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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나날이 눈 떠가는 삶
조회수 | 2,825
작성일 | 05.03.03
어린 아기는 육체의 눈을 뜨면 엄마 아빠를 알아본다. 초등학생 때는 글눈을 뜬다. 사춘기가 되면 이성에 눈을 뜬다. 40이 지나면 불혹(不惑)의 경지에 이른다. 그러나 인간의 영적인 눈은 죽는 날까지 계속 새롭게 떠가야 한다. 자기 편견이나 영적인 오만은 우리를 눈멀게 한다.

1. 우리는 때때로 보아도 보지 못한다.

마산 촌놈이 하루는 부산엘 갔다. 점심때가 되어 식당 앞에 주차를 하려하는데, 식당 앞에 우리 본당 신자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데레사씨 거기서 뭐하세요?"하고 물었다. 한번 슬쩍 쳐다보더니 딴 곳을 보며 모른 체 한다. 나는 다시 조금 큰 소리로 "데레사씨, 여긴 웬일로 오셨어요?" 하였다. 한번 힐끔 쳐다보더니 또 딴 곳을 본다. 나는 할 수 없이 차에서 내려 팔뚝을 툭 치면서 "데레사씨 사람 못 본체 하기요?"하며 바싹 다가섰더니, "아이고 신부님이시네. 나는 웬 사람이 나보고 뭐라카노 싶었더니"하면서 집안에 결혼식이 있어서 이곳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두 번이나 나를 분명히 보았는데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이런 곳에서 본당신부를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아예 그 가능성까지도 배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실을 인식하는데 있어 육체의 눈보다는 열린 마음, 영적인 시력이 더 중요한 모양이다. 마음이 닫혀 있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2. 인간은 일생동안 눈 떠 가며 산다.

어린 아이는 100일이 지날 무렵이면 얼굴을 알아보고 낯선 사람을 보면 울기도 한다. 육체의 눈이 뜨이는 것이다. 그러다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면 글눈이 뜨인다. 사춘기에 들어서면 이성(異性)에 눈뜨게 된다.  인간은 죽는 날까지 끊임없이 새롭게 눈을 떠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태생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신다. 태생소경은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하는 물음에, "선생님 믿습니다"하고 신앙을 고백했다. 그러나 두 눈이 멀쩡하고 똑똑하다고 자부하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였다. 아무리 두 눈으로 본당신부를 보았어도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다. 육체의 눈으로 아무리 똑똑히 보아도 그것을 제대로 해석할 마음의 눈이 열려있지 못하면 헛일이다. 육체의 소경 됨보다 마음의 소경 됨이 더 큰 문제이다. 신앙의 눈이 뜨이고, 또 영원한 세상에 대한 영적인 눈이 열리면 인생의 넓이와 깊이를 보는 시력이 확 달라질 것이다.

3.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들

우리 마음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는 선입견이다. "그 사람, 좀 그런 사람이라 카더라"는 말이 있다. 누군가에게 들은 "...... 라 카더라" 라는 한마디는, 갑자기 시야를 막는 안개처럼 실체를 보지 못하게 한다. 선입견이라는 마음의 색안경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둘째는 영적 오만이다. 남을 무시하고 자만하는 사람,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오만은 명경지수(明鏡止水) 같아야 할 우리 마음의 호수에 돌을 던지는 것과 같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기준을 수시로 바꾸고, 모든 것을 그 잣대에 따라 판단하는 사람이다. 바리사이들의 모습이다.

셋째는 원한과 마음의 상처이다. 원한과 증오, 죄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정서적인 상처가 되어 일그러진 거울처럼 참된 상(像)을 비치지 못하게 한다.

사순절(빠스카 준비시기)이 깊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남을 판단하고 단죄한다. 나도 잘못 볼 수 있음을 깨닫자.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을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하신 복음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자. 내가 만사에 기준이 아님을 깨닫자. 혹시라도 나의 선입견과 오만과 영적 상처로 주변의 형제 자매들을 판단하고 매도함으로 고통을 안겨준 적은 없는가 반성해보자.

