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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
조회수 | 2,968
작성일 | 05.03.11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시던 말씀이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지만 사람이 되셨습니다(요한 1,1.14 참조). 하느님이신 그분이 사람이 되신 것은, 하느님 백성을 죽음의 무덤에서 끌어올리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어둠 속에 머무는 사람을 보시면 눈물을 흘리십니다.

기원전 6세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보다 자신의 뜻을 앞세우며 불의를 일삼던 하느님 백성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로 모든 것을 잃고 남의 나라로 끌려갔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일어난 결별의 동기를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죄에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없는 남의 나라에서 유배살이하는 그들은 살아 있지만 죽은 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누가 그들을 죽음의 골짜기(시편 23편 참조)에서 끌어올릴 수 있겠습니까?

바빌론 유배는 사람들의 눈에 불행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멸망과 불행을 통하여 구원과 행복이라는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 백성 개개인에게 당신의 내적 영을 부어 주시고 모든 이가 당신의 규정에 따라 충실히 걸어가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에제 36,26-27 참조). 당신 백성에게 당신의 기운을 불어넣어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불행 중에 몸살을 앓고 있는 자녀들을 못 본 체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기운을 받으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이 나라 없는 백성이 되어 서러운 나그네살이를 하고, 라자로가 깊은 잠에 빠졌듯이 삶의 고뇌를 거쳐 가야 합니다. 삶의 고뇌를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보잘것없고 약할 뿐더러 죽은 시체에 불과한 자들에게 새 영을 넣어 주십니다.

주님은 고통의 길을 영광의 길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손발이 베로 묶여 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 있던 라자로에게 죽음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도록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은 주위 사람들에게 죽었던 라자로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라”(요한 11,44)고 명령하십니다. 죽은 사람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지만, 힘든 인생길을 걸어가도록 그를 돕는 것은 주위 사람의 몫입니다.

나의 모든 선입견으로 다른 사람을 꽁꽁 묶어 움직이지도 보지도 못하게 했던 과거의 행실을 버리고 그를 풀어 주어야 합니다. 나의 모든 선입견에서 내가 먼저 해방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오늘 나는 죽음의 올무에 잡혀 있는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합니까? 죽은 라자로를 위해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예수님은 그의 딱한 처지를 보고 눈물을 흘리시고, 당신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나를 보고 또 우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 때문에 예수께서 두 번 우셔서야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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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요한 영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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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님께 기도하고 청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라자로를 다시 살려주시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켜 주십니다. 주님은 죽은 다음에서야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우리 각자는 어릴 때부터 나름대로 하고 싶었던 고귀한 뜻과 이상이 있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건실하고 또 이웃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사람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상과 뜻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아직 안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이상과 뜻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듯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우리가 영원히 돌아가지 못할 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낙인을 찍는다 해도 또 우리 자신도 멀리 떨어져서 돌아가지 못할 것처럼 느낀다해도 주님은 우리가 원하는 길로 우리를 되돌이켜 주실 수 있습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주님,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39)하고 말씀드렸지만, 주님은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40)고 말씀하십니다. "돌을 치워라"(39)하신 주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이루실 수 있는 주님의 권능을 믿고 청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을 들어보십시오. "라자로야 나오너라."(43) 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우리를 막고 있는 모든 악습과 허물 그리고 세상의 장애를 없애주시는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주님은 주님께 나아가는 우리를 모든 장애로부터 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44)

우리는 주님께 기도하고 청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청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가 청하고 바라는 것을 들어주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주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걱정하거나 조바심 내지 말고 꾸준히 그리고 진지하게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그것이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주님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십시오. 세상이 우리를 향해 무어라고 하든, 또 내가 설사 주님의 뜻을 이루기에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하고 불가능하게만 보일지라도 주님을 믿고 주님께서 일러주시고 보여주시는 길로 걸어나가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모든 장애를 없애주시고 새 인생의 빛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5-26)

