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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눈 뜬 것도 죄가 되는가?
조회수 | 2,807
작성일 | 05.03.05
오늘 복음도 참 깁니다.

복음의 내용은 안식일에 소경을 눈 뜨게 해주신 기적 때문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을 두고 너무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견해가 엇갈려 우리 머리 속을 한바탕 어지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차분히 살펴보면 이 혼란한 이야기 속에서 하느님 눈 밖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기적이 일어난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길에서 소경을 만나시는데 이 소경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보던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이 소경은 무슨 죄로 이렇게 되는가를 묻지만 예수님은 그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땅에 침을 뱉어 흙을 개시고는 그 진흙을 눈에 발라주시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라지십니다.

그가 씻고 나자 그의 눈이 밝아져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사건이 복잡해지는 것은 다음 일입니다. 예수님은 안계시고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 기적은 다른 기적과는 다르게 예수님이 안 계신 상태에서 벌어지고 주변 사람들은 이 사건의 진상을 들어 짐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눈 뜬 소경에게 어떻게 눈을 뜰 수 있었느냐고 물어 대답을 듣는 것이 주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소경조차 예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시키는 대로 했고, 그렇게 그는 눈을 떴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눈을 뜨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자기들이 알던 소경이었는지 궁금해합니다. 소경이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라고 증언하자 사람들은 놀라며 소경에게 어떻게 눈을 떴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소경은 예수님이라는 분이 이렇게 저렇게 하여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이 일이 일어난 시작이 예수님이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관심사가 됩니다. 그리고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이 죄인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이 붙습니다. 예수님의 사건을 직접 보지 못했으면서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예수님이 도마 위에 오르고 이 일로 해서 이야기는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신 예수님을 죄인으로 내 몰기 위한 시도들이 이해되지 않을 만큼 거세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증언을 한 소경을 회당에서 쫓아내는 행동도 서슴지 않게 됩니다.

이 일의 마무리는 예수님께서 다시 소경을 만나 하시지만 그 전에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사실 이 기적은 예수님의 시작과 그분의 말씀을 들은 소경의 행동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정작 기적이 일어난 순간에는 주님이 소경 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치자면 예수님이 진흙을 발라주신 것보다 실로암에서 씻은 소경의 행동이 기적을 이룬 직접적인 행위입니다. 그래서 이 일이 예수님에게서 시작되었음을 소재로 그분을 논쟁거리로 만드는 것은 그 출발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을 문제 삼으려 했다면 사실은 예수님이 아니라 소경이 죄를 지었다고 그들이 지적하는 것이 옳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일에 예수님께서 개입되셨다는 사실 자체에 열광합니다. 그것도 나쁘게 말입니다. 게다가 안식일이었으니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기에 이 이상 좋은 시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자신의 행동으로 실로암 연못에 들어갔다 나온 눈 뜬 소경은 관심 밖이고 오직 이 일을 주동한 예수님만이 그들의 표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혼란스럽게 만든 예수님을 죄인으로 내 모는 사람들의 관심사는 처음부터 예수님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한 사람을 죄인으로 내 몰기 위해서 그가 한 모든 것이 아무리 좋은 의도를 지녔다 하더라도 이처럼 죄로 왜곡되는 사람의 잔인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눈 먼 소경을 눈 뜨게 하신 하느님의 사랑도, 실로암에서 눈을 뜨게 된 소경의 기쁨도 주제가 될 수 없고, 주님을 죄인으로 내 몰기 위한 멀쩡한 사람들의 이기심과 시기심이 주제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미 죄인인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셔도 죄인이실 수밖에 없었고 그분을 증언하는 모든 이들도 같은 이유로 하느님 앞에서 쫓겨나야 할 죄인으로 낙인 찍혀 버립니다.

눈 먼 이유로 죄인으로 불리던 소경이 눈을 떴지만 그 이유가 예수님이었다는 이유로 죄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하느님 앞에서 쫓겨나야 했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미워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복음의 마지막에 예수님은 소경에게 찾아오시어 당신이 예수님이심을 알려주시고 이 복음의 주제를 당신을 죄인으로 내 몰던 사람들에게 알려주십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고는, 이 말씀을 듣고 “그러면 우리들도 눈이 멀었단 말이오?” 하고 대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하고 말씀하십니다.