태생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신 주님께 "주님 제 마음의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하며 겸손되이 청하자. 삶의 깊이와 넓이를 제대로 볼 수 있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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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유영봉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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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로의 길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께서는 현존하십니다. 나는 그분을 만나 뵈었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대단히 미심쩍어 하며 회의적으로 “나는 아니다. 우리는 오늘날 하느님 체험에 있어 위기에 처해 있다. 하느님께서는 현존하시지 않는 듯하다. 하느님을 체험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구체적이고 증명할 수 있는 것만이 ‘사실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는 ‘실제적인 것’을 보지 못하는 수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일상의 현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서 표지나 징조를 읽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찰함으로써! 눈먼 사람의 치유에 대한 이야기를 단순히 이야기로만 알아듣고자 한다면, 우리는 오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드러난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을 가리키고 있음도 알아채어야 합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건에서 눈으로 볼 수 없는 표지도 알아챌 수 있어야 합니다. 곧 시력의 기적적인 회복은 예수님께서 가능하게 하신 신앙의 눈의 회복도 암시하고 있습니다. 눈먼 사람을 볼 수 있도록 하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사람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능력도 가지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는 것처럼, 영혼의 눈을 뜨게 하시는 힘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볼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그분께서는 증명할 수 있는 사실 너머에서 하느님의 위대한 실제를 보는 것을 가능하도록 해 주십니다.

신앙에로의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사람을 만나십니다. 그분께서는 그 사람을 불러들이시며 그리고 “가라.” 하고 이르십니다. 눈먼 사람인 그 사람도 신뢰에 가득 차 ‘파견된 이’라는 말로 번역되는 “실로암”으로 달려갑니다. 이것은 치유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준비가 되었지 않다면, 모든 수고는 헛됩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바리사이들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장황하고 성가신 질문들은 그들이 전혀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조금도 원치 않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세상의 빛”(요한 9,5)이신 예수님께서는 볼 수 있도록 하심으로써, 사람들을 갈라놓습니다.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이 보려는 마음도 없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제 심판이 되어 돌아옵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자는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그리스도와 만남은 결단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을 들을 때, 우리는 말씀에 대한 증인들이 되고, 말씀에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이 되며,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됩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함께 미사에 참여하고 있음은 말씀과 함께 말씀 안에서 이미 준비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는 신앙으로 인한 어려움들과 그리고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불확실성과 불안에 대해서도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복음 선포는 신앙의 길을 새롭게 가도록, 마음먹고 준비하라고 우리를 일깨우는 통보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눈먼 사람을 치유하는 장면 안에서 신앙에로의 길을 알려줍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면서, 부활대축일을 준비하는 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신앙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분께서는 당신 말씀에 대한 신뢰 안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려고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눈을 새롭게 뜨도록 은총도 베풀어 주십니다. 거기에 우리가 지금 사순시기를 보내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시간들은 우리가 깨어서 실로암(= 파견된 이)을 향해 신앙을 발걸음을 재촉하도록 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받아들여서, “눈을 뜸”의 체험에 이를 수 있는 길을 가도록 잘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요한 9.37)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9,38)

차광호 파스칼 신부
  |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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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고 말하라"

아름답다고 말하라..사람아
하느님께서 지으신 너

아름답다고 말하라
내 숨 쉬고 움직이는 한 순간

이 한순간을 둘러싼 이 산과 숲
이 바람 햇빛 사람들

사람들 사이에서 걷는 일
때로 힘에 겨워도
아름답다 말하라..이 고통마저

이연학(요나)신부님의 시 "아름답다고 말하라"의 일부입니다. 여기에 곡을 붙인 것도 있지요. 시에서의 주인공도 글쓴이도 심안과 영안을 지니신 분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네 일상, 때로는 고통마저도 아름답다고 진정 말할 수 있다는 것은 태생소경의 육안뿐만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을 보고 믿을 수 있도록 영적인 눈도 뜨게 해주신 주님의 은총일 것입니다.

한 자매님이 암 진단을 받고 오랜 시간 치료 중에 있을 때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던지요. 미운사람 한 명 없이 모두가 선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던걸요." 완치가 되고 몇 년이 지난 지금은 그 약발(?)이 떨어졌다며 부끄러운 미소를 지으시는 자매님. 아마도 자매님이 투병 중일 때 하느님께서 그녀의 심안을 열어주셨던 모양입니다.

사실 우리의 육안은 아름다운 것을 바라본다면서 끊임없이 추한 것을 찾아내고, 사랑스러운 것을 찾는다면서 끊임없이 보기 싫고 미운 사람을 만들어 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바라보고 누가 죄를 지었기에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는지 그 죄의 원인 찾기, 불행의 원인 찾기, 종교적 해석 논쟁에 집중합니다. 혹 어떤 제자는 이런 생각도 하였을 것입니다. 아, 거지구나 그것도 소경이야. 저렇게 하루 종일 앉아서 얼마나 벌까?(8절) 배후에 깡패 조직이 있는 건 아닐까?

