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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너는 나를 믿느냐?"
조회수 | 4,940
작성일 | 05.03.11
사람아,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사순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 말을 들으며 머리에 재를 받았습니다. 올 사순절엔 그래도 좀 더 잘 살아보려는 마음을 다지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벌써 사순도 마지막 주일이니 부끄러움이 밀려옵니다. 지나온 사순 시간을 돌아보면서 주님께서 저에게 무엇을 바라셨는가 한번 돌이켜 봤습니다.

사순 첫 주에는
세상이라는 험난한 광야에서 악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최고의 무기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임을,

둘째 주에는
다볼산의 변모를 통해서 주님께 대한 두렵고 떨리는 체험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셋째 주에는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 주님이야말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이심을,

그리고 지난주에는

실로암 못에서 태생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을 보아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죽은지 나흘이 지난 나자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다섯 주간의 복음 말씀을 통해서, 아니 이 사순절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나에게 또 우리 모두에게 정작 무엇을 바라시는 걸까? 무엇 때문에 그런 복음들을 이 사순절에 들려주었을까? 왜 여러 차례의 기적들을 보여주고 심지어 죽은 사람마저 살려내는 기적까지 보여주셨을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왜 그랬냐고 누군가 여러분에게 묻는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사실 이것은 놓치지 않아야 할 물음입니다. 놓쳐서는 안될 물음입니다.

2000년이 지난 오늘 이 사순 시기에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는 결국 어디를 겨냥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 자신입니다.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한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나자로를 살려내시면서 정말 묻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나를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있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말 제대로 알고서 믿는 것인지? 그저 소문으로만 듣고 믿는 것은 아닌지?

주님께서 이 사순절 내내 그걸 나한테 묻고 계셨던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나자로가 무덤에서 살아나는 광경을 들으면서 그냥 한 쪽귀로 흘려버리시진 않으셨는지요? 그건 2000년 전 성서 속의 이야기일 따름이지,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반문하신다면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의 본 뜻은 아직도 나한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체 올해도 사순절만 그냥 지나버린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그렇다면 왜 나에게 예수님은 그런 물음을 묻고 싶어 하신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누구신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갖 기적을 다 보여주었어도 참으로 주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극소수였기 때문입니다. 늘 믿는다고 하면서도 조금만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 닥치면 쉽게 주님의 등을 돌리는 우리 자신 때문입니다.

그 많은 기적을 보여주었을 땐 ‘주여 주여 믿습니다’ 하고 쫓아다니던 수 만 명의 사람들도 주님의 고통과 십자가 아래서는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순 기간 내내 다양한 복음을 통해서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나를 정말 믿느냐?”하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묻고 계셨던 것은 결국 우리를 위해서 대신 지고 갈 피눈물의 십자가 속에서도 나를 믿고 따르겠느냐?는 다짐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이제 다음 주는 성주간입니다. 찬란한 기적은 간 곳도 없고 참혹한 고통과 피범벅이 되신 몰골의 주님께서 높다랗게 십자가에 달리게 될 것입니다.

남은 한 주간만이라도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성주간을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죽은 나자로를 살리신 주님께서 다시 한 번 나에게 물어오는 질문에 기꺼운 맘으로 말씀드렸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믿음이 부족하다면 이 미사 중에 믿음을 더해달라고 도움을 청하도록 합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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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광훈 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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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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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
예수님의 눈물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라자로의 죽음과 그 가족들의 슬픔에 눈물을 흘리 셨다. 우리는 근엄한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지만 예 수님은 우리의 삶에 함께하시는 참으로 따뜻한 분 이시다. 오빠의 죽음을 두고 슬퍼하는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 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11,25-26). 예수님은 라자로를 무덤에서 살리심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믿는 이들에게 기쁨을 돌려주셨 다.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

