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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무거운 십자가는 은총의 도구로 사용된다.
조회수 | 2,933
작성일 | 05.03.03
늦은 시각까지 휴게실에 TV가 켜져 있길래, 살짝 문을 열어봤습니다. 그런데, 아니 글쎄 몇몇 형제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어 '이게 무슨 일인가' 했었지요.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느낌표'의 '눈을 떠요' 꼭지를 보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또 어떤 일로 심금을 울리나 궁금증이 생겨 형제들 사이에 슬그머니 끼어 앉았습니다.

안타까운 시선으로 시각장애인을 바라보는 가족들의 근심어린 얼굴, 자신 때문에 고생하는 가족을 위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시각장애인, 그저 착하기만 한 사람들의 가슴아픈 사연들을 보고 있노라니 저절로 눈물이 나왔습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새 세상을 밝혀주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출연진 모습도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이토록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프로그램으로 눈물샘을 자극한 제작진 아이디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눈을 떠요' 꼭지를 통해 실제로 새 삶을 되찾은 이웃들의 환한 얼굴을 바라보며 참으로 부럽고, 또 한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우리 교회도 더 많은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형제자매들의 헌신, 여러 분야에 걸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 활약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순식간에 온 국민적 동참과 구체적이고 실제적 도움을 즉각 이끌어내는 '눈을 떠요' 꼭지의 참신한 기획을 보며, 우리가 하고 있는 사목에 대한 더욱 진지한 점검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가 남겨준 각막을 이식받고 새 삶을 되찾은 사람이 '죽어도 이 은혜를 잊지 않겠다. 어떤 모습으로든 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치유행위는 다시 한번 생명을 부여하는 가장 은혜로운 활동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태생소경의 치유를 통해 그에게 새 세상을 열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생소경에게 일단 담당 제자(접수창구)에게 가서 접수를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순서를 기다렸다가, 번호가 뜨면 들어오라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 딱한 사람을 만난 바로 그 자리에서 즉각 구체적 치유활동을 시작하십니다.

당장 괴로워서 죽을 것만 같은 사람 앞에서, 당장 하루하루가 답답해서 못 견디는 사람들 앞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즉각적이고 구체적 도움입니다. '한번 기다려 봅시다. 살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요.' 그분들에게는 이런 말처럼 약 오르는 말도 없을 것입니다. 좋은 마음, 따뜻한 한 마디 말, 간절한 기도 등등 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즉각적이고 구체적 도움의 손길입니다.

태생소경! 말만 들어도 가슴이 답답해오는 안타까운 단어입니다. 세상에서 태생소경처럼 큰 십자가를 진 분들도 드물 것입니다. 그분들은 우리가 너무도 당연히, 그리고 '공짜로' 실컷 누릴 수 있는 빛의 세계와는 완전히 단절된 암흑 세상을 살아갑니다. 찬란한 일출이나 감명 깊은 낙조, 밤하늘을 곱게 수놓는 무수한 별들, 황금빛 들판…. 태생소경에게는 이런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얼마나 답답한 일이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태생소경, 그 또한 태어나는 순간부터 소외와 저주를 밥먹듯이 당하며 살아왔습니다. 더욱 그를 슬프게 했던 일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왜곡된 시선이었습니다. 태생소경으로 태어난 것만도 서러운 일이었습니다. 너무도 고통스런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당시 유다 사회에서는 고통의 원인을 규명해 나가는 데 있어서, '고통은 고통 당하는 인간이 저지른 죄의 결과'라는 고통관이 어느 정도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딱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단 한 번만이라도 눈을 떠보고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태생소경의 철저한 소외, 심연의 고통, 죽음보다 더한 좌절감,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비참함이 예수님 마음을 자극합니다. 태생소경이 한평생 지고 살아온 무거운 십자가는 진정 괴로운 것이었지만, 결국 예수님 구원을 불러오는 은총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이 됩니다. 결국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갖은 삶의 고통이나 십자가는 우리 자신의 한계나 비참함을 깨닫게 하는 동시에 영적 눈을 뜨게 하는 계기를 가져다줍니다.

