느님의 말씀으로‘물’을 채우십시오. 영원한 생명의 물을 마시려는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기꺼이 샘솟는 물을 채워주십니다. 자신의 샘에 물을 채우게 되면, 다른 이들의 샘에 물이 얼마나 있는지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여러분의 물을 나누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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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한창용 시몬 신부
2017년 3월 19일
  | 03.14
528 45.2%
[수원]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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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한낮에 갈증을 느낀 두 사람을 야곱의 우물가에서 만나게 됩니다. 한 분은 예수님이시고, 한 사람은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예수님의 갈증은 영적인 것(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었고, 사마리아 여인의 갈증은 육적인 것(물을 길으러 왔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진정한 갈증은 육적인 목마름이 아니라, 영적인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지만, 어느 남편도 사마리아 여인의 ‘참된 행복’에 대한 목마름을 해결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샘”이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의 오랜 갈증은 사라지고, 어두웠던 삶이 기쁨과 행복으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도 매일 우물가를 찾는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이 목마름 …‘참된 행복’에 대한 목마름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모든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갈증과 목마름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갈증이고 목마름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에 하느님의 속성이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이건 신자가 아니건 간에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에 대한 영적인 갈증과 목마름을 가지고, 한평생을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느끼는 그 갈증이, 근본적으로 어떤 갈증이고 목마름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내적으로 끓어오르는 욕망을 채우면, 그 갈증이 해소될 줄 알고, 욕망을 따라 욕망을 채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욕망을 채우면 채울수록 그들이 얻게 되는 것은, 성취감이나 만족감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공허함과 죄책감 그리고 자신에 대한 실망 등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행복’에 대한 영적인 갈증은, 세상의 어떤 재물이나 명예 그리고 온갖 조건들로도 해소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순 시기를 보내는 우리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기쁨과 행복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발길을, 빨리 하느님께로 되돌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참된 행복’에 대한 갈증을 풀고자, 어디에서 어떤 물을 마시며 살아왔는지 깊이 식별해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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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윤동출 프란치스코 신부
2020년 3월 15일
  | 03.14
528 45.2%
[수원] 목마르지 않으려면 우물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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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찾을 수 있습니까?”

“갈망함으로써 찾을 수 있느니라.”

“그렇지만 저는 온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갈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분을 찾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자 스승은 제자를 데리고 강에 가서 제자의 머리를 물속에 밀어 넣고는 몸부림칠 때까지 붙들고 있었습니다.

“자네 머리를 물속에 넣었을 때 왜 그렇게 몸부림을 쳤나?”

“숨이 막혀서 그랬습니다.”

“바로 그렇게, 갈망하라.”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나의 갈망을 세상 것으로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망의 양은 누구나 똑같습니다. 세상 것을 갈망하는 만큼 하느님께는 관심이 없어집니다. 나의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커질수록 세상 행복에 대한 갈망엔 무감각해집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명의 물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한낮에 물을 길으러 나오는 이상한 사람입니다. 한낮은 사람이 갈증을 가장 많이 느끼는 가장 뜨거울 때입니다. 이는 그 여인이 무언가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갈증을 느끼며 살아갈까요? 바로 ‘행복’입니다. 물은 고생고생해서 길어가도 내일이면 또 목이 마르는 그런 세상의 행복들을 상징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세상 것들로 행복을 좇으면서도 항상 목이 말라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의 상징입니다. 돈과 명예와 쾌락 등의 모든 것을 가지고도 허기가 지고 목이 말라 참을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많은 사람이 이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세상 목마름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나마 목을 채울 물을 청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먼저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돈이 궁핍하여 돈이 좀 솟아 나왔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돈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이는 에사우가 야곱에게 불콩죽을 좀 달라고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야곱처럼 에사우가 자신에게 장자권까지 넘겨줄 수 있는 인물임을 안다면 죽 한 그릇 주는 것은 일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에게 물을 청하는 분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성당 가면 밥을 줘, 돈을 줘? 어? 다 돈 빼먹으려는 수작이야!”라고 말하며 성당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이런 부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에 있었던 일입니다. 미국 샌디에고 외곽 지역에 있는 어느 호텔에서 한국전쟁에 왔다가 미국으로 돌아간 한 청년이 자기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머니, 제가 돌아왔어요.”

