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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부활.....누구와 함께 있는 것?
조회수 | 2,858
작성일 | 05.03.12
6년 전 알고 지내던 한 자매가 22살의 나이로 급성 백혈병 판정을 받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삶이 완전히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어쩌면 그 판정이 그녀에게 생명이 끊겨지는 죽음이 아니더라도 죽음과 같은 절박함과 절망감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앞으로의 희망의 나날들이 희미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녀가 언젠가부터 병원의 의사나 간호사나 주변의 사람들이 놀랄 정도의 독한 의지로 병과의 싸움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겨내기 힘든 고통과, 매일매일 받아야 하는 항암치료. 이를 악물고 이겨낸다고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고통을 이겨내려는 의지와 삶을 살아내려는 뜻이 다름 아닌 주님으로부터 발산되고 있다는 사실에서이다. 성서를 읽고 기도하고,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있다는 것. 그러한 그녀가 남동생의 골수이식을 받고 완쾌 되어가고 있다. 중간에 골반과 다리를 잇는 뼈의 파괴로 인공뼈 이식을 받는 아픔이 있었지만 이젠 완쾌가 다음달이라고 한다. 근 6년의 시간. 이젠 걷기도 하고 조금은 일도 할 수 있다. 물론 신앙생활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오늘 복음에서 죽었던 라자로가 예수님에 의해서 소생한다.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장면을 목격하면서 단지 죽었던 라자로가 살아난 것에 대해서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라자로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이고, 그 영광이 아들로부터 나오면서 예수님은 바로 부활이며 생명이라는 사실이다.

백혈병으로 죽음을 선고받은 그녀는 그 순간 그 모든 과거의 삶이 끝나버린 그 삶에서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그 순간 바뀌어진 그녀의 모습을 우리는 오늘의 복음말씀의 일부분인 마르타와 마리아의 말을 통해서 상기할 수 있다. “주님께서 함께 계셨더라면 그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 죽음의 판정순간 그녀는 이미 주님과 함께 있고자 소망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금 생명을 얻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비록 과거의 건강했던 삶이 아닐 지라도 이미 그 과거의 삶에서 죽었기에 그녀의 신앙으로 과거의 삶에 얽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새로운 삶을 얻었기 때문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다. 라자로 역시 주님께서 와주셨고 그분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난다. 죽지 않게끔 할 수 있음에도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기적의 치유만을 바라보려는 우리에게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리고 라자로를 살리시면서 당신 자신의 부활을 보여주시려는 것(라자로의 부활은 이미 예수님 당신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모습을 예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 자신이 세상의 빛이요 생명이요 부활임을 보여주시려는 것이다. 이미 백혈병을 앓고 있던 그녀에게서 주님의 영광은 드러났다. 그리고 그녀의 신앙으로부터 예수님께서는 부활이요 생명임이 드러났다.

죽음에서의 부활은 라자로와 같이 죽었던 몸이 소생하는 것에만 있지 않다. 얼마큼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려는 신앙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다.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계시면......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주실 것입니다.”라는 제2독서의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그분과 함께 살아가려 했을 때, 예수님은 이미 당신이 지니고 계신 생명과 부활을 주신다.

그것이 육적인 죽음으로부터의 새로운 생명을 얻는 부활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겪는 모든 고통과 절박함, 절망감, 외로움 이라는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생명과 부활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그분과 함께 하려고 하는 의지에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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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유승학 마티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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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에 있는 보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歸天’中 -

이 구절을 되 뇌일 때마다 다시금 저의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사순절의 중반을 훌쩍 넘어 주님 수난 성지주일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이 시기에 지금까지 지나온 나의 삶을 돌아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낯선 현상으로, 때로는 두려움처럼 느껴지는 벽이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에게 질문합니다. “지금 간절히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와 가족들의 건강...” “그렇다면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닌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있어 죽음은 어떠한 것입니까?”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우리 모두는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생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순서와는 무관하게 나약한 우리 스스로를 인정하면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이 죽음.

오늘 복음말씀에서 우리는 라자로가 되살아나는 그 곳에 함께 합니다.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죽은 네 자신으로부터 일어나거라’

지금 제가 버려야 할 것을 돌이켜봅니다. 지금 제 스스로 어떤 것을 바꾸어야 할지 계획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아니 나를 위해 아무런 변명 없이 십자가에서의 최후를 맞이하셨습니다. 그분에게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드릴 것을 찾아봅니다.

