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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라자로의 부활사건
조회수 | 3,465
작성일 | 05.03.11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마르타에게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하고 물으셨고, 마르타가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무덤의 입구를 막았던 돌을 치우게 하신 후에 『라자로야, 나오너라』하고 큰 소리로 외치시자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 나는 라자로가 살아서 밖으로 나왔다고 하는 놀라운 기적의 사건을 오늘의 복음은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까?

몇 년 전에 낯선 세 자매가 나를 찾아와서 예수님은 거짓말쟁이라고 항의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자기네 부모님들은 딸만 넷을 낳아 다들 결혼을 시켜서 뿔뿔이 헤어져 사는데 그중 막내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시켰지마는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영안실로 옮기려는 것을 못하게 말렸는데 영안실로 들어가면 냉동을 시키기 때문에 부활하는 데에 지장이 될 것 같아서였단다. 그러나 병원 당국에서는 시신을 그대로 방치할 수가 없으니 집으로 옮기라고 하여 집으로 옮겼단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본당의 연도회 회원들이 찾아와서 염하려고 하여 꽁꽁 묶어 놓으면 다시 살아날 수도 없을 것 같기에 그것도 못하게 말리고는 라자로를 살리시기 전에 마르타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네들도 믿겠으니 제발 막내동생을 살려 달라고 며칠동안 금식을 하면서 철야기도를 언니들 셋이서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동생의 시신은 자꾸만 썩어가서 어쩔수 없이 연도회원들의 도움을 받아 장례를 치렀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다고 하신 예수님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찬 그들을 우선 위로한 다음 『당신네의 막내 동생은 부활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삶으로 내 말을 듣던 그들이 갑자기 어리둥절해 하기에 나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고 새로운 삶으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누에를 보십시오. 뽕잎을 먹으면서 기어다니며 살 때에는 얼마나 징그럽습니까?

그러나 그 징그럽던 누에가 얼마 후에는 입에서 실을 뽑아 자신의 관을 짜고 죽음의 상태인 번데기가 되지 않습니까? 누에가 죽음의 상태인 번데기가 되어 고치 속에 갇혔다는 상태만을 본다면 안타깝고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들지마는 그 과정은 보다 높은 부활의 삶인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되는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번데기가 되기 전의 누에는 징그러운 모습으로 꿈틀거리고 기어다니며 뽕잎이나 먹고 살았지만 번데기의 과정을 거쳐서 부활하여 나비가 된 다음에는 화려한 날개로 창공을 날면서 꽃을 찾아 다니고 꿀을 빨아먹지 않습니까?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 더 차원이 높은 부활의 삶으로 옮겨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하니까 그들의 어둡고 굳어졌던 얼굴들이 밝아지기 시작하였고 마침내는 우리 모두 손을 잡고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올린 다음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들 갔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실 때에 그 기적 자체만을 목적으로 행하시지 않고 그 기적을 통해서 더 큰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셨음을 알 수 있다.

라자로의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은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고 계심을 가르치시고자 하셨다. 라자로의 부활은 엄밀히 말한다면 부활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부활한 다음에는 사도신경의 내용대로라면 다시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야만 되는데 라자로는 부활한 다음에 얼마간 더 살다가 다시 죽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라자로를 소생시킨 주님의 더 큰 뜻은 당신 자신이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이시므로 믿음을 가지고 당신께로 와서 당신의 부활과 생명에 동참하도록 우리 모두를 깨우쳐 주시는 데에 있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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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허성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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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눈물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고 어떤 시인은 노래했지만(정호승, 「수선화에게」),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정말 우신다. 처절하리만큼 철저하게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께서 어찌 인간의 눈물을 모르시랴! 우리 인간의 아픔과 슬픔, 절망과 고통 뿐 아니라, 우리의 죄마저도 스스로 짊어지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눈물도 당신 것으로 삼으신다. 그리하여 당신 눈물로 우리 눈물을 닦아주신다.

