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가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528 44%
[서울] 세 가지 발견
조회수 | 2,819
작성일 | 05.03.05
우리말에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내가 맘에 들고 고마우면 처갓집의 말뚝조차도 반갑고 소중하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 반면에 마누라가 미우면 어떻게 될까요? 마누라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얄밉고 괘씸해서 보고 싶지 않은 사람마저 있는데, 그런 사람을 보면 그가 하는 일조차 싫을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일은 모두 마음에 안 들고, 좋은 일이라고 그가 주동하거나 그가 끼어 있으면 나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세상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이 하면 욕이요 인격모독이고, 내가 하는 욕은 패러디이고 유머이다.
남이 글 쓰면 별 볼일 없는 낙서고, 내가 쓴 글은 예술이다.
남이 실직한 것은 능력부족이고, 내가 실직한 것은 경제가 안 좋아서다.
남이 파산한 것은 당연한 적자 도산이고, 내가 부도낸 것은 억울한 흑자 도산이다.
남이 비오는 날 강변을 혼자 거닐면 청승맞은 것이고, 내가 비오는 날 강변을 혼자 거닐면 낭만을 아는 사람이다.
남이 뚱뚱한 것은 많이 먹고 빈둥거리기 때문이고, 내가 뚱뚱한 것은 천성이 착하고 낙관적이기 때문이다.
남이 야윈 것은 성질이 까탈스러워 살조차 붙을 새가 없는 것이고, 내가 야윈 것은 지적인 활동을 많이 해 살찔 틈이 없기 때문이다
남이 외도하면 불륜이고, 내가 외도하면 로맨스다
남이 가는 휴가는 농땡이고, 내가 가는 휴가는 재충전이다.
남이 가는 해외여행은 외화낭비고, 내가 가는 해외여행은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다.
남이 식욕이 왕성한 것은 가득 찬 욕심의 표현이고, 내가 식욕이 왕성한 것은 충만한 생명력의 표현이다.
남의 흰머리는 빨리 늙은 탓이고, 내 흰머리는 지적 연륜의 상징이다.
남이 천천히 차를 몰면 소심운전이고, 내가 천천히 몰면 안전운전이다.
남의 남편이 설거지를 하면 공처가고, 내 남편이 설거지를 하면 애처가다
남의 딸은 내 아들에게 쥐어 살아야 하고, 내 딸은 남의 아들을 휘어잡고 살아야 한다.
남의 자식이 어른에게 대드는 것은 버릇없이 키운 탓이고, 내 자식이 어른에게 대드는 것은 자기주장이 뚜렷해서 이다.
남이 민소매를 입으면 지나친 노출이고, 내가 민소매를 입으면 개성과 패션이다.
남이 각자 음식값을 내자고 제안하는 것은 이기적인 사고방식이고, 내가 각자 음식값을 내자고 제안하는 것은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다.
남이 술자리에 자주 가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고, 내가 술자리에 자주 가는 것은 인생을 즐기기 위한 것이다.
남이 술잔을 돌리는 것은 위생관념이 전혀 없는 것이고 내가 술잔을 돌리는 것은 다정다감한 정을 나누자는 것이다.
남이 술 마시고 주정하는 것은 좋은 분위기 깨는 추태이고, 내가 술 마시고 주정하는 것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제스처다.

오늘 복음도 이런 인간 세계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눈이 먼 병자를 고쳐주자, 어떤 사람들은 반기고 기뻐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싫어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들이 아는 하느님과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마땅히 지켜야할 안식일 계명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자기 심리가 뒤틀리자 눈을 뜨게 한 사실을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은 범죄행위로 규정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에는 ‘그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보면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16) 그리고 심지어는 눈먼 사람이 눈을 떴다는 사실마저 부정하려고 듭니다. “이 사람이 틀림없이 나면서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19) 그래도 성이 차지 않으니까, 아예 예수님과 눈멀었던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세웁니다. “사실대로 말하시오. 우리가 알기로는 그 사람은 죄인이오. 너는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난 주제에 우리를 훈계하려 드느냐?”(24. 34)

지독한 자기 중심주의의 극치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맘에 들지 않으면 하느님마저도 부정하고마는 자기 중심주의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도와주어야만 하느님이지, 내가 하는 일을 도와주지 않는 분이라면 그는 하느님도 아니다 라는 식입니다. 게다가 내 뜻을 거스르거나, 내 앞 길에 방해가 된다면, 세상 그 누구도 제거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자기 중심주의 즉 인간의 교만에 의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

그들의 속셈은 그들의 질문을 통해 드러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눈이 멀었던 사람도 자기를 고쳐주신 분이 누구신지를 잘 몰랐지만, 반대자들의 질문을 통해 차츰 차츰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게 됩니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앞 못 보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잘 보게 되었다는 것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안 들어주시지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여 준 이가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분이 만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도저히 하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25. 31-33)

반대하는 사람들은 결국 자기들의 모습이 거울에 비치듯 양심에 걸리게 되자 화를 내고 저주합니다. “너는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난 주제에 우리를 훈계하려 드느냐?”(34) 그리고 유다인들은 “그를 회당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34)

자연스럽게 눈이 멀었던 사람은 자기가 누구를 믿고 따라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처음에는 막연하고 불확실했지만, 질문과 사람들의 숨은 생각이 드러나면서 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게 됩니다.

