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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눈물 흘리시는 하느님
조회수 | 2,908
작성일 | 05.03.11
슬픔 중에서 가장 깊은 슬픔은 아마도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일 것입니다. 멀쩡하고 든든하던 아들, 여러 자녀들 가운데서도 가장 다정다감하던 아들, 나이 드셔서 그나마 가장 큰 낙(樂)이요, 유일한 의지처였던 효자를 잃고 슬퍼하는 한 자매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아들을 앞세웠다는 죄책감과 상심으로 자매님 일상생활은 거의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득 채워진 쓰레기봉투를 내다버리러 나가다가도 갑자기 아들 생각이 나면 슬픔에 겨워 주저앉아 우십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쓰레기봉투를 냉장고에 넣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답니다.

아들 없는 이 세상, 어머니에게 더 이상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국적 연합군처럼 포위해오던 갖은 과로와 스트레스, 중압감을 견디다 못해 건강에 과부하가 걸린 것도 모르고, 한번 잘 살아보겠다고 죽기살기로 뛰어다니던 아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한 순간에 세상을 하직한 아들의 얼굴이 생각날 때 마다 자매님은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한 인생이 제대로 활짝 펴보지도 못한 채 요절한다는 것은 너무도 잔혹한 일이지요. 특히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오빠 라자로를 먼저 떠나보내고 애통해 하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슬픔을 보십니다. 먼저 떠난 라자로는 예수님에게도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오랜 시간 동고동락을 같이 했던 절친한 친구 같은 존재였습니다. 친구 라자로의 부재에 예수님께서도 눈물흘리십니다.

오빠와 사별로 인해 망연자실해 있는 마리아와 마르타를 바라보는 예수님 눈망울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입니다. 기운이 하나도 없이 겨우 서 있던 자매를 바라보던 예수님 마음 역시 찢어질 듯이 아파왔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죽은 라자로를 향해 생명의 말, 구원의 말 한마디를 던지십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오늘 라자로를 살리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결핍, 우리의 나약함은 하느님의 자비를 요청하는 원동력입니다. 우리의 고통, 우리의 상처는 하느님의 사랑을 불러오는 바탕입니다. 우리의 슬픔, 우리의 눈물은 하느님의 구원을 가져다 주는 도구입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에서 우리 감정을 하느님 앞에 감추지 않고 솔직히 드러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 자신의 한계와 비참함을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고 그분의 손길, 그분의 도움을 간청하는 자세는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에 아주 소중한 요소입니다.

때로 하느님 앞에 울고 싶을 때는 원 없이 우는 것도 필요합니다. 너무도 충격적 일 앞에서 "하느님 당신이 사랑의 하느님이시라면서 어떻게 이런 일을 다 겪게 하십니까?"하고 외치는 것도 너무나 자연스런 일입니다.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고 따지면서 "도대체 이게 뭐냐"고, "제발 좀 길을 열어주시라"고 간청하는 모습이야말로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너무나 울어 눈물조차 말라버렸을 때, 목소리가 잠겨올 무렵, 가만히 뒤에서 우리 어깨를 감싸주실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우리 눈에서 영원히 눈물을 거두어가실 분, 결국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누구나 다 떠나야 할 존재란 것을 깨우쳐 주실 분, 이 세상 그 누구도 주지 못할 따듯한 위로를 주실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음산하고 어두운 죽음의 장소인 무덤을 향해 이렇게 외치십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라자로야, 그대 자신을 옥죄고 있는 죄와 악습의 사슬을 끊고 나오너라!" "라자로야, 그대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지니고 살아왔던 질병과 죽음의 굴레를 던져버리고 나오너라!"

온 몸을 뒤덮고 있는 더러워진 수의를 그대로 걸친 라자로는 비틀비틀거리면서 겨우겨우 동굴 밖으로 걸어나옵니다. 심연의 죽음을 떨치고, 질식할 것만 같은 짙은 어둠을 뒤로 하고 걸어나옵니다.