눈을 뜨고 세상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그래서 나는 성하며 나는 정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들은 분명 눈을 뜨고 있지만 예수님께 눈멀었다고 선언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랑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오히려 주님을 조롱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성한 만큼 사랑하지 않은 죄를 벗어버리지 못할 것이라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평생을 앞을 못 보고 살 것 같던 소경이
눈 뜬 사건은 참으로 기쁜 사건이지만,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잘난 사람들 덕에
이 이야기는 기쁨의 기적이 아닌
슬픈 사건이 되어 버립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볼 수 있는 눈을 뜹시다.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 오히려 덜 부끄러울 것입니다.

안식일.
그들의 이런 독한 마음을 드러나게 하시려고
주님은
그 자리에서 소경을 낳게 하시지 않으셨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주님의 지혜는
세상에서 잘난 우리의 이기심을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주님 눈 밖에서
우리는 이렇게 있는 그대로의
욕심을 모두 드러냅니다.
그 모습이 추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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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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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태생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긴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았고, 예수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예수와 함께 있던 바리사이파 사람 몇이 이 말씀을 듣고 『그러면 우리들도 눈이 멀었단 말이오?』하고 대들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하고 대답하셨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밤에 한창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 갑자기 정전이 되고 초나 등 마저 없을 경우를 당한 경우를 회상해 보자. 얼마나 답답하고 난감하겠는가? 잠시 동안 어두움도 이렇게 견디기 힘든데 태생소경은 부모님의 모습 한번 보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서 일생을 살아야만 하니 얼마나 안타깝고 애처로운 일이겠는가? 만일 그에게 전 재산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단 하루만 눈을 뜰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마 가족들과 빛과 색채와 만물을 보고 싶어 전 재산을 포기할 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육안 외에도 심안과 영안이 있다. 육안은 가장 차원이 낮은 눈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흔히 심안과 영안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조차 갖지 않고 육안에만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육안이 필요하고 소중한 것은 사실이지만 때로는 심안과 영안의 장애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스님들은 득도하기 위하여 벽을 향하여 가부좌하고 참선을 하는 것이고 우리는 묵상을 하거나 깊은 사색을 할 때에 육안을 지긋이 감는다.

일찍 엄마를 여의고 설악산 오세암에서 몸 붙여 살던 어린 남매의 대화중에 『누나! 난 엄마가 보고 싶어』하는 동생에게 『그러면 눈을 감어. 그러면 엄마가 보여』라고 대답하자, 동생은 눈을 감고 잠시 있더니 『누나, 정말 엄마가 가물가물 보여』라는 대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몇 년 전에 어떤 여대생이 나를 찾아 와서는 울면서 하소연을 하였다. 자기는 음악을 전공하고 있는데 당뇨가 온 후로 자꾸만 실명되어 가니 어찌 했으면 좋겠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에게 계속 치료를 받으면서 기도회에 열심히 나오라고 말해주었고 그는 내 말대로 치료받으면서 기도회에 열심히 다녔건만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 완전실명되고 말았다.

그는 다시 나를 찾아와서 『신부님 말씀대로 따랐는데도 왜 하느님께서 안 들어주셨습니까?』하고 항의하였다.

나는 그에게 심안과 영안을 더 밝게 해 주시느라고 육안이 어두워지는 것을 용인하셨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당신의 육안은 우리의 육안보다 어둡지만 당신의 심안과 영안은 분명히 우리의 것보다 더 밝을 거라고 달래서 보냈다.