이 세상에는 볼 수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볼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했지만 진정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태생소경은 비록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예수님이 빛이요 구원이심을 온 몸으로 고백합니다. 이런 태생소경에게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눈만 회복시켜 주신 것이 아니라 영혼의 눈까지 함께 회복시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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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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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을 꼭 감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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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는 치유과정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행동은 꽤 색다른 것이어서 의구심을 품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침을 뱉습니다. 진흙으로 갭니다. 그 지저분한 것을 눈 먼 사람의 눈에 바릅니다. 눈먼 사람이나 그 부모 입장에서 보면 꽤 불쾌할 수도 있었겠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쌈박하게 그냥 고쳐주면 어디 덧나나? 그도 아니라면 깨끗한 물이나 기름으로 눈을 닦아주면서 치유시켜주면 좀 좋을까? 그렇게 하면 모양새도 좋을 텐데, 왜 하필 침이냐구? 더럽게 침을 흙에 개어서 눈에 바르느냐 말야?’

눈먼 사람 입장에서도 난감했을 것입니다. 침에 갠 진흙을 눈에 바르니, 얼마나 느낌이 답답했을까요? 눈도 따가웠을 것입니다. ‘도대체 뭘 하시려고 그러시나? 내 눈 가지고 장난이라도 치려고 그러시나?’ 그렇게라도 하고 즉시 눈이 떠졌으면 아무 군소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 난감하게 해놓고 그게 다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시는 말씀은 눈먼 사람의 속을 더 긁어놓았습니다.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어라.”

그간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치유과정을 보면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예수님의 옷깃만 만져도 병이 낫곤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즉석에서 오그라든 손이 펴지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잡으면 죽었던 사람이 일어서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여간 복잡하지 않습니다. 지저분하게 침으로 갠 흙을 바르셨습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근처 아무 연못이나 찾아가서 씻으라는 것이 아니라 굳이 실로암 연못을 찾아가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이럴 경우 자존심 ‘팍’ 상해서, ‘이게 도대체 뭐야? 사람 가지고 장난치는 거야 뭐야?’라고 소리 지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눈 먼 사람은 예수님의 치유과정에 군소리 한 마디 하지 않습니다. 능동적이고 협조적입니다. 그 결과 눈을 뜨게 되는 은총을 입습니다. 오늘 눈먼 사람이 겪은 축복의 기적, 그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침과 진흙으로 제조하신 ‘기적의 고약’ 때문일까요? 결코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비위생적인 고약으로 인해 병이 더 악화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침과 진흙으로 만든 고약’을 바르는 행위는 구약시대 예언자들이 자주 사용하던 상징적 행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행위가 상징하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여러 해석들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재창조’, ‘말씀의 강생’, ‘인간의 자연생활에 대한 은총의 주입’과도 같은 해석. 여기 더 설득력 있는 해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 그래도 보이지 않는 눈에 진흙을 바름으로서 그 눈을 더 확실하게 막아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눈에 진흙을 바른 것은 다른 생각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아무 것도 바라보지 말고, 두 눈을 꼭 감은 채로 예수님 자신만을 따르라는 초청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전적인 믿음, 예수님께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 예수님 외 부차적인 것에 대한 철저한 차단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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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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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眼의 旅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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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안의 기쁨, 개안의 여정입니다.
깨달음의 기쁨,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바로 우리의 영적 여정입니다.
오늘 복 음의 태생 소경은 우리 눈먼 인간을 상징합니다.
눈이 있다하여 다 보는 것이 아니라
눈 뜬 소경도 많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비로소 눈이 열립니다.

예전에 써놓은 ‘예수님은 봄이다.’라는 자작시입니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봄이 입 맞춘 자리마다
환한 꽃들 피어나고
봄의 숨결 닿은 자리마다
푸른 싹 돋아난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흡사 부활의 봄 같습니다. 봄이 입 맞춘 자리마다 봄꽃들이 환히 피어나듯 예수님을 만나자 눈이 열린 태생 소경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 자 깨달음을 주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우리보다 우리의 갈망과 필요를 잘 아시는 분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절망이지만 그분을 바라보면 희망이 샘솟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자 나를 찾는 사람입니다. 누구나의 근본적 갈망입니다. 하느님을, 나를 찾아 발견할 때 참 기쁨입니다. 광야인생을 압축하는