죽었던 라자로의 소생 기사를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활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결정권을 쥐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란 사실,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욱 기쁜 일은 예수님께서는 먼 훗날 우리 생이 마감하는 그 순간, 우리를 부활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 지금 이 순간 우리를 영원한 생명과 구원으로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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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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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보배로운 기능, 슬픔

나는 어른이 된 이후로 지금까지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별로 없다. 그것이 어찌 나만의 이야기랴! 오랜 세월 유교적 풍토와 군사문화의 영향을 받아오고 그 어느 나라보다도 더 남성 중심적인 풍토가 강하게 지배해 온 한국 사회에서 자라난 남성이라면 대부분 그러하리라. 남자는 무릇 강해야 하기에 눈물을 보이면 안 되고, 더구나 남들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나약함의 상징이라는 관념이 어릴 때부터 주입되어 형성되어 온 것 같다. 그러기에 어느 때부터인지 나는 고통스러운 순간에는 감정이 메마른 사람처럼 차라리 슬픈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마비시켜 온 것 같다. 그것이 정말 잘못된 것이라는 것은 수도생활을 하며, 또 나중에 상담심리를 배우면서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죽었던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복음 이야기에서 우리는 감정이 온전히 살아 있는 예수님을 보게 된다.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연민에서 솟아나오는 비통한 주님의 눈물이 마침내 힘찬 음성으로 울려 퍼진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은 매우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참 인간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시는 것 같다.

흔히 신학적으로 고통은 죄 때문에 생긴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면 사랑 때문에도 고통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당신의 십자가의 고통을 바라보면 사랑 때문에 생기는 무죄한 이들의 눈물과 고통에는 세상의 죄를 씻는 구속의 힘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자식을 사랑하는 모든 어머니의 눈물이 그렇듯이 말이다.

감정은 주님이 주신 영혼의 보배로운 기능 중의 하나다. 이성이 감정에 압도당하는 것은 미성숙함의 문제겠지만, 한편 감정이 제 기능을 하지 않는 것은 마치 한 바퀴가 빠진 채 굴러가는 자동차와 같다. 나의 감정은 살아서 온전히 기능하고 있는가? 주님을 제대로 따르고자 한다면 마땅히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고, 아플 때 아파하고, 정의롭게 화가 나야 할 때 화를 내는지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수회 이재욱 신부
  |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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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우리 국민들의 노령화가 점점 가속화되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가끔씩 문상을 가보면 요즘 80은 장수한 축에 끼지도 못합니다. 90 넘어 돌아가시는 분들이 수두룩합니다. 아직 생존해계시는 100세 이상의 노인들이 한국에만 1,000여명 남짓 된답니다.

세계 최고령 남자는 올해로 만 112세를 넘기신 다나베 도모지라는 할아버지랍니다. 기네스 협회 관계자가 인증서를 수여하러 가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할아버지, 몇 살까지 살고 싶습니까?”

112세 된 할아버지는 거침없이 대답하셨답니다.

“영원히!”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너무 오래 살아 미안하지만, 얼른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허락된다면 쭉 나가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누구에게나 필연적으로 찾아옵니다. 위 할아버지께서 “영원히 살고 싶다”고 하셨지만, 그분의 삶이 앞으로 며칠 남았는지 모를 일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그 어떤 것도 확실한 것이 없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 누구든 상관없이 언젠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으며, 또한 다가오는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류역사상 그 누구도 죽음의 땅으로 한번 건너간 사람 이상 다시 이쪽 세상으로 건너오지 못했습니다. 물론 가끔씩 예외적인 상황이 없지 않았겠지요. 외관상으로는 죽은 듯했지만, 아직 완전히 목숨이 덜 떨어진 상황에서 사망진단을 내렸다가, 다시금 생명이 회복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라자로는 그런 상황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완벽하게 죽었습니다. 그래서 장례까지 치렀습니다. 염을 했고, 무덤에 묻었고, 바위로 봉하기까지 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시신이 부패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라자로가 소생되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죽음조차 지배하시는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돋보이는 복음입니다. 죽었던 사람도 일으키시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썩어가는 시신을 일으켜 세우시는 재창조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생명과 죽음을 좌지우지하는 힘이 부여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생명 자체이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가게 이끄시는 관문이십니다.

결국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죽음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삶의 이정표로 삼는 수밖에 없습니다.

