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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자매의 믿음
조회수 | 3,251
작성일 | 05.03.12
오늘 우리는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의 이야기를 듣는다. 루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종종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들르셨다. 가끔씩 그 집에 머무르시며 식사 대접도 받으시고, 하느님의 말씀도 가르치시며 사랑을 베푸셨다(루가 10,38참조). 예수님께 대한 그 자매의 사랑과 정성 또한 지극했다. 오신다는 소식만을 듣고 멀리 마중 나갈 정도였으며, 오빠가 앓아눕자마자 이내 그 소식을 예수님께 알려드릴 정도였다.

베타니아에서 갈릴래아까지는 대단히 먼 거리이고, 더구나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의 어느 곳에 계신지도 알고,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께 소식을 알려드릴 정도로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지극했다.

이러한 자매의 모습, 그것이 곧 신앙인의 모습이다. 누구보다 먼저 주님을 찾고 주님께 알려드리는 자세, 그것이 신앙인의 자세이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축구 경기를 볼 때 어떤 선수가 골인을 성공시킨 후 달려가 무릎을 꿇는 것을 보면 그는 개신교 신자이다. 어찌 생각하면 쇼맨십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골인의 기쁨을 먼저 하느님께 바친다는 자세가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인의 자세인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보면 그분들은 항상 ‘예수 마리아, 성모 어머님’을 찾았다. 깜짝 놀랄만한 일이 생겼을 때나 기쁜 일이 생겼을 때에도 ‘예수 마리아, 성모 어머님’을 찾았다. 감탄사처럼 입에 발려 예수님과 성모님을 불렀다. 그래서 어떤 신자가 열심한 구교우 신자인가 아닌가를 알려면 그가 ‘아이고머니’를 찾는가 아니면 ‘예수 마리아, 성모 어머니’를 찾는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정도이다.

먼저 하느님을 찾으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갚아주신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하다가 되지 않으면 하느님을 찾지 말고, 먼저 하느님을 찾고, 다음에 최선을 다하여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사람이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신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을 찾는 자세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며, 이를 어여삐 보시고 갚아주신다. 먼저 하느님을 찾는 사람, 하느님께 사랑과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참 신앙인의 모습이다.

이처럼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님을 찾은 자매의 믿음은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큰 믿음이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여기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라자로가 죽었다는 원망의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지 않도록 치유의 기적을 하실 수 있는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예, 주님 믿습니다.” 하고 대답했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습니다.” 하고 철저한 신앙고백을 한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고백이 결국 라자로를 소생시킨다. 주님께 대한 자매의 굳은 믿음이 라자로를 살린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은 죽은 사람까지도 살린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뿐이다. 믿음 없이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없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해주고, 우리를 가로막는 장벽을 제거해주는 하느님의 힘이다. 도저히 소생할 수 없는 라자로가 다시 소생하듯이 신앙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해주는 하느님의 힘이며 능력이다. 신앙은 또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게 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우리의 애통함을 감싸주시고 달래주시며 그래서 우리가 청하는 바를 들어주시는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을 느끼는 유일한 길이 곧 신앙이다. 신앙 없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다. 그들이 만일 신앙이 없었다면 마르타는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주실 줄 압니다.” 하고 주님께 매달리지 않았을 것이며 라자로의 소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믿음이 부족하다는데 있다. 그래서 하느님께 매달리고 간구하지 않는데 있다. 별로 기도하지 않으면서도 많이 기도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신앙이 깊지 않으면서도 열심하다고 자만하며, 그래서 자신의 신앙과 기도의 부족을 탓하기보다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느님을 몰인정한 분으로 생각하는데 있다.

마태오복음(17,14이하)을 보면 어떤 사람이 아들의 병을 고쳐주시길 예수님께 청한다. 자신의 아들이 간질병에 걸려 불 속에도 뛰어들고 물속에도 뛰어들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불러 고쳐달라고 청하였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했다고 예수님께 말씀드린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왜 이렇게 믿으려 하지 않고 비뚤어졌느냐?” 하고 탄식하신 후 마귀를 쫓아내어 그의 아들의 병을 고쳐주신다. 제자들이 “왜 저희는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예수님께 여쭙자,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약한 탓이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겨자씨란 들깨보다도 더 작은 씨앗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런 작은 믿음도 없다는 꾸지람이다. 어쩌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랍시고 믿음을 자랑하며 병을 고쳐준다고 했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믿음은 실로 보잘것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병을 고쳐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믿음이 부족함을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만 몰인정하다고 원망하고, 심한 경우 하느님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우리의 모습과 제자들의 모습이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셨다. 애통해하는 자매들의 모습을 보시고 비통해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실 정도로 그들을 무척 사랑하셨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가셨을 때는 이미 라자로를 장사 지낸지 나흘이나 지난 뒤였고, 그래서 라자로의 시체에서는 벌써 썩은 냄새가 나고 있었다. 라자로는 완전히 죽었으며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라자로야, 나오너라.”는 한 마디의 부르심으로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죽음의 세계에서 불러내시어 살리셨다.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눈물을 흘리시며 비통해 하실 정도로 지극했기에 완전히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것이다.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시체까지도 다시 살릴 수 있을 정도로 예수님의 사랑은 지극했던 것이다. 사랑은 그 모든 것을, 죽음까지도 뛰어넘는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처럼 우리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아버지이시다. 우리의 슬픔을 보시고 비통해 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애통해하는 자를 가엾이 보시고, 청하는 자들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시며, 따뜻한 정과 사랑을 베푸시는 자비의 아버지이시다. “하느님은 어떤 죄도 용서하시는 분, 애처롭고 불쌍한 꼴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시고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시는 분, 그 사랑은 그지없으시다.”(느헤 9,17)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이시다(루가 15,20).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연결시키는 통로가 곧 믿음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자매의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라자로를 죽음에서 살리셨다. 그런데 주님께서 “라자로야, 나오너라.”라고 부르심으로써 라자로를 소생시키신 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에서 소생시키신 것을 뜻하지만은 않는다. 영적인 소생까지도 상징한다.