심흥보 신부
  |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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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끝자락에서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납니다”(요한 11,39). 분노가 담긴 절규에 가까운 마르타의 외마디 탄식이, 되돌려놓을 수 없는 죽음의 차가운 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랑도 우정도 그 어떤 인간적인 친분도 죽음 앞에서는 더 이상 힘쓸 수 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다니! 죽음 앞에서 큰소리칠 자 누구이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 과연 누구입니까? 그렇다면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죽음이란 것이 이렇게 우리 모두를 절망의 끝자락으로 내몬다면 우리에게는 과연 희망이란 없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은 라자로 소생 이야기를 통해 해결의 실마리가 없을 것 같은 그러한 질문에 명쾌한 답을 줍니다. 그 답은 한 마디로 예수님을 생명의 주관자로 믿는 데서 찾아집니다. 물론 믿는다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마리아, 마르타도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32)라고 말할 정도로 오빠의 죽음 앞에서는 실망과 좌절의 고통스러운 순간을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의구심과 주저함의 참담한 순간을 겪어 내고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생명의 주관자로 맞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죽은 라자로를 되살린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몸소 사시게 될 그분의 부활을 예표(豫表)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라자로에게 생명을 되돌려 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마르타와 마리아가 흘려야 했던 고통의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두 자매의 가슴을 짓누르던 깊은 절망과 좌절을 몰아내고 그들의 마음 속에 희망의 불을 밝혀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자로가 다시 얻은 생명은 일시적으로 지속되게 될 한시적인 생명에 불과합니다.

그 반면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을 믿는 우리 모두가 그분의 능력에 힘입어 살게 될 영원한 생명의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불멸하는 생명의 힘’(히브 7,16)은 세례의 은총을 통해 이미 우리의 마음 안에 심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지금 그 생명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어떠합니까? 매순간이 의구심과 의혹으로 점철되고 두려움과 불안감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고통의 연속이 아닙니까? 게다가 그 불안의 끝자락에 죽음이라는 거대한 걸림돌이 우리의 희망을 가로막고 서 있으니 탄식은 갈수록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리아와 마르타처럼 의구심과 두려움 때문에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갈등의 지평선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희망을 받쳐 주는 힘이 무엇인지 그리고 누가 진정 퇴색치 않는 희망을 안겨 주어 절망의 끝자락이 좌절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살아가는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줄 수 있는 지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바로 지금이 우리의 마음을 열어 결단해야 할 때입니다.

안 병철 신부
  |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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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캠퍼스에 그려지는 영혼의 붓질

꽃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나 모아진 봉우리로 말을 걸어오고 초록은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대지를 서서히 물 들여갑니다. 봄은 그렇게 우리 마음에 꽃씨를 뿌리고 연초록의 붓질로 밑그림을 그려가지만 마음의 캠퍼스 한 곁에서 솟구치는 애잔함만큼은 어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연초록의 붓질도 봄의 토양 속에 자리한 뭇 생명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기 때문일 겁니다.

봄은 그렇게 생명이란 단지 살아 숨 쉬는 이들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의 손길 위에 놓여져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아마도 사순절이 영원의 캠퍼스에 그려지는 영혼의 붓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이기도 할 겁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예수님은 사랑하시던 나자로를 다시 살리십니다. 죽은 나자로의 부활이 단순한 기적으로만 다가오지 않음은 흔하게 볼 수 없는 예수님의 눈물과 더불어 나자로를 향한 진정한 사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인간에게 죽음은 사랑할 수 있는 기회의 영원한 박탈이며 동시에 사랑받을 수 있는 기회의 영원한 상실입니다.

하지만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앞에서는 영원한 단절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더욱이 사랑하는 이들 마음속에서는 영원한 단절이란 있을 수 없음을 확인시켜 주는 사건이 나자로의 부활입니다.

우리 신앙이 성인들의 통공을 말하고 하늘과 땅, 죽은이와 산 이의 통교를 믿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사랑하는 이들 마음속에서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것이 생명인 것처럼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신 하느님의 바다에 담겨질 때,우리 사랑의 원천적인 기회 박탈은 없으리라는 믿음이 우리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밀물이든 썰물이든 바닷 속에 머무는 한, 물의 성질이변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생이든 죽음이든 하느님의 손길 위에 자리하는 한 영원한 생명의 바다에 자리합니다. 해서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한 것은 없다고들 하지만 죽음보다 더한 것은 하느님을 멀리하고 그분을 떠나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 참 신앙이고 참된 믿음이기도합니다.

연초록의 붓질로도 다 지울 수 없는 뭇 생명의 흔적처럼 죽음조차 영원히 묻어버릴 수 없는 것이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임을 알기에, 오늘도 우리 믿음은 영원한생명의 캠퍼스에 그려지는 영혼의 붓질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눈물이 물감이 되어 부족하고 허물 많은 죄인이지만 아름답게 채색되어지는 우리이기를 기도합니다.

‘절실한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영원히 살 것처럼 일하고 내일 죽을 것처럼 기도하라’는 말처럼 간절함으로 두 손 끝이 모아지는 사순절입니다.