광야의 사순시기 는 집중적으로 주님과 나를 찾는 시기입니다. 장미주일 이라 일컫는 오늘 사순 제4주일은 태생 소경처럼 주님을 만나 우리 역시 눈이 열리는 날입니다. 부활의 기쁨을 앞 당겨 체험하는 날입니다. 하여 우리는 성령의 즐거움을, 영적갈망의 즐거움을 지니고 남은 광야 사순시기를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나를 보고 알기 위해 있는 눈입니다. 눈이 있어도 주님과 나를 못 보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의 발견과 더불어 나의 발견입니다. 이런 개안과 더불어 주님을 발견하고 나를 발견할 때 참 기쁨입니다. 이래야 잠 에서 깨어나,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어나, 세상 어둠을 밝히는 주님의 빛으로, 빛의 자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세상에 이보다 큰 기쁨도, 행복도 없습니다.

태생 소경의 개안 과정은 그대로 우리의 평생 개안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심안(心眼)이 열린 그는 ‘예수님이란 분’에서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마침내 영안(靈眼)이 활짝 열린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라는 결정적 고백을 합니다. 주님을 만나 활짝 눈이 열려 믿음을 고백함으로 구원받은 태생 소경입니다.

사순시기뿐 아니라 평생 개안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 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입니다. 문제는 내 안에 있고 답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 만 주님은 마음을 봅니다.(1사무 16,7 참조) 우선적으로 바꿔야 할 것은 밖의 환경이나 사람이 아니라 내 마음의 눈 입니다. 주님을 찾는 개안의 여정에 항구할 때 우리 역시 점차 하느님의 눈으로 사람들을 보고, 주님 만드신 참 좋은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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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이수철 신부
  |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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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뜨게 하소서!” (요한 9,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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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삶을 돌아보면 여러 차례 실로암에서 눈이 뜨이는 체험들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고 또 다시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의 시간으로 돌아가기를 몇 번을 거듭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느님께 멀어졌다가 당신의 자비하심으로 눈을 뜨고 주님을 믿게 되기를 반복하리라 믿습니다.

스물에 대학에 입학하면서 서울 유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모든 20대가 겪게 되는 삶에 대한 질문과 해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저도 나름 겪었습니다. 공부, 연애, 운동, 성당활동 등 답을 찾고자 부단히도 노력을 했습니다. 그렇게 20대 초반을 보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아 이리 저리 부딪히고 상처가 난 저에게 하느님께서 오셨습니다. 눈 똑바로 뜨고 바른 길 갈 수 있게 제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20대 중반에 저는 ‘사제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예수회 성소자가 되었습니다. 군대를 갔다 오고,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2년여 한 뒤에 저는 입회를 했습니다. 20대 중반 어느 날 제게 오셨던 예수님을 잊지 않고 줄곧 수도 사제의 성소를 생각했습니다. 눈이 멀어 이리저리 헤매던 제게 빛을 비춰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서른에 예수회라는 수도회에 입회를 했습니다. 수도생활을 통해 더 눈이 맑아지고, 멀리, 깊게 보며 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제 눈은 시력을 잃어갔습니다. 신학 공부를 외국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가기 전에 외국어 학원을 다녔습니다. 그곳 학생들은 제가 가톨릭 수사인지 몰랐습니다. 말을 해도 뭔지 몰랐습니다. 언제 결혼하냐고 묻곤 했습니다.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가 되지 않아 몸과 마음이 처지는 것입니다. 외국어 공부가 힘들어서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성찰을 해보니 6년 동안 교회 울타리 안에서 ‘수사님’이란 말과 수녀님과 신자 분들의 환대에 빠져 제 본분을 망각했습니다. 제가 잘나서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에 깁스를 엄청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학원에서는 아무도 제게 ‘수사님’이라고 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머리로는 겸손하고 가난한 수도자로 살아야지 했지만, 몸과 마음은 6년 동안 부유함에 젖어 있었습니다.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어디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던 것입니다. 외국 유학을 준비하며 하느님께서는 다시 제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제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다시 알아듣고, 주님을 믿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마흔에 사제가 되었습니다.
부제품을 앞두고 한 달 동안 예수회 사제직에 대한 워크숍을 했습니다. 전반부에는 예수회원과 함께 일하는 수녀님, 신자 분들께서 오셔서 당신들의 체험을 나눠주셨습니다. 당신들이 바라는 예수회 사제에 대해서 진심을 담아 말씀해 주셨습니다. 열여섯 나라에서 온 우리 수사들은 말씀을 듣고 각자 나라의 상황에 비추어 어려움들, 희망들을 또 나눴습니다.