나를 살리시는 예수님
나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은 나를 살리신다. 나의 캄캄한 무덤에서 예수님은 나를 불러내신다. 나의 무덤은 실패, 절망, 미움, 두려움이라는 삶의 십자가다. 이 무덤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예수님은 이 무덤 바깥에서 눈물을 흘리시며 함께하시면서 나를 부르시고 계신다.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으라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자주 성체를 통해 우리를 안아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말씀 안에서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생활묵상 안에서 나와 함께하심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나에게 당신이 십자가를 지고가신 것처럼 나의 무덤의 어두움을 받아들이라고 하신다. 나아가 당신의 십자가를 사랑하신 것처럼 모든 것을 감사하고 사랑하라고 하신다. 공이 바닥에 닿을 때 다시 튀듯이 무덤의 어두움을 통해 다시금 기쁨으로 살 것임을 알려 주신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목소리를 들음으로 위로를 얻고 용기를 가지고 어두운 무덤 밖으로 나올 수 있다. 이런 생활로 우리는 훗날 예수님의 진정한 부활의 영광에 함께 할 것이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의 무덤 바깥에서 라자로라 불리우는 나에게 연민을 가지시며 함께하시면서 말씀하신다. “라자로야, 너의 무덤에서 이리 나와라” (요한11,4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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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창환 레오 신부
  |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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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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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멀리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귀에 잘 들립니다. 놀이터에서 한참 재미있게 놀고 있는 아이가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 집으로 금방 뛰어갈 수 있는 것도, 아무리 시끄러운 곳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이야기 소리는 선명하게 들을 수 있는 것도,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를 사랑하셨기에 죽었던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마리아가 보낸 이의 말을 들으시고 잠든 라자로를 깨우러 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한 라자로의 누이 마르타와 마리아의 슬픔을 보시고 함께 눈물을 흘리실만큼 사랑이 넘치셨습니다. 또 무덤 앞에 가셔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라자로를 부르셨고,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라자로는 수의를 입은 채 무덤에서 걸어 나옵니다. 마르타의 믿음으로 인해 함께 있었던 많은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고 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그들은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항상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있으면, 우리도 역시 그분의 목소리를 잘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라자로가 주님의 부르심으로 부활을 체험할 수 있었듯이 우리도 주님을 믿고,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새 삶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남은 사순 시기 동안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우리의 믿음을 더 굳건히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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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9일 대구대교구 주보
  |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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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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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언젠가 우리 모두를 영원히 살게 할 것입니다.물론 살다 보면 이런저런 어려움을 참 많이도 겪게 됩니다. 그럴 때 지치고, 우울해지고, 마음과 육신의 병도 얻게 됩니다. 인생살이의 고달픔이라 하겠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꼭 같은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기에 마음이 불안하고 흔들릴 때 드리는 우리의 간절한 청은 주님 마음을 더욱 쉽게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간절히 기도하면 언젠가는 우리도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용기를 잃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때때로 너무나 힘겹고 무겁게 느껴지겠지만, 예수님께 의탁하며 지고 가는 인생의 십자가는 마침내 승리의 십자가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유다인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고, 로마인들에게는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그 모든 굴욕을 이겨내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언제나 우리를 구원할 승리의 십자가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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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전광진 신부
  |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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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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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향한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는 오늘 생명의 주님을 만납니다. 갈증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시는 분, 사마리아 여인의 목마름을 풀어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시원한 샘물이십니다. 눈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시면서, 눈 뜨고도 못 보는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빛이십니다.

우리의 갈증과 어둠을 해소시켜 주시는 예수님께서는 오늘 죽은 라자로를 소생시키심으로써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드러내십니다. 죽음이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의 갈증과 어둠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생명과 자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소생시키시면서 생명과 자유의 주인으로 드러나십니다.

생명과 자유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부활의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냄새가 나는 라자로를 살리셨듯이 세상에 파묻혀 세상의 냄새에 찌든 우리를 살리실 것입니다. 손과 발이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온 라자로를 풀어주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힘과 죄에 손과 발이 묶이고 얼굴이 가려져 있는 우리를 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전부이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시는 그분은 의사이시며
고열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한줄기 시원한 샘물이십니다.
우리가 죄악에 억눌렸을 때 그분은 화해이시며
도움이 필요할 때, 그분은 힘이십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그분은 생명이시며
천국을 애타게 바라는 우리에게 그분은 길이시며
어둠을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에게 그분은 빛이시며
굶주린 우리에게 그분은 양식이십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
복되다, 그분께 희망을 두는 자.

-성 암브로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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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영동 치릴로 신부
  |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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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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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울수록 살아나는 당신 모습은
내가 싣고 가는 평생의 짐입니다.
나는 밤낮으로 여울지는 끝없는
강물 흐르지 않고는 목숨일 수 없음에
오늘도 부서지며 넘치는 강물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강>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지울수록 살아나는 당신 모습”,
곧 내려놓고 싶고 회피하고 싶고 거절하고 싶지만
그럴수 없는 “당신의 모습은 내가 지고가야 할 평생의 짐”이라고 합니다.