그 후로 그는 어려움 속에서도 공부를 계속했고 많은 작사 작곡을 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그의 작사 작곡 중에서도 「빛이 없어도」라는 CD와 「아름다운 미사곡」은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태생소경은 예수님께로부터 육안만 치유받은 것이 아니라 영안까지 치유받은 것이다. 그렇기에 네 눈을 뜨게한 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유다인들에게 『분명히 내 눈을 뜨게 하여 주셨는데 그 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도 모른다니 이상한 일입니다. … 그 분이 만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도저히 하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당당히 확신에 찬 증언을 하게 되었고 예수께서 그 후에 그를 만났을 때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하고 물으시자 『주님, 믿습니다』하며 그는 예수 앞에 꿇어 엎드렸던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교만이 가득 차 있고 우리의 관심과 욕심이 엉뚱한 것들에게 쏠려 있을 때에는 심안과 영안은 어두워져서, 태생소경의 눈을 뜨게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면서도 그 분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 뜬 소경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눈들은 밝은가를 한번 검안해 보자.

허성 신부
  |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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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은 우리 모두가 변화되는, 변화되어야 하는 시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태생 소경의 시력을 되찾도록 해준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력을 되찾아 주신 것은 소경으로 하여금 점차 그분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마침내는 주님으로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해준 또 다른 눈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들이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적은 어떤 사람의 품행이나 용모, 능력에 의하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께서 자의로 택하신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치유된 소경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고쳐 준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인정함으로써 회당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다시 만나 그분이 메시아임을 알고 “믿습니다.”라는 신앙 고백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는 영적으로도 온전히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소경을 치유해 주었고 신원이 불분명하다고 해서 예수님과 눈을 뜨게 된 사람을 거부하여 스스로 눈뜬 장님이 되었습니다. 율법주의에 사로잡혀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모르고 옹골찬 고집으로 일관하며, 자신의 눈멂을 인정하지 않은 어리석은 자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에도 이런 눈뜬 장님이 많습니다. 성당에서는 열심히 기도하면서 집에 돌아가서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 주교님이나 높은 사람이 오면 열심한 신자인 체하면서 사순절을 맞아 ‘십자가의 길’기도나 선행 한번 하지 않고 지내는 사람, 세속적인 일이나 자기 신원에 관계되는 일에는 모든 정성을 기울이면서 성서 한번 읽지 않는 사람, 성체 조배나 피정에는 요리조리 빠지면서 친목 모임이나 노는 일에는 기를 쓰고 찾아다니는 사람, 신앙 생활을 취미 생활이나 친목 단체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 우리가 눈뜬 장님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교회라는 제도의 벽을 넘어서서 기꺼이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고백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어둠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더럽고 치사한 것들을 드러내 선과 정의와 진실을 열매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이 이새의 다른 일곱 아들을 물리치고 여덟째였던 다윗을 선택하였던 것에서 나타난 것처럼 “하느님은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고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십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도록 빈껍데기의 신앙, 눈뜬 장님의 신앙이 아니라 제대로 볼 수 있는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영적으로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되어 빛이신 그분 안에서 영원한 삶의 기쁨을 누리도록 합시다. 사순절은 우리 모두가 변화되는, 변화되어야 하는 시기입니다. 제대로 보고, 본 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신앙인으로 거듭 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수락 요한보스코 신부
  |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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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이야기의 주인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누가 죄를 지어서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혹은 저 사람의 부모입니까?” 유대인들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본인이나 부모의 죄 때문에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답하십니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탓으로 그런 불행이 주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이 기회에 하느님의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를 고치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주어진 불행의 탓을 생각하지 않고, 그 불행을 퇴치하는 인간의 노력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시각 장애인을 고치시는 과정을 소상하게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개어서 그것을 그의 눈에 바릅니다. 침은 그 시대 사람들이 잘 사용하는 치유의 수단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이 예수님이 침을 사용하셨다는 것은 치유하신다는 뜻입니다. 진흙이라는 단어가 이 이야기 안에 다섯 번이나 반복 사용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만지지 말아야 하는 것 중 하나가 진흙입니다. 집 짓는 노동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진흙이라는 단어를 반복 사용하여 예수님이 안식일 계명을 범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부각시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사람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판단입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날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느님과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하느님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고 그것을 정확하게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고치고 살리는 분이라고 믿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곧 하느님의 날에 하느님의 일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장애인을 실로암 못으로 보내어 씻게 하십니다. 요한복음서는 실로암이라는 단어를 “파견된 자”라는 뜻이라고 무리한 해석까지 하면서, 그것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이름이라고 말합니다.