“빨리 집에 오지 왜 전화는 하는 거냐?”

“아뇨, 제가 호텔에 있는데요, 이제 갈 거예요. 어머니. 그런데 만나기 전에 할 말이 있습니다. 제게 아주 절친한 친구가 하나 있는데 부모가 다 없습니다. 일선에서 저와 같이 전쟁을 하다가 부상을 당했습니다. 두 눈을 잃었어요. 두 손도 없습니다. 이걸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내가 데리고 가서 나와 함께 우선 한 일 년이라도 같이 살려고 합니다. 어머니 어떻겠습니까?”

어머니는 “뭐, 괜찮지.” 하고 소극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러나 처음에는 괜찮을지 몰라도 며칠 있으면 지겨울 거다. 네가 데리고 온 것을 후회하게 될 거야. 피곤하게 되고 괴로워질 거야. 얘야, 그러지 말고 어서 집으로 들어오렴.” 아들은 “잘 알았습니다.”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다음 날, 해군 본부로부터 그 어머니한테 전보 한 장이 날아들었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호텔 12층에서 투신자살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달려가 보니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눈멀고 두 팔이 없는 것은 바로 자기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선물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가 드리는 작은 희생쯤은 장자권에 비해 불콩죽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물을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하느님 나라의 상속권까지 잃게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 생명의 물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이 물은 이 세상의 행복과는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 그 물을 얻기 위해 조금이라도 이 세상 행복을 봉헌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행복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지금까지 사마리아 여인은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왔습니다. 남편이 여섯이나 되니 얼마나 세상 행복을 갈망했던 여인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이 마치 정오의 뙤약볕처럼 목이 말랐던 이유는 세상 물을 통해 행복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좀 특별합니다.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이 곧 샘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그 사람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물로 물을 뜨러 오는 사람이 되지 말고 그 자신이 우물이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실제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이제 생명의 물을 내어주는 샘이 됩니다. 그런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그 기쁨이 영원히 그 사람 안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자신을 통과하는 것이 자신을 채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어령 박사는 자신을 “평생 우물을 파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책을 보면 자신은 무언가에 대한 갈증이 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목마름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명예를 달라고 글을 썼더니 명예가 생겼고 돈을 벌려고 애쓰니까 돈이 생겼다. 또 병 때문에 병원에 다니니까 병이 나았다. 어느 날 너무나 외로워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좋아하는 글을 봐도 채워지지 않는 ‘혼자’라는 절대고독에 괴로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갈증이 바로 진리에 대한 갈증이요, 창조주에 대한 목마름임을 깨닫게 되었다.”