라자로는 한번 소생했지만, 영원히 살지는 못했습니다. 인간의 한계와 조건을 뛰어넘지는 못했습니다. 20년, 30년이 흘러 그는 또 다시 죽음 앞에 직면하게 되었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흙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라자로의 소생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분은 당신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이 세상의 죽음을 물리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부활로 온 세상 사람들이 죽음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까지 선물로 주셨습니다.
매일 아침 우리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하루는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선물로 주시는 ‘작은 부활’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한 조각’입니다. 오늘 지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 하루, 감사하면서, 기뻐하면서, 찬미하면서 최대한 만끽하는 것, 그것이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께 우리가 드릴 참된 예배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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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의 시간

라자로는 얼마나 예수님을 애타게 기다렸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은 뒤 찾아오셔서 슬퍼하셨습니다. 눈물 흘리며 애통해 하셨습니다. 그만큼 라자로를 사랑하셨습니다. 라자로는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했을까요? 죽음을 앞두고 라자로는 사랑하는 예수님을 얼마나 간절히 만나고 싶었을까요?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 눈을 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라자로는 끝내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마지막 가는 길이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물론, 그 자리에는 누이들이 있었습니다. 친인척들이 와서 슬퍼했습니다. 그런데 라자로가 사랑한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라자로는 그렇게 외롭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무덤에 묻혔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기 전까지 나흘간 지독히 외로움 속에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외롭습니다.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회사 동료가 있지만 우리는 외롭습니다. 집에 와서 가족들과 이야기를 하지만 이해받기보다는 멀게 느껴집니다. 친구들과 함께 앉아있지만 각자 스마트폰을 보고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서로가 한걸음 더 앞서 나가기 위해 동료애는 찾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많은 곳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본당, 회사, 학교, 동호회, 가족, 등등. 우리의 몸은 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하지만 혼자라는 느낌은 어쩔 수 없습니다. 라자로가 마지막 눈을 감으면서까지 느꼈던 그 외로움, 쓸쓸함을 우리는 지금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가족이 없어서도, 친구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지 못하기 때문에 외롭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외로우셨습니다. 3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이 순식간에 도망가고 없습니다. 같이 죽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죽음이란 공포 앞에 모두 사라졌습니다. 겟세마니에서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은 모두 도망쳐 버렸습니다. 잡히신 뒤 이리저리 끌려다니시며 고초를 당하시고 골고타 언덕을 올라가실 때까지 제자들은 없었습니다. 공생활 동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고, 가르치시고, 돌보셨던 그 제자들이 예수님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외로우셨을까요? 얼마나 비참했을까요? 지난 3년의 세월이 제자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것입니까? 수난의 시간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배척받은 외로움의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외로우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외로움을 이해하시고 함께 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로워하는 우리에게 오고자 하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어둡고 습한 무덤에서 외롭게 누워있던 라자로를 깨우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름을 불렀을 때, 라자로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외로움, 두려움, 무서움에 떨던 라자로는 떨리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따스함이 온몸을 감쌉니다. 이 기운을 받아 라자로는 일어나고, 걸어서 그 어둡고 음산한 무덤을 나와 예수님 앞에 섭니다.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외로움, 두려움, 죽음에서 살려내 주시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해주십니다. 무덤에서 나왔지만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라자로에게 새로운 삶, 자유를 허락해 주십니다. 우리도 외로움과 두려움 때문에 제자리에만 있게 됩니다.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더 깊은 외로움으로 떨어집니다. 그런 저희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괜찮다, 한 발 내디뎌라. 내가 옆에서 잡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의 고통을 홀로 겪어내셨습니다. 당신께서 사랑하셨던 사람들이 곁에 없다는 현실을 이겨내기가 더 어려우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내고 있는 이 사순은 예수님의 외로움에 동참하는 시간입니다. 라자로가 죽어가면서, 무덤 속 죽음에서 느꼈던 그 외로움을 우리도 느껴야 합니다. 지극한 외로움에 사무칠 때,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죄 없으신 분께서 그 외롭고 무서운 죽음의 길을 왜 걸으셨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라자로의 이름을 따뜻하게 부르시고, 라자로의 묶인 몸을 풀어서 걸어가게 해 주시는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만나는 복된 주간을 우리는 보내야 합니다.

