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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그리스도 신앙인은 이웃을 위해 봉사해야
조회수 | 132
작성일 | 21.11.17
오늘 복음(요한 18, 33-37)은
로마총독(總督)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한 내용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당신이 유대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유대인들이 당신을 고발한 죄명(罪名)이라고 답하십니다.  

빌라도는 유대아를 통치하는 로마제국의 총독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종교 문제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그는 오로지 유대아를 무사히 통치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고발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은
빌라도의 관심을 끌기 위해 로마의 통치에 저항하는 정치범,
곧 유대인들의 왕을 사칭한다는 죄목으로 예수님을 고발하였습니다.  

십자가형은 당시 로마제국의 통치에
저항하는 식민지 주민을 처형하는 수단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처형한 후,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죄목을 써 붙였습니다.  
그 죄목은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정치범으로 처형된 사실을 입증합니다.  

로마법에는 식민지에서 사형 언도와 집행은
총독의 권한에 속하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제거하는 데는
빌라도의 동의와 협조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들은 동족인 예수님을 없애기 위해
그들이 증오하던 로마총독에게 그를 정치범으로 만들어 고발하였습니다.  
그분을 없애기 위한 편법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로 당신의 부하들이
당신을 위해 싸워주지 않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왕국에서는 부하들이 싸우고,
빼앗고, 점령하여 왕을 떠받들고 보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는 그렇게 싸우고
빼앗고 점령하여 통치자를
영광스럽게 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진리를 증언하려고 이 세상에 왔으며,
진리에 속한 사람은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진리가 이 세상에 나타났고,
예수님은 그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십니다.

우리는 먼저 왕이라는 단어를 이해해야 합니다.  

일본과 영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에 아직도 왕이 있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라는 왕이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 단어를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왕은 인류 역사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구시대의 유물입니다.  
그리스도 왕 축일은 사라져가는 그
런 왕으로 그리스도를 기억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에게 왕은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백성에게 먹을 것을 주고,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들어
“땅 끝에서 땅 끝까지”(시편 2,8)
다스리게 해주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초기신앙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것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의 일입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돌아가신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빌라도에게 당신이
‘진리를 증언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증언하신 진리가 무엇인지「복음서」에 물어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서」 8장에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이름으로 그 여인을 돌로 치러 하고,
예수님은 그들의 손에서 그 여인을 구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당신을 단죄하지 않습니다.”(요한 8,11).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요한 8,40)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요한 8,32)고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증언하신
하느님의 진리는 사람을 용서하고 살리는 데에 있습니다.  

권력으로 사람을 심판하고 짓밟는 일과,  
미움으로 사람을 버리고 죽이는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인간이 출현하기 전 동물에서 진화하는 과정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은,  
동물적 본능의 잔재(殘在)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증언하신 진리는 용서하고 살리는 데에 있었습니다.  
용서하고 살리는 것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하느님 자녀의 참다운 자유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 혹은 왕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인은
예수님이 증언하신 진리를 실천합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읽어내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이 우리를 위한 진리입니다.  
하느님은 용서하고 살리십니다.
우리가 배워서 실천해야 하는 진리입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 것이 아니다.”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나라는,
힘으로 혹은 권력으로 판단하고, 군림하고,  
억압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용서하고 살리는 자유를 실천하는
그리스도신앙인이 따르는 왕이십니다.

주일 미사와 고해성사에 충실하다고
그리스도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남부럽지 않게 살고,  
주변 사람들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알아주니까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괜찮은 사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진리와는
아무 관계없는, 이 세상의 괜찮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남이 보아서 괜찮고,  
내가 보아서 훌륭하면,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증언하신 진리가 삶 안에 살아 있어야 합니다.  
용서하고 살리는 하느님이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계셔서,  
인간 본연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죄에 대해 벌을 주고,  
인간이 율법을 지키고 제물을 바친 그만큼 용서하고
구원하신다고 유대교는 가르쳤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이 그들에게
큰 권한을 주셨다고 주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율법의 이름으로 죄인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에게 장애인, 병든 이, 가난한 이,
실패한 이들은 모두 하느님이 버린 죄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의 그런 가르침을 비판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용서하고 살리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진리를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하들을 희생시키며,  
자기 스스로는 명예롭게 군림하는 이 세상의 높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신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아서,
인류 역사 안에 ‘내어 주고 쏟는’ 삶의 진리를 발생시켰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나라의 일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왕이십니다.
그 나라에는 우리의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아니라
우리가 자유롭게 실천하는 헌신과 봉사가 기본 질서입니다.