수도자에게 무슨 그리 큰 짐이 있는지, 무슨 그리 무거운 평생의 짐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하튼 “지울수록 살아나는 당신 모습은 내가 싣고 가는 평생의 짐”이라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짐이 있습니다. 짐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 짐은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어떤 사람에게는 배우자가 짐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올곧지 못한 자식이 짐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찢어지게 어려운 가난이, 어떤 사람은 층층시하가 짐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제인 저에게도 짐이 있습니다. 언변이 시원찮은 저에게는 미사 때마다 잘하든 못하든 강론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제일 큰 짐입니다. 사제생활에서 강론이 없다면 참 쉬울 것 같습니다. 미사만 정성껏 집전하면 될 것이니까요. 그런데 강론을 준비해야 하니까 매일 성경을 읽어야 하고 묵상도 해야 하고 책도 봐야 하고 기도도 하게 됩니다.

만일 강론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내 하고 싶은 운동이나 취미 생활도 맘껏 즐길 수 있고, 놀고 싶은 대로 놀고, 쉬고 싶은 대로 쉬고 정말 부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렇다면, 그런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까? 나는 사제로서의 모습보다는 그저 놈팡이나 한량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감히 단언합니다.

짐이야 말로, 나로 하여금 사제의 정체성을 잃지 않게 붙들어 주는 고리요 하느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내 생활을 지지해 주는 지지대요 축복이고 은총이고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혜 중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짐을 지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짐, 그것이 바로 은총이고 사랑이고 은혜의 보화를 담고 있는 질그릇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시는 계속 이어집니다.
“나는 밤낮으로 여울지는 끝없는 강물. 흐르지 않고는 목숨일 수 없음에, 오늘도 부서지며 넘치는 강물입니다.”

강물은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강물이 아닙니다. 흐르지 않는 물, 고여 있는 물은 썩어 버립니다. 거기엔 생명이 살 수 없습니다. 물고기도 수초도자랄 수 없습니다. 흘러야 합니다. 흐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굴러야 합니다. 한 마디로 엎어지고 넘어지고 깨지고 부서져야 합니다. 그래야 굴러 갈 수 있습니다. 깨지지 않고, 편안한 모습을 지닌 채로 흘러 갈 수는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믿는 삶, 그것은 내가 다 이해할 수 없고, 오라버니를 잃은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처럼, 나에게 큰 상실의 아픔이 온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진정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부활과 생명의 주님으로 믿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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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정환 미카엘 신부
  |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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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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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세상 누구나가 자신이 살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다른 이의 고통을 모른 척하기 쉬운데 그게 가능한 일일까? 너무나 바보 같은 삶은 아닐까?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어 있는 라자로를 소생시키심으로써 당신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라자로의 소생으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기도 했지만,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이 사건을 계기 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죽음 앞에서 슬퍼하고 있는 사람들과, ‘어찌 생명을 소생 시킬 수 있겠냐?’라고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느님이 사람들을 사랑하고 살리시듯이, 예수님도 사람을 사랑하고 살리십니다. 그것도 자신의 죽음을 무릅쓰고. 어쩌면 죽음까지 무릅쓰며 사람을 살리신 예수님의 사랑이 그분의 부활을 있게 한 것이 아닐까요?

라자로의 죽음을 잠듦으로 표현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한 잠으로 오해한 제자들의 모습도, 죽음과 부활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마르타의 모습도,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의 주인이심을 믿지 못하는 마리아의 모습도 모두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죽음이라는 넘어설 수 없는 장벽 앞에서 눈앞에 보이는 것만으로 두려워 떨며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당신께서 는 우리가 단순하게 알고 있듯이 죽음으로 부터 우리를 구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기도 전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사람을 사랑하고 살리시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일 것입니다. 같은 믿음 속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습을 닮아가려 노력 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라고 했던 또 다른 마르타의 고백이 아닐까요?