<예수회 김동일 신부>
  |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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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5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성지주일을 앞두고, 마치 부활을 연주하는 ‘전주곡’과 같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무덤에서 끌어내시고, <복음>에서는 죽은 라자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며, 당신이 주님이심을 밝힙니다. <화답송>에서는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음을, <복음 환호송>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찬미하며,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을 통하여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주님이심을 선포합니다.

오늘 이 ‘부활의 전주곡’을 들으면서, 사순시기가 생명으로 가는 길, 곧 부활로 가는 길임을 봅니다. 그리고 그 막바지에 이르러,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쓰라림보다는 감미로움이 서광처럼 비쳐옵니다.

또한 우리는 3월을 뒤로 보내며, 봄의 길목에 들어섰습니다. 봄도 또한 분명 하나의 길입니다. 사순이 부활로 가는 길이듯, 봄은 여름, 가을, 겨울로 가는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을 꽃피우고 열매 맺고, 또 다시 생명으로 피어오르는 봄의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봄길”이라는 정호승 시인의 시가 떠오릅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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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봄길’입니다. 생명을 열어주고, 부활을 가져다주는 참된 생명길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걷는 이 길에 사랑이 걸어갑니다. 이 길을 걷는 여행은 아나톨 프랑스의 말처럼,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생각의 이동’이요, 참된 생명에로의 이동이요, 사랑에로의 이동입니다.

오늘 우리는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는 이와 함께 울어주는 봄바람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둠의 동굴에 갇혀있는 이를 불러내는 봄 햇살 같은 이야기입니다. 주저앉아 웅크리고 죽어 있는 이를, 빛으로 불러내는 봄비 같은 생명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라자로의 소생이라기보다, 죽음 앞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정체입니다. 곧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당신이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이십니다. <요한복음>의 머리말에서,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라고 장엄하게 예고된 그 “생명”입니다. 곧 빛이신 생명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하신 일은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죽음의 어둠 속에 생명의 빛을 비추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생명이시오, 빛이신 까닭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를 생명의 길로 부르십니다. 참 생명에로 이동입니다. 그 길은 ‘앎’에서 ‘믿음’에로의 이동입니다.곧 ‘당신이 생명이요 부활임에 대한 믿음’에로의 초대입니다. <본문>에서 마르타는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11,22)라고 고백합니다. 마르타는 “알고 있다.”고 고백할 뿐,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11,23)라고 말씀하셔도 여전히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11,23)라고, “안다.”고만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한 것이다.”(1코린 8,2)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쩌면, 여전히 마르타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예수님을 마주하고 있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부활과 생명을 믿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믿음”을 촉구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6)

‘아는 것’을 넘어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믿을 때라야, 그 믿는 이에게 부활과 생명이 부여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생명과 부활은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사건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활은 믿음 안에서 현재의 사건이 됩니다. 그렇게 믿음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일상과 현재를 변화시킵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믿어야 하는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죽음 이후에야 얻을 수 있는 생명이 아니라, 현세와 현세를 넘어서 얻을 수 있는 풍만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는 질문에, 동문서답을 합니다.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요한 11,27)

예수님께서는 “부활이요 생명”임을 믿느냐고 물으시는데, 마르타는 “그리스도이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신원에 대한 믿음을 고백할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동굴 무덤의 돌을 치우라고 했을 때도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요한 11,39)하고 여전히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거듭 강조하시어 나무라듯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

이처럼, ‘앎’에서 ‘믿음’으로의 이동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선사하십니다. 불신과 어둠의 묻혀있는 저희의 무덤을 열어주십니다. 그리고 저희를 당신 생명의 빛에로 부르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오너라.”(요한 11,43)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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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부활을 믿게 하소서!
제 생명이 죽고, 당신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제 안에 살아계신 당신 생명을 보게 하소서!
제가 사라지고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믿음으로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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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2020년 3월 29일
  |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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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총애를 받은 라자로의 죽음과 마르타의 슬픔

우리에게도 그러하듯이 예수님께도 유난히 절친했던 가족이 있었으니, 친구 라자로와 그의 누이들, 마르타와 마리아였습니다. 본격적인 복음 선포를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노숙도 마다하지 않으셨는데, 때로 심한 허기에 시달리거나 휴식이 필요할 때는 엄청난 식욕의 소유자들인 제자들을 이끌고 그들의 집을 자주 방문하셨습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예수님을 비롯한 장정들을 위한 손님맞이의 총 책임자는 마르타였습니다. 그들이 예고도 없이 대거 방문할 때마다 마르타는 즉시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엄청나게 먹고 마셔대는 제자들을 위해 그녀는 빵을 굽고 또 구웠습니다. 하루 온종일 지지고 볶았습니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마르타는 한 사흘씩 앓아 누울 정도였습니다.