이 장애인이 치유된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은 매우 요란합니다. 유대인들은 그의 부모들까지 불러서 심문합니다. 부모는 겁에 질려서 제대로 말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만 하면 회당에서 추방하기로 이미 합의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은 초기교회 신앙인들이 유대인 회당에서 쫓겨난 사실을 반영합니다. 유대인이었던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유대인 회당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주장했다가 추방당하였습니다. 시각 장애인이었던 사람에게 유대인들이 거는 시비와 억지, 불려온 그의 부모가 심문당하면서 보이는 두려움, 그리고 치유된 사람이 예수를 예언자라고 말했다가 추방당하는 것 등은 초기교회가 유대교에서 분리되어 새 출발하는 과정에 발생한 실제 역사적 현상들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부언합니다. 좋은 일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예수를 죄인이라고 단정합니다. 시각 장애에서 치유된 오늘의 주인공은 항의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모세의 제자”라고 주장합니다. 유대교의 기득권자들은 모세의 이름으로 자기들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강요하였습니다. 인간은 권력이 주어지면 자기 생각을 남에게 강요합니다. 그리고 그 강요를 정당화하기 위해 예수님 혹은 하느님을 말합니다. 자기의 생각을 하느님의 것이라고 믿고 강요하는 것은 과대망상 환자들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 공동체에 대해 어떤 책임을 가졌다는 사람들이 쉽게 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기회만 있으면 속이고 횡포하면서 허세를 부립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장애인이었던 사람에게 말합니다. “너는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난 주제에 우리를 훈계하려 드느냐?”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앞에 인간의 우열은 신분이 가려 주지 않습니다. 복음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고”(마태 7,21),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7,24)이라고 말합니다. 신분이나 지위가 아니라 신앙을 동기로 한 실천이 신앙인의 우열을 가리는 기준이라는 말입니다. ‘선한 일’ 곧 ‘사람을 살리는 일’(마르 3,4)을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단죄하고, 실망시키고, 고통과 슬픔을 주는 일은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 안에 자리 잡은 죄가 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장애인은 예수님이 자기의 시력을 회복해 주자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시각 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에 항의합니다. “그 분은 제 눈을 뜨게 해 주셨기에...하느님으로부터 온 분입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회당에서 쫓겨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다시 만납니다. 그리고 “주님, 믿습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하면서 “예수님 앞에 꿇어 절합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고, 고백하며 경배하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유대교와 결별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올바로 믿는 이들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본 것”(14,9)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새로운 시력을 얻어서 하느님을 본다는 말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을 단죄하고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새로운 시력을 얻은 사람은 자기 주변의 불행이 감소하고 삶의 질이 높아지도록 노력합니다. 유대교 기득권자들과 같이 권위로써 자기 자신을 무장하여 자기 한 사람 잘 되는 길을 찾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고치고 살리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나섭니다. 우리가 하는 일도 사람을 불행에서 구하고 살리는 일이라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실천이 그런 것이라면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서공석 신부
  |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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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의 복음 구절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다”(요한 8, 12)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를 태생 소경의 치유를 통해 우리에게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태생 소경은 길을 가시는 예수님께 어떤 요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외침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태생 소경을 ‘보셨습니다’. 이 보심은 단순한 바라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 - 태생 소경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 - 이 그 소경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경에게 ‘다가가십니다’. 다가가시기 전에 제자들의 질문을 받습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 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모든 병자를 죄인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경은 날 때부터 죄인이었으니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태어날 때 소경으로 났으니 뱃속에서 죄를 지었을 리는 만무하고 소경이 된 이유가 ‘자신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인지?’라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마르 2, 1∼12 참조). 말하자면, 소경이 죄인임은 분명하니 그 이유나 자세히 알아보자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의 답변은 아주 명쾌합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 된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는 태생 소경이 겪는 고통의 비유를 통해, 인간 고통이 죄의 결과라는 편협된 시각에서 벗어나 고통 안에 담겨진 하느님의 뜻과 고통 안에 펼쳐질 하느님의 역사하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분명히 하십니다. 또한 이 고통과 아픔을 극복케 해주시고 떨쳐주시는 주님의 모습에 주목해야 함을 보여주십니다.