이웃을 돕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다른 이를 존중하며 섬기고, 나를 내어 주면 서까지 다른 이를 사랑한다는 것이 마냥 바보 같은 삶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하느님과 사람과 화해하기 위한 사순 시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기억하며 우리의 실천으로 신앙을 고백해보려고 노력하는 시간이 되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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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영재 바오로 신부
2017년 4월 2일
  |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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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자연속의 인간! “너는 무엇을 믿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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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처럼 우상을 따르다가 바빌론 유배를 당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런 유배 상황을 무덤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당신 말씀에 충실하시고 당신 구원 경륜을 주도적으로 완성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무덤에서 꺼내어 되살리고자 하십니다. “내 영을 넣어 너희를 살린 다음 내가 주님임을 알게 할 것이다.”(에제 37,14 참조)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을 당신의 의로움으로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로마 8,11참조)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죽은 나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새로운 삶을 열어주심으로써 주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지난 1월 늦겨울부터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 죽음이라는 무덤가에 있는 듯 살고 있습니다. 이 위기를 통하여 다시 깨달아야 하고 배워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사는 경제, 정치의 문제보다 공중보건과 공동선을 우선으로 하는 삶의 방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아니, 인간 중심도 아니고, 하느님과 인간만의 관계도 아니고, 하느님과 우리 그리고 생태계가 함께 살 수 있는 삶의 방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죽고 난 뒤 부활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생태적 회개의 부르심을 듣고, 돌을 치우고 냄새나는 무덤으로부터 걸어 나와야 합니다. 생태적 회개의 삶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이 필요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하느님께서 참으로 생태계의 창조주요, 생태계의 구세주요, 완성자이심을 세상이 올바로 믿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요한 11,4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주님,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시편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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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곽재진 베드로 신부
2020년 3월 29일 대구주보에서
  |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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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만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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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시기도 어느덧 끝을 향하고 있습니다. 사순 제5주일인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미 생명과 부활에 대하여 들려줍니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제1독서 에제 37,14)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제2독서 로마 8,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복음 요한 11,25-26)

한 마을에 꽃을 파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노인은 가난했습니다. 복장은 허름했고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얼굴 전체에 항상 행복한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노인을 ‘행복한 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보지요?”
노인은 특유의 밝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내게 행복의 비결이 하나 있지요.
이 나이에 어찌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고통을 당할 때마다 저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부활의 새벽을 맞지 않았습니까.
저는 고난이 다가올 때마다 마음속으로 ‘사흘만 기다리자.’라고 다짐합니다.
그때부터 제 삶이 한결 행복해졌지요.”

노인이 누리는 행복의 근원은 부활의 소망이었습니다. 예수님 수난의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사순 시기 끝자락에서, 오늘 말씀은 부활의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라자로의 죽음 앞에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을 통해 주어질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벌써 나흘이나 지났는데’라며 좌절하고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주님 부활을 통하여 주어질 새 생명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고난이 닥칠 때, 좌절의 순간,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는 이렇게 속삭입시다.

“사흘만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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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억수 필립보 신부
2023년 3월 26일 주보
  |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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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5   [전주] “성령께서는 우리가 걸어갈 길을 가르쳐주신다"  [3] 476
804   [광주] 십인십색(十人十色)  [2] 764
803   [청주] 성령, 한계 없는 사랑의 기운  [2] 601
802   [대전] 제자들과 함께 하는 성령  [4] 2677
801   [의정부] 나에게 중요한 것은?  [4] 881
800   [군종] 사랑해요  [3] 877
799   [원주] "희망을 믿음으로 믿으며 당당하게 살아갑시다"  [2] 504
798   [춘천] 진리의 영(靈)만이…  [4] 2932
797   (백) 부활 제6주일 독서와 복음 (다른 보호자를 보내실 것이다)  [7] 2378
796   부활 제5주일 성경 말씀 해설  [7] 131
795   [수도회] 미풍처럼 다가오시는 하느님  [2] 2574
794   [청주] 주님의 길  [2] 119
793   [대전]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완전한 유일한 이콘(상)  [2] 2810
792   [인천]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8] 2562
791   [수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4] 3051
790   [서울]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신 예수  [9] 2835
789   [안동] 행복의 길 :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  [3] 2838
788   [대구] 우리 삶의 네비게이션이신 예수님  [4] 2847
787   [마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2] 2799
786   [부산] 하느님이 하시는 일  [4] 2476
785   [전주] ‘위하여’가 아닌 ‘함께’  [3] 740
784   [광주/제주] 본래의 제 기능  [4] 553
783   [군종]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2] 1811
782   [의정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1] 902
781   [원주]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2] 600
780   [춘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2] 3052
779   (백) 부활 제5주일 독서와 복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7] 2247
778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성경 말씀 해설  [3] 94
777   [수도회] 행복한 목자 착한 목자  [6] 2418
776   [인천] 죽을때 후회하지 않을 인생  [6] 2546
775   [수원]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7] 2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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