제자들이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우리 친구 라자로가 잠들어 있으니 이제 내가 가서 깨워야겠다”(요한 11,11)시며 고달픈 구원의 여정을 떠나신다. 언제나 병자들과 죄인들의 벗이 되어 주시는 주님께서는, 죽어서 악취를 풍기는 인간에게도 변함없는 “친구”가 되어 주신다. 파리 한 마리도 되살릴 수 없는 우리 인간 눈에는 분명 라자로가 죽었지만,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께는 잠시 “잠들어” 있을 따름이다.

라자로를 살리러 가시는 길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길이다. 남을 살리는 일은 언제나 자신의 죽음을 전제한다. 당신을 돌로 쳐 죽이려는 사람들 우글거리는(11,8) 죽음의 골짜기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시는 예수님이야말로 당신 양떼를 위해 생명을 바치는 착한 목자이시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느라 가파른 산벼랑도 마다 않는 착한 목자이시다.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압니다”(11,23)라고 그럴 듯하게 말하지만,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이 아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종말에야 이루어질 썩은 뼈다귀와 살덩어리의 재생에 관하여 말씀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바로 “부활이요 생명이다”(11,26). 지금 그리고 여기서 내 사랑의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은 “이미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들어서 있다”(5,24). 내가 걸어가는 사랑과 섬김의 길, 수난과 죽음의 길은 “죽더라도 죽지 않는”(11,25) 길이다. 마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어 죽은 듯이 보이지만 수많은 열매로 다시 살아나듯, 너희도 자기를 비우고 버리고 썩기만 하면 날마다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남을 죽이는 법이 아니라, 남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죽이는 법을 가르치셨다. 참으로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니”(마태 16,25), 탐욕과 이기심, 돈과 권력에 사로잡혀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비록 육신으로는 숨 쉬고 있을지라도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예수님처럼 부활하려면 먼저 매일의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예수님처럼 부활하려면 먼저 예수님처럼 날마다 죽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이기심과 탐욕의 동굴에 갇혀 죽은 듯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몸소 찾아오시어 입구를 가로막은 돌을 치워주신다(11,39). 그리고 “라자로야, 나오너라!”(11,43)던 사랑 가득한 그 목소리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 당신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신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눈물을 흘리시며 우리가 갇혀 있는 무덤 바깥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최원오 빈첸시오 신부
  |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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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이 말씀은 사순 시기를 보내는 우리가 깊이 새기며 간직해야 할 물음이라 생각됩니다. 아울러 이 물음에 대한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라는 마르타의 대답이 부활을 준비하는 우리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현실, 사랑하는 이를 잃어 보신 분들은 그 가슴 먹먹함을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비록 성당을 다니고 부활을 믿고 고백하더라도 막상 죽음이란 현실은, ‘죽음과 부활’이라는 단순한 도식으로 해결되지는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왜 부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냐?”는 식으로 꾸짖거나 다그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신 주님은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의 눈물’이 부활에 대한 신앙 부족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겪어 왔고 또 겪고 있는 죽음이라는 아픔을 그분도 함께 느끼며 우십니다. 이분이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로 죽음을 부수시고 오늘 제2독서인 로마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우리 죽음을 함께 아파하시며 눈물 흘리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우리에게 산 희망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화답송 시편은 우리가 주님께 불러드려야 할 적절한 찬미입니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주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는 무덤 입구를 여시고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복음은 말합니다. 이 일로 많은 유다인이 믿게 되었다고. 우리도 같은 믿음을 고백하며 구세주이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노래합시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박경빈 알렉시오 신부
  |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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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죽었던 라자로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걸어 나옵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은 한평생 믿음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순절을 지내는 우리에게, 지난 몇 주일의 복음 말씀은 그 믿음에 관하여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 가를 가르쳐 줍니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이 간청합니다.“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요한 4, 15)

지난 주일 눈을 뜨게 된 태생 소경의 고백도 있습니다.“선생님, 그분이 누구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9, 36. 38)

오늘 복음 말씀의 마르타 역시“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 27) 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믿고 싶고 또 믿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 가를 모를 수 있는 우리에게 주님은 오늘 라자로의 죽음과 소생을 통해 분명하게 다시 말씀해 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 25∼26)