태생 소경에게 다가가 흙을 개어 태생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가서 씻어라”하고 말씀하신 후 그가 씻자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인간의 고통과 아픔을 떨쳐주시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비춰집니다. 곧 예수님께서 당신을 알지 못했던 태생 소경을 보시고 다가가시어 눈에 흙을 바르시고 말씀해 주심을 통해 태생 소경은 제대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고 그 안에 계신 하느님을 바라봄으로써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게 되는 기쁨과 행복을 누립니다. 이처럼 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 안에서 신앙의 빛을 통해 어둠을 떨쳐버릴 수 있는 치유가 이루어짐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 어둠과 고통과 아픔이 머물 때 언제나 우리를 먼저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시고 다가오셔서 우리를 치유해 주시고, 우리를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기쁨과 행복으로 이끄시는 주님, 주님은 분명히 세상에서 하느님을 뵈옵게 하는 빛이시며 우리의 삶의 목적입니다.

곽용승 신부
  |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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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여기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삶이 얼마나 고단할지는 두 눈이 온전한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가는 양로원에 그런 할머니가 한 분 계십니다. 올 겨울 유난히 눈이 많이 왔던 날이 있었습니다. 부산 인근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찾아가야’ 볼 수 있는 눈이 아침에 일어나니 온통 하얗게 쌓여 있었습니다. 양로원의 원장이 기쁜 나머지 할머니께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윤옥 할머니! 밖에 눈이 ‘하얗게’ 쌓였어요!” 할머니가 “그래, 아이고 좋아라!” 그 후에 어떤 가슴 아픈 일이 생길지도 모른 채 서로 손을 잡고 좋아라 했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할머니가 묻습니다. “원장, 그런데 ‘하얀색’이 어떤 색깔인고?” 그러자 원장이 여러 가지 예를 들어 ‘하얀색’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러다 원장은 울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해도 할머니는 ‘하얀색’이 어떤 색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하얀색’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 가슴이 먹먹해 지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보다도 탁월한 감각의 소유자였던 헬렌 켈러는 어느 날 자신의 친구에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눈멀고 귀먹고 말할 수조차 없는 자신이 느낄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덜 느끼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멀쩡한 눈을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에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건성으로 대하기 쉽습니다. 보고도 보지 못합니다. 아니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헬렌 켈러의 유일한 소원은 ‘죽기 전에 꼭 사흘 동안만 눈을 뜨고 세상을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눈을 뜨는 첫 순간 꼭 찾아가 보고 싶은 사람이 자신의 스승이었던 에미 설리반이라고 말합니다. 그를 통해 비로소 자신이 누구와도 다르지 않은 인격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소경이 눈을 뜹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묻습니다.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그는 자신의 ‘뜬’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서 대답합니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몇몇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되묻습니다.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교형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눈을 뜨셨습니까?

정필종 도미니코 신부
  |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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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태생 소경과 빛

눈으로 사물을 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빛이다. 빛이 없다면, 내가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도 칠흑 같은 어둠에 갇히게 된다. 눈에서 스스로 빛을 발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신원을 밝히고 계신다.“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 5) 예수님 당신 스스로 세상의 눈을 밝히는 빛이라 한다. 오늘 복음 말씀은 이 빛을 받아드리는 태도를 통하여 3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1. 거부하는 사람들 :“유다인들은…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요한 9, 18 참조)
2. 개입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 :“지금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고,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주었는지도 우리는 모릅니다.”(요한 9, 20∼21 참조)
3. 받아들이는 사람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9, 32∼33. 38 참조)

왜 빛을 볼 수 없는가? 자연적 환경에서 아침에 태양이 뜨면, 빛은 그저 찾아오는 것이고, 우리의 눈을 저절로 밝혀준다. 그러나 영혼과 마음의 눈은 빛이 있어도 시신경을 잃어버린 사람들처럼 그렇게 밝혀지지 않는가보다.