권철호 다니엘 신부
  |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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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로야, 나오너라

가난하지만 정의감 넘치는 법학도 라스꼴리니코프가 전당포 주인 노파와 전당포에 일을 보러온 노파의 동생 을 살해합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물건과 돈을 착취 하는 노파가 세상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기생충과 같은 존재이기에 없애버린 것이라며 자신이 저지른 살인 행위를 정당화시킵니다. 머리로는 자신의 행동이 옳았노 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던 그였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속삭이는 양심의 소리에 그는 괴로워하기 시작합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자신을 살인자로 취급하는 듯 싶더니, 급기야 경찰의 추적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 상황 보다 그를 더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이런 그 앞에 자기희생 의 삶을 살던 창녀 소냐가 나타나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그녀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성경을 읽고 있던 소냐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자신의 범죄를 고백 하게 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소냐가 읽고 있던 성경 은 그가 살해한 노파의 동생이 그녀에게 준 것이었고, 그 때 읽던 성경 대목이 바로 오늘 복음말씀인 ‘라자로의 부 활’ 이야기였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중 일부분입니다.

작가는 소설 속 주인공이 자기 죄를 고백하는 대목에서 왜 라자로의 부활 이야기를 꺼냈을까요? 주인공이 살인을 저지른 순간 그 자신도 죽었다는 강한 자의식을 내 비치는 한편, 라자로의 부활 이야기를 통해 그 또한 부활 할 수 있으리라는 영감도 함께 얻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라는 부름과 함께 “살인범아, 네 아집과 편견, 불안과 공포를 떨쳐 버리고, 네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라.”라는 내면의 소리에 굴복하여 스스로 죄를 고백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성경 속 라자로의 부활 이야기는 죽었던 인간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확증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며, 당신께서 친히 그 모습을 보여 줄 것이라는 암시도 함께 전합니다.

우리가 육체적인 죽음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영혼의 죽음, 정신의 죽음입니다. 내가 매일 범하고 있는 죄악들, 나의 온갖 악습과 사악한 욕심들, 목을 조르듯 나를 옭아매고 있는 갖가지 굴레들, 제힘으로는 도저히 극복되지 않는 내 안의 더러운 찌꺼기들. 이런 것들이 바 로 영혼의 죽음이며 정신의 죽음입니다. 가난한 이웃의 눈물을 외면한 채 제 뱃속 채우기에 급급한 사람들로 가 득 찬 사회, 이기심과 탐욕이 난무하며, 윤리와 도덕이 땅에 파묻히고, 인정과 사랑이 메말라 버린 사회 또한 죽 음의 사회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을 자아내게 했던 라자로의 무덤처럼, 이미 죽어버린 정신과 영혼이 묻혀 있는 무덤과도 같은 사회인 셈입니다.

자신마저 속이며 애써 내면의 소리를 외면한 채 절망 과 죽음의 나락에 빠져있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구원 의 소리, 희망의 소리를 들려주십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일어 나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를 무덤에 서 구해줄 것이다.

<서울대교구 차원석 신부>
  |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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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순절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올해 전례력에서 사순 주일의 말씀의 전례 흐름을 살펴보면, 첫 주일에는 사순 시기를 시작하며 우리의 죄를 돌아보고 새롭게 회개하라는 내용을 들었고, 두 번째 주일에는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내가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는 말씀과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이야기를 통해 하느님께서 인도해 주실 ‘새로운 존재’로 변모해가라는 촉구의 내용을 들었으며, 이어서 우리의 회개와 변화의 여정을 동반해 주시고 당신 자신이 우리 여정의 목적지이기도 한 그리스도는 바로 ‘생명의 물’이시고(사순 제3주일),‘빛’ 이심을(사순 제4주일) 들었습니다.

오늘 사순 제5주일에는 그리스도께서 바로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드러내는 표징, 곧 라자로의 부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앞서 독서의 내용들은 부활과 생명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독서에서는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라는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씀을 들었고, 2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을 들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대목에서 ‘부활 신앙’을 더욱 강조하기위해 ‘하느님께서’라고 간단히 표현하는 대신, 굳이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라고 표현하십니다.(로마 8,11) 또 같은 절 안에서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라고 비슷한 표현을 한 번 더 사용하시는 까닭도 바로 ‘부활 신앙’을 강조하고자 함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부활과 생명이라는 주제를 배경으로 독서를 들은 뒤 듣게 되는 라자로의 부활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드러내는 표징인 동시에, 우리가 장차 부활하여 새 생명을 누리게 되리라는 점을 예표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생명이요 부활’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라자로를 살리신 것이 역설적으로 최고 의회가 그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게 된 배경이 되고, 더 역설적으로는 그 예수님의 죽음이 결국엔 우리 모두의 영원한 새 생명을 위한 부활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구원의 깊은 신비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이 구원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라자로의 부활은 미래 우리의 부활의 예표일 뿐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손발이 감기어 묶여 있는’ 우리의 내적모습을 향해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묵은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말씀이기도 함을 묵상케 합니다.