“예수께서 그를 만났을 때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하고 물으셨다. ‘선생님, 믿겠습니다. 어느 분이십니까?’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지금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하고 말씀하셨다.”(35-37)

그러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은 “‘주님 믿습니다.’하며 예수 앞에 꿇어 엎드렸다.”(38)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세 가지를 발견합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신앙에 대해 물을 때, 내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지. 주님께서 나에게 나타나셔서 무엇을 어떻게 해주셨는지 말할 수 있을 만큼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과 확실한 체험이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부모조차 자기들이 다칠까봐 “다 자란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23)하면서 피해갔지만, 눈멀었던 사람은 과감하고 명확하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9)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17)

두 번째는 인간이 나를 내세우면서 자기 안에 갇혀서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갈 때 하느님께 대한 믿음도 사라지고,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에게서 떠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눈이 먼 사람을 보게 해주신 기적을 베풀었는데도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은 주님의 기적과 은총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또 그래서 그 은총을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너는 그 자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모세는 직접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지만 그자는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른다.”(28-29) 그러자 주님께서 이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차라기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39. 41)

셋째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말을 듣고 판단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의 좋은 마음과 의도를 헤아려주십니다. 사람들은 눈이 멀었던 사람이 자기를 고쳐주신 분이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분이라고 증언하자 회당에서 쫓아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몸소 찾아가십니다.(35절 참조) 또 이런 모습은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사무엘이 주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의 왕을 뽑을 때도 나타납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1사무 16, 7)

----------------------------------------------------------------

서울대교구 심흥보 신부
528 44%
속마음을 보시는 하느님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

오늘 복음은 눈먼 소경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결과를 보고 그 결과가 누구의 탓인지 묻는 데 익숙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 그들이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자신은 깨끗하지만 그는 틀림없는 ‘죄인’임을 미리 단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눈먼 소경이 ‘전에 거지 노릇을 하고 있던 사람’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눈이 밝아져 구걸하던 신분을 벗어난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한 소경을 결국 회당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소경마저 공동체에서 쫓아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본디 생활 공동체뿐 아니라 친교의 공동체로 더불어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창세 2,18-25 참조). 외적인 모습에 집착한 유다인들은 눈먼 소경의 상태를 보고 그를 죄인으로 판단하여 그의 처지가 개선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낼 수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변화되어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하는 그들의 마음은 철저히 어둠 속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누가 참된 소경인지 물으십니다. 태생 소경인가, 아니면 사람의 속마음을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신앙공동체에서 몰아내는 사람들인가?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주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이를 식별하는 잣대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은 빛의 세계에서 삽니다(요한 1,1-13 참조). 그는 “모든 선과 정의와 진실을 열매 맺기”(에페 5,9) 때문에 어둠의 행위에 끼어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비추어 주시는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빛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빛으로 인정할 수 없었고 소경을 죄인으로 낙인찍어 공동체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진짜 소경은 어둠의 세력에 빠져 버린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믿었지만 하느님이 속마음을 들여다보시는 분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겉모양을 보고 그의 됨됨이를 판단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도록 하느님 백성을 위해 여러 가지 규정을 만들어 주었지만, 모세의 제자로 자처한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찾지 않고 모세의 규정으로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붙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방식대로 하느님을 믿었기에 다른 사람을 단죄했습니다.

하느님을 믿습니까? 그럼에도 지금 ‘나’는 누군가를 단죄하고 있습니까?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내가 누군가를 친교의 공동체에서 몰아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빛의 하느님이 아닌, 내가 만든 하느님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잠에서 깨어날 때입니다. 죽음에서 일어나십시오!

박요한 영식 신부
  | 02.28
528 44%
자만(自慢)의 자화상

'자기 알림의 시대’라는 말 자체가 낯설지 않게 들린 지 오랩니다. 그런데 정치·사회적인 변화의 물결 속에서는 자기 알림의 현상들이 더욱 더 증폭되기 마련입니다. 잘난 체하고, 능력 있음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자기를 알리려 합니다. 그래서 ‘검증’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치유 사건의 한 중심에 예수님께서 자리하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눈먼 사람을 만나십니다. 하지만 눈먼 사람이 그분께 치유해 달라고 청했다는 내용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주도권을 쥐고 이 사건을 이끌어 가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시험하려했던 바리사이들이 그냥 있을 리가 없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단순한 치유사건을 전해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여정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알려 줍니다. 이 치유사건은 눈먼 사람뿐 아니라 바리사이들에게도 하느님의 놀라운 역사(役事)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이미 단단히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눈먼 사람은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말씀하시는 것 모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던 그는 땅에 침을 뱉어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자기 눈에 발라 주시는 어처구니없는 그분의 행위를 겪으면서도 거칠게 항의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바리사이들과 논쟁하면서 엄청난 시련에 봉착하게 됩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음을 자랑하면서 그렇지 못한 자들을 거침없이 단죄할 정도로 교만과 자만의 수렁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 지식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눈먼 사람을 고쳐 주신 것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결코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아무리 선한 일이라 해도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절대적인 규범으로 내세워 예수님을 단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먼 사람은 비록 율법적인 지식은 없어도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보여 주신 놀라운 업적을 겪은 사람으로서 그분의 행위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확신을 갖습니다.

그는 학문적인 지식도 없고 사회적인 신분 역시도 내세울 것 없지만 그저 매순간 자신이 겪고 있는 현실 안에서 예수님을 한 단계 한 단계 더 깊이 알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바리사이들은 이러한 눈먼 사람의 믿음 행보를 방해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성 자체를 부인하는 데 그를 이용하려 했습니다. 바리사이들의 집요한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눈먼 사람은 한 발짝 한 발짝 믿음의 여정을 행하면서 급기야 “주님, 저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예수님을 세상의 빛으로, 구원자로 믿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먼 사람은 육체적인 시력만 회복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영적인 시력도 얻게 된 것입니다. 그에 반해 바리사이들은 볼 수 있다는 자만심 때문에 결국에는 보아야 할 분을 보지 못하고 기다려 왔던 분이 그분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바리사이들의 그러한 불행을 이 시간 우리가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혹시 우리도 ‘검증’받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까?

안병철 베드로 신부
  | 02.28
528 44%
나를 넘어서면 보이는 하느님과 이웃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 외로움에 지친 나머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한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하소연했지요.
 
"선생님, 사람들이 왜 저를 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나도 외롭습니다."
 
이미 이 사람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었던 선생은 그를 창가로 데려 갔습니다. 그리고는 창밖을 손으로 가리키며 "무엇이 보이십니까?"하고 물었지요. 그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선생은 다시 그 사람을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거울을 가리키며 "무엇이 보이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제 모습이 보입니다"하고 대답하자 다시 이렇게 물었습니다.
 