음식 솜씨도 좋고 마음씨도 착했던 마르타는 언제나 예수님과 제자단을 극진히 환대했습니다. 늘 기쁜 마음으로 주방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틈만 나면 찾아오고, 엄청나게 먹어대니, 어느 순간 마르타의 심기가 불편해졌습니다. 한번은 얼마나 힘들었던지, 마르타는 예수님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따지기까지 했습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 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루카 10,40)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그의 오빠 라자로를 각별히 사랑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요한 11,5)

그런데 한번은 마르타가 예수님의 처신에 크게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오빠 라자로가 갑작스레 병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 급히 좀 와주십사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요한 11,3)

마르타는 평소 자신의 가족이 한 마음 한 몸으로 합심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기울였던 봉사와 희생, 그간 쌓아온 각별한 친분과 우정을 생각했을 때, 만사 제쳐놓고 즉시 달려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웬걸! 아무리 기다려도 예수님께서 오지 않으셨습니다. 인연도 관련도 없는 다른 사람들은 다 치유시켜 주시면서, 보통 인연이 아닌 오빠 라자로는 끝내 죽음을 맞이하게 놔두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에 크게 실망하고 분노한 마르타는 솟아오르는 화를 겨우 눌러 참으며 오빠의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죽음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의 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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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조차 지배하는 전지전능하신 예수님

상황이 완전히 종료된 후 예수님께서 도착하신다는 말을 전해들은 마르타는 즉시 달려가서 볼멘소리로 따졌습니다. 오빠의 죽음에 대한 깊은 슬픔과 꼭 필요한 순간 적절히 개입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늑장에 대한 원망이 가득한 목소리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

그러나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굳게 결속되어 계시는 분이시고, 그분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혹시라도 그분께서 허락하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마지막 기대를 버리지 않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실낱같은 희망을 마음에 품고 예수님께 아룁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2) 오빠를 향한 마르타의 사랑이 참으로 애틋합니다. 예수님의 신원과 그분의 능력을 향한 마르타의 믿음이 참으로 깊습니다. 이런 마르타의 마음을 갸륵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외치십니다. “네 오빠는 살아날 것이다.”(요한 11,23)

그러나 아직도 예수님을 향한 마르타의 믿음은 100% 완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2% 부족했습니다. 그 결과 이렇게 말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4)

“네 오빠는 살아날 것이다”라는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라자로의 부활뿐만 아니라 종말의 부활 모두를 포함하고 있었지만, 마르타는 마지막 부활로만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종말 부활 신앙은 예수님 시대 당시 이미 군중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에, 마르타의 반응은 그러한 시대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2% 부족한 마르타의 부활 신앙을 일깨워주시고 채워주시기 위해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예수님 당신 자신이 부활의 원동력이며 부활 그 자체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은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은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한없이 부족한 우리들의 부활 신앙도 예수님께서 일깨우시고 채워주시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그분만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예수님 그분만이 우리 생의 전부임을, 예수님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임을 온몸과 마음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라자로는 적당히 죽은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죽었습니다. 그래서 장례까지 치렀습니다. 염을 했고, 무덤에 묻었고, 바위로 봉하기까지 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시신이 부패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라자로가 소생되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죽음조차 지배하시는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돋보이는 복음입니다. 죽었던 사람도 일으키시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썩어가는 시신을 일으켜 세우시는 재창조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생명과 죽음을 좌지우지하는 힘이 부여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생명 자체이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가게 이끄시는 관문이십니다.

결국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죽음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삶의 이정표로 삼는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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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신문 2023년 3월 26일 주
  |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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