깊어가는 이 사순절, 우리를 내적으로 옭아매고 있는 것들, 우리가 거기서 풀려나와야 할 ‘죽음’은 무엇인지 묵상하며 참 생명, 참 부활을 준비하는 한 주간을 살아봅시다.

▦ 서울대교구 정순택 베드로 주교 : 2017년 4월 2일
  |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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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구약성경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인장(印章)처럼 나를 당신의 가슴에, 인장처럼 나를 당신의 팔에 지니셔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 그 열기는 불의 열기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한 불길이랍니다. 큰물도 사랑을 끌 수 없고 강물도 휩쓸어가지 못한답니다. 누가 사랑을 사려고 제집의 온 재산을 내놓는다 해도 사람들이 그를 경멸할 뿐이랍니다.”(아가 8,6-7) 모름지기 사순 시기는 우리를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때입니다.

1. 내 백성아, 너희를 데려가겠다(에제 37,12 참조)

‘수단의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일치’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난다”고 말씀하시면서, “일치란 단순히 말과 생각의 일치가 아니라, 내 삶의 짜깁기와 다른 사람 삶의 짜깁기가 일치하는 것으로서 나의 삶이 다른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고 깨우쳐주셨습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를 끌어내어,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놓겠다”(에제 37,12-14 참조)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얼마나 이스라엘을 끔찍이도 사랑하시는지 헤아릴 수 있습니다.

2. 여러분의 죽을 몸이 다시 살 것이다(로마 8,10-11 참조)

프랑스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게 ‘너는 (내 안에서)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라고 통찰했습니다. 사실 인간의 경험을 통해서 볼 때에, 사랑은 그 자체 안에 이미 영원에 대한 향수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사용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하느님의 영(靈)이 ‘죽을 몸’, 곧 ‘죽음을 향해 있던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셨다”(로마 8,8-11 참조)고 선포하십니다. 참으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신실하신 사랑은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고 밝히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3.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요한 11,36 참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인간에게 사랑이 계시되지 않을 때, 인간이 사랑을 만나지 못할 때, 사랑을 체험하고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할 때, 사랑에 깊이 참여하지 못할 때, 인간은 자기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남게 되며 그의 생은 무의미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던 라자로의 죽음 앞에 마음이 북받치시고 눈물을 흘리셨다”(요한 11,32-36 참조)고 전합니다. 여기서 라자로는 우리의 예형(豫形)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주님께서는 이른바 ‘물질주의와 상대주의와 무관심주의’라는 무덤 속에 갇혀있는 우리에게 크게 외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리 나와라.”(요한 11,25.43 참조)

4. 너는 믿느냐?(요한 11,26)

교황청 성서위원회는 ‘라자로의 부활’(요한 11,1-44)처럼 예수님께서 행하신 ‘예외적인 행위’에 대하여 “증명되고 기록된 표징(表徵, semeia)들은 예수님에 대한 막연하지 않고 명백한 구체적 믿음, 따라서 그분에게서 오는 생명으로 인도할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합니다.(「성경의 영감과 진리」 참조)

교형자매 여러분, 주님께서는 ‘죽을 몸’인 우리를 ‘부활과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부디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영원히 살게 하시는 주님의 영으로 충만한 삶이 되시길 빕니다. 아멘.

▦ 서울대교구 정연정 신부 : 2017년 4월 2일
  |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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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라자로야! 나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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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는
예수님과 아주 가까운 사이인
라자로, 마르타 그리고 마리아의
3남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그 자매로부터 라자로가 병이 들어 위급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셨다. 평소 같으면 당장 달려가 고쳐주셨을 예수님께서 왠지 그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르시는 바람에 결국 라자로는 죽었다. 그리고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나자 비로소 베타니아에 있는 그들의 집을 찾아가셨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서 예수님을 만나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주실 줄 압니다”(요한 11,21-22)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아 라자로가 죽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마르타는 “지금이라도…”라는 말로 곁에 계신 예수님께서 무엇인가 해주시리라는 희망을 두고 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끝난 상황이지만 원하시면 지금이라도 당신의 일을 이루실 수 있고, 모든 상황을 역전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온전히 담고 있는 믿음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고백을 들으시고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23)고 말씀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4)하였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만난 방금 전에 “지금이라도”라고 말했는데, 예수님께서 라자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시니 ‘지금, 여기서’라는 의미의 신앙 고백은 사라지고 “마지막 날 부활 때에”라는 말로 ‘다시 살 것’에 대한 현실적인 의구심을 드러내고 있다.