1.“신은 자만심에 차 있는 사람과 가장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사람들은 신을 필요로 하지만 자만심에 찬 사람은 신 없이도 자신이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마하라쉬와의 대화)라는 글이 있다. 내 안에 있는 교만과 자만심은 끊임없이 빛을 거부하게 할지 모른다.

2. 태생 소경의 부모는 하느님의 벌을 받은 것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깨뜨리지 못하고, 공동체와 이웃에게 외면당할 두려움에 싸여서, 빛을 찾아 바라보는 것을 피하고 있지는 않을까? 세상의 불의에 대해서, 나만의 이익과 편안함을 위하여, 나는 세상의 정의와 가난한 이의 외침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3. 소화 데레사 성녀에게 인생의 짐이 많은 자매가 찾아와서“수녀님, 저는 제 앞에 있는 이 환난의 벽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이 고통의 벽이 너무나 높습니다.”그러자 수녀님은“자매님, 뛰어넘으려 하지 말고 밑으로 기어들어 가세요. 그게 훨씬 더 쉬울 겁니다.”라고 말했다. 얼마나 통쾌한 대답인가! 믿음을 가진 자에게!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 있는 그대로 바로 보는 것! 빛을 보고, 빛이라고 소리치고, 솔직히 고백할 수 있는 삶의 자세와 겸손한 마음 안에 빛은 온전히 내 안에서 빛나지 않을까!

<부산교구 주영돈 토마스 신부>
  |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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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고정관념과 영적인 눈뜸

어느 교수가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두 마리의 개를 키우고 있다. 그것은 편견(偏見)과 선입견(先入見)이다.”실제로 우리는 모두 자기중심의 고정관념(固定觀念)에서 비롯된 편견과 선입견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고정관념이란 이미 형성된 나의 것(古)이 견고한 어떤 틀 속(口)에 자리 잡은(定) 생각을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팽만한‘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갈등요인이 바로 이런 고정관념에서 비롯된다 하겠습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왜곡된 생각인 고정관념의 지지대는‘영적인 눈멀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여전히 자기중심의 고정관념에 묶여있는 우리를 질책하십니다.“지금 너희가‘우리는 잘 본다.’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 41)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고정관념을 가리키시며 영적으로 눈멀어 있는 현실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육체적인 눈멀음뿐 아니라 영적인 눈멀음까지 치유 받은 태생소경에게 하셨듯이“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요한 9, 7)고 말씀하십니다.

영적인 눈뜸이란 고정관념을 탈피하고 동시에 단순한 객관적 차원을 뛰어넘는 새로운 관점입니다. 이 새로운 관점은 제1독서에서“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 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 7)는 말씀처럼“겉모습으로 보지 않고”(1사무 16, 7) 주님의 눈으로 마음을 보는 것이고 속 알맹이를 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제2독서에서 주님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보기 위해서 자기중심에 갇힌 어둠의 틀을 벗어나 빛이신 주님 안으로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빛이신 주님을 통해서만 세상과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됩니다. 사순 시기의 중요한 일 중 하나는 나의 편견과 선입견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활은 주님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영적인 눈뜸에서 비롯됩니다.