그렇게 2주가 끝났을 때, 저는 무척 무서웠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어 제대에, 강론대에 선다는 것이 너무너무 바라던 일이었는데, 그때는 너무 두렵게 다가왔습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내가 사제가 되어 신자들 앞에 서는구나, 내가 그만큼 역량이 되나? 준비가 되었나? 이렇게 두려움에 떠는 저를 하느님께서는 꼭 끌어안아 주셨습니다.

후반부에는 피정을 했는데, 피정 동안 불안하고 두려웠던 제 마음을 주님께서는 완전히 녹여주셨습니다. 제 과거의 순간 순간을 보여주시며 저를 얼마나 아끼셨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저는 두려움에 싸여 눈이 멀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빛을 보여주셨고, 저는 제 삶 구석구석을 보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제 삶의 모든 지점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다고 믿습니다. 그 모든 시간에 당신께서는 제 눈을 열어 당신을 보도록 빛과 사랑을 넘치도록 주셨습니다.

예수님, 당신께서는 눈먼 저를 몇 번이고 뜨게 해주셨습니다. 앞으로도 저의 어리석음, 게으름, 죄 때문에 눈이 멀 때마다 계속 눈뜰 수 있게 은총 허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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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김동일 신부
  |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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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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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이 멀어버린 우리 가운데서 사람의 아들은 당신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닫힌 마음을 여는 당신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우리의 닫힌 마음은 언제나 서로를 믿음으로부터 격리시켜 나아갑니다.

죽이는 삶에 너무나 익숙해져갑니다. 잔인한 마음은 이웃이야기를 도대체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보려는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 마음의 병을 손수 치유해주십니다.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 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눈을 씻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을 씻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을 일깨워주듯 실로암이 있습니다. 실로암은 치유가필요한 우리들의 마지막 희망지입니다. 희망은 절박함에 눈 뜨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가득 찬 욕망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감히 주님께'우리는 잘 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이웃들 안에 계시는 사람의 아들을 바라보는 마음의 사순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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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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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여정

-깨어남, 일어남, 비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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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4주일은 일명 장미주일로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누리는 날입니다. 이미 만개(滿開)한 개나리, 진달래, 목련 꽃들이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순시기는 우울하고 어둡게 지내는 고행의 시기가 아니라 성령의 기쁨, 갈망의 기쁨으로 주님 부활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이미 저는 오늘 강론을 3주전 서울주보에 기고하여 '생명의 말씀'란에 '개안의 여정'이란 주제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오늘 저는 '믿음의 여정'이란 주제로 묵상을 나눕니다. 오늘 묵상은 2독서 말미의 다음 말씀에서 착안했습니다. 사순 제4주일을 맞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

첫째, "깨어나라"입니다.

믿음의 여정, 첫 단계는 잠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향해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말씀하십니다. 잠에서 깨어남 역시 은총이자 수행의 노력입니다. 사실 깨어있지 않고 잠들어 있는 영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살아있다 하여 다 살아있는게 아니라 영적 잠에서 깨어날 때 비로소 살아있는 것입니다.

깨어있음의 빛이요,
깨어있음의 기쁨이요,
깨어있음의 생명입니다.

잠에서 깨어나 불러주신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오늘 1독서의 엘리압이 아닌 다윗의 선택과정이 흡사 잠에서 깨어남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영혼이 잠에서 깨어날 때, 은총으로 깨어있을 때 선입견, 편견에서 벗어난 주님의 뜻에 따른 올바른 분별입니다. 주님은 사무엘을 통해 당신 마음에 드는 다윗을 선택하십니다.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의 은총으로 완전히 영적 잠에서 깨어나 성령 안에서 새 사명을 부여 받아 새 인생을 살게 된 다윗입니다. 다윗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세례성사를 통한 부르심에 의해 잠에서 깨어나 성령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어제 읽은 다산 정약용의 유배일기 중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나는 지금 구덩이에 빠졌다. 하지만 평지려니 하고 지낸다. 이런 평상심이 가능한 것은 오로지 독서(읽기)의 힘이다. 책을 읽으며 허물어지는 마음을 하루하루 다잡는다.“