마르타는 정녕 부활을 믿으면서도 그 부활의 믿음이 지금 이 순간 현실화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은 별로 없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무덤을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도 다르지 않았다.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했고 부활하실 것을 믿었음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단지 동산 지기인 줄 알았다. 그녀도 부활의 믿음은 충만했지만, 현재 ‘지금, 여기서’ 그 부활을 볼 것이라는 확신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앞으로 일어날’ 신앙이 아닌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신앙을 갖도록 요구하신다.

‘먼 훗날 그렇게 해주시겠지!’라는 믿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일과 영광이 드러나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원하시는 것이다.

자매를 데리고 무덤에 이르신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며 다시 한 번 그들의 믿음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마르타가 예수님의 심정도 모른 채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요한 11,39)라고 말하며 현재의 절망적인 상황만 바라보는 나약한 믿음을 또다시 보이고 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고 질책하시며, 현재 상황만을 보면 절망적일 수밖에 없지만, 하느님을 보면 어떠한 기적도 이루어 낼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신다.

그 믿음이 무엇인가?
그것은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고
무덤을 향해 힘 있게 외치는 믿음이다.

앞으로 부활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음을 고백하는 믿음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기보다는,
상황을 극복하는 살아있는 믿음으로
부활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는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토서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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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임상만 신부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3월 29일
  | 03.28
528 45.2%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질문은 3가지 차원에서 성찰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달마’입니다.

달마에게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깨달음)을 얻고자하는 의지입니다. 무엇(깨달음)을 주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예전에 교리문답은 이렇게 묻고 답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왔습니다. 남자와 여자로 왔습니다. 사는 곳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생각도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현상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본질을 아는 것입니다. 달마가 그 이유를 알았다면 달마가 가는 곳은 모두 동쪽(깨달음)일 것입니다. 반대로 그 이유를 몰랐다면 수십 년을 걸어가도 동쪽(깨달음)에는 도착할 수 없을 겁니다.

둘째는 ‘동쪽’입니다.

동쪽은 방향을 의미합니다. 방향은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기준은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를 알면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아! 어디에 있느냐?’ 아담은 어디를 가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묻습니다. ‘아담아! 어디에 있느냐?’ 우리 삶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기꺼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리석은 성모상이 되기도 합니다. 포도주는 사제의 축성으로 성혈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지 않으면 기꺼이 버릴 수 있습니다. 돈 때문에 친구를 배신한다면 돈을 버려야 합니다. 권력 때문에 양심을 속인다면 권력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방황하는 이유는 방향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방황하는 이유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삶의 원칙과 기준이 뚜렷한 사람에게 장소는 피었다가 지는 꽃과 같습니다. 시간은 공간보다 더 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간에 더 집착하기 마련입니다. 뿌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까닭’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습니다. 선이 있으면 악이 있습니다. 생하는 것이 있으면 멸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두 개의 깃발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신앙인은 행동하기 전에 어느 깃발 아래 있어야 하는지 선택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행동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돌로 쳐서 죽인 카인의 행동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발자국을 보면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겸손과 온유함의 발자국이 남았다면, 믿음과 사랑의 발자국이 남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깃발을 향해 가고 있는 겁니다. 시기와 질투의 발자국이 남았다면, 욕망과 이기심의 발자국이 남았다면 우리는 사탄의 깃발을 향해 가고 있는 겁니다.

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연민’입니다.

죽은 라자로에 대한 연민이 있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와 마리아에 대한 연민이 있으셨습니다. 오천 명에게 빵을 먹이신 것도,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것도, 중풍 병자를 걷게 하신 것도,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것도,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도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에서 비롯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신 것도 연민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다면 이렇게 죽어가는 모든 것을 품어주는 연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연민의 마음이 가족, 이웃, 국가의 벽을 넘어서 함께한다면, 연민의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을 넘어서 원수와도 함께한다면 세상은 기쁨과 평화가 넘쳐날 것입니다.

