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가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528 45.2%
[안동] 생명의 삶
조회수 | 2,552
작성일 | 05.03.11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생명의 삶을 위해 애쓰시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한 주간 열심히 사셨지요? 우리 농민들에게는 지금이 한해의 농사를 잘 짓기 위해 한창 준비를 하는 때입니다. 잘 준비하셔서 풍성한 수확을 거두십시요. 학생들에게는 지금 이 시기가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때입니다. 갓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은 각자의 대학과 학과에서 열심히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겠지요. 올해도 여지없이 입시로 인해 홍역을 치루었습니다. 너나할 것 없이 대부분의 학생들은 적성과는 관계없이 자신의 성적에서 취업이 잘 될 수 있는 대학과 학과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대학은 의과대학이었습니다. 의사가 되어서 돈과 명예도 가지고 편안한 생활을 하겠다는 것이겠지요. 이런 부모와 학생들의 선택을 누가 잘못되었다 하겠습니까? 아니 의사가 되어 인술(仁術)을 펼치겠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밀어주어야 하는 일입니다. 갈수록 사람들은 각종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없었던 병들이 점점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는 삶, 자연을 거스르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살리는 일은 그 어느 일보다도 더 가치 있고 중요한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만큼 의사가 되려는 학생에게 격려해줌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제발 인술을 펴는 의사가 되라고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 중에 한 가지는 오래 살고싶은 것입니다.

3대 거짓말 중에 하나가 어르신들이 '빨리 죽어야지'하는 말이라니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음직 합니다.

팔순 어르신에게 '사실만큼 사셨으니 이제는 그만 돌아가셔도 되겠습니다'라고 하면 단번에 얼굴에 섭섭한 기색을 띄시며 다시는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물며 오늘날처럼 물질의 풍요를 마음껏 누리며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때에는 그 욕망이 더 커지겠지요. 팔십도 더 이상 오래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구십, 백세까지 아니 그보다 더 오래 라도 살수만 있다면 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살고 죽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의술이 아무리 발달되어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함을 드러내고 맙니다. 살고 죽는 것은 오로지 한 분이신 하느님께 속해 있습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도 거두어 가실 수도 또 영원히 살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사랑했던 라자로를 죽음에서 살리십니다. 이는 당신이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될 것임을, 그리하여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도 당신처럼 부활 할 수 있게 됨을 미리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빠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누이 마르타에게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는 말씀으로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십니다. 이에 앞서 마르타에게 또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당신을 믿고 그 믿음대로 사는 사람은 예수께서 살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죽었더라도 영원히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희망입니까?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하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죽음의 문제를 의술로는 해결할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시원하게 해결해주실 수 있으십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삶을 나의 삶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생명의 삶을 우리의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과 이웃을 죽이고 부패시키는 삶이 아니라 살리는 삶, 세상도 살고 이웃도 살고 나도 사는 상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삶을 받아들임은 나눔의 삶,
상생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할 때 예수께서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실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한 주간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생명의 삶을 나의 삶으로 열심히 살아갑시다.  

-------------------------------------------------------------------

안동교구 배인호 베드로 신부
528 45.2%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레이건이 대통령 선거유세를 할 때(1979년) 한 노파가 소리쳤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되면 나같은 노인들을 잊지 말아요." 레이건이 대답했습니다. "잊을리가 있겠습니까? 나도 여러분들처럼 노인의 한 사람인데요." 그보다 더 확신을 주는 대답은 없습니다. 나도 당신들과 같은 부류에 속해 있다는 말은 당신들의 처지와 요구와 필요를 몸소 체험하기 때문에 잘 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인간의 평범한 모습으로 나귀를 타고 오시는 하느님은 "내가 너를 잊을 리가 있겠느냐? 나는 너희 속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인간을 무덤에서 생명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주인공인 마리아와 마르타, 라자로 세 남매를 통해 당신이 어떤 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죄녀라고 소문난 마리아의 향유로 당신의 발에 도유와 입맞춤, 참회의 눈물로 씻음과 고운 머리칼로 닦아 드리는 한 여인을 향한 사랑의 말씀, "용서를 많이 받았으니 많은 사랑을 받았다."하신 예수님!

한 여인의 정성으로 마련한 음식을 받으시고 그 집에 머무시며 인간의 정을 함께 나누셨던 예수님! 병중에 있는 그 여인의 오빠를 치유해주시고 방문해 주시는 예수님!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난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는 너무나도 인간적이신 예수님! 돌무덤 안에 있는 주검 앞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기도한 후 무덤을 향하여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라고 외치시며 죽은 나자로를 소생시키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타의 신앙고백을 통해 당신의 존재를 계시하십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라고 마르타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마르타가 주님께 청하는 가장 훌륭한 기도입니다. 주님은 이 고백을 통해 당신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께서 라자로를 살리시듯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임을 밝히시는 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중에 많은 기도를 드립니다. 가장 훌륭한 기도는 신앙고백이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주님은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한 신앙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기도이며, 베드로는 이 기도로서 천국의 열쇠를 받은 으뜸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미사 중에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영원한 삶을 믿습니다. 아멘."하고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우리가 드리는 가장 완전하고 훌륭한 기도이며 이 기도로써 부활하신 예수님을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의 삶 안에 모십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한 한 주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아멘!