“라자로야, 나오너라.”라는 주님의 부르심은 재산을 잃거나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꿈과 희망을 잃고, 삶의 목표와 용기를 잃고, 실의와 절망에 빠져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들, 살 의욕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매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부르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감옥에 갇혀 있는 자들에게 일러라. 어서 나오너라. 캄캄한 곳에 웅크리고 있는 자들에게 일러라. 나와 몸을 드러내어라.”(이사 49,9)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이기도 하다.

오늘 제 1독서 에제키엘 예언서에서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올려 이스라엘 고국 땅으로 데리고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의 기운을 불어넣어 살려내어 너희로 하여금 고국에 가서 살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영적인 힘과 기운을 불어넣어주시는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어떤 것으로 인하여 삶의 힘과 용기를 잃고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다면, 그래서 돌무덤과 같은 어두운 곳에 웅크리고 있다면 “라자로야, 나오너라.”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라자로를 불러내시듯이 캄캄한 무덤 속에 있는 우리를 불러내실 것이다. 주님께서 라자로의 손발을 묶고 있는 베와 얼굴에 감긴 수건을 풀어주어 가게 하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를 얽매고 있는 모든 것들을 풀어주시며 우리의 인생길을 생기 넘치고 활기차게 걷도록 하실 것이다.

사순 제 5주일인 오늘, 이제 사순절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진정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아버지이시다. 우리를 다정하게 감싸주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자 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우리가 어둠 속을 벗어나 기쁘고 활기차게 살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이시다. 라자로를 죽음에서 건지시어 살려내셨듯이 우리를 어둠의 세계에서 건져내시어 삶의 활기와 용기를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바로 그러한 하느님이심을 굳게 믿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인생이란 사순절을 걸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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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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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을 믿나이다.” 그러고 끝이야?

오늘 복음말씀을 보면 오빠의 죽음에 마르타는 원망 섞인 말을 합니다. 오빠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언질을 받지만, 그런 일이 지금 당장 일어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이시며, 살아서 믿는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에 고백은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시라고. 하지만 그것은 오빠의 죽음이라는 그녀의 현재와는 직접 관계가 없다는 듯한 고백이었습니다. 돌을 치우라는 주님께 거부반응을 보이는 그녀의 오빠 잃은 슬픈 현실과 고백 ‘사이’를 헤아려 보십시오.

마르타의 ‘사이’는 오늘 우리에게도 확인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하고 성가를 부르고 신앙의 진리를 입으로 고백을 하기는 하지만, 그 믿고 고백한 내용이 당최 내 삶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고백으로 끝나는 일이 많습니다. 현실의 얼굴에 손끝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는데, 이런 꼴 당하자고 성당 다니는 줄 아느냐고 하소연합니다. 그렇다 보니 열망이 식은 고백을 하게 되고, 삶을 은총으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십자가를 들었다 놨다 합니다. 사랑을 귀찮아합니다. 그러니 ‘세상의 소금’이어야 할 우리 삶이 싱거울 수밖에 없고, 그걸 보고 빈정거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고백은 살아 있어야 합니다. 말이나 노래를 통한 고백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겸손하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고백이, 사랑의 증거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지금 네 삶의 자리에서도 그러하냐? 그렇다면 지금 당장 “돌을 치워라.” 고백과 현실을 갈라놓는 돌을, 주님과 너를 갈라놓는 돌을, 이웃과 너를 갈라놓는 돌을 치워라. 입에 달아놓은 고백을 네 마음에, 네 얼굴에, 네 삶에 달고 살아라.

정식수 신부
  |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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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뼈들이 생명으로 다시 되돌아 온다

주님께서는 에제키엘에게 환시 속에서 사람 뼈들로 가득 찬 골짜기를 보여주시며 말씀하셨다. “에제키엘,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마른 뼈들이 생명으로 다시 되돌아올 수 있겠느냐?” 그 예언자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주 야훼님, 당신께서 그것을 가장 잘 아십니다”(에제 37,3). 뼈 하나하나가 그것의 다른 반쪽을 찾듯이, 뼈들과 뼈들이 털거덕털거덕 소리를 내었다. 그 뼈들은 근육들에 의해 서로 한 덩어리가 되었다. 살은 그것들을 에워싸고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살가죽이 살을 덮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그 몸들 위에 숨을 불어넣고 그들은 생명으로 되돌아왔다!

