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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제대로 본다는 것은
조회수 | 2,589
작성일 | 05.03.03
사람은 누구나 두 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하며, 눈을 통해 구분하고 판단합니다. 사람에게 두 눈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눈이 없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으며, 산과 강, 꽃과 나무의 아름다움인들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사람에게 두 눈이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고 확인할 수 있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눈을 갖고 태어났지만 소경이어서 볼 수 없다면 참으로 답답하고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다면,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도, 자연의 아름다움도 보지 못한다면 그런 눈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많지는 않더라도 이렇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면서 누리는 아름다움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애정과 연민으로 대해야 합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 시대에도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들을 소경이라고 하면서 그 불행이 그들의 부모나 혹은 자신들의 죄 탓이라고 치부해버렸습니다. 그들의 불행과 아픔을 외면하고, 오히려 죄인으로 몰아붙여 이중의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들이 죄인입니까?

오히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궁색한 변명은 아닐런지요. 사회가 져야할 약자에 대한 책임을 율법이란 이름으로 교묘히 피해나가는 옹색한 책임회피는 아닌지요. 실상 어느 누구도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육체의 장애일 뿐이며 그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병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들만이 특별한 대접(?)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함" 이라고 하십니다. 즉 그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치유되고 모든 사람이 누리는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더 특별한 은총이 베풀어져야 하고 사회는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만난 소경은 비록 유다인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앞을 보지는 못하지만 그들보다 먼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비록 눈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마음으로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오히려 앞을 보지 못하니 세상 사람들의 타락과 추함을 보지 못하게 되고, 그러니 남들보다 더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고, 그래서 더 쉽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눈이 있어도 제대로 볼 수 없다면, 그런 눈은 없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한 두 눈을 갖고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비뚤어지고 이기적인 마음과 욕심이라는 눈을 통해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본다면 소경이 차라리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눈이 없어도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훨씬 더 세상을 아름답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기심과 아집과 욕심으로 가득 찬 눈으로 모든 것을 삐딱하게 바라보고 투정부리는 바리사이파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두 눈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제대로 보며 살아갑시다. 내 가족과 이웃이 함께 살아감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제대로 보고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내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제대로 보고 그들의 아픔에 함께 참여합시다.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바라본다면,
오늘 복음의 소경처럼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이웃의 소중함과 자연의 소중함을 알아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두 눈을 가지고 마음의 소경이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한 주간동안 우리 주위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더 많이 가지고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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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배인호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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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진흙으로 온 몸을 발라 주소서

최후의 만찬을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미술과 과학과 철학에 정통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화가인 한 친구와 사이가 나빠져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바로 전에 큰 싸움을 했습니다. 그는 최후의 만찬에 나오는 인물 중에 유다 이스카리오를 제일 먼저 그렸는데, 자기와 싸운 동료 화가의 얼굴을 유다로 그렸습니다. 원수 같은 친구의 얼굴이 유다와 더불어 대대에 전해지게 하려는 흉계였습니다. 두 번째로 그가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려고 하는데 며칠을 애써도 좋은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아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여러 날 뒤에 그는 실패의 원인을 찾았습니다. 친구에 대한 증오심이 유다의 얼굴에서 살아나 성자의 모습을 생각할 여지를 말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유다의 얼굴을 지우고 그 친구를 찾아가 화해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머리에 성자 예수의 모습이 뚜렷하게 떠올랐다고 합니다.

형제 여러분!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께서 태생소경을 치유하시는 기적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 된 것이다." 인간의 불행을 죄의 결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오히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그 죄를 용서하시고 치유하시는 주님, 세상의 빛이심을 계시하십니다.

예수님은 불치의 병과 죄인으로 이웃의 냉대와 멸시를 받으며 평생 불행하게 살아가는 소경에게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게 하십니다.