이상복 비오 신부
  | 03.05
528 45.2%
지금이 그 때입니다.

사순 5주일을 맞이하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바로 라자로를 살리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그 이야기는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가장 놀라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죽은 이의 몸에 영혼이 3일 동안만 머문다고 믿었습니다. 3일이 지나면 영혼은 몸을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죽은 지 3일이 자나면 육신의 부패가 시작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마르타의 반응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요한11, 39)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육신에 영혼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살릴 희망이 없다는 마르타의 절망적인 표현이지요. 또한 예수님께서 조금만 더 일찍, 즉 3일 전에만 오셨어도 사랑하는 오빠를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마르타의 원망의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늦게 오셨을까요? 예수님께서 행동하시기 전에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였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이야기하듯, ‘희망이란 희망이 없는 때 희망하는 것이다.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즉, 우리의 삶에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절망의 순간에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는 도전입니다. 개인적으로, 공동체로서, 혹은 국가적으로 우리는 희망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의 순간들에 직면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새로운 삶이 늦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절체절명의 절망의 순간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선적으로 하느님께 협력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부활의 힘을 체험하기 위해 어떻게 하느님의 일에 협력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라자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났으므로 아무도 그를 살릴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마리아와 마르타 역시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를 전하는 요한 복음사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기대하는 믿음’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강조점은 하느님의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실천적 순명’을 행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세 가지 명령에 사람들이 ‘믿음으로 순명’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첫 번째 명령을 사람들에게 내립니다. “돌을 치워라. … 그러자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39-41절) 사람들은 부패한 시신이 있는 무덤 입구의 무거운 돌을 왜 치워야 하는지 이해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자신들의 지적 이해를 통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에 대하여 순명을 통한 실천적 합의에 도달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귀찮게 하지 않고 돌에게도 명령하실 수 있는 분이신데 그렇게 하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힘은 언제나 사람들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기적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순명을 통해 활동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죽은 이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러자 죽었던 이가 … 나왔다.”(43-44절) 우리는 무덤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명령이 있었고, 곧바른 순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이 있자, 무덤에서 썩어가던 사람도 스스로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게 된 사실은 우리에게 무한한 감동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사람들에게 명령합니다. “그를 풀어주어 걸어가게 하여라.”(44절) 라자로가 무덤에서 나올 수는 있었지만, 스스로 풀 수는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공동체의 도움이 필요했으며 죽음에서 자유로워진 그를 공동체가 다시 받아 주는 모습을 통해 열린 공동체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오늘날의 그리스도 신자 공동체 안에서도 죄로 인한 죽음의 피해자를 만납니다. 죄의 습관과 태도에 묶인 사람들은 이미 희망 없는 무덤에 묻혀 부패하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위해 또 다른 기적을 준비하십니다. 그리스도와 우리를 갈라놓는 돌을 치울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서로 용서함으로써 묶인 것을 풀어주고 자유롭게 할 준비의 마음이 지금 필요합니다. 생명을 얻기 위한 기적이 우리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순명의 실천적 협력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시기입니다.

<안동교구 임준기 다미아노 신부>
  | 04.04
528 45.2%
[안동] 달과 손가락

베타니아 마을에 사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인 라자로가 병에 걸려 곧 죽게 되었다는 소식이 예수님께 들려왔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는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면, 예수님과 이 세 남매의 관계가 특별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라자로가 죽고 나서야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다시 살리십니다.

이 특별한 기적을 보면서, 우리는 분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기적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것 같다는 마음입니다. 우연히 찾아간 마을에서 만난 소경, 백인대장의 딸, 이방인 어머니 등등 예수님과 특별한 인연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이라면, 우리는 큰 분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기적의 대상이 된 가족은 예수님께 특별히 사랑을 받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라자로의 죽음에 마음이 산란해지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셨습니다. 평소에 사람을 보고 가여워하는 마음을 자주 표현하셨던 예수님이시지만, 이 남매가 특별히 사랑받는 대상이라고 생각하면, 꼭 특별대우를 받는 것 같다는 분심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저만 그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기적은 특별히 사랑받는 사람에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받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라자로가 병에 걸려 고통스러워 할 때, 그리고 죽었을 때에도 끊임없이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그것은 기적이 일어난 그 사람에게 집중하지 말고, 그 기적을 통해 드러나신 하느님께 집중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지금 내가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믿을 수 있으면, 이 라자로처럼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 몸으로 구원받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체감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손으로 달을 가리켜 다른 사람에게 보인다면, 그 사람은 손가락을 따라 당연히 달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만약 그가 손가락을 보고 달의 본체로 여긴다면, 그 사람이 어찌 달만 잃은 것이겠는가, 손가락도 잃어버린 것이다.’ - 능엄경

능엄경이라는 경전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구구절절 해석하면 어려워지겠지만 단순하게 본다면, 오늘 복음에서 캐낸 메시지를 더 잘 알아듣게 도울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기적에 환호합니다. 기적이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기적이 하느님께 집중되어있기 보단, 기적이 일어난 목적이나 기적을 일으킨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경우는 기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런 사태가 발생하여 물의를 빚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적에 대한 그릇된 관심이 달도 잃게 하고 손가락도 잃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곧, 우리에게는 최고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위대한 왕이 가장 어리석고 약한 모습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잘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기적을 통해 일어나는 하느님께 집중하고, 이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형제자매 여러분, 기적을 오해케 하는 분심을 거두어 내고, 그 기적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을 바라봅시다.