바리사이들은 더욱 가관입니다. 눈이 멀었다가 눈을 뜨게 된 사람을 여전히 죄인으로 취급하는가 하면(34절) 사람 살려내기, 불행의 원인 없애기, 사랑하기에 온통 집중하고 계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하고 내쫓을 궁리만 하고 있습니다(22절).

우리도 마찬가지일 때가 많습니다. 비단 남에게 일어난 불행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을 보고도 이거 무슨 죄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인가? 뭘 잘못했나? 자꾸만 자꾸만 죄의 원인을 찾으려 합니다. 샅샅이 살피다가 지치고 실망하고 좌절하고 왜 하필 나한테만 이런 큰 고통을 주시나 항변하다가 작인 믿음마저 잃어버리는 경우까지 있으니까요.

가족의 얼굴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파란 하늘과 어우러진 하얀 꽃잎이 가슴미어지게 아름다운 것인지 모르는 태생소경의 장애가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임을(3절) 깨닫지 못하는 우리이기에, 인간관계의 어려움이나 경제적 난관, 사랑하는 이와의 사별 등 그 어떤 역경도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의 섭리임을 깨닫고 언제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도록, 우리의 심안과 영안을 뜨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최태준(필립보) 신부
  |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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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시선으로

찬미예수님.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거나 듣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 같아.’ 실제로 이 이야기는 의학적으로 맞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눈이 보고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가 눈으로 본 것들을 뇌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서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보더라도 내가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평가를 내리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눈이 보이게 된 사람과 바리사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입장과 생각으로 사건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또한, 눈으로 보았다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세례를 받았지만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기준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기준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결국, 눈은 뜨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눈이 먼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세상을 잘 보고 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하느님의 기준이 아닌 나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잘못된 것을 옳다고 이야기할 때도 있고, 옳은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 할 때도 있습니다.

사순 시기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기준을 나에게서 하느님께로 옮겨가는 시기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내가 무엇에 더 관심이 있느냐가 결국 내가 바라보는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결정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기준으로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남은 사순 시기동안 노력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만들어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마산교구 이동진 안셀모 신부>
  |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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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가서 씻어라”

신앙은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우리 눈에 “영적 안경”을 씌워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 영적 시력을 “영혼의 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육신의 눈(육안)과 다릅니다. 보는 관점과 대상과 그 내용에 있어서 서로 다릅니다. “육안”은 겉만 볼 뿐이지만 “영안” 즉 영혼의 눈은 속내까지 볼 수 있습니다. 육안과 영안이 다르듯이 하느님의 눈은 사람의 눈과 완전히 다릅니다.

독서에서 사무엘은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인물을 찾아 기름을 부으려 했을 때 사람의 겉모습만 보았으므로 하느님이 원하시는 사람을 즉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몇 번의 실수 끝에 다윗을 보고 그가 하느님께서 점지하신 인물임을 알아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무엘에게 “용모나 신장을 보지는 말라. 하느님은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하느님은 속마음을 들여다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완전한 우리의 눈은 자주 실수를 범합니다. 세상도 우리 눈을 속이지만 우리도 거짓이나 허영으로 우리 눈을 속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판단의 각도가 비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안은 멀쩡하지만, 영적으로 눈먼 소경들이 많습니다. 여러 종류의 소경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돈, 명예, 지위, 도박, 쾌락 따위에 미치면, 눈먼 소경이 됩니다. 눈먼 이들은 다른 더 소중하고 올바른 것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눈 뜬 장님”이라 하겠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태생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침으로 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니 그가 눈이 열려 세상과 사람을 똑바로 보게 되었습니다. 소경은 치유 받아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았지만, 눈이 멀쩡한 바리사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라보았기에 무시하면서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인처럼 판단합니다. 누가 눈먼 사람이고 누가 눈 뜬 사람인지 분간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는 물론, 세상과 나 자신과 하느님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우리 자신과 하느님을 향해서도 눈떠야 합니다. 진정으로 매일 볼 수 있게 해 주는 신앙의 안목, 영혼의 눈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눈만 뜰 수 있다면 우리 일상생활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 우리의 고통과 어려움 속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 연약한 우리를 지탱해 주시는 하느님을 알아 뵈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관점에서, 세상의 견지에서 벗어나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느님께 간청합시다. 하느님께서 빛을 주시기를 영혼의 눈을 뜨게 해 주시기를 간구합시다.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어라.”