안식일에 진흙을 발라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세상을 보게 하시는 예수님은 마치 창세기에서 진흙을 빚어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시는 야훼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우리는 재의 수요일에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라는 말씀과 함께 이마에 재를 받으며 사순절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순절동안 죄를 뉘우치며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할 때 죄의 용서와 빛이신 그리스도를 뵙는 다는 확신을 얻습니다.

안식일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날 진흙을 개어 소경을 낫게 하신 일처럼 우린 매주일 미사 때마다 죄의 어두움에서 빛이신 성체성사를 통하여 용서와 치유를 받고 새로운 아담으로 창조됩니다. 은혜로운 사순절,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향한 미움과 증오심을 버리고 용서와 화해를 요구하십니다. 이 화해와 용서만이 성체 안에 계시는 주님을 뵙고 새로운 삶을 약속 받습니다.

오늘 미사 중에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주님, 진흙을 개어 소경의 눈을 씻으신 그 손으로 저희의 온 몸에 진흙을 발라 주소서. 그리하면 저희는 눈뿐만 아니라 온 몸이 새로워져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되어 어두움 속에 있는 이웃을 빛이신 당신께로 인도하는 구원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아멘!

이상복 비오 신부
  |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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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은 사순 제4주일입니다. 요즘 농촌에서는 농사일로 바쁩니다. 가을의 추수를 기대하면서 열심히 준비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태생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을 만나셨습니다. 땅에 침을 뱉어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어라.”고 하십니다. 소경은 가서 얼굴을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왔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 전체에서 볼 때, 똑같은 사실을 두고 태생 소경과 바리사이들은 서로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태생 소경은 육체적인 밝음 뿐 아니라, 신앙 안에서도 밝음을 찾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그분의 법을 온전히 안다고 자처하던 바리사이들과 유다인들은 장님이 되고 맙니다. 태생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 “주님, 믿습니다.” 라고 신앙을 고백하면서 그의 신앙은 완전해 집니다. 태생 소경은 주님을 통하여 마침내 완전한 의미에서 ‘보게 됩니다.’ 반대로 바리사이들과 유다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그를 죄인으로 몰아 배척하면서 오히려 참으로 눈이 멀었습니다.

태생 소경이 실로암 연못에서 눈을 뜨게 된 것처럼 그리스도 신자는 세례의 물을 통해 밝은 빛을 얻습니다. 그 빛으로써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며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존재의 의미를 신앙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세례는 하나의 커다란 빛입니다. 그 빛은 우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어, 그들도 우리의 빛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둠 속에 살다가 세례를 통하여,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 살게 된”(에페 5,8)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빛은 모든 선과 정의와 진실을 열매 맺게 해 줍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빛의 선포자요, 증거자로 살아가기 위해 잠과 죽음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에페 5,14 참조).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부활대축일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주님께서 우리 삶의 빛이 된 세례의 의미를 깨닫고, 빛 속에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그 빛이 모든 이에게 밝음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일 예절에 참례할 때, 기도할 때,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리고 성체를 모실 때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빛을 비추십니다. 주님의 빛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위에 있는 이들에게 언제나 그 빛을 비추어주는 타오르는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빛’(요한 8,12)이십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에페 5,9)

전장호 프란치스코 신부
  |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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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복음은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 이야기를 많이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 역시 길을 가시다가 만난 눈먼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불행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적으로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 볼 수 있는 사람보다 더 큰 행복 속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경우를 종종 목격합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는 눈이 먼 사람들이지만 오히려 영적으로 예수님의 빛을 바라보며 따라 사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을 고쳐주시는 오늘 복음 이야기 역시 육체적으로 눈이 먼 사람과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적 가르침이 숨어 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은 육체적으로 눈인 먼 것을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으로 사용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께 가까이 올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눈이 멀었다고 표현했던 것이지요. 결국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예수께서는 인간의 육체적인 눈의 치유 뿐 아니라, 그 마음의 눈이 먼 상처마저도 치유해 주시는 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가 육체적이며 영적인 차원에서 읽혀지기를 원하는 요한복음 사가의 의도는 마지막 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39-41)