평상심(平常心)이 도(道)입니다. 우리로 하면 성독(lectio divina)과 더불어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바치는 미사와 성무일도가 허물어지는 마음을 하루하루 다잡게 하며 깨어있는 삶을 살게 합니다. 이런 규칙적이고 항구적인 영적수행이 없으면 영혼은 무너져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되니 이보다 큰 재앙은 없습니다. 저희 수도자들에겐 이미 영혼의 밥이 되어 버린 미사와 성무일도입니다.

둘째, "일어나라'입니다.

믿음의 여정 둘째 단계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태생 소경은 주님을 만남으로 눈을 뜨니 흡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남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새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남도 은총이자 노력임을 깨닫습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주님의 말씀이 은혜롭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만날 때 태생 소경처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파견된 이'를 뜻하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실로암 샘물에 씻고 앞을 보게 된 태생 소경은 그대로 부활체험을 한 것입니다. 전 주일 복음의 '야곱의 우물'가에서 주님을 만나 구원 받은 사마리아 여인과 흡사합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야곱의 우물', '실로암 샘'같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 부활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게 죄요,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게 죄입니다. 잠에서 깨어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 늘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우리 믿음의 여정입니다. 어제 '걷기 예찬'이란 글 중 한 대목입니다.

"다비드 르 브로틍은 홀로 걷는 고독을 가장 즐긴다. '고독만큼 함께하기 좋은 동반자는 없다.'는 소로의 말처럼 고독하면서도 가득한 느낌이 드는 걷기이기 때문이다.“

잠에서 깨어나 '읽기'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 '걷기'가 좋은 짝을 이룹니다. 생각과 영혼을 빼앗기기 쉬운 디지털 시대에, 이처럼 '읽기'와 '걷기'의 수행에 항구함은 우리 믿음의 여정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셋째, "비추어라'입니다.

믿음의 셋째 여정은 주변을 밝히는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비추시기에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빛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습니다. 오늘 태생 소경은 주님을 만남으로 영안이 활짝 열려 고백합니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주님을 발견하고 주님께 믿음을 고백함으로 완전히 주님의 빛이 되어 살게 된 태생 소경이요,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바오로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이지 가려내십시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일에 가담하지 말고 오히려 밖으로 들어내십시오.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 빛으로 밝혀집니다. 밝혀진 것은 모두 빛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비추십니다. 그러니 주변을 비추면서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사순 제4주일, 믿음의 여정 중에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1.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2.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비추시니, 비추어라.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깨어 일어나 세상을 비추는 빛의 자녀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 은총의 빛으로 저희 마음을 밝혀 주시어,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뜻에 맞는 것을 생각하며,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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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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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순 4 주일이며, 기쁨주일 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참된 기쁨이 어디로부터 오는 지를 밝혀줍니다. 곧 참된 기쁨은 ‘빛을 보는 데서 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을 말해주기에, 기쁨은 ‘빛이신 주님을 아는 데서 온다.’는 것을 밝혀줍니다. 우리는 모두 눈을 지니고 있고, 눈으로 타인과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바라본다고 해서 모두 제대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당달봉사가 있는가 하면, 눈을 감고도 볼 수 있는 심미안이 있고, 보아도 보여 지는 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이 보는 대로만 고집하는 편견이 있습니다.

<제1독서>는 눈이 빛나는 다윗이 선별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은 말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제2독서>는 빛의 자녀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이야기입니다.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에게 말합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리라.”(에페 5,8-14)

그리고 <복음>은 태생소경이 눈을 뜨고 빛을 보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태생소경이 보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죄든, 부모의 죄든, 죄 탓인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이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이다.”(요한 9,3)

그렇습니다. 그에게서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소경인 그는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인류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곧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대변해 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가 눈을 뜨게 되는가?
그에게 빛이 생기게 되는가?