▦ 부산교구 김영규 안셀모 신부 : 2017년 3월 26일
  |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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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세상 일깨우는 그리스도의 빛

이스라엘의 첫 임금이었던 사울은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판단하여 움직이다가 하느님 눈 밖에 납니다.(1사무 13,13 참조) 그래서 오늘 1독서에 나오듯이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기름을 가지고 이사이의 아들들 가운데 당신이 새롭게 뽑으신 사람 하나를 찾아가라고 명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시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뽑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사이의 아들들을 찾아간 사무엘은 엘리압이 하느님께 선택받은 사람이겠거니 생각합니다.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만큼 더 컸던 사울처럼 엘리압도 듬직하게 큰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1사무 11,23; 16,6) 하지만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인물은 이사이의 아들들 가운데 가장 작은 막내아들 다윗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눈은 사람들의 눈과 다르다는 것, 하느님은 겉모습보다 참된 마음을 보는 분이심이 드러납니다.(1사무 16,11)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보기에 위대해 보이는 인물이 아니라, 작지만 당신의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겸손하고 가난한 이들을 통해 당신 일을 하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눈이 사람들의 눈과 다르다는 것은 오늘 복음에서도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고 그가 눈이 먼 이유가 자신의 탓인지, 부모의 탓인지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가 눈이 먼 이유는 하느님의 일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답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것을 안다고 자부하던 바리사이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죄인 취급을 당하던 가련하고 가난한 소경을 통해 당신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다른 하느님만의 독특한 작업 방식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소경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죄를 없애러 오신 메시아이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소경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눈을 뜨고,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게 되어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렇게 해서 소경은 모든 죄를 용서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하지만 스스로 소경보다 낫다고, 소경보다 잘 본다고 여기던 바리사이들은 소경도 이해하게 된 진리를 보고서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도, 그분의 기적을 체험하며 예수님의 제자가 된 소경도 모조리 죄인이라고 비난하며 공격합니다. 이런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39)

오늘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처럼 스스로 무엇인가를 잘 본다고 말하면서도 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이들을 두고 “잠자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눈을 감고 있기에 죽은 이들과 같고, 그래서 자신이 죄인임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이런 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빛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

우리는 종종 예수님 곁에 있던 바리사이들처럼 무언가를 좀 본다고, 무엇을 좀 안다고 자만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보다 부족해 보이는 이들을 하찮게 여기고, 그들보다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말하고 행동하곤 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번 스스로의 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소경임을 인정하고, 주님께 눈을 열어주시라고 청합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를 비추어 모든 것을 하느님의 눈으로 깨닫게 해 주시라고 주님께 간구합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 눈을 열어 주시고 당신 빛으로 우리 앞을 비추어주실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 올바른 눈으로 하느님과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소경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통해서도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7년 3월 26일
  |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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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달리타스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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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2023년 검은 토끼의 해 사순 시기를 하느님의 자녀로 지내는 형제, 자매 여러분 반갑습니다. 우리가 가진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운동 감각 그리고 신앙 감각은 모두 건강하신지요.

이번 복음 말씀은 태어나면서부터 시력을 잃은 사람을 예수님께서 시각을 회복시켜 주면서 일어난 상황을 이야기해 줍니다.

복음 내용의 대상들은 시각을 회복한 사람과 예수님, 시각을 회복한 사람과 바리사이들, 바리사이들과 예수님의 각 시선들의 차이를말합니다.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모습은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마음적으로, 신앙적으로 시선을 어디에 두고 해석하고 판단하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나지요.

복음에서 시각을 회복한 사람은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증언하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심판과 구원, 그리고 죄의 회개에 대해서 말씀하시지요. 바리사이들은 안식일과 죄인이라는 관점에서 전부 믿으려고 하지 않지요. 바리사이들은 나 자신만은 완벽한 것처럼 말들을 하고 행동들을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만은 잘못된 것이 없고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사실과 진실을 외면하면서 왜곡된 시선으로 판단하여 억지를 부리지요.

시각을 회복하는 사람의 기쁨, 예수님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말입니다. 시노달리타스의 시선은 그렇지 않습니다. 평등과 나눔의 예수님 시선으로 보고, 해석하고 판단하여 하느님 나라의 구원사업을 실천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예수님의 길을 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길에서 시노달리타스의 시선을 잃지 않도록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배우는 삶을 걸어가야겠지요.

이 사순 시기는 그 길을 가도록 삶을 회복시켜 줍니다. 그 기쁨을 맛보고 느끼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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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진용 F.하비에르 신부
2023년 3월 19일 주보
  |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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