"같은 유리인데 어찌하여 유리창에는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이고 거울에는 당신의 모습만 보일까요?"
 
우리 마음에 이기심과 욕심이라는 마음의 때가 끼면 다른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열심히 유리창을 닦아내는 이유는 밖을 잘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의 창을 유리처럼 맑게 해야 하느님이 보이고 이웃이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바리사이와 같이 아집에 사로잡힌 존재인지 아니면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 은총을 체험하는 기적의 사람인지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소경을 고쳐주시는 기적을 체험하고도 안식일 법에 집착해 점점 판단력을 상실해 가는 눈 뜬 장님과도 같은 바리사이들을 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예수님께서는 태생 소경조차도 볼 수 있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셨지만 아집에 사로잡혀 너무나도 잘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만을 주장하는 바리사이들은 고쳐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바리사이와 같이 눈 뜬 장님이 아닌지 되돌아봐야겠습니다. 처음 세례 받을 때에는 마치 눈먼 이가 눈을 떴을 때처럼 모든 것을 경이롭게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려고 노력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눈에 먼지가 쌓이고 양심은 무뎌져서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을 하게 되기 쉽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 말씀으로 나를 정화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안 보이고 이웃도 안 보이며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목자의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중국의 달마 대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마음, 마음, 마음이여, 참으로 알 수 없구나.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도
한 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으니."

나이가 들수록 아집이 단단해져서 감동할 줄 모르고, 남의 말은 들을 생각도 안하며, 내 것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들이지요. 자신을 지배하는 아집을 허물 수 있다면 우리는 많은 사람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기회와 시간을 얻게 될 것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할 수 있게 되지요. 이기심을 버리고 남을 먼저 생각하면 많은 사람이 다가오고 새로운 관계가 형성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바리사이와 소경의 모습이 공존합니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내 주장이 통하지 않는다고 답답해한다면 바리사이의 모습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고, 이웃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하느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한다면 늘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거울을 보며 신체를 청결하게 유지하듯이 복음으로 우리의 내면을 정화해야 곁에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음을 늘 기억합시다.

이기양 신부
  | 02.29
528 44%
무엇을 보았습니까?

어느날 한 맹인이 등불을 켜들고 밤길을 나섰습니다. 자신은 비록 불빛을 보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도 자신이 들고 있는 등불의 빛을 보고 자신과 부딪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등불을 들고 한참을 걸어가는데 어떤 사람이 그만 “탁!”하고 이 맹인과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맹인은 화를 버럭 내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보시오! 당신은 눈도 없소? 나는 맹인이라 앞을 못보지만 당신은 내가 들고 있는 이 등불도 보지 못하시오?” 그러자 맹인과 부딪친 사람은 어둠 속에서 손으로 맹인이 들고 있는 등불을 확인하고는 말했습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그런데 당신이 들고 있는 등불은 이미
꺼졌습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런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눈이 먼 병자를 고쳐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반기고 기뻐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싫어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마땅히 지켜야할 안식일 계명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심지 어는 눈먼 사람이 눈을 떴다는 사실마저 부정하려고 듭니다. 그러면서 아예 예수님과 눈멀었던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세웁니다. 마치 위의 이야기처럼 등불이 켜져 있는지 꺼져 있는지도 모르는 소경이 자신과 부딪친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볼 수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태생 소경이 분명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안식일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한 행위를 했다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안식일 계명을 지켰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반대로 볼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했지만 진정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태생 소경은 비록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지만 예수님이 빛이요 구원 그 자체임을 보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죄인으로 취급받으며, 심지어는 회당에서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여러 소경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육신의 눈이 어두운 사람만 소경이라고 말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돈에 미친 사람은 돈만 보이고, 도박에 미친 사람은 화투장만 보일 것입니다. 또 여자에 미친 사람은 여자만 보이고, 권력에 미친 사람은 권력만 보일 것입니다. 그렇듯이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소경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고준석 토마스아퀴나스 신부
  | 04.01
528 44%
<나는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가>

3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를 생각하며 사순시기를 잘 지내야 하겠습니다.

예전에 50년을 함께 살았던 노부부가 '스피드 퀴즈'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가 맞춰야 할 문제는 '천생연분'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할멈, 우리들의 만남은 무엇이지?" 할머니가 대답하셨습니다. "웬수."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씀하십니다. "네 글자로 하면 뭘까?" 할머니가 말씀하십니다. "평생웬수." 할아버지는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했지만, 할머니는 '웬수'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평생 할머니 속을 썩였던 할아버지가 목에 사레가 들려서 숨을 쉴 수 없었습니다. 할머니가 구급차를 불렀고, 병원에 도착했지만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운명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아직 약간의 기운이 남아서 말씀하셨습니다. "나 아직 안 죽었어!" 그러자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평생 말을 듣지 않더니, 의사 말도 듣질 않네! 의사 선생님이 죽었다고 하잖아!"

눈이 있지만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삐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잣대로 보려 하기 때문에 현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조상의 탓도 아니고, 본인의 탓도 아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사람이 아픈 것도, 장애인이 되는 것도 모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같은 사물을 보면서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앞을 보지 못한 소경이 눈을 뜬 것은 축하할 일입니다. 가족들에게도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소경이 눈을 뜬 것이 신학적으로 합당한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독화살의 비유와 같습니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았으면 먼저 치료를 해야 합니다.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화살이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누가 쏘았는지를 먼저 따집니다. 왜 화살을 쏘았는지를 생각하는 동안에 화살에 맞은 사람은 독이 온몸에 퍼져서 죽을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묵상해봅니다.