그는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묻혀 진흙에 개어서 자신의 눈에 바르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요한 9,7)하신 말씀대로 했습니다. 그는 앞을 보지도 못했지만, 말씀에 순명하여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보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침을 묻힌 진흙을 눈에 발라 주었습니다. 진흙으로 빚어진 그의 살이 예수님의 신성과 결합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도유된 것입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친히 소경의 눈을 만지시고, 그의 가슴 속에 당신의 빛을 부어주시어 그가 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는 남들처럼 볼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도 보게 되었습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혹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도 아직 눈 먼 존재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본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를 주님을 계시하는 장소로 알아 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실을 떠난 저 높은 곳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의 신학자라 불리는 <보나벤뚜라>는
인간에게는 ‘3중의 눈’이 있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육신의 눈과 지성의 눈과 관조의 눈이 그것이다.

인간은 육신의 눈으로써 세계와 그 안에 있는 것을 보고,
정신의 눈으로써 영혼과 그 안에 있는 것을 보며,
관조의 눈으로써 하느님과 하느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본다.
그리하여 인간은 육신의 눈으로써
인간 밖에 있는 것을 인식해야 하고,
지성의 눈으로써 인간 안에 있는 것을 인식해야 하며,
관조의 눈으로써 인간 위의 것을 인식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이’에게 말합니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요한 9,37)

분명, 우리는 이미 그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면, 곧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면, 완고하여 보고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분명, 여전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혹 나는 지금 빛이 아니라 어둠을 보고 있지는 않는지요?

혹 자신에게서나 타인에게서 어둠이 보인다면, 얼른 그 어둠을 비추고 있는 빛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빛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빛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세상과 모든 이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일, 바로 이것이 “기쁨주일”인 오늘 우리가 누리는 참된 기쁨일 것입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장면에서, 바리사이들이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요한 9,37)

주님!
분명, 이미 당신을 보았습니다.
보고도 아직 보지 못함은 완고하여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여전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항상 저를 향하여 계신 사랑입니다.
하오니, 빛을 보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당신을 보게 하소서.
나의 주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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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2020년 3월 22일
  |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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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9,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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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이름을 이 순간 다시 묻습니다. 치유의 이름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시작되는 믿음의 시간입니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게 하는 참된 믿음입니다. 믿음이 피어나고 믿음으로 피워내는 치유의 꽃입니다. 치유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으로 드러납니다. 믿음은 어둠의 시간과 고통의 시간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보게하고 서로를 치유하는 유일한 희망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기에 치유하시는 주님을 앞에 두고도 주님을 모른 채 살아갑니다.

주님과 우리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믿음을 보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삶을 밝히는 믿음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보게하시는 믿음을 믿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을 다르게 보는 믿음이 있습니다.

부활을 준비하는 이 사순 시기가 믿음의 길을 따라가는 새로운 시작이길 기도드립니다. 우리 영혼이 잃어버린 것이 바로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반성하는 시간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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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20년 3월 22일
  |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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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재난과 시련의 시기는
성찰과 성숙의 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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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물론 인류 공동체 전체를 위협하는 대재난 앞에서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과연 무엇인가? 하느님께서는 이 대재앙을 통해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가? 전지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류 전체가 겪는 이 극심한 고통 앞에 왜 신속하게 개입하지 않으시는가?

아무리 곱씹고 또 곱씹어도, 아무리 묵상하고 또 묵상해도, 납득할만한 명쾌한 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종교 지도자는 하느님께서 진노하신 결과라고, 그에 따른 징벌을 내리셨다고 외치는데,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발상입니다. 괜히 별 생각없이 엉뚱한 말했다가 비난의 대상, 공공의 적이 되기 십상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나의 강력한 메시지라는 것을 느낍니다. 인간 본연의 나약함과 한계를 자각하고 더 겸손해지라는 메시지. 지구촌 전체를 위협하는 다양한 형태의 거대악과 재난, 질병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해 서로가 더 연대하고 협력하라는 메시지. 평소 잊고 살았던 가장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깨달으라는 메시지 말입니다.

지난 성 요셉 대축일에 배포된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이러한 재난과 시련의 시기는 성찰과 성숙의 때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시련을 허락하시지만 동시에 시련을 이겨 낼 힘을 주십니다.”

“여러분에게 닥친 시련은 인간으로서 이겨 내지 못할 시련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십니다”(1코린 10,13).