국민학교(초등학교)때 소풍을 기억하십니까? 소풍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바로 ‘보물찾기’가 아닌가합니다.
훌쩍 커버린 지금 생각해 보면 보물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찾기 어려운 곳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내 가까운 곳에서 찾아보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던 돌틈이나 나무틈에 보물은 있었습니다. 그 보물의 내용이 공책 세권이었지만 우리는 그 보물을 친구들보나 먼저 찾기 위해 뛰어다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주위에 보물들을 즐비하게 늘어놓으셨습니다. 나의 마음이, 나의 눈이 멀리 있는 것을, 큰 것을 찾으려 했기에 가까이에 늘어놓으신 하느님의 선물을 찾지 못하고 불평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족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힘들어 넘어지고 쓰러져 있는 나를 향해 당신의 팔을 뻗어주시고, 내 작은 속삭임에도 귀 기울이시는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간부터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아멘.

서인덕 베드로 신부
  |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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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성당을 다니면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키워 나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가서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보게 되었어요.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그는 기도 중에 주님께 이렇게 따지기 시작합니다.

“주님,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불행하게 살아야 합니까?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이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이들보다 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당신은 정녕 모르시는 것입니까? 왜 당신은 이렇게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으십니까?”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님의 겸허한 음성이 들려 왔다고 하네요.

“그래서 내가 너를 거기에 보내지 않았느냐!”

주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죄 많이 지으라고? 하느님 나라에서 할 일이 없어서 대충 시간 때우고 오라고 보내셨을까요?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이 세상에서 고생이나 신나게 하고 오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지금 나를 바로 이 자리에 초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기보다는 나의 뜻을,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세상의 일을 생각하면서 하느님과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복음 말씀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 정답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십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 근처의 동네로 약 3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결국 베타니아로 떠난다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반대하여 제거하려는 유다 지도자들이 가득한 곳으로,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곧 죽음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라자로는 죽어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소식을 듣고 곧바로 가지 않으시고 계시던 곳에서 이틀이나 더 머무르다 라자로가 있는 베타니아로 떠나셨다는 사실을 기억했을 때, 예수님께서 통보받았을 때에는 이미 라자라고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미 늦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당시의 랍비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자기 육체 근처에서 계속 머물다가 나흘 째 되는 날에 비로소 영혼이 육체를 떠난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또한 나흘이라는 숫자는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하는 기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부활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태였음을 보여주지요.

이렇게 이미 늦었는데, 또한 죽을 수밖에 없는 길인데도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이 길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담겨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십니다. 그 결과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살 수 있게 되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희망을 전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시도록 한다면, 우리도 죽음을 넘어서 하느님 안에 부활하여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순 제5주일. 이제 사순시기의 막바지에 들어섰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얼마나 부합되게 살았는지를 반성하면서, 예수님의 사랑 실천에 함께 동참하는 우리들이 될 것을 다짐합시다.

조명연 신부
  |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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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면 구원받는다. 기도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우리 성당은 현재 신축중이어서 지하 소성당을 임시로 사용하고 있다. 반지하라서 완전 지하보다는 조금 낫기는 해도 불을 켜지 않으면 어두침침하다. 사정이 이러하여 사무실도, 집무실도, 임시 성당도 뒤엉켜 생활하고 있는데, 이런 불편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는 교우들을 보면 참 흐뭇한 마음이 들곤 한다.

어느 날인가 성당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어떤 교우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수심 가득한 얼굴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대충 ‘무슨일일 것이다’ 짐작이 되긴 해도, 방해가 될 것 같아 조용히 일을 마치고 나오는데,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끙끙(?)대며 기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다워 보였고 “과연 어떤 보물을 얻었을까?” 은근히 궁금하기도 했다.

신앙인은 만사(萬事)가 하느님 안에 있음을 깨닫고 온전히 의탁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이다. 스스로 무력해짐으로서 더 높은 비상을 꿈꾸는 초월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또 한 눈에 보이는 쉬운 길도 있지만 굳이 마다하고 십자가의 길을 걷는 우직-현명한 존재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삶의 모범을 보여 주고 계시다. 사랑하던 라자로의 고통스러운 병과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그것으로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아들도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요한 11,3)

“아버지, 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제 청을 들어주시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여기 둘러선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 주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요한 11,42)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 그분께 대한 온전한 신뢰, 그리고 소명의 완수,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는 삶의 모범이고 가르침이다.

시간속을 걷다보면 세파의 풍랑이 우리를 사정없이 뒤흔든다. 예수님도 그러셨고 우리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벅찬 감격이 있는가 하면, 상상도 못했던 고통도 있다. 일희일비(一喜一悲)의 격랑 속에서 우리도 무엇보다 먼저 끙끙대며 기도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갖출 필요가 있다. 그래서 자꾸만 흐트러지는 우리 삶의 초점들을 늘 모아들이고,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헤아려 보아야 한다. 이럴 때 우리 눈에 주님도 보이고, 감사도 보이고, 신뢰도 보일 것이다. 반대로 이렇게 하지 않을 때 우리 눈에는 세상만 보이고, 돈만 보이고, 미움만 보이게 될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무엇이든 다 할 자유가 있지만 무엇이 자신에게 유익한 것인지 잘 식별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1고린 6,12 참조).