오늘 그리스도 왕 축일은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진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 진리는 지배와 억압이라는 이 세상의 악순환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하느님의 참다운 자유를 살게 해 줍니다.  

‘내어 주고 쏟으신’ 예수님을 성찬에서 모시는 그리스도신앙인은
이웃을 위해 봉사하면서 하느님의 자유를 삽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으로 나타내신 하느님 나라의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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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2018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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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 성월을 맞으면 어릴 적, 왠지 엄숙하고 갈앉았던 성당의 분위기를 추억하게 됩니다. 가령 맨 앞줄에 전용석을 가지셨던 할머니들의 뒷모습에서 엿보이던 간절함이랄지, 위령 성월에 세상을 떠나면 하늘 문이 활짝 열려서 곧바로 천국에 들어간다던 큰 수녀님의 속삭임도 곁인 듯 가까워지곤 합니다. 물론 신학적 근거는 없지만 저는 온 교회가 한 마음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바치는 호소를 하느님께서 외면하실 리가 없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더욱 위령 성월의 기도에 마음을 모읍니다. 그리고 삶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려 노력했던 분들을 기억하며 기립니다.

오늘 빌라도는 주님을 향해서 “나는 유다인이 아니잖소?”라며 무시하며 비웃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하찮은 세상 권세로 허세를 떠는 빌라도에게 당신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십니다. 밉살맞은 빌라도에게도 진리를 감추지 못하는 주님 모습에서 새삼 세상의 어느 누구도 당신 사랑에서 배제하지 않는 주님의 자비심을 봅니다. 죄인을 온통 껴안아 품으시는 그분의 진실함을 만납니다.

이렇게 거짓말을 모르는 분의 순수를 그리다가 문득 2019년에 세상을 떠나신 삼촌 신부님이 떠올랐습니다. 늘 천진한 표정으로 지내시던 삼촌 신부님의 삶은 지극히 소박했음에도 세상을 떠나신 후에 전해 듣는 이야기가 감동이기에 그렇습니다. 여태, 함께했던 본당 가족들로부터 신부님의 삶을 따라 살고 있다는 고백을 듣게 되니, 해맑은 아이처럼 낮은 삶을 사셨던 삼촌 신부님의 진정한 승리라 생각됩니다.

얼마 전에도 삼촌 신부님의 옛 본당 신자분의 얘기를 들었는데요. 택시를 타면 항상 기사님께 팁을 주시는 삼촌 신부님께 이유를 여쭈었더니 “예수님과 늘 함께 있으니까 예수님 몫을 챙겨드리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시더랍니다. 이후 그 자매님도 줄곧 팁을 주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매사에, 예수님과의 동행을 기억하는 참 좋은 방법을 배운 무딘 조카는 세상을 떠난 후에 남은 이들에게 간직된 그리움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선물해주신 주님의 향기라 싶었습니다.

지난여름, 세상을 떠나신 본당 자매님은 교회 일에 충실하셨고 레지오 활동에도 매우 열심이셨습니다. 레지오 장을 치르는 게 소원이라서 더 열심을 내는 것이라고 늘상 말씀하셨는데요. 삶의 막바지,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임시 퇴원을 해서 병자성사를 받으실 만큼 열정적인 믿음인이셨지요. 그런데 자녀 중에 신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레지오 장을 청하지 않아서 자매님의 평생 바람을 이루어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그분을 위한 연미사가 없다는 사실이 마음 아팠습니다. 이야말로 믿음인의 ‘불상사’라 싶었습니다.