▦ 안동교구 김지성 안토니오 신부 : 2017년 4월 2일
  | 03.31
528 45.2%
“예수님의 눈물”

---------------

예수님의 일생을 그려놓은 복음서를 읽으며,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하다 보면 , 예수 님의 감정이 어떠했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정말로 그들의 태도에 화가 나신 것처럼 보이기도하지만, 죄인들을 구원하시려 당신의 모든 것을 던지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면, 정말로 예수님께서 화를 내는 것인지, 그들에게 간절한 부탁을 하시는 것인지를 헷갈릴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감정은 너무나도 명확해 보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슬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슬픔은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슬퍼하셨을까요?

누군가는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슬픔이 사랑하던 제자 라자로의 죽음 때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죽음이라는 인간적인 한계 앞에서 죽은 이를 사랑했던 이들이 슬퍼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을 읽다 보면, 예수님의 눈물이 단순히 누군가의 죽음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라자로의 죽음을 인지하시고도 너무 태연하게,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라고 말씀하실 뿐, 그 어떤 감정표현도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슬픔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요한복음 사가는 라자로의 죽음 앞에 눈물 흘리는 예수님 곁에 마리아와 마리아를 따라온 유대인들을 배치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눈물 흘리시기 전에 그들이 먼저 울고 있었고,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고 이야기합니다.

결국, 요한복음 사가는 예수님의 마음을 슬프게 했던 것은 사랑하던 제자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던 이들의 눈물이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 다른 이들의 눈물 앞에서 함께 울어주고 있는가?” “우리는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지 않는가?”

2000년 전이 아닌 오늘도 우리 곁에는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 눈물 흘리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경제적 사회적 요인들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눈물짓게 합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어쩌면 오늘의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눈물 흘리시며, “너희도 나와 함께 이들을 위해 울어주지 않겠니?”라며 우리를 그 자리로 초대하고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

안동교구 박지훈 디모테오 신부
2023년 3월 26일 주보
  | 03.25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814   부활 제6주일 성경 말씀 해설  [5] 173
813   [수도회] 진리이신 성령이여, 오십시오  [8] 2666
812   [수원] 협조자 성령의 약속  [8] 3108
811   [인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7] 2837
810   [서울]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성령  [11] 3024
809   [마산] 신부님, 사제관에 불 좀 켜 놓고 사이소!  [4] 3170
808   [부산] 성령의 약속 : “아버지께 구하면 성령을 보내겠다”  [5] 3065
807   [안동] 늘 함께 하시는 성령  [5] 2927
806   [대구] 하느님의 협조자 파라클리토  [6] 3838
805   [전주] “성령께서는 우리가 걸어갈 길을 가르쳐주신다"  [3] 476
804   [광주] 십인십색(十人十色)  [2] 764
803   [청주] 성령, 한계 없는 사랑의 기운  [2] 601
802   [대전] 제자들과 함께 하는 성령  [4] 2677
801   [의정부] 나에게 중요한 것은?  [4] 881
800   [군종] 사랑해요  [3] 877
799   [원주] "희망을 믿음으로 믿으며 당당하게 살아갑시다"  [2] 504
798   [춘천] 진리의 영(靈)만이…  [4] 2932
797   (백) 부활 제6주일 독서와 복음 (다른 보호자를 보내실 것이다)  [7] 2378
796   부활 제5주일 성경 말씀 해설  [7] 131
795   [수도회] 미풍처럼 다가오시는 하느님  [2] 2574
794   [청주] 주님의 길  [2] 119
793   [대전]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완전한 유일한 이콘(상)  [2] 2810
792   [인천]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8] 2562
791   [수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4] 3051
790   [서울]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신 예수  [9] 2835
789   [안동] 행복의 길 :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  [3] 2838
788   [대구] 우리 삶의 네비게이션이신 예수님  [4] 2847
787   [마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2] 2799
786   [부산] 하느님이 하시는 일  [4] 2476
785   [전주] ‘위하여’가 아닌 ‘함께’  [3] 740
784   [광주/제주] 본래의 제 기능  [4] 553
783   [군종]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2] 1811
782   [의정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1] 902
781   [원주]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2] 600
780   [춘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2] 3052
779   (백) 부활 제5주일 독서와 복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7] 2247
778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성경 말씀 해설  [3] 94
777   [수도회] 행복한 목자 착한 목자  [6] 2418
776   [인천] 죽을때 후회하지 않을 인생  [6] 2546
775   [수원]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7] 2517
1 [2][3][4][5][6][7][8][9][10]..[21]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3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