"너희는 사람들의 외모와 능력, 사람들의 겉모습만 보지만, 야훼께서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보신다." 마치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신만의 성에 갇혀 다른 이들의 생각을 보지 못하고, 편견과 독단과 아집과 이기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그런 나 자신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몸이 있어도 참된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그러기에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으로 볼 수 있는 '심안(心眼)'을 요구하십니다. 참으로 들을 수 있는 '지혜'를 요구하십니다. 눈을 들어 세상을 봅니다. 참으로 보지 못하고, 참으로 듣지 못해서 눈과 귀가 있으면서도 그릇된 곳으로 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겉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 욕하고 비난하며 침을 뱉고 인격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보는 사람은 보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보게 하려고 왔다." 진실을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거짓과 가식과 허영에서 벗어나 참된 진리를 보도록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참된 세상을 보도록 인도하십니다. 누구나 함께할 수 있는 세상을 보도록 인도하십니다. 희망과 평화, 진실과 사랑이 한데 어울려 참된 빛을 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기 전에 저 땅속에서 쉼 없이 양분과 물을 찾고 있는 뿌리를 볼 수 있다면, 깨끗한 거리를 보기 전에 새벽부터 일어나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을 볼 수 있다면, 일등에게 찬사와 축하를 보내기 전에 꼴등에게 위로와 격려를 먼저 할 수 있다면, 용서받기를 원하기 전에 먼저 용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둠에서 벗어나 이미 빛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천국이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원하는 모든 일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이란 주님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곳이 천국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천국입니다.

참회와 절제, 자선의 사순시기도 벌써 반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난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보기 싫어하는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남은 사순시기를 지냈으면 합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 03.30
528 44%
[서울] 마음의 눈을 뜨세요. 그리고 행복하세요.

예전에 사목했던 성당 근처에 맹인학교의 선생님이 한분 사셨습니다. 태생 소경이었던 그분은 맹인학교 침술 선생님이었습니다. 그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주일 저녁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오는 음악 방송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아름다운 가요와 가곡의 노래를 들으면 한 주일의피로가 풀린다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주 그 선생님은 “신부님! 어제 그 가수의 가사도 좋고/표정도 너무 좋던데요. 정말 재미있게 보았어요”라고 즐겁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은 내가 어렵게 “선생님! 외람된 질문이지만 선생님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소리를 들으시는 것인데 왜 ‘본다’라고 말씀하시는지요? 궁금해요”라고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선생님은 미소를 띠며 방송 중인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광경, 특징, 행동들을 막힘없이 잘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미처 못 보고 지나치고, 깨닫지 못하는 장면이 많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선생님은“저희 같은 사람들은 눈으로 볼 수 없기에 귀나 촉각으로 본답니다. 일반 사람에게는 없는 능력이 있어 우리 나름대로 장면을 보는 것입니다.” 하긴 얼마 전 목소리만 듣고 내 나이와 외모, 성격 등을 설명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본다는 것은 사실 인식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면 보고 있어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세상을 보는 것은 눈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닫히면 진실을 보지 못합니다. 더구나 편견을 가지게 되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인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겨 기적을 베풀어 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기적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고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비난만합니다.

마음의 눈을 뜬 자만이 진리를 볼 수 있고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영적인 눈, 마음의 눈, 신앙의 눈을 떠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주님의 눈으로 불우한 이웃을 내 형제로 보고, 주님의 눈으로 이웃의 장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지속적인의지와 기도로 가능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삶의 기쁨이내 안에, 그리고 내 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어린 시절 소풍 때 보물찾기에서 선생님들이 꼭꼭 숨겨 놓은 보물 딱지를 찾은 기분일 것입니다. 보물을 찾게 되면 아이들은 탄성을 지르며 펄쩍펄쩍 뛰게 됩니다. 수풀 속에서 보물쪽지를 발견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기쁨을 잘 모릅니다. 이제 눈을 뜨세요! 그리고 내 안에서 그리고 멀지 않은 내 곁에서 보물을 발견하세요.

▦ 서울대교구 허영엽 마티아 신부 : 2017년 3월 26일
  | 03.24
528 44%
오늘은 사순 제4주일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중에서 「교회 헌장」은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빛이시다”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모름지기 사순 시기는 참 빛이신 주님을 알아 뵈올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깨우는 때입니다.

1.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9)

한 단계 높은 차원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어떤 사실을 안다는 뜻의 ‘인지(認知)’를 합친 용어인 메타인지는 자신의 인지 활동에 대해 알고, 또 이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는 확신이 주는 위험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사무엘이 이사이의 여덟째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는 과정을 전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9)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그동안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육안을 통한 외양에만 치우쳤던 잘못을 자주 범했었습니다.

2.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에페 5,14)

국제신학위원회가 발간한 문헌 「친교와 봉사」에서는 “인간은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Capax Dei)로서 하느님을 보고 싶어 하는 본성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정의하면서,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지향이 죄로 인하여 파괴될 수 없다는 것과 구원 은총의 필요성”에 대하여 강조합니다.

오늘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주님 안에 있는 빛의 자녀답게 선과 의로움과 진실을 따라 살아가십시오”(에페 5,8-10 참조)라고 권고하십니다. 아울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일에 가담하지 마십시오”(에페 5,11 참조) 하시면서, 자기를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는 ‘근본적 선택’(「진리의 광채」 66-67항 참조)의 삶이 지닌 중요성을 역설하십니다.

3.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요한 9,37)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회칙 「신앙의 빛」에서 “신앙은 비타협적인 것이 아니며 서로를 존중하는 공존 속에서 자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믿는 사람은 거만하지 않으며 신앙은 그와 반대로 그를 겸손하게 이끕니다. 신앙이 주는 안정성은 우리를 전혀 완고하게 만들지 않고, 여정에 나서며 증언하고 모든 이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 줍니다”라고 깨우쳐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에 의해 비로소 시력을 갖게 된 태생 소경은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요한 9,27) 하며 바리사이들의 자기중심적인 태도에 일침을 놓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우리는 잘 본다”(요한 9,41)는 불필요한 자신감보다는, 참으로 주님을 “마음으로 만져서 믿고 있는가?”(「신앙의 빛」 31항 참조) 하는 겸손입니다.

4.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이사 66,10 참조)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기회가 될 때마다 “이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보려는 마음, 곧 마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사순 제4주일은 래타레(Laetare) 주일이라고도 불립니다. ‘래타레’는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하고 외치는 라틴어 입당송의 첫 단어에서 유래합니다. 우리의 기쁨은 파스카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태생 소경처럼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을 압니다”(요한 9,25)라고 당당히 고백하는 ‘마음의 눈’을 지니고 ‘빛이신 주님’을 향해야 합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가 우리를 ‘빛의 삶’으로 이끄시는 한없이 자비로우신 주님 안에서 언제나 충만한 구원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누가 사람의 마음을 알리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예레 17,9-10 참조) 아멘.