둘째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회개하고 기쁜 소식을 믿으십시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을 ‘산상설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 가난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나라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나고,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춤추고, 늑대와 어린양이 같이 노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셋째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라자로야 나오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무한대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지 않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짓과 욕망의 동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의 동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의 감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던 제자들은 근심과 걱정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가슴이 뛰었고, 살아있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다락방이라는 동굴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 다릅니다. 영원한 생명은 의미와 존재의 차원입니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친구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며 우시고 영원하신 하느님으로서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으며 인류를 자비로이 굽어보시고 거룩한 신비를 통하여 새 생명으로 이끌어 주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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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2020년 3월 29일
  | 03.29
528 45.2%
무엇이든 먼저 포기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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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어떤 연예인이 한 말이 생각이 납니다. “포기는 김치 담글 때나 쓰는 말이다.” 포기라는 말은 배추를 셀 때나 쓰지, 자신의 삶을 단념하고자 하는 의사 표명하는데 쓸 일은 없고, 그런 자조적인 생각을 할일조차 없으리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연예인의 말에 여러분은 얼마나 동의하십니까? 옛말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을 도와 성공하게 한
다.’라는 말입니다. 또, “감나무 밑에 누워 홍시 떨어지기를 기다린다.”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노력은 하지 않고 기회만 보고 요행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와 “감나무 밑에 누워 홍시 떨어지기를 기다린다.”는 속담은 서로 정반대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말에 따라 살아오셨습니까? 가끔 신자들 중에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신자들을 보게 됩니다. 물론 신앙심이 깊어서 그러실 수도 있겠지만 제가 아는 하느님이라면, 또 길진 않지만 감히 제가 살아온 삶에 비추어 본다면 그분들이 뜻하신 바가 이루어질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만드셨다는 것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사람은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른 피조물은 노력한다 해도 스스로 가지고 있는 능력 이상을 발휘할 수 없지만 사람은 스스로 노력 한다면 본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 이상의 잠재 능력을 얼마든지 발휘할 수 있고, 옆의 사람과 서로 연대하고 협동해서 본인이 생각한 것 이상의 능력을 공유할 수 있고, 나눌 수 있다고 믿으며, 그런 경우를 실제로도 많이 봐 왔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을 봐도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 민족의 정체성과 신앙심을 잃지 않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에제키엘 예언자가 대단한 예언자라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민족이 이미 사라져버렸다면, 하느님에 대한 신앙심을 잃어버렸다면 그의 예언이 이루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 이 세 오누이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스스로 저버렸다면 마르타와 마리아가 살면서 예수님을, 라자로가 죽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살면서 아직 또는 죽어서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서 은총을 받지 못하고, 영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삶과 죽음의 굴레에 스스로를 가두어 두었기에 예수님을 만나뵐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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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하성용 유스티노 신부
2023년 3월 26일 주보
  | 03.25
528 45.2%
우리는 살면서 주위의 눈치를 많이 봅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해도 되는가 하는 탐색 외에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과 같이 보조를 맞추고 함께 살기 위해 눈치를 봅니다. 그렇게 또 눈치보고 사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려, 이제는 마음의 병처럼 나를 망설이게 하고 주저앉게 합니다. 그런가 하면, 사랑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사랑하지 못하는 내 모습과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하는 나의 또 다른 모습이 마치 영혼의 병처럼 이중의 십자가를 안겨 주는 듯합니다.

실제로 또 나이가 들면서 여기저기 아파오고, 또 조금이라도 무리하면 마치 약속이나 초대라도 받았다는 듯이 찾아오는 감기나 몸살 같은 몸의 이상 증상들이 우리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도록 경고합니다. 이러 저러한 몸과 마음 그리고 영적인 일들과 사정들이 우리가 주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영적 전선에 장애와 벽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장애와 벽 같은 한계에 갇혀 있다면 그 장애와 벽은 우리에게 한계가 되겠지만, 그 장애와 벽을 극복하고 넘어서면 그것은 우리를 새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라자로는 죽음이라고 하는 인간의 대표적인 한계에 갇힙니다. 그리고 그 한계에 갇힌 라자로의 주변인들, 특히 가족인 마리아와 마르타는 커다란 슬픔에 잠겨 심히 아파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 즉시 달려가시지 않고, 라자로가 그 병에 완전히 갇혀 죽을 때까지, 그리고 마치 그 가족들의 슬픔이 깊어질 수 있을 만큼 깊어질 때까지를 기다리시기라도 하듯이 뜸을 들이셨다가 라자로를 찾아가십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요한 11,4)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집을 찾았을 때 이미 라자로는 죽어 무덤에 묻혔고, 그 가족은 눈물에 잠겨 있었습니다. 이 한계 상황에서 마르타는 예수님께 한탄하듯 하소연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21절)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곁에 계셨으면 하느님께 기도하여 자기 오빠를 죽지 않게 해 주셨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빠 라자로가 죽은 후에야 도착하신 예수님께 아쉽고 야속한 마음을 담아 하소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마르타의 원망에 대해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23절) 주님께서는 마르타가 그저 사람이 죽기 전에, 사람의 살아 생전에 병에서 구해줄 수 있는 의사이거나 예언자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예수님을 의사나 예언자를 넘어서는 우리 삶의 주인으로 제시하십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을 주님으로까지 믿지 못하고, 그저 사람이 그 생을 다하고 죽은 후, 마지막 날 하느님의 심판 때에 죽은이들이 다시 살아나리라고 했던 유다교의 믿음에만 충실한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24절) 라고 대답합니다.