한평생 믿음의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은 이렇게 부활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죽더라도 다시 사는 삶, 영원히 죽지 않는 삶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에게도 현실은 늘 무덤같은 삶임을 또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웃에게 마음을 닫으면 사회도 무덤이 됩니다. 가족에게 마음을 닫으면, 가정 또한 무덤입니다. 그래서 이제 자신에게마저 마음을 닫는 것이 바로 죽음의 무덤이 되는 것입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 43)

죽음의 무덤에서 생명의 나라로 라자로를 끌어내 주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나를 가두고 있는 모든 무덤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내 마음을 열고, 내 집 문을 열고, 우리 공동체를 활짝 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씀을 실현하라고 하십니다.“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에제 37, 12) 나를, 그리고 우리 공동체를 닫고 있는 무덤이 무엇입니까? 그 무덤에서 나와서 부활의 삶을, 생명의 삶을 살라고 하는 오늘 사순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아멘.

<부산교구 차성현 암브로시오 신부>
  |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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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부활의 리허설 그리고 빈무덤

오늘 제1독서는 무덤에 살고 있는 당신 백성들의 무덤을 열고 무덤에서 끌어내고 하느님의 영을 넣어 백성들을 살리고 그들의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무덤에 살고 있다는 것은 사람들의 삶속에 하느님의 힘, 성령의 열매인 사랑, 용서, 기쁨, 친절, 여유로움, 따뜻함, 웃음이 없고,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미움, 질투, 분노, 시기, 무관심, 불안, 근심 등으로 살아도 산 사람의 삶이 아닌 삶을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무덤의 삶에서 끌어내고 하느님의 영으로 다시 살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제2독서는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우리 안에 사시면서 생명이 되어 주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삶과 가르침, 죽음을 통해서 다시 살게 하는 하느님의 영을 보았고, 그 영이 우리 안에 이미 생명이 되어 사신다는 것을 믿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육체적인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믿느냐는 것과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하느님의 품안에서 영원한 삶을 살게 됨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지금‘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무덤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성령의 인도로 그 무덤에서 나와 새로운 삶, 부활의 삶을 살게 할 가능성, 그 힘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으며 살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믿음, 희망은 우리 누구에게나 당연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삶을 두고‘무덤에 살고 있음을, 이미 죽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을 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힘으로 다시 새롭게 살 믿음이 없다면 부활의 삶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무덤은‘빈무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불려나온 라자로의 무덤도‘빈무덤’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무덤 안에 살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부활의 리허설’은 매일 반복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덤이 필요없는‘빈무덤’의 삶을 믿고 희망해야하지 않겠습니까?

▦ 부산교구 임형락 신부 : 2017년 4월 2일
  |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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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죽음은 영생으로 옮아가는 과정