▦ 서울대교구 정연정 신부 : 2017년 3월 26일
  | 03.25
528 44%
[서울] 고통 속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

--------------------------------------------------

오늘 복음을 보면,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눈먼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자기 탓이나 부모의 탓이 아님에도 날 때부터 눈이 안 보이는 고통을 당했다.

무릇 성경에는 이런 시련과 고통을 당하는 이유가 세 가지로 나온다.

첫째로,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한 대가이다.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 가에 있던 병자를 고쳐주시며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5,14)고 당부하시는 말씀을 들어 알 수 있다.

둘째로, 믿음의 성장을 위한 시련과 고통이다. 욥기를 보면, 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며 신앙과 삶의 위기를 맞아 방황한다. 그러나 결국 자기의 고통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단련시키기 위한 것임을 깨닫고 이를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복음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드러나게 하려고 허락하신 시련과 고통이다.

길을 가던 중에 태중 소경을 발견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태중 소경이 되는 이유에 대해 물으니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3)라고 하신다. 기존 유다인들의 논리대로라면 지금 당하는 고통의 이유가 과거에 있으니 현재는 절망과 낙담만 남게 되지만, 예수님의 새로운 관점의 말씀으로 보면 우리가 겪는 고통 속에 분명한 하느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은 당장 어렵고 힘든 상황이더라도 하느님께서 나의 고통을 통해 역사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어떤 시련과 고통 중에도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바쿡 예언자가 바빌로니아 침공으로 유다 왕국이 망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무화과나무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없을지라도… 우리에서는 양 떼가 없어지고 외양간에는 소 떼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리라”(하바 3,17-18)라고 노래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언제나 하느님께서 그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 속에 일하시고 늘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고통의 상황은 하느님께서 일하심이 드러나는 은총의 현장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변화시켜주시고 우리를 주님 앞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 쓸모 있는 일꾼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원하는 결과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할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몸의 가시로 받는 고통이 너무도 커서 이를 없애주시길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다가 깨달았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비록 자기를 고쳐달라는 기도의 응답을 받지는 못했지만, 주님을 더 의지하고 더 겸손하게 일하라는 주님의 음성으로 도리어 기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도 매번 당하는 시련과 고통이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온전히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봉헌하는 삶을 살면 주님은 연약한 우리를 통해서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신다. 어떠한 절망이나, 어떤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먼저 주님 앞에 나서면 바로 그곳이 실로암 못이 된다. 그곳에서 주님의 생명수를 마시고 바르면 눈이 치유되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기적을 보게 될 것이다. 실로암은 예수님께서 그리하도록 ‘파견된 분’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

서울대교구 임상만 신부
평화신문 2020년 3월 22일
  | 03.21
528 44%
작년 8월에 미국으로 왔습니다. 저를 파견하신 주교님께서도 멀리 가는 저를 안쓰럽게 보셨습니다. 잘 지내다 오라고 하셨습니다. 동창 신부님들도 힘들지만 잘 지내고 오라고 했습니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신문사의 일이 힘들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있는 곳은 한국인이 많아서 언어로 인한 어려움도 별로 없습니다. 음식도 대부분 한국 음식으로 먹을 수 있습니다. 신문 홍보로 비행기를 자주 타지만 여행가는 기분으로 다니고 있습니다.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자리도 생각하나 바꾸면 꽃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신종코로나 바이러스가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한국의 상황이 어려워졌습니다. 동창 신부님들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잘 견디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모든 일들이 잘 풀릴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돌아보면 언제나 시련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절망과 고독이 있었습니다.
우주는 생성하고 소멸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도 6번의 큰 시련이 있었습니다. 소행성이 충돌한 적도 있고, 엄청난 규모의 화산 폭발이 있었고, 빙하기가 있었고, 기근과 전염병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생명체가 사라지기도 했고, 인류도 아주 극소수만 살아남기도 했습니다.

토인비가 말했던 것처럼 시련과 도전이 있었기에
그에 따른 변화와 발전이 있었습니다.

구원의 역사인 성서도 이스라엘 백성의 시련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정처 없이 정든 땅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도착했지만 남과 북으로 갈라져야 했습니다.
아시리아,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유배를 가야했습니다.

성모님은 가슴이 예리한 칼로 찔리듯
아플 거라는 예언을 들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보아야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을 보아야 했습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을 품에 안고 통곡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시련을 예고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당연히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부했던 베드로 사도에게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야단치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반당하셨습니다.
가장 사랑했던 제자는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대부분 순교로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초대교회는 300년 동안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화려한 교회는
모두 순교자들의 피와 땀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의 역사도
찬란한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오랜 시련과 고통의 역사가 함께 했습니다.

냉혹한 제국주의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으로부터 36년 동안 지배를 받았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이 순국하였습니다.
해방의 기쁨도 잠깐이었습니다.
남과 북으로 나눠진 민족은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눴습니다.
한국전쟁으로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습니다.
국토는 파괴되었습니다.
서로의 가슴에 적대감이 커졌습니다.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조국의 허리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남과 북의 통치자들은 이념과 사상으로 인권을 탄압했습니다.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고,
긴장과 갈등의 골이 조금 적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념과 사상은
넘기 힘든 벽이 되고 있습니다.
변 강대국들과의 외교문제도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 그 밖의 것들은 제쳐 놓고서라도, 모든 교회에 대한 염려가 날마다 나를 짓누릅니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다른 사람 때문에 죄를 지으면 나도 분개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자랑해야 한다면 나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들을 자랑하렵니다.”

