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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사랑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조회수 | 58
작성일 | 19.07.12
[춘천] “사랑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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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과 율법의 완성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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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낱말을 설명해 맞추는 TV 노인 프로그램에서 ‘천생연분’을 설명해야 하는 할아버지,

“여보, 우리 같은 사이를 뭐라고 하지?” 할머니 답,

“웬수!” 당황한 할아버지 손가락 넷을 펴 보이며

“아니, 네 글자로!” 할머니 대답,

“평생 웬수!”???

우리가 안고 있는 슬픔은 저 멀리 외계의 것도 아니오, 타지방 사람들에게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가까이 있는 이웃이나 집안 식구들에 의해 만들어 지는 아픔이요, 상처인 것입니다. 너무 자주 부딪치며 살아야 하기에 그 상처에 대한 치유가 그토록 어렵고 슬픈 것입니다. 특별히 집안 식구들을 사랑하고 용서하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마태 10, 36)고 하셨을까요.

성 요한 베르크만은 세상을 떠나기 전 이같이 고백하였다고 합니다.

“수도 생활에서 가장 큰 극기는 형제들과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성인조차도, 그것도 일생 하느님을 사랑하며 살겠다고 약속한 수도자들이 수도원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그토록 어려웠다는 고백이 됩니다. 때문에 사랑의 사도인 성 요한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 20~21)

유다인의 오랜 경전인 탈무드에는 사랑에 대한 이 같은 아름다운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열두 가지 강한 것이 있다. 그 첫째는 돌이다. 그러나 돌은 쇠에 의해 잘려지고, 쇠는 불에 녹아 버린다. 불은 물을 이기지 못하고 구름 속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구름은 바람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 그러나 바람은 인간을 불어 날리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은 공포에 의해 비참하게 위축된다. 그 공포는 술에 의해 사라진다. 술은 잠을 자면 깨어 버린다. 잠은 죽음만큼 강하지 않다. 그런데 그 죽음조차도 ‘사랑’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모든 율법과 계명의 완성인 위대한 사랑에 대하여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1코린 13, 7~8)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사랑>

7살 짜리 장애아가 이모 집에 놀러 갔습니다. 이모가 뜨거운 차를 타오려다 그만 컵을 깨뜨렸습니다. 그 바람에 이모는 손을 데어 아파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이모부는 깨진 잔을 쓸어모으고 걸레로 닦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애인 조카가 이모부에게 “이모부, 이제는 이모 손을 만져 주세요. 이모가 손을 데었잖아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 무엇이 중요하고 급한지 장애를 가진 아이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상인이고 어른인 우리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이모부는 무엇보다 먼저 달려가 아내의 손을 붙잡고 “여보, 어디 다치지 않았어?”라고 말했어야 합니다.

가족이, 이웃이 무엇을 원하는지 살피는 것, 그들의 마음을 조금은 읽을 수 있는 것, 그렇게 큰일은 아니어도 작은 배려의 마음에서부터 사랑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너무 크고 부담스럽게만 생각하기 때문에 실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 30, 14)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돌아갈 곳이 있는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분명 은총이며 희망입니다. 우리가 돌아갈 본 고향,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는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 지상에서 끊임없는 사랑을 나누었던 사람들만이 꿈꿀 수 있는 곳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최후의 심판’ 가르침에서 이렇게 단호히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