에제키엘 예언자는 백성들과 함께 바빌론에 유배를 끌려갔던 사제였습니다. 에제키엘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이 아니라 다른 민족과 그들이 섬기던 우상을 따라 살다가 유배를 끌려오게 되었는데, 이런 이스라엘로 인해 하느님의 이름은 온 세상에서 더럽힘을 당합니다.(에제 36,16-38) 오늘 1독서에서 에제키엘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유배 상황을 무덤에 비유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죽음을 맞게 되어 무덤에까지 끌려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에서 더럽혀지게 된 당신의 이름을 다시금 거룩하게 만들고자, 곧 당신이야말로 주님이심을 드러내고자 이스라엘을 무덤에서 꺼내어 되살린 뒤 그들의 선조들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되돌려 놓으실 것입니다.(에제 37,14) 그리고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에제키엘의 예언처럼 50년이 지난 후 속박에서 풀려나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오늘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어 주셨다고 말합니다.(로마 8,10) 죄로 인해 죽음을 맞은 우리가 성령 덕분에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는 말인데, 성령이 우리의 생명이 되어 주시는 것은 하느님의 의로움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충실하심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선조들과 맺으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우리 모두를 죄의 속박에서 건져내시고, 당신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들이신다는 말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말하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신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 모두를 죽음에서 구해내어 당신이야말로 참된 주님이심을 드러내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라자로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당신이 바로 죽은 이들을 생명으로 이끌어 가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당신이 바로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밝히시며, 당신을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믿는 이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1,25) 당신을 통하여 에제키엘이 예언했던 일이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바오로가 말하듯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비로소 드러났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모두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진다고,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의로움, 곧 하느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덕분에 이루어지게 되리라고 증언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런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로 예수님처럼 영원히 살 것임을 믿는 이들입니다. 물론, 영원히 산다는 말을 지금 현재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 육신 그대로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장애를 지니고 있는 분들은 영원히 몸이 불편한 채 살아가야 하고, 불치병을 지닌 분들은 영원히 불치병을 지닌 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영원히 산다는 것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으리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겪는 죽음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옮아가는 과정임을 믿는다는 것이고, 우리 모두 부활하여 온전히 변화된 몸으로 영원히 살아가리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실제, 육신 그대로 부활한 나자로도 죽었고,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도 돌아가셨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번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의 의로움 덕분에 우리 모두 구원받아 영생을 얻게 되었음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완전히 변화된 몸으로 부활하여 하느님과 영원히 살아갈 것임을 믿읍시다. 그러면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힘으로 우리 모두를 무덤에서 건져내어 우리 선조들에게 약속하신 땅, 영원한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7년 4월 2일
  |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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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라자로는 저와 당신의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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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만물이 생명의 힘으로 약동하는 봄, 교회는 죽음을 선포합니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며 새 생명을 향한 희망의 관문임을 선포합니다. 오늘도 살아있다고 하나 사실은 죽어있는 세상을 살리려는 주님의 외침입니다. 우리를 묶고 있는 세상의 강한 사슬을 풀어주려는 구세주 예수님의 외침입니다.

그날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난 라자로를 살리신 주님의 능력은 사랑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진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살고 싶으신 하느님의 마음이 예수님의 외침으로 온 세상을 적셨던 그날처럼 주님께서는 오늘,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나서 냄새가 나는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바로 나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려 목청을 다해 외치고 계십니다.

죄 때문에 죽어가는 우리 모두가 라자로입니다. 생명이 아닌 것으로 치장하느라 지친 내 이름이 바로 라자로입니다. 이제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입시다. 그분의 음성에 응답해 드립시다. 서둘러 그분의 음성을 쫓아 당신의 말씀대로 행동해 봅시다.

주님께서는 분노하고 질투하고 의심하며 미워하는 얼굴의 수건을 벗기시고 진리와 생명의 눈을 뜨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두려움과 자책과 열등감과 무기력의 천을 말끔히 치워주실 것입니다.

삶이 죄 때문에 썩어 문드러졌다 해도 괜찮습니다. 삶에 갖은 악취가 진동을 한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악에게 손발이 묶여 꼼짝할 수 없는 처지여도 무관합니다. 그분의 음성에 깨어나면 그만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만 해드리면 ‘얘기 끝’입니다. 그분의 치유를 믿고 ‘이 모습 이대로 나아가는 결단’만 있으면 됩니다.

세상에서 죽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죽기 위해서 오신 유일한 인간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작정하고 세상에 왔던 유일한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을 배신하고 외면한 것들에 마음 쓰지 않으십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이사 43,18)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해드릴 수 있습니다. 건강하고 튼튼한 주님 사랑을 믿고 투신할 수 있습니다.

인류역사 안에서 인간의 악랄한 본능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일일 것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지울 수 없는 인간의 허물일 터입니다.

그런데 그 극심한 악이 저질러진 배경을 살피면 어이가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죄 없는 예수님을 성난 군중에게 내어주었던 그 무섭고 끔찍한 인간의 책략에 할 말을 잃게 되는 겁니다. 달랑 손 한번 씻으며 책임을 벗으려던 빌라도의 가벼움에 분노가 솟구치고 예수님의 고통에서 볼거리를 원했던 헤로데의 음흉함에 소름이 돋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모욕했던 병사들의 무지도, 골고타로 향하는 주님께 가혹한 채찍을 휘둘렀던 군인들의 잔인함도, 덩달아 고함을 질러대며 합류했던 군중이 모두, 그날 그 순간에 예수님의 고통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하게 됩니다.