사순시기를 보내면서 “기도하면 구원받는다. 기도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어떤 성인의 말씀을 깊이 새김질 해 보자.

박문서 신부
  |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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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진지하게 살펴 가고 있는 사순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교회는 사순절을 보내는 신자들에게 ‘세례를 회상하고, 세례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보속하고, 더 큰 열성으로 하느님 말씀을 듣고, 기도에 전념하고, 파스카 신비의 경축을 준비하자’고 권고합니다. 세례를 준비하는 예비자들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야 기쁘게 갈 수 있습니다. 이 희망에 대한 갈망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형성해 가야 합니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새로운 방식이고 시작입니다. 꼭 가야만 하는 힘든 시간이기도 하지만, 또한 은총과 자비가 풍성한 소중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죄에서 죽고 새로운 삶으로 태어나는 것이 세례입니다. 세례를 통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얻게 되었고,(요한 4, 5-15 참조) 죄로 인한 죽음에서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생명으로 일으켜 줍니다.

오늘 예수님은 무덤에 묻혔던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실한 표징을 보여 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 25)고 묻습니다.

서로 다른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는 잠시 지나가는 육신의 생명이 있고, 또 하나는 영원히 사는 영적인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 지상에서 사는 육신의 생명은 한시적인 것으로 죽지 않으려고 숨기고, 감추고 잊으려 하지만 헛된 속임수일 뿐입니다. 이 세상은 죽음(어둠)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니라고 부정하려 합니다. 요즈음 문제가 되는 성형광고 내용이 그렇습니다. 온갖 것으로 분장하고, 가리라고 유혹합니다. 모두가 지금의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헛된 희망을 심어줍니다. 우리는 광고판 뒤의 적나라한 현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도 육체적으로는 목이 마르고, 또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죽음까지도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이란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첫 번째 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유배시기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인간이 처한 상황이기도 합니다. 죄의 어둠으로 인해 죽음이 가득한 거대한 무덤과 같았고, 잃어버린 하느님 나라에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라로의 죽음을 슬퍼하시고 눈물을 흘리신 것은 우리 죄로 인한 죽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에제 37, 12) 우리를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겠다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일을 보내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생명이 전해지는 세례의 소중함을 상기하도록 합시다.

<인천교구 최형호 루카 신부>
  |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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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멈칫거림

오늘 복음 말씀을 읽어 내려가면서 이러한 물음을 던져봅니다. 과연 우리 인간은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매번 반성하고 고백하고 다짐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비참함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용기 내어 청해봅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용서해달라고, 다시금 일으켜 세워달라고…….

오늘 복음의 주요 사건은 라자로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일으켜 세우신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저는 라자로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생사를 오갔던 라자로의 모습에서 우리 신앙인의 모습을 떠올려 보고자 합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라는 말씀과 함께 죽음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건너온 라자로. 천으로 감싼 채 무덤에서 덤덤히 걸어나오는 그의 모습은 마치 세상의 모든 악의 유혹에서 벗어나고픈 인간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는 듯합니다. 더러운 것을 보고 싶지 않고, 흉측한 것을 듣고 싶지 않고, 나쁜 것을 말하고 싶지 않고, 어리석은 행동을 행하고 싶지 않은 새롭게 태어난 인간으로서의 본능말입니다. 마치 새 옷에 먼지 묻히기 싫어 고이 놔두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허나 인간은 세상과 단절한 채 평생을 지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그 어둠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온갖 유혹 속에서 우리가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익숙해짐에 대한 두?*遲?갖는 일입니다. 어둠, 죄, 악에 대해서 꺼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멈칫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빛에 가깝게 서 있을 때, 선을 향해 나아가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그와 상충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꺼려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공간 속에서 우리는 죄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입니다. 사방에서 다가오는 유혹들 가운데에서 항상 이겨 내리라고 자만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이 노력해야 할 부분은 죄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죄에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있고 준비하고 반성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 그분을 알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우리는 점차 죽음이 아닌 생명**** 다가설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을 준비하고 있는 지금 이 시간들, 우리는 단순히 내 잘못을 반성하고 고백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유혹들에 대해 익숙해진 나의 변질된 마음을 되돌려야 할 것 입니다. 나의 잘못에 대해서 당연함과 익숙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멈칫할 수 있는 내 자신이 될 수 있게 준비할 수 있는 사순시기가 됐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의 “이리 나와라”라는 말씀 따라 어둠에서 나와 빛으로 나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청해봅니다.