참 야곱의 우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신 옆구리가 뚫리게 하심으로써 생명의 물인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이웃에게 성령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곧 야곱의 우물입니다. 성령은 받아야 줄 수 있습니다. 마치 빵과 포도주를 미리 봉헌해야 성체, 성혈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을 받으려면 이 세상에서 내가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어느 정도는 봉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당에 가서 한 시간도 앉아 있지 않으면서 우울해서 못 살겠다고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먼저 세상 행복을 추구하던 두레박을 내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물을 주시는 분 옆에 앉아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세상 행복을 내어주는 우물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우물에서 행복을 찾기 위해 뙤약볕에 고생하며 또 다시 목마를 물을 푸고 있습니까? 세상 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물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회개의 증거는 내가 주님께 어떤 세상 행복을 봉헌하느냐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물 한 모금 드립시다. 그러면 나를 영원히 샘솟는 야곱의 우물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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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2020년 3월 15일
  | 03.15
528 45.2%
[수원] 솟아오르는 영원한 생명의 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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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물에 관한 주제가 계속 나오고 있다. 그 물은 사순절의 신비를 더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목말라 죽게 되었다고 불평을 했을 때 바위에서 물이 솟게 한 기적을 전하고 있다. 물은 생명의 본질적 요소이다. 광야는 생명의 원천이 고갈된 장소로 물과 대립적이다. 물이 없다면 죽고 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왔소? 우리와 우리 자식들과 가축들을 목말라 죽게 하려고 그랬소?”(탈출기 17,3) 이것은 살아남기를 바란다는 표지이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그 내용은 모두 물이라는 표지하에 전개되고 있다. 예수님과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풍성히 먹여 살리시는 “생명의 원천”이심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목마른 인간이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목말라 하시며 당신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렇게 하고 계시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 4장 10절)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 여인은 알아듣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좀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려 주신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장 14절)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요한 4장 14절)

샘솟는 물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또 다른 의미로 그 물은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을 떠나실 때, 우리에게 풍성히 주실 성령의 선물도 암시한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물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7장 37절-39절)

예수 그리스도는 갈증을 풀어주고 생명을 주는 물이실 뿐 아니라, 하느님과 새로이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 4장 24절) 하느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당신의 성령과 진리의 말씀을 주시며,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고 직접 우리를 찾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영과 진리 안에서”라는 말은 우리의 삶을 바꾸어 주시는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살아있는 예배를 뜻한다.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기에 새로운 예배는 그분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바로 그분이 ‘새로운 예배’이시다. “지금 우리의 성전은 예수이시며 이 순간부터는 이 성전이 그리짐(Grizim) 산상과 예루살렘의 지성소를 대신한다.”(I. De La Potterie, Gesù verità, Torino 1973, p. 47)

그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장 26절)라고 하신다. 그녀는 놀라움과 기쁨에 가득 차 동네로 달려가 사람들에게 알리고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든다.(요한 4장 29-30절)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온다.”(요한 4장 22절)고 하더라도 그 구원은 그들과 가까이 있는 사마리아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다 포용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구원은 모든 사람을 다 포함하고 있음을 복음은 말한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요한 4장 42절)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요한 4장 32절)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만큼 예수님의 신비는 알아듣기 어려운 것이다. 제자들은 어떤 사람이 음식을 예수께 갖다 드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장 34절)

그 일은 무엇인가?

문맥을 볼 때, 그것은 예수께서 당신 사도들을 파견하시고 또 사마리아인들 가운데 이루어진 결과가 상징적으로 나타나는 ‘선교 사명’을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요한 4장 35절)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분명히 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구원의 희망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좌절하거나 실망하고 있는 젊은이들, 착취당하고 소외당하는 가난한 이들, 방향감각을 잃은 지식인들, 이들에게 교회는 응답하도록 해야 한다.

사랑과 진리에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사람들의 외침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귀를 막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순절을 통하여 우리는 보다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더욱 훌륭한 ‘복음 선포자’가 되어야 한다. 훌륭한 그리스도인=훌륭한 복음 선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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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20년 3월 15일
  | 03.15
528 45.2%
생명의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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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는데 물은 생명에 꼭 필요한 필수 요소입니다. 하지만 저는 물을 잘 마시지 않습니다. 워낙 물 마시는 것을 싫어해서 어떤 날은 물 한 잔도 안 마시곤 합니다.