아, 스승님의 고통을 외면한 채 도망가기에 급급했던 제자들의 모습도 빼놓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일 테지요. 그런데 솔직히 따져보면 이런 일들은 지금 우리에게도 흔한 일입니다. 고작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려고 전전긍긍하는 모습도 홀로 정의를 살아내는 양 이웃을 판단하는 모양새도 너무 익숙한 우리의 일상이니까요. 세상의 고통이 나와 무관하다는 것에 안위하며 힘없는 이웃을 외면한 채 몸을 사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니까요.

이리도 모자라고 덜 된 우리이기에 사순의 은혜가 절실합니다. 이 허다한 죄는 오직 값없이 주시는 십자가의 피로만 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이라 믿지 못합니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방법이 너무 쉽고 간단해서 의아해하고 의심합니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됩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통 큰 하느님 사랑을 선뜻 받아들여 믿지 않는 것이 곧 ‘죄’라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의 선물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특약이 있고 선물로 주신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한 우리 탓인 것입니다.

때문에 사순절 묵상의 핵심은 사랑의 하느님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처럼 딱하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사순, 죄와 맞서는 능력을 얻는 복된 시기입니다. 그러기에 사순 시기에는 신앙의 큰 기쁨과 벅찬 감격이 따릅니다. 이제 믿는 척 꾸미고 사랑하는 척 겉모양에 취했던 거짓 믿음을 잘라냅시다, 오늘, 지금, 이 순간, 애타게 내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께 큰 음성으로 응답해드립시다.

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키고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쁘게 순명하는 믿음인으로 도약합시다. 십자가를 사랑하고 끌어안는 건강한 믿음으로 주님께 힘이 되어 드리는 튼튼한 우리의 삶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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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가톨릭신문 2020년 3월 29일
  | 03.25
528 45.2%
예수님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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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한 사람의 죽음과 소생에 관련된 여러 장면들을 보여줍니다.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여겼던 가족들이 질병으로 한 형제를 잃은 과정에서 자신들의 든든한 뒷배라고 믿었던 예수님이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강하게 항의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 마르타의 항변은 곤경과 위기에 처해서 어쩔 줄 모르며 좌절하고 분노할 때 일어나는 원망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이든, 하느님이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부르짖는 절규입니다.

예수님과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던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 남매들이 기대했던 도움은 예수님의 특별한 치유능력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문제를 단숨에 해결하는 전능하신 모습이 예수님답게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발병과 죽음, 장례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얼른 뛰어들기는커녕 그저 묵묵히 지켜보셨습니다. 그러다 사람들 앞에 나타나셔서 비통하게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라자로를 향한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진하게 느낍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바로 여깁니다. 라자로가 무덤에서 나와 소생하는 장면은 예수님의 곡진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자연스런 결말입니다. 그러기에 살아가면서 우리가 시련과 고통을 겪을 때, 예수님은 멀리 계시고 무심하게 침묵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 내가 겪는 모든 삶의 국면에 깊이 동참하신다고 예수님의 눈물은 분명히 알려줍니다.

주변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어렵고 힘든 사태에 처할 때, 예수님을 찾기보다는 다른 존재나 수단을 먼저 떠올리는 듯합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의 견해, 유능한 ‘대화전문인공지능’(챗지피티)의 판단을 구하거나 심지어 점집을 찾기도 합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이런 일을 시킬 수 있는 도우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넘어서서 나에게 정말 필요하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시는 분입니다.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분입니다. 한마디로 나를 위해 우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같이 웃고 같이 우는 사이를 이뤄가는 것이 우리가 평생 누리며 간직해야할 믿음의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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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노영찬 세례자 요한 신부
2023년 3월 26일 주보
  |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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