주님께서는 정확히 알아듣지 못한 마르타에게 재차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5-26절) 그리고 물으십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26절)

그제야 마르타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게 되고 주님께 신앙을 고백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7절)

그러나 아직 다른 이들은 주님을 믿지 못하고, 라자로의 죽음만을 안타까워하며 울고 있습니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33절) 라고 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직접 보여주시기라도 할 양으로 그들에게 묻습니다.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34절) 그들은 절망적으로 대답합니다. “주님, 와서 보십시오.”(34절)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답답해서 그런지, 라자로를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동하셔서 그런지, 사랑하는 라자로가 죽음에 갇혀 무덤에 묻혀있는 모습이 안쓰럽고 불쌍해서 그런지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36절)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엉뚱하게도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주실 수는 없었는가?”(37절) 라고 하며 빈정거리듯 말합니다.

복음사가는 반신반의하며 친지가 죽었다는 사실에만 몰두하여 전혀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는 그들의 대응을 바라본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38절) 라고 전합니다. 급기야 예수님께서는 “돌을 치워라”(39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머리와 말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7절) 라고 고백했지만, 아직 마음으로는 아니 현실에서 그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자신의 오빠를 다시 살려주시리라는 사실을 상상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결과적으로 믿지 못하는 마르타가 예수님을 제지합니다.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39절)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시면서도 부드럽고 강력하게 마르타를 일깨워 주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40절) 드디어 사람들이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치웠습니다.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머리와 말로만 예수님을 믿고 있는 마르타와 추종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다 죽고 난 저 마지막 날, 심판의 날, 부활의 날 때가 되어야만 이루어질 뿐이지 과학적 진리라고 하는 현실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재생의 신비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래서 그들이 믿게 하기 위해서 표징을 보이는 것이오니 아버지께서 들어주십사 하고 청합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41-42절) 아버지의 응답에 힘입어, 아니 아버지와 온전히 일치해 있는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내려주신 권능에 힘입어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43절)

그러자 죽은 라자로가 다시 살아나서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옵니다. 그러자 아직도 그를 묶고 있는 수의들을 걷어 내어 주라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44절) 그제서야 마리아와 마르타 자매 그리고 죽었다고만 생각했던 라자로를 문상 왔던 친지들과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게 됩니다. 이상이 오늘 복음에서 살펴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라자로의 이야기입니다.

그럼 오늘 다시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서 헤아려봅시다. 우리가 알면서도 또 하고 싶으면서도 주님께서 바라시는 좋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우리의 미련이 크거나, 지금까지 해왔던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것을 실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그러한 미련과 두려움을 안겨주는 것을 영적으로는 죄악 또는 죄악의 지배 아래, 죄악의 노예 상태에 놓여있다고 하며 그것을 빗대어 우리의 삶 속에 죄악의 뿌리가 그처럼 깊이 박혀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죄악의 뿌리를 다 뽑아내고 희망도 없는 이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몰이해와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이해와 사고방식을 깨우쳐 주고 치워줄 신앙의 형제자매인 교회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마치 사람들의 눈에는 죽어 무덤에 묻힌 라자로를 다시 살리기 위해 무덤을 막았던 돌을 치워줄 가족과 친지들이 필요했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라자로가 다시 살아나 그를 묶었던 수의로 대표되는 우리 삶의 거품들과 껍질들을 벗겨줄 신앙의 형제 자매들인 교회 공동체가 필요하고, 그 신앙의 형제 자매들인 교회 공동체가 바로 여기 앉아 있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 신앙의 형제 자매인 교회 공동체의 역할은 바로 죄악에 묶여 있는 형제 자매들을 주님 말씀의 힘으로 되살리도록, 그러기 위해 주님께 나아가 주님 말씀의 힘으로 새로 태어나도록, 그를 막아 놓았던 장애와 돌을 치워주는 일이며, 신앙 안에서 새로 (태어)났을 때 그에게 신앙 안에서 더욱 더 앞으로 성장하고 성숙해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일입니다.