오늘 예수님께서는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실로암 연못으로 보내시어 앞을 보게 하시는 치유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오늘 이 시대 역시 저 자신을 포함해서 만사 제쳐두고 실로암 연못으로 달려가야 할 사람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보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 죽었다 깨어나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평소 같으면 수많은 교우들로 붐빌 텅빈 성전, 평소 같으면 수많은 아이들로 요란스러웠을 텅빈 교정, 텅빈 수련원 경당에 앉아, 늦었지만 절실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습니다.

평소 별 생각 없이 대하던 교우 한분 한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송이 꽃이었다는 것을. 아이들 한명 한명이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값진 보물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눈만 뜨면, 만날 때 마다, 백번이고 천번이고 존재 자체로 선물이요 축복인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교회의 가장 기본 세포요 조직인 교우들이 사라진 본당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이 사라진 교실은 그저 황량한 건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태가 진정되고 정상화되는 어느 날, 한분 한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답답하고 제한적인 삶을 시작한지 꽤 많은 날들이 지났습니다. 짧다고 하면 짧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날들, 우리는 그간 단 한번도 체험해보지 못한 초유의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흘러넘치도록 풍성했던 날들, 하고 싶은 것은 뭐든 다 할 수 있었던 날들을 돌아봅니다. 자신도 모르게 극단적 물질만능주의에 깊이 함몰되어 살았음을 반성합니다. 내 삶 안에 하느님의 영역, 신앙의 영역, 영적인 영역은 한없이 초라하게 위축되고, 인간의 영역, 세상의 영역은 괴물처럼 확장되었음을 성찰합니다.

고통과 시련의 시기, 볼 줄 아는 눈이 없어 그간 놓치며 살아왔던 일상의 지극히 작은 것들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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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2020년 3월 22일
  |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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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안開眼의 여정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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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로 인해 전세계가 전시 상황입니다. 그래도 세월은 흘러 봄철이 되자 곳곳에 피어나는 청초한 꽃들이 우리 마음을 환히 밝힙니다. 마침 오늘은 부활의 기쁨을 미리 맛보는 사순 제4주일, 일명 ‘기뻐하라, 래타레 주일’, ‘장미주일’이라 제의 색깔도 기쁨을 상징하는 연분홍의 장미꽃 색깔입니다.

입당송 이사야서 말씀도 이런 기쁨을 한껏 드러냅니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 오너라.
슬퍼하는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뛰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기일전, 기쁘고 즐겁게 살라고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주님이십니다. 방금 부른 화답송 가사와 곡은 늘 들어도 새롭고 위로와 힘을 줍니다.

아주 예전 어느 분의 묘비명 부탁에 지체없이 추천한 시편 구절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좋은 글은 늘 읽어도 새롭고, 좋은 분은 늘 봐도 새롭습니다. 바로 주님 말씀이 그렇고 주님이 그러합니다. 위 시편은 후반부 가사를 다음처럼 바꿔 불러 불러도 그대로 통하며 은혜롭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노라.”
“주님은 나의 목자 불안할 것 없노라.”
“주님은 나의 목자 걱정할 것 없노라.”