유배중인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은 저 깡마른 뼈들의 처지와 비슷했다. 하지만 주님께서 놀라운 일을 해내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고 다시 한 민족이 될 것이다. 계약이 처음으로 체결되었던 날처럼(레위 26,12), 다시 한 번, “주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실 것이고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될 것이다.” 주님의 약속은 얼마 후에 이루어졌다. 이스라엘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이스라엘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되돌아왔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에제키엘이 환시에서 보았던 일이 예수님에게서 현실로 드러났다. 죽었던 나자로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예수님과 나자로 가족 사이에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죽어있는 라자로를 보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그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슬픔에 함께 하셨다.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파괴하는 우리의 죽을 몸들까지도 다시 살리실 것을 확신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사랑하는 이가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죽어가는 오빠 라자로를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청한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가족의 우환에 간절한 기도를 드리자.

나궁렬 신부
  |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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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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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권한과 주시지 않을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2) 이 말씀은,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 자체이신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어디 다른 곳에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와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있는 생명력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라는 말씀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이쪽 세상에서 저쪽 세상으로 가는데, 그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부활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고 곧바로 하느님 나라로 직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에녹’은 죽지 않고 승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창세 5,24), 그리고 엘리야 예언자도 죽지 않고 승천했습니다(2열왕 2,11). 우리 교회는 성모 마리아도 승천하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종말과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게 됩니다(1테살 4,15-17). 그래서 “모든 사람이 반드시 한 번은 죽어야 한다.”라는 말은 맞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친다고 말해야 합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두 번째 죽음’을 겪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두 번째 죽음’은 종말의 심판 때에 영원한 멸망을 선고받은 사람이 당하게 되는 ‘영원한 죽음’입니다(묵시 20,11-15).

이 말씀에서, “살아서 나를 믿는”이라는 말씀은, 신앙생활과 회개와 사랑 실천 등은 이쪽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저쪽 세상으로 가면 할 수가 없습니다. 지옥으로 가면 벌을 받을 것이고, 연옥으로 가면 보속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 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라는 말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에 합당하게 충실한 신앙생활을 했다면, 아무도 탈락하지 않고 모두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실수로 누락되는 일도 없고, 불공평하게 차별대우를 받는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만’ 믿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무엇에 관심을 갖거나, 한눈을 팔거나, 그것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2)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어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예수님께 기도하지는 않고, 돈이나 권력이나 세속의 연줄 같은 것만 찾고 그것들만 의지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3)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이기 어렵고, 실감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요한 6,68).

4)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머릿속으로 믿는다고 생각만 하고,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생각이 아니라 ‘삶’입니다.

그리고 ‘부활과 생명’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고, 얻기를 희망하고 있는 ‘부활과 생명’은, 죽은 다음에 저 세상에 가서야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어서 그곳에서 완성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부활과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기도 하고, 지금 이곳에서 ‘부활과 생명’을 누리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물론 지금 누리는 ‘부활과 생명’은 미완성 상태이기 때문에 아직은 많이 부족하고 약하고 희미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부활과 생명’은, 또는 ‘부활과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은 신앙인들의 삶의 바탕이고, 살아가는 힘입니다. 이 힘은 세속의 그 어떤 힘보다 더 강력합니다.

박해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과시하면서 순교자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빼앗으려고 했는데, 그 박해자들이 빼앗은 것은 순교자들의 육신의 목숨뿐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빼앗지 못했습니다. 세속의 박해자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힘’이 순교자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힘’보다 약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부활과 생명을 믿고 희망하는 신앙인은,
순교자들이 그랬듯이, 어떤 고난과 시련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혹시 넘어졌더라도 다시 일어섭니다. 꺾이지 않는 그 모습 자체가 복음 선포이고, 신앙의 증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고 희망하는 신앙인은
부활과 생명의 ‘완성’을 향해서 능동적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를 보면, 무덤 앞으로 가신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하고 부르시기만 했습니다(요한 11,43).

무덤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걸어 나온 일은 라자로 자신이 한 일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서 일으켜 세우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일어나서 앞으로 걸어가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곁에서 지켜 주시고, 함께 걸어가시는 분이지만, 걸어가는 일 자체는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합니다. 능동적인 신앙생활이 바로 ‘살아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죄만 안 지으면 된다.”, 또는 “지옥에만 안 가면 된다.”라는 소극적인 마음으로, 또 수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지옥에 가는 것은 피할 수 있겠지만, 천국에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고, 부활과 생명을 얻는 것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아마도 연옥에 가서 아주 오랫동안 많은 보속을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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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0년 3월 29일
  |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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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   [의정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1] 902
781   [원주]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2] 600
780   [춘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2] 3052
779   (백) 부활 제5주일 독서와 복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7] 2247
778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성경 말씀 해설  [3] 94
777   [수도회] 행복한 목자 착한 목자  [6] 2418
776   [인천] 죽을때 후회하지 않을 인생  [6] 2546
775   [수원]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7] 2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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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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