▦ 인천교구 곽승환 스테파노 신부 : 2017년 4월 2일
  |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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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부활이요 생명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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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하루 평균 국내 사망자 수는 약 760명이라고 합니다. 제가 사목하고 있는 간석4동 성당도 작년 한 해 50여 건의 장례가 있었으니, 매주 몇몇 가정에서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라는 아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때, 우리는 한없이 아파하고, 때로는 바닥까지 내려가는 체험을 합니다. 죽음의 문제는 돌아가신 분보다는 남아있는 사람에게 더 가혹하기에 그렇습니다.

사실, 죽음을 반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의학기술의 발달로 평균 수명이 늘어가고는 있지만, 죽음은 여전히 해결할 수 없는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현실이 될 것이지만, 그 현실이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는 의외성으로 인해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마르타를 향해, 아니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나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부활이실 뿐만 아니라 생명이시라고 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사순절의 8부 능선에 다다랐습니다. 사순절은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인 ‘부활’에로 이끌어줍니다. 분명, 예수님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아픔과 좌절을 희망으로 바꾸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어둠 속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밝은 빛을 선사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신 이유! 십자가상의 고통과 죽음을 당하신 궁극적인 이유!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어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시기 위함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끝내시기 위함입니다.

“이리 나와라.”(요한 11,43)

말씀 한마디로 부패하여 냄새나는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이십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분은 축 늘어진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살려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의 죽음은 극복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당신께서 말씀하셨듯이,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통해, 죽음을 넘어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과거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루카 12,29)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채 살던 내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마태 6,33)을 찾고,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마태16,24)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온전한 부활 신앙 안에서 부활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덧붙여, 오늘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슬픔속에 있을 분들에게 간곡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슬픔과 좌절을 걷어내십시오. 결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언젠가 나도 부활할 것이요, 사랑하는 사람도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니, 눈물을 거두고 힘내어 부활의 삶을 살아내시길 바랍니다.’“당신께서 하신 일들 얼마나 경외롭습니까!”(시편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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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신대근 마르코 신부
2020년 3월 29일 인천교구 주보에서
  |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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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기보다, 함께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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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희로애락의 순간을 만나게 됩니다. 기쁨과 즐거움만이 가득하면 좋으련만 화가 북받치고 고통에 짓눌리는 순간도 찾아오지요. 이런 순간이 찾아오면 우리는 하느님의 도움을 갈망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도움으로 고통을 넘어서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무런 답을 얻지 못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그저 마주할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그러면 마르타와 마리아처럼 애끓는 마음을 우리는 하느님께 토로하기도 하지요.

이런 상황에 놓여있는 분들을 뵐 때면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지 참 막막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크나큰 고통을 겪고 있는 라자로와 그 가족에게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요한 11,4)라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위안이 될 만한 말씀을 하시기보다 그 병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하시는 말씀은 큰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할 적절한 말씀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고통을 방관하시겠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틀을 더 머무르시는 동안 무엇을 했다고 명확히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늘 머무르시는 곳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돌보셨으니 늘 하시던
대로 하고 계셨겠지요. 그리고 그곳에는 라자로와 마찬가지로 절실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즉 라자로와 그 가족이 겪는 고통과 슬픔은 세상 안에 있는 수많은 일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으로 모든 것이 끝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고통 너머의 기쁨이 하느님의 영광으로 분명히 드러남을 예수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요한 11,37)라며 물음을 던졌던 사람들처럼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께서 애초에 고통이라는 것이 없게 하셨으면 되는 것은 아니었는지 의문이 들곤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세상의 많은 고통을 방관하신다고 따지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러한 세상의 많은 고통 앞에서 나는 무얼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죽음’이라는 어찌할 수 없고 손 쓸 수 없는 고통을 우리에게 보여주지만 우리의 삶에는 수없이 크고 작은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고, 이러한 순간들 대부분은 하느님의 뜻대로 서로가 함께하고 작은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으로 충분히 해소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고통 없는 참된 행복의 하느님 나라를 바라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어떠한 실천을 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순시기 동안 고통받고 어려움 속에 놓여있는 다른 이들을 위해 시작한 우리의 실천들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사순시기의 끝자락이고 이미 거의 다 지나갔으니 다음번에는 더 열심히 하리라 하며 내년으로 넘길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서로의 어려움과 고통에 손 내미는 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간다면 고통을 넘어서는 기쁨으로 2023년도 부활을 모두가 함께 맞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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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신희섭 암브로시오 신부
2023년 3월 26일 주보
  |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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