오늘 우리가 들은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명선언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말씀은 바리사이 뿐 아니라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깨닫기 위해 먼저 우리의 무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치유받기 위해 우리의 눈먼 상태를 인정해야 하며 용서받기 위해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초대교회부터 오늘의 복음 이야기는 세례와 연결되어 사용되어져 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실로암 연못에 들어간 눈먼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 되어 돌아옵니다. 마찬가지로 믿는 이들은 세례성사를 통해 영적으로 새로이 태어나며 눈을 뜬 온전한 사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세례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앉아 구걸하던 장님이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하며 따르는 제자가 되었는지 보여주는 마치 실제의 장면을 보는 착각이 들게 만듭니다.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있는 힘은 지식의 습득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경험과 체험(지난 주 복음의 사마리아 여인처럼)을 통해서 우선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신앙의 위기는 바리사이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많이 배운 바리사이들보다 눈이 먼 사람이 먼저 믿음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만났고 그분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알기 전에 그분에 대한 체험이 우선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는 주님 앞에 영적으로 여전히 눈이 먼 우리 자신을 겸손히 고백하며 히포의 성인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빛과 영적 통찰력을 갖게 해주시기를 청합시다.

<안동교구 임준기 다미아노 신부>
  |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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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반응

태어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을 두고 제자들은 ‘그 사람은 누가 잘못을 했기에, 그렇게 눈이 멀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기 위해서’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눈 먼 사람을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를 통해 하느님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예수님이라는 이가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라는 것도 드러났습니다.

우리에게는 각자 가지고 있는 부족한 점, 결핍된 부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것을 두고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왜 그런 것인지 여쭈어 볼 때, 하느님은 그것이 당신의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그럼 나를 슬프게 하고 나를 비참하게 하는 나의 못난 부분이 오히려 큰 힘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앞을 보게 된 그 사람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볼 수 있게 된 눈이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더불어 내 가족과 조상의 죄가 그간의 소경으로 살았던 자기 삶과 관계가 없다 하니 얼마나 큰 오해가 풀렸습니까?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는 순간, 예수님이 하느님에게서 온 분임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과 유대인들은 그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일을 믿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그의 기쁜 소식에 반가워하거나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고, 그와 그의 가족들을 괴롭혔습니다. 어쩌면 그 사람 입장에서는 하느님으로 인해 더 불편해졌다며 탄식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 사람은 끝까지 자기에게 드러난 일이 하느님의 일이며, 그 일을 해주신 예수님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믿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설득하고, 괴롭히고, 욕설을 퍼부어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바리사이들에게 내쫓김을 당했지만, 하느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앞을 보게 된 사람이 하느님의 음성에 ‘반응’하지 않고, 사람들의 음성에 ‘반응’했다면 자기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일을 부정하고 피했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그 사람은 하느님의 음성에 ‘반응’했고,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그의 ‘반응’이 배울 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이 아닌 하느님께 ‘반응’ 하셨기 때문에, 그 많은 야유와 음모를 멀리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실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며 우리는 무엇에 더 기꺼이 ‘반응’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타인의 인정, 타인의 ‘반응’에 우리는 얼마나 욕심을 부리고 있습니까? 그것이 나에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일과 대치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많이 흔들리거나 너무 터무니 없이 하느님이 아닌 사람들 쪽으로 가버린다면, 우리는 이 사순시기 동안 ‘반응’에 대한 욕심을 줄여야 하겠습니다. 그 굶주림이 참기 힘들겠지만, 그래서 괴로울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 대신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미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음성에 ‘반응’하는, 그래서 외로울 지도 모르는 시기를 살도록 노력하는 사순시기 되면 좋겠습니다.

▦ 안동교구 김지성 안토니오 신부 : 2017년 3월 26일
  |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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