한정된 시간에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 왔다가 떠나는 이들은 반드시 살아남은 이들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살아보니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부족합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후회 없이 사랑하십시오”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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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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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자비로운 이웃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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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율법 교사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렇게 질문합니다. 율법 교사는 누구보다 율법을 잘 알고 있기에, 굳이 예수님께 질문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며,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 고 율법 교사에게 물어 보십니다.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 10,37)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자비를 베푸는 일’ 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여행 중이던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루카 10,33)고 합니다. 자비를 베푸는 데 있어 ‘가엾은 마음’이 드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곤경에 처했을 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눈물이 나고 가슴이 미어지면서 내 일처럼 아파합니다. 당연합니다. 그들은 이웃이 아니라 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이라는 뜻이 국어사전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1.나란히 또는 가까이 있어서 경계가 서로 붙어 있음. 2.가까이 사는 집 또는 그런 사람. 이웃은 애석하게도 사랑스러운 이웃 또는 착한 이웃만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어떤가요? 매일 쓰레기를 내 집 앞에 버리고, 모이기만 하면 내 흉을 보고, 그것도 모자라 피해까지 입히는 사람이 내 이웃에 살고 있습니다. 자! 그 사람에게 “성당에 함께 갑시다.” 라고 말할 수 있겠는지요?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큰 도전이며 요구입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에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가능하겠지요. 그에 앞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구원에 대해 진정으로 염려하기에 “성당에 한번 가봅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의인들은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 중에 과연 의인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이웃, 나와 맞지 않는 이웃, 내가 싫어하는 이웃에게 “성당에 함께 갑시다.” 라는 권유로 하늘에 보화도 쌓고, 이웃도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하면 1석 2조가 아닐까요? 자격이 있어서 하느님을 믿고. 자격이 있어서 구원을 받고. 자격이 있어서 전교를 하고. 자격이 있어서 성당에 다닌다는 착각은 이제 그만!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자비. 이웃의 자비’로 신앙인이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이웃에게 자비로운 신앙인이 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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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고봉연 신부
  |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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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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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유명한 ‘모나리자’ 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김요한님의 『응원』이라는 책에서는 ‘모나리자’ 라는 작품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림 속 모나리자의 눈길은 보는 이를 따라 움직이면서 어느 각도에서도 정확하게 일직선으로 보는 사람의 눈과 부딪치게 되는데,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눈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 모나리자의 그림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연구한 사람 중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이 그림을 세계 최초의 명화라고 하는가? 왜 루브르 박물관의 많고 많은 그림 중에서 그 작품만을 방탄유리로 보호하고 있는가? 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67세의 나이에 죽기까지 그 그림만을 자기 옆에 걸어 두었는가? 왜 그가 열 번 이상시체를 해부하면서, 특히 얼굴을 세심하게 관찰했을까? 왜 프랑스와 1세가 그 그림을 자기 소유로 했다가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했을까?’답은 눈길이 마주치는 그림은 세상에 오직 ‘모나리자’ 밖에 없고, 또 그런 기술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에게 눈길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바라보는 눈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눈길은 곧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기 때문에 상처 받고 원망합니다. 항상 누군가를 위한 ‘모나리자’ 가 되어 주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먹고 마시며 일하며 관계하는 삶의 현장에서 누군가를 위해 사랑의 눈길로한 사람의 영혼을 만져주고 응원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에게 사랑의 눈길로 ‘모나리자’ 가 된 사람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사제도 아니요, 레위인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방인이라고 차별받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수만 명의 사람들에게 눈길을 맞춰주신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나는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고…….우리의 가정과 이웃과 본당 공동체 안에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 에게 ‘모나리자’의 사랑의 눈길을 마주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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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박재현 시메온 신부 : 2016년 7월 10일
  |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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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이웃을 사랑하자-이웃이 되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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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 날씨가 무덥습니다. 생각으로나마 시원한 상상을 하며 겨울을 떠올립니다. 겨울 하면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절”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성탄 즈음 길거리에선 흥겨운 캐롤송이 흘러나오고 발길을 멈추게 하는 구세군의 자선냄비 종소리도 들립니다.

어느 해 성탄절 무렵, 큰 백화점 앞에서 “딸랑딸랑, 불우이웃에게 온정의 손길을 보냅시다.”하는 자선냄비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앞을 지나가던 한 스님이 유심히 지켜보다가 심사가 뒤틀렸는지 옆에 자리를 깔고 “딱딱딱,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목탁을 치며 염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선냄비 입장에선 아주 심한 훼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게 뭐람, 종교 간에 싸우는 것도 아니고”라면서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이러니한 광경에 웃음을 터뜨리며 스님의 모습을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염불을 외며 절을 하였습니다. 스님 앞에도 차츰 돈이 모였고 추웠던 날씨는 슬슬 눈까지 내렸습니다. 그러나 스님의 염불과 절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이에 질세라 구세군의 종소리도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어스름한 저녁이 되어 종소리가 그치며 자선냄비는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스님도 일어났는데, 자신 앞에 수북하게 쌓인 돈을 모두 집어 들고 자선냄비에 ‘탁탁’ 털어 넣었습니다. 그리곤 합장을 한 채 인사를 하며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행인 하나가 쫓아가 자선냄비에 돈을 넣은 이유를 물었습니다. 스님이 대답했습니다. “나도 무엇인가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행인이 “아니, 스님은 크리스챤이 아니지 않습니까?”하고 말하니 스님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이웃을 돕는 데에 부처님이 따로 있고 예수님이 따로 있습니까? 모두가 사랑 한가지 아닙니까!”

오늘 복음에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는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이웃의 개념’ 자체를 바꾸십니다. “사제, 레위, 사마리아 사람, 이 셋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의 말씀은 동료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이가 이웃이며,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절친한 이웃이 되어 주어서 도움을 베풀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이웃은 나와 가까운 이들만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으로 가까워지는 모든 사람입니다. 이웃 사랑은 생각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매사에 모든 이에게 참된 이웃이 되기 위해 ‘사랑을 베푸는 사람’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할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사회·경제적인 구조적 폭력에, 우리 무관심의 폭력에 쓰러진 이들이 있습니다. 탈북자들, 실직자들, 외국인 노동자들, 장애인들, 농민들 그리고 북녘 동포들…. 이처럼 무수히 많은 이들을 두고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하며 여전히 우리의 이웃 사랑이 지나치게 관념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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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최창덕 프란치스코 신부 | 2019년 7월 14일
  |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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