철원에서 군 생활할 때 사단 RCT 훈련을 마치고 수십 킬로를 행군해서 부대로 귀환하는데, 컨디션 조절을 잘 못했는지 행군이 정말 지옥처럼 느껴졌습니다. 워낙 행군을 많이 하는 부대였기에 평소엔 힘들어도 잘 참아냈는데, 그날 밤 행군 길은 탈수 현상까지 생겨 아직 갈 길은 10km 이상 남았는데 점점 눈이 흐려졌고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허리춤에 달린 빈 수통이 덜렁덜렁 대는데 버릇처럼 한 방울도 남지 않은 빈 수통을 계속 입에 털면서 버틸 수 없는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앞으로 푹 엎어지면서 기절했고, 제 군생활 중 처음으로 낙오를 체험했습니다. 소리치는 외침들이 어스름하게 들리고 무전을 치는 소리 등… 의무병이 쓰러진 저를 일으켜 부축해 의무대 지프차에 태우는 데 의식이 없다 보니 짧게 짧게 기억이 났습니다. 의무대 차량 뒷자리에 누운 채로 의무병이 수통의 물을 주는데 그렇게 의식이 없는 상황에서도 수통을 가로채듯이 빼앗아 그 많은 양의 물을 벌컥벌컥 순식간에 다 마셨습니다. 의무병이 “아저씨! 이제 의식이 좀 들어요? 물 좀 더 줄까요?” 하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네! 제발 물 좀 더 주세요.” 하고는 두 번째 수통의 물까지 단번에 다 마셨습니다. 그날 마신 수통의 물 두 통이 지금껏 제가 마셔본 물 중에 최고 생명의 물이었습니다. 정신이 돌아오고 탈수 현상이 사라지자 제 눈을 살피던 의무병이 장교에게 보고하고 제가 속한 중대의 무리에 내려주었습니다. 정신이 들고 나니 중대원들 무리로 들어가는 것이 너무나 창피하고 부끄러웠지만 놀랍게도 두 통의 물에 제 체력은 신기하게 완전히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영적 갈증을 대번에 알아보셨습니다. 슬프고 어두운 삶을 살아가는 그 사마리아 여인은 가까이 마음을 털어놓고 위안을 청할 사람도 없이 삶의 의미를 전혀 찾지 못하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예수님의 한없는 사랑의 샘물이 되어주십니다. 저에게 수통 두 병을 연민으로 전해주어 그날 밤, 저를 살려준 그 의무병처럼 예수님은 육신뿐 아니라 영혼까지 살려주시는 부활의 생명수를 여인에게 건네주시고 희망 없던 그녀의 삶은 기쁨으로 바뀌고 부활을 체험하고 늘 멀리하며 피했던 마을 사람들에게 달려가 생명의 주님을 만났다고 외칩니다.

이 거룩한 사순 시기, 우리는 우리 육신의 물만 찾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생명수를 목말라 해야 합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14) 주님의 말씀에 사마리아 여인처럼 “주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큰소리로 외치는 사순 시기가 되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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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한영기 바오로 신부
주보 2023년 3월 12일
  |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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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6   부활 제5주일 성경 말씀 해설  [7] 131
795   [수도회] 미풍처럼 다가오시는 하느님  [2] 2574
794   [청주] 주님의 길  [2] 119
793   [대전]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완전한 유일한 이콘(상)  [2] 2810
792   [인천]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8] 2562
791   [수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4] 3051
790   [서울]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신 예수  [9] 2835
789   [안동] 행복의 길 :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  [3] 2838
788   [대구] 우리 삶의 네비게이션이신 예수님  [4] 2847
787   [마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2] 2799
786   [부산] 하느님이 하시는 일  [4] 2476
785   [전주] ‘위하여’가 아닌 ‘함께’  [3] 740
784   [광주/제주] 본래의 제 기능  [4] 553
783   [군종]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2] 1811
782   [의정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1] 902
781   [원주]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2] 600
780   [춘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2] 3052
779   (백) 부활 제5주일 독서와 복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7] 2247
778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성경 말씀 해설  [3] 94
777   [수도회] 행복한 목자 착한 목자  [6] 2418
776   [인천] 죽을때 후회하지 않을 인생  [6] 2546
775   [수원]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7] 2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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