한국의 첫 번째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순교자들은
1984년 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여의도 광장에서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한국교회에는 커다란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103위 순교 성인들의 삶은
고난과 가시밭의 연속이었습니다.
눈물 없이는 차마 읽을 수 없는 순교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생의 마지막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에게
어머니 우술라를 잘 부탁한다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순교의 칼을 받는 것은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평생 고생하신 어머니를 혼자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야하는 인간적인 고뇌가 있었습니다.
236년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순교자들의 피와 땀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신앙의 자유는
신앙의 선조들은 단 하루만이라도 누리고 싶었던
신앙의 자유입니다.

오늘은 사순 제4 주일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의 빛을 말하고 있습니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사막의 먼 길에 오아시스를 만나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쁘겠습니까?
오늘 성서 말씀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힘들어 하는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또는 삶의 시련 앞에 힘들어하는 신앙인들에게
커다란 위로가 될 것입니다.

------------------------------------

데레사 성녀의 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 하도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2020년 3월 22일
  | 03.22
528 44%
유학시절 가장 부담스러운 과목은 열 명 남짓의 학생들만 듣는 세미나 과목들이었습니다. 소수의 인원이 함께 발표와 토론을 해야 한다는 것이 꽤나 큰 어려움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각 나라의 사람들의 저마다 다른 억양과 발음 때문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스페인어권 학생들은 시옷 발음을 너무 흘리고 미국인들의 경우 발음을 엄청 굴리다 말문이 막히면 영어를 쏟아냅니다. 베트남 혹은 중국인 학생들은 이태리어를 발음하는데도 성조가 강해 알아듣기 어려웠고 이태리 학생들은 그냥 말이 너무 많았습니다.

물론 저의 발음 역시 그들이 듣기엔 어려웠으리라는 생각이듭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인상을 쓰며 서로의 발음을 알아들으려 애썼던 순간들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세미나 중에는 특별히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과 관련된 세미나가 기억납니다. 담당 교수님은 캐나다 출신의 할아버지 신부님이었고 그리고 깐깐하고 매섭기로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베네딕토 16세와 관련된 논문을 쓰고 있었으므로 이 수업을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야 했습니다. 세미나의 과제는 교수님이 정한 교황님의 저서들 중에 각자 한 권씩을 골라 발표하는 형식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기지를 발휘했는데, 교수님이 정해주신 책 중에서 유일하게 한국말로 번역되어 있는 <나자렛 예수>라는 책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태리어를 이제 어느 정도 한다고 해도 외국말로 읽는 것보다 한국말로 번역된 책으로 빨리 맥을 잡고 발표 준비에 매진하는 것이 훨씬 수월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책을 고르자 교수님이 저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얇은 책도 많은데 그 어려운 책을 정말 할 수 있겠어?” 라고 물어보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국말로 번역이 되어 있으므로 내용을 이해하고 정리하는데 오히려 체계적일 것이라 말씀드렸고 교수님도 이를 받아들이셨지만 그래도 의심어린 눈빛은 여전했습니다. 솔직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아시아 사람을 은근히 무시하는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발표 날이 다가왔고 저는 제가 준비한 대로 착실히 발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토론을 시작하는데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만약 한국말로 이 책을 정리해서 발표했다면 너처럼 할 수 없었을 거야. 네가 이 책을 골랐을 때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의심했는데 내 생각이 틀렸어. 진심으로 나의 잘못을 사과해.”

이 말씀을 들으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냥 넘어갈 법도 한데 학생에게 자신의 불찰을 사과하는 모습이 진심으로 겸손하고 멋있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 교수님은 학교에서 만날 때마다 저를 잘 챙겨주셨고 다른 교수님들께 제 이름을 알리시며 언제나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박사학위 수여식 때도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나오셔서 끝까지 함께 해 주시고 축하해 주셨습니다.

자신의 불찰을 인정하고 누군가를 인정한다는 것.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위가 높을수록 이것은 점점 어려워집니다. 설사 인정할만한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체면을 구기기 싫고 무엇보다 자신에 비해 지위가 낮은 사람은 우스워 보이기 쉽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할아버지 교수님은 진정한 겸손의 모범을 보여주셨고 그 모습은 좋은 교육이 되어 아직도 저의 기억안에 영롱하게 남아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 먼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이 소경의 과거를 상상해 봅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상실감, 죄를 지었으므로 눈이 멀게 되었다고 여기는 당시의 문화에서 생겨나는 열등감, 촉각과 청각, 미각 모두가 선명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이유로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던 몸. 당연히 눈만 뜰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평생에 걸쳐 해왔을 것입니다.

매일매일이 어두운 밤이었던 나날들, 그런데 예수님이 다가와 사랑이 가득한 손을 그의 눈가에 얹으십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마침내 그에게 찬란하고 아름다운 새벽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이를 전혀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초라해 보이는 작은 고을 출신의 청년 예수에게 권위와 힘이 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자신들의 권위가 다소 약해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었음을 트집잡으며 오히려 예수님을 죄인이라 부르고 눈 뜬 소경을 내쫒아 버립니다. 그야말로 스스로 눈을 가리고 있는 셈입니다.

한편 눈을 뜬 소경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기적을 증언합니다. 그는 은총을 직접 받았고 그것을 생생히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지위가 높은 바리사이들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증언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은 교만과 의심으로 인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들은 결국 눈먼 자로 남아있을 것이며 겸손과 사랑이 있는 이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 뜬 자가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얼마나 명확한 시력으로 예수님을 느끼고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여러 가지 유혹들과 나약함 속에서 시야가 흐려지기도 하고 아예 눈이 감겨 아무것도 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보다 적극적으로 눈을 치켜뜨며 오늘 소경의 고백처럼 예전에 예수님을 느꼈을 때의 사랑과 기쁨으로 “주님, 저는 믿습니다”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공교롭게도 사순 제 4주일입니다. 이는 전례상 ‘기쁜 주일'이므로 사제는 무거운 사순의 분위기와 사뭇 달리 분홍색 제의를 입습니다.

그동안의 힘겨운 회개와 고행을 잠시나마 쉬면서, 부활의 내일을 바라보는 환희의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눈에 손을 얹어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며 그에 기뻐하는 마음으로 보다 편안히 보내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사해주신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아멘.