신자들에게 “이제부터 하루에 1000원씩 5년 정도 모으자”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장례미사와 백일미사를 준비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천국 길을 예비하자고 당부드렸습니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이 긍정해주셨는데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이후에 본당 미사에서 그 자매님을 위한 연미사가 계속 봉헌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소속되었던 레지오 단원들이, 자매님을 기억하는 많은 교우분이 그 자매님을 위한 연미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마음을 모아주고 계신 것입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하루하루가 감격입니다. 쉼 없이 봉헌되는 자매님의 연미사에서 제 영혼은 대책 없이 화사해지곤 합니다. 이 복되고 복된 일을 소문내는 심정, 이해되시지요?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알면서 지은 죄, 몰라서 지은 죄, 무의식적으로 행한 죄까지도 속속 드러날 ‘그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생에서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일은 죄와 죽음의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죄와 죽음에 관한 논의를 꺼립니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죄와 죽음의 치명적이고 결정적인 사안을 외면하도록 영혼을 마비시키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긴박한 현실을 세상에 알리는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죄의 감옥에서 신음하는 세상에 그분의 생명과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선물해 줄 의무가 생겼습니다.

성경은 “율법은 장차 일어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히브 10,1)라고 증언합니다. 이렇게 그림자는 참모습이 존재할 때 생기는 것이고 그림자는 실제로 ‘있는’ 것만을 반영한다는 점을 부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주님을 그대로 반영하는 사랑의 그림자가 되어야 할 것이라 헤아립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그림자가 되어 그분 닮은 삶을 살아냄으로 이 세상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어집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에나 항상 사랑과 연민으로 우리 곁에 계신 그리스도 왕을 찬미해 드리는 오늘, 그분이 그립습니다. 그리운 마음에 그분의 사랑이 차오릅니다. 벅차오른 마음을 시편 마지막 구절에 실어 봅니다.

“숨 쉬는 것 모두 주님을 찬양하여라.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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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2021년 11월 21일 가톨릭신문에서
  | 11.20
498 81.6%
왕(王)은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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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력에 따르면 오늘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며 올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나의 모습을,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하나의 ‘끝’은 새로운 ‘시작’에 대한 각오를 새롭게 하여 주기 때문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왕이시라는 것은전체 전례력을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내고 있는 축일이 지칭하고 있는 ‘왕’이라는 칭호는 무엇보다도 예수님 생애의 처음과 끝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당신 생애의 처음에는 ‘유다의 왕’을 찾는 이들을 별이 구유로 인도해 주었었고, 당신 생애의 마지막에는 욕설로 십자가 위에 적혀 있었습니다.

구유에서 십자가까지 왕으로서는 별난 경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힘 있는 자들의 편에 가담하셨더라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분은 아웃사이더들과 주변을 기웃거리는 이들의 편에 섰기 때문에 돌아가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지내고 있는 축일의 그 왕입니다. 우리가 이 왕을 따르려면 잘못된 왕의 환상으로부터 탈피해야 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부와 명예가 아닌 가장 연약하고 비천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정한 왕으로 세상에 우뚝 서신 이유는 사랑의 완전한 실천가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은 한마디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 가르치시는 모든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과 용서와 평화 그리고 겸손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의 왕직을 받았습니다.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왕의 모범을 따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왕직은 한마디로 봉사직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그러한 삶을 사셨고 제자들에게 하신 가르침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실로 왕으로 섬긴다면, 우리는 예수님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것을 함께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사랑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시면서 마침내는 제자들의 발까지 씻겨주는 가장 겸손한 왕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베풀고 용서하며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왕직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가장 낮은 곳에서 겸손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가장 높은 곳에서 영광을 받는 이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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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기태 세례자 요한 신부
2021년 11월 21일 ‘주보’에서
  |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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