끊임없이 되뇌이며 기도로 바쳐도 참 좋은 기도입니다. 이런 주님을 만날 때 기쁨과 평화, 위로와 치유, 정화와 성화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주님을 만나 배워가면서 눈이 열려 주님을 알고 참 나를 알아갈 때, 무지로 부터의 해방이요 참으로 자유로운 삶이요 빛의 자녀다운 삶입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은 무지의 눈멈에서 눈이 열려가는 개안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여 오늘 강론 주제도 ‘개안의 여정-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로 정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무지의 어둠’에서 ‘개안의 빛’으로의 전환임을 깨닫습니다. 개안의 여정은 그대로 개안의 기쁨입니다. 제 자작 기도시, 행복기도는 그대로 이런 개안의 기쁨을, 감격을 노래한 것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눈 만 열리면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들이요 기적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은 태생 소경을 치유하신 예수님의 기적에 관한 일화입니다. 태생 소경이 상징하는 바, 바로 무지에 눈 먼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함께 하시어 우리 눈을 열어 주실 때 올바른 분별임을 오늘 제1독서에서 사무엘이 다윗을 선택하는 과정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사무엘이 외관에 눈이 멀어 외모가 출중한 엘리압을 선택하려는 순간 주님은 즉시 사무엘의 눈을 열어 주시며 제지하십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사무엘에게는 충격적 깨우침이었을 것이며 새로운 영적 시야를 획득했을 것이며 보는 눈도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마침내 다윗 앞에 섰을 때 주님은 사무엘의 눈을 활짝 열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이래서 중대한 일을 앞뒀을 때 공동체는 활짝 열린 눈으로 올바른 식별을 위해 성령 청원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눈먼 사람을 소재로 한 제자들과 주님의 대화중 제자들의 무지에 눈먼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누구의 죄로 인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느냐는 무지한 제자들의 물음에 주님은 이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십니다. 새삼 우리의 고정관념이나 편견, 선입견 역시 무지에 눈먼 모습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무지의 치유’는 평생 과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우리의 까닭 모를 병고나 어려움에 대한 답도 되는, 역시 우리의 무지를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이어 무지로부터 벗어나 지혜롭게 아주 현실적이 될 것을 촉구하며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그대로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죽음의 날이 닥치기 전 살아있는 동안,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세상의 빛이신 주님과 함께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충실히, 성실히 수행하라는 바로 오늘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살아있을 때 찬미와 감사와 일과 사랑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주님을 만났을 때 비로소 눈 뜬 삶이요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 예외없이 눈 뜬 소경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을 만나 실로암 우물터에서 눈이 열린 이는 태생 소경입니다. ‘

파견된 이'란 뜻인 실로암이 상징하는 바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눈뜬 태생 소경은 바리사이들과의 계속된 논쟁적 대화를 통해 영적 시야도 깊어짐을 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보는 안목의 변화입니다.

예수라는 그 사람에서, 예언자로, 마침내 하느님에게서 온 분임을 고백합니다. 정말 무지에 눈 먼, 눈 뜬 소경들인 완고한 바리사이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마침내 주님을 고백함으로 믿음의 눈이, 영의 눈이 활짝 열린 오늘 복음의 태생 소경입니다.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대답한 후 예수님께 경배하니 이제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완전히 주님의 빛 속에 살게 된 복음의 태생 소경입니다. 어제 저녁 성무일도중 마리아의 노래 후렴과 오늘 아침 성무일도중 즈카르야 후렴이 일치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못보는 사람을 보게 하려는 것이다.”

참으로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만날 때 개안의 기쁨을 누리는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났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큰 은총의 선물인지요. 한 번뿐이 없는 삶인데, 평생을 살아도 주님을 만나지 못해 눈먼 무지의 삶을 살다가 세상을 마친다면 얼마나 허망하고 억울하겠는지요.

아무리 육안의 시력은 좋아도 영안의 시력은 형편없이 안 좋을 수 있습니다. 아주 예전 개나리꽃 만발했던 봄철에 써놓은 시가 생각납니다.

-“겨울 지낸 개나리
햇빛 환한 봄날도 너무 어두워
샛노란 꽃 초롱들 가득 켜들고
대낮의 어둠 환히 밝히고 있다”-

대낮의 어둠을 환히 밝히고자 곳곳에 피어나기 시작한 청초한 파스카의 봄꽃들입니다. 대낮같이 환한 세상도 무지에 눈 멀면 내면은 깜깜한 어둠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영안이 활짝 열린 빛의 자녀들은 존재 자체로 주위를 환히 밝힙니다. 바로 우리 믿는 우리들의 궁극의 소망이자 목표입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한껏 고무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밖으로 드러내십시오,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 빛으로 밝혀집니다. 밝혀진 것은 모두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사순 제4주일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주님의 간곡한 당부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참으로 심오합니다. ‘개안開眼의 여정’에, 마음을 여는 ‘개심開心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은총의 빛이 마음의 어둠을 환히 비추어, 우리의 존재 자체는 그대로 무지의 어둠을, 주변의 어둠을 환히 밝히는 빛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인들의 주변이 환한 것은 바로 이런 까닭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시어 빛의 자녀답게 살게 하시고 개안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향해, 참으로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할 말씀을 주십니다.

“잠자는 사람들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에페5,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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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020년 3월 22일
  |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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