--------------------------------------------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
2020년 3월 22일
  | 03.22
528 44%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고인이 되신 어머니는 생전에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가끔 하였습니다. 시대를 잘못 만난 어머니는 배움이 적었습니다. 어머니는 배우자를 만날 때 딱 한 가지 기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배우자의 능력, 재력, 외모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배우자의 ‘학력’을 보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당시 사범학교를 다녔기에 어머니의 기준에 적합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해서 57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지 못해도 탓하지 않았습니다. 재력을 보고 결혼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이사를 다 마치면 집으로 오셨습니다. 이사를 하는 것도 모두 어머니의 몫이었습니다. 집안일을 잘 못해도 탓하지 않았습니다. 능력을 보고 결혼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책을 가까이 하고, 서예를 하는 아버지를 존경하였습니다. 자식들에게도 늘 ‘아버지의 자리’를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신앙과 배움은 어머니 삶의 두 날개였습니다. 어머니는 야학으로 한글을 배웠고, 검정고시도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레지오 단원으로 지냈습니다. 어머니의 안목으로 동생은 수도자가 되었고, 저는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 들어온 며느리는 어려운 집안을 일으켜 세운다고 합니다. 잘 못 들어온 며느리는 집안에 분란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정부는 인사를 할 때마다 ‘홍역’을 치르곤 합니다. 후보자의 능력과 자질을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후보자의 인격과 품성을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능력과 업적은 쉽게 볼 수 있지만 인격과 품성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국가 수사본부장이 임명된 지 하루 만에 자진 사퇴하였습니다. 정부는 임명을 철회하였습니다. 본인도 사퇴의사를 밝혔고, 정부도 임명을 철회하였기에 사퇴의 이유를 거론할 필요는 없지만, 인사를 할 때는 좀 더 명확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평가가 있었습니다. 인사이동 때가 되면 주교님들의 고민도 깊어 질 것 같습니다. 꼭 보내고 싶은 사제는 겸손하게 사양을 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보내고 싶지 않은 사제는 굳이 찾아와서 보내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인사이동이 별 무리 없이 이루어지면 그제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습니다.

눈이 있지만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겉모습만 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삐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잣대로 보려하기 때문에 현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조상의 탓도 아니고, 본인의 탓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사람이 아픈 것도, 장애인이 되는 것도 모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같은 사물을 보면서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랜 동안 앞을 보지 못한 소경이 눈을 뜬 것은 축하할 일입니다. 가족들에게도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인들은 소경이 눈을 뜬 것이 신학적으로 합당한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을 묵상해봅니다. “너희는 사람들의 외모와 능력, 사람들의 겉모습만 보지만, 야훼께서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보신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볼 수 있는 “心眼”을 요구하십니다. 참으로 들을 수 있는 “智慧”를 요구하십니다. 눈을 들어 세상을 봅니다. 참으로 보지 못하고, 참으로 듣지 못해서 눈과 귀가 있으면서도 그릇된 곳으로 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겉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여, 욕하고, 비난하고, 침을 뱉으며, 인격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보는 사람은 보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보게 하려고 왔다.” 진실을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거짓과 가식과 허영에서 벗어나 참된 진리를 보도록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참된 세상을 보도록 인도하십니다.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세상을 보도록 인도하십니다.

희망과 평화, 진실과 사랑이 한데 어울려, 참된 빛을 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기 전에, 저 땅 속에서 쉼 없이 양분과 물을 찾고 있는 뿌리를 볼 수 있다면, 깨끗한 거리를 보기 전에, 새벽부터 일어나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을 볼 수 있다면, 일등에게 찬사와 축하를 보내기 전에, 꼴등에게 위로와 격려를 먼저 할 수 있다면, 용서받기를 원하기 전에, 먼저 용서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둠에서 벗어나 이미 빛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참회와 절제, 자선의 사순시기도 벌써 반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난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지, 난 과연 무엇을 보기 싫어하는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한 주간을 지냈으면 합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2023년 3월 19일
  | 03.18
528 44%
우리는 살면서 뜻밖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상하고 신비한 경험을 한 뒤 우리는 변하게 됩니다. 죽을뻔한 상황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든지, 기도하면서 주님을 만났다든지, 일상에서 주님의 은총을 경험했다든지,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주님의 응답을 받았다든지 할 때 우리는 힘이 샘솟고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한 번 은총을 입었다고 해서 다시는 어려움이 없는 것도 아니고, 다시 그런 은총을 또 입는 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체험들은 일생 동안 우리 삶의 기준이 되고, 좋은 추억으로 간직되어 힘겨울 때마다 우리 삶의 영양분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과 함께하게 되면, 과거에 읽었던 성경구절도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고, 새로운 의미로 우리를 일깨워주고, 우리 마음을 새롭게 불러일으켜 줍니다. 그 때마다 주님은 우리를 환하게 비춰줍니다. 마치 천둥번개를 치듯, 끊어졌던 숨이 되살아나듯, 우리에게 새로운 쾌감과 힘을 던져두고, 절망에서 희망의 빛을 비춰주시고, 현세의 난관을 극복하고 펼쳐나갈 새로운 길을 비춰주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무엘은 주님의 명을 따라 사울의 뒤를 이을 왕을 선택하러 갑니다. 사무엘은 이사이의 아들 중에 엘리압을 보고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1사무 16,6) 하면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하자, 주님께서는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1사무 16,7) 라고 하시며 사무엘을 말리십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뽑을 때 사울은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다.”(1사무 10,23) 고 합니다. 이렇게 출중했던 사울은 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여러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긴 하였지만, 주 하느님은 “나는 사울을 임금으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 그는 나를 따르지 않고 돌아섰으며 내 말을 이행하지 않았다.”(1사무 15,2) 라고 하시며 사울을 왕좌에서 내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아버지 이사이조차 아들로 취급하지 않는 막내 다윗을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선택하십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찾고 이행하려고 하는 다윗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주님 백성의 지도자로 선택하십니다. 힘과 모략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며 주님께 의지하려는 자녀 된 마음으로 주님과 백성들에게 나아가도록 이끄십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시편 2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의 입장에서는 일을 하지 말고 쉬어야 하는 안식일에 예수님이 '고치는 일을 함'으로써, 그리고 눈먼 사람에게 '~까지 가서 씻는 일'을 하게 함으로써,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남을 죄짓게까지 하였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파들에게는 "눈먼 사람이 눈을 떴느냐 안 떴느냐?"하는 사실이나, 눈먼 사람의 답답하고 힘에 겨운 삶은 안중에도 없고 안식일 계명이 지켜지고 유지되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요한 9,16) 하는 정당한 문제제기도 무시돼 버립니다.