▦ 마산교구 최영철 알폰소 신부 : 2017년 3월 26일
  |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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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주님, 저도 보게 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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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비신앙인이었던 한 사람이 신앙인으로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태생소경은 사람들에게 ‘예수라는 분’으로, 바리사이파들에게는 “예언자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유다인들과 죄인에 관한 논쟁 중에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유다인들로부터 회당 밖으로 내쫓기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자 “주님”이라 고백하게 됩니다. 이제 그의 신앙은 완전해집니다. 완전한 의미에서 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까지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태생 소경이 자신을 고쳐주신 분을 알아가게 되는 과정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치유하신 분을 단죄하려는 무리들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온갖 모략과 비난을 넘어서서 치유된 자신과 가족마저 오해와 불이익을 가져오게 할 그 상황이 오히려 “주님, 믿습니다.”라고 그를 치유해 주신 분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삶과 신앙에서 힘든 시간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 시간들 속에서 어떤 이는 인간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더욱 성숙해집니다. 하지만 많은 신자들은 사람에 대한 실망들로 인해 그 사람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저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저버리거나 다른 공동체로 옮겨버리기도 합니다. 믿음의 대상과 사람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은 부족한 신앙에서 유래합니다. 사람(성직자, 수도자, 봉사자, 동료)에 대한 실망이 내 신앙을 흔들어 놓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믿어 온 것이 하느님이 아닌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내 생각이나 방법만을 고집해 온 것은 아니었는지를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당하는 역경과 실망은 하느님과 더욱 친밀해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사람이 아니라 오직 그분만을 응시할 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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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김화석 도미니코 신부
2020년 3월 22일
  |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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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달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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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있지만 실제로는 앞을 볼 수 없는 눈.”

오늘 복음에는 태생 소경, 즉 태어나면서부터 시력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눈이 보이지 않으면 신체기관의 약 80%가 마비된 것과 같다고 하니 눈이 얼마나 중요한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상영되었던 ‘올빼미’라는 영화에도 시력장애를 가진 침술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영화에서 보듯이 시력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눈을 대신할 다른 기능, 특히 청력이나 촉각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매우 예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으로 보는 대신 듣고 만지는 것으로 사물이나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합니다.

태생 소경은 세상의 어떤 것도, 심지어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의 얼굴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많은 경우, 아니 거의 대부분 내 안에 계시고 다른 사람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 당달봉사인 셈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청력이나 촉각 등 다른 기능으로라도 하느님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해 본당 재건축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형제님 한 분과 의견이 맞지 않아 언성을 높여가며 논쟁을 벌인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그분이 제시한 의견에 합당한 설명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분 입장에서는 많이 불편하셨던지 그 후로 주일미사에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잘못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에 모른 체하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말쯤 어느 모임에 나갔다가 그분을 잘 아는 다른 분으로부터 전화라도 한 통해서 마음을 좀 풀어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유야 어찌 되었건 그분이 미사에 나오지 않는 것은 저 때문이었습니다. 제 감정으로 인해 눈으로 보이는 형제님의 모습만 보고 그분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 뵙지 못한 것이지요.

당달봉사처럼 눈은 제 기능을 못하고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다른 분이 말씀하신 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 청력은 살아있었습니다. 다음날 작은 선물을 준비해 그분 사무실로 찾아가서 저의 미성숙으로 인해 마음을 불편하게 해드린 것에 진심으로 용서를 청했습니다. 그분도 사무실까지 찾아오게 해서 정말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며칠 뒤 성탄미사에 자매님과 함께 나오셨는데 저에게는 둘도 없는 성탄 선물이었습니다. 시력장애를 가진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멀쩡한 두 눈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눈으로 하느님을 뵐 수는 없습니다.

사순 시기 동안 행하는 기도와 단식 그리고 자선이 우리의 영을 맑게 하여 육신의 눈으로 뵐 수 없는 하느님을 영적 청력과 촉각으로라도 듣고 느낄 수 있게 이끌어 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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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윤행도 가롤로 신부
2023년 3월 19일 주보
  |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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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1   [수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4] 3051
790   [서울]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신 예수  [9] 2835
789   [안동] 행복의 길 :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  [3] 2838
788   [대구] 우리 삶의 네비게이션이신 예수님  [4] 2847
787   [마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2] 2799
786   [부산] 하느님이 하시는 일  [4] 2476
785   [전주] ‘위하여’가 아닌 ‘함께’  [3] 740
784   [광주/제주] 본래의 제 기능  [4] 553
783   [군종]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2] 1810
782   [의정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1] 902
781   [원주]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2] 600
780   [춘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2] 3052
779   (백) 부활 제5주일 독서와 복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7] 2247
778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성경 말씀 해설  [3] 94
777   [수도회] 행복한 목자 착한 목자  [6] 2418
776   [인천] 죽을때 후회하지 않을 인생  [6] 2546
775   [수원]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7] 2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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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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