그런가 하면 죄악에 묶여 있는 이는 우리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르타처럼 머리와 말로만 주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고자 결심을 하고 실제로 실천해 나갈 때 새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 때 비로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5-26절) 라는 말씀이 라자로에게서처럼, 지금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가운데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 하느님께서 자유롭게 살도록 창조하신 여러분을 죄악에 묶어 놓고 있는 장애는 무엇입니까? 어떤 장애와 죄악이 여러분의 자유를 구속하고 선행을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죄악의 뿌리에서 헤어나 주님의 영광스러운 새 생명의 빛으로 나아오도록. 부활이요 생명이며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를 영원히 죽지 않고 살리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43절)

그리고 신앙 안에서 새로 태어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신앙 안에서 죄악의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 묶여 있는 형제 자매들을 구하러 나가라고. 형제 자매들을 사로잡고 있는 허망한 꿈과 그릇된 취득과 분배방식이라는 “돌을 치워라.”(39절) 그리고 그를 묶고 있는 꺼풀을 벗겨 “그를 풀어주어 걷게 하여라.”(44절) 라고 초대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죄악과 세상의 죄라는 어둠 속에 갇혀 있다고 여기신다면,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헤어나고 싶다면, 주님을 향해 희망의 눈을 뜨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장애에서 해방되어 다시 주님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장애에서 벗어나 여러분과 같은 장애로 헤매는 여러분 친지들의 돌을 치우고 풀어주어 걸어가도록 주님께 청하고 도와줍시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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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그 심흥보 신부
2023년 3월 26일
  |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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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토론토에 신문홍보를 가면서 저를 기억하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제가 18년 전에 토론토에서 3년간 지냈기 때문입니다. 한맘 성당 신부님은 저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18년 전에 신부님은 제게 주일 저녁미사를 부탁하였습니다. 저는 2년 동안 주일 저녁미사를 도와 드렸습니다. 당시에 신부님은 제게 차를 빌려주었습니다. 뚜벅이었던 제게 차가 생긴 것은 마치 애벌레가 고치를 열고 나비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차를 타고 성당으로 미사를 갔고, 여행도 다녔습니다. 이번에도 신부님은 사제관에서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눈이 많이 내려서 신문홍보를 하지는 못했지만 신부님은 다음 기회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다음에는 꽃피는 봄에 오라고 하였습니다. 반찬가게 하였던 자매님, 아이스크림 가게 하였던 형제님도 저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기억 속에 머물러 있던 분들을 다시 만나니 반가웠습니다. 그때 미사 복사를하던 소년은 결혼해서 가장이 되었습니다. 같은 신앙 안에 있기에 다시 만나도 반가웠습니다.

지난 2021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연해주로 이주한지 100년 만에, 카자흐스탄에 묻힌 지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운구하는 수송기가 대한민국 영공을 들어올 때였습니다.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 편대가 수송기를 호위하면서 이렇게 환영하였습니다. “홍범도 장군님의 귀환을 환영합니다. 이제부터는 대한민국 공군이 호위하겠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먼 이국땅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던 홍범도 장군이 생각났습니다. 대한민국은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실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2021년 국군의 날에 고국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했다. 대개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정신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큼은 남아 존재하고 있으니, 이것이 통사를 서술하는 까닭이다. 정신이 존속해 멸망하지 않으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으리라.”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기억은 우리 민족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우리가 미래로 나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2000년 동안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였고, 기억한 이 말씀을 성체성사를 통해서 행하고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2000년 전에 행하셨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체성사는 2000년 전에 행하셨던 ‘최후의 만찬’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제가 축성하는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우리에게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신앙은 기억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기억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라고 하셨습니다. 라자로는 죽은 지 삼일이 지났습니다. 사람들은 라자로가 이미 썩어서 냄새가 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라자로에게 무덤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라자로는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게도 “가브리엘아, 이리 나와라.”라고 하십니다. 근심과 걱정의 무덤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욕망과 불평으로 악취가 나는 무덤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게으름과 나태의 무덤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근심과 걱정 속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가 욕망과 불평 속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가 게으름과 나태 속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의 영혼은 이미 썩어가고 있으며, 우리가 머무는 이곳은 이미 무덤입니다. 우리가 “라자로야, 이리 나오너라.”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래서 주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부활의 약속에서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길목임을 믿고 위로를 받습니다. 부활 신앙만이 우리 인생살이의 진정한 힘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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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2023년 3월 26일
  |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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