바리사이파들에게는 이번 기적이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은 상태에서 생겨난 것이기에 '무효다!'라고까지 주장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의미나 군중에게 끼칠 영향이나 효과를 충분히 감소시킬 수 있기 때문에, 거듭 그 부모와 눈을 뜬 사람에게 예수님이 안식일에 '(고치는) 일'을 했다고 자백하도록 유도합니다.

눈 뜬 사람의 부모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눈먼 이었다는 사실, 즉 기적이란 사실은 증명해 주면서도, 그 기적의 의미에 대한 논쟁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침묵해 버립니다. 이러한 부모의 움츠리는 태도에서 힘(?)을 얻은 바리사이파들은 그 눈멀었던 사람을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24절) 하고 윽박지르며, 그도 죄인이라고 동의해주기를 요구합니다. 드디어 주님을 섬기기 위한 안식일 계명으로 말미암아, 진정 주님을 섬기지 않고 있는 유다인들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눈 뜬 사람은 유다인들이 이렇게 자꾸 질문을 해가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오히려 되묻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해 눈이 밝아져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가 어려우니까 이제는 그와 나를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분도 (더 자세히 알아서)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27절)

눈 뜬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진실여부에 대해 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유다인들에게 오히려 그 기적의 정당성을 드러내는 말로써 복음을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31.33절)

자신들의 속이 드러나 버린 유다인들은 격분하여 그를 회당에서 쫓아냅니다.

눈 뜬 사람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밝힙니다. "내가 (거지였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9.33절) 그리고 예수님께 "주님, 저는 믿습니다."(38절) 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에게서 주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일이 드러"납니다(3절).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2독서에서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일에 가담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십시오.”(에페 5,8-11) 라고 일깨워줍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세 가지를 되새겨 봅니다.

첫째, 오늘 복음에서 눈을 뜬 사람처럼 사람들이 우리에게 신앙에 대해 물을 때,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주셨는지 말할 수 있을지 자문해 봅시다.

두 번째, 바리사이들처럼 사람이 자기 이해관계 안에 갇혀서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할 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변질되고, 실제로 그 사람에게 하느님은 머무실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자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오. 그러나 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오.”(요한 9,28-29)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런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39. 41절)

세 번째, 예수님께서 앞을 보게 된 이를 찾아가셨듯이 우리가 복음의 빛으로 새롭게 눈 뜨게 되면,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복음의 하느님 나라로 이끄십니다.

이해관계로 둘러싸인 세상의 어두운 관점에서 벗어나, ‘주님이 어떤 의미에서 내게 빛이신지?’ ‘어떻게 하면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깨달음을 간직합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하는 빛의 관점으로,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일상에서 접하는 사건과 상황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맞이하여, 주님께서 빛처럼 깨우쳐 주시고 비춰주시고 이끌어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어나가도록 합시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9,38)

---------------------

서울대교구 박흥보 신부
2023년 3월 19일
  | 03.18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814   부활 제6주일 성경 말씀 해설  [5] 173
813   [수도회] 진리이신 성령이여, 오십시오  [8] 2666
812   [수원] 협조자 성령의 약속  [8] 3108
811   [인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7] 2837
810   [서울]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성령  [11] 3024
809   [마산] 신부님, 사제관에 불 좀 켜 놓고 사이소!  [4] 3169
808   [부산] 성령의 약속 : “아버지께 구하면 성령을 보내겠다”  [5] 3065
807   [안동] 늘 함께 하시는 성령  [5] 2926
806   [대구] 하느님의 협조자 파라클리토  [6] 3838
805   [전주] “성령께서는 우리가 걸어갈 길을 가르쳐주신다"  [3] 476
804   [광주] 십인십색(十人十色)  [2] 764
803   [청주] 성령, 한계 없는 사랑의 기운  [2] 601
802   [대전] 제자들과 함께 하는 성령  [4] 2677
801   [의정부] 나에게 중요한 것은?  [4] 881
800   [군종] 사랑해요  [3] 877
799   [원주] "희망을 믿음으로 믿으며 당당하게 살아갑시다"  [2] 503
798   [춘천] 진리의 영(靈)만이…  [4] 2932
797   (백) 부활 제6주일 독서와 복음 (다른 보호자를 보내실 것이다)  [7] 2377
796   부활 제5주일 성경 말씀 해설  [7] 131
795   [수도회] 미풍처럼 다가오시는 하느님  [2] 2574
794   [청주] 주님의 길  [2] 119
793   [대전]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완전한 유일한 이콘(상)  [2] 2810
792   [인천]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8] 2562
791   [수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4] 3051
790   [서울]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신 예수  [9] 2834
789   [안동] 행복의 길 :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  [3] 2838
788   [대구] 우리 삶의 네비게이션이신 예수님  [4] 2847
787   [마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2] 2799
786   [부산] 하느님이 하시는 일  [4] 2476
785   [전주] ‘위하여’가 아닌 ‘함께’  [3] 740
784   [광주/제주] 본래의 제 기능  [4] 553
783   [군종]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2] 1810
782   [의정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1] 902
781   [원주]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2] 600
780   [춘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2] 3052
779   (백) 부활 제5주일 독서와 복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7] 2247
778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성경 말씀 해설  [3] 94
777   [수도회] 행복한 목자 착한 목자  [6] 2418
776   [인천] 죽을때 후회하지 않을 인생  [6] 2546
775   [수원]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7] 2517
1 [2][3][4][5][6][7